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화신의 입김
웅성웅성.
카레브 마을 동문 밖에 1천 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아이템과 근성으로 똘똘 뭉친 아르니안 대륙의 강자들이었다.
“왔군.”
“쳇, 길드의 후광을 업고 저리 생색이라니.”
“말조심해. 녀석은 이제 거물 중에서도 최고의 거물이니.”
유저들이 모여 있는 동문 밖에 수십 명의 유저들을 대동하며 그랜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존 12인 중 한 명이자 대륙 10대 길드 중 하나인 임페리얼 길드의 수장 그랜저.
그 한 사람의 등장에 동문 밖이 금세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저는 유저들 사이를 가로질러 그들의 선두로 걸어 나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위풍당당한지 유저들을 살짝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안녕하십니까, 원정대 여러분. 본인은 이번 원정을 기획하고 이끌어갈 원정대장 그랜저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와아아아!”
그랜저의 예의 바른 인사에도 불구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같은 임페리얼 길드의 길원들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번 원정은 아르니안 대륙 최초로 4대 금지 중 한 곳을 정복하는 역사적인 원정이 될 것이며, 더불어 여러분은 그 역사의 한쪽을 장식하는 일원들이 될 것입니다.”
“빌어먹을! 그딴 사탕발림 집어치우고, 당신이 얻어낸 퀘스트나 함께 공유하자고!”
그랜저의 말이 거슬렸는지 한 사내가 나서서 소리치자 우후죽순처럼 다른 유저들도 목청을 높여 퀘스트를 공유하자며 외쳐 댔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퀘스트라니요? 저희는 그저 화신의 사막을 들어서는 또 다른 통로를 발견해 이번 원정을 기획하고 실행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누가 믿느냐, 이 말이다! 솔직히 아닌 말로, 이번 원정은 워낙에 대규모라 그쪽에서 들인 돈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런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서려는 이유가 뭔데? 퀘스트 때문에 그런 거 아냐!”
“혹시나 혼자 S급 퀘스트를 독식하려는 거 아냐?”
“화신의 사막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아직까지 그 누구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바로 그 S급 퀘스트가 있을 가능성이 충분해!”
『오벨리스크』의 메인 스토리와도 관련이 있다는 S급 퀘스트는 천휘뿐만 아니라 아직 그 누구도 받아내지 못한 꿈의 퀘스트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어. 화신의 사막 정도라면 S급 퀘스트도 꿈은 아니지.’
그러한 생각은 천휘 역시 마찬가지로 하고 있었다. 설사 S급 퀘스트가 아닐지라도 그에 준하는 이윤이 화신의 사막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오해이십니다! 저희가 이번 원정을 획책한 이유는 바로 펜하르트 왕국으로부터 의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왕국으로부터의 의뢰?”
그랜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오자 공세를 펼치던 유저들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렇습니다. 펜하르트 왕국에서는 화신의 사막을 탐험하는 것을 통해 이 아르니안 대륙에서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싶은 마음에 제게 이번 원정을 의뢰했습니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한 화신의 사막 원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평소 매너 좋기로 소문난 그랜저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이 대들던 유저들의 입이 조금씩 닫히고 있었다.
그랜저의 유창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발언에 심지가 흔들리는 탓이었다.
“역시 말 하나는 잘해.”
“후후, 그렇지. 그러니까 저 정도의 인망과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겠지만.”
“으윽, 송이는 저 남자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용. 꼭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들개 같아용. 재수 없엉.”
“호호호, 그렇게 들으니 정말 송이 동생 말처럼 들개 같네?”
하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이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갈 때도 천휘 일행은 그러지 않았다. 천휘나 카멜, 그리고 로빈으로부터 그랜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어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도 그랜저의 말에 속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얼굴과 전신을 로브로 가린 채 정체를 숨기고 있는 몇몇 유저들이었다.
“천휘 동생, 저기 보이는 저자가 바로 최강이라 불리는 사내 아렌이야.”
“아렌…….”
