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마을 카레브
화신의 사막 둘레에는 신기하게도 바위 산맥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찌나 험하고 가파른지 유능한 등산가들도 타고 넘을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은 라그혼 왕국 남부의 예레브 마을을 통하는 것이 유일했다.
하지만 임페리얼 길드에서 원정대의 집결지로 삼은 마을은 예레브 마을이 아닌 그곳에서 서남부에 위치한 카레브 마을이었다.
카레브 마을 역시 화신의 사막과 인접해 있기는 하지만 바위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탓에 그곳에서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페리얼 길드에서는 집결지를 카레브 마을로 삼은 것이다.
새로운 진입로!
때문에 많은 유저들은 임페리얼 길드가 화신의 사막으로 들어서는 새로운 진입로를 발견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나 모였지?”
“대략 일천 정도 모였다.”
그랜저의 물음에 알무니아가 대답했다. 최근 이래저래 일이 많았는지 그의 눈 밑에 거무스름한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었다.
“대단해. 예상에 비해 두 배나 더 많은 숫자로군.”
“역시 『오벨리스크』에는 기인이사들이 많아. 게다가 아직 정확한 랭킹제가 도입되지 않은 탓에 음지에서 활동하는 고렙 유저들도 많은 덕이겠지. 문제는 그들이 순순히 우리의 계획에 따라주느냐 하는 거야.”
“상관없어. 그들이 제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들이라고 해도 우리 임페리얼 길드보다는 아닐 테니까. 더욱이 우리에게는 저들이 모르는 화신의 사막에 대한 정보와 끈끈한 단결력이 있잖아. 계획대로 진행해. 원정은 그대로 3일 후에 시작한다.”
“두말하면 잔소리. 그럼 나 먼저 간다. 아직 처리할 일이 많아.”
“수고해라.”
알무니아가 방을 나서자 이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빨리 접속했네?”
“어,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시더라고.”
여인의 이름은 헤라. 그랜저의 애인으로서, 임페리얼 길원들 사이에선 성녀라 칭송받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희영이었다.
“이번 원정에 나도 참가할 거야.”
“그렇게 해. 너라면 실력이 조금 처져도 내 재량으로 통과시킬 수 있으니까. 그보다 영완이 그 개자식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정말 널 포기한 거야?”
“모르겠어. 확실한 건, 그 멍청한 자식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변했다는 거야.”
“흐음, 그럼 그 자식을 놀려 먹는 재미가 사라지는데. 아, 그보다 네 친구는 어떻게 된 거야? 그 친구, 유명 기업 사장의 딸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랜저의 물음에 헤라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년 얘긴 꺼내지도 마. 그년이 글쎄, 그 멍청한 놈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푸하하하! 뭐라고? 그 자식을 좋아해? 웃긴 년일세.”
“그러니까 말이야. 아무튼 그년 성깔이 보통 아니니까 너도 조심해. 그년이 성깔 부리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하긴 뭐, 나랑은 상관없는 년이니까.”
“그래, 그 연놈들은 상관 말고 같이 사냥이나 나가자. 오랜만에 접속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해.”
“안 돼. 지금 원정 준비하는 거 몰라?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 나중에 같이 사냥해줄게.”
“쳇, 알았어. 그럼 난 다른 녀석들이랑 놀아야겠다. 내일 학교에서 봐.”
헤라가 나서자 그랜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장비들을 착용한 유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너희가 총알받이를 해줘라. 그래야 내가 화신의 신물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 * *
“다들 모였으면 곧바로 이동하자.”
“아직 블랙헤드가 안 왔는데?”
“어라, 그러네? 이 자식, 아직도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이그나혼에서 각자 준비를 마친 일행이 진 마탑 앞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블랙헤드만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큭큭.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저기 온다.”
카멜의 말에 일행의 눈이 운남정으로 향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운남정의 정문에서 거무튀튀한 가죽 갑옷을 갖춰 입은 블랙헤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싸게싸게 움직이지 못하겄냐!”
그리고 그의 뒤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 재료를 담은 수레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저게 다 뭐야?”
“저 미친놈! 대체 어쩌자고 저 많은 식재료들을!”
마치 출장 뷔페라도 하러 가려는지 블랙헤드가 챙긴 식재료들은 정말 무지막지한 양이었다. 건장한 장정 2명이 끌고 있음에도 쉽사리 끌리지 않는 수레가 무려 3대나 되었다.
“여어, 다들 와 있어브렀네? 내가 쪼까 늦었제?”
“괜찮아. 그런데 뒤의 저것들은 다 뭐냐?”
