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화신의 신전
피그미족과의 전투는 그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족장 피그미가 천휘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는 하나 피그미들은 타고난 사막의 전사들답게 쉽게 와해되지 않았고, 그 이후로 치열한 혈투를 펼친 끝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녀석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피그미들을 물리친 대가는 컸다.
4백 명 정도 살아남았던 원정대는 이제 겨우 150명만 남았다. 그들 대부분이 아르니안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랭커들이라 해도 그 피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제 끝인가?”
“아직도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데…….”
“이런 전투를 또 얼마나 해야 할지…….”
화신의 사막은 모든 것이 베일에 감춰진 미지의 땅이다.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무작정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욕 저하.
원정대에게는 지금 의욕을 고취시켜 줄 계기가 필요했다.
“원정을 중지하라!”
“맹목적인 원정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임페리얼 길드 개새끼들! 네놈들의 사악한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우리를 방패막이로 삼고 무사할 것 같으냐!”
유저들은 결국 봉기를 일으켰다.
원정을 주최한 임페리얼 길드와 그랜저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그 봉기의 중심에는 미온이 있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이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여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느새 미온은 원정대 유저들에게 여신으로 통하고 있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떡과 기력 회복 물약을 보급해주고 있는 그녀야말로 여신이라 불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온에 의해 오아시스가 잠잠해지자 임페리얼 길드의 텐트가 모여 있는 곳에서 임페리얼 길드의 유저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그들 뒤에는 그랜저가 돈으로 고용한 용병들도 함께 있었다.
70 대 80의 대치.
숫자상으로는 임페리얼 길드 쪽 유저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임페리얼 길드 측에는 대략 10명 정도의 유저가 물자를 보급하는 상인 유저였기에 숫자는 비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들이십니까!”
미온 측 유저들이 불만을 터트리자 결국 그랜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헤라와 알무니아가 함께 서 있었다.
“이분들을 대표해서 제가 나섰어요. 저희는 이제 맹목적인 원정에 신물이 났답니다. 이번 원정을 주최하고 기획한 임페리얼 길드 측에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요.”
“옳소!”
“여신님의 말이 옳다! 어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해보란 말이다!”
미온의 말을 시작으로 하여 유저들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개척이라는 미명하에 움직였던 자신들의 우스운 꼬락서니가 그들을 더욱 흥분시키고 있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원정은 화신의 사막을 개척해서 새로운 사냥터를 만들고, 더 나아가 대륙에서 최초로 4대 금지를 개척했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집어치워라, 그랜저.”
“앗! 저 사람은 최강의 사내 아렌이다!”
“여태 조용하던 그가 웬일이지?”
입에 발린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그랜저의 말을 끊으며 아렌이 나섰다.
그의 뒤에는 데몬 위치 데브라와 번개의 정령사 신선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 식의 말투는 용납하지 않겠다, 아렌!”
아렌의 격한 말투에 그랜저 역시 지지 않고 강하게 맞받아쳤다.
두 사람은 『오벨리스크』 초창기부터 유명한 라이벌로서 지금껏 몇 차례 결투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아렌이 그랜저를 이겨 왔다.
한마디로, 그랜저에게 있어 아렌은 앙숙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흥! 내 속셈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뭘 꾸미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뭔가를 알고 있다는 투의 아렌과 그런 일은 없다고 반박하는 그랜저.
유저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경청했다.
“네놈이 원하는 것은 개척 따위가 아냐! 네놈이 원하는 것은 화신의 신기가 아니더냐!”
“화신의 신기(神技)? 그게 뭐지?”
“역시, 뭔가 있었어! 빌어먹을, 임페리얼 길드 새끼들! 지들끼리만 그걸 독식하려 했다 이거지?”
“아, 글쎄, 화신의 신기가 뭐냐니까!”
“나도 몰라!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그게 엄청나다는 건 알 수 있잖아!”
