제8장 강철 사슬 마을
끼에에엑!
“그래. 너도 느끼는가 보구나.”
파뱃의 울음소리가 마치 겁에 질린 쥐새끼처럼 처량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세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사기(邪氣)까지 함께 발산되고 있었다.
“마신의 권능을 받은 나와 마족과의 계약으로 아크 리치가 된 녀석… 과연 누가 위일까?”
상식적으로 따져 보자면 당연히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천휘가 이길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천휘보다 거의 100레벨이나 높은 보스 몬스터!
게다가 로즈란과 같은 8서클의 흑마법사다. 흑마법이 일반적인 마법보다 공격력이 몇 배는 강한 것을 감안한다면, 아크 리치는 산도 무너트리고 땅을 짓이길 엄청난 힘을 지녔음이 틀림없었다.
“최대한 녀석과의 접촉은 피해야겠어.”
어차피 상대도 이미 자신의 마기를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이 강시술사인 만큼 천휘에게는 네크로맨서와 같은 죽음의 기운이 늘 함께하고 있었다.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파뱃! 최대한 공중으로 높이 날아라! 가능한 한 기운을 감춰야 해!”
자신은 어쌔신이 아닌 만큼 기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멀리 선회해 접근해야 했다.
휘이이잉.
“파뱃! 바로 이 아래야! 곧바로 하강해!”
끼에에엑!
구름과 거의 닿을 듯 날던 천휘는 아르샤빈이 건네준 지도와 산세를 비교해보고는 마을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이제 남은 것은 최대한 빠르게 강철 사슬 마을에 도착한 후, 드워프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휙. 휙. 휙.
“으으윽!”
그동안 파뱃을 타고 대륙을 횡단해온 천휘였지만, 수천 미터 상공에서 이렇듯 급강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볼이 바람에 밀려 머리 뒤쪽으로 쓸려 버릴 것 같은 중압감에 천휘는 낮은 신음성만 내뱉었다.
끼에에엑!
“으윽!”
아예 눈을 감고 있던 천휘에게 파뱃이 거의 다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에 천휘는 힘겹게 바람에 맞서 눈꺼풀을 열었다.
“이제 천천히! 녀석들이 놀라지 않게 마을 어귀로 향해… 뭐, 뭐야!”
마을에 접근하면 할수록 천휘는 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작스레 마을의 곳곳에서 불까지 치솟았다.
“빌어먹을! 파뱃! 더 빨리!”
끼에에엑!
강철 사슬 마을에 사단이 일어났다!
천휘는 그 사단의 원흉이 제발 아크 리치만은 아니기를 빌고 또 빌며 파뱃의 목덜미를 꽉 붙잡았다.
“…빌어먹을.”
강철 사슬 마을 중앙의 거대한 석상 옆으로 단숨에 뛰어내린 천휘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낯익은 뼈다귀들을 바라보니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크 리치, 개자식!”
마을을 돌아다니는 뼈다귀들은 다름 아닌 스켈레톤 병사들이었다. 이 근방에서 스켈레톤을 부릴 수 있는 몬스터라면 당연히 아크 리치였다.
그러나 아크 리치가 마을을 점령했건 말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드워프들을 모조리 데려갔다는 것이 문제였다.
“저 스켈레톤들은 드워프의 해골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키가 커. 틀림없어. 녀석이 드워프들을 데려간 거야. 아아악! 젠장!”
대포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농후한 드워프 일족이 잡혀갔다. 그것도 단 하나의 시체도 남겨 두지 않은 채.
“미치겠네. 어떡하지?”
천휘는 반드시 강철 사슬 일족의 드워프 강시가 필요했다. 대포를 만들 가능성이 적은 다른 일족을 강시로 만들어봐야 그저 테크토를 도와 배를 제작하거나, 수선하는 데 쓰일 뿐이었다.
딱. 딱. 딱.
