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협곡의 사투 (47/82)

제6장 협곡의 사투

“음산해.”

“이 정도는 펜하르트 왕국 서남부에 위치한 독사의 대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하하하.”

자신들의 실력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바보들인지 원정대에 속한 몇몇 파티들은 협곡을 가로지르며 긴장감 없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마치 산보라도 나온 듯 여유롭게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저들은 뭐죠, 누님?”

그런 그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카멜이 하린에게 물었다. 엄청난 정보력으로 중무장한 하린이라면 저들을 알고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었던 하린도 고개를 내저었다.

“웬만한 고렙 유저들은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는데 저들은 잘 모르겠네. 흐음, 최근에 트리플 마스터에 오른 유저들인가? 아무튼 잘 모르겠어, 동생.”

“그래요? 뭐야, 허접들이었어?”

하린의 말에 카멜이 입가에 조소를 그리며 즐거워했다.

“그렇다 해도 트리플 마스터다. 우리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그보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이 협곡…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천휘의 핀잔에 카멜도 얼굴을 굳히며 일행과 거리를 좁혔다.

그것은 다른 파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손에 꼽히는 강자들답게 하나같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원정대는 반나절가량을 이동했다.

하지만 바위 산맥의 규모가 워낙 방대한 탓에 아직도 협곡을 지나치지 못했고, 결국 어두운 협곡 안에서 숙영지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파이어.”

화르륵.

로빈의 마법으로 준비한 땔감에 불을 붙이자 금세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모닥불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다른 파티도 마찬가지인 듯 어두운 협곡 안을 모닥불이 점점이 밝혀 나가고 있었다.

“젠장, 벌써 이틀째 걷기만 하다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살 수가 있나.”

“그런 소리 마, 동생. 원래 평화로운 게 좋은 거야. 나는 이대로 영영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이고, 그런 불길한 소린 제발 거둬주세요. 화끈하게 붙으면서 경험치를 쌓아야 남들보다 앞서 갈 수 있다고요. 그래야 더욱 강해지는 거고요.”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서두른다고 좋을 건 없어. 카멜 동생도 이참에 그 성급한 성질 좀 죽일 필요가 있어.”

“그런가?”

하린의 충고에 카멜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어했다.

그런 그를 놀리듯 블랙헤드가 모닥불 위에 바비큐 통을 올리며 말했다.

“하린 누님 말이 맞당깨요. 저 자슥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부터 고쳐야 쓴당깨요.”

“오랜만에 블랙이 옳은 소리 했다. 카멜, 너는 진짜 전후 사정 좀 생각해서 행동할 필요가 있어. 너한테만 피해가 가는 게 아니고, 남들한테도 피해를 주잖아!”

“쳇, 내가 얼마나 피해를 줬다고! 아아아아! 몰라, 몰라! 블랙아, 얼른 고기나 올려 봐. 간만에 식객님의 요리 좀 맛보자!”

“흐흐, 걱정을 말랑깨. 내가 최고의 통돼지 바비큐를 보여 줄 텡깨.”

“오오, 기대하겠어!”

일행은 대화를 중단한 채 모닥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식객 블랙헤드가 자신만의 특별한 통돼지 바비큐를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행은 식객이라는 히든 직업을 지닌 블랙헤드의 요리가 얼마나 뛰어난 맛을 보여 주는지 잘 알게 되었다. 단순히 맛의 뛰어남을 떠나 그의 요리는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일행이었기에 그의 요리에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스멀스멀.

“우오오오! 죽인다, 냄새 죽여!”

“심하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코끝을 저며 오는 이 고소한 향기라니!”

“블랙 오라버니, 빨리 좀 하세용! 배고파용!”

“으하하하! 기다리랑깨, 기다려!”

모닥불 위의 통돼지는 어느새 노릇노릇 구워져 있었다. 하지만 블랙헤드는 거기에서 요리를 끝마치지 않고 커다란 양동이에 흑갈색의 걸쭉한 양념을 담아왔다.