최강의 사내 아렌이 내뱉은 말에 유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벌써 임페리얼 길드와 그랜저를 향해 욕설부터 내뱉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지금껏 냉정함을 유지해오던 그랜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피도 눈물도 가지지 못한 여인, 헤라가 붙어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화신의 신기라니, 우린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말도 안 되는 억측으로 우리를 이상하게 몰아가지 말아줘요.”
“호호. 여전하구나, 헤라. 그 되지도 않는 똥배짱은.”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데브라. 죽고 싶지 않으면 찌그러져 있어라.”
헤라와 데브라의 제2대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쫙 돋게 만들 만큼 불꽃이 튀었다.
역시 싸움은 여자들의 싸움이 가장 무섭고 표독스러웠다.
그러나 두 집단을 중재하고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신선이었다.
“허허, 모두 진정들 하시게. 이렇게 화를 낸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랜저, 내 하나만 묻겠네. 정녕 개척이란 이름으로 이번 원정을 꾸렸다고 자신하나?”
“당연합니다! 저는 이번 원정에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은 일체 가지지 않았습니다.”
신선은 아르니안 대륙에서도 가장 명성이 높은 연장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다른 유저들도 한 수 접어주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였다.
“허허, 자네는 참으로 야욕이 많은 사람이야. 더불어 거짓도 진실로 바꾸는 힘이 있지. 자네의 목적은 그저 원정이 아니야. 화신의 신기를 얻기 위함이지.”
“아무리 신선 님이시라 해도 그런 모욕은 참을 수 없습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걸 보게.”
“그, 그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그랜저는 신선이 내비친 붉은 구슬과 열쇠 하나에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화마의 구슬이라는 것이지. 더불어 이건 화마의 열쇠이고 말이야.”
“말도 안 돼! 그건 가짜야! 진짜는 여기에… 헙!”
“허허, 걸려들었군그래.”
그랜저는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 알고 있었다. 때문에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자네는 이걸 가짜라 생각하겠지만, 이건 진짜네. 내 지인도 자네와 똑같은 퀘스트를 받았더군. ‘화신의 부활’.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그걸!”
“허허, 그러니 내가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 아니겠는가. 자네에게 그 물건을 넘겨줄 수 없어서 말이야. 자네와 같이 야심이 가득한 인물에게 화신의 신기를 넘길 수야 없겠지.”
신선과 그랜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저들 중 한 사람이 못마땅한 듯 소리쳤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 둘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이거로군. 한 놈은 원정대를 기획해서 우리를 끌어들였고, 한 놈은 저 자식의 생각을 미리 읽고 있으면서도 그걸 잠자코 보고만 있었고 말이야. 아나, 씨뱅이들이! 너희가 뭔데 우리를 가지고 놀아!”
“이런 씨뱅이들! 뒈졌다고 복창해라!”
유저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무섭게 타올랐다.
하지만 이내 한 사람의 중재로 그들은 타오르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잠시만 화를 가라앉히세요!”
“하지만!”
“제가 저들과 협상해볼게요!”
“여신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역시 배고픔을 구제해준 이의 고마움은 대단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와 같았던 유저들의 군중심리가 그새 수그러든 것을 보면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그 ‘화신의 부활’이라는 퀘스트, 공유해요. 저희 모두와!”
“허허.”
“미친!”
미온의 말에 신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반대로 그랜저는 쌍욕부터 내뱉었다.
이 한 번의 반응으로 미온은 그랜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쳐다보지 않고 신선만 바라봤다.
“신선 님께선 그 지인에게 화신의 부활 퀘스트를 공유받으셨겠지요? 더불어 그 지인은 당연히 이번 원정에 함께하고 있을 테고요. 우리 다 같이 공유해요. 이번 원정은 여러분만의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것이랍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미온은 너무도 당돌하고 똑 부러졌다.
바로 현실에서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대목이었다.
