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용병왕 아르샤빈
“그게 사실이냐?”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와! 이거 완전히 대박인데?”
쿠닉섬에 오베른을 제외한 모든 강시들을 두고 곧바로 이그나혼으로 돌아온 천휘는, 함께 화신의 사막 원정을 떠났던 일행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이번 미개척지와 관련해 여러 가지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아마 조만간, 어쩌면 이번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그 미개척지가 공개될지도 몰라.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오벨리스크』를 많이 즐기는 연령층은 10대니까.”
“여름방학이라면 고작 4개월밖에 안 남았잖아? 이곳 시간으로 하면… 약 1년?”
“그래. 겨우 그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이제부터라도 우린 미개척지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해.”
천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를 도와줄 유저들이야.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고작해야 일곱 명이야. 겨우 일곱 명만으로는 공성이나 수성이 불가능해.”
“하지만 이제 와서 유저들을 끌어 모은다고 해도 그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텐데, 동생? 웬만큼 레벨이 된다는 유저들은 다들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까?”
하린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주변만 봐도 대부분 대형 길드, 혹은 중소 길드에 소속되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아. 그리고 『오벨리스크』는 아직도 빠르게 유저들이 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돼.”
“그렇다고는 해도 신입 유저들을 상대로 길드를 구성하면 공성이나 수성은 힘들지 않겠냐? 어느 정도 레벨이 받쳐 줘야지.”
“로빈 네 말이 맞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돼. 다들 어느 정도 명성이 있을 테니, 각자 따로 길드들을 만들어봐.”
“따로 길드를 만들라고?”
일행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봐도 따로 길드를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천휘가 마스터가 되어 하나의 길드를 만드는 것이 결속력도 좋고 명령 체계도 단일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난 앞으로 나서지 않아.”
“…그랜저 때문이냐?”
“그래. 만약 내가 마스터가 되어 공개적으로 이름이 드러난다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 무슨 말들인지 알겠지?”
“그렇다고 길드를 여러 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천휘가 아니면 로빈이나 카멜이 마스터가 되어 길드를 조직하면 된다. 괜히 여러 개의 길드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우리들은 모두 각자 직업이 달라. 괜히 여러 직업을 한데 뭉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다른 대형 길드나 중소 길드들이 견제를 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라믄 어떻게 하믄 되는 거제?”
천휘의 지루하고도 긴 설명에 블랙헤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각자 직업과 연관된 유저들을 끌어 모아 길드를 만들어. 카멜 너는 카오스 팔라딘이니 자유 팔라딘들을 모아 길드를 만들고, 로빈 너는 무려 7서클 마법사이니 마법사들을 끌어 모으면 되지 않겠냐?”
“그렇다믄 나는 요리사들을 모아야 하는 것이여?”
“그건 아니지. 넌 요리사 이외에도 비주류 생산직 유저들을 모아 길드를 창설해. 너 운남정 운영하면서 돈 꽤 많이 모았지? 그걸로 생산직 유저들 지원 좀 해주고 하면 돈 좀 될 거다. 되도록 다양한 방면의 생산직들을 포섭해.”
천휘는 그렇게 나머지 일행들에게도 어떤 식으로 길드를 창설할 것인지 언질을 해두고는 마지막으로 미온을 쳐다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온.”
“응? 나도 길드를 만들어야 해? 너랑 같이 다니는 게 아니고?”
“아니. 너도 길드를 만들어야 돼. 그것도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길드를!”
“오로지 남자들?”
조금은 이상한 구성에 미온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화신의 사막 원정 중 당시 너에게 식량과 식수를 배급받은 수많은 남성 유저들이 아직도 널 잊지 못하고 있을 거야. 누가 뭐라 해도 그들에게 있어 너는 여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뭐야, 그럼 지금 너 여자 친구를 팔아먹겠다는 거야?”
“그래, 천휘 동생! 그건 좀 아니다!”
“맞아용! 어떻게 여친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용? 당장 사과해용, 천휘 오라버니!”
천휘의 제의에 미온을 비롯한 하린과 눈송이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천휘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미온, 솔직히 말해서 다른 일행들은 길드원을 모집해봐야 수십 명밖에 모을 수가 없어. 게다가 분명히 수준도 다소 떨어질 거야. 하지만 미온 네가 화신의 사막 원정에 참가했던 유저들을 모아준다면 이야기는 달라. 당시 화신의 사막에 참가했던 유저만 수천이고, 그들의 수준 역시 최소한 300레벨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도 그건 좀.”
