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장 화신의 신기 (51/82)

제10장 화신의 신기

우르릉.

콰앙.

“으아아악!”

누군가 기관을 밟았는지 일행의 후미에서 폭음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서너 명은 되는 듯했다.

“제길! 뭐가 이렇게 기관이 많은 거야? 파오, 당신! 대체 기관을 해제하고 있긴 하는 거야!”

그랜저는 모험가인 파오를 다그쳤다.

파오는 10대 모험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랜저가 거액을 주고 이번 원정에 끌어들인 인물이었다.

“빌어먹을! 죽도록 기관을 파헤치고 있는 것 안 보이는 거요? 나는 분명히 최선을 다했소! 하지만 나조차도 모두 파훼할 수 없을 만큼 이 통로의 기관은 은밀하고 첨예하게 깔려 있소. 정 나를 못 믿겠거든 당신이 직접 나서시오!”

“…쳇.”

모험가 파오의 노고는 그랜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인지 통로의 수많은 기관들이 임페리얼 길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선두에서 무사히 지나쳤다고 해도 후미에서 발을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기관이 발동되기 십상이었다.

특히 30분 전에 어떤 유저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지정된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연거푸 밟았다가 통로 좌우에서 쏟아지는 화염 세례에 열댓 명이 목숨을 잃는 불상사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현재 살아남은 임페리얼 길원들은 고작 20명 남짓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 앞사람과 간격을 유지해! 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화신의 신기를 손에 넣어야 한다!”

“…….”

그랜저의 격려에도 길원들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피로가 극한에 도달한 탓이었다.

“제길! 이번 원정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500골드의 보상금과 함께 길드의 간부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반드시 살아남아라!”

“우오오오! 500골드!”

무려 500골드란다.

과연 이기적이고 돈 밝히는 그랜저가 이끄는 길드의 일원들답게 그들 역시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족속들이었다.

그렇게 그랜저는 길원들을 다독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데브라! 악마들이 우리를 물어뜯는다! 어떻게 된 거야?”

“미안!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악마를 부리는 탓에 제어가 안 되고 있어!”

“허허, 이거 큰일이구먼. 화마의 전사들이 너무 많이 살아남았어.”

신선 일행이 지나고 있는 통로는 다른 통로에 비해 최소 5배는 큼직했다. 너비는 물론이고 천장의 높이도 높았다.

이러한 통로를 고른 것은 아렌이었다. 남자는 자고로 크고 굵은 것이 최고라는 이유 아닌 이유 때문이었다.

이 통로에는 따로 기관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레벨 300대의 화마의 전사라는 이름의 몬스터가 가득할 뿐이었다.

평범한 레벨 300대의 몬스터라면 신선 일행이 고전할 이유가 없었다.

아렌은 레벨 397로서 곧 포 마스터의 경지를 넘보는 사내였고, 데브라와 신선 역시 지존 12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실력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따르는 5명의 유저들도 하나같이 발군의 기량을 가진 이들이었다. 문제는 화마의 전사들에게 물리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오러를 뿜어낼 수 있는 강자였지만 화마의 전사들 역시 그리 녹록지는 않은 데다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을 정도로 숫자가 많아 마나의 한계가 있는 신선 일행으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대로는 힘들겠어! 강행 돌파만이 살길이오! 모두 내 뒤를 따르도록 합시다! 하앗, 야수 본능!”

최강의 사내 아렌이 최강의 비기 중 하나인 야수 본능 스킬을 꺼내들었다.

호랑이의 민첩함과 곰의 완력, 그리고 멧돼지의 저돌적인 돌파력을 온몸에 깃들게 해서 순간적으로 몇 배에 달하는 능력을 갖게 해주는 최강의 보조 스킬, 그것이 야수 본능이었다.

“허허, 그것이 살길이로고!”

최강의 사내가 꺼내든 최후의 카드.

그것으로 인해 신선 일행도 점점 화신의 신기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똥개, 이제 어디로 가면 되냐?”

컹컹.

“왼쪽? 알았어.”

다른 유저들이 힘들게 화신의 신기에 다가가고 있는 반면, 천휘 일행은 아주 편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오면 먼저 깜둥이들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다. 기관이 많이 장치된 길은 피했고, 몬스터들이 즐비한 길도 피했다.

