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 제1장 복수의 시작 (52/82)

제1장 복수의 시작

“네 녀석이 어떻게!”

천휘가 인피면구를 벗자, 그랜저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한눈에 천휘의 정체가 영완임을 알아본 것이다.

“나도 『오벨리스크』를 즐기는 한 명의 유저거든.”

“누가 그걸 물었냐! 네 녀석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느냐, 이거다!”

“다 알면서 그래. 당연히 네가 계획한 원정대에 참가해서 이곳까지 왔지.”

천휘의 능글맞은 말에 그랜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더불어 헤라 역시 얼굴이 붉어지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어떻게!”

“뭐, 놀랄 것 있나. 같은 게임을 하다 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안 그래, 미온?”

“당연하지.”

“너… 너는!”

천휘의 정체를 알게 되자, 헤라는 자연스럽게 미온의 정체도 알아봤다. 약간의 얼굴 변형이 이뤄지긴 했지만, 미온은 현실의 미연과 상당 부분 닮아 있었다.

“…우리의 목적을 예상하고 따라온 거냐?”

“그렇다면 그런 거고.”

천휘는 마치 산보를 나온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랜저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모습이 더욱 껄끄러운 듯 그랜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여기까지 제 힘으로 온 걸 보니, 과연 숨겨둔 비장의 패가 있다는 소리겠지?”

“피차일반이겠지. 그쪽이나 이쪽이나 전혀 피해가 없을 순 없을 테니까.”

어차피 두 무리가 격돌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천휘 일행은 그랜저와 임페리얼 길원들에 대해 빠삭하게 꿰뚫고 있지만, 반대로 그랜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뭘 그렇게 망설여! 저 연놈들을 어서 죽여 버려!”

“빌어먹을 년!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네. 사갈 같은 네년은 내가 상대해주지!”

“흥! 네년이 돈 좀 있다고 사람 우습게보는 모양인데, 사람 잘못 봤어! 난 언제나 콧대 높은 네년이 싫었어!”

“헤라!”

“미온!”

천휘와 그랜저가 말릴 새도 없이 헤라와 미온이 부딪쳤다. 하지만 신체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헤라로서는 단신으로 몽크인 미온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임페리얼 길원 중 도끼 전사 한 명이 헤라를 돕기 위해 나섰고, 천휘 일행 중에서도 블랙헤드가 나서 미온을 도왔다.

“최후의 승자가…….”

“저걸 갖는 거다!”

그랜저도 이제 천휘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천휘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복수심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격돌했다.

소울 웨폰이라는 히든 직업을 지닌 그랜저의 강함은 익히 알려진 바였다.

소울, 즉 영혼의 형태로 모든 무기를 생성해내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로 하여금 긴장감을 촉진시킬 수밖에 없었다.

“소울 액스(Soul Axe)!”

“검이 아니고 이번엔 도끼군.”

“후후! 난 검보다는 도끼가 더 편하거든. 더 확실하게 상대를 찍어버릴 수도 있고 말이야.”

“끝까지 날 얕보겠다는 심산이로군. 그 오만함이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겠어.”

“얼마든지.”

단숨에 녀석의 면상을 짓이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천휘는 꾹 참았다. 모든 이들을 자신의 발아래로 여기는 녀석에게 죽음이 아닌 절망감을 안겨 주고 싶었다. 그저 녀석에게 한 번의 죽음을 안겨 주기에는 녀석에 대한 분노가 너무도 대단했다.

“파멸의 휘장!”

천휘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파멸의 권능을 익힐 수 있었다. 파멸의 권능을 전신에 깃들게 해 시전자로 하여금 파멸의 기운을 마음대로 뿜어낼 수 있게 해주는 스킬이었다.

정확한 부가 효과는 파멸의 미학 스킬 사용 시 2배에 달하는 데미지 증가와 모든 스탯의 1.5배 향상.

아렌의 야수 본능이나 그랜저의 소울 스피릿을 상회하는 최강의 보조 스킬이 바로 파멸의 휘장이었다.

천휘의 등 뒤로 마신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명 마신 공주라 불리고 싶어 하는 마신 캐리건의 본모습.

마신의 성 정문에 새겨져 있던 마신 본연의 형상이 현신한 것이다.