“부탁해, 미온!”
천휘의 솔직한 말에 미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천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에야 그녀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쳇! 꼭 이럴 때만 내 가치를 인정한다니까!”
“내가 언제. 후훗! 난 널 사랑하는걸!”
“우웩! 재수 없다, 진짜!”
“저 자식이랑 이제 친구 안 한당깨!”
“큭큭!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 이 자식들아!”
천휘의 말에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로빈과 블랙헤드가 강하게 반발하며 달려들었다.
천휘는 그날, 친구들에 의해 강제 로그아웃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 * *
“자, 오늘은 여기까지! 아무래도 더 이상은 너희들에게 무리인 것 같다. 이제 다들 접속 종료하고 내일 학교에서 보자.”
“네…….”
천휘는 일요일 오후에도 8반 아이들을 이끌고 끈적거리는 동굴로 향했다. 멀록 로드 그웬이 사라진 그곳에는 이제 다소 능력이 떨어진 멀록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끝내 3층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동굴을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천휘가 아이들에게 허용한 시간은 고작해야 3시간뿐인 탓이다.
“너희들은 왜 접속 종료를 안 하는 거냐?”
마지막으로 남은 세 녀석들을 보며 천휘가 물었다. 오늘 내내 뚱한 얼굴로 사냥을 하던 녀석들의 모습에 모른 채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
“왜?”
마치 합창하듯 한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세 녀석들을 바라보며 천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정체가 뭐긴. 니들 담임이지.”
“어떻게 선생님이… 그것도 가장 바쁘다는 고등학교 교사가 그렇게 레벨을 높일 수가 있어요?”
“뭔 소리야? 누구 레벨이 높아? 난 그냥 아는 사람이 많을 뿐이야. 이 자식들! 허튼소리할 거면 당장 접속 종료나 해! 그럼 난 이만 가보마. 볼일이 있어서.”
고비의 물음에 천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으며 뒤돌아섰다. 하지만 아이들은 쉽게 천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제 다 봤다고요. 선생님이 이상한 사람들을 불러내서 멀록 로드를 사냥하는 거. 어떻게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잡을 수가 있어요? 그것도 순식간에? 진짜 말도 안 돼.”
“…….”
어떻게 된 건지 녀석들은 어제 자신이 멀록 로드를 사냥한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어떻게 본 거냐?”
어느 정도 수긍하는 천휘의 물음에 김전일이 대답했다.
“저녁 먹으려고 해도 같이 먹을 사람들이 없어 우리 셋은 다시 접속해 사냥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선생님을 뵌 거죠.”
“…휴우! 너희들, 비밀로 할 거지?”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할 수도 있겠죠.”
아이들의 눈빛은 마치 공을 발견한 애완견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천휘는 뭔가 꼬였다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뭘 원하는데? 돈? 아니면 아이템?”
“우리를 고작 그 정도로밖에 안 보신 거예요? 선생님께 삥이나 뜯을 것같이 보이냐고요!”
“어.”
“…….”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하는 천휘를 보며 셋은 할 말을 잃은 듯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헛기침을 하며 천휘와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튼 정확히 뭘 원하는 건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주고.”
“쉬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면 더 무섭거든? 얼른 말해봐.”
천휘와 아이들은 이제 겨우 대화를 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직은 완벽하게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천휘는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아이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주변에서 걱정하는 것만큼 삐뚤어진 아이들은, 적어도 1학년 8반에는 없었다.
“함께 게임해요.”
“응? 뭐라고?”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명탐정의 말에 천휘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어차피 우리와 친해지려고 이렇게 함께 사냥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 함께 게임을 하자는 소립니다.”
“맞아요! 왠지 선생님이랑 같이 있으면 꽤나 게임이 재밌어질 것 같거든요.”
천휘의 물음에 김전일과 고비가 대답했다.
“후훗!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안 돼. 너희들과 함께할 수 없다.”
“왜요!”
웃음을 흘리며 거부하는 천휘를 보며 고비가 발끈했다. 명탐정과 김전일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즐기려고 게임을 하는 게 아냐. 물론 너희들과 이렇게 사냥을 했던 건 너희들과 친해지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문제에 너희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너희와는 종종 만나서 함께 퀘스트를 수행하는 정도에 그쳤으면 한다.”
“말도 안 돼!”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선생님을 도우면 되는 거잖아요.”
