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그레이트 웜 (48/82)

제7장 그레이트 웜

바위 일족 고블린들과의 사투는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사막의 입구까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원정대의 숫자는 3분의 2로 줄어들었고,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정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누구보다 모험을 즐기는 이들이었다.

그런 끝없는 모험심이 그들을 사막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빛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땅바닥을 향하던 원정대의 고개가 일제히 전방으로 향했다.

“빛이다!”

“젠장, 드디어!”

“우오오오! 끝난 건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환희에 찬 함성이었고, 그것은 곧 원정대의 발걸음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원정대는 아르니안 대륙 4대 금지인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영지를 마련합니다. 지긋지긋한 고블린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이제부터는 어떤 미지의 몬스터들이 우리를 공격해올지 알 수 없습니다. 더욱 긴장해주시고, 오늘 밤은 편안히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협곡을 벗어난 기쁨에 젖는 것도 잠시, 사막에 밤이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 내리쬐던 강렬한 햇빛은 간데없고 어느덧 칠흑 같은 어둠이 사막을 뒤덮은 것이다.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이 바로 사막.

더욱이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은 4대 금지 중 한 곳인 화신의 사막이었다.

유저들은 그랜저의 말에 수긍하며 각 파티별로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숙영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하아, 간만에 제대로 된 전투 한번 펼쳐 보나 했더니, 이대로 자는 거야?”

“아서라. 다른 이들의 얼굴이 안 보이냐? 다들 죽을 맛이야.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고블린 녀석들과 드잡이를 펼쳤으니 오죽하겠냐? 그보다 그쪽이나 잘 잡아! 텐트는 각이 생명이라고 몇 번을 말해? 각이 엉성하면 쉽게 무너진다고!”

“네, 네, 알아 모십죠.”

카멜과 로빈은 언제나처럼 말다툼을 벌이며 텐트를 설치했다. 남자용 텐트와 여자용 텐트 2개였는데, 천휘가 신경을 기울인 덕에 좀처럼 구하기 힘든 최고급 물건이었다.

비록 게임일지라도 잠자리가 좋지 못한 것은 다음 날 움직임에 큰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눈송이야, 퍼뜩 썰지 못하나? 그러다 날 샌당깨!”

“조용히 좀 해용! 이렇게 열심히 썰고 있잖아용!”

블랙헤드와 눈송이는 식사 당번이었다. 블랙헤드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협곡에서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최대한 빨리 음식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동안 두 사람이 짝을 이뤄 음식을 만들어온 것이다.

“미온, 땔감 다 잘랐냐?”

“어, 거의. 재촉하지 마. 금방 되니까.”

“알았어. 얼른 가져와.”

천휘와 미온은 모닥불 담당이었다. 이미 아공간에 엄청난 양의 장작을 가져온 덕에 장작 걱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맞은 크기로 잘라야 하기에 미온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모험가인 하린은 텐트 주변에 간단한 덫을 설치해 주변으로부터 일행의 텐트를 방어하도록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행이 아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그녀의 신념 때문이었다.

“자, 요리 끝났당깨!”

“이야, 냄새 죽이는데? 오늘은 뭐냐?”

“내가 특별히 만든 닭백숙이랑깨! 무더운 사막에서 몸보신하라는 의미여!”

“최고, 최고!”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한 일행은 요리가 다 됐다는 블랙헤드의 말에 하나 둘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른 파티에 비해 2배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만큼 일행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증거였다.

“우걱우걱.”

“쩝쩝.”

블랙헤드의 요리는 일행의 관심을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하게 만들 만큼 뛰어났다.

순식간에 일행의 배 속으로 닭 3마리가 사라졌고, 쟁반 위에는 앙상한 닭 뼈만이 남게 되었다.

“꺼억! 잘 먹었다.”

“카멜, 어딜 도망가냥깨? 오늘 설거지 담당은 바로 너여!”

“쳇, 게임 속에서까지 설거지를 해야 되나. 빌어먹을. 이딴 건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잖아!”