천휘가 그곳에서 고심하고 있을 때, 마을을 돌아다니던 스켈레톤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언데드인 그들로서는 살아 있는 천휘가 못마땅한 것이다.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천휘도 스켈레톤 병사들의 살의를 느꼈는지 잠시 생각을 접고 양 주먹의 관절을 가볍게 풀었다.
“흠, 혼자 처리하기에는 좀 많나?”
확실히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스켈레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어디에서 이토록 많은 스켈레톤이 나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공간 오픈! 오베른, 똥개 소환!”
지금 가용 가능한 강시라고는 오베른과 똥개 시벨리우스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스켈레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수백. 단 셋이서 수백을 상대해야 했다.
[이번에는 해골바가지들인가.]
“부탁한다. 똥개 너도!”
크워어어엉!
천휘의 지시에 오베른과 똥개가 좌우로 스켈레톤을 향해 쇄도했다.
“자, 나도 움직여 볼까? 하앗!”
오베른은 물론이고 중급 마수였던 똥개 녀석 역시 레벨 150대의 스켈레톤에게 당할 리가 만무했다. 천휘는 둘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접고 눈앞의 스켈레톤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파멸의 대지!”
천휘가 내려 밟은 대지를 중심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전해졌다. 우수수 무너지는 스켈레톤들!
천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멸의 축제를 연이어 전개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천휘가 주변의 스켈레톤들을 모두 처치하고는 녀석들이 떨어트린 잡템을 줍고 있을 때, 갑자기 가슴이 찌릿해오는 것을 느꼈다.
“뭐지?”
천휘는 동전을 줍다 말고 허리를 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처음 그가 내려선 마을 중앙의 거대한 석상을 발견했다.
찌릿.
“윽!”
석상을 유심히 쳐다보자 다시 한 번 가슴이 찌릿했다. 천휘는 낮은 침음성과 함께 석상에 천천히 다가갔다.
[주인, 해골바가지들 완벽 수거했다.]
“어, 잘했어.”
[……?]
오베른의 보고에도 천휘는 대충 대답하고는 석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 주변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가슴의 통증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여기 뭔가 있어.”
거대한 석상은 이름 모를 드워프를 조각해놓은 것으로, 한 손에는 거대한 검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거대한 방패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석상을 찬찬히 살펴보던 천휘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진 드워프의 다리 보호구에 주목했다.
“저… 문양…….”
분명히 익숙한 문양이었다.
포효하는 드래곤의 머리!
“어? 그러고 보니 저거!”
천휘는 발록의 심장을 장비 해제했다. 그러자 그의 가슴을 잘 감싸고 있던 마룡 오그하트의 가슴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저건 바로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 보호구였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마룡 오그하트의 세트 아이템 중 하나를 이런 곳에서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강철 사슬 마을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 보호구와 관련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찾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크 리치…….”
이제 녀석을 상대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천휘는 얼굴조차 구경하지 못한 녀석에게 분노를 토해내며 석상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뭐지?”
석상의 다리 보호구 부근에 희미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느꼈나?”
천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공간을 오픈했다. 파뱃을 타고 다시 그런트로 돌아가 아크 리치의 던전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찌릿.
“크윽!”
천휘가 석상에서 고개를 돌리고 아공간을 오픈하려는 찰나, 다시금 가슴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빌어먹을! 나보고 어쩌라고?”
천휘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바로 석상이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천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 위에 어린 땅딸보가 있다.]
“어린 땅딸보?”
천휘는 오베른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다리 보호구. 그러나 그곳에는 분명히 아무도 없었다.
“안 보이는데?”
[특수한 마나의 장막이 어린 땅딸보를 보호해주고 있다. 내가 데려올까?]
“그래줘.”
[알겠다.]
천휘의 지시에 오베른이 땅을 박차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석상의 다리 보호구 부근에 손을 내밀어 그 안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놔! 이거 안 놔!”
“어라? 정말 있었네?”
분명 천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건만, 그 안에서 튀어나온 건 어린 드워프였다. 인간의 기준으로 드워프의 나이를 계산할 순 없었지만, 앳된 얼굴과 피부를 감안할 때 어리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데려왔다, 주인.]