천휘의 물음에 블랙헤드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여서 음식을 해가는 것보다 거기서 제때제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겄냐? 일단 식당에 남아 있는 식자재들을 다 가져오긴 했는디, 어째 좀 부족허냐?”
부족할 리가 없었다. 수레 3대 분량의 식자재라니. 한 달이 아니라 몇 달은 거뜬할 것 같은 양이었다.
“그 정도면 됐다. 저대로 아공간에 넣으면 되지?”
“내가 알아서 분류해놨은깨 너는 그냥 창고에다 넣기만 하믄 된다.”
“알았어. 아공간 오픈!”
천휘는 아공간을 열어 3대의 수레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엄청난 양의 식자재였지만 아공간은 제아무리 거대한 것이라도 담을 수 있기에 별 무리 없이 옮길 수 있었다.
“이제야 다들 모였네. 그럼 바로 움직이자고. 시간이 별로 없어. 로빈!”
“알았다.”
일행은 로빈을 따라 진 마탑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이그나혼에서 카레브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이 형성되어 있어 그걸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오, 이게 누구야? 로빈 아니냐.”
“안녕하세요, 치렌 마법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나야 무슨 일이 있겠느냐. 그보다 마탑을 떠난 네 녀석이 여긴 웬일이냐?”
“텔레포트 마법진 좀 이용하려고요. 바로 쓸 수 있죠?”
“당연하지. 내 직접 안내해주마.”
로빈이 마탑에서 어떤 존재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마탑의 1층을 지키는 노마법사가 직접 텔레포트 마법진까지 안내해주는 상황이라니.
대개 마탑의 마법사들은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데, 눈앞의 노마법사는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와도 같은 푸근한 미소로 로빈을 대하고 있었다.
“들어가라. 이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겠지?”
“네. 감사합니다, 치렌 님.”
치렌이라는 노마법사가 뒤로 빠지자 나머지 일행이 로빈의 곁으로 다가갔다.
“야, 너 진짜 진 마탑의 탑주 할 생각 없냐?”
“없어.”
“쳇, 아깝다. 진 마탑의 탑주 친구라면 엄청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로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카멜이 진심으로 안타까운지 푸념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보다 어서 이동하자. 자칫하다가는 늦겠어.”
“천휘 동생 말이 맞아.”
“네, 누님 말이 옳아요. 먼저 안으로 들어가세요.”
진 마탑의 텔레포트 마법진은 오로지 진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만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일반적인 텔레포트 마법진과 그 궤를 달리하며 대륙 모든 마을을 다이렉트로 이동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섰죠?”
일행 모두가 마법진 위에 올라선 것을 확인한 로빈이 곧바로 텔레포트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진 마탑에 구축된 텔레포트 마법진은 워낙 성능이 뛰어나서 적은 마나로도 많은 숫자의 인원을 장거리 이동시킬 수 있었다.
스차아앗.
“끄윽, 우웩.”
“뭐야? 이 자식, 텔레포트 처음 경험하는 거야?”
텔레포트가 끝나자 갑작스레 블랙헤드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텔레포트가 주는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저랬지. 머리가 울리고 심장이 뒤흔들리는 기분이 좋을 리 없으니.”
“저도 처음에는 헛구역질을 했었어요.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개 처음 텔레포트를 경험하는 유저들은 약간의 어지럼증과 함께 약 10초 정도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블랙헤드는 벌써 1분이 넘도록 계속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형감각이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야, 괜찮냐?”
“육시랄! 내 다시는 이거 안 탈란다. 죽겄단깨.”
“큭큭. 그래, 이그나혼으로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고 움직이자.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은 임페리얼 길드가 원정대 접수를 받고 있는 황혼의 문명 여관으로 향해야지. 내가 미리 위치를 알아뒀으니까 나만 따라오면 된다.”
천휘는 일전에 미리 로빈으로 하여금 카레브 마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두라고 언질을 주었다. 이런 일은 자신이 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머리 쓰는 일은 로빈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이야, 사람 많네! 그렇죠, 누님?”
“정말이야. 빙룡의 대지 원정을 나설 때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이 모여들었는걸? 게다가…….”
“대부분 우리의 수준과 엇비슷한 고렙들이야.”
황혼의 문명 여관 근방에는 수많은 유저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는 것이, 절로 투지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아따, 가슴이 불타올라불그만? 어디 투기장 같은 것 없을까잉? 한판 붙어보고 싶어븐디.”
블랙헤드는 전투 직업이 아닌 비전투 직업 식객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즐겼다. 운남정을 운영하면서도 사냥에 소홀히 하지 않아 300레벨을 넘어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게다가 귀도 밝아 블랙헤드가 무심코 내던진 말을 주워듣고 다가오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애송이로군. 방금 그 말, 아직 유효한 것인가?”
