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고백
저벅저벅.
영완은 아침 출근과 동시에 본관 옥상으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은 오직 담배밖에 없었다.
“하아! 뭔가 허무하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며 영완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허망함. 영완을 괴롭히는 감정은 바로 그 허망함이었다.
“이건 뭐, 녀석에게 복수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한 것도 아니니. 젠장! 그냥 당장에라도 찾아가 임페리얼 길드를 산산조각 내버려?”
시영의 『오벨리스크』 캐릭터인 그랜저의 야욕을 분쇄시킨 것만으로는 녀석에게 복수를 했다고 볼 수 없었다. 녀석을 한 번 죽인 것으론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복수에 성공했다고 난리다. 준우 녀석이나 정호 녀석은 통쾌하다 못해 상쾌하다며 오늘 저녁 진하게 술이나 한잔 걸치자는 연락이 왔고, 다른 동료들도 오늘만큼은 축하하고 싶다며 다 같이 현실에서 모여 회식을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런 동료들의 호들갑에도 영완은 그리 즐겁지가 않았다. 복수에 대한 마음이 시들해진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이 허망함은 어제의 일이 자신이 원하던 복수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래, 그냥 일부분이라고 치자. 아직 갈 길은 머니까.’
영완은 이내 담뱃불을 끄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영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큭큭! 네놈이 내게 이런 식으로 한 방 먹일 줄이야.”
“시영.”
그곳에는 시영이 영완과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무슨 연유인지 얼굴 한가득 분노보다는 기쁜 기색이 자리하고 있었다.
“난 네 녀석이 싫었어. 가난뱅이 주제에 대학 시절부터 나보다 인기가 많은 것은 물론, 학점도 나보다 훨씬 높았지. 재수 없게도 말이야.”
“본론만 말해.”
영완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왜 시영이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고자 했는지, 왜 자신의 연인인 희영을 이용해 자신에게 상처를 주려 했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었다.
“네놈은 날 이길 수 없어. 이 세상은 오로지 돈만 있으면 뭐든지 용납되는 그런 세상이거든. 그건 네놈 역시 알고 있지. 그 때문에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을 통해 내게 복수를 하려는 거고. 그렇지 않나?”
“용건만 말하라고, 그러니까.”
의외로 차분한 시영을 보며 영완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속내는 그럴지 몰라도 영완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어디 얼마나 더 발악할 수 있는지 지켜보지. 아, 물론 네놈 의도대로 가상현실 속의 원한을 현실에서 해결하진 않을 거야. 난 네 녀석처럼 찌질하지 않거든.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네 녀석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벨리스크』 내에서의 내 힘은 더욱 엄청나거든. 조만간 다시 『오벨리스크』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때는… 네놈을 철저하게 밟아주겠어!”
“…….”
시영의 원한 가득한 말에도 영완은 그저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반응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를 기대해라.”
영완의 반응이야 어떻든 시영은 할 말을 마치며 유유히 옥상을 떠났다.
영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이제야 녀석도 내게 원한을 가지게 된 것인가.’
이전까지만 해도 시영에게 있어 영완은 그저 유희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시영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는 영완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역시 이제는 영완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동등한 관계라고 볼 수 있지. 남은 건 마지막에 가서 누가 웃느냐 하는 거겠지.”
영완은 시영을 결코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이번 원정에서는 운 좋게 자신이 녀석을 처치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녀석은 10대 길드의 마스터이니까.
“역시!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아, 여긴 어쩐 일이야?”
영완이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누군가 옥상 위로 올라왔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느낄 수 있는 그녀의 향기.
바로 미연이었다.
“어쩐 일이긴, 너 보고 싶어서 왔지. 그나저나 학교에서 담배 좀 그만 피우면 안 돼? 그거 명백한 교육법 위반이라고!”
“안 걸리면 되는 거지, 교육법 위반은 무슨.”
“세상에 너 같은 교사가 있으니까 교사들이 욕을 먹는 거야! 나를 봐! 이 얼마나 교사다운 복장이야!”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당연하지!”