“비켜 봐, 마지막 양념을 해야 항깨!”

“우오오오!”

블랙헤드의 말에 일행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블랙헤드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구워진 통돼지에 양념을 골고루 바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못 참겠어!”

고소한 돼지고기 냄새에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향기가 더해지자 일행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평소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는 로빈이나 카리스마를 뽐내는 천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식객 블랙헤드의 요리는 참을 수 없는 마성을 지니고 있었다.

“꿀꺽.”

“제, 젠장!”

천휘 일행이 일제히 달려들어 통돼지 바비큐를 시식하는 모습을 보며 주변의 유저들도 침을 삼켰다. 통돼지 바비큐가 연출하는 고기 냄새는 그들로서도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우걱우걱.

“저, 저럴 수가!”

“어떻게 저리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야?”

“으아아아! 나도 먹고 싶다, 먹고 싶다!”

천휘 일행이 광속으로 통돼지 바비큐를 해치워나가자 주변의 유저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통돼지 바비큐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먹는 것을 빼앗길 카멜이 아니었다.

“카오틱 배리어!”

타앙.

“빌어먹을! 젠장! 제발 안으로 들여보내줘! 나도 먹고 싶다고!”

“미안하지만 안 돼.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해. 정 뭐하면 너희가 만들어 먹어!”

“세상에, 저리 냉정할 수가!”

“먹을 것 가지고 치사하게!”

카멜의 냉정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달려들던 유저들이 낙심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개중에 난폭한 유저들은 자신의 무기를 이용해 카멜이 형성한 카오틱 배리어를 마구 두들겼다. 그렇게 해서라도 통돼지 바비큐를 꼭 먹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래, 부수자! 반드시 저 고기를 먹어야 돼!”

“서둘러! 부수자, 부숴!”

“부수자!”

“부수자!”

“이런 미친!”

어느새 유저들은 통돼지 바비큐에 대한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입가에서 침까지 흘러내려 흡사 광신도들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끄어억! 잘 먹었다.”

“아, 잘 먹었네. 고마워용, 블랙 오빠! 다음에도 또 부탁해용!”

“당연한 거 아니랑깨! 우리 귀여운 눈송이가 부탁하면 언제라도 만들어준당깨!”

하지만 천휘 일행은 주변의 소란에도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이지 않은 채 통돼지 바비큐를 모두 먹어치웠다. 마치 주변의 유저들을 없는 사람들로 취급하는 듯했다.

“마, 말도 안 돼!”

“으아아악! 내 통돼지! 한 입도 못 먹어보고!”

어느새 앙상하게 뼈만 남아버린 통돼지를 바라보며 유저들은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토록 통돼지 바비큐에 연연하는 이유는 바로 식객 블랙헤드가 그것에 모종의 특별한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아귀의 절규라는 스킬로, 오로지 식객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직업 스킬이었다.

효과는 음식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서, 아귀의 절규가 첨가된 음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보조 스킬이 될 수 있었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뭐, 뭐야, 이거! 야, 블랙! 대체 너 이 통돼지 바비큐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자식들이 지금 왜 이래?”

“아, 그거는 말이다잉, 이 통돼지 바비큐는 아귀의 절규라는…….”

“피해!”

휘익.

탁!

블랙헤드가 자랑스럽게 통돼지 바비큐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려는 찰나, 카멜이 급히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적이다!”

“몬스터의 기습이다! 모두 전투 준비!”

블랙헤드를 향해 갑자기 날아든 것은 바늘 크기의 작은 침이었다. 게다가 침 끝에 독이 발라져 있는지 카멜의 유니크 풀 플레이트 메일이 살짝 부식되기까지 했다.

“협곡 위쪽이다!”

“마법사들은 협곡 위쪽으로 라이트 마법을!”