“그란깨 지금 나랑 한판 붙고 싶다, 이 말이제? 나야 당근 오브 코울스제! 한판 붙어보드라고!”
“잠깐! 블랙, 일단 접수부터 하고!”
천휘의 말에 블랙헤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결을 걸어온 사내에게 말했다.
“여기서 쬐끔만 기다리드라고. 내 가서 접수부터 하고 올 것인깨.”
“후후, 얼마든지.”
블랙헤드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내는 전사 직업 중 가장 강맹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검투사인 듯했다. 한 자루 양손검을 무기로 삼는 듯 그의 등 뒤에는 가로수처럼 거대한 양손검이 메여 있었다.
“자신 있냐?”
접수를 위해 기다리는 와중에 로빈이 블랙헤드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제법 강해 보이는 탓이었다.
“걱정 말란깨! 지난 몇 달은 나를 새롭게 만들었단 말이여! 게다가 운남정이 잘돼가꼬 식칼도 하나 제대로 된 놈으로 사놨시야.”
“식칼?”
블랙헤드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지옥의 나락이라는 식칼이란깨.”
“지옥의 나락?”
“그라제. 혹시 나락의 심연이라는 던전 아는감?”
“거기라면 내가 알아, 블랙 동생. 펜하르트 왕국 동북부에 위치한 A급 던전 아냐? 아직 그 누구도 클리어하지 못한.”
하린의 설명에 일행의 눈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의아한 눈빛으로 다시 블랙헤드를 바라봤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란깨. 나락의 심연은 바로 이 내가 클리어했은깨! 이제 미정복 던전이 아니여!”
“정말이야, 동생? 거긴 임페리얼 길드에서도 포기한 던전인데, 거길 클리어했다고? 블랙 동생이?”
“내가 거길 클리어하긴 했는디, 실상은 말이여… 사실 나락의 심연 던전은 식객이라는 직업을 위한 던전이었단깨. 식객의 2차 승급을 위한 퀘스트 던전!”
블랙헤드의 말에 하린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확실히 그곳은 거창한 이름치고는 이상한 점이 많았지. 던전 내에 가득한 기묘한 향기들하며, 아르니안 대륙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팔뚝 길이의 칼을 소유한 무사들까지. 아, 그러고 보니 그 무사들이 착용한 칼들이 식칼이었나? 그래, 동생?”
“역시나 하린 누님의 안목은 대단하시단깨요. 바로 맞히셔 브리네.”
“그 지옥의 나락이라는 식칼, 내가 잠깐 봐도 괜찮을까?”
어느새 일행의 관심은 지옥의 나락이라는 식칼에 집중되었다. 히든 클래스의 승급과 관련된 아이템이라면 분명히 뛰어난 성능을 가진 무기일 것이었다.
“마음대로 봐브러요.”
[지옥의 나락]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본 일이 있는가?
사람들이 느끼는 지옥은 천차만별이기에 삶의 영위를 거부케 하는 지옥의 나락 또한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일이다.
식객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으로 지옥의 나락을 경험하게 할 수도, 천당의 전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등급:유니크 내구력:30,000/30,000
분류:식칼
제한:직업 ‘식객’
옵션:물리 공격력 +250
옵션:모든 스탯 +30
옵션:클리버 마스터리 +30% 상승
옵션:하루 1회 ‘지옥의 나락’ 스킬 사용 가능
“유니크 식칼!”
“우헤헤헤, 역시나 쥑인단깨요!”
하린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블랙헤드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야, 소리 낮춰.”
“응?”
“휴, 이미 늦었다.”
어느새 여관 주변에 서성이던 유저들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비록 식칼이긴 하지만 길이가 롱 소드에 버금갈 정도로 긴 지옥의 나락인 데다 더욱이 유니크 등급이었으니, 그 옵션은 두말할 여지도 없었다.
“일단 접수를 마치고 자리를 뜨자.”
천휘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굳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자신 때문에 사단이 난 하린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
“일행이요?”
“그렇습니다만.”
“단독 접수와 파티 접수 두 가지로 접수가 가능한데, 무엇으로 하시겠소?”
접수원의 물음에 천휘는 일행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파티 접수로 하죠.”
“파티의 장과 일원, 그리고 이름을 말하시오.”
“파티의 장은 천휘 네가 해라.”
접수원의 말에 로빈이 얼른 말하자 천휘가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파티의 장은 천휘. 일행은 로빈, 카멜, 하린, 눈송이, 블랙헤드, 그리고 미온이오.”
천휘가 일행의 이름을 나열하자 접수원이 빠르게 서류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류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빛을 발했다.