“그래.”
오베른에 의해 끌려나온 어린 드워프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 눈동자에 핏발까지 어려 있었다. 마치 길 잃은 새끼 도둑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이름이 뭐지?”
“이방인 따위에게 내 이름을 알려 줄 이유는 없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제법 강단이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널 해치지는 않아. 오히려 널 돕고 싶은 마음뿐이야. 마을의 드워프들이 모두 어디로 갔지?”
“이방인에게 알려 줄 이유는 없어!”
어린 드워프의 까칠한 대답에도 천휘는 빙긋 웃고만 있었다.
“우리가 스켈레톤들을 모두 부수는 걸 보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정황상 이곳 강철 사슬 마을의 드워프들은 아크 리치 녀석에게 끌려갔겠지?”
“그… 그걸 어떻게?”
천휘의 물음에 어린 드워프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닫고 양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역시 그 자식이었어. 빠득!”
어린 드워프의 반응에 자신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음을 안 천휘는 이를 갈았다. 이제는 별수 없이 녀석의 던전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녀석이 어떻게 던전을 빠져나왔지? 보스 몬스터는 보통 그 던전을 빠져나올 수 없는데 말이야.’
천휘는 상대가 어쩌면 보스 몬스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게임이 그렇듯 『오벨리스크』 역시 보스 몬스터에게 커다란 제약을 부여했다. 그것은 해당 지역 이외의 곳으로 이동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오벨리스크』는 거대하고 흉악한 보스 몬스터들에 의해 정복되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그들은 강한 존재들이었다.
“꼬마야.”
“나 꼬마 아니다! 내 이름은 모단이다!”
“후훗! 그래, 모단. 난 지금부터 아크 리치를 찾아가 강철 사슬 일족을 되찾아올 거다.”
“정말?”
천휘의 말에 모단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녀석의 눈가에는 어느새 희미한 눈물까지 맺혔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너도 알겠지만, 아크 리치는 엄청난 괴물이야. 나 역시 어느 정도 힘은 가지고 있지만, 녀석을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수도 있어.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마을에 숨겨진 보물들이 없나? 아아, 오해는 하지 말고. 쓰고 반드시 돌려주마.”
“…….”
결국은 본색을 드러내는 천휘의 말에 모단이 의심의 눈빛으로 그를 훑어봤다.
“내가 이방인 따위를 어떻게 믿지?”
불신 가득한 모단의 말에 천휘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차피 너 혼자서는 네 동료들을 구할 수 없지 않겠어? 차라리 내게 보물을 내어주고라도 아크 리치를 상대하도록 하는 게 좋을 텐데?”
“…….”
천휘의 천연덕스러움에 모단이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미 그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어린 드워프이니만큼 마을의 보물보다는 부모 형제가 더욱 소중했다. 당연히 보물을 내어주고라도 그들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좋아.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어린 드워프가 흥정을 할 줄 아는 듯 조건을 내걸었다.
“이미 우리 마을의 보물은 아크 리치가 모두 가져갔어. 남은 거라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진 단 하나뿐이야. 하지만 그 보물은 다른 어떤 보물보다도 위대하고 대단해!”
“그래서?”
모단은 자긍심이 가득한 말투로 천휘의 물음에 대답했다.
“주신 라멘의 이름으로 계약하노니, 강철 사슬 일족의 보물을 빌려 주는 대신, 그대는 강철 사슬 일족을 구하고 그 보물을 다시 이곳으로 가져올 것을 맹세하겠나?”
“이… 이건?”
모단은 강철 사슬 일족 유일의 신관이었다.
드워프들도 인간들처럼 주신 라멘을 믿었고, 몇몇의 드워프는 신의 계시를 받고 신관이 되었다. 모단 역시 그러한 존재로, 그가 아크 리치의 눈을 피해 석상에 몸을 은신할 수 있었던 것도 신성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주신의 율법으로 이행하는 계약이야. 절대 어길 수 없어. 어때? 이래도 계약하겠어?”
