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피오르해 (55/82)

제4장 피오르해

쏴아아아.

철썩.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변을 두드렸다.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끼에에엑!

“멀록이 쳐들어왔다! 당장 목책을 방어해!”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아르니안 대륙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마을 페난은 하루가 멀다 하고 습격해오는 멀록들 때문에 손에서 역한 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바다는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작업장이자,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장이기도 했다.

“젠장! 멀록 도끼 전사들이 수십이야! 목책을 방어할 수 없겠어!”

“그런 소리 마! 이대로 무너지면 우리가 이 마을을 개척한 의미가 없어! 우린 반드시 버텨 낼 거야! 이곳에 우리의 땅을 건설할 거라고!”

평소 페난을 습격하는 규모보다 몇 배는 거대한 멀록 무리가 쳐들어왔다. 때문에 숱한 전투 경험으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경비대원들조차 패색이 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눈에 독기를 품고 손에 들린 각자의 무기들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자신들의 등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처자식들이 떠오른 것이다.

더불어 처음 이 마을에 정착했을 때의 다짐이 떠올랐다.

모든 이들이 평등한 자유의 땅, 페난.

페난의 주민들은 그러한 마음을 품고 죽음의 바다라 불리는 피오르해로 찾아왔다.

자유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타인이 이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이 변화를 추구하고 그 변화에 발맞춰 움직일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싸우자! 이기자! 우리의 땅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

“우와아아아!”

페난 경비대장 한슨의 우렁찬 외침에 경비대원들이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함을 내질렀다.

스파아앗.

페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해안가 쪽 목책에 집중되어 있는 사이, 마을 중앙 분수대에 일단의 무리들이 새하얀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모두들 괜찮으냐?”

“으윽!”

“우웩! 멀미가…….”

페난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바로 천휘와 미온, 그리고 1학년 8반 아이들이었다. 이미 텔레포트 마법에 대한 경험이 있는 천휘나 미온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텔레포트 마법에 대한 후유증으로 가벼운 멀미 증상을 일으켰다.

“미온, 아이들에게 상태 회복 마법 좀 걸어줘.”

“알았어.”

좀처럼 아이들이 멀미 증상에서 회복하지 못하자, 결국 천휘는 미온에게 부탁해 아이들을 치료하게끔 했다.

챙챙.

“선생님! 저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납니다!”

“흐음, 정말이네. 무슨 일이지?”

“그보다 여기가 어딥니까? 비릿한 바다 내음이 나는 걸로 봐서는 정말 바닷가인 것 같은데. 피오르해가 맞긴 한 겁니까?”

유일하게 멀미를 일으키지 않은 김전일의 말에 천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펜하르트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페난 마을이다. 당연히 피오르해와 인접한 곳이지. 그보다 저 병장기 소리가 거슬리는데? 미온! 아이들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들과 함께 저쪽으로 와줘. 난 먼저 가볼게.”

“그래, 어서 가봐!”

“부탁해!”

천휘가 아이들을 미온에게 맡기고 빠르게 남쪽으로 달려가자, 그 뒤를 김전일이 따랐다.

남쪽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공히 불길함이 깃들어 있었다.

* * *

“끄아악! 내 눈!”

“양손으로 눈을 덮어! 흥분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 어서!”

멀록은 물고기의 몸체에 사람의 팔다리를 가진 특이한 몬스터였다. 주로 해안가에 서식하며 인간을 주식으로 삼는 포악한 녀석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이 멀록을 물고기 취급하듯 멀록 역시 인간을 그저 한낱 먹잇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페난 주민과 멀록의 전투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먹거나, 혹은 먹히거나.

하지만 페난 주민과 멀록의 전투는 애당초 뻔한 싸움이었다. 타고난 신체 능력이 남다른 멀록과 변변한 검술조차 배우지 못한 페난 주민의 전투는 칼을 든 어른에게 어린아이가 목검을 들고 덤비는 형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그동안은 멀록들이 십 단위 이하의 소수만 쳐들어온 탓에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오늘은 그 규모가 이제껏 싸워온 멀록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많았다.

견고하게 마을을 지켜 줬던 목책은 종잇장처럼 산산이 부셔졌고, 페난 주민들의 손에 들렸던 무기들은 고철이 되어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끅끅끅.

“비… 빌어먹을!”

목책이 무너지고 동료들이 대부분 죽거나 심대한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용감했던 경비대장 한슨 역시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아아!”

“이렇게 페난은 무너지는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페난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기구한 운명에 좌절했다. 여인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까지 눈물을 흘리며 곧이어 찾아올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띠링! 돌발 퀘스트 ‘페난 마을의 위기’가 발동되었습니다.]