진중한 표정으로 이유를 설명했건만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결국 천휘는 아이들과 한 차례씩 눈을 마주치고는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
천휘는 절대 아이들을 자신의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어른들의 문제에 관여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미 세상의 때가 묻은 아이들일지라도 자신의 제자들인 만큼 조금이라도 아껴 주고 싶은 것이다.
“나중에… 좀 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는 함께 게임하자. 그리고 이거 받아라.”
“이건…….”
천휘는 명탐정에게 작은 펜던트 하나를 건넸다.
“수호의 펜던트라는 거다. 방어력 5퍼센트 상승 오러를 품고 있는 제법 고가의 아이템이지.”
“이걸 왜 제게?”
“아이들과 함께 네 녀석이 길드를 창설해 함께 게임을 즐겨 줬으면 좋겠다. 네 녀석들은 모두 친구야. 그저 스쳐 가는 인연으로 보지 말고 좀 더 따듯한 눈빛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봤으면 좋겠다. 너희들처럼 마음이 뜨거울 때에는 그게 최고라 생각한다.”
천휘의 말에 세 아이들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서로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무리, 무리.”
“절대 무리예요, 그런 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선생님.”
“후훗!”
아이들의 과장된 행동에 천휘가 즐거운 미소를 흘렸다. 그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귀여운 녀석들.’
* * *
끼에에엑!
“야! 고작 이 정도밖에 못 날겠어? 좀 더 빨리 날아보란 말이다!”
시간이 촉박한 천휘로서는 귀가 얼얼할 정도로 빠르게 날아가는 파뱃의 속도조차 못마땅했다. 그에 죽어나는 것은 파뱃이었다.
“어라? 벌써 이그나혼 상공이네? 이 정도 속도라면 두세 시간이면 바렌트 왕국에 도착하려나? 흐음. 아! 생각해보니 드워프 일족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아? 하이 엘프 퀸이었던 로즈란 녀석이 있었다면 녀석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별수 없이 바렌트 왕국의 수도인 그런트로 가서 알아봐야겠네.”
그런트에는 믿을 만한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병 길드였다.
예전 그런트의 용병 길드에서 한차례 대결을 펼친 끝에 오베른과 데모닉 제너럴 아르샤빈이 사나이의 우정을 나눈 탓이었다.
‘게다가 데모닉 제너럴 아르샤빈은 그런트의 용병 길드를 넘어 현재는 용병왕의 칭호를 얻고 있다. 아르니안 대륙의 모든 용병들의 마스터!’
오베른과의 대결에서 패한 이후, 데모닉 제너럴 아르샤빈은 더욱 혹독한 수련을 통해 300레벨을 넘어서 트리플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을 따르는 용병들을 이끌고 당시의 용병왕과 전투를 치르고, 급기야 유저 최초로 NPC 길드를 차지하는 업적을 이루고야 말았다.
“문제는 그가 과연 그런트에 있는가 하는 것인데.”
대륙 모든 용병들의 마스터가 된 그가 아직도 그런트에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용병들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땅은 바렌트 왕국이 아닌 테오른 왕국과 펜하르트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가볼 수밖에 없겠지. 파뱃! 그런트로 향한다! 어서 속도를 올려!”
끼에에엑!
한 시간 반이 흐르고 천휘를 태운 파뱃은 그런트의 상공에 도착했다. 천휘의 끝없는 독촉에 두세 시간 거리를 한 시간 반으로 단축시킨 것이다.
“이제 아공간으로 돌아가 있어. 역소환!”
끼에에엑!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온 탓에 다시 아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운지 파뱃이 슬픈 울음을 터트렸지만, 천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용병 길드는 이쪽이었나?”
천휘는 오베른을 소환하지 않은 채 빠르게 그런트 시내를 가로질렀다. 괜히 오베른을 소환해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 찾았다.”
그렇게 그런트 시내를 한 시간가량 헤매던 천휘는 결국 용병 길드를 찾아냈다. 그곳은 예전과는 달리 몇 차례 증축을 했는지 음습하고 작은 규모의 건물이 아닌 무려 5층짜리 초대형 건물로 변화되어 있었다.
“일단 오베른을 소환해야겠다. 아공간 오픈, 오베른 소환!”
스파아앗.
“어머! 저게 뭐야!”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어!”
대로 한복판에서 갑자기 거대한 체구의 오베른이 나타나자,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오베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천휘를 바라봤다.