블랙헤드의 말에 결국 카멜은 일행이 먹은 접시들을 씻기 시작했다. 주변에 물이 없는 탓에 눈송이의 아이스 마법을 녹여 물을 만들어 접시를 닦았다.

이윽고 사막의 밤이 찾아왔다.

사막의 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추웠다. 모닥불을 피우고 침낭 안에 들어가도 엄습해오는 추위가 가실 줄을 몰랐다.

결국 사막의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밤잠을 설치며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내가 따뜻한 침낭 하나 사오자고 했잖아!”

“내가 이렇게 추울 줄 알았냐? 덜덜. 젠장, 이가 저절로 후달리네.”

밤잠을 설치던 유저들이 하나 둘 텐트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따로 침낭을 가져오지 못한 이들이었다.

“어라?”

“왜 그래?”

숙영지에서도 가장 외곽에 거처를 마련했던 한 사내가 사막을 바라보다 의아한 물음을 던졌다.

“사막이 움직이는데?”

자기가 내뱉고도 황당한 물음이었지만 분명 사막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사막의 바닥이 스멀스멀 움직이며 원정대의 숙영지 쪽으로 다가왔다.

“그냥 모래바람이겠지. 어떻게 사막이 움직일 수 있냐?”

“아냐, 달라. 저길 봐.”

친구의 핀잔에도 그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어디?”

친구의 반응에 그제야 그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친구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움직이긴 뭐가 움직인다고 그래?”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출렁이던 사막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네가 협곡을 건너오면서 몸이 피곤해졌나 보다. 여기서 자기 힘들면 잠깐 나갔다 와. 시간 맞춰서 돌아오는 거 잊지 말고.”

“흐음.”

친구의 권유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사막을 바라봤다. 분명 사막이 움직였었다.

사막 전체가 움직이는 그 광경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았다.

원정대는 숙영지를 거두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랜저의 말로는 이 근방에 화신의 사막을 지배하는 그레이트 웜들이나 사막 몬스터의 출몰이 잦지 않다고 했지만, 유저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의 기습이 있을지 모르기에 언제나 무기를 들고 만전에 만전을 거듭하며 걸어갔다.

“조금 심심하지 않냐?”

“그런 소리 마라. 살아서 이 땅을 밟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 이 땅은 다름 아닌 화신의 사막이라고. 언제 목숨을 잃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4대 금지란 말이다.”

카멜의 불평에 로빈이 핀잔을 주며 소리쳤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만 말이 씨가 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봐온 탓에 최대한 주의를 줄 요량이었던 것이다.

천휘 일행만 그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사막 몬스터들은 대부분 땅바닥에서 출몰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다른 유저들도 알고 있었다.

즉, 언제 어느 곳에서 기습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매 순간 긴장에 긴장을 거듭한 탓에 원정대의 심신은 고작 반나절을 걸었음에도 피로가 극에 달하고 말았다.

“오아시스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는 해질녘.

원정대의 선두보다 앞서서 정찰을 나갔던 임페리얼 길드의 헌터 유저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아시스!”

“죽인다! 드디어 쉴 수 있겠어!”

오아시스라는 한마디에 유저들은 전열에서 이탈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모, 모두 진정을!”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행여나 오아시스로 들어서는 길목에 몬스터라도 잠복하고 있다면 원정대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그랜저가 목청을 높여 유저들을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이미 밑 빠진 독이었다. 유저들은 어느새 오아시스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카멜!”

하지만 천휘 일행은 다짜고짜 달려가지 않았다. 천휘가 일행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지한 것이다.

“왜 그래? 오아시스라잖아! 당장 가봐야지!”

“진정해! 사막에는 신기루라는 것도 있어. 하린 누님, 어떻습니까? 화신의 사막에는 신기루가 발생하지 않나요?”

“흐음, 고서적에 의하면 화신의 사막은 여느 사막보다 뜨거운 열을 발산하는 탓에 신기루가 무척 많이 발생한다고 했어. 게다가 실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는 글귀도 있었어.”

하린의 차분한 설명에 천휘가 일행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다들 들었지? 아마 저건 신기루일 거야. 어쩌면 고위 몬스터의 농간일 수도 있어. 긴장을 늦추지 말고 우리는 원정대의 후미에서 천천히 걸어간다. 다급해하지 마!”