“세상을 환하게 비출지니, 라이트(Light)!”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한 마법사가 협곡 위쪽으로 대단위 라이트 마법을 펼쳤다.

그러자 이윽고 어두웠던 협곡 위쪽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고, 고블린!”

“이토록 많은 고블린이라니!”

“피해! 녀석들이 투창을 던진다!”

협곡 위쪽에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고블린들이 자세를 취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먹잇감을 노리고 작살을 던지는 낚시꾼의 그것과 흡사했다.

쐐액, 쐐액.

“끄악!”

“배리어!”

“하앗! 소드 배리어!”

하지만 고블린의 투창들은 원정대의 유저들에겐 큰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다. 개중에 블랙헤드의 통돼지 바비큐에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몇몇 유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스킬이나 마법을 이용해 고블린들의 투창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냈다.

“저들은 바위 일족 고블린이에요! 등급은 B+! 독침에 묻어 있는 독은 마비독으로, 3초간 전신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어요!”

쏟아지는 투창의 비를 모두 막아내자 모험가로 보이는 한 유저가 큰 소리로 고블린들에 대해 설명했다. 고블린에 대한 소소한 정보를 파악해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모험가의 상위 직업인 몬스터 헌터인 듯했다.

“빌어먹을, 고블린! 모두 협곡을 타고 올라가서 녀석들을 죽입시다!”

바위 일족 고블린이 쏜 독침에 당했는지 왼팔이 퉁퉁 부은 한 전사 유저가 큰 소리로 소리치자, 그에 상응하듯 검사나 전사와 같은 근접 공격에 특화된 직업군 유저들이 협곡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쐐액.

“끄악!”

쐐액.

“젠장! 고블린들 때문에 오를 수가 없잖아!”

하지만 호기롭게 나선 그들은 뜻한 바를 이룰 수가 없었다. 협곡의 경사면이 워낙 가파른 탓도 있었지만 협곡 위쪽을 장악하고 있는 바위 일족 고블린들이 투창 세례를 퍼부어 원정대 유저들로 하여금 쉬이 오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온다! 이번엔 독침이다!”

바위 일족 고블린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투창으로 인해 혼비백산한 유저들의 머리 위에 곧바로 마비독이 묻은 독침을 쏘아낸 것이다.

“커헉! 모, 몸이!”

“사제들은 뭐 하는 겁니까? 어서 해독 마법을 걸어주세요!”

“몸속의 나쁜 기운을 정화할지니, 큐어 포이즌(Cure Poison)!”

“리스토어(Restore)!”

사제들이 펼친 빛무리가 협곡 안으로 퍼져 나갔다.

각 파티별로 최소한 한 명의 사제는 대동하고 있던 터라 독침에 당했던 유저들은 이내 회복해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궁수나 사냥꾼들은 고블린들을 향해 활을 쏘십시오! 투창이나 독침을 쏘지 못하도록 견제해야 합니다!”

어느새 그랜저가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원정대의 대장이 그인지라 모든 전투의 통솔권이 그에게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유저들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지시에 맞춰 궁수 직업이나 사냥꾼 직업을 지닌 유저들이 협곡 위쪽을 향해 활을 날려 대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범위 공격이 아닌 애로우 계열의 대인 마법만을 펼쳐 주십시오! 자칫하다가는 협곡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랜저의 지시는 전장을 꿰뚫어 보는 면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마법사들이 귀찮은 고블린들을 처치하기 위해 대단위 범위 마법을 펼쳤다가는 협곡이 무너질 염려가 있었다.

“이외에 몸이 가벼운 격투가 분들이나 헌터 계열의 유저 분들은 고블린들의 독침을 피해 협곡을 지그재그로 타고 올라가 녀석들을 처치해주십시오. 아무래도 여러분이 나서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협곡의 폭은 좁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5미터를 상회했다. 일반적인 신체 능력이라면 절대 지그재그로 밟으며 위로 올라갈 수 없는 폭이었다.