“허허, 맞는 말이야.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이곳까지 왔으니 의당 그럴 권리가 있지. 좋네, 모두 공유하지.”
“마, 말도 안 되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신선 님! 이번 퀘스트는 무려 S급 퀘스트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퀘스트를 공유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저런 어중이떠중이들과?”
그랜저의 입장에서 신선의 행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어중이떠중이라는 거야!”
“저 개새끼!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만!”
그랜저의 발언에 유저들이 대놓고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그들도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마음대로 하시죠! 원정대는 해산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화신의 신전으로 갈 겁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어봤자 건질 게 없다는 생각에 그랜저는 결국 임페리얼 길원들을 이끌고 한발 먼저 푸름의 대지를 나섰다.
그의 행태에 유저들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신선과 미온의 중재에 다행히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 이제 우리도 움직이지. 다행히 우리도 화신의 신전으로 향하는 지도를 가지고 있으니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임페리얼 길드보다 먼저 화신의 신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야.”
이제 원정대의 수장 직책은 신선에게로 돌아갔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유저들은 신선에게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저자도 어차피 그랜저와 똑같은 족속이다. 그저 지금은 우리의 힘이 필요하니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야. 난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내 사람들을 제외하곤!’
바야흐로 화신의 사막 원정은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과연 화신의 신기를 얻을 자는 누구일까?
더불어 화신의 신기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미궁에 빠져 있었다.
* * *
푸름의 대지 오아시스에서 출발한 지 열흘이 흘렀다.
이미 먹을 식량과 물이 다 떨어진 원정대에게 유일한 희망은 여신 미온이 배급해주는 하루 한 끼의 떡과 기력 회복 물약뿐이었다.
만약 그것마저 없다면 원정대는 이미 모두 굶어 죽었거나 기력이 쇠진되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원정대 내에서 미온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천휘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화신의 신전은 아직 멀었나요?”
원정대의 실질적인 수장은 신선이었지만 미온의 입지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허허, 거의 다 왔네. 이 지도에 의하면 저 멀리 보이는 사구(砂丘)만 넘으면 바로 화신의 사막일 걸세.”
“아!”
신선의 말에 미온은 탄식을 내뱉었다.
드디어 이 길고 긴 원정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이내 모든 원정대 유저들의 귀에 들어갔다.
즐겁고 기쁜 일이었지만 유저들은 이전처럼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화신의 사막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땅. 괜히 나섰다가 이제 와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었다.
“이 사구만 넘으면 바로 화신의 신전일세!”
“와아아아!”
신선이 가리켰던 사구의 앞에 이르자 유저들은 그제야 환호성을 내질렀다.
원정대 유저들의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사구의 정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 왔… 빌어먹을! 뭐야? 신전이라는 것 없잖아! 우리 또 낚인 거야?”
“어라? 정말이잖아!”
사구의 정상에 먼저 도착한 유저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신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대놓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선은 여전히 너털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사구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사막일세. 제아무리 신기가 잠들어 있는 신전이라고 해도 세월의 흐름에 의해 모래에 파묻히지 않았겠나. 저길 보게. 그랜저가 이끄는 임페리얼 길드가 신전의 입구로 들어가는군.”
“어라? 정말!”
“자세히 보니 저건 탑의 일부잖아?”
“찾았다!”
“화신의 신전이다!”
화신의 사막을 지탱하는 비밀이 감춰져 있는 곳.
원정대는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다.
“벌써 임페리얼 길드가 들어선 지 꽤 시간이 지났네. 우리도 서두르지 않으면 그들에게 신기를 빼앗길 염려가 있네.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단독으로 움직이지. 더 이상 자네들과 함께할 생각이 없으이.”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여기까지 안내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럼 이만.”
화신의 신전 입구에 도착하자 원정대와 신선, 아렌 일행은 분열했다. 이제부터는 각자 이해득실이 맞는 이들끼리 움직이는 것이 옳았다.
