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사막 부족 피그미
그레이트 웜과의 전투가 일어난 뒤, 한동안 원정대는 이렇다 할 몬스터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일부러 신기루로 보이는 오아시스를 피해 안전한 길만을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여정이 지속될수록 낙오자도 늘어만 갔다.
화신의 사막을 우습게본 그들은 생필품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기력이나 포만감이 떨어져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돕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유저들의 상황도 그와 비슷한 탓이었다.
그 와중에 단 한 사람만이 유저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었는데, 그녀는 임페리얼 길드에서 성녀라 칭송받는 헤라를 뛰어넘어 여신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온이었다.
“여기 떡과 기력 회복 물약을 받아가세요. 하루 정도는 버티실 수 있을 거예요.”
“헉헉, 감사합니다. 역시 여신님뿐이세요.”
미온은 천휘의 지시에 따라 떡과 기력 회복 물약을 아사 직전의 유저들에게 나눠줬다.
물론 그것도 고작해야 사흘에 한 번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트리플 마스터에 도달한 원정대의 유저들은 목숨을 연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저건 왜 그러는 건지 내는 도통 알 수가 없당깨. 괜히 음식만 축내는 거 아닌지 모르겄어.”
“저런 어중이떠중이들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 날이 올 거다. 그런 소리 말고 떡이나 계속 만들어. 네 특제 떡은 더위 회복 효과도 있으니까.”
“흐미, 아죠 지대로 부려 먹는당깨!”
“후후.”
천휘는 미온과 블랙헤드를 이용해 원정대의 민심을 사로잡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지금 당장은 손해 보는 장사일지라도 후에 분명히 큰 보답으로 다가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우오오오!”
원정대의 숙영지가 별안간 들썩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사내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것이다.
환호성의 출처는 바로 임페리얼 길드의 길원들이었다.
“드디어 오아시스를 발견했답니다!”
“오아시스?”
“에이, 한두 번 속나.”
임페리얼 길드의 한 사내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숙영지를 뛰어다니는데도 유저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임페리얼 길드의 인망이 그만큼 떨어진 탓도 있지만 그레이트 웜과의 전투를 통해 불신이 팽배한 탓이 더욱 컸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이번엔 진짜예요! 이미 저희 길드에서 보낸 선발대가 오아시스의 존재를 확인했어요! 아마 곧 출발할 겁니다! 진짜예요!”
“우오오오! 정말인가?”
“오, 예! 오아시스다!”
오아시스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말에 유저들은 그제야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신의 사막에서 뜨거운 뙤약볕을 쬐며 행군한 것이 벌써 닷새째였다. 유저들의 심신이 바닥을 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드디어 찾은 모양인데?”
“그러게.”
오아시스를 찾았다는 말에 기쁜 것은 천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오아시스는 다른 말로 사막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면 다시 원정대의 사기도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모두 야영지를 정리하세요! 곧 출발합니다! 이번 목표 지점은 바로 오아시스입니다!”
“와아아아!”
[띠링! 화신의 사막 세 곳의 오아시스 중 하나인 ‘푸름의 대지’를 최초로 발견하셨습니다.]
[명성이 30 증가했습니다.]
“오, 오아시스다!”
“물이다!”
“와아아아!”
푸름의 대지라는 이름의 오아시스는 중앙에 작은 호수가 생성되고 그 주변에 녹음이 광활하게 펼쳐진 제법 큰 규모의 오아시스였다.
그 생기 가득한 모습에 취한 유저들은 앞뒤 잴 것도 없이 곧바로 호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우와아아! 시원하다!”
“물맛도 죽이는데!”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오아시스에는 몬스터들도 없었다. 그저 몇몇 작은 새들만이 나무 위에서 지저귀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움 속에서도 천휘 일행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아시스 주변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뭐 좀 찾아낸 것 있어?”
“아니, 아무래도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다.”
“내 ‘몬스터 탐지’ 스킬에도 걸리는 게 없어.”
“흐음, 그럼 정말 사막의 여행자들을 위한 평범한 오아시스라는 건가?”
원정대가 서 있는 땅은 다름 아닌 4대 금지 중 한 곳인 화신의 사막이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 이 오아시스에도 분명히 뭔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듯했다.
그때였다.
[주인.]
‘응?’
천휘가 오아시스에 대한 의심을 접을 때쯤,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성으로 이어진 소리.
바로 천휘와 영성으로 이어진 강시들 중 한 명이었다.
[로렌이다, 주인.]