미연의 복장은 한마디로 말해 홍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옷차림이었다. 이제 조금씩 날씨가 풀리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기가 매서운데도 그녀는 마치 한여름을 연상시킬 만큼 속살을 다 드러내놓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교사다운 복장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려 주지. 저길 봐봐.”
“누구? 아, 최 선생님?”
영완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최효선이라는 이름의 교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1학년 국어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인데, 늘 단정하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미연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저런 게 바로 진정한 여교사의 모습이야. 이제 좀 알겠어?”
“교사라고 해서 개성을 중시하지 않은 복장을 입어야 한다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야. 요새는 자기 PR 시대라고! 내게 있어 이 복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휴, 그래. 내가 지금 누굴 가르칠 형편이 아니지.”
더 이상 미연과 대화를 나눠봐야 손해라는 걸 깨달은 영완은 담뱃불을 끄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그 화신의 신기는 어쩔 거야?”
“아, 그거?”
옥상을 떠나려던 영완은 미연의 물음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우리 결국 그거 못 얻었잖아. 하필 그에 관련된 퀘스트가 필요할 건 또 뭐람?”
“…….”
그랜저를 비롯한 임페리얼 길원 전원을 처치한 천휘 일행은 마지막으로 화신의 신기를 얻고자 화신의 홀 주변을 탐색했다.
하지만 결과는 말짱 도루묵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대했던 화신의 신기는커녕 화신의 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모종의 퀘스트를 받아야 하거나, 혹은 화신의 신기와 연관된 아이템을 지녀야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천휘 일행은 화신의 사막 원정에서 아무런 결과물도 얻지 못한 채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아깝지 않아?”
“괜찮아. 어차피 내겐 마신의 신기라고 할 수 있는 어둠의 진실이 있으니까. 그보다 학교 생활은 어때? 할 만해?”
“당연하지. 애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 복장을 좋아하는 거 아닐까? 큭큭! 너 여자 애들한테는 인기 없지?”
“…쳇.”
영완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는지 미연은 입을 삐쭉 내밀며 삐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영완의 눈에는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내가 그녀를 정말 좋아하게 된 걸까?’
미연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에 영완은 문득 희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희영으로 인해 울고 웃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었다.
비록 몸은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시영에게 가 있었지만, 언제나 영완은 마음속으로 희영은 자신과 함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본색을 알게 된 지금은 그녀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상 그녀에 관해 감흥도 없었고, 애틋한 감정은 더더욱 사라졌다. 그만큼 영완 스스로 그녀에게 실망했다는 소리였다.
‘이제 내겐 미연뿐이다.’
자신이 희영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사는 집안의 딸이면서도 미연 그녀는 자신만을 바라봤고, 자신 때문에 이렇듯 학교에까지 취직했다.
예전에 영완이 희영을 향해 그러했듯 미연 그녀도 자신을 향해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오늘 데이트할까?”
“…뭐?”
“데이트하자고. 진짜 연인처럼 보여야 할 거 아냐.”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할 말도 있고 하니까 수업 끝나고 보자.”
“할 말? 흐음, 뭔지 벌써부터 궁금하네. 그래. 나도 오늘 저녁에 약속 없으니까.”
“그럼 끝나고 데이트하는 거다!”
“흥! 그러든지 말든지!”
“후훗.”
여느 여자들처럼 내숭도 없이 자신의 제안에 군말 않고 응하는 미연을 보며 영완은 슬그머니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왜? 싫어?”
“당연히 싫지! 우린 아직 사귀는 게 아니잖아! 너 설마, 사귀기도 전에 스킨십부터 하는 파렴치한이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날 그렇게 몰라?”
“아무튼 싫어! 앞으로 이런 짓 다시 한 번만 더 했다간 죽여 버릴 줄 알아! 명심해둬!”
“네, 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요.”
미연은 영완에게 쏘아붙이듯 소리를 내지르고는 이내 먼저 옥상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화난 듯 소리치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얼핏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귀여운 것. 후후!”