하린의 말에 천휘가 흑갈색 망토를 두른 한 사내를 쳐다봤다. 망토와 로브를 절묘하게 겹쳐 입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번뜩이는 사자의 눈빛만큼은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한 번쯤 붙어보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지. 어쩌면 그가 변수가 될 수도 있겠어.’
최강의 사내 아렌 외에도 하린은 몇몇 이들을 찍어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유저들의 신상 정보를 알려 줬다.
그들 대부분이 천휘로서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대단한 명성의 유저들이었고, 그에 걸맞은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미온.”
“왜?”
“방금 하린 누님이 하는 말들, 다 들었지?”
“어느 정도는. 무슨 문제 있어?”
어느새 두 사람은 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문제는 그것이 『오벨리스크』 안에서만 그렇다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학교에서의 두 사람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현실과 게임 속에서의 모습이 사뭇 다른 천휘 때문이었다.
“네가 저들의 움직임을 잘 파악해줘. 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천휘는 미온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저들은 원정대 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절대 강자들.
그런 그들이 나선다면 자신이 그랜저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한결 수월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고 견제한다면 상황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저들이 어떤 편에 설 것인지 그걸 파악하라는 거 아냐.”
“그래.”
“그 정도라면 해줄게.”
천휘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에게 그러한 일을 맡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구보다 눈썰미가 좋은 그녀였기에 사람의 심리 파악에도 능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녀는 천휘가 믿을 수 있는 여인이었다.
‘자칭 타칭 지존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엉덩이가 무거운 저들이 나설 정도면 분명히 이번 원정에 뭔가 있다는 거다. 비록 그랜저에 대한 복수로 원정에 참가하긴 했지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포기할 만큼 멍청하진 않아. 이번 일은 따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오랜만이오.”
“그렇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요.”
“허허, 나야 잘 지냈지요.”
천휘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비슷한 복장을 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그들은 아무래도 서로 안면이 있는 듯했다.
“신선 형님은 여전히 제가 그 기운을 감지할 수 없네요. 성취가 더욱 높아지신 모양이군요.”
“허허. 아렌, 그대만큼 하겠는가? 과연 모든 히든 직업 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이라는 비스트 슬레이어(Beast Slayer)답군.”
“또 띄워주시는군요. 아무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역시 형님도 저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오신 것이겠지요?”
“이를 말이겠는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인데. 아무튼 잘해보세나. 저 탐욕스러운 그랜저 녀석에게 그 물건을 뺏길 수는 없으니 말이야.”
최강의 사내 아렌과 호형호제하는 사내는 50대의 지긋한 나이를 지닌 신선이라는 중년인이었다.
그의 직업은 히든 직업 중 하나인 라이오너였다.
다른 말로는 번개의 정령사라고 불리는 라이오너는 세상에서 가장 패도적인 기운인 번개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직업이었다.
두 사람 모두 패도적인 기운을 품은 이들인 탓일까. 그도 아니면 딱히 세력을 구축하지 않고 홀로 독고다이를 지향하는 게임관 때문일까.
두 사람은 다른 지존 12인들에 비해 더욱 친한 사이였다.
“호호, 역시나 두 분도 마찬가지였군요.”
“오, 데브라! 몇 개월 못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군.”
“호호, 신선 오라버니가 보시기에도 그렇죠? 제발 아렌 저 사람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네요.”
“데브라!”
“허허, 아직도 두 사람의 관계는 진전이 없는 모양이군.”
데브라라 불린 여인은 지존 12인 중 유일한 홍일점으로, 데몬 위치(Demon Witch)라는 히든 직업의 소유자였다.
더불어 그녀에겐 또 한 가지 특이 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최강의 사내 아렌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호호, 저 무뚝뚝한 석상이 변하겠어요?”
“허허, 그것도 그렇지.”
“휴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세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그 어떤 유저도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그랜저의 일장 연설에 집중하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그들과 대략 10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서 있는 천휘만은 달랐다.
‘역시 뭔가 꿍꿍이들이 있어.’