“모두 300레벨을 넘으셨군요. 자, 그럼 이제 파티의 이름을 말해주시오. 뭐로 정하시겠소?”
서류는 일종의 확인 마법이 걸린 주문서인 모양이었다. 그와 같은 서류를 처음 본 천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접수원의 물음에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뒤통수.”
“응? 방금 뭐라고 하셨소?”
“뒤통수라고 했소.”
“허 참, 그런 파티명은 또 처음이군.”
“그럴 거요. 어떤 자식 뒤통수를 치고 싶어 만든 이름이니까.”
“큭큭큭.”
“호호호.”
천휘가 내뱉은 말에 일행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어떤 의미가 담긴 파티명인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뭐, 그럼 그렇게 적어두지.”
차아앗.
서류에서 또 한 번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눈부신 빛이었다.
“접수는 끝났소. 이틀 뒤까지 이곳으로 모이면 되오.”
접수원의 말에 천휘는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일행과 함께 여관에서 사라졌다.
그런 일행의 뒤로 낯선 그림자가 따라붙고 있었다.
“따라붙고 있어요, 누님?”
“응, 숫자가 제법 많아. 게다가 몇몇은 내 추적술로도 기척을 읽기 힘들 만큼 고렙이고.”
“자식들, 유니크 아이템 못 먹어서 안달이 나기라도 했나. 왜들 저렇게 난리 블루스야?”
하린의 말에 카멜이 분통 터지는 듯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황혼의 문명 여관에서부터 따라붙은 유저들의 숫자가 물경 수십에 이르는 탓이었다.
“마을 안에서 처리하기에는 숫자가 많아. 보는 눈도 많고. 마을 외곽의 사냥터로 가서 녀석들을 맞이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상황은 천휘 일행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천휘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가능하겠냐? 네 녀석이 강시를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우리들만으로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말이야.”
제아무리 천휘 일행이 히든 클래스의 유저가 셋이나 된다고 해도 뒤쫓은 유저들 역시 300레벨을 넘은 고렙들이었다. 숫자 역시 최소한 5배 이상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저들을 순수하게 힘으로만 맞상대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었다.
“걱정 마라. 녀석들의 눈에 띄지 않고 부릴 수 있는 강시를 최근에 제작했으니까.”
“그래? 그럼 다행이네.”
“하지만 녀석은 최후의 순간에만 힘을 쓸 거다. 이참에 우리 파티의 호흡도 맞춰볼 필요가 있으니 말이야.”
천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행 간의 연계를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카멜이나 로빈 등은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춰 퀘스트를 진행해본 경험이 있지만 블랙헤드나 눈송이 등은 이번이 처음 함께 하는 퀘스트였다.
화신의 사막은 천휘의 능력이라고 해도 쉽사리 생존 여부를 점칠 수 없는 지옥의 대지. 강시들마저 가용할 수 없다면 일행 간의 호흡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숲으로 간다.”
카레브 마을 동남쪽에 위치한 이름 모를 숲.
천휘는 그곳을 전장으로 삼았다.
“꼴에 잔재주를 부렸군.”
“그래봐야 독 안에 든 쥐지. 고작해야 일곱 명 정도로 이 많은 숫자를 상대할 순 없으니 말이야.”
하이렌과 카류는 동갑내기 친구 사이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무려 10년을 이어온 두 사람의 우정은 최근 『오벨리스크』를 함께 즐기면서 더욱 꽃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두 어쌔신을 직업으로 택했다. 그리고 어둠의 칼날이라는 이 바닥 최고의 길드에 함께 가입했다.
백수라는 장점을 십분 발휘해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오벨리스크』를 플레이해온 둘은 최근 어둠의 칼날 길드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요직에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런 두 사람이 천휘 일행을 타깃으로 삼았다. 블랙헤드가 들고 있던 유니크 식칼이 탐나는 탓이었다.
그것은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유명 유저들도 저마다 탐욕스러운 눈빛을 하고 천휘 일행을 뒤쫓아 숲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서로를 견제하며 빠르게 숲의 녹음에 물들어갔다.
“동생, 드디어 마지막 유저가 숲으로 들어섰어.”
“수고하셨어요. 그럼 이제 남은 건 어떻게 녀석들을 우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건데…….”
천휘 일행이 들어선 숲에는 C급 몬스터인 회색 갈기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인근에서는 제법 흉성을 토해내는 녀석들이었지만, 천휘 일행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천휘 일행은 회색 갈기 오크들을 모조리 사냥하고 그들의 거처를 은신처로 삼았다. 녀석들은 멍청한 일반 오크들과 달리 제법 영리하게도 숲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은신처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침입자를 빨리 발견하고 대처하기 위한 방편의 일환인 모양이었다.