[아, 네 녀석이냐? 무슨 일이냐?]
천휘는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서기 전 카이젠과 오베른, 로렌을 먼저 화신의 사막으로 들여보냈다.
그 사실을 이제 와 떠올린 것이다.
[지금 주인이 머무르고 있는 오아시스 주변에 미지의 존재들이 잠복하고 있다. 제법 은신에 뛰어난 녀석들인지 나조차도 녀석들의 은신을 감지하는 것이 어려웠을 정도다.]
로렌은 최고의 사냥꾼이다. 최고의 사냥꾼인 만큼 은신에도 능했고, 은신을 감지하는 것에도 능했다.
한데, 그런 그가 은신을 감지하는 것이 어려웠다면 그만큼 은신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미지의 존재라면,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냐?]
[지금으로서는. 하지만 주인이 굳이 알고 싶다면 알아봐줄 수 있다.]
[그래, 녀석들의 정체를 알아봐라. 그런데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지?]
카이젠과 오베른 역시 자신과 영성으로 이어진 녀석들. 그런 녀석들이 조용하다는 것은 그들이 주변에 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발 먼저 화신의 사막 심처로 향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주인을 위해 먼저 위험을 감내하려는 심산이다.]
[흐음, 그래? 간만에 기특한 짓을 하는군. 좋아. 그럼 너는 어서 가서 잠복해 있는 녀석들의 정체를 알아 와라. 아무래도 원정대는 이곳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할 것 같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이곳으로 와서 곧바로 내게 연락하고.]
[그렇게 하지. 아 참! 그동안 사막의 몬스터들을 처치하면서 모아놓은 아이템들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 넘겨줄까?]
[아이템? 그렇다면 너희가 사막의 몬스터들을 처치했던 거냐?]
[우리를 위협하기에 모조리 처치했지. 아, 그 거대한 지렁이는 처치하기 귀찮아서 그냥 지나쳤다.]
[…….]
그레이트 웜을 처치하고 난 뒤, 원정대는 이렇다 할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고작해야 레벨이 낮은 사막 늑대 몇 마리가 전부였는데, 그 정도는 마법사들이 살짝 술수만 부려도 처치가 가능했다.
명색이 4대 금지 중 한 곳인 화신의 사막에 몬스터가 왜 이렇게 없을까 의심하던 천휘는 그제야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아이템들은 모조리 모아놔. 하나라도 흘리면 죽을 줄 알아! 내 성격 알지? 요새 피리를 너무 안 불었더니 입이 근질근질하네.]
[…목숨 걸고 아이템들을 간수하겠다. 그럼 이만.]
천휘의 으름장에 로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연락을 끊었다.
“후후.”
역시나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하나같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이 천휘는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천휘 오라버니.”
“응? 눈송이 아니냐? 대체 뭐 하느라 이제 온… 어라? 그 녀석은 또 뭐냐?”
천휘 일행 중 가장 늦게 합류한 눈송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아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모르겠어용. 오아시스 북쪽 야자수 밑에서 홀로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데려왔어용.”
“아, 그래? 흐음.”
아이는 대략 6~7세 정도로 추정되는 소년이었다. 머리카락은 흡사 원시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피부색도 전반적으로 거무튀튀했다. 게다가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땟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넌 누구지?”
“바라바라 훔바라.”
“뭐라는 거야, 이 원숭이 녀석!”
“아무래도 아르니안어를 모르는 것 같아용. 게다가 제가 알고 있는 언어도 아닌 걸로 봐서는 그들만의 특별한 언어인 것 같아용.”
“흐음, 이거 왠지…….”
“냄새가 나는데?”
“그치?”
천휘 일행은 소년을 유심히 살펴봤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너무 많았다.
첫 번째, 아무도 살지 않는 오아시스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것.
어린 소년이 거칠고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이 오아시스에 올 리가 만무한 만큼 이는 분명히 의심스러웠다.
두 번째, 소년은 소년답지 않게 전신의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마치 잘 단련한 전사들과 같았다. 특히 무슨 훈련을 받았는지 오른쪽 어깨의 근육은 흡사 거인 토르를 연상시킬 만큼 단단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얼굴은…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주름이 많았다.
눈가의 잔주름은 물론이고 이마에도 지렁이처럼 거대한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이, 흡사 노인을 보는 듯했다.
“…휴, 눈송이야.”
“넹?”
소년을 한참 살피던 천휘는 한숨을 내쉬며 눈송이를 불렀다.