천휘는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했다. 그랜저는 물론이고 저 3명의 지존들도 화신의 사막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촉이 말해준다. 저기엔 뭔가 있다고.’
천휘의 머리카락이 하늘 위로 쭈뼛 솟아올랐다. 이번 원정에 얽힌 사안이 그만큼 크고 두렵다는 반증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난 지지 않는다! 내겐 숨겨진 최고의 패가 있으니까!’
아르니안 대륙의 4대 금지, 화신의 사막.
금지(禁地)라고 불리는 만큼 그 안에 감춰진 비밀은 어마어마할 것이 틀림없었다.
천휘는 그 비밀을 자신의 손으로 풀고 싶었다.
반드시!
뿌우우우.
그랜저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드디어 원정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정대의 선두에는 그랜저를 비롯한 임페리얼 길드의 길원들이 섰고, 그 뒤로 각 유저들이 파티를 맺으며 따르고 있었다.
“나팔수라… 저것도 일종의 히든 직업인가?”
원정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에 원정대 전원에게 효과가 일었다. 이동속도 10퍼센트 상승과 체력 회복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였다.
“세상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히든 직업이 많아. 저 사람 역시 그런 이들 중의 한 명일 거야. 그렇지 않아, 로빈 동생?”
“누님 말씀이 옳아요. 『오벨리스크』는 그만큼 방대한 게임이니까요.”
하린과 로빈의 말에 천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벨리스크』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만큼 그 깊이가 깊고 넓은 게임이다. 이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라면 그 깊이에 놀라고 그 넓이에 한 번 더 놀라게 되는 것이다.
“원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정신 바짝 차려. 그리고 원정대가 현실 시각으로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이어진다고 했으니까 되도록 그 시간은 꼭 지켜 주도록.”
천휘의 말에 일행은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천휘 오라버니와 퀘스트를 해보게 되네용.”
“나도 마찬가지랑깨요. 로빈 저 자식이 천휘와 함께 사냥을 하고 퀘스트를 풀어나가는 재미를 알려 줬는디, 그것이 참말로 즐거워 보였당깨요.”
“쿡쿡, 두 사람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천휘 이 자식이랑 함께 게임을 한다는 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툭하면 목숨을 담보로 미끼 역할을 하라고 하질 않나, 흐윽.”
“어디 그것뿐이냐? 마치 하인처럼 부리는 건 또 어떻고? 흑흑. 저 자식은 악마야, 악마!”
카멜과 로빈의 한탄 섞인 외침에 눈송이와 하린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슬며시 천휘의 얼굴을 바라봤다.
히죽.
“히익!”
“아, 악마!”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그의 웃음에 눈송이와 하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카멜의 뒤로 물러섰다.
“흐메, 저 자식은 웃는 것도 귀엽당깨. 멋져 브러!”
“…….”
“…바보.”
눈송이와 하린은 천휘의 미소에 놀라 뒷걸음쳤지만 오히려 블랙헤드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드는지 천휘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그런 그를 나머지 일행은 질렸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 오늘은 이곳에서 숙영지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미리 공고한 대로 화신의 사막에 본격적으로 들어설 테니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8시까지 『오벨리스크』에 접속해주시길 바랍니다.”
음성 확대 마법으로 모든 원정대에게 지시를 내린 그랜저의 모습을 보면서 천휘는 이를 부득 갈았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녀석의 면상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응? 저년은!’
그랜저를 바라보던 천휘는 이내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난 여인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자신을 엿 먹인 희영의 캐릭터인 헤라였다.
“저년이 나타났네.”
그런 천휘의 반응을 살폈음인지, 미온이 그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응…….”
그녀가 지칭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천휘로서는 그저 짤막하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연놈들에 대한 복수를 할 순 없어. 한두 번 죽이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잖아. 이왕 복수할 거면 철저하게 밟아버려야지. 안 그래?”
어찌 들으면 섬뜩할 수도 있는 말을 미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을 천휘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무서워.”