그런 미연을 바라보며 영완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 끝나니,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대 더 태울 요량이었다.
“하아! 후우.”
영완은 역시 학교에서 피우는 담배가 제맛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담배를 빠르게 태워나갔다.
딩동댕동.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은 곧바로 반으로 돌아가 자리에 착석했고, 교사들도 교과서와 참고 서적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끝나고 봐.”
“누구 마음대로!”
교무실을 나서며 살짝 미연에게 귓속말을 전한 영완은 유유히 자신의 반으로 걸어갔고, 미연은 그런 영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나저나 이놈의 새끼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벌써 새 학기가 시작되고 2주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완이 맡은 1학년 8반 녀석들은 벌써부터 학교에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녀석들이 일으킨 가장 큰 문제는, 감히 3학년 일진들을 상대로 싸움을 건 것이다.
결과는 8반 녀석들의 완승. 인근 중학교에서도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데다, 영완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는 탓에 녀석들의 결속력은 대단했다.
결국 3학년 일진들은 8반 녀석들의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이후 마음 놓고 1학년들에게 삥을 뜯거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저 밑밥 던지기에 불과했다.
8반 녀석들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 바로 담임 영완에 대한 복수였다.
드르륵.
“여어, 오늘 하루도 잘들 지냈냐?”
“…….”
영완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오, 간만에 모두들 출석했네. 그보다 원석아, 옆에 정호 깨워라. 자식이 담임선생님이 왔는데 쳐 자고 있어?”
영완의 꾸지람에 원석이 바로 정호를 깨웠다. 하지만 명색이 학교 짱인 정호가 바로 일어날 리 만무했다.
“셋 셀 때까지 안 일어나면 내일 화장실 청소 시킬 거다. 그것도 여자 화장실. 하나, 둘.”
영완의 심드렁한 말에 정호는 곧바로 책상에서 얼굴을 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녀석은 의외로 숫기가 없어 남자 화장실도 아닌 여자 화장실을 청소할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이미 파악한 영완의 전략이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내 시간에 5분 전부터 일어나 있어라. 안 그러면 여자 화장실은 물론, 여선생님들 화장실까지 청소시켜 버릴 테니까.”
“…쳇.”
이미 지난 2주간의 경험으로 정호는 알고 있었다. 영완이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고야 마는 성격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이행하지 않을 시에 ‘항명죄’라는 것을 적용시켜 말도 안 되는 벌칙을 내린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영완이 8반 아이들에게 내리는 벌은 간단했다. 대련을 가장한 구타.
예슬고는 전국에서도 태권도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연히 학교 내에 태권도 수련장이 있었고, 영완은 그곳에서 아이들을 대련 명목으로 일방적인 구타를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이랑아.”
“네?”
갑자기 호명을 받자, 손거울을 보고 있던 이랑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너 어제 강남 클럽 갔었지?”
“…안 갔는데요.”
“후후! 지금 내 앞에서 감히 거짓말하는 거지?”
“흑.”
영완의 살기 어린 말에 이랑이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두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봐주지만, 다음부터는 어림없어.”
“쳇! 그래도 술은 안 마셨다고요!”
영완의 말에 이랑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 모습에 영완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누가 술 먹었대? 내 말은, 그런 데를 가더라도 제발 다른 선생님들 눈에 띄지 말란 말이야. 화장 떡칠을 해서라도 얼굴은 어떻게든 가려! 다른 애들도 잘 들어둬. 너희들이 클럽에 가는 건 개의치 않지만, 내가 아닌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들키지 마라. 그리고 방금 이랑이 말처럼 술은 절대 안 돼! 용필이, 너 이놈아!”
영완은 일장연설을 늘어놓다 말고 용필을 지목하며 눈을 부라렸다.
“네?”