“네가 보기에는 이 녀석이 아이로 보이냐? 이렇게 주름이 자글자글한 녀석이?”
“에에? 어라? 이 자식 정말 주름이 장난 아니잖앙! 어린아이라면 나처럼 피부가 뽀얘야징! 이상하넹!”
“카멜! 블랙! 녀석을 제압해!”
휘익.
“우웁! 브레브레!”
천휘의 명령에 카멜과 블랙이 얼른 뛰어들어 녀석을 제압했다.
제아무리 녀석의 근육이 잘 발달돼 있다 해도 카멜과 블랙의 완력을 이겨 낼 순 없었다.
“로빈, 녀석에게 사일런스 마법을 걸어둬. 녀석이 소리치지 못하게.”
“알았다. 사일런스(Silence)!”
로빈이 마법을 걸자 주름 소년은 발버둥만 칠 뿐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일단 녀석을 감금해둬. 원정대가 모르게 눈송이 네가 감시하고 있어. 아무래도 이 녀석… 뭔가 있어.”
“그렇게 할게용.”
주름 소년.
녀석의 존재가 무엇인지 천휘는 모르고 있었다.
* * *
[테무는 어떻게 됐나?]
[아무래도 이방인에게 잡힌 모양입니다. 조금 전부터 소식이 두절됐습니다.]
[설마! 이방인들 중에서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챈 이들이 있단 말인가! 우리의 앳된 모습을 보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동안은 지상 최고입니다! 우리는 귀여움으로 무장한 피그미 부족이 아닙니까?]
화신의 사막은 몬스터가 아닌 유사 인종이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그런 화신의 사막에서 유일하게 생존을 유지해온 이들이 바로 피그미 부족이었다.
원숭이에 비견되는 작은 몸집.
주름이 천연적으로 생겨날 만큼 적은 수분으로 몸을 유지할 수 있는 특성.
거기에 더해 사막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강인함과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술.
피그미 부족은 그레이트 웜과 몇몇 화신의 일족을 제외하고는 최상위층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오늘 저녁에 이방인들을 친다! 은신으로 접근해 잠자고 있는 녀석들의 목을 딸 것이다!]
[역시 족장님이십니다! 당장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우리는 무적의 피그미족이라는 걸 잊지 마라!]
“츤데레!”
츤데레.
피그미 말로 파이팅을 일컫는 말이었다.
* * *
“앞으로 현실 시간으로 사흘 동안 이곳 오아시스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강행군을 해오느라 기력이 많이 쇠하셨을 텐데 사흘 동안 푹 쉬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되도록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접속해주셨으면 합니다. 차후에 변동 사항이 있을 수 있으니 저희가 설치한 이 게시판에 그러한 사항들을 적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랜저의 설명에 유저들은 호응하며 자신의 야영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현실 시간으로 오늘이 토요일이기에 바로 접속을 해제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오벨리스크』는 주말 여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봤어들?”
그 시각, 천휘 일행은 모닥불을 지펴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회의에는 뜻밖의 인물도 함께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인맥을 동원해서 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봤는데도 알 수가 없더라고요.”
거인 토르의 말에 하린도 입을 뗐다.
“나도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소용이 없더라고, 천휘 동생. 녀석들, 아예 꼭꼭 숨겨 두고 있어. 게다가 더욱 놀라운 건 간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정확한 목적을 알지 못한다는 거야.”
“하린 누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랜저 녀석은 아군까지 믿지 못할 정도라는 거군요.”
“그 말은…….”
“아무에게도 넘겨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건이 이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거겠지.”
“흐음.”
로빈의 추측에 모두들 동의하는 듯했다.
이미 어느 정도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녀석이 같은 길원들까지 믿지 못할 정도로 비밀스럽게 추진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오벨리스크』에서도 엄청난 세력을 구축하고 지존 12인 중 한 사람으로서 부와 명예를 모두 이룬 녀석이 조심스럽게 추진할 정도로 대단한 물건.
“아아악! 젠장, 모르겠어! 대체 뭐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오자 카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후.”
[주인.]
‘왔군.’
천휘는 카멜의 광분을 보며 웃다가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오마.”
“그래, 다녀와라.”
이 근방은 시끄러워 로렌과의 대화를 할 수 없기에 천휘는 자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지?]
[녀석들의 정체를 알아냈다.]
[어떤 녀석들이었지?]
[지금 주인 일행이 붙잡고 있는 그 주름쟁이와 같은 족속들이다.]