“악마와 악녀야, 저 둘은.”
“…….”
“…….”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대화.
하린과 눈송이는 두려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고, 카멜과 로빈은 그저 연민의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겔겔겔, 역시나 저 둘은 화끈해븐당깨! 멋져 브러!”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블랙헤드만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원정대에 합류해서 화신의 사막으로 가는 건 좋은데, 이런 속도라면 언제 화신의 사막의 심처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인데? 하루라도 빨리 원정을 끝내야 우리도 좋고 저들로서도 좋을 텐데 말이야.”
“꿀꺽꿀꺽.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랜저 녀석이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는지 모르겠어.”
천휘 일행은 원정대에서도 후방 쪽에 야영지를 차렸다. 워낙 많은 숫자의 유저들이 합류한 원정대인지라 원정대의 진영은 종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다른 유저들이 야영지를 마련하고 로그아웃한 반면, 천휘 일행은 한 명도 빠짐없이 로그아웃하지 않고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조촐한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 고렙들이라면 대부분이 오랜 시간을 게임에 투자했을 거야. 우리만 해도 그렇잖아. 적어도 새벽까지는 게임을 즐기는 게 우리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른 시간에 휴식을 취한다는 건…….”
“하린 누님은 저들에게 뭔가 시간을 늦춰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바로 그거지. 어쩌면 이번 원정대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길어질 수도 있어. 그랜저 녀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로서는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흐음.”
하린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천휘 역시 어느 정도 염려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휘 자신이 그랜저를 닦달할 수도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이번 원정의 대장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뭘 어떻게?”
고심하고 있던 찰나, 로빈이 나서서 말했다.
“천휘 네가 이끌고 있는 그들이라면 이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겠지?”
“몇몇 녀석들은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로빈이 말하는 이들은 강시들이었다. 그가 강시를 우회해서 말하는 이유는, 아직 주변에 몇몇 유저들이 로그아웃하지 않고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럼 그들로 하여금 미리 화신의 사막을 정찰하라고 하는 건 어때? 어차피 그들을 이용한다고 해도 천휘 너한테 불이익은 없지 않나?”
“오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어떠냐, 천휘야?”
로빈과 카멜의 물음에 천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잠시 다녀오마.”
“그래, 잘 지시하고 와라.”
천휘가 하는 말의 의중을 모를 리 없는 일행은 가타부타 말을 늘어놓지 않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따, 저 자식은 역시나 바빠브러. 그럼 남은 사람들끼리 술판이나 벌이장깨요. 내가 안주는 곰방 만들어오겄응깨.”
“쿡쿡, 그러자. 우리는 술이나 마시자고!”
“역시 블랙 동생은 재밌어! 나도 오랜만에 술 한번 마셔 볼까?”
“그럼 나동!”
“눈송이 넌 콜라나 마셔!”
“뭐라고용? 나도 어른이에용! 지금 나 무시하는 것임?”
“푸하하하!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못 마셔! 머리에 피나 마르고 와라.”
“나 머리에 피 다 말랐거든용? 이쒸!”
“으하하하!”
“하하하!”
“호호호!”
일행과 떨어진 천휘는 곧바로 인근의 숲으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우거진 숲이었지만 원정대의 움직임에 놀라 주변의 몬스터들이 줄행랑을 쳤기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숲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사제들이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들을 감지하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일반 사제들이라면 고작해야 반경 50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원정대에 고만고만한 사제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리버훌 성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대사제 유저들도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빛의 외침’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지존 12인 중 요한이라는 유저의 신성력은 어마어마했다.
히든 직업 세인트의 주인인 그는 리버훌 성국의 대주교에 근접할 만큼의 신성력을 보유한, 명실상부 아르니안 대륙 최고의 성직자 유저였다.
그런 그가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를 감지할 수 있는 반경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반경 10킬로미터라고도 했고, 다른 이들은 그 이상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천휘는 그 이상일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제아무리 신성력이 막대한 유저라고 해도 항상 언데드 계열 몬스터의 등장에 신경을 쓸 수는 없는 탓이었다.