모단의 의기양양한 말에 천휘는 겉으로는 당황해하면서도 속으로는 고소를 흘렸다.
‘멍청한 드워프.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는 내게 주신 라멘의 율법으로 계약을 하시겠다고? 큭큭!’
“좋다! 계약하지.”
[띠링! 퀘스트 ‘모단의 부탁’이 발동되었습니다.]
바렌트 왕국의 수많은 드워프 마을 중에서도 가장 명성이 자자한 강철 사슬 마을. 그들은 뛰어난 대장장이임과 동시에 훌륭한 전사들이다.
그러나 강철 사슬 마을에 위기가 찾아왔다. 바렌트 왕국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아크 리치가 마을을 방문한 것이다.
드워프들은 처절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아크 리치의 위대한 흑마법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결국 강철 사슬 일족은 어린 신관 모단을 제외하고 모조리 아크 리치에게 끌려갔고, 마을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모단은 부모 형제를 잃은 슬픔에 분노하고 있다. 그를 도와 아크 리치로부터 강철 사슬 일족을 구하라!
난이도:A
제한:300레벨 이상, 모단의 생존
보상:강철 사슬 일족의 보물(한시적인 취득, 퀘스트 이행 정도에 따라서 영원히 귀속될 수도 있다. 단, 퀘스트 완료 전에 모단이 죽으면 보물은 파기된다.)
“그럼 이제 보물을 한번 봐보실까?”
무려 난이도 A의 고난이 퀘스트.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하는 퀘스트이지만 천휘는 담담했다. 그만큼 경험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퀘스트 완료 전에 모단이 죽으면 아이템이 파기된다는 소리에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보물은 저 위쪽에 있어.”
“저 위라면… 이 석상?”
“그래. 다시 날 위로 올려 줘.”
“오베른.”
[알겠다.]
모단의 부탁에 천휘가 오베른으로 하여금 그를 조금 전의 장소로 올려 보냈다. 그러자 모단이 석상 안으로 모습을 감추더니, 이내 작은 상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바로 우리 일족의 보물이야.”
작은 상자를 보는 순간 천휘의 가슴이 다시금 찌릿해져 왔다. 가슴의 울림은 이내 전신으로 퍼져 나갔고, 종국에는 발목과 무릎 사이에 도달했다.
철컹.
천휘가 전신의 울림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마룡 오그하트의 조각이 새겨진 한 쌍의 다리 보호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오!”
천휘는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 보호구를 보자마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 오는 것이 아무래도 자신이 입고 있는 마룡 오그하트의 흉갑과 감응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
고대 하스렌 제국을 멸망으로 몰아간 원인 중 하나는 마룡 오그하트의 출현이었다.
본래 오그하트는 블랙 드래곤이었으나, 드래곤의 율법을 어기고 마신의 힘을 부여받아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마룡이 되었다.
그는 인간 영웅들의 손에 의해 처단당하며 대륙에 세 가지 신물을 남기고 죽었고, 그 신물들에는 마룡 오그하트의 강대한 힘이 담겨져 있다.
등급:레전드 내구력:25,000/25,000
분류:다리 보호구
제한:악명 300만 이상
옵션:물리 방어력 +150
옵션:마법 방어력 +150
옵션:물리 회피율 30% 증가
옵션:더위와 추위에 대해 면역
옵션:NPC 상대 시 10% 확률로 공포 효과 발생
옵션:세트 효과(1) 생명력 +100,000
옵션:세트 효과(2) 모든 스탯 +50
[띠링! 마룡 오그하트의 갑옷 세트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생명력이 100,000 상승합니다.]
“대박!”
다리 보호구는 보통 방어력이 100을 넘지 않았다. 이제까지 나온 다리 보호구 중 가장 좋다고 알려진 유니크 아이템, 용기의 불꽃 다리 보호구가 고작해야 방어력이 90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룡 오그하트의 다리 보호구는 레전드 아이템답게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했다.