“로빈, 준비는 다 마쳤냐?”
천휘는 녀석들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로빈이 펼치고 있는 마법진의 준비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일곱 대 오십의 싸움.
평범한 방법으로는 감히 승리를 입에 담을 수 없는 숫자 놀음이었다.
“어느 정도는.”
“어떤 마법진들인지 말해줄 수 있겠냐?”
천휘의 물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물음은 녀석에게 밑천을 드러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로빈은 그것 따위는 개의치 않는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마나 증폭 마법진과 마나 교란 마법진 두 가지다. 둘 모두 내가 익힌 마법진 중에서는 수위에 꼽는 마법진이지.”
“마나 증폭과 마나 교란이라니용? 두 가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아닌가용?”
로빈의 대답에 눈송이가 예의 그 귀여운 말투로 물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처럼 두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나 증폭 마법진은 반경 10미터 안에서 효과를 보이고 있지. 그렇다고 이 안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효과가 적용되는 건 아니야. 나와 파티를 맺고 있는 우리 일곱 명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그에 반해 마나 교란 마법진은 내가 직접 전개할 거야. 죽을지 모르고 달려드는 저 불나방들이 이곳에 접근하면 말이지.”
“오망성의 마법사라더니… 그런 것도 가능한 거냐?”
“물론. 하지만 마법진을 전개하고 있으면 난 움직이지 못하는 석상이 되고 만다. 당연히 마법도 펼칠 수 없어.”
“그건 걱정 마라. 미온, 당신이 로빈을 보호해줘. 해줄 수 있지?”
“엑? 그런 따분한 걸 내게 맡기는 거야?”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에게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둘이었다.
“별수 없잖아. 나와 카멜은 전면에서 녀석들을 상대해야 하니까. 당신은 로빈을 보호하면서 종종 우리에게 축복 마법을 걸어줘. 그 정도면 충분해.”
“어쩔 수 없네. 알았어, 내가 할게.”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자 속속 숲을 가로지르는 유저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천휘와 하린 정도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조만간 카멜이나 다른 일행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아공간 오픈, 랄프 로렌 소환!”
스파아앗.
[으하하하! 주인, 날 불렀는가!]
검은 빛무리와 함께 악마의 활 힐프리거를 등에 메고 있는 로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단과도 같은 머릿결과 수려한 외모는 그가 과연 강시인지 의심이 들게 만들 정도였지만 그는 분명 음양마령강시 랄프 로렌이었다.
“긴말하지 않겠어. 당장 이 숲에서 가장 높고, 이 주변이 눈에 훤히 드러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라.”
[저기 접근해오는 날파리들 때문인가?]
역시나 음양마령강시는 음양마령강시인 듯 그는 어느새 유저들의 기척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저들을 네가 사살할 필요는 없어. 네가 나서야 할 때는 내가 신호를 보냈을 때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주인의 명령이라면 거스를 수 없겠지. 아 참! 안에서 오베른 자식이 자꾸 날 괴롭힌다. 얼굴 잘생긴 것이 무슨 죄라고, 내게 자격지심이 있는 모양이다. 주인이 나서서 좀 패줘.]
“…하아, 너희들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
그의 어이없는 부탁에 천휘가 한숨을 내쉬며 소리치자 랄프 로렌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과연 어둠에 특화된 다크 엘프 강시라서 그런지 천휘조차도 그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대체 저치는 뭐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못한 카멜이 나서며 물었다.
“말했잖아, 이번에 새로 제작한 강시가 있다고. 보기에는 저래도 대단한 녀석이야. …뭐, 성격에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네 강시들이 언제는 정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냐?”
“…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자, 이제 모두 긴장합시다! 우리의 힘을 저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켜 주는 겁니다!”
“우오오오!”
“자식들, 더럽게 꼼지락거리네.”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나설 수는 없잖아. 이번 원정에 참여할 정도면 녀석들도 300레벨은 넘었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둘만으로는 정면 승부가 불가능하지.”
“네 말이 맞다. 우리는 암습의 전문가니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하이렌과 카류는 천휘 일행의 은신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위틈에 몸을 은신하고 있었다.
다른 유저들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최대한 몸을 숨기며 천휘의 은신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서로의 능력을 알 도리가 없으니 괜히 먼저 나서서 힘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젠장, 우리가 먼저 나서자!”
그런 상황을 보다 못한 거구의 장한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뒤에는 그 장한에 못지않은 체구의 사내 넷이 함께하고 있었다.