하지만 그랜저의 지시처럼 몸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격투가나 헌터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욱이 트리플 마스터에 오를 정도의 강자들이라면 이 정도 협곡쯤은 우습게 오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협곡 위쪽을 장악하고 있는 바위 일족 고블린들은 물경 1천 단위를 넘어서는 숫자였다. 원정대 역시 1천에 달하는 머릿수였지만 그들 중 격투가나 헌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부터 사제 여러분은 각 파티의 격투가와 헌터 유저 분들에게 모든 회복 마법을 집중해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사 여러분은 각자 무기를 들고 땅바닥에 떨어지는 고블린들의 목숨을 끊어주시면 됩니다!”

그랜저가 마지막에 전사들에게 내린 명령을 통해 그가 격투가와 헌터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저 협곡을 타고 올라가 고블린들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고깝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랜저 녀석의 지시가 최선이다. 카멜, 너는 이참에 네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해둬라.”

“그게 무슨 말이냐?”

“너 하나 정도는 남들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어. 그래야 녀석들이 우리를 위험한 전장에 투입할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위험한 전장에 투입되면 안 좋은 거 아냐?”

카멜이 의아해하며 묻자 천휘가 그랜저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우리가 남들보다 돋보여야 저 녀석이 내 정체를 알아봐도 뒤탈이 없지.”

“다른 유저들이 너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거란 소리냐?”

천휘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꿰뚫어 본 로빈이 물었다.

“무작정 우리 편이 되어주진 않겠지. 하지만 불합리한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우리가 전투에서 저들을 돕고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면 저들은 분명 차후에 우리를 위해 자기도 모르게 한 번쯤 힘을 실어주게 될 거다.”

“흐음, 과연?”

“알았으면 일행에게 그렇게 일러둬. 하지만 3할의 힘은 언제든지 감춰둬야 한다는 것 잊지 마라.”

“물론!”

“그럼 나 먼저 움직인다!”

일행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린 천휘는 곧바로 절벽을 타고 올랐다. 이미 몸놀림이 가벼운 어쌔신들이나 헌터들이 절벽을 타오르고 있었다.

휘익.

“어딜!”

깡.

바위 일족 고블린이 던진 투창을 주먹으로 쳐냈다. 제법 실린 힘이 묵직했지만 천휘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탁탁탁.

천휘는 마치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절벽을 올라갔다. 워낙 난전이 펼쳐지는 탓에 천휘에게 신경을 쓰는 이들이 없었기에 힘을 숨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쳇, 더럽게 많잖아?”

절벽을 타고 오르면 오를수록 바위 일족 고블린들이 새까맣게 절벽을 점유하고 있었다. 흡사 개미 떼처럼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숫자에 기가 다 질릴 지경이었다.

“이 녀석들을 하나하나 움직이면서 처치하는 건 너무 오래 걸리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범위 공격을 쓰는 건 무리야. 자칫 잘못하다가는 절벽이 무너질 염려가 있으니까. 젠장! 어떡하지? 차라리 원거리 무기라도 있다면… 응? 원거리 무기?”

천휘는 문득 이제는 자신의 애완견으로 전락해버린 시벨리우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녀석이 죽으면서 남긴 시벨리우스의 활이 떠올랐다.

“활이라면… 아공간 오픈, 시벨리우스의 활 소환!”

스파앗.

“좋아!”

시벨리우스의 활은 자신의 팔 길이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 이 정도면 숏 보우보다는 크고 롱 보우보다는 작았다.

“젠장! 그러고 보니 화살이 없잖아?”

로렌 녀석처럼 마나를 이용해 무형의 화살을 만들 수 있다면 모를까, 천휘에게는 반드시 화살이 필요했다.

하지만 궁수가 아닌 천휘에게 화살이 있을 리 만무했다.

“화살이라… 응? 어쩌면!”