펜하르트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개척 마을 페난.

그들은 신분제를 벗어나 자유의 땅을 찾아 이곳 피오르 해안까지 도달했다. 그들은 이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아 밭을 일구고 집을 지어 점차적으로 마을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를 얻은 대신 언제 죽을지 모를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위험은 바로 인간을 주 먹이로 삼는 멀록들.

페난 마을에 쳐들어온 멀록들을 처치하고 페난 마을을 구하라!

난이도:C

제한:페난 경비대 NPC 50% 생존(현재 70% 생존)

보상:페난 주민과의 우호도 상승

“멀록?”

페난 주민과 멀록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펼치고 있는 남쪽 목책 부근까지 도착한 천휘는 생각보다 상황이 더욱 다급하다고 생각했다.

‘이곳 페난은 앞으로의 계획에 거점으로 활용되어야 할 곳이다. 무너지게 둘 순 없지!’

“김전일! 방금 퀘스트 떴지?”

“네! 그러니 당장 NPC들을 도와 멀록이라는 몬스터를 처치해야 합니다!”

호기로운 김전일의 대답에 천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녀석들은 내가 상대한다. 넌 부상자들을 돌봐. 아마 곧 미온이 올 거다. 넌 안전한 곳으로 부상자들을 대피시키기만 하면 된다.”

“하… 하지만 저들의 숫자가!”

휘리릭.

김전일의 우려 섞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휘는 곧바로 멀록 도끼 전사에게 일격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경비대장 한슨의 앞을 가로막았다.

까앙!

“누… 누구시오?”

“지나가던 이방인입니다. 상황이 위급하니 제 소개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타앗! 파멸의 대지!”

콰아앙!

멀록의 평균 레벨은 200 정도다.

하지만 눈앞의 멀록들은 전투 능력을 갖춘 도끼 전사와 주술을 부릴 줄 아는 주술사들. 게다가 숫자는 무려 수십이나 된다.

천휘는 처음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녀석들을 상대하고자 마음먹었다.

천휘가 땅바닥을 발로 구르자 주변의 멀록 도끼 전사들이 스턴 상태에 빠졌다. 이제부터 약 3초간 녀석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갈 주먹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멸의 축제!”

순식간에 수십의 잔영이 사방을 뒤덮었다. 파멸의 권능이 담긴 강력한 일격에 멀록 도끼 전사들은 끈 떨어진 연처럼 나가떨어졌다.

“대… 대단해!”

천휘가 보여 주는 엄청난 신위에,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데려가던 김전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자신의 형, 거인 토르보다 강할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천휘가 멀록 도끼 전사들을 상대로 분전을 거듭하고 있을 때, 미온이 멀미 증상에 시달리던 아이들을 데리고 전장에 나타났다.

“멀록들이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미온 선생님은 부상자들을 돌보시라 전하셨습니다.”

김전일의 상황 설명에 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때마침 돌발 퀘스트를 받은 탓이었다.

“싸울 기력이 있으면 당장 멀록들을 상대하고, 사제들은 나를 도와 부상자들을 치료하자. 명탐정과 김전일이 아이들을 이끌고 어서 천휘를 도와.”

“알겠습니다.”

“그러죠.”

천휘를 따라다니며 숱한 전장을 경험했던 미온이다. 천휘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녀 역시 전장을 헤아리는 능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온의 지시에 명탐정을 비롯한 근접 공격이 가능한 아이들이 빠르게 천휘 곁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왔구나! 이 녀석들 체력이 거의 오우거 수준이다! 한 방에 처치하려 들지 말고 3인 1조로 조를 짜서 상대해! 마법사들은 후방에서 지원 사격 좀 해주고!”

“그럴게요!”

천휘의 지시에 아이들이 각각 3인 1조로 나뉘어 멀록 도끼 전사들을 상대했다.

레벨이 낮아 멀록을 상대하기가 버거운 아이들도 있었지만, 천휘의 말처럼 3인 1조로 상대하니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사념을 지닌 영이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영체를 구속할지니, 영혼의 속박!”

게다가 사령술사인 파라오가 멀록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광범위 흑마법을 펼치자,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나 멀록 도끼 전사들을 상대해나갔다.

게다가 다른 이들보다 레벨이 압도적으로 높은 명탐정과 코난, 그리고 김전일은 발군의 무력을 자랑하며 멀록 도끼 전사들을 처치하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었다.