오로지 안전 제일주의를 앞세워 쉽고 편안한 길로만 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천휘 일행이 다른 일행에 비해 크게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천휘 일행은 그저 묵묵히 똥개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깜둥이들, 이쪽으로 가봐.]

천휘는 영성으로 깜둥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깜둥이 서넛이 똥개가 가리킨 통로로 들어섰다.

“흐음, 부서졌나?”

깜둥이들이 통로로 들어서고 나서 10분이 흐르자 녀석들과의 영성 연결이 끊어졌다.

한마디로, 녀석들이 역소환되었다는 의미였다.

“이거 이쪽은 위험한 통로인가 본데?”

“그러면 어떡해! 다른 통로를 알아봐야 하나? 똥개에게 다시 명령을 내려 봐.”

“그럴까?”

로빈의 조언에 천휘는 이전처럼 다시 똥개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똥개는 요지부동이었다. 무조건 처음의 길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이전에는 다른 길도 말했었는데.”

“천휘 동생, 아무래도 이 통로 앞에 그 화신의 신기가 잠들어 있는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때문에 똥개가 이 길만 고수하는 것이고.”

“맞당깨요! 똥개시키가 저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랑깨요.”

“흐음, 그런가?”

이미 화신의 신전 내부에서 헤맨 지도 닷새나 흘렀다. 그동안 닌자거북들과 똥개를 세워놓고 로그아웃과 로그인을 반복하며 통로를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종착점에 거의 다다른 듯했다. 물론 이 앞에 있을지 모르는 마지막 난관을 극복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길을 따라가야지. 모두 긴장해. 깜둥이들이 순식간에 당했어. 분명히 뭔가 있을 거다. 하린 누님은 탐색을 멈추지 마세요.”

“알았어, 동생.”

똥개를 필두로 일행은 드디어 통로에 진입했다. 이제까지처럼 까마득한 어둠이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일행은 천천히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일행의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정적이 통로 안에 가득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둠과 정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천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컹컹컹컹.

약 10분간의 정적을, 똥개가 깼다.

전방에 뭐가 있는지 맹렬하게 짖어대고 있었다.

“누님!”

“없어!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아! 이런 경우라면…….”

“누님의 몬스터 탐지 스킬로도 발견할 수 없는 몬스터!”

일전에도 이와 같은 경험이 있었다.

그레이트 웜과 마주쳤을 때도 하린은 녀석의 존재를 탐지해낼 수 없었다. 그나마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는 녀석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을 때는 녀석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다.

컹컹컹컹.

일행이 경악하고 있는 동안 똥개의 짖는 소리가 더욱 커져만 갔다. 마치 겁에 질린 듯 녀석은 납작 땅바닥에 엎드려 전방을 향해 맹렬히 짖기만 했다.

“카멜!”

“알았다!”

일행 중 가장 방어력이 높은 카멜이 선두에 섰다.

천휘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똥개를 역소환하고 자신도 앞으로 나섰다.

“닌자거북들! 녀석을 쳐라!”

[충!]

천휘는 미지의 존재에게 미리 타격을 입힐 생각에 닌자거북들을 동원했다. 녀석들의 은신술이라면 상대가 무엇이건 간에 꽤나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였다.

“큭!”

“왜 그래?”

“닌자거북들도 당했어.”

“뭐라고?”

“젠장! 대체 뭐가 있는 거야?”

닌자거북들은 예전에 천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을 만큼 뛰어난 암습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이 당했다는 것은 상대가 그들의 암습 따위에는 아무렇지 않게 대응할 수 있는 막강한 녀석이라는 소리였다.

“후우, 모두 마음을 가라앉혀.”

미지의 상대로 인해 일행의 신경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다.

천휘는 그 점을 우려하며 일행에게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카이젠이나 오베른을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녀석들은 최후의 순간에 쓰일 비장의 카드. 지금 눈앞의 난관은 우리 힘으로 해결한다.’

사실 카이젠이나 오베른이 나선다면 눈앞의 상대가 무엇이건 순식간에 베고 넘어갈 수 있다. 녀석들은 그만큼 대단했고 천휘 자신이 아는 한 최강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휘 자신과 일행의 실력 역시 부족하지 않았다. 강시들이 없어도 협곡을 건너왔고, 그레이트 웜을 처치한 자신들이 아니던가.

“미온! 축복 마법!”

“응! 남자의 힘은 정력! 정력에는 비아그라!”

