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제1장 준비 (42/82)

제1장 준비

심연의 밀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모든 것을 파멸시킬 수 있는 마신의 권능을 얻었으며, 자신의 능력을 배가시켜 줄 새로운 아이템도 잔뜩 얻었다.

그뿐인가.

새로운 음양마령강시뿐 아니라 자신의 강시 군단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다크 엘프 혈강시들도 대거 제작했다.

천휘는 그들을 깜둥이들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똥개 시벨리우스를 비롯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몇몇 마수 강시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그들은 앞으로 『오벨리스크』를 즐기는 데 있어 천휘로 하여금 많은 도움을 줄 녀석들이었다.

그렇게 천휘는 즐거운 마음으로 심연의 밀림을 벗어날 수 있었다.

“후아, 이거 오랜만에 느껴 보는 여유로움인걸?”

끼에에엑.

파뱃의 등 위에서 느끼는 바람은 언제나 상쾌했다. 게다가 심연의 밀림에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이럴 기회가 없어 천휘로서는 새삼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우하하하! 시원하구나, 시원해!]

“…….”

하지만 간만의 이 평화를 깨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새로 합류한 로렌 녀석이었다.

[로렌! 좀 조용히 하지?]

로렌의 호방한 웃음에 천휘가 언짢아하는 것을 느낀 카이젠이 나지막한 말로 나무랐다.

[뭐야? 이 비리비리한 녀석이 누구보고 조용히 하래! 죽고 싶어?]

[이런 망나니 같은 자식이! 오냐, 죽여주마!]

“둘 다 그만!”

성정이 폭급한 두 강시가 이내 무기를 빼들고 서로를 향해 살기를 터트리자 천휘가 조용한 목소리로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런 천휘의 목소리를 들은 체 만 체하며 둘은 급기야 무기에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 입만 번드르르한 놈!]

[이 개잡종 새끼!]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는 이내 파뱃의 등 위에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로렌은 활 힐프리거에 오러를 주입해 어둠의 화살을 형성했고, 카이젠은 레이피어에 오러를 주입해 검붉은 화염을 발화시켰다.

삐이이익!

[크아아악! 뭐야, 이 소리는!]

[커허어억! 주, 주인님!]

두 강시의 행태를 지켜보던 천휘가 급기야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꺼내들었다.

청명하게 하늘에 울려 퍼지는 피리 소리.

일반인에게는 마음에 평온을 안겨 주는 소리였지만 두 강시에게는 지옥의 유황불보다도 더욱 강렬한 고통을 안겨 주는 소리였다.

“이 자식들이 지금 누구 앞에서 지랄이야, 지랄이! 야, 신입!”

[누구보고 신입이라고 하는… 끄아아악!]

[크으윽!]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대들려는 로렌을 보며 천휘가 가차 없이 손을 쓰자 로렌과 카이젠은 다시 한 번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네 성격이 얼마나 지랄 맞는지 대충 알겠는데, 그래도 내 앞에서는 자중해라. 깝죽거리다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어디서… 끄아아악!]

그 정도로 정신을 차린다면 그가 다크 엘프 최고의 문제아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독불장군, 안하무인.

로렌의 성정을 지칭하는 최고의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다른 강시들과 다르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천휘가 강시들을 다스리는 법칙이었다.

[허억, 허억.]

[크헉!]

계속되는 피리 소리에 로렌은 물론이고 카이젠까지 파뱃의 넓은 등판 위에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였다.

이미 죽은 존재들인 그들이 숨을 내쉬는 것이 어쩌면 이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만드라고라의 비명이 자아내는 고통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깝죽대지 마라! 내 말에 토 달지도 마라! 내가 죽으라면 죽고, 내가 기라면 기어!”

[…….]

더 이상 말을 내뱉을 힘도 없는지 자존심을 건드리는 천휘의 말에도 로렌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은 뭐야! 눈 안 깔아?”

자신을 쳐다보는 로렌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천휘가 마치 동네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다소 격앙된 그의 목소리에도 로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천휘를 쳐다보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그거면 되나요, 주인님?]

“엥?”

한바탕 대결을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천휘는 이내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빛처럼 애절하게 변한 로렌의 눈빛을 바라보며 황당해했다.

[진작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아이구! 장난도 심하셔라. 이거 뭐, 앞으로는 입 꾹 다물고 살아야겠네. 어이, 이봐, 그쪽도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보아하니 앞으로 한배를 타야 할 운명인 것 같은데 말이야. 우하하하!]

“…헐.”