“욱! 빌어먹을! 소울 스피릿!”

마신의 형상이 안겨 주는 지독한 존재감에 그랜저는 참지 못하고 소울 스피릿을 전개했다.

녀석의 등 뒤로 나타나는 희뿌연 유령들. 그 유령들이 돕는 듯 그랜저의 안색은 이내 안정을 찾았다.

“덤벼라, 그랜저!”

천휘는 먼저 나설 생각이 없었다.

녀석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닌 모든 절기를 내보이게 할 작정이었다. 최강이라 여기고 있을 절기들을 하나하나 깨부숴 녀석에게 절망감을 안겨 줄 심산인 것이다.

“어리석은 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난 최강의 사내 아렌을 꺾은, 명실상부 『오벨리스크』 최강의 남자다!”

“비겁하게 암습으로 처치해놓고 생색은. 잔말 말고 덤벼. 괜히 나중에 비겁하다, 어쩌다 말고.”

“이런 미친! 오냐! 내 네놈의 자만을 철저하게 깨부숴주지! 하앗!”

그랜저가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천휘를 향해 쇄도했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움직임. 어찌나 신묘한지 처음 그를 상대하는 이들은 이 움직임에 현혹되어 패하기 일쑤였다.

“어딜! 파멸의 대지!”

콰앙!

하지만 천휘는 그런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이 주변에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파멸의 대지를 전개했다.

“큭!”

화신의 홀 바닥이 쩍 갈라지며, 동시에 그랜저의 움직임도 제자리에서 멈췄다. 파멸의 휘장으로 인해 파멸의 대지 역시 위력이 몇 배는 상승한 탓이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것밖에 없는 거냐?”

“이런 빌어먹을!”

천휘의 조소에 그랜저는 순간적으로 마비된 몸을 움직이며 더욱 빠르게 천휘를 향해 쇄도했다.

순식간에 좁혀진 둘의 거리.

동시에 그랜저가 소울 액스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천휘의 머리를 가를 기세였다.

“훗.”

그러나 천휘는 고작 그 정도 공격에 당할 수 없다는 듯 보법을 운용해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리고는 텅 빈 그랜저의 복부에 일권을 내질렀다.

“크헉!”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빈틈을 허용한 그랜저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결국 피를 토해냈다.

“마스터! 모두 마스터를 도와!”

믿었던 그랜저가 허무하게 무릎을 꿇자 알무니아가 놀라며 소리쳤다. 그의 지시에 남아 있던 임페리얼 길드 유저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동료는 천휘에게도 있었다. 그것도 위명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강력한 동료들이.

“어딜 나서!”

“이익! 카오스 팔라딘!”

“어서 마스터를 도와라, 알무니아. 녀석은 내가 맡겠다. 그렇지 않아도 허세 가득한 저 녀석을 손봐주고 싶었어!”

호기롭게 나선 이는 임페리얼 길드 부길마 중 한 사람인 철혈의 전사 레만이었다. 일찍이 카이젠 산맥, 제황의 계곡에서 오베른과 만나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했던 그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려 1년 전.

1년 사이에 그는 전사 랭킹 10위 안에 드는 초강자로 거듭나 카멜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래, 너한테 맡기마!”

레만과 카멜을 붙여 놓고 그랜저를 도우려던 알무니아는 이내 또 다른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잊으면 섭섭하지.”

이번에는 로빈과 눈송이, 그리고 하린이 한꺼번에 나섰다. 신체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이지만, 알무니아보다 한 단계 높은 7서클 마법사 로빈이 함께 있었기에 충분히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훗! 네놈의 허접한 동료들이 내 동료들에게 모두 가로막힌 모양인데?”

동료들이 도우러 올 수 없는 상황임을 확인하자 그랜저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런 그를 보며 천휘가 가소로운 듯 조소를 흘렸다.

“네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왜? 날 죽이게? 와! 서른 살이나 처먹고 현실에서 어떻게 해볼 작정이냐? 고작 게! 임! 에서 당한 것 때문에?”

천휘는 일부러 게임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행여나 녀석이 현실에서 직장 문제를 가지고 해코지를 할 경우, 실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는 복수! 여기에 학교 문제를 개입시켜서는 안 돼!’