천휘는 시벨리우스의 활을 등에 메고 다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절벽을 오른 천휘는 이내 약 200미터 높이의 절벽 꼭대기에 올라섰다.

“헉헉.”

단번에 100미터 이상을 오르는 것은 무리가 있었는지 절벽의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숨을 헐떡이는 천휘였다.

“저기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천휘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 일족 고블린 무리를 발견하고 곧장 그들에게로 신형을 날렸다.

“키킥! 인간! 인간!”

천휘가 다가오자 여느 고블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고블린 녀석이 인간의 말을 내뱉었다.

“홉고블린이구나!”

고블린들은 지능이 매우 낮다. 때문에 단체 행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고블린들을 조종하는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홉고블린이었다.

그나마 녀석들은 7세 정도의 인간 아이에 버금가는 지능을 지닌 덕에 멍청한 고블린들을 조종하고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키킥! 죽여라!”

홉고블린의 명령에 녀석의 주변에서 호위하고 있던 고블린들이 일제히 천휘를 향해 독침과 투창을 내던졌다.

“후후.”

매우 가까운 거리였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천휘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리 눈여겨봤던 돌덩이를 밟고 허공으로 치솟으며 독침과 투창을 피해낸 천휘는 그대로 홉고블린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푸슉.

파멸의 권능까지 더해진 천휘의 주먹은 홉고블린의 머리통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이윽고 천휘는 주먹을 난타하며 주변에 있는 고블린들을 순식간에 정리시켰다.

“좋았어!”

천휘가 점령한 위치는 절벽에서 자리 잡고 있는 고블린들이 모조리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곳에는 대량의 투창들이 적재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종의 투창 보관소인 듯했다.

“일단 연습을 해볼까?”

천휘는 따로 궁술을 익히지 않았다. 하지만 궁수에게 가장 필요한 스탯인 민첩이 가공할 정도로 높은 덕에 어느 정도 궁술에 자신이 있었다.

휘익.

천휘는 시벨리우스의 활에 투창을 메기고 뒤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고블린 무리를 향해 화살을 조준한 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활을 튕겨 냈다.

쐐애액.

콰앙.

“헉!”

천휘가 쏘아낸 투창은 목표했던 고블린 무리가 아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끄아아악!”

“이럴 수가! 고블린 전사들이 나선 것인가!”

“…….”

자신이 쏘아낸 투창에 전사 한 명의 가슴이 꿰뚫리며 즉사했다.

[악명이 10 증가했습니다.]

“…뭐, 연습이니까.”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알림음.

천휘는 멍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애써 외면하고는 다시 투창을 활에 메겼다.

“이번에야말로!”

휘익.

탁!

끼기긱.

“…헐.”

이번에는 확실히 바위 일족 고블린에게 명중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천휘가 목표로 한 고블린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목표물의 근방에 있는 녀석도 아니었다. 대략 20미터는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블린 무리에 투창이 날아든 것이다.

“…맞히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어차피 활은 그의 주 무기가 아니었다. 천휘는 그렇게 자위하며 계속해서 투창을 쏘아댔다.

“헉!”

콰앙.

“빌어먹을! 대체 어떤 새끼가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투창을 난사하는 거야?”

눈먼 투창에 하마터면 옆구리를 꿰뚫릴 뻔한 카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눈앞을 얼쩡거리는 고블린의 목울대를 단검으로 그어버렸다.

“그러게 말이다. 벌써 몇몇 유저들이 눈먼 투창에 목숨을 잃었어.”

“저건 고블린 전사가 던지는 게 아니야. 저 정도 속도와 파괴력으로 투창을 내던지려면 적어도 오우거 정도는 되어야 해. 고블린이 그 정도의 근력을 지니고 있다면… 역시 고블린 로드인가?”

“저기 또 날아온다!”

“피해!”

콰아앙!