‘방어에 특화된 크루세이더 명탐정이 멀록 도끼 전사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그 틈을 타 공격력이 강한 크레이지 헌터 코난이 활을 난사해 멀록을 처치하는 전략이군. 단순하지만 제법 쓸 만한 조합이야.’

명탐정과 코난은 『오벨리스크』를 쭉 함께 즐겨 왔는지 협공을 펼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베른과 로렌을 보는 것처럼 둘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효과적으로 멀록 도끼 전사들을 처치했다.

‘드루이드는 방어도 약하고 공격도 그저 그런 직업이지. 하지만 400레벨의 보스 몬스터인 흰곰 크누트의 영혼을 빙의시킨 김전일은 달라! 대단해!’

주먹으로 멀록 도끼 전사들을 요리하면서 천휘는 흘낏 김전일을 바라봤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흰곰으로 변신한 김전일은 거대한 앞발을 이용해 멀록 도끼 전사들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가죽도 단단한지 멀록 도끼 전사들의 공격을 별 무리 없이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어. 나머지 아이들은 레벨을 키워주면 어느 정도 몫을 할 것 같고.’

아이들은 어른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같은 걸 배워도 어른들은 몇 달이 걸리는 반면, 아이들은 몇 주 정도면 완벽하게 숙지가 가능했다. 천휘는 그걸 알고 있었다.

끄그그극!

“모두들 조심해! 멀록 주술사들이 움직인다! 원거리가 가능한 애들은 녀석을 우선순위로 처치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천휘의 지휘를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천휘가 담임교사라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은연중에 발산하는 그의 카리스마가 한몫 거든 탓이었다.

“타앗! 크레이지 샷(Crazy Shot)!”

“워터 스트라이크(Water Strike)!”

크레이지 헌터 코난과 수 계열 마법을 전문으로 익힌 워터 메이지 수정나리가 주술사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다행히 코난의 활을 떠나간 화살은 멀록 주술사의 머리를 관통하며 그 수를 줄였지만, 수정나리의 마법은 허무하게 튕겨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멀록에겐 수 계열 마법은 소용이 없어! 멀록은 자체적으로 저항력이 뛰어나! 물리 공격으로 처치해야 한다! 솔비, 담비, 고비! 너희들은 멀록 도끼 전사들을 상대하지 말고 은신을 펼쳐 주술사들을 처치해!”

“네!”

어쌔신 계열의 직업을 가진 세 아이들이 곧바로 전장의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200레벨을 넘어 2차 전직을 눈앞에 둔 세 아이들의 은신은 멀록들이 알아채기에 힘들 정도로 뛰어난 숙련도를 자랑했다.

“제법이네.”

소리 없이 주술사에게 다가가는 세 아이들을 보며 천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닌자거북들이나 어둠의 제왕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멀록들에게는 충분히 통하는 은신이었다.

어느새 그녀들은 멀록 주술사의 배후로 파고들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엇! 저러면 안 되는데!”

어쌔신들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은 바로 인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살기를 죽여야만 대상을 척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유저나 NPC는 상대해보지 못한 듯 멀록 주술사들에게 단검을 겨냥하고는 진득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스윽.

끄끅!

“야호! 우리가 처치했어요!”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

그러나 다행히 상대는 실력이 뛰어난 유저나 NPC가 아닌 멀록이다. 그녀들은 수월하게 멀록 주술사들을 처치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제대로 가르쳐야겠군.”

천휘는 등 뒤에서 달려드는 멀록 도끼 전사를 향해 백 스핀 블로우(Back Spin Blow)를 먹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띠링!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페난 마을 주민 NPC들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이르렀습니다.]

고비가 피의 사슬이라는 스킬로 마지막 멀록 주술사를 처치하자,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휴우! 간신히 처치했어.”

“그러게. 그래도 생각보다 싸울 만했어. 처음에는 엄청난 숫자에 기겁했는데 말이야.”

전투를 마친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기력을 회복했다. 한 시간의 전투였지만, 멀록들이 워낙 숫자가 많았던 탓에 긴장을 많이 해 기력이 최저치까지 떨어진 것이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이들이 휴식을 취하는 그 순간, 천휘는 미온과 함께 페난 마을의 촌장을 찾았다.

보통 마을의 촌장 NPC가 늙은 노인인 반면, 개척 마을인 페난 마을의 촌장은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었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멀록 녀석들이 자주 쳐들어오는 겁니까? 마을 외곽에 제법 견고한 목책들이 세워져 있던데요.”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록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습을 드러냈었습니다. 게다가 숫자도 적어 저희 마을의 경비대만으로도 방어가 가능했었지요. 하지만 최근 들어 멀록의 습격이 잦아지더니, 급기야 오늘 같은 일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촌장의 말에 뭔가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은 천휘의 뇌리에 로빈 녀석이 말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진 마탑에서 흘러나온 정보다. 그런데 이게 말이지… 왠지 심상치 않은 냄새를 풍겨.’