[이곳은 어디지?]
“기억 안 나? 네가 용병 마스터와 대결을 펼쳤던 그곳이잖아.”
[아, 나한테 깨진 녀석?]
“…….”
역시나 지능이 다소 떨어지는 오베른답게 아르샤빈에 대한 기억이 단편적인 모양이었다.
천휘는 말없이 그를 앞세워 용병 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철커덩.
“어서 오… 헉! 다… 당신은!”
“S급 용병이다!”
“마스터를 꺾었다는 그 의문의 S급 용병이잖아!”
천휘와 함께 오베른이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1층 로비에 앉아 있던 용병들이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오베른의 가슴에 매여진 S급 용병패를 확인한 것이다.
“마… 마스터를 불러!”
수많은 용병 중 카운터를 보고 있던 용병 하나가 당황하며 곁에 있던 부하 용병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그 용병이 빠르게 계단을 올라 위층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원하는 인물이 곧 내려올 것 같으니 우린 여기 앉자.”
[머슴은 주인을 위해 한시도 호위를 쉬지 않는 법이다.]
“…어련하시겠어요.”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녀석의 머슴 발언에 천휘는 말없이 웃으며 계단을 바라봤다.
우당탕탕!
“…어지간히도 네가 보고 싶었나 보다.”
계단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천휘가 비아냥거리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나 오베른은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그저 묵묵히 계단을 쳐다볼 뿐이었다.
“오오! 정말로 너였군! 이게 얼마 만이야!”
아르샤빈은 천휘는 보이지도 않는지 곧바로 오베른을 향해 다가가며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오베른 역시 그의 환영이 나쁘지만은 않은 듯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넌 변하지 않았군.]
“하하하! 내가 변할 게 뭐 있겠나. 그나저나 한 번 더 붙어봐야지! 내게 예전의 앙갚음을 할 기회를 줘야지 않겠어!”
[확실히 제법 강해진 것 같군. 나 역시 바라는 바다.]
“좋아! 그래야지! 당장 뒤뜰로 가자고!”
순식간에 나타나, 순식간에 오베른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멍하게 서 있던 천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머슴이 어쩌고 어째?”
용병 길드가 거대해진 만큼 아르샤빈과 오베른이 대결을 벌였던 뒤뜰의 규모도 커졌다. 이제는 용병들의 연무장으로 쓰이는 듯 곳곳에 무기들과 수련 도구들이 쌓여 있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얼마든지.]
남들이 보면 철천지원수를 만났다고 여길 정도로 두 사람은 급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저 서로 간의 무력을 가늠해보기 위한 그들만의 인사법에 지나지 않았다.
휘익.
철컹.
아르샤빈은 애병인 쌍검을 양손으로 꼬나 쥐고 천천히 연무장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오베른 역시 양손에 클레이모어의 자루를 꽉 움켜쥐고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에 대한 탐색을 마친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까아앙!
“큭!”
초장부터 오베른의 클레이모어에 오러 블레이드가 맺혔다. 이미 그랜드 소드마스터를 넘어 소드엠페러의 경지를 넘보고 있는 오베른이었기에 순식간에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르샤빈은 그 정도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듯 오베른의 강맹한 일격에 쌍검을 교차시키며 간신히 막아냈다.
“역시 대단해!”
[내 공격을 막다니! 과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군!]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승부를 매듭지을 둘이 아니었다.
낮은 침음성과 함께 뒤로 물러난 아르샤빈이 오베른과 마찬가지로 쌍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키며 쇄도해왔다.
[호오!]
아르샤빈의 움직임은 마치 먹이를 노리고 날아드는 뱀과 같았다. 그저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베른으로 하여금 공격 타이밍을 잡을 수 없도록 전후좌우로 몸을 움직이며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
“그저 감탄만 할 순 없을 거다! 하앗!”
아르샤빈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천휘조차도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까앙!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타아앗!]
의도하고 막은 것인지, 혹은 우연히 막은 것인지 아르샤빈의 쌍검이 오베른의 왼쪽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건만, 오베른은 살짝 클레이모어를 뒤트는 것만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연이어 좌우로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며 아르샤빈을 압박했다.
휘익.
휘익.
그러나 오베른의 공격은 아르샤빈에게 적중하지 못했다. 예전과는 달리 엄청나게 쾌속해진 움직임으로 아르샤빈이 공격을 모두 회피해낸 것이다.
[…뭐지?]