천휘 일행을 비롯해 몇몇 경험 많은 유저들은 천천히 오아시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 역시 천휘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하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그랜저를 비롯한 임페리얼 길드도 있고, 지존 12인들의 파티도 있었다.

“와아아아!”

“오아시스다!”

“편히 쉴 수 있어!”

원정대의 유저들이 빠르게 오아시스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의 환호성은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다. 오아시스에 다가가면 갈수록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것이다.

“뭐, 뭐지?”

“서, 설마… 신기루?”

“젠장! 누가 낚은 거야? 어떤 새끼야!”

비록 안목이 낮다고는 하나 그들 역시 레벨 300을 넘은 트리플 마스터였다.

오아시스를 대략 1킬로미터가량 남겨 두고 그것이 신기루임을 깨달은 유저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나와? 어떤 새끼가 낚은 거야! 분명히 임페리얼 길드 개새끼였지? 어떤 새끼야!”

“이런 씨뱅이 있나! 감히 누굴 낚아? 당장에라도… 허억!”

콰르르릉.

“따, 땅이 갈라진다!”

“으악! 피해!”

신기루를 오아시스라 말한 유저를 찾아 분노를 내뿜던 유저들 사이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흔들렸다.

이내 땅이 쩍 갈라지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형성되었다.

“그레이트 웜!”

“원정대원은 모두 뒤로 빠지세요! 그레이트 웜입니다!”

거대한 크레이터 사이에서 고층 빌딩 크기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50미터는 됨 직한 그레이트 웜의 크기에 유저들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워어어엉.

사막의 포식자 그레이트 웜의 포효가 사막을 뒤흔들었다.

추정 레벨 500의 준보스급 몬스터 그레이트 웜.

여태 사냥을 당한 적이 없을 정도로 희귀하면서도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전사 분들은 녀석의 움직임을 봉쇄해주세요!”

“마법사 여러분은 녀석에게 아이스 계열 마법을 시전하세요!”

그레이트 웜에 대한 정보도 조사했는지 그랜저와 알무니아가 지시를 내렸다.

그들의 지시에 우왕좌왕하던 유저들도 마음을 다잡고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이 몸이 잡아주마! 하아앗, 거인의 괴력!”

그레이트 웜의 거대한 몸집에도 위축되지 않고 지존 12인 중 한 사람인 거인 토르가 레전드 망치 묠니르를 들고 스킬을 시전했다.

콰아앙!

과연 지존 12인 중 한 사람답게 그의 공격은 지축을 뒤흔들며 그레이트 웜에게 타격을 입혔다.

그워어엉.

“빌어먹을! 역시나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이건가?”

하지만 그레이트 웜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의 포효는 고통에 찬 것이 아닌, 그저 순수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랜스!”

“아이스 애로우!”

그레이트 웜의 거대한 입이 거인 토르를 집어삼키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에 반응하듯 마법사들이 각기 아이스 계열의 마법을 시전하며 녀석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토르, 내가 도와주겠소!”

거인 토르의 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고층 빌딩을 연상시키는 그레이트 웜을 상대로 홀로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선 이가 있었으니, 원정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으면서도 거인 토르와 같은 지존 12인으로 군림하고 있는 소울 스타 그랜저였다.

“당신이라면 믿을 만하지!”

거인 토르도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그랜저의 힘을 빌렸다. 그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바였다.

“나도 돕지!”

“오오, 카오스 팔라딘 카멜이다!”

“고블린 학살자 카멜이다!”

어느새 칭호까지 붙은 카멜도 온몸에 보조 마법을 두르고 그레이트 웜에게 다가갔다.

협곡에서의 전투로 그의 실력을 알게 된 토르와 그랜저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나도 한몫 거들지!”

“우아아아! 최강의 사내 아렌이다!”

“비스트 슬레이어!”