자신을 핫바지로 본 녀석을 용서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직장까지 잃어가면서 복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휘로서는 어떻게든 게임에서의 일은 게임 내에서 해결해야 함을 필사적으로 역설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현실과 가상현실은 별개다! 내가 네놈같이 현실에서의 원한을 가상현실까지 끌고 오는 머저리인 것 같냐!”

“…머저리.”

그랜저, 아니 시영의 말이 옳았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에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충분히 고심했던 부분이었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다! 겁쟁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네놈 말처럼 머저리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으로 남을 농락하는 개자식은 아냐!’

확실히 현실에서의 자신은 힘이 없다. 가진 돈도 없었고, 권력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럼에도 녀석에게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할 용기는 남아 있다는 것이다.

“패배한 녀석치고는 입이 좀 거치네? 그렇게 죽고 싶은가 보지?”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자신은 그랜저를 제압했고, 다른 일행들도 임페리얼 길드를 상대로 근소하게나마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랜저는 아직 입가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그도 어느 정도 패색이 짙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얼굴 전체에 짜증이 어려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녀석은 분명… 웃고 있었다.

“내가 이번 원정에 얼마를 투자했는지 아나?”

“그건 내 알 바가 아닌 것 같은데?”

“1억. 정확히 1억 골드가 들었다.”

“1억!”

천휘 자신도 돈이 많다고 자부했지만, 그랜저 녀석은 과연 뭔가 달랐다. 실패할지도 모를 원정에 무려 1억. 현실로 따지면 거금 1천만 원을 투자했다.

‘역시 미친놈이었어.’

보통 제아무리 게임을 좋아해도 그 정도 액수를 투자하진 않는다. 설령 그런 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아이템이나, 혹은 게임상에서의 돈을 갖기 위함이지, 고작해야 퀘스트 하나를 위한 투자금으로 쓰진 않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최후의 순간을 위해 조커 한 장 안 숨겨 뒀을 것 같아?”

“조커?”

순간 천휘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얼굴 전체에 피어오르는 자신감.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길함이 가득 밀려왔다.

쐐애액.

“흡!”

콰앙!

귓가에 들려오는 공기 찢기는 소리에 천휘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이윽고 천휘가 있던 자리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검게 그을렸다.

“당신은!”

“하하! 드디어 나타났군!”

“오래 기다렸군, 그랜저!”

아르니안 대륙에서 천휘에게 위협을 가할 정도로 강력한 벼락의 힘을 구사하는 유저는 극히 드물다. 벼락과 관련된 마법은 마탑에서 거의 팔지 않는 데다, 있다고 해도 라이트닝 볼트와 같은 낮은 레벨의 마법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락이 지닌 파괴의 힘을 추구하는 2명의 유저가 있었으니,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번개의 정령사 신선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뇌전의 기사 크롬웰이었다.

지존 12인 중 한 사람인 번개의 정령사 신선은 물론이거니와, 뇌전의 기사 크롬웰 역시 강력한 벼락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본래 직업은 마검사. 하지만 그는 마법 중에서도 오로지 벼락과 관련된 마법만을 익히고 구사했다.

그런 그에게 뇌전의 기사라는 명호를 붙여 준 마법은 바로 썬더 블레이드(Thunder Blade)라는 보조 마법이었다.

무려 4서클의 보조 마법인 썬더 블레이드의 위력은 여느 보조 마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계열의 보조 마법인 플레임 블레이드의 2배에 달하는 위력은 물론이고, 보조 효과로 적을 마비시키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사기 스킬!

그런 크롬웰이 그랜저의 손을 들어주며 화신의 홀에 나타난 것이다.

“정체를 숨기고 있던 녀석들이 또 있었군.”

“후후! 말했지 않나. 최후의 순간을 위해 조커를 숨겨 두었다고. 게다가 그 조커는 한 장이 아니야. 트럼프에서 쓰이는 조커 두 장, 모두 내가 가지고 있었지.”

휘릭.

“큭! 이번엔 어쌔신이냐? 가엘론!”