그야말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녀석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네 마네 살기를 뿜어대던 녀석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녀석은 금세 적응하며 카이젠에게 어깨동무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녀석의 모습이 황당한 듯 카이젠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큭큭. 저 자식, 생각보다 더 재밌는 녀석이네?”

아무래도 다크 엘프들이 녀석을 컨트롤하지 못했던 데는 급변하는 감정의 변화도 한몫 거든 듯했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았을 그들에게 마치 인간처럼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녀석의 행동을 이해할 가치관이 형성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좀 전의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저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잡아주지.]

휘익.

삑.

[어라, 안 맞았네? 우하하하, 재밌다!]

휘청.

지근거리에서 날아가는 새조차 잡지 못한 로렌.

그런 로렌을 보며 천휘는 몸이 휘청거릴 만큼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시한폭탄을 떠안은 듯한 기분이 드는 천휘였다.

* * *

천휘와 강시들을 태운 파뱃이 날아간 곳은 라그혼 왕국의 수도 이그나혼 인근의 작은 마을로, 라그혼 왕국을 택한 유저들이 처음 시작하는 초보 마을 중 하나인 레리온이라는 곳이었다.

휘리릭.

퍼덕퍼덕.

“와, 저기 좀 봐! 와이번이다!”

“헉! 그렇다면 저 사람이 와이번 라이더라는 건가? 죽이는데!”

레리온의 하늘을 뒤덮은 파뱃의 웅장한 위용에 감탄한 듯 초보 유저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휘는 그런 초보 유저들이 귀찮은 듯 파뱃을 제외한 다른 강시들을 모두 아공간으로 되돌려 보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는 탓이었다.

“와아아! 와이번 라이더님, 저 1실버만 주세요!”

“저는 1실버도 필요 없어요! 그냥 제련된 노멀 롱 소드 하나만 사주시면…….”

천휘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초보 유저들이 그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구걸이었다.

콰앙.

“히이익!”

“뭐, 뭐야!”

천휘가 발로 거칠게 땅을 구르며 생긴 여파로 초보 유저들은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야 했다.

“나 지금 바쁘거든? 그러니까 그냥 가주지?”

물론 바쁘지 않다고 해도 그들에게 적선이나 해줄 천휘가 아니었지만 괜히 이래저래 말이 길어지는 것이 싫어 그런 식으로 말을 회피했다.

“뭐야! 고렙이면 단가? 웬 반말?”

“재수 없네. 그까짓 1실버 얼마나 한다고 지랄이야!”

“퉤! 그러게 말이야. 아무튼 있는 것들이 더한다니까!”

“…….”

대놓고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초보 유저들을 보며 천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것들을 확 엎어?’

순간적으로 천휘의 눈에 살기가 이글거렸지만 그것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천휘를 욕하는 데 정신이 쏠린 탓이었다.

“아공간 오픈! 냥이 소환!”

자신을 욕하는 초보 유저들을 뒤로하고 천휘는 마을 어귀에서 냥이를 소환했다.

크허어엉.

“헉! 저건 또 뭐야?”

“웬 호랑이? 『오벨리스크』에 호랑이도 있었나?”

천휘가 소환한 냥이를 보며 초보 유저들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샤벨 타이거가 워낙 고위 몬스터인 탓에 모두 샤벨 타이거를 처음 보는 듯했다.

크허어엉!

고작 자신을 호랑이 따위로 취급하는 초보 유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냥이가 포효를 터트렸다.

“조용히 해. 그러다 어린놈의 시키들 오줌 지린다.”

천휘가 냥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초보 유저들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꽤나 도발적인 말이었다.

“저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님! 지금 나보고 어리다고 했삼? 한번 죽어볼 거임? 난 미래의 킹왕짱 어쌔신임. 내 칼에 찔리면 국물도 없심!”

천휘가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이미 초보 유저들은 뿔이 날 대로 난 상황이었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빼들고 천휘를 벨 태세였다.

“하아, 귀찮아. 내가 그냥 간다, 가. 냥이야, 가자.”

“뭐야, 저 새끼! 우리 무서워서 그냥 가는 거야?”

“울 초딩들을 우습게보지 마삼! 초딩을 무시한 죄는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갚아줄 거임!”

천휘가 냥이를 타고 이그나혼으로 향하자 초보 유저들 중 나이가 어린 이들이 천휘를 뒤쫓았다. 고작해야 10살 남짓으로 보이는 그들은 게임 속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초딩들이었다.

병아리 떼들로 보여야 할 그들이 흡사 아귀 떼처럼 끈질기게도 천휘를 뒤쫓았다.

“병아리! 어라? 병아리 우는 것도 몰라? 그럼 강아지! 어라, 이것도? 쯧쯧. 말세다, 말세! 어린것들이 그런 것도 모른 데서야.”