“이 자식이 어디서 시치미야! 네놈한테 아직도 술 냄새가 풀풀 풍겨. 대체 몇 시까지 술을 처먹은 거야! 내가 말했지! 담배는 물론이고, 술도 절대 안 된다고! 네 녀석은 오늘 방과 후에 집에 가지 말고 1층부터 4층까지 여자 화장실이란 여자 화장실은 다 청소해놓고 귀가해! 내일 와서 검사할 테니까 도망갈 생각일랑 말고! 알았어?”
“하… 하지만!”
“킥킥.”
영완의 지시에 용필이 울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대한 체구의 용필이 우스꽝스럽게 울상을 짓자, 다른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용필과 영완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정호야.”
“네.”
용필의 일을 간단하게 처리한 영완은 정호를 지목했다.
“너 지난 주말에 3학년 애들 건드렸다며? 다른 애들이랑 같이. 사실이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영완은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정호와 남자 아이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네놈들 표정을 보아하니 사실인 것 같네. 흐음, 이를 어쩐다? 다른 선생님들 눈도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겠지?”
영완의 말에 남자 아이들 중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흡사 중을 연상시킬 정도로 머리를 박박 밀고 다부진 근육을 지닌 상호라는 녀석이었다.
“억울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녀석들이 먼저 건드렸다고요!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녀석의 당찬 반론에 영완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아이들은 그 얼굴을 보며 다가올 미래를 직감했다. 이제 남은 것은 태권도 수련장에서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짝짝짝.
“브라보! 역시 내 제자들이야.”
“……?”
호된 꾸지람을 받을 줄 알고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아이들은 난데없는 박수와 칭찬에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이왕 싸운 거 상대가 3학년이든, 대학생이든 이겨야지. 암! 잘했어.”
“…하아?”
여느 선생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완의 발언에 아이들은 기가 막힌 듯 멍한 얼굴로 영완을 쳐다봤다. 이들의 머릿속엔 과연 그가 선생일까 하는 의문이 가득했다.
“문제는 아까도 말했듯이 다른 선생님들이 그 사건으로 인해 나를 유난히도 괴롭힌다는 거지. 오늘 아침에는 교감 선생님께도 불려 갔었다. 이, 내가! 성실하게 교사 생활을 해온 이, 내가 말이야!”
“…….”
영완의 이어지는 말에 아이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그 벌로 이번 주말에 너희들 나와 같이 가줘야 할 데가 있다.”
조금은 생뚱맞은 영완의 말에 반장인 동국이 손을 들고 물었다.
“어디를요?”
자신들의 의문점을 풀어주는 동국의 물음에 아이들이 이목이 일제히 영완에게로 집중됐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영완의 말을 어기고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하지만, 기왕이면 좀 더 편한 벌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아이들의 바람.
영완은 아이들의 그런 바람이야 어떻든 자신이 할 말만을 내뱉었다.
“너희들… 『오벨리스크』 하냐?”
* * *
드르륵.
“아니, 아직도 퇴근들 안 했나? 벌써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데. 어서들 퇴근하게. 다들 배고플 텐데 말이야.”
본래 교사의 퇴근 시간은 5시다.
다른 공무원들이 6시에 퇴근하는 것에 비해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반 공무원들은 9시까지 출근하는 데 비해, 교사와 같은 교육 공무원들은 아이들이 등교하는 8시까지 출근한다. 한마디로 말해, 일반 공무원들과 비교했을 때 일을 하는 시간은 같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완을 비롯한 교사들이 6시가 다 되도록 퇴근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교감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할 말이 있다며 방과 후 대기하라는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순이 가까운 교감 선생님은 벌써 치매가 왔는지 자신이 내뱉은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행여나 다시 부를 수도 있으니까 어서 나가자.”
“그게 좋겠어.”
최근 들어 자주 깜빡하는 교감 선생님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교사들은 모두 교감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교무실을 나섰다. 혹시 교감 선생님이 기억이 돌아와 붙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영락없이 퇴근 시간이 늦춰질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휴우! 간신히 여기까지 왔네.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
“그러게 말이야. 하마터면 퇴근 제때 못할 뻔했어. 그나저나 오늘 우리 어디…….”