그랜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간을 격하고 작은 철침이 쏟아졌다. 마치 소나기를 연상시키듯 엄청난 철침의 숫자에, 천휘는 피하지 못하고 방어 마법인 가엘론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단하군. 내 싸우전드 레인(Thousand Rain)을 간단하게 막아내다니.”

“우습게보지 마라, 마리오. 날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녀석이야. 큭큭!”

“저 녀석도 꽤나 불쌍한 녀석이야. 어쩌다 널 적으로 만들어서는. 큭큭!”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랜저의 얼굴은 어느새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 자신이 조커라 칭했던 두 사내의 등장 때문이었다.

뇌전의 기사, 크롬웰. 그리고 어둠의 제왕이라 불리는 마리오까지.

지존 12인에 가장 근접했다고 알려진 랭커들이 최후의 순간을 위해 여태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이 등장하고 난 뒤에도, 뒤따라 대략 대여섯 명의 유저들이 화신의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그랜저가 원정대에 심어놓은 비밀 전력이었는지 모두 임페리얼 길드를 도와 천휘 일행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천휘야!”

“육시랄! 쪽수로 밀어붙인당깨!”

실력에서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대결이라면, 응당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들은 몇몇 유저를 제외하고 모두 근접 무기를 든 전사 유저들이었다. 공간이 제한되어 있는 화신의 홀인 만큼 당연히 전사가 많은 저들이 유리했다.

“이제 포기해라! 네 녀석은 현실에서고 가상현실에서고 날 이길 수 없어!”

천휘가 크롬웰과 마리오의 공격을 피하는 동안, 그랜저는 천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마치 독 안에 든 쥐가 밑바닥을 깨고 도망친 형국. 이제는 그 쥐가 동료 쥐들을 모아 고양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모두 모여!”

그랜저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천휘는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행들마저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천휘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휘익.

“모두 괜찮아?”

동료들이 전투에서 빠져나와 천휘의 주변으로 모였다. 저들도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마음이 없는지 순순히 동료들을 보내줬다.

“괜찮다. 그저 기력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야.”

“나도 그렇당깨.”

다행히 일행은 모두 무사했다. 아무래도 양측 모두 전력으로 부딪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천휘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일행을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봤다.

“다행이네. 자, 그럼 이제 너희는 전투에서 빠져.”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천휘의 황망한 발언에 일행은 모두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내 복수에 너희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어. 그러니 빠져라.”

“그것이 말이 된당가? 나는 그럴 수 없당깨!”

“블랙 말이 맞다.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는 끝까지 너와 함께할 거야.”

“그래, 천휘 동생. 우리는 동료잖아. 동료라면 무슨 일이든 함께할 권리가 있어.”

“나도 찬성이용! 천휘 오라버니는 내가 도울 거예용!”

“…….”

이미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전개였다. 하지만 천휘는 단호하게 동료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녀석에 대한 내 원한…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일이야. 나 역시 너희들이 위험에 빠지는 순간이 온다면, 반드시 구해낼 거야. 하지만… 난 전혀 위험하지 않아. 오히려 저 녀석과 녀석을 돕는 무리들을 부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을 정도야. 모두 미안. 이번 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울분을 토해내는 천휘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가 지금 얼마만큼 분노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껴지는 탓이었다.

“지지 마.”

그리고 이어지는 결정적인 미온의 한마디.

일행은 그녀의 말에서 진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천휘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주는 것이 그를 위한 것임을 그들도 어렴풋이 느낀 것이다.

“개자식. 꼭 마지막에 가서 멋있는 척은 다 해요.”

“그랑깨 우리 리더 아니겄어? 껄쩍찌근허게 밟지 말고 허벌라게 밟아줘야 한당깨!”

“어.”

동료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받으며 천휘는 결국 혼자 앞으로 나섰다. 그 걸음이 너무도 당당해 마치 사자가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나서는 듯했다.

“후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너 혼자 목숨을 내놓겠다는 거냐?”

홀로 나서는 천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죽고 싶어 발악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랜저 역시 그와 같은지 천휘를 이미 죽은 목숨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너, 그게 전부냐?”

“뭐? 그게 무슨 말이지?”