[띠링! 10분간 공격력과 방어력이 10% 상승합니다.]

[띠링! 10분간 공격속도와 이동속도가 10% 상승합니다.]

“그런뎅 대체 이건 왜 나에게도 해당이 되는 거예용? 전 비아그라 쓸 일이 없는뎅.”

“…그냥 그러려니 해라.”

“큭큭.”

“호호.”

미온의 마법 주문을 들은 눈송이는 자신에게도 축복 효과가 걸어지는 것이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일행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금 전 천휘의 격려보다도 훨씬 훌륭한 효과였다.

“간다!”

천휘의 지시에 일행이 일제히 전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뤄보건대 기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뭐가 있다!”

“좋았어! 내가 몸빵할게! 카오스 미러!”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자 희미하게 실루엣이 전방에 그려졌다. 하지만 아직은 거리가 제법 있는지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었다.

“어라? 조금씩 통로가 넓어지는데?”

그 순간, 로빈의 말대로 통로가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천휘 동생! 빛이야! 빛이 보여!”

하린의 말대로 빛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빛이라고 하기에는 그 밝기가 너무도 희미했다.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어!”

“강행 돌파다!”

일행은 발에 박차를 가하며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점차 희미했던 빛과 실루엣이 일행의 눈에 들어오며 실루엣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지기 시작했다.

“드, 드래곤!”

“아냐, 달라! 저건 드래곤이 아냐! 저건!”

“레드 드레이크!”

통로는 어느새 비약적으로 넓어져 있었다. 천장 역시 높아지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 통로의 끝에 거대한 레드 드레이크 한 마리가 우두커니 버티고 서 있었다.

일행이 발견했던 빛은 레드 드레이크의 동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의 화염이었다.

크워어엉!

“우욱!”

“모두 피해!”

“젠장, 움직일 수가 없어!”

레드 드레이크의 포효와 함께 녀석의 입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드래곤의 아종이기에 브레스를 뿜어낼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천휘였기에 곧바로 일행에게 피하도록 지시했지만 이미 일행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레드 드레이크의 포효로 인해 일시적으로 스턴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크워어엉!

푸슈우욱.

“빌어먹을!”

일행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레드 드레이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브레스를 내뿜었다. 천휘의 강시인 파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열의 화염 브레스가 일행에게 쏟아진 것이다.

“림다일!”

이대로 가다가는 일행이 모두 전멸할 상황.

천휘는 지체하지 않고 림다일을 이용해 앞으로 빛살처럼 나아가 일행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이 지닌 최강의 방어 스킬을 시전했다.

“가엘론!”

천휘의 팔목에 차인 팔찌 가엘론의 수호자에서 빛이 뿜어지며 그의 전면을 보호했다.

콰아아앙!

“끄윽!”

레드 드레이크가 뿜어낸 고열의 화염 브레스가 천휘가 생성한 가엘론의 막에 부딪혔다.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

하지만 천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자신의 마나를 불태워 그 마나만큼의 방어력을 지닌 방어막, 가엘론.

천휘는 순식간에 500,000을 상회하는 마나가 절반으로 떨어지는 기이한 경험을 겪었다. 생명력이 깎여 나가는 것도 몇 배는 더한 어지럼증이 뇌를 자극했다.

‘질 수 없어!’

자신이 무너지면 뒤에 있는 일행도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때문에 천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띠링! 마나가 10% 이하로 떨어지셨습니다.]

겨우 3초가 흘렀건만 벌써 마나가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500,000의 마나 중 450,000에 달하는 마나가 순식간에 깎여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나는 기하급수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급기야 마나가 1백 단위로 떨어졌고, 거기에 더해 천휘의 이성도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천휘야! 우리가 도와줄게!”

그 순간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레드 드레이크의 포효로 인해 스턴 상태에 빠져 있던 일행이 스턴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홀리 실드!”

“카오스 실드!”

천휘가 펼친 가엘론의 방어막 뒤로 미온의 홀리 실드와 카멜의 카오스 실드가 펼쳐졌다.

“세상 모든 파멸을 막아낼 수 있는 절대의 마나여, 파멸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앱솔루트 실드(Absolute Shield)!”

거기에 더해 로빈이 펼친 7서클 방어 마법 앱솔루트 실드까지 펼쳐졌다.

빠지직.

“끄윽! 막아야 해!”