마지막으로 최강의 사내라 불리는 아렌마저 앞으로 나서자 원정대의 사기가 드높아졌다. 유저 중 최고의 야성을 지닌 그라면 충분히 그레이트 웜을 상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각기 네 방향에서 녀석의 움직임을 분산시킬 테니 마법사 분들과 정령사 분들은 마법이나 정령 마법으로 녀석을 공격해주시오!”

그랜저의 지시에 마법사들이 제각기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그랜저는 함께 앞으로 나선 3명의 유저들을 보며 말했다.

“과거의 은원이 어떻든 간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우로서 움직입시다. 눈앞의 상대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도 상대하기 벅차다는 걸 여러분도 잘 알 겁니다.”

“큭큭, 그렇게 하지.”

“동의합니다.”

“으하하하! 당연한 것 아닌가!”

“자, 우리의 힘을 보여 줍시다!”

그랜저의 지시에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네 사람이 그레이트 웜을 둘러싸고 네 방향에서 일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거인 토르의 망치가 그레이트 웜을 두드렸고, 그랜저의 소울 소드가 그레이트 웜의 피부를 갈랐다.

카오스 오러를 머금은 카멜의 검이 그레이트 웜의 진갈색 피를 밖으로 분출시켰고, 최강의 사내 아렌의 손에 달린 쉐도우 클로가 그레이트 웜의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한기의 바람이여, 그 응집된 힘을 분출시켜 적의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발길지니! 아이스 블래스트(Ice Blast)!”

“눈의 여신 헤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파괴의 눈 결정을 이 땅에 내리노라! 프로즌 오브(Frozen Obe)!”

네 사람이 그레이트 웜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있을 때, 캐스팅을 마친 마법사들이 각자 고위 서클의 얼음 마법을 전개했다.

차가운 얼음으로 이루어진 한 줄기 바람이 그레이트 웜에게 쏟아졌고, 회전하는 얼음 구체가 비상했다.

그워어어엉.

“으악! 피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맹렬한 공격에 그레이트 웜이 괴로운지 거대한 동체를 뒤흔들자, 주변에 있던 4명의 사내는 빠르게 뒤로 몸을 빼냈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유저 몇몇은 거대한 동체에 휩쓸리며 목숨을 잃었다.

“젠장, 녀석이 땅속으로 사라진다!”

“막아! 땅속으로 들어가면 잡을 길이 없어!”

그레이트 웜은 몸을 한차례 흔들고는 땅속으로 몸을 숨겼다. 급히 그랜저와 아렌이 나서서 녀석을 저지해봤지만 고작 2명의 힘으로 그레이트 웜을 제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 사방으로 흩어지세요! 한곳에 모여 있다가 전멸하면 큰일입니다!”

그레이트 웜이 땅속으로 사라지자마자 그랜저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레이트 웜의 주공격은 땅속에서 갑자기 솟구쳐 커다란 입으로 집어삼키는 것. 그의 말대로 모여 있다가 한순간에 공격을 당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러다 내가 당하면 어쩔 건데!”

“빌어먹을! 내 말이 그 말이야!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미끼로 그레이트 웜을 낚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그랜저의 지시에 유저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나 생명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마법사 계열의 유저들은 더욱 불만이 많았다. 만의 하나 자신들이 공격을 당한다면 속절없이 녀석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유저들은 그랜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몇몇 파티들이 일행을 이끌고 사막 곳곳으로 움직인 탓이었다.

괜히 사람이 많은 곳에 모여 있다가 녀석의 먹잇감이라도 되는 날에는 그야말로 개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움직이자.”

천휘 일행도 서둘러 움직였다. 그들은 다른 유저들과 달리 믿는 구석이 있었다. 괜히 다른 유저들에게 휩쓸릴 필요는 없었다.

“하린 누님! 녀석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계시죠?”

“당연하지, 동생. 지금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어. 어서 반대편으로 움직여야 돼!”

모험가 직업을 가진 하린의 존재는 일행에게 있어 옵저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모험가의 스킬 중 적대 성향을 지닌 몬스터를 탐지할 수 있는 ‘몬스터 탐지’ 스킬을 익힌 덕이었다.

그워어어엉!

“나타났다!”