또다시 날아온 투창에 하이렌과 카류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자신들을 노리고 날아든 투창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맹한지 절벽을 부수다 못해 뚫고 안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분명히 저쪽이었지?”

“확실해.”

투창의 위력에 질린 두 사람은 투창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는지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이번 전투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제법 눈썰미가 좋고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들은 강맹한 위력의 투창이 쏘아지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휘익.

쐐애액.

콰앙.

“이거 주먹질만큼 손맛이 좋은데?”

자신이 쏘아낸 투창에 고블린 무리들이 하나 둘 쓰러지자 천휘가 즐거운 듯 소리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투창을 쏘아내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주변에 유저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응?”

하지만 천휘는 저들의 움직임을 이내 눈치 챌 수 있었다. 저들이 벌써 10미터 아래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뭐지?”

천휘는 그들이 자신과 같은 원정대에 속한 유저들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저들이 뿜어내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살의. 그것을 느낀 천휘는 그들을 허투루 대할 수가 없었다.

휘익.

휘익.

급기야 절벽 아래에서 투척용 단검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독이 묻은 것도 간간이 보일 정도였다.

“빌어먹을!”

단검들이 날아들고 나서야 천휘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눈먼 자신의 투창이 몇몇 유저들에게 쏟아진 탓에 녀석들이 자신을 몬스터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대응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다면 자신이 동료 유저들을 죽인 살인자가 되기 때문이다.

“아공간 오픈, 펜릴의 망토 소환!”

자신의 모습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 천휘는 곧바로 아공간에서 전신을 가릴 수 있는 망토를 소환해 몸에 둘렀다. 그리고는 본래 얼굴을 감추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어 행낭에 집어넣었다.

“뭐야! 고블린이 아니었어?”

“이 자식은 또 뭐야? 유저가 왜 우릴?”

“이번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타 길드에서 보냈겠지! 긴말할 것 있어? 당장 녀석을 죽이자고!”

이내 천휘가 버티고 서 있는 곳까지 올라선 유저들이 천휘를 향해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다. 그를 첩자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들! 기껏 힘써서 도와줬더니!”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천휘는 녀석들을 모조리 죽일 심산이었다. 개중에 몇몇은 아는 얼굴도 있었지만 관여치 않았다.

“하앗! 파멸의 안식!”

퍼억.

“커허억!”

“하, 한 방에!”

천휘는 처음부터 강수를 두었다. 가장 강해 보이는 어쌔신을 향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파멸의 안식을 펼친 것이다.

사냥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천휘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종횡무진 눈부신 움직임을 보이며 유저들을 유린했다.

단 한 방!

저들이 보기에 평범한 단 한 방에 동료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저, 저자는!”

“그 괴, 괴물들을 부리던!”

유저들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이렌과 카류는 천휘의 압도적인 무위를 바라보다 이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지존 12인 중 거인 토르를 쓰러트린 절대 고수이자 괴물 같은 신위를 지닌 부하들을 거느린 이름 모를 괴인.

그 사실을 눈치 챈 하이렌과 카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벽을 내려갔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저 살육에 자신들도 휩쓸릴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쐐애애액.

푸캉.

“허억!”

“이, 이 화살은!”

하지만 두 사람은 뜻한 바를 이룰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화살 한 대가 두 사람의 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 화살은 마치 연기처럼 이윽고 푸른 아지랑이와 함께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그 화살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어쌔신인 자신들을 토끼 사냥하듯 몰아서 사로잡았던 바로 그 악마의 활을 지닌 사나이.

하마터면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갔을 그 화살이 날아온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천휘가 다른 유저들을 모조리 쳐 죽일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라 치면 어떻게 알고 화살이 날아온 탓이었다.

“후우,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

“…….”

순식간에 10명에 가까운 유저들을 처치하고 마지막 유저를 처리하며 진심으로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천휘는 이내 멀리서 장승처럼 굳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이렌과 카류를 발견했다.

“어라? 당신들은!”