“어이, 내가 누군지 모르지는 않겠지? 좋은 말 할 때 아까 그 유니크 검 놔두고 떠나라. 피차 함께 원정을 떠날 사이에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겠어?”
거구의 장한은 나름대로 격식을 차리려는 요량인지 좋게 천휘 일행을 타일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의외인지 그의 뒤를 따르는 사내들은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네놈이 누군데? 생긴 건 이웃집 사십 대 아저씨같이 생겨 가지고.”
“뭐, 뭣이라? 사, 사십 대? 이이익!”
카멜이 툭 내뱉은 말에 거구의 장한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밖으로 표출했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흡사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젠장! 두목이 제일 싫어하는 말을!”
“이 빌어먹을 새끼가 누구 염장 지르려고 그따위 소리야! 야, 너 책임져! 너 때문에 우린 오늘 줄초상 치러야 한다고!”
카멜이 내뱉은 말의 여파는 컸다. 거구의 장한을 두목이라 일컫는 사내들이 한껏 짜증이 난 어투로 카멜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커다란 목소리는 한 소녀의 작은 중얼거림에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흐응? 내가 보기에는 머리도 빡빡인 게 할아버지 같은뎅…….”
“…….”
“…….”
눈송이의 발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럼 저 뒤에 있는 아찌들은 할아버지 손자들인강? 그나마 저 아찌들은 좀 어려 보이는뎅.”
“…….”
“…….”
“뭐, 나랑 상관없징.”
“크아아악! 할아버지? 할아버지!”
마지막 말을 내뱉은 눈송이는 이내 무료한 표정으로 거구의 장한에게서 눈빛을 거뒀다. 그녀의 마지막 말처럼 진실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했다.
“죽여!”
한차례 소리를 내지르며 괴로워하던 거구의 장한이 거칠게 토해낸 명령에 사내들이 일제히 천휘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도끼나 철퇴 등 중병기를 이용하는 워리어들이었다.
“카멜!”
“응!”
사내들의 돌격에 기다렸다는 듯이 천휘와 카멜이 전면에 나섰다.
“남자의 힘은 정력! 정력에는 비아그라!”
[띠링! 10분간 공격력과 방어력이 10% 상승합니다.]
[띠링! 10분간 공격속도와 이동속도가 10% 상승합니다.]
“쿨럭.”
“비, 비아그라.”
미온의 네이밍 센스에 천휘와 카멜은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일전에 헤론 습지에서 함께 사냥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녀의 네이밍 센스는 과연 발군이었다.
“젠장, 비아그라라니!”
“나도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본 걸!”
“죽어! 죽어! 죽어!”
미온의 축복 마법에 사내들은 더욱 광분한 채 달려들었다. 마치 버서커처럼 그들의 눈에 짙은 광망이 깃들었을 정도였다.
“이 정도쯤이야!”
사내 둘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천휘는 살짝 몸을 젖힌 것만으로 두 사람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발이 땅바닥을 세게 굴렀다.
“파멸의 대지!”
콰아아앙!
“커헉!”
“모, 몸이!”
순식간에 두 사내의 몸이 완벽하게 마비되고 말았다. 아직 숙련도가 낮을지라도 파멸의 미학은 신급 스킬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파멸의 축제!”
퍼버벅.
“끄아아악!”
“커흐억!”
수십 발의 주먹이 일제히 쏟아지자 제자리에 멈춰 있던 2명의 사내가 거친 비명을 토해내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서릿발의 한기가 뭐든 꿰뚫어 보일지니, 아이스 쟈벨린(Ice Javelin)!”
촤르르륵.
“크헉!”
땅바닥을 나뒹구는 2명의 사내에게 2미터 길이의 얼음 투창이 날아들었다. 워낙 찰나지간에 날아든지라 두 사내는 피해내지 못하고 심장을 꿰뚫린 채 절명하고 말았다.
“굿!”
“헤헤, 맡겨만 주시와용!”
눈송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의 말을 건넨 천휘는 곧바로 눈송이가 할아버지라고 놀린 거구의 장한에게로 걸어갔다.
카멜 역시 히든 클래스 카오스 팔라딘답게 2명의 사내를 상대로 완벽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너희들 뭐냐?”
“우리가 뭐?”
“조금 전 네 녀석이 보여 준 스킬,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킬이었다. 주먹을 이용하는 것을 보니 격투가인 듯한데… 실로 대단하군.”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거구의 장한이 건넨 칭찬에 천휘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후후후,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야. 정식으로 소개하지. 난 토르라고 한다. 남들은 날 일컬어 거인 토르라고 하지.”