“으아악! 살려 줘!”

“흑마법사들은 녀석이 다시 땅속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저주 마법을 걸어주세요!”

그레이트 웜이 나타나자마자 그랜저가 녀석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한 지시를 내렸다.

총 3명의 남녀가 그레이트 웜의 먹이가 되어 녀석의 입 안으로 사라졌지만 그런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았다. 그레이트 웜이 다시 땅속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그대에게서 어둠을 빼앗을지니, 블라인드(Blind)!”

“그대의 정신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컨퓨즈(Confuse)!”

“당신의 육체를 악마의 손짓으로 옭아맬지니, 데크리피티(Decrepity)!”

순식간에 그레이트 웜에게로 저주 마법들이 전개되었다.

마법 저항력이 뛰어난 녀석이었지만, 트리플 마스터 흑마법사들의 저주 마법은 그보다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녀석은 순식간에 눈이 멀고 정신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악마술사로 보이는 사내의 마법으로 인해 온몸이 무기력증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곧 녀석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녀석을 이제 잡아…….”

그러나 그레이트 웜은 여전히 팔팔했다. 막 그랜저 외 3명의 사내가 녀석에게로 향했지만 마치 약 올리듯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젠장, 녀석에게 마법을 지속시키는 것은 고작해야 3초에 불과합니다!”

저주 마법을 전개했던 흑마법사의 말을 통해 녀석이 왜 땅속으로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워어어엉.

“끄아아악!”

그워어어엉.

“아아아악! 내 다리!”

그 이후에도 그레이트 웜은 마치 제집 마당을 거닐 듯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원정대를 공격했다.

녀석의 지능이 꽤 뛰어난 듯 본능적으로 원정대의 최고 강자들에게는 덤비지 않고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고 실력이 뒤처지는 이들만 골라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좀 해봐!”

“이러다 다 죽겠어!”

시시각각 조여 오는 그레이트 웜의 공격에 유저들은 공포에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트리플 마스터에 올랐을 그들이었지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들로서도 견디기 힘든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임페리얼 길드의 농간에 결국 놀아나다니!”

“누가 아니래! 내 이번 원정에서 낙오되면 당장에라도 오시리스 게시판에다 글을 올리겠어! 임페리얼 길드가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고!”

결국 유저들의 원성은 이번 원정을 기획한 그랜저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분노는 어마어마해 평소 냉철한 면모를 보였던 그랜저마저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훗, 녀석이 당황하는데?”

“아니, 아직 멀었어. 이 정도 난관에 당황하면 섭섭하지. 큭큭.”

그랜저가 당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로빈과 천휘는 그를 비웃으며 큭큭댔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그레이트 웜에 대한 공포는 상당한 것이었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이쯤에서 녀석을 처치하자. 저쪽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봐서는 아마 어떻게든 녀석의 움직임을 봉쇄할 거야. 그리고 그 후에 정령사 중에서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한다는 번개의 정령사 신선이 마무리를 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거야. 그레이트 웜의 생명력은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우린 그때를 노려 마지막 마무리를 한다. 로빈과 눈송이가 준비해둬.”

“뭐? 우리가 뭘 어떻게?”

“그래용! 내 얼음 마법으로는 녀석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없다고용!”

천휘의 지시에 로빈과 눈송이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멍청한! 로빈, 너의 마나 증폭 마법진으로 눈송이가 전개하는 얼음 마법의 위력을 몇 배는 더 증강시킬 수 있잖아!”

“아!”

천휘의 말에 로빈이 멋쩍은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면 되겠지? 어서 준비해! 눈송이, 넌 혹시 모르니까 네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마법을 준비하고.”

“그런뎅…….”

“응?”

평소 생기발랄한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여 주던 눈송이가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을 하자 천휘가 살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봤다.

“저한텡 최근에 익힌 최강의 얼음 마법이 있거든용…….”

“뭐야? 그런 게 있었어?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얼른 준비해! 네가 그렇게 자신하는 거면 믿을 만하겠지.”

“그렇긴 한뎅…….”

“응?”