“응? 왜 그러지, 갑자기?”
맹렬하게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던 오베른이 갑자기 클레이모어를 거둬들였다. 그에 의아한 듯 아르샤빈도 쌍검을 늘어트리고 오베른을 바라봤다.
[예전의 네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빈 껍질만 남은 거냐?]
“예전의 내 모습?”
대결을 펼치다 말고 갑자기 정색한 표정을 지으며 투지가 수그러든 오베른을 보며 아르샤빈이 되물었다.
[네 녀석은 예전의 환검을 버렸지?]
“그게 어떻단 말이냐! 나는 환검을 버리고 쾌검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강해졌지! 이제는 대륙 10만 용병들의 왕이 되었다!”
질책하는 투의 오베른을 향해 아르샤빈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군. 넌 지금 내 검을 비하하고 있어.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어느새 아르샤빈의 언성이 높아졌다. 게다가 눈빛에는 살기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긴말할 필요 없겠지. 검으로써 보여 주마. 덤벼라. 단,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건방진!”
오베른도 자신의 뜻을 굽힐 의향이 없는지 클레이모어를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야수와도 같은 흉포한 기운이 폭사되고 있었다.
아르샤빈이 내뿜는 기운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그의 검술이 악마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만큼 그의 전신에서도 악마와도 같은 마기가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위… 위험해!”
“마스터… 꼭지가 돌아버렸어.”
“모두 피해! 여기 있다가는 둘의 대결에 휩쓸리고 말 거야!”
대지를 진동하는 둘의 기운에 용병들이 천천히 연무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병들 중에서도 제법 실력을 갖춘 이들은 둘의 대결을 끝까지 관전하기 위해 연무장에 남아 있었다.
“후훗! 확실히 지존 12인 중 한 명이야. 거인 토르와 견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
천휘가 보기에도 아르샤빈은 대단한 강자인 듯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무력만으로 따진다면, 그는 오베른이 아니라 자신의 적수조차 되질 못했다.
그가 강한 것은 이와 같은 대인전이 아닌 세력전이었다. 그는 대륙에서도 명성으로만 따진다면 웬만한 왕국의 국왕과 맞먹는 용병들의 왕! 그는 분명히 검술보다도 용병술에 더 능했다.
“죽어라!”
하지만 아르샤빈은 자신의 검술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그리고 자신감도 넘쳐흘렀다. 그는 쾌검을 익히고 나서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레벨 300의 보스 몬스터, 은빛 발굽 일족 켄타우로스 로드까지 이긴 그였다. 당연히 NPC에 불과한 오베른 따위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따위 가벼운 공격이 통하리라 믿나?]
까앙!
“크윽!”
빛살과도 같은 빠르기로 다가오는 아르샤빈의 쌍검을, 오베른은 일도양단의 기세로 위에서 아래로 클레이모어를 내리그었다.
보는 이마저도 숨이 막힐 듯한 강력한 중검(重劍).
아르샤빈은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빠르게 뒤로 몸을 빼내며 그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콰앙!
“커허억!”
그러나 허공을 가를 듯했던 오베른의 클레이모어는 마치 엿가락처럼 쭉 늘어나 아르샤빈의 어깨를 베어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아르샤빈이 신음을 내건 말건 오베른은 클레이모어를 재차 좌에서 우로 베어갔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오러 블레이드까지 생성시켜 단숨에 허리를 양분할 생각이었다.
“누가 할 소리!”
아르샤빈은 상처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간발의 차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오베른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리고는 곧장 쌍검을 십자가 형태로 교차시켜 오베른을 향해 오러를 폭사했다.
“데모닉 크로스(Demonic Cross)!”
아르샤빈의 쌍검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지며 오베른을 뒤덮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베른을 뒤덮고자 했다.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악마의 기운이 눈앞에까지 도달한 상황이었다.
금방에라도 사지가 찢기고 승부에서 패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그러나 오베른은 그마저도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촤아악!
순간적으로 오베른의 클레이모어에 깃들어 있던 오러 블레이드가 사라지고 그곳에는 무형무색의 오러가 깃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베어내겠다는 오베른의 의지가 더해져 아르샤빈의 공격을 산산이 무너트렸고, 이윽고 무방비로 서 있던 그의 정수리에까지 도달했다.
“허억!”
“마… 마스터!”
이번 공격으로 용병왕 아르샤빈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 생각했던 몇몇 A급 용병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에 반해, 천휘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오연하게 양팔을 교차해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스아악.