‘주름쟁이? 아, 그 주름 소년을 말하는가 보군.’
로렌의 말에 천휘는 눈송이가 끌고 온 주름 소년을 떠올렸다.
[그 녀석들이 뭔데 잠복해 있는 거지?]
[카이젠의 말에 의하면 녀석들은 화신의 사막에 거주하는 피그미 부족이라고 한다. 카이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걸로 보아 녀석들에 대한 정보는 전 대륙을 뒤져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혹여 로즈란이라면 또 모를까.]
[흐음, 뭐 녀석들이 숨어 있는 위치만 알고 있으면 되겠지. 그런데 왜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지?]
밤이 되면 원정대의 유저들은 더욱 민감해진다. 어두워진 사막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탓에 더욱 경계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때문에 천휘는 밤에 원정대의 숙영지 부근에 찾아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내로 공격할 태세다.]
[뭣이! 숫자는?]
[대략 5천 정도다.]
[5천!]
처음 카레브 마을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원정대의 규모는 1천 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협곡을 건너면서 바위 일족 고블린들과의 전투를 통해 2백가량이 목숨을 잃었고, 그레이트 웜과의 전투로 인해 4백에 가까운 유저들이 비명횡사했다. 거기다 화신의 사막을 건너는 동안 많은 이들이 낙오하면서 그 숫자는 더욱 줄게 되었다.
결국 지금 ‘푸름의 대지’ 오아시스까지 무사히 도착한 유저들은 고작해야 4백이 채 되지 않았다.
‘4백 대 5천이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비교할 수 없는 전투다. 게다가 이런 척박한 땅에서 그 정도의 규모로 살아남을 정도라면 그들 역시 전투에 능하긴 마찬가지. 게다가 혈육인 만큼 단결력도 우리보다 월등히 뛰어날 터. 빌어먹을! 여기까지 와서 전멸해야 하나?’
5천의 정예 전사들을 고작 4백으로 상대해야 한다면 전설의 명장인 나폴레옹이나 이순신조차도 버거울 것이다.
게다가 원정대는 전술이나 전략을 이용할 수 있는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그저 그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유저들에게 알려야 한다.’
[잘했다, 로렌. 우선 주변에서 대기해. 내가 따로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도록 해.]
[알겠다, 주인.]
로렌과의 대화를 끊고 천휘는 곧바로 일행에게 돌아왔다.
“큰일 났다!”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야?”
웬만한 일에는 설레발을 하지 않는 천휘의 행동에 일행이 놀란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눈송이! 눈송이를 불러! 그리고 그 주름쟁이 녀석을 데려와. 어서!”
천휘의 지시에 블랙헤드가 놀란 눈으로 부리나케 눈송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눈송이와 블랙헤드가 주름쟁이라 불리는 피그미족의 전사를 데려왔다.
“하린 누님, 이 녀석들의 언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종족의 언어들을 다 알 순 없지만 체계가 비슷하기만 하다면 대충 의미 파악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동생.”
“좋아요. 토르야, 이 녀석을 고문시킬 수 있겠냐?”
“제가 해볼까요?”
“그래, 해봐라. 이 자식이 무엇이든 토해내게 만들어!”
천휘의 지시에 토르가 즐거운 듯 양팔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거대한 체구에 걸맞은 거대한 주먹으로 무자비하게 피그미족의 전사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쿄이쿄!”
녀석의 무자비한 구타가 무려 30분간 이어졌다.
30분간 구타를 지속할 수 있는 토르도 대단했지만 30분간 그의 구타를 견뎌 낸 피그미족도 대단했다. 게다가 녀석은 30분 내내 ‘이쿄이쿄’라는 말만 반복하며 어떤 것도 불지 않았다.
“이 자식이! 안 되겠다! 블랙, 네 녀석이 저 녀석의 피부를 회 떠봐!”
“알았당깨! 내한티만 맡겨 부러!”
천휘의 지시에 블랙헤드가 즐거운 듯 지옥의 나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생선을 회 뜨듯 피그미족의 피부를 산 채로 회 뜨기 시작했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게 회를 뜨는 그의 실력에 일행은 감탄을 연발했다. 하지만 반대로 피그미족의 인상은 더욱 일그러져만 갔다.
“끄아아악! 쇼이쇼이!”
“…분위기를 봐서 항복한다는 거 같지요?”
“그런 것 같은데, 동생?”