눈송이의 말에 반색하며 즐거워하던 천휘는 그녀의 애매모호한 반응에 의아한 듯 그녀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상급 마나석이 하나 필요해용. 그걸 매개체로 써야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에용. 그것도 고대 마법.”

“고대 마법?”

상급 마나석을 매개체로 써야 한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천휘는 이어진 고대 마법이라는 말에 의문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고대 마법이 뭐냐, 로빈?”

“저, 정말 고대 마법을 익힌 거야?”

로빈은 고대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깜짝 놀란 얼굴로 눈송이의 어깨를 부여잡고 물었다.

“넹. 고대 마법 하쿠나 마타타. 저도 아직 써보진 못했지만 상급 마나석을 매개체로 하는 거니 아마 대단할 거예용.”

“로빈, 고대 마법이 뭐냐니까!”

“고대 하스렌 제국 시대에 소실된 마법을 고대 마법이라 통칭하지. 고대 하스렌 제국은 검과 마법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졌던 시기지. 그 시절의 검술과 마법은 지금의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 아마 마지막 황제였던 카이젠이 익힌 검술도 고대의 검술일 가능성이 커. 아무튼 그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것이 바로 고대 마법이다. 아마 위력은…….”

“흐음, 그런 대단한 걸 익혔다 이 소리지? 이야, 눈송이 다시 봐야겠는데? 좋아, 내 큰맘 먹고 상급 마나석을 선물하지. 아마 몇 개 있을 거야.”

사실 눈송이는 전력 외로 치부하고 있던 천휘였다. 일행 개개인이 각 분야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것에 반해 그녀는 얼음 마법에만 치중한 반쪽짜리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언어에 대한 재능이 남달라 고대어와 고대사에 능통한 고고학자였다. 물론 가상현실상에서만 그러했지만 고고학자라는 보조 직업은 의외로 유용한 구석이 많았다.

“좋았어! 준비는 끝났다! 이제 저쪽에서 움직여 주는 것만 남았는데…….”

“슬슬 우리가 나서서 장내를 정리해야 하지 않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라버니. 이쯤이면 유저들도 그랜저보다는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할 테니까요.”

“허허, 과연 그렇겠지?”

데브라와 신선은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 태평하게 대화를 나눴다.

주변에는 그들을 따르는 몇몇 유저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들 역시 그런 분위기를 즐기는 듯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전장의 지배자는 그랜저나 그레이트 웜이 아닌 자신들이 따르는 저 두 사람이라는 것을.

“지렁이 녀석의 행동 패턴을 봐서는 금방 다시 나올 것이야. 준비하게, 데브라.”

“그럴게요, 신선 오라버니.”

데브라는 웃으며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녀의 직업은 데몬 위치.

흑마법사 계열의 히든 직업으로서, 악마를 부리는 마녀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터였다.

“열려라, 마계의 문이여!”

데브라가 마치 마녀처럼 허공을 향해 양팔을 대각선으로 뻗으며 소리치자 그녀의 머리 위로 작은 잿빛 구름이 형성되었다.

이내 그 구름에서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 꼬마 악마들이 우후죽순 모습을 드러냈다.

그워어어엉.

마계의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레이트 웜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등장에 여지없이 유저 서너 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계의 소악마 그렘린이여! 속박의 힘으로 저 지렁이 녀석을 옭아매라!”

끼기기기긱!

데몬 위치 데브라의 명령에 소악마 그렘린들이 일제히 그레이트 웜에게로 날아들었다.

적어도 1천 단위에 이르는 녀석들의 어마어마한 숫자.

엄청난 숫자의 그렘린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우며 그레이트 웜에게 달라붙었다.

“호호호, 이제 최소 5분간 녀석은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허허, 역시 데몬 위치로군. 잘했네. 이제 내 차례일세! 나오너라, 번개의 정령 라이오너!”

우르릉, 쾅!

찌지지직.

“버, 번개의 정령!”

“번개의 정령사 라이오너다!”

“허허, 내가 무척 반가운가 보군. 그럼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번개의 정령사 신선은 기분 좋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표정은 신선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흉신악살처럼 흉물스럽게 변모했다.