거기에 더해 회피율이 30퍼센트나 상승하는 옵션까지 있었다. 회피율을 올려 주는 어쌔신의 스킬 그림자 밟기가 고급까지 마스터했을 때 고작 회피율을 30퍼센트 올려 준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옵션이었다.
게다가 이제 무려 생명력 100,000이 상승하는 초대박 세트 옵션까지!
천휘의 생명력은 단박에 2배 이상 상승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아크 리치 녀석을 상대해볼 만했다.
“가자! 아크 리치 잡으러!”
다행히 아크 리치의 던전은 강철 사슬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게다가 모단 녀석이 그곳으로 가는 길까지 알고 있어 천휘는 다시 그런트로 돌아가지 않고도 아크 리치의 던전을 찾을 수가 있었다.
“여기야.”
휑.
“…뭐야, 여기?”
바렌트 왕국을 가로지르는 클리든 산맥은 리버훌 성국과 맞닿아 있어 산맥 전체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아크 리치의 던전 입구는 그렇지 않았다. 성스러움이 아닌 지저 세계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마신의 기운이 입구를 잠식하고 있었다.
[살벌하군. 상급 마수 그 이상의 기운이야.]
“그 정도야?”
지저 세계에서 만났던 상급 마수들만 하더라도 레벨 400을 넘는 괴물들이었다. 게다가 그 크기 또한 웬만한 마을의 야산보다도 컸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보다 강하다니.
“역시 포기야?”
은근히 자존심을 긁는 모단의 말.
천휘는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들어가자, 오베른! 똥개!”
[주인이 원한다면.]
크워어어엉!
어쩌면 무리일 수도 있었다. 아니, 무리다. 그만큼 아크 리치는 현재의 전력으로 상대하기에는 벅찬 상대다.
그러나 후퇴할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드워프 강시를 만들어 곧 다가올 업데이트를 준비해야 한다.
시간은 금이다!
* * *
딩동댕동.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어라, 서 선생? 뭐가 그리 바쁜 거야?”
“일이 좀 있어서요. 내일 뵐게요.”
영완은 종이 울림과 동시에 가방을 들고 교무실을 나섰다. 담임을 맡게 되면서 칼퇴근을 하기 어려워졌지만, 바쁜 용무라는 핑계로 미리 교감 선생님께 언질을 해두고 일찍 퇴근하려는 것이었다.
“뭐야? 벌써 가는 거야?”
“어. 빨리 처리해야 하는 퀘스트가 있어서.”
“퀘스트? 드워프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어?”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설명해줄게.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교무실을 나서다 미연을 만난 영완은 대충 얼버무리고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 서 선생님.”
“…….”
주차장에는 마침 희영도 있었다. 그녀도 오늘 약속이 있는지 일찍 퇴근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부름에도 영완은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의 차에 올라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너무도 냉랭한 영완의 모습.
희영은 멀리 사라지는 영완의 차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스파아앗.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벨리스크』에 접속한 천휘는 경계의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왜 이제 온 거야!”
“원래 이방인은 바쁜 법이야. 어린 시키가 꼭 참견이야.”
다행히 모단은 무사했다. 행여나 그가 목숨을 잃었을까 봐 천휘는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걱정했었다.
‘이 녀석이 죽으면 퀘스트가 실패한다.’
“웃기는 이방인일세? 내가 너보다 30살은 더 많거든?”
“…젠장.”
놀랍게도 모단의 나이는 무려 61살이었다. 드워프의 나이로 따지자면 고작 12살 정도에 불과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나이가 많은 것은 분명했다.
“어서 출발해! 이러는 동안에도 우리 마을 드워프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아공간 오픈, 오베른, 똥개 소환!”
파앗. 파앗.
천휘의 부름에 오베른과 똥개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기가 가득한 던전이라 그런지 둘의 표정에는 작은 희열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좋군.]
크엉.
“느끼지 말고 앞장서. 이 아래에 스켈레톤 녀석들이 바글바글하니까.”