“아공간 오픈!”
천휘는 아공간을 열어 차례로 강시들을 소환했다.
화신의 사막은 워낙 위험한 금지인지라 웬만한 강시들로는 정찰을 할 수 없기에 오베른을 비롯한 음양마령강시들만을 소환한 것이다.
[무슨 일인가, 주인?]
[주인님을 뵈어요.]
[주인님을 뵙습니다.]
[으하하하! 역시 바깥바람이 좋군. 주인, 간만이다!]
“쿡쿡쿡.”
각양각색의 성격을 지닌 강시들을 보며 천휘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화신의 사막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함이다.”
[화신의 사막이라면… 4대 금지 아닌가?]
[금지는 무슨 금지!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살아왔던 심연의 밀림 역시 4대 금지다! 으하하하!]
“로렌, 네 말이 맞다. 난 너희를 믿는다. 아직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알 수 없어 너희를 먼저 들여보낼 수는 없지만, 일단 이곳에서 기다렸다가 우리가 움직일 때 따라와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로즈란?”
[알겠어요, 주인님.]
천휘는 막무가내인 오베른과 로렌이 아닌 로즈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가 그나마 가장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번 명령에 대한 지휘권을 로즈란에게 내리겠다. 너희 셋은 무슨 일이 있어도 로즈란의 말을 따라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꿀꺽.]
[으하하하! 그 정도 고통쯤이야… 참을 수 없다. 말 잘 따르도록 하지.]
천휘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자명한 일이기에 카이젠과 로렌은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다.
“일단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서기만 한다면 그 이후에는 원정대를 앞질러 화신의 사막 심처로 움직여라. 당연히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주인,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그게 뭐지?”
천휘의 말에 오베른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적들은?]
오베른의 물음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천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베른을 비롯해 카이젠과 로렌은 전형적인 투사였다. 잠을 자는 것보다 전투를 즐긴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후후, 당연하지 않나. 모조리 죽여도 좋다.”
[쿡쿡.]
[으하하하! 역시 주인은 최고다!]
천휘의 대답에 카이젠과 로렌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웬일인지 로즈란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녀 역시 그동안 마법을 부릴 수 없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난 이만 물러가마. 너희에게 행운을 비마.”
[우리를 믿으세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어찌할 순 없어요.]
[방해하는 것은 처참하게 짓이길 것이고, 우리에게 이를 드러내는 것들은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그게 우리다!]
[으하하하! 좋군, 좋아! 내가 그래서 오베른 당신을 좋아한다니까!]
[쿡쿡.]
히죽.
네 강시들의 자신감은 충분히 가질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강했고, 천휘는 그런 그들을 믿었다. 이번 원정에 어떤 모략과 계략이 숨어 있다 해도 그들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화신의 영역에 짙은 살기가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다.
다음 날, 현실 시각으로 7시가 넘어가자 다시금 원정대의 원정대원들이 하나 둘 야영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번 원정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보여 주듯 원정대에 속한 유저들 중 아직까지 접속하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약속한 시각이 되자 원정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정대의 방향은 화신의 사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거대한 바위 산맥.
아무리 둘러봐도 산맥을 넘어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서는 통로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역시 『오벨리스크』를 열심히 플레이해온 만큼 이런 경우에는 베일에 싸인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뭐가 보이나요, 누님?”
“아니, 이 근방에는 이렇다 할 마나의 변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어. 흐음, 그렇다면 일종의 기관이 장치되어 있는 건가?”
모험가인 하린의 탐색 기능으로도 바위 산맥에는 이렇다 할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흐트러트리는 안개가 뿌려져 있다든지, 혹은 미러 이미지와 같은 환상 마법으로 통로를 감춰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특이점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이렇게 되면 녀석들이 퀘스트를 얻었다는 것이 사실인 게 되는 거겠죠?”