블랙헤드의 선전에 결국 피그미족은 항복을 선언했다. 정확히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녀석의 표정과 상황을 따져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누님, 이제 누님이 나설 차례네요.”
“맡겨만 둬.”
하린은 그때부터 자리에 앉아 피그미족 전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피그미족의 언어를 모르는 그녀였지만 모험가답게 여러 유사 인종의 언어를 아는 만큼 손짓 발짓을 이용해 대략 상황이 어떤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때요, 누님?”
하린이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천휘가 물었다. 벌써 45분가량이 지난 탓에 애간장이 탈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의 특기는 은신을 통한 암습인 것 같아. 그리고 녀석들의 주 무기는 기다랗고 얇은 투창이야. 게다가 투창의 끝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어. 하지만 마법에는 약한 모양이야. 특히 전격 계열 마법에 취약해. 녀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갑옷을 입지 않아.”
“잘하셨어요, 누님. 미온, 그리고 카멜! 너희는 당장 돌아다니면서 이 사실을 알려! 토르, 너는 그랜저에게 당장 이 사실을 알리고! 단, 우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릴 필요는 없어!”
“알았다!”
[띠링! 돌발 퀘스트 ‘피그미족의 습격’이 발동되었습니다.]
척박한 화신의 사막에서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유사 인종 피그미족.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이방인이 침입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평상시에는 온순하기 짝이 없는 그들이지만, 침입자에게는 죽음이라는 철퇴를 내리며 화신의 사막에서 살아왔다.
그런 그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아야 화신의 사막에서의 원정을 성공시킬 수 있다.
난이도:B+
기한:없음
보상:명성 300 상승
경험치 50,000 상승
카멜과 미온이 유저들에게 피그미족의 습격을 알리자 이윽고 원정대의 모든 유저들에게 퀘스트가 공유되었다.
카멜과 미온은 이미 원정대 사이에서 대단한 인지도를 얻고 있었기에 유저들이 한 번에 그들의 말을 믿은 것이다.
“자,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다. 로빈! 너 최근에 익힌 마법진 있지?”
“치유의 마법진을 말하는 거냐?”
“그래, 그거! 그거 바로 준비해! 이번엔 우리의 역량을 총동원해도 이기기 힘들어! 그렇다고 내가 강시들을 쓸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가지고 있는 밑천을 다 드러내봐야지!”
“알았다, 바로 준비하마!”
로빈은 사막을 행군하면서도 꾸준히 원진 마법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동안 마나 증폭과 마나 공명 마법진, 그리고 마나 드레인 마법진밖에 사용할 수 없었던 그가 오망성의 마법사가 되고 나서 새로운 마법진을 익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치유의 마법진.
마법진 영역 안의 아군에게 생명력과 마나의 회복속도를 50퍼센트 상승시켜 주고, 출혈과 같은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을 50퍼센트 상승시켜 주는 마법진이었다.
효과가 비약적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시전자의 마나가 허락하는 만큼 마법진의 크기를 넓힐 수 있다는 것이 이 마법진의 장점이었다.
“블랙과 눈송이는 로빈을 지켜라. 만의 하나 후방으로도 녀석들이 공격해올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녀석들이 몰려올 곳으로 향한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천휘가 택할 수 있는 전술은 많지 않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원정대를 추스를 틈도 없었고, 이제 와서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는 저들을 지휘해서 피그미족과 맞설 수도 없었다.
그저 녀석들이 암습을 펼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녀석들을 치는 것, 즉 선공의 묘를 살릴 수밖에 없었다.
천휘와 일행은 어둠을 내달렸다.
웅성웅성.
촤르륵.
임페리얼 길드의 마스터인 그랜저와 헤라가 머물고 있는 막사에 폭염법사 알무니아가 들어섰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랜저가 다짜고짜 물었다.
막사 안에서 조용히 헤라와 찻잔을 기울이던 그였지만 밖의 소동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래도 주변에 미지의 몬스터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누가 발견했는지도 모르고 아직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소문으로 인해 숙영지가 발칵 뒤집혔다. 이미 몇몇 유저들은 막사를 거두고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야.”
“젠장! 정찰대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 정도도 정찰하지 못하고! 어서 길원들을 소집해! 지도에 의하면 화신의 신전은 멀지 않았어! 여기까지 와서 원정에 실패할 순 없다!”
“알았다! 너도 어서 준비해라.”
알무니아가 막사 밖으로 나서자 그랜저도 얼른 무기를 챙겼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헤라 역시 곧바로 사제복을 걸쳐 입으며 그랜저의 옆에 섰다.