장한의 말에 천휘는 눈을 빛냈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거 처음부터 거물이 납셨군. 거인 토르, 지존 12인 중 일인. 레전드 망치 묠니르를 사용하는 최강의 워리어. 한 가지 덧붙이자면 스물여섯 살!”
“엑? 정말 그 할아버지가 스물여섯 살이에용? 뭐양, 그럼 나랑 열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앙!”
“크윽.”
눈송이의 말에 다시 한 번 거인 토르는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늙어 보이는 외모가 크나큰 콤플렉스인 모양이었다.
“큭큭큭. 눈송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듣는 이십 대 서운하다.”
“알았어용. 난 카멜 오라버니나 도와드릴게용.”
“젠장! 빌어먹을! 그래, 나 늙어 보인다! 됐냐? 으아아악! 내가 네놈들 모조리 쳐 죽이고야 만다!”
“할 수 있다면!”
결국 토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레전드 망치라 알려진 묠니르를 휘두르며 천휘에게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맹한지 천휘로서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과연! 지존 12인 중 한 명이라더니, 그 기세가 대단한데?’
천휘는 그의 공격을 경시하지 못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토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속도를 배가해 연방 공격을 퍼부었다.
콰아앙!
“크윽. 쳇! 과연 거인 토르로군!”
“으하하하! 이 몸은 절대 무적이시다!”
결국 천휘는 그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지 못하고 가슴을 가격당했다. 만약 발록의 심장과 마룡 오그하트의 가슴이 아니었다면 더욱 큰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천휘! 도와줄까?”
둘의 격돌을 지켜보던 로빈이 물었다. 여차하면 마나 교란 마법진이나 혹은 마법을 이용해 천휘를 도와줄 요량이었다.
“아니, 됐어. 충분히 혼자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천휘는 그의 도움을 원치 않았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이었다. 파멸의 권능을 얻고 난 뒤 한동안 자만심에 빠져 있던 그에게 토르라는 사내는 열화와도 같은 열망을 안겨 주고 있었다.
“동생, 조심해! 그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야.”
“알고 있어요, 누님. 누님은 주변의 떨거지들 움직임이나 잘 읽어주세요.”
“알았어, 동생! 힘내!”
하린의 응원까지 받은 천휘는 토르의 공격으로 받은 충격을 어느 정도 털어내며 몸을 움직였다.
“애송이, 꼴에 자존심은 있구나! 하지만 그것이 곧 자존심이 아닌 오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마!”
“미친! 누가 누구보고 애송이래? 너 스물여섯이지? 이 자식아, 난 이래 봬도 올해 서른이야! 네놈보다는 한참 윗줄이라, 이 말이다!”
“뭐, 뭐라고! 그 얼굴이 서른이라고? 마, 말도 안 돼!”
평생을 노안으로 살아온 토르에게 천휘의 얼굴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지금 그가 인피면구를 통해 본래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려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믿고 안 믿고는 네놈 마음이고! 자, 이제부터는 내가 공격할 차례다! 타아앗!”
천휘의 말에 토르는 여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만큼 천휘의 말은 그에게 있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전투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토르는 묠니르를 들고 천휘의 공격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진정한 강자다! 그저 그런 몬스터들만 사냥하며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야! 녀석의 망치엔 산도 무너트릴 만큼의 강맹한 위력이 담겨 있고, 녀석의 단단한 근육은 어떤 공격이든 위력을 반감시킨다!’
치열하게 펼쳐지는 접전 속에서 천휘는 토르의 장단점을 어느 정도 파악해가고 있었다. 문제는 녀석에게 독이 될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워리어는 중병기를 사용하는 탓에 움직임이 느리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녀석은 격투가와 다를 바 없는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더욱 빠르다!’
“림다일!”
아직 상대할 적들은 많다. 비록 거인 토르가 엄청난 거물이긴 해도 적들을 모두 상대하려면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것이 최고였다. 그것이 설사 마나를 잡아먹는 괴물을 끄집어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허억!”
마치 허깨비처럼 갑작스럽게 빠르게 이동하는 천휘를 보며 토르는 놀란 가슴을 끌어안았다. 맹세코 이렇게 빠른 자는 처음이었다. 무수히 많은 강자들과 생사투를 벌이며 강함을 길러온 그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파멸의 축제!”
빠른 움직임을 통해 더욱 위력이 배가된 수십 발의 주먹이 토르의 등을 강타했다. 워낙에 빠른 공격인지라 토르로서도 쉽사리 반응하지 못하고 공격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크아아앗! 거인의 장벽!”
그러나 토르 역시 녹록지 않았다. 어느새 레전드 망치 묠니르를 이용해 굳건한 장벽을 만들어 수십 발의 주먹 중 일부를 방어해낸 것이다.