“응. 던전에 장치된 기관의 경우에는 퀘스트가 아닌 이상 간파할 수 없으니까. 나와 같은 모험가라 해도 발동되지 않은 기관은 파악할 수 없어. 아무래도 천휘 동생의 생각이 맞는 거 같아. 저들은 이 화신의 사막에 감춰진 퀘스트를 얻어낸 거야.”
끄덕.
하린의 말은 천휘의 생각과 동일했다. 이제는 단 1퍼센트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랜저는 모종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화신의 사막으로 향하는 대규모 원정대를 기획한 것이다.
최소한 A급, 화신의 사막이 지닌 위험성을 감안한다면 천휘조차도 수행해보지 못한 S급 퀘스트일 가능성도 농후했다.
‘네놈의 계획이 무엇이든 반드시 깨부숴주마.’
두 번째 원정이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나자 원정대의 선두인 임페리얼 길드가 신호를 보내 행군을 멈춰 세웠다.
“이곳에서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랜저의 외침에 원정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드디어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서는 새로운 통로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유저들의 시선을 느꼈음인가, 그랜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바로 그 느낌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알무니아, 시작해라!”
“그렇게 하지.”
그랜저의 지시에 폭염법사 알무니아가 앞으로 나섰다.
폭염법사라는 닉네임답게 그는 화염계 마법을 6서클 마스터하고, 7서클 화염 마법도 몇 가지 익힌 화염 마법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알무니아는 바위 산맥으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거대한 바위기둥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고, 그 중앙엔 도저히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가파른 절벽이 자리하고 있는 험한 지형이었다.
“저기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통로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알무니아가 향하는 곳은 그저 바위 산맥의 지류 중 한 곳이었다.
절벽이나 마찬가지인 그곳에 통로가 있다는 걸 믿기 힘든 유저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그저 침묵을 고수하며 알무니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철컥.
알무니아의 손이 절벽에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주먹 크기의 돌덩이를 좌우로 비틀었다. 그리고는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3미터 높이의 절벽에 위치한 같은 크기의 돌덩이 역시 좌우로 비틀었다.
그런 식으로 알무니아는 3개의 돌덩이를 차근차근 움직이기 시작했다.
“펜타그램?”
알무니아가 움직이는 돌덩이의 위치를 살피던 로빈이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펜타그램이라면 오망성을 말하는 거냐? 네가 익히고 있는?”
“분명해. 저 녀석이 움직이고 있는 다섯 개의 돌덩이는 오망성의 위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혹시…….”
“혹시 모르지. 화신의 사막에 잠들어 있는 그 어떤 존재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일지도…….”
천휘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오직 로빈만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원정의 주인공은 천휘가 아닌 로빈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천휘는 웃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빈이기에.
딸칵.
그르릉.
“저, 절벽이 움직인다!”
“대단한데!”
“와아아아!”
알무니아가 다섯 번째 돌덩이를 움직이자 절벽이 마치 거대한 문처럼 좌우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웅장한 모습에 원정대의 유저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곳이 바로 저희가 찾아낸 새로운 통로, 일명 화신의 입김이라는 협곡입니다. 협곡을 따라가면 거대한 그레이트 웜들이 서식하고 있는 사막의 초입을 한참 벗어난 곳으로 단번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자, 이제 화신의 사막을 정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뎌 봅시다!”
“우오오오!”
유저들의 사기가 들떠 있을 때 내뱉어진 그랜저의 음성에 유저들이 다시 한 번 환호성을 터트렸다. 유저들의 마음을 절묘하게 흔드는 모습이었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그런 그랜저의 모습을 보며 고까운 듯 카멜이 말했다.
“아니, 타고난 게 아니야. 그저 철저한 가식으로 본모습을 감추고 있을 뿐이지. 녀석은 그저 허황된 욕심에 몸부림치는 허풍쟁이에 불과해. 내가 그걸 곧 만천하에 공개해 보이겠어. 후후.”
카멜의 말을 부정하듯 천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영민한 여우를 잡는 호랑이의 눈빛을 그 눈에 담은 채…….
“자,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