“역시나 4대 금지인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어.”
“걱정 마, 이번에도 잘될 거야! 이제 곧 있으면 화신의 신기를 얻을 수 있잖아. 그렇게만 된다면 그랜저 네가 아르니안 대륙을 집어삼키는 것도 멀지 않았어.”
헤라의 말에 그랜저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꼭 그렇게 될 거다. 꼭!”
과연… 그는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정말? 리얼리?
휙휙.
“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천휘의 뒤를 따르던 카멜이 물었다. 이미 오아시스에서 벗어나 어둠만이 깃들어 있는 사막으로 들어선 것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다른 일행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 힘만으로 녀석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어. 녀석들의 숫자가 숫자인 만큼 분명히 오아시스를 전 방위에서 포위하며 공격해올 거다.”
“그럼 이럴 필요가 없지 않아, 동생?”
하린의 말이 옳았다. 전 방위에서 공격해오는 피그미족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오아시스에서 차분히 녀석들을 기다리며 막는 것이 나을 듯했다.
“내가 노리는 건 녀석들의 수뇌입니다. 녀석들이 이 방향에 숨어 있다가 움직였으니 분명히 이쪽에 녀석들의 수뇌가 있을 겁니다. 수뇌라면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그제야 후방에 나타날 테니까요.”
천휘는 피그미족이 체구가 작은 만큼 지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현생 인류의 선조 격인 네안데르탈인 등의 원시인들 지능이 떨어졌던 것은 바로 두개골이 작아 뇌의 용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탓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녀석들을 모두 상대하지 않을 겁니다. 강행 돌파! 녀석들을 뚫고 후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피그미족의 수뇌, 즉 족장 녀석을 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수뇌를 잃은 녀석들의 힘은 처음보다 몇 분지 일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너무도 무모한 방법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개죽음이 될 수도 있는 노릇.
하지만 천휘는 망설이지 않았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그랜저를 엿 먹이고 그가 얻으려던 것을 자신이 독식해야 했다.
복수에 대한 집념이 천휘를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온다!”
원정대의 모험가 중 한 사람이 드디어 피그미족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는 하린과 마찬가지로 10대 모험가 중의 한 사람이자 임페리얼 길드의 간부이기도 했다.
“호수를 중심으로 녀석들의 공격을 방어하겠습니다! 모두 한데 뭉쳐 원형의 진형을 이루는 것이 최선입니다!”
천휘보다 상황 파악이 느리긴 했지만 그 역시 숱한 전투를 거쳐 온 덕에 전술에 능한 면이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천휘보다 나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유저들을 통솔하는 능력이었다. 거대한 길드의 마스터답게 통솔력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전사나 기사 등의 근접 공격이 가능하신 분들은 가장 바깥의 1진이 되어주시고, 궁수와 도적 여러분은 그 뒤쪽에서 2진이 되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사 여러분과 사제 분들은 3진으로서 아군을 지원합니다! 그 외 생산직 여러분은 3진을 도와주세요! 이상입니다! 자, 한바탕 놀아봅시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저들은 긴장을 하긴 했어도 그다지 걱정하는 눈빛들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서서 만난 몬스터라고 해봤자 사막 늑대나 사막 전갈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트리플 마스터인 원정대에게는 이렇다 할 위협도 되지 못했다. 때문에 제아무리 많은 숫자라 할지라도 지레 겁부터 집어먹는 유저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안이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오아시스 외곽에서부터 모습을 천천히 드러내는 시커먼 그림자 때문이었다.
“세, 세상에! 저게 대체 몇이야!”
“그보다 대체 저것들의 정체가 뭐야?”
오아시스 곳곳에는 유저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이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피그미족의 어마어마한 숫자를 확인한 원정대 유저들은 안색이 창백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상대는 사막 늑대도 아니고 사막 전갈도 아닌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형 몬스터, 정확히는 피그미족이었지만 그것까지 유저들이 알 리 없었다.
“츤데레!”
휘익, 휘익.
“뭐가 날아온다!”
“투창이다!”
“방어 마법! 방어 마법!”
오아시스를 둘러싼 피그미족이 일제히 투창을 내던지자 작고 가느다란 투창 5천 자루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하지만 때는 달빛조차 밝지 않은 자정 무렵.
허공으로 솟아오른 투창의 숫자가 유저들에게 보일 리 없었다.
터억, 터억.
“으아악! 너무 많아!”