“…….”
함께 본관 뒤쪽에 마련된 주차장으로 향하던 영완과 미연은 이내 그곳에 한발 먼저 와 번쩍이는 외제 차의 문을 여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함께 어디 가나 보죠, 두 분 선생님들?”
“…이 선생님이 알 바 아닙니다만.”
영완과 미연처럼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는지 시영과 희영도 함께 퇴근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영완은 희영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영에게 할 말만을 내뱉고는 자신의 차로 빠르게 다가갔다.
“기왕이면 오늘 함께 술이라도 마시는 게 어떨는지. 제가 잘 아는 술집이 있습니다만…….”
“…무슨 꿍꿍이지?”
“후후! 내가 뭘?”
시영의 뜬금없는 제안에 영완은 가식적인 가면을 벗어던지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시영은 예의 그 재수 없는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네놈이 정상적인 이유로 내게 술을 살 리가 만무하지. 날 그토록 싫어하는 네놈이 말이야.”
“그걸로 인해 네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제안?”
예상치 못했던 말에 영완은 살짝 호기심이 동한 눈치였다. 하지만 미연이 그의 소맷자락을 부여잡자, 이내 그런 호기심조차도 수그러들었다.
“네 녀석의 제안 따위, 내가 들을 이유가 없지. 더 이상 할 이야기 없으면 난 이만 간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은지 영완은 곧바로 미연을 위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이내 그의 내심을 읽은 미연이 곧바로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그러지 말고 함께 가요.”
“…….”
갑자기 들려오는 희영의 목소리에 영완의 몸이 멈칫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즐거운지 희영이 연이어 입을 열었다.
“우리 넷이서 술 마셔 본 적 없지? 미연아, 그러지 말고 함께 술 마시러 가자. 예전에는 자주 같이 마셨잖아. 안 그래, 시영 씨?”
“그랬지. 예전에 셋이서 술 마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 미연 씨. 오늘 영완이랑 해서 넷이 같이 술 마시러 가죠?”
과연 커플답게 두 사람은 궁합이 척척 잘도 맞았다. 하지만 영완은 물론이고 미연 또한 그 둘과 함께 술을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네놈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내 알 바는 아니다만, 잘 들어둬라. 난 네 녀석은 물론이고 네 뒤에 서 있는 사람과 말 한마디 섞기 싫은 사람이야. 네 녀석의 재수 없는 면상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아. 내가 여기서 폭발하면 그동안 참아왔던 내 자신에게 미안하거든. 아, 아까 옥상에서 네가 그랬지? 넌 찌질하게 가상현실의 문제를 현실로 끌어내지 않는다고? 그 말 잘했다.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 조만간 기다려. 아르니안 대륙에서의 네 녀석 근간, 내가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을 테니. 으드득!”
“…….”
영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시영에 대한 원한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시영 또한 그걸 느꼈는지 아무 말 없이 차에 타는 영완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두 사람 다.”
마지막으로 미연까지 똑 쏘아붙이고는 차에 오르자, 이내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빠르게 교정을 빠져나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더니, 딱 그 짝인데?”
“그러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말에는 꿈뻑… 시… 시영 씨.”
시영의 말에 신나게 맞장구치던 희영은 이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트린 시영을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흉신악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시영의 모습.
희영은 놀라 그에게 어떤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호호! 말 한번 진짜 시원하게 잘했어. 마지막에 그 두 사람 얼굴 봤어?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다니까.”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지. 반드시 언젠가 두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말 거야.”
미연은 어느새 영완의 원한을 함께 공유하고 있을 정도로 영완과 마음이 통하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두 사람의 태도였다. 마치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 당연하게 행동하는 두 사람은 어느새 실제 연인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 갈 거야?”
“흐음, 공식적인 첫 데이트니까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뭐야! 이렇게 아리따운 숙녀와 데이트하면서 계획도 짜지 않았다는 거야? 이런 천인공노할!”
“…혼자 사극 찍냐? 천인공노는 개뿔. 그냥 따라오기나 해.”