천휘의 난데없는 물음에 그랜저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네가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이게 전부냐, 이 말이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마치 고작해야 그 정도밖에 안 되냐는 식의 물음에 그랜저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딜 봐도 지금의 상황은 그랜저 쪽이 우세했다. 아니, 우세하다 못해 승패 자체가 이미 명확하게 나뉜 상황.

그랜저의 입장에서 볼 때, 천휘의 행동은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널 뒤쫓아 왔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냐? 지금의 상황에서도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 말이다!”

“네놈…….”

천휘의 말에 그랜저는 모험가 파오를 바라봤다. 탐색 스킬을 활성화해 주변에 또 다른 유저가 있는지 알아보라는 의미였다.

“없소, 마스터. 우리를 제외하곤 이 신전의 생존자는 전무하단 말이오.”

모험가 파오의 말에 그랜저는 조소를 흘리며 천휘를 바라봤다.

“거짓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보시지. 그렇게 뻔히 다 드러나는 거짓말 말고 말이야. 후후!”

“거짓말? 대체 무슨 거짓말을 말하는 거지? 네놈이 괜히 제 발 저린 것 아니었나?”

“끙.”

천휘의 말에 그랜저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천휘는 아군이 있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을 뿐이었다.

“네놈이 그렇게 농간을 부려 봤자 다 헛수고다. 네놈은 물론이고, 이 동료들까지 모조리 죽여주지! 그리고 이 신전에서 벗어나는 순간, 네놈이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가 몇 번이고 더 죽여 주마! 네놈이 이 게임을 확실하게 접을 때까지 말이야.”

“큭큭큭! 당연히 그래야지.”

“길원 전부를 동원해서라도 감히 우리 임페리얼 길드의 뒤통수를 친 저 연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어. 호호!”

그랜저의 폭언에 임페리얼 길원들이 맞장구를 치며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살기 어린 말에도 천휘는 물론이고, 나머지 일행들까지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저 자식들이 지금 뭐래?”

“나도 몰라. 그냥 죽기 직전에 발악하는 거라 생각하자.”

“불쌍하당깨. 죽을지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들은 너무도 불쌍하당깨.”

“천휘 오라버니, 살살 하세용. 저들이 아무리 미워도 너무 불쌍해용.”

임페리얼 길원들과는 사뭇 다른 천휘 일행의 호의적인 말들. 그러나 그들의 이런 말들이 저들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깔아뭉개고 있었다.

“저것들이! 마스터!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후후! 바보들은 겁이 없다고 하지. 저 머저리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쓸어버려!”

드디어 떨어지는 명령.

임페리얼 길드의 길원들은 그 짧은 사이에 기력을 회복했는지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천휘를 향해 쇄도했다.

“이제 나서도 좋아. 본보기로 내게 달려드는 놈들 모두 처치해.”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으하하하! 과연 주인이다! 최고의 타이밍이야!]

천휘의 명령에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강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달려드는 임페리얼 길원 셋을 한꺼번에 처치했다.

“무… 무슨!”

“뭐… 뭐지, 저들은?”

“분명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세 강시의 등장에 그랜저 측 유저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특히 탐색 스킬을 활성화해 주변을 확인했던 모험가 파오의 놀람은 더욱 컸다. 그의 탐색 스킬에 걸리지 않았다는 소리는, 눈앞에 나타난 이들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약삭빠른 놈.”

“누가 누구한테 약삭빠르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놈이 먼저 원군을 데려온 거 아냐?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원망은 마, 금방 해치워줄 테니.”

“누가 누굴 해치운다는 거냐!”

천휘의 도발에 그랜저의 얼굴은 다시 일그러졌다. 그 역시 천휘의 앞에 선 세 인영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탓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야겠군.”

“걱정 마라, 그랜저. 너에겐 우리가 있질 않느냐.”

그랜저가 뭘 염려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뇌전의 기사 크롬웰과 어둠의 제왕 마리오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섰다.

“나도 돕겠어.”

두 사람과 함께 철혈의 전사 레만도 함께 앞으로 나섰다. 현재 그랜저가 운용할 수 있는 최강의 카드들이 모두 나선 것이다.

[저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겠군.]

[으하하하! 송사리들이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주인님, 맡겨만 주십시오. 단 일합에 녀석들을 먼지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하지만 세 강시들은 저들이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천휘에게 잘 보일 수 있는지가 그들에겐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카이젠, 네 녀석이 나서서 저들을 해치워라. 단, 네 말대로 단 일합에 해치워야 한다.”