“내 허벅지!”
이미 협곡에서 바위 일족 고블린들과 전투를 치르며 투창에 대한 방어 방법을 터득한 유저들이었지만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수의 투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저것들을 당장에……!”
“안 됩니다! 진형을 유지하세요! 절대 말려들면 안 됩니다!”
투창에 상처를 입은 유저들이 분노를 토해내며 진열을 이탈하려고 하자 그랜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제지했다.
“녀석들이 원거리 공격을 해온다면 원거리 공격으로 맞서야 합니다! 마법사 여러분은 마법을 전개해주세요!”
그랜저의 지시에 마법들이 전개됐다. 어둠을 밝히는 화염계 마법은 물론이고 날카로운 바람을 동반한 바람 계열 마법도 전개되었다.
“이쿄이쿄!”
마법 몇 방으로 피그미족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보통 사막의 몬스터들이 단단한 피부나 껍질을 지니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녀석들은 마법에 약합니다! 마법사 여러분은 쉬지 않고 마법을 난사하세요!”
그랜저의 지시에 마법과 투창이 오가는 원거리 공방이 시작되었다.
결국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부족한 피그미족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투창을 양손으로 꼬나 쥐고 원정대에 달려들었다.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와아아아!”
원정대와 피그미족 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카멜!”
“알았다! 카오스 미러!”
천휘의 지시에 카멜이 카오스 팔라딘의 고유 스킬인 카오스 미러를 몸에 두르고 피그미들을 향해 돌진했다.
“미온! 하린 누님을 보호해!”
“알았어!”
“하아앗! 파멸의 축제!”
카멜이 카오스 미러로 피그미족의 공격을 방어하고, 천휘가 파멸의 축제로 피그미족을 쓰러트린다.
단순한 방식이었지만 그 효율은 최고였다.
피그미족의 투창은 카오스 미러를 뚫을 수 없었고, 피그미족의 미약한 방어력도 파멸의 축제를 견딜 수 없었다.
“남자의 힘은 정력! 정력에는 비아그라!”
[띠링! 10분간 공격력과 방어력이 10% 상승합니다.]
[띠링! 10분간 공격속도와 이동속도가 10% 상승합니다.]
거기에 더해 미온이 축복 마법을 걸어주자 일행의 돌진속도는 더욱 빨라져만 갔다.
“천휘 동생, 왼쪽이야! 저곳인 것 같아! 이 근방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몬스터가 있어!”
일행이 길을 연다면, 하린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하린의 ‘몬스터 탐지’ 스킬은 10대 모험가 중에서도 발군이었기에 천휘는 그녀에게 길 안내를 전격적으로 맡기고 있었다.
“다메다메!”
천휘 일행이 피그미족의 족장 근방까지 다다르자 피그미들이 일제히 ‘다메다메!’라 소리치며 일행을 가로막았다.
인해전술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막힐 순 없지! 카멜, 내 주먹에 카오스 오러를 입혀!”
“오냐! 카오스 오러!”
[띠링! 카오스 오러의 영향으로 공격력이 150% 상승합니다.]
[띠링! 카오스 오러의 영향으로 피격 대상 주변에 공격력의 50% 데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좋았어! 림다일!”
카오스 오러로 인해 1.5배 더 강해진 천휘는 곧바로 림다일 스킬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300퍼센트 향상된 천휘의 속도.
천휘는 림다일을 통한 도약력으로 대각선 위로 솟구쳤다.
목표는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피그미들의 머리 위였다.
“파멸의 대지!”
천휘는 피그미들 사이로 떨어지며 곧바로 파멸의 대지를 전개했다.
스턴 효과를 발휘하는 림다일과 파멸의 대지가 연계되자 천휘 주변의 피그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스턴 상태에 빠졌다.
“하앗! 파멸의 축제!”
천휘는 다시 자신의 주변으로 파멸의 축제를 전개했다.
한 방향이 아닌 전 방향으로 파멸의 축제를 펼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워낙 마나량이 많은 그였기에 파멸의 축제를 연달아 펼치는 것으로 그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카멜, 이때다!”
“알았다!”
천휘의 주변에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크레이터가 펼쳐졌다.
그 위를 카멜을 비롯한 일행이 빠르게 지나치며 운집해 있던 피그미들을 돌파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이야!”
피그미들을 지나치자 곧바로 하린이 한 피그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하린이 가리킨 피그미는 우락부락한 피그미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붉은 피부의 피그미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방인이 여기에 있을 수 있어?]