미연의 불평을 일축시키고 영완은 곧바로 차를 몰아갔다.
한강을 건너 강북으로 향한 영완은 곧장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홍대 부근으로 향했다.
“뭐야, 이건.”
“왜? 싫어? 난 여기 너와 다시 한 번 오고 싶었거든. 생각하기 싫은 1인이 끼어 있긴 했지만, 아무튼 여긴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잖아.”
“정확히는 『오벨리스크』에서 먼저 만났다고.”
“후훗! 네 말이 맞아. 아무튼 들어가자.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데이트할 때 꼭 남자가 내야 한다는 편견은 버려! 오늘 저녁은 내가 살 거야! 그러니까 넌 술이나 사!”
괜히 돈을 내겠다고 한마디 했다가 한 대 맞을 뻔한 영완은 웃으면서 먼저 카페로 들어간 미연을 뒤따랐다.
영완이 첫 데이트 장소로 선택한 곳은 바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홍대의 한 카페였다. 비록 당시에는 희영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이지만, 이제는 희영과는 별개로 좀 더 발전된 사이가 되어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문하시겠어요?”
두 사람은 예전에 앉았던 바로 그 탁자에 마주 보며 앉았다.
이윽고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영완이 미연에게 물었다.
“뭐 먹을까?”
“그냥 간단하게 먹자. 아까 학교에서 간식거리 집어먹었더니 별로 배가 안 고파.”
“그래? 난 배고픈데. 그럼 난 해물볶음밥.”
“뭐야, 그게. 촌스럽잖아.”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카페는 홍대에서도 꽤나 유명한 카페 겸 레스토랑이었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주방장이 직접 이태리로 유학을 다녀왔다는 소리도 있을 정도였다.
“아, 몰라. 난 해물볶음밥이 좋아. 촌스러워도 할 수 없어.”
“아씨. 그럼 난 파스타 먹을게. 여기 크림소스로 된 치킨 파스타 있죠? 그걸로 주세요. 해물이 들어간 볶음밥이랑 같이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미연의 신경질적인 주문에 점원이 웃으며 주문을 받아갔다. 그런 점원의 미소가 마음에 걸렸는지 미연은 괜히 영완에게 화를 풀었다.
“이런 데 왔으면 정식 코스로 먹어야 하는 거야, 이 맹추야.”
“정식 코스는 무슨. 다 먹지도 못할 걸 왜 시키고 난리야. 그냥 대충 볶음밥이나 먹으면 되지.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난 양식 별로 안 좋아해. 피자나 햄버거는 더욱더 싫어하고.”
“그럼 왜 여기로 왔어?”
“우리 둘의 첫 만남이 이뤄진 장소니까.”
영완의 솔직하고도 간결한 말에 미연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영완 역시 조금 민망한지 볼이 살짝 붉어졌다.
“미안했어.”
“갑자기 왜 그래?”
“늦었지만 사과하고 싶어서. 그동안 네 마음 받아주지 못한 거.”
“새삼스레 사과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런 거라 했어. 그렇게 확 변하다 진짜 죽기라도 하면… 흡!”
새치름한 얼굴로 불평을 늘어놓던 미연의 입술에 영완이 기습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아주 찰나간의 입맞춤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 그보다 달콤한 입맞춤은 없을 것이다.
“…있지.”
“…왜?”
입맞춤을 하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미연이 말문을 열었다.
“이거 무슨 의미야?”
역시나 솔직한 그녀답게 미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영완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런 짓을 벌일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본 그대로야. 너와 사귀고 싶어. 널 좋아해.”
“…후우.”
“웬 한숨이야? 싫어?”
영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미연이 뜸을 들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에 내쉬는 한숨인지라 영완은 내심 긴장하며 물었다.
“거의 1년 기다렸다.”
“뭘 기다려?”
“방금 네가 한 말, 1년이나 기다렸다고.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기다린 말이니까.”
“아…….”
미연의 말에 영완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미연도 함께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