누가 뭐라 해도 화신의 신기는 단 하나.
최후의 그것을 손에 넣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따로 움직이지. 그동안 고마웠어, 여신. 다음에 만나면 함께 사냥이나 한번 하자고.”
“우리도 그만…….”
“우리도…….”
신선 일행이 먼저 움직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원정대도 사분오열 나눠졌다.
그들은 처음부터 같은 파티를 이뤄왔던 이들로서, 최후의 순간에 자신들이 화신의 신기를 가지려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세요. 그럼 다들 파이팅이에요.”
그런 그들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미온이었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그들을 보내줬다.
그리고 이내 그들이 신전 안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미소를 풀고 본래의 까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쁜 놈들. 그동안 먹여 줬더니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해? 역시 세상에는 믿을 놈 하나 없다니까.”
“원래 그런 거야, 세상은. 그나저나 이제 우리도 움직여야 하는 거 아냐? 이러다 저들에게 뺏길라.”
카멜의 말에 일행은 일제히 천휘를 바라봤다. 누가 뭐라 해도 일행의 리더는 천휘였다.
“잠시만 기다려. 녀석들이 곧 나타날 때가 되었으니까. 아! 저기 오네.”
천휘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화신의 신전 너머에 있는 거대한 사구의 정상이었다.
화신의 신전은 사구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에 위치해 있었다.
“누가 온다고… 앗! 강시들이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사구 정상에서 환한 햇빛을 받으며 세 강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고생이 제법 심했는지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이며 신발 등이 무척이나 낡아 있었다.
[주인, 왔는가?]
[주인님을 뵙습니다.]
[으하하하! 주인, 드디어 왔군!]
“후후. 그래, 미리 손을 써뒀겠지?”
오랜만에 만난 세 강시들과 회포라도 풀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화신의 신전은 우리의 접근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주인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우리를 허접한 언데드로 취급한 모양이다.]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수고했다! 일단 아공간으로 돌아가서 힘을 비축해둬라! 곧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야 하니까 말이야.”
[으하하하! 기다리고 있겠다!]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서운하긴 하지만 주인의 명이라면 그렇게 하지.]
[주인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세 강시가 아공간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녀석들을 선두에 세워 가장 빨리 화신의 신기가 있는 곳까지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동안의 여정으로 인해 쇠약해졌을 녀석들의 힘부터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작정 움직이는 것보단 모험가인 하린 누님이 나서주시는 것이 좋겠네요. 카멜이 옆에서 보조해줄 테니 마음껏 스킬을 펼쳐 보이세요.”
“호호,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리는 혹시 모를 다른 유저들의 암습에 대비한다. 이제부터 이 안은 서바이벌 그 자체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될 거야. 내 말 명심해!”
이제까지 정을 쌓아왔다고 해도 그들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가상현실. 조금 전까지 쌓은 우정이 언제 배신의 칼날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화신의 신전 구조는 지상이 아닌 지하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행이 들어선 지상 1층에는 거대한 홀이 있어 수십 개의 통로로 이어졌다. 마치 꿀벌의 집을 연상시키는 육각형의 통로였다.
천휘 일행은 그중에서 한 통로를 정해 무작정 따라갔다.
통로를 지나는 중에 ‘화마의 정령’이라는 몬스터를 만나 한차례 전투를 벌인 것을 제외하곤 순조롭게 탐험을 지속해나갔다.
“하아, 또 갈림길이네.”
“이거 완전히 미궁 아냐?”
“후우, 이러다 미아 되겠어.”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갈래나 되는 갈림길이었다.
일행은 이제까지 이어졌던 긴장감과 피로가 겹쳐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나눠서 움직일까?”
“그럴 수는 없지. 일단 여기서 한 번 쉬자. 아무래도 조금 위험 부담이 따르더라도 강시들을 이용해야겠어.”
“강시들?”