[충!]

천휘의 속셈은 불을 보듯 뻔했다. 소드엠퍼러인 카이젠을 이용해 압도적인 무력을 그랜저에게 보여 주고자 함이었다. 감히 항거할 수조차 없는 카이젠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녀석은 더 이상 천휘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미친놈.”

“감히 우리를 단 일합에 해치워?”

“구라도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걸 알려 주지! 하앗!”

천휘가 카이젠에게 내린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철혈의 전사 레만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그의 검이 카이젠을 향해 쇄도했다.

[소드마스터를 갓 벗어난 신출내기로군.]

지고무상한 경지에 도달한 카이젠으로서는 그랜드 소드마스터인 레만조차도 신출내기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카이젠은 보폭을 늘리는 것만으로 레만의 공격을 피해냈다.

“어찌 저런!”

간결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카이젠의 회피 동작에 그랜저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것은 크롬웰과 마리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그들은 카이젠이 어떻게 레만의 공격을 피해냈는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허깨비처럼 몸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어!”

“칼의 궤적이 순간 흐트러졌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후.]

세 유저의 반응에 카이젠은 웃으며 크롬웰과 마리오에게 다가갔다. 레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움직임이었다.

“난 아직 지지 않았다! 으아아앗!”

“어떤 술수를 부린지 모르겠다만, 내겐 통하지 않아!”

“난 어둠을 지배하는 어둠의 제왕 마리오다! 하앗!”

무슨 연유에서인지 세 사람이 한꺼번에 카이젠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만 혼자 나서며 일대일 대결을 펼칠 것만 같았던 그들이 순식간에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셋이 힘을 합한다면!’

그들은 직감적으로 개개인의 힘으로는 카이젠을 상대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든든한 동료들과 합공을 펼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카이젠은 천휘조차 그 능력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최강의 강시였다.

[라그나 썬더(Ragna Thunder)!]

카이젠의 레이피어가 드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레이피어 끝이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오망성을 만들어냈다.

콰과과광!

“끄아악!”

“커허억!”

“으아아악!”

오망성이 그려짐과 동시에 주변으로 뇌전의 다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5서클 전격 마법인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에 비견되는 끔찍한 위력의 뇌전. 제아무리 트리플 마스터인 3명이라 해도 그 위력을 버텨 내는 것은 무리였다.

“…….”

“…….”

과연 천휘의 지시대로 단 일합 만에 대결이 끝났다.

뇌전의 기사 크롬웰과 어둠의 제왕 마리오, 그리고 철혈의 전사 레만은 그 화려한 위명에 걸맞지 않게 카이젠이 만들어낸 뇌전의 다발을 버티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숨이 멎었다.

그 끔찍하고도 참혹한 광경에 그랜저는 물론이고, 임페리얼 길드 전원은 숨죽이며 오연히 서 있는 카이젠을 바라봤다.

[또 있는가.]

“…….”

카이젠이 흘려 내는 물음에 그랜저의 입이 꾹 닫혔다. 천휘와의 전투로 인해 아직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머지 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크롬웰이나 마리오보다 강할 리가 만무한 탓이었다.

“그랜저.”

“…이놈!”

카이젠이 전장을 압도하자 천휘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양옆에는 오베른과 로렌이 함께하고 있었다.

“네놈의 머리로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말이야, 세상에는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아. 네 녀석이 이번 원정에 천문학적인 골드를 쓴 것도 알고, 그 허접한 길드를 꾸리는 데 어느 정도의 돈을 썼는지도 알고 있지. 그러나 명심해둬라, 그랜저! 네 녀석이 이 『오벨리스크』 내에서 이뤄낸 모든 성과를 내가 모조리 분쇄시켜 버릴 거라는 걸! 오늘의 일은 그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

얼굴까지 붉히며 역설하는 천휘를 보며 그랜저의 눈빛이 깊게 침잠했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신!”

“…서 선생님.”

“그렇게 부르지 마! 난 그저 천휘일 뿐이니까!”