‘뭔데?’

‘너 피오르해 알지?’

‘피오르해라면 펜하르트 왕국과 테오른 왕국 남쪽 바다를 말하는 거 아냐?’

‘그래, 바로 그 피오르해. 최근에 그 피오르해에서 새로운 땅에 대한 단서가 잡혔다.’

‘새로운 땅?’

‘어쩌면 유저들을 위한 미개척지가 될 수도 있다. 이 단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놀랍게도 유저야.’

‘그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데?’

‘수행 중인 마탑의 마법사가 펜하르트 왕국 최남단 페난 마을에 들렀다가 그 유저와 어떤 퀘스트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거야.’

‘미개척지라…….’

‘어떠냐? 땡기지?’

‘당연하지!’

“혹시 주변에 이방인이 없습니까?”

“이방인이요? 흐음, 이 마을에는 이방인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만…….”

천휘의 물음에 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표정으로 봐서는 정말 페난을 거점으로 삼은 이방인이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인근에라도.”

“인근이라면… 아! 저 섬에 테크토라는 이방인이 한 명 살기는 하는데…….”

촌장의 말에 천휘는 직감적으로 그 사람이 로빈이 말한 유저임을 알 수 있었다.

“저 섬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쿠닉섬에 말입니까? 저 섬은 배로 가는 수밖에 없는데. 멀록 녀석들 때문에 배를 띄울 수가 없으니…….”

“저희가 녀석들을 모조리 처치해드리죠. 그러면 배를 빌려 주시겠습니까?”

[띠링! 퀘스트 ‘멀록 퇴치’가 발동되었습니다.]

피오르해의 먼 바다에 주로 서식하는 멀록들이 페난 마을을 위협하고 있다. 녀석들은 오크보다 더욱 뛰어난 번식력으로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 녀석들의 본거지를 찾아가 멀록 로드 그웬을 처치하라!

난이도:B

기한:없음

보상:100골드, 어선 한 척

“은인께서 인근의 멀록들을 조종하는 멀록 로드를 처치해주신다면, 배 한 척 빌려 주는 것이 일이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녀석들을 모조리 처치해드리죠. 배나 준비해주십시오.”

“꼭 녀석을 처치해주십시오.”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촌장의 간절한 외침을 뒤로하고 천휘와 미온은 촌장의 집을 나섰다.

“저 섬에는 무슨 볼일이야? 애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걸 보니 꽤나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촌장의 집을 나서서 아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곳으로 가는 와중에 미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미온조차 천휘의 의도를 아직 몰랐던 것이다.

“애들을 데려온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그저 애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란 존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지. 게다가 함께 게임을 즐기면서 자기들끼리 친해지기를 바라고 있기도 해. 저 때는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나이잖아. 그러면서 반의 결속력도 다지고 교사로서의 위엄도 챙기려고.”

“정말 그것뿐이다, 이거지?”

“다른 이유가 있긴 하지만… 아직 정확한 건 아니라서 말할 단계는 아니야.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말해줄게.”

“그래? 흐음, 네가 하는 일이니, 별 걱정은 없지만서도. 알았어. 더 이상 묻지 않을게.”

“훗.”

미온은 천휘가 하는 일에 왈가왈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천휘를 믿는다는 뜻이다. 왈가닥 성격에 대책 없이 나설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천휘는 그런 그녀가 고맙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와락.

“뭐야, 갑자기?”

“그냥. 안고 싶어서.”

앞서 가는 미온을 등 뒤에서 와락 껴안은 천휘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를 바라봤다.

“너 요새 엉큼해. 지금도 봐봐! 네 손이 어디에 가 있는지!”

“헉! 이건 고의가 아니라…….”

미온을 껴안은 양손이 절묘하게도 그녀의 가슴 위에 얹어져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 있던 천휘는 미온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한 번만 더 이랬다간 봐라. 확 나도 네 가슴 만져 버릴 테니까.”

“후훗! 알았어. 조심할게.”

이제는 그녀가 툴툴거리는 것도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겉과 속이 다른 그녀가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사랑의 콩깍지.

천휘의 눈에는 솔로들이라면 누구나 극도로 경멸한다는 바로 그 사랑의 꽁깍지가 씌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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