“…하하.”

“…하하.”

“그때 그 숲에서 만났던 그분들 맞죠?”

“아, 뭐.”

“그렇다고 할 수가…….”

하이렌과 카류는 천휘의 물음에 그저 어색하게 대답했다. 서로에게 이런 식의 만남은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긴… 혹시?”

“하하.”

“하하.”

천휘의 물음에 두 사람은 또다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천휘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지라 차마 그를 죽이러 왔다고 대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 당신들도 잘못 알고 온 모양이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단, 여기서 일어났던 일의 원흉이 저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그 정도는 분간하실 수 있으리라 믿죠.”

“당연한 말씀을.”

“지금 당장 입에 지퍼를 채우도록 하죠.”

두 사람의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천휘는 이내 여분의 투창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려 하이렌과 카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아본 거요?”

천휘의 물음엔 살짝 짜증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분명히 인피면구를 벗어 그때의 얼굴과 달랐건만, 이 두 사람이 자신을 알아본 탓이었다.

“그건…….”

그런 천휘의 기색을 읽은 것일까, 하이렌과 카류는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굳어지는 천휘의 얼굴을 보며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가 없었다.

“당시 거인 토르를 상대하던 당신의 스타일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오. 뭐, 본래 전투 스타일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흐음.”

하이렌의 대답을 들은 천휘는 이내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전투 스타일이 단 두 번 만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다음에 또 보죠.”

“…….”

천휘가 자신의 전투 스타일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하이렌과 카류는 그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 그와 말을 섞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천휘는 절벽의 꼭대기에서 홀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끼기긱!

까앙.

“이 녀석들! 이제 근접 공격을 할 속셈이야!”

바위 일족 고블린들이 점차 절벽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녀석들이 무기로 사용하던 투창과 독침이 떨어진 탓이었다.

“모두 뭉쳐서 싸워주세요! 언제 어디서 녀석들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각 파티별로 뭉쳐 주세요!”

전면전이었다면 전사들이 앞으로 나서고 뒤에서 마법사나 궁수들이 원거리 공격을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전투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것과 사뭇 달랐다. 절벽을 타고 움직이는 바위 일족 고블린들은 언제, 어디에서 떨어져 내려 공격을 해올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체력이 낮은 사제나 마법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바위 일족 고블린들에게 당할 위험성이 있었다.

“카멜! 블랙!”

“내게 맡겨라!”

“나헌티 다 맡기랑깨!”

그랜저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이미 로빈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전면에 나서서 바위 일족 고블린들을 처치하던 카멜과 블랙이 어느새 일행의 주변으로 돌아와 철벽 방어진을 구축한 것이다.

“나도 도울게.”

“미온, 너도?”

“이래 봬도 몽크로 전직한 몸이야. 요리사보다 강하면 강했지, 못하진 않을 거야.”

“내는 요리사 아니랑깨! 내는 식객이여, 식객!”

“엎어치나 메치나. 아무튼 나도 도울게.”

“아따, 가시나, 참 정내미 떨어지게 말해쌌네.”

미온의 독설에도 블랙은 그저 얼굴만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이미 천휘를 통해서 그녀가 말은 그렇게 해도 속내는 따뜻하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온다!”

“고블린들이 내려온다!”

바위 일족 고블린 수천 마리가 순식간에 협곡을 가득 메웠다. 이미 어쌔신과 헌터들이 협곡을 종횡무진 움직이며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을 처치했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파이어 애로우!”

“썬더 애로우!”

바위 일족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먼저 손을 쓴 것은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범위 마법이 아닌 대인 마법, 그것도 가장 주변에 피해를 덜 끼치는 애로우 계열 마법을 바위 일족 고블린들에게 난사했다.

협곡에 최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끼기긱!