척.
“…….”
[…….]
연무장을 뒤덮었던 악마의 기운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오로지 2명의 사내만이 남았다. 한 사내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탈한 표정으로, 다른 사내는 그런 사내를 향한 안타까움을 가진 채로 연무장 중앙에 서 있었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섰군.”
[아직은 아니다.]
아공간에서의 끝없는 수련을 통해 오베른은 얼마 전 최고의 경지라는 소드엠페러에 한 걸음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아르샤빈은 조금 전의 일격에서 극의에 이른 검술을 알아본 것이다.
“내 검술에 뭐가 문제인 거지?”
비록 패하기는 했어도 아르샤빈은 자신의 검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화살보다 빠른 자신의 검은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심장을 꿰뚫어버릴 정도의 빠르기를 지니고 있었다.
[검술에는 정도도 없고 사도도 없다. 어떤 검술을 익혔건 극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검을 버리고는 극의에 이를 수 없다. 너의 검은 변화무쌍한 변환의 검. 그걸 버리고 속도로 무장한 쾌검을 익혔다고 해서 강해졌다고 볼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넌 예전에 비해 전혀 강해지지 않았다는 거다.]
“…….”
[검이란 올곧은 마음. 오로지 하나만을 바라보는 의지가 깃들어 있을 때, 극의를 바라볼 수 있다.]
오베른의 말은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묘한 설득력도 있어 아르샤빈은 물론이고 주변의 용병들까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천휘는 똥폼을 잡고 있는 오베른을 바라보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저거 다 카이젠이 한 말이잖아?”
오베른과 아르샤빈의 대결이 끝나고 두 사람을 비롯해 천휘는 길드 건물의 맨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그곳에 용병왕 아르샤빈의 집무실이 있었다.
끼이익.
“들어와라.”
또다시 대결에서 졌건만 아르샤빈은 오히려 더욱 정답게 굴었다. 진정한 사나이들의 명승부! 거기에 어떠한 사심이나 불편한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할 말이 뭐지?”
아르샤빈의 물음은 오베른이 아닌 천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오베른이 그의 수하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당신과 나는 별다른 연이 없으니 긴말이 필요하진 않겠지. 바렌트 왕국에서 활동하는 드워프 일족들에 대해 알고 싶다. 물론 정보에 대한 값은 후하게 쳐주지.”
“그럴 필요는 없네. 오베른이 충성을 맹세할 정도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남자일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게. 10분 정도면 될 거야.”
아르샤빈이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하나 꺼내자, 그 뒤로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용병 길드의 주요 문서나 정보들을 보관하는 비고(秘庫)인 듯했다.
“이렇게 아무에게나 보여 줘도 상관없나?”
“오베른은 내게 있어 은인이나 마찬가지네. 그리고 여기 있는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야. 정보를 찾아올 테니 10분만 기다리게.”
아르샤빈이 비고로 사라지자, 천휘와 오베른은 좀 전의 대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너 그 검에 관한 이야기, 카이젠이 너한테 해준 소리 아냐?”
[누가 하면 어떤가. 그것이 진실이라면, 누구에게나 말해줄 권리가 있다.]
“이상하네. 네 녀석이 그런 말들을 외우고 있을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멋진 말들을 외우고 있는 건가? 이런 날을 위해서?”
[…….]
천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오베른이 딴청을 피우며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5층이다 보니 창문 밖 풍경은 제법 볼 만했다.
“정말 대단한 게임이야.”
[그게 무슨 소리지?]
“넌 몰라도 돼.”
창밖을 바라보니 수많은 군상들이 대로를 활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수많은 군상들이 만나서 만들어가는 크고 작은 사건들. 마치 현실의 길거리를 보는 듯 생생하고도 사실감 넘치는 그들의 모습은 경외 그 자체였다.
천휘도 그렇지만, 『오벨리스크』를 즐기는 유저라면 NPC를 그저 NPC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 다른 생명이었고, 하나의 인격을 가진 인격체였다.
‘NPC는 NPC. 유저는 유저. 이렇게 꼭 둘로 나누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아. 유저들과 NPC가 화합하고 힘을 합칠 때, 『오벨리스크』는 더욱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게임이 되겠지.’
그렇게 잠시 동안 감상에 빠져 있을 때, 아르샤빈이 비고에서 두툼한 문서철을 꺼내왔다.