“버티고야 말겠어!”

“이제는 우리가 널 지킬 때야!”

결국 가엘론의 방어막이 깨지며 천휘도 기절하고 말았다. 급격한 마나 소모로 인해 뇌가 너무 커다란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하지만 천휘는 죽지 않았다.

엄청난 충격으로 입가에 선혈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방어막을 유지시킨 동료들의 의지 덕분이었다.

화르륵.

“됐다!”

“막았다!”

이윽고 레드 드레이크가 브레스를 뿜어내는 것을 멈췄다.

무려 10초간 브레스를 뿜어낼 수 있는 드래곤과 달리 드레이크는 고작해야 5초 정도가 최고였기 때문이다.

즉, 천휘는 겨우 5초 만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 나쁜 도마뱀 시킹! 이거나 먹어랑! 하쿠나 마타타!”

천휘와 동료들이 번 시간을 활용한 눈송이가 자신의 최고 마법을 펼쳐 냈다.

또다시 몇백 골드짜리 상급 마나석이 소모됐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작 상급 마나석으로 레드 드레이크를 처치할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콰과과과광.

크아아앙!

지하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빙산.

지난번과 같이 마나 증폭과 마나 드레인을 통해 최강의 위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여전히 고대 마법 하쿠나 마타타의 위력은 대단하기 짝이 없었다.

저 엄청난 레드 드레이크조차 하쿠나 마타타가 연출해낸 얼음 빙산의 날카로운 봉우리에 뱃가죽부터 머리끝까지 꿰뚫리고야 말았다.

“이겼다!”

“역시 고대 마법!”

“천휘야!”

레드 드레이크를 처치했다는 기쁨도 잠시, 일행은 곧바로 천휘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천휘야, 괜찮냐?”

“천휘 동생! 괜찮으면 말을 해봐!”

“오라버니, 정신 차리세용!”

자신들을 위해 목숨 걸고 나선 천휘의 행동에 일행은 가상현실인 것도 잊고 거칠게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크윽, 나 안 죽었거든? 그렇게 흔들지들 좀 마!”

“오라버니!”

“살았어! 다행이다!”

이내 천휘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눈을 뜨자 일행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내 천휘의 입에서 나온 황당한 말에 모두의 얼굴은 벙찌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아이템은? 레드 드레이크가 드롭한 내 아이템은!”

“…….”

“…….”

“…네가 짱 먹어라.”

천휘가 정신을 추스르는 동안, 일행은 그의 바람대로 레드 드레이크가 떨어트린 아이템을 회수했다.

레드 드레이크의 가죽으로 만든 유니크 허리띠 하나와 상급 마나석, 그리고 300골드 남짓한 돈이 전부였다.

“후우, 이 정도가 어디야. 아무튼 모두 고생했어.”

“너 다 가져라, 이 독종 새끼야! 그 와중에도 아이템만 찾고 있냐!”

“후후, 부자일수록 더욱 알뜰해야 살아남는 거야. 부자는 3대 안 간다는 말 몰라?”

“난 어찔 때 보믄 점마가 참말로 무섭당깨! 천하의 놀부도 니맨큼은 아니었을 것이여!”

“마음대로 생각해라.”

일행이 자신을 향해 핀잔을 늘어놓는 동안, 천휘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바닥까지 떨어진 마나를 채우는 데 전념했다.

각종 아이템들로 인해 마나 회복속도가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빠른 그였지만, 500,000이라는 경이로운 마나량 때문에 꽉 채우는 데에 제법 시간이 소요됐다.

“자, 잔소리들 말고 이제 진짜 화신의 신기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가자!”

끄덕끄덕.

천휘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수에 찬 눈으로 레드 드레이크가 가로막고 있던 통로 저편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레드 드레이크로 인해 일행이 볼 수 없었던 찬란한 황금의 빛무리가 뚜렷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화신의 신기.

드디어 그 찬연한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챙챙.

“포기하시지, 아렌! 화신의 신기는 내 거다!”

“아이템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나? 먼저 차지한 자가 임자지!”

“이 자식이!”

화신의 동상이 있는 화신의 홀에서는 이미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랜저가 이끄는 임페리얼 길드와 아렌이 이끄는 파티가 펼치는 전투였다.

화신의 홀 내부의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아직 다른 파티들은 이곳에 다다르지 못한 듯했다.