[저도 모르겠습니다, 족장님. 아무튼 일단 피하십시오!]
천휘 일행이 나타나자 피그미 족장은 너무도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주변에는 피그미 1천가량이 있었다. 더욱이 모든 피그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님에도 이방인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피그미의 저능한 지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린 누님, 녀석에게 단검을 던지세요! 카멜, 너는 녀석에게 저주 마법을 걸어!”
모험가 하린의 주공격 방식은 단검 투척이었다. 다른 모험가 스킬에 비해 다소 숙련도가 떨어지긴 해도 백발백중을 자랑할 만큼 단검 투척에도 능한 그녀였다.
카오스 팔라딘인 카멜은 다크 팔라딘의 스킬도 쓸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저주 마법이었다.
신성 마법의 일종이지만 신성 마법이 축복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과 반대로 다크 팔라딘의 암흑 신성 마법은 저주의 효과가 있었다.
휘익.
“이쿄이쿄!”
하린의 단검이 족장 피그미 주변에 있는 피그미 전사들의 목울대에 박혀 들었다.
그것을 본 족장 피그미가 놀랐는지 고래고래 울음소리를 냈다.
도대체 어떻게 저토록 심약한 녀석이 사막 최강의 일족이라는 피그미 부족을 이끌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어둠의 족쇄!”
이윽고 족장 피그미의 발목에 카멜의 저주 마법이 걸렸다. 이동속도를 무려 50퍼센트나 떨어트리는 저주 마법이었다.
“다음은 내게 맡겨라! 림다일!”
천휘는 다시 한 번 림다일을 펼친 것도 모자라 천 대륙에서 익혀 온 보법까지 전개해 족장 피그미의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모두 물러서!”
순식간에 족장 피그미를 제압한 천휘.
천휘는 녀석을 인질로 삼아 다가오는 피그미들을 저지시켰다.
“헉헉.”
“헉헉.”
이 모든 것이 고작해야 30분 만에 이뤄졌다.
운집한 피그미들을 돌파해서 족장 피그미를 찾아내고, 거기에 더해 족장 피그미를 제압한 것까지.
그야말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조금도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모두 비켜서라! 비키지 않으면 이 녀석의 목숨은 없다!”
천휘의 말을 알아들을 피그미들이 아니었지만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피그미들은 천휘의 위협에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좋았어! 모두 날 따라와! 이 녀석을 오아시스에서 처치해야겠어! 그래야 가장 효과가 좋을 테니까!”
“역시 천휘!”
“…사악한 데는 천휘 동생을 따라갈 사람이 없지.”
“하하.”
캉캉.
“크윽, 이 녀석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어!”
“젠장, 고블린 녀석들보다 더 질긴 녀석들이야! 끄아악!”
오아시스에서는 때 아닌 대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작은 몸집으로 한 번에 서넛씩 달려드는 피그미들의 파상 공세에 트리플 마스터인 유저들도 하나 둘 희생자가 발생했고, 거기에 더해 원형을 이루던 진형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랜저,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다! 녀석들의 숫자가 전혀 줄어들지 않아!”
“으으, 마법사들은 뭐 하는 거야? 저 녀석들을 일거에 쓸어버리지 않고!”
“우리도 마나의 압박을 받은 지 오래다. 조금 전에는 번개의 정령사 신선이 라이오너까지 소환해 몇백에 달하는 피그미들을 처치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녀석들은 마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어!”
“젠장, 천하의 그랜저가 이따위 야만족들 때문에 쩔쩔매다니!”
분통이 터질 만도 했다. 고작해야 오크 정도의 능력을 지닌 야만족들에게 쪽수로 밀려 패하기 직전이라니, 유난히 자존심이 강한 그랜저에게는 너무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다메에에에에!”
“츤데레?”
“뭐, 뭐지?”
“무슨 소리지?”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던 푸름의 대지에 정적이 흘렀다. 피그미들의 공세가 갑작스럽게 멈춘 것이다.
저벅저벅.
고요한 오아시스의 정적을 깬 것은 바로 천휘 일행이었다.
천휘는 오른손으로 족장 피그미를 움켜쥐고 천천히 오아시스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모두들 잘 봐둬라! 너희도 이제 이 녀석처럼 될 테니!”
우지끈.
“다메다메!”
유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천휘는 당당하게 족장 피그미의 목을 꺾어버렸다.
순식간에 패닉 상태에 빠진 피그미들.
천휘는 그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모두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