“저 녀석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려!”

찌지지직.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었다.

번개의 정령 라이오너에게 필요한 건 그저 파괴 본능을 심어주는 것뿐이었다.

그워어어엉.

그레이트 웜은 소악마 그렘린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에게 죽음을 선고하고자 라이오너가 하늘 위로 붕 떠올랐다.

찌지지직.

그워어어엉.

번개의 정령 라이오너와 그레이트 웜의 대치.

두 절대자들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내리쳐라, 벼락이여!”

찌지지직.

신선의 명령에 따라 라이오너가 벼락으로 화해 그레이트 웜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그워어어엉.

“녀석이 고통에 울부짖고 있어!”

“역시 신선! 번개의 정령사!”

“데몬 위치 데브라의 악마들은 또 어떻고!”

처음으로 그레이트 웜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광경을 연출하자 유저들이 드디어 녀석을 처치하는구나 싶어 환호성을 내질렀다.

번개의 정령 라이오너는 그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더욱더 강한 번개의 힘으로 그레이트 웜의 내장을 파고들었다.

그워어어엉.

털썩.

“됐다! 드디어 녀석이 죽었다!”

“번개의 정령사 신선, 최고다!”

“데몬 위치 데브라, 너도 최고다!”

“와아아아! 그레이트 웜을 물리쳤다!”

그레이트 웜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땅 위로 거대한 동체를 뉘었다. 그리고 녀석은 더 이상 움직이지도,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지렁이 새끼!”

“젠장! 이 자식 때문에 죽은 동료가 몇이야!”

그레이트 웜이 죽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유저들이 하나 둘 그레이트 웜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분풀이라도 하듯 녀석에게 발길질을 해대고 침을 내뱉었다.

번쩍!

“으아아악! 모두 피해! 저 녀석 아직 안 죽었다고!”

“빌어먹을! 저 녀석 눈이 뜨였어!”

그워어어엉.

하지만 그레이트 웜은 죽지 않았다.

유저들은 녀석의 시체가 5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한 듯했다.

보통 몬스터의 시체는 1분 내로 사라진다. 보스급 몬스터의 경우에는 그 시간이 5분 정도였지만 그레이트 웜과 같은 준보스급 몬스터는 3분이면 충분했다.

유저들은 한마디로 녀석에게 낚인 것이다.

그리고 녀석에게 낚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워어어엉.

“으아아악! 살려 줘!”

그레이트 웜은 자신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유저들을 향해 거대한 동체를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다.

두고 볼 것도 없이 유저들은 녀석의 거대한 동체에 압사당했고, 그 짧은 찰나의 순간 물경 2백에 달하는 유저들이 목숨을 잃었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녀석이 다시 살아난 거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가 나서서 녀석의 난동을 제압해야 한다!”

“으으, 괴물 같은 놈!”

그레이트 웜의 난동에 그랜저와 거인 토르, 그리고 최강의 사내 아렌이 나섰다.

카멜은 이미 천휘 일행과 합류한 뒤였다.

하지만 세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정확히는 원정대의 모든 유저들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황량한 사막을 뒤흔드는 마나의 공명 때문이었다.

최소 트리플 마스터가 모인 만큼 그들의 마나 감응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때문에 그들의 수준보다 압도적인 마나 공명이 일어나자 놀라움이 심해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쿠나 마타타!”

콰과과과광.

뜨거운 사막의 모래벌판을 뚫고 저 깊은 지하의 심연에서 얼음 빙산이 솟아올랐다.

마치 송곳을 연상시킬 만큼 거대하고 뾰족한 빙산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날카로움으로 그레이트 웜을 꼬치 꿰듯 꿰어내며 하늘 위로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이 단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

그 기이하고도 경이로운 광경을 보던 유저들은 마치 동상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것은 천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마법, 하쿠나 마타타.

그것은 마법이 아닌 천재지변이었다.

천휘는 알 수 있었다.

고대 하스렌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그리고 마지막 황제였던 카이젠이 왜 그토록 강한 것인지.

고대 제국 하스렌.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져서는 안 될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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