천휘가 가리킨 방향에는 헤라가 서 있었다. 천휘로 하여금 복수의 원동력이 되었던 그녀가, 이제는 복수의 대상이 되어 그 앞에 서 있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당신을 좋아했어. 당신의 순수함을 좋아했고, 당신의 청초함을 사랑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당신은 그저 내 원흉의 연인일 뿐이야. 그리고 더불어 나로 하여금 세상의 비정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여인이기도 하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저 녀석은 필요하다면 연인인 당신마저도 내칠 정도로 간악한 녀석이니까. 이건 한때 당신을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해주는 말이니까 새겨듣도록 해.”

“빌어먹을! 어디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뭐 하는 거야! 저 녀석을 쳐! 화신의 신기는 반드시 내가 차지해야 한다!”

그랜저의 명령에도 임페리얼 길원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카이젠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더 이상 싸울 용기가 없는 모양인데? 좋아. 내 기회를 주지. 네 녀석이 목숨을 내놓는다면, 네 길원들은 살려 주도록 하지. 마스터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겠지?”

천휘의 달콤한 제안에도 그랜저는 길원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당장 움직이지 못해! 이번에 내가 투자한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화신의 신기를 얻지 못하면, 네놈들에게 돌아갈 수고비도 몽땅 사라지는 줄 알아!”

그랜저의 분기탱천한 목소리에 그제야 임페리얼 길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카이젠에게 위축되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렌! 모두 사살해!”

[으하하하!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

천휘의 지시에 로렌이 화살에 무형의 화살을 메겼다. 마나로 이루어진 총 6발의 화살.

하지만 로렌은 그 화살을 바로 쏘아내지 않고 악마의 활 힐프리거에 더욱 막대한 마나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데몬 클로(Demon Claw)!]

로렌의 외침과 함께 6발의 화살이 악마의 발톱이 되어 임페리얼 길원들에게로 날아갔다.

악마의 발톱은 주저하고 있는 그들의 목 주변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그들의 목을 가슴에서 뜯어내버렸다.

[으하하하! 이 로렌 님의 활 솜씨가 어떠냐!]

카이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의 공격에 길원들을 잃어버린 그랜저의 표정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빛은 굶주린 늑대의 그것처럼 표독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네 녀석, 정체가 뭐냐.”

“후후! 왜? 이제야 내가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달은 거냐?”

“저들은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네크로맨시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죽은 자가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산 자의 땅을 거닐고 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랜저의 물음에 천휘가 비아냥거리며 대답했다.

“네 녀석이 이 『오벨리스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지금? 후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모양인데. 이거 벌써 네 녀석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큭큭!”

천휘에게 강시의 정체를 밝힐 의무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녀석이 세 강시의 절대적인 강함을 경외시하며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천휘의 공격을 기다리게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오늘 일, 네놈이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얼마든지.”

천휘의 마음을 읽은 듯 그랜저는 쉽게 단념했다. 더 이상 천휘에게서 캐낼 것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대로 우리가 물러설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언젠가 반드시 당신을 찾아내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겠어요!”

“후후! 그럴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천휘는 이미 마음속에서 헤라를 지웠다. 그녀의 양면적인 모습과 행동에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뻐하고 슬퍼했지만, 그것은 과거의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스윽.

어느새 천휘에게 다가와 미온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헤라의 말에 상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후후! 걱정 마. 천휘는 심약한 영완과 다른 존재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미온의 격려를 뒤로하고 천휘는 드디어 강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기만 해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랜저와 헤라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또 보도록 하지.”

“개자식…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가 네놈을 죽여 버리겠어!”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해보라니까 그러네. 저 둘을 해치워!”

그랜저의 악독한 저주를 마지막으로 천휘가 세 강시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세 강시가 동시에 움직이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랜저와 헤라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천휘는 회색으로 물들어가는 둘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내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해라…….”

둘에 대한 원한은 단지 이 정도에 그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고작 여자에게 채였다고 이러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었다. 현실의 원한을 고작 게임에서 풀려고 하는 것이 소심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휘는, 아니 영완은 그런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다. 남들은 알 수 없었다. 3년 동안 한결같이 바라보던 짝사랑이, 그저 자신을 유희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그 비참함을.

지금 이 순간, 천휘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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