[그렇게 하지.]
아크 리치의 던전에는 안전지대로 설정된 지역도 없었다. 아니, 분명 있었겠지만 찾지 못했다. 때문에 천휘는 어젯밤 스켈레톤들의 손이 닿지 않는 동굴의 위쪽 벽 작은 틈에 모단을 숨겨놓았다.
크워어엉.
똥개의 주변으로 스켈레톤들이 모여들었다. 모단과 천휘는 틈 사이에 있었지만, 덩치가 큰 똥개와 오베른은 땅바닥에 소환된 탓이다.
“모단, 너는 똥개 위에 타고 있어. 괜히 설치지 말고.”
“나야 고맙지. 신관은 본래 체력이 조금 떨어지니까 말이야.”
“…하아! 내가 상전을 모시지, 상전을 모셔.”
모단을 똥개의 등 위에 태운 천휘는 스켈레톤을 학살하고 있는 오베른의 곁으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돌파한다. 스켈레톤을 다 죽이려 하지 마.”
[알았다, 주인. 내가 선두에 서지!]
“똥개, 오베른을 따라가라. 내가 후미를 맡지.”
크엉.
천휘의 빠른 지시에 일행의 대형이 갖춰졌다.
선두에 오베른, 중앙에 모단을 태운 똥개 시벨리우스, 그리고 대형의 후미에는 천휘가 섰다.
“돌파!”
[우오오오!]
천휘의 지시에 맞춰 오베른이 클레이모어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거대한 클레이모어의 회전에, 전방을 가로막던 스켈레톤들이 모조리 튕겨져 나갔다.
“오! 이 친구 덩칫값하는데? 풍기는 분위기는 기분 나쁘지만.”
꼴에 신관이라고 모단은 오베른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무위에 그러한 의심도 금세 수그러들었다.
[주인! 앞에 듀라한이다!]
“듀라한? 빌어먹을! 돌파를 늦추지 마! 녀석은 내가 상대한다!”
듀라한은 레벨 300대의 언데드 몬스터였다. 오른손에는 검신이 부러진 그레이트 소드를, 왼손에는 자신의 머리통을 들고 있는 괴기스러운 모습의 몬스터가 듀라한이다.
강력한 근력, 힘을 실을 줄 아는 강력한 검술.
듀라한은 언데드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 중 하나였다.
“하앗! 파멸의 안식!”
그어어어.
천휘는 처음부터 가장 강력한 스킬을 전개했다. 순간적으로 공격력을 10배 가까이 올려 주는 최강의 스킬.
듀라한은 천휘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부러진 그레이트 소드를 마주쳐 갔다.
까앙!
천휘의 주먹과 듀라한의 부러진 그레이트 소드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발록의 주먹으로 보호받는 천휘의 주먹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멸의 축제!”
듀라한의 부러진 그레이트 소드를 튕겨 낸 천휘는 곧바로 듀라한의 거대한 몸에 파멸의 축제를 전개했다.
퍽퍽. 퍽퍽.
그어어어.
천휘의 주먹 세례를 받은 듀라한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나 생명력이 엄청난 듯 듀라한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고 버텨 냈다.
“빌어먹을! 그냥 꺼지라고! 파멸의 주먹!”
딜레이가 긴 파멸의 안식 대신 천휘는 파멸의 주먹을 듀라한의 왼손에 들린 머리통에 꽂아 넣었다.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박살이 나버린 듀라한의 머리통.
듀라한은 그대로 스르르 무너지며 오베른에게 길목을 내어줬다.
[최고다, 주인!]
“당연한 걸 가지고! 이대로 곧장 아크 리치에게 직진이다!”
[나만 믿어라!]
간간이 전방을 가로막는 듀라한 등의 강력한 몬스터는 천휘가 처치했고, 오베른은 자잘한 스켈레톤 무리들을 처치하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환상적인 둘의 호흡에 일행은 순식간에 아크 리치의 던전 깊숙한 곳까지 다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