“바렌트 왕국에는 총 아홉 곳의 드워프 마을이 있다. 각 마을은 적으면 70명에서 많게는 500명 정도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지. 하지만 마을에 따라 주로 만드는 물건들은 다르다네. 어떤 마을은 검이나 창, 그리고 방패와 같은 군에서 쓰이는 것들을 제작하는가 하면, 다른 마을에서는 반대로 실생활에서 쓰이는 농기구들을 주로 만들기도 하니까 말이야.”
아르샤빈의 설명에 천휘는 잠시 고민하더니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아직은 대포가 업데이트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대포도 대륙 각지에서 제작이 가능하게 되겠지. 하지만 역사적으로 봐도 대포는 관에서 주로 제작하던 무기! 그렇다면 관에서 쓰이는 물품들을 제작하는 드워프들이라면 분명히 나중에 대포를 만들 수 있게 되겠지!’
천휘의 가설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드워프들이 자신을 도와 대포를 제작해주느냐에 달려 있었다. 여차하면 드워프들을 처치하고 강시로 제작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드워프들은 장인 일족답게 구성원 대부분이 대장장이였지만, 그와 더불어 전사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험준한 산맥에서 쳐들어오는 대형 몬스터들을 무리 없이 처치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모조리 죽이면 되지.’
목적을 위해 하이 엘프 퀸도 처치한 자신이다. 고작 드워프 몇몇에 쩔쩔맬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관에 물품을 대주는 마을로 찾아가지. 이름과 위치를 알 수 있겠나?”
“물론이지. 여기 있네. 하지만 문제가 있어.”
“문제?”
“그래, 문제.”
“그게 뭐지?”
자신과 오베른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아르샤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꼬집어 말할 정도면 꽤나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강철 사슬 마을이네. 강철 사슬 부족이라는 이름에서 따왔지. 문제는 그 근방에 아크 리치 녀석이 살고 있다는 거라네.”
“아크 리치(Ark Lich)?”
“무려 레벨 450의 보스 몬스터이지. 8서클 흑마법사인 탓에 그 누구도 녀석을 잡지 못한 실정이네. 게다가 몬스터 주제에 지능이 워낙 높아 그 근방을 점령하고 있어. 강철 사슬 마을도 그 녀석의 세력권에 존재하고 말이야.”
아크 리치라면 확실히 그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언데드 계열 몬스터 중에서도 본 드래곤과 함께 최강이자 최악으로 불리는 보스 몬스터가 녀석이다. 마법적 능력은 드래곤에 견줄 만하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라이프 베슬만 파괴되지 않는다면 영원의 생명까지 지니고 있는 녀석이다.
“왕실에서는 뭘 하고 있는 거지? 흑마법사인 녀석이라면 일대의 NPC 마을 역시 무사하진 못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아크 리치의 던전과 가장 가까운 푸린이라는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졌다네. 그에 분노한 왕실에서 이번에 병사를 파병한다는 소문이야.”
아르니안 대륙의 각국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왕국에 B급 이상의 경보가 울릴 때만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번과 같이 왕실에서 병사를 파병한 일은 『오벨리스크』가 오픈하고 단 두 번 있었다. 그중 한 번이 심연의 밀림에서 마수들이 광기를 일으키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드래곤 산맥에서 테오른 왕국으로 초대형 몬스터 몇 마리가 넘어왔을 때였다.
두 번 모두 왕국군이 사태를 진압하긴 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었을 정도로 위급했었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지. 가서 드워프 녀석들을 처치하고 시체를 구해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위치는?”
“끝내 갈 것인가?”
“피할 수 없다면 일단 부딪쳐 봐야겠지.”
“역시 그럴 줄 알았네. 여기 지도가 있네. 도보로 닷새 정도 걸리는 거리일세.”
인간의 걸음으로 닷새거리라면 파뱃의 비행속도로는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이만 일어나지.”
[주인을 대신해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천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오베른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투를 빌지. 또 도울 일이 있으면 찾아오게. 언제든지 자네를 도와주지.”
용병왕 아르샤빈의 말에 천휘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품었다.
‘10만 용병의 수장. 나쁘지 않네.’
아마 용병왕 아르샤빈 역시 얼마 후에 벌어질 피오르해의 제도에서 펼쳐지는 섬 정복에 발을 들이밀 것이다. 10만 용병의 수장인 그라면 충분히 하나의 섬 이상은 노려 볼 수 있는 상황.
그와 나쁘게 지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