“어. 심연의 밀림에서 새로 얻은 내 컬렉션들을 보여 줄게. 아공간 오픈. 나와라, 깜둥이들!”
휙휙.
아공간이 열리자 그 안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마치 그림자처럼 어두운 벽면으로 사라졌다.
“뭐, 뭐야!”
그 기이한 광경에 일행마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깜둥이들, 즉 다크 엘프 혈강시들은 다크 엘프일 적의 은신술에다 혈강시가 되면서 얻어진 부가적인 민첩 스탯의 상승으로 인해 로렌조차도 의식하지 않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은신술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연의 밀림에서 얻은 내 컬렉션의 일부다. 개인적으로 깜둥이라 부르고 있지. 자, 깜둥이들아! 세 팀으로 나뉘어서 이 갈림길로 향한다! 되도록 유저들과의 전투는 피하도록! 실시!”
스르륵.
천휘의 명령에 깜둥이들이 어둠을 타고 사라졌다.
그 모습에 흡족한 듯 천휘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저런 녀석들이 있었으면 진작 부르지 그랬냐.”
“저런 고급 인력들을 무작정 부려 먹을 수는 없지. 아 참! 우리도 움직여야지.”
“어디로 움직이게? 차라리 저들이 정보를 모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아?”
“저들은 그저 주변의 정보를 모아올 요량으로 보낸 거야. 이 정도 갈림길에서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
“아무 길이나 갈 순 없지 않나?”
로빈의 물음에 천휘가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 오픈. 닌자거북, 똥개 소환!”
스파아앗.
[주인님을 뵙습니다.]
컹컹.
천휘의 소환에 닌자거북들과 똥개 시벨리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닌자거북? 똥개?”
“하여간 저 자식 작명 센스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왜용? 재밌기만 한뎅. 꺅! 게다가 저 똥개는 너무 귀여웡! 머리에 뿔 달린 것 좀 봐앙!”
닌자거북과 똥개 시벨리우스의 등장에 일행은 웃으면서 그들을 맞았다.
“잔소리 말고 기다려 봐.”
일행이 강시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천휘는 무한의 행낭에서 붉은 구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건 화마의 구슬이잖아. 그건 왜?”
천휘는 신선에게 거액을 주고 화마의 구슬을 사들였다.
사실 화마의 구슬은 ‘화신의 부활’ 퀘스트를 얻기 위한 일종의 퀘스트 시작 아이템이었기에 퀘스트가 시작된 후엔 그다지 쓸모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이걸 똥개 녀석에게 맡게 해서 길을 알아볼 거야. 이 녀석이 마나를 추적하는 데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거든. 명색이 마수니까.”
“마수!”
“똥개가 말로만 듣던 마수야? 이야, 왠지 달리 보이는데?”
일반적인 유저들은 마수를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니안 대륙에 존재하는 마수들은 거의 심연의 밀림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똥개, 이걸 맡아봐. 그리고 이 구슬에 담긴 마나가 이어지는 곳으로 안내해. 닌자거북, 너희는 우리 주변에서 은신하며 우리를 따라와. 그리고 만약 우리를 쫓는 녀석들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주인님.]
“헙! 또 사라졌어!”
“흐메, 뭔 놈의 강시들이 이라고 신출귀몰하다냐. 눈앞에서 사라져 블어도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당깨!”
닌자거북들이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을 감추자 카멜과 블랙헤드는 주변을 돌아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자신들의 실력도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그들이건만, 고작 강시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낼 것 없다. 저 녀석들은 전투 능력보다 은신에 더 뛰어난 것뿐이니까. 자, 이제 똥개를 따라가자. 이미 녀석이 마나를 맡은 것 같으니까.”
컹컹.
이제 천휘조차도 모든 패를 꺼내들었다.
모든 이들의 욕망이 점차 모여들며 그 욕망의 수레바퀴가 거칠게 굴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