애로우 계열 마법은 대부분 저서클 마법이었다. 하지만 원정대의 마법사들은 최소한 6서클 이상인 고위 마법사들. 그들이 펼쳐 내는 애로우 계열 마법은 바위 일족 고블린들에게 끔찍한 치명상을 입혔다.

“스네이크 샷!”

“파워 샷!”

마법사들의 뒤를 이어 궁수와 사냥꾼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각기 활에 화살을 메겨 치명상을 입은 고블린들을 향해 화살을 난사했다.

마법보다는 위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녀석들에게는 목숨을 끊어내는 최고의 공격이었다.

끼기긱.

“쳇! 이 녀석들, 마치 바퀴벌레 같잖아!”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어! 빌어먹을!”

단 한 번의 공세로 바위 일족 고블린 수백 마리가 시체로 변했지만 아직도 녀석들은 수천 마리가 더 남아 있었다.

질긴 녀석들의 생명력에 유저들의 얼굴이 점점 사색으로 변했다.

“하앗, 카오스 미러(Chaos Mirror)!”

“야, 카멜! 너 어디 가?”

“아, 글쎄, 나 한번 믿어보라니까!”

유저들이 밀려드는 바위 일족 고블린들의 파상 공세에 쩔쩔매고 있을 때, 갑자기 카멜이 일행의 주변에서 벗어나 바위 일족 고블린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뭐야,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내버려 둬!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걸 보니 나이트인가 본데, 그래봐야 이 정도로 많은 고블린들 앞에선 별수 없어! 3분 내에 뒈지는 것에 1골드 건다!”

“그럼 난 1분 30초에 3골드!”

“난 5분에 5골드!”

카멜을 놓고 별안간 내기판이 벌어졌다. 그들은 카멜을 마치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지랄! 내는 안 죽는다는 것에 50골드 건당깨!”

그런 내기를 벌이는 녀석들이 짜증났는지 블랙헤드가 홧김에 소리쳤다.

“오오, 50골드! 여기 미친놈 또 있네!”

“아아, 잔말 말고 저 녀석이 몇 분 만에 죽는지 누가 시간 좀 재줘! 내기 돈 건 녀석들은 얼른얼른 돈 모으고!”

협곡은 순식간에 도박장으로 변해버렸다. 내기를 건 이들 대부분이 난전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법사들이었다. 아군과 적군이 밀착되어 전투를 벌이는 난전에서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마법사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탓이었다.

“하앗!”

자신을 놓고 내기를 벌이건 말건 카멜은 허공으로 껑충 뛰어올라 바위 일족 고블린들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방어는 무시한 채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 고블린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끼기긱!

까앙.

하지만 카멜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숫자에는 당할 수 없었다. 카멜의 뒤쪽에서 접근한 고블린 하나가 그의 등을 향해 투창을 내질렀다.

끼기기기긱!

“헉! 저건 또 뭐야?”

“어떻게 공격한 고블린 녀석이 되레 죽을 수가 있어?”

“사, 사기다!”

카멜을 공격한 고블린은 마치 자신이 투창에 공격을 당한 듯 타격을 입고 피를 토해냈다. 그에 반해 카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해서 거대한 양손검을 휘두르며 고블린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끼기긱!

끼기긱!

동료들이 순식간에 죽어나가자 고블린 중에서 제법 덩치가 큰 녀석들이 나섰다.

바위 일족 고블린 전사였다.

녀석들은 투창이 아닌 조악한 무쇠도끼를 휘둘러 카멜의 등을 가격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은 공격이라 카멜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끼기기긱!

끼기기긱!

“세, 세상에!”

“저 사람… 불사신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멜은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쇠도끼를 휘두르는 고블린 전사들을 손에 들린 양손검으로 대번에 베어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의 활약에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카멜의 살신성인에 힘을 숨기고 있던 고수들이 하나 둘 본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아앙! 내가 바로 카오스 팔라딘 카멜이다!”

지금 이 순간, 카오스 팔라딘 카멜의 위명이 『오벨리스크』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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