그랜저와 아렌은 생사대적을 만난 듯 치열하게 격돌했다. 그랜저의 소울 소드와 아렌의 클로가 서로의 급소를 노리며 빠르게 날아들었다.

따로 스킬을 쓸 겨를도 없었다. 그만큼 둘의 전투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허허, 이런다고 해결이 되겠는가? 두 사람 다 그만 하게!”

그 와중에도 신선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려는 듯 더욱 악랄한 수를 펼치며 상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젠장! 알무니아, 뭘 보고 있는 거야? 당장 저들을 제압해!”

결국 아렌과의 대결을 끝맺지 못한 채 그랜저는 쪽수로 밀어붙일 요량이었다.

임페리얼 길드는 아직도 20명 남짓 남아 있었지만 아렌 일행은 고작해야 7명 남짓에 불과했다.

“이런 비겁한 새끼들! 다 덤벼! 내 악마들의 먹이가 되고 싶다면!”

“흥! 네년의 악마 따위로 뭘 한다는 거야? 네년의 상대는 나다!”

데브라와 헤라가 맞부딪쳤다.

여러모로 헤라는 데브라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데몬 위치와는 상극인 사제 직업을 가지고 있는 덕에 어느 정도 결착을 낼 만했다.

“신선! 당신은 내가 상대하지!”

“허허, 어린 친구의 용기가 부럽군. 기꺼이 내가 상대해주지!”

번개의 정령사 신선은 폭염법사 알무니아와 대결을 펼쳤다. 알무니아로서는 신선을 상대하는 것이 역부족이었지만 대지 계열 마법을 6서클까지 익힌 또 다른 마법사의 지원을 받아 그와 대등한 대결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유저들이었다.

레벨이나 능력은 아렌 일행이 더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해도 3 대 1의 전투를 압도할 만큼 뛰어나진 않았다.

결국 겨우 10분 만에 아렌 일행은 아렌과 데브라, 신선을 제외하고 모두 전멸하는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에 반해 임페리얼 길드는 고작 서너 명만이 목숨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랜저!”

“후후! 이제야 사태 파악이 되는 모양이지?”

동료들이 모두 목숨을 잃자 아렌은 분노했다.

“하앗! 야수 본능!”

“흥! 소울 스피릿(Soul Spirit)!”

아렌이 최강 비기인 야수 본능을 전개하자 그랜저 역시 소울 스피릿을 전개하며 맞섰다. 전사의 영혼을 빙의시켜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보조 스킬이었다.

야수와 유령의 격돌.

한쪽은 끊임없이 공격을 퍼붓고, 한쪽은 침착하게 방어해내는 탓에 둘의 대결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렇게 5분이 흐르고, 쥐도 새도 모를 만큼 은밀하게 모험가 파오가 수리검을 허공에 내던졌다.

‘붉은 반점 두꺼비의 점액’이라는 맹독이 묻은 수리검이었다.

치익.

“큭! 비겁한!”

모험가 파오가 던진 수리검은 아렌의 허벅지에 박혀 들었다. 그랜저와 생사를 넘나드는 접전을 펼친 탓에 수리검이 날아드는 것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흥! 이런 상황에서 비겁한 게 어디 있어? 잘 가라, 아렌! 다음에는 좀 더 재미나게 놀아보자고!”

“내가 질 줄 아느냐? 크아아악! 수왕의 권능!”

아렌은 최근에 익힌 스킬까지 전개하며 그랜저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모험가 파오를 비롯해 궁수 유저 한 명이 계속해서 견제하는 탓에 그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져만 갔고, 결국 그랜저의 소울 소드가 그의 심장을 꿰뚫으며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렇게 최강의 사내라 불리던 아렌이 죽자 곧이어 신선과 데브라도 수적 열세를 이겨 내지 못하고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으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화신의 신기를 얻는 데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아렌 일행을 처치한 그랜저는 화신의 홀이 떠나가라 대소를 터트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임페리얼 길원들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비쳤다.

드디어 이 험난했던 여정의 마침표를 자신들이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후후, 드디어 끝난 건가?”

“누구냐!”

“나? 네놈을 엿 먹일 구원자이시다.”

“네, 네놈은!”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던 그랜저에게 찬물을 끼얹으며 한 사내가 화신의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내의 얼굴을 바라본 그랜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안녕, 시영아?”

“서! 영! 완!”

- 6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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