“파멸의 축제!”
다시 한 번 수십 발의 주먹이 토르의 가슴을 향해 쏟아졌다. 언제 자리를 옮겼는지 이번에도 역시 토르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퍼버벅.
“으아아앗! 거인의 괴력!”
콰아아앙!
“치잇!”
토르는 천휘의 주먹을 등 뒤로 허용하면서도 묠니르를 들어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그 충격파로 천휘는 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놈! 날파리처럼 뛰어다니지 말고 정면으로 붙어보자!”
“후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것이 내 장점인데 말이야.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싸워!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당신을 상대할 테니까!”
“이익!”
천휘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유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캐릭터를 키워왔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게임을 즐겨 왔다. 당연히 이러한 대결을 펼칠 때에도 저마다의 방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들어줄 수도 있지.”
번쩍!
내심 계속해서 천휘가 앞의 공격 방식을 고수한다면 자신에게 더 이상 그를 이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던 토르는 눈을 번뜩이며 그를 쳐다봤다.
“당신이 원하는 방식이 뭐지?”
“당연하지 않은가! 남자라면 당연히 어벤저지! 한 대씩 주고받기!”
“큭큭큭.”
실로 그다운 발상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공격이 강하다 믿고 있고, 자신의 공격을 방어해낼 이는 그 누구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좋다, 받아들이지.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제안을 하도록 하지.”
“제안?”
“그래. 솔직히 그냥 내 방식대로 싸우면 난 필승이다. 그런 내가 당신의 편의를 봐주면서까지 당신의 방식을 따라주는데 제안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흐음, 제안이라… 뭐, 그렇게 하지. 난 지지 않을 테니까!”
“후후, 그럼 시작해보실까?”
토르는 천휘의 비웃음을 보며 속으로 분노를 삭였다. 그리고 그 분노를 자신의 망치 묠니르에 토해낼 작정이었다.
‘난 최강이다! 그리고 거인의 힘은 무적이다!’
토르의 손에 들린 묠니르에 오러가 깃들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오러는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땅의 그것과도 같은 색이었다.
그렇게 점차 묠니르에 갈색의 오러가 충만하게 깃들었다. 흡사 땅의 굳건함을 표현하고 있는 듯 그의 묠니르에는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죽어라, 놈! 거인의 태동!”
토르의 신형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리곤 그의 양팔이 묠니르를 부여잡고 한껏 뒤로 젖혀졌다.
마치 활대처럼 휘어진 그의 신형이 중력의 법칙을 이겨 내지 못하고 천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흐읍! 가엘론!”
천휘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방어 스킬을 펼쳐 냈다. 마신의 애완견 펜릴의 공격마저도 막아냈던 바로 그 방어벽이 펼쳐진 것이다. 게다가 양팔을 머리 위로 교차하며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콰과과광!
“천휘야!”
“천휘 동생!”
격한 충격음이 숲을 진동시켰다. 산새들은 깜짝 놀라 하늘 위로 솟구쳤고, 아직 생존해 있던 회색 갈기 오크들은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 있었다.
그 충격의 중심에 천휘와 토르가 있었다.
“저, 저런!”
“멍청한!”
둘의 격돌을 지켜보며 은신해 있던 유저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쿨럭쿨럭.”
“허억, 허억.”
충격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소리를 토해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대단한데?”
“허억, 허억. 너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이었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공격이었다. 한 번에 조그마한 동산마저 무너트린 전력이 있는 공격이 한 사람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토르에게는 그만큼 충격이었고,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
“허억, 허억.”
사실 천휘는 좀 전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에 생명력이 20퍼센트까지 떨어져 내렸다. 그의 무한한 생명력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공격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휘는 오연하게 서 있었다. 주변에는 아직도 수많은 적들이 은신해 있고, 토르 역시 아직 제대로 무릎을 굽힌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졌다.”
“호오, 지금 패배를 시인하는 건가?”
“크윽, 그렇다.”
토르와 같은 부류의 사내들에게는 자존심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그럼 이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차례인가?”
“큭, 말해봐라. 무엇이냐, 너의 제안이!”
토르의 외침에 천휘는 조소를 흘리며 그의 귓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냈다.
“흐음, 그것이면 되는가?”
“그래. 그러니 목숨을 살려 줄 때 떠나라.”
“그렇게 하지. 아, 그리고 동생들의 죽음은 묻어두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는 싫으니 말이야.”
“그래주면 고맙고.”
“그럼 이만.”
토르가 떠났다. 놀랄 만한 일대 사건으로 인해 숲에는 기나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토르가 떠난 이상 그들로서도 더 이상 천휘 일행을 핍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천휘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