“크아아악! 저 님 죽이삼! 반드시 죽이삼! 우리를 유딩 취급하고 있삼!”

“죽이삼! 죽이삼!”

“푸하하하!”

그렇게 천휘는 초딩이라는 꼬리를 달고 이그나혼으로 향했다.

휘익.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찾아주십시오.”

천휘가 이그나혼의 성내로 들어서자마자 찾은 곳은 최근 이그나혼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한 식당이었다.

이 드넓은 땅덩어리에서 고작해야 식당이 이슈가 되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분명 최근 이그나혼에 거주하는 NPC들이나 유저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바로 이그나혼 성내의 한 식당이었다.

운남정.

조금은 친숙한 이름의 이 식당은 진 마탑 인근에 자리 잡은 이그나혼 최고의 한식당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3층으로 나뉜 이곳은 창업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이그나혼 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고, 이내 『오벨리스크』 홈페이지인 오시리스에 『오벨리스크』의 10대 식당 중 하나로 꼽히며 이그나혼 최고의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 운남정이 수많은 손님들을 일절 받지 않고 가게 문을 걸어 잠그다니.

어떤 영문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손해까지 감수해가며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 이곳에서 중요한 모임이 있다는 소리였다.

“남자는 여드름.”

“아, 숙수님의 손님이셨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3층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종의 암호를 대듯 천휘가 기이한 단어를 내뱉자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안으로 들여보내줬다.

“애들 다 왔습니까?”

“숙수님과 그 친구 분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지금은 가볍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사내의 말에 천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대단해. 5천만 골드가 큰돈이긴 하지만 이 정도 규모에 이 정도 명성의 식당을 단시간에 만들기에는 많지 않은 돈이야.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다니까.’

천휘는 3층으로 올라가며 식당의 규모나 내부 인테리어를 살펴보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혁명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현실의 한식당을 재현해내고 있었다.

물론 자재가 다른 만큼 차이점이 눈에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매우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오벨리스크』를 즐기는 수많은 유저들은 현실에서는 먹기 힘든 비싼 한식들을 이곳 운남정에서라도 먹고 싶어 할 터였다.

“워매, 이것이 누구란가! 천휘 아니여!”

“야, 블랙헤드, 간만이다!”

3층에 올라서는 천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다름 아닌 블랙헤드였다. 예전의 골골한 행색은 온데간데없고 깔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여어, 왔냐.”

“자식,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제일 늦게 오는 거 봐라.”

“크크크, 미안하다.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말이야.”

흑백이 강렬하게 조화를 이룬 풀 플레이트 갑옷을 차려입은 카멜과 은은한 보라색 로브를 두른 로빈이 반가운 얼굴로 천휘를 맞았다. 최근 각자 일이 바빠 현실에서도 못 만난 탓에 세 사람은 더욱 반가운 눈치였다.

“안녕하세용, 천휘 오빠앙.”

“오랜만이야, 천휘 동생.”

“아! 눈송이와 하린 누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카이젠 산맥에서 보고 처음이죠?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늘 이 자리는 자신과 뜻을 함께할 이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때문에 최측근인 카멜과 로빈, 그리고 블랙헤드 세 사람만 볼 요량이었다.

“우리가 불렀어. 아무래도 그랜저 그 자식 작살내는 데 우리만으로는 이래저래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어차피 원정대에 속한다 해도 각자 파티를 이뤄서 움직일 텐데, 우리 네 사람만으로는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흐음, 하지만…….”

로빈의 뜻이 뭔지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친분이 두텁지도 않은 그들을 믿을 만큼 천휘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에 대해 불신의 감정만 들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희영, 그녀 때문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이들은 정말 믿을 수 있어.”

“그래, 로빈 말이 맞다! 하린 누님은 정말 믿을 수 있는 누님이야. 게다가 네 속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더라.”

“호호호. 천휘 동생, 걱정 마! 이래 봬도 나 입 무거운 여자야. 무슨 소리인지 알지?”

하린의 말에 천휘는 그제야 기분이 살짝 풀렸는지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눈송이도 마찬가지다. 네 속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울면서 도와주겠다고 했어.”

“울면서?”

“맞아용! 어쩜 그리 슬픈 사랑이 있는징……. 걱정 말아용. 이 눈송이가 오빠를 도와줄게용! 저만 믿어용!”

“…하아.”

이제 해가 지나 열일곱이 된 그녀였지만 초딩 같은 말투는 여전했다. 게다가 이제 확연히 사춘기도 왔는지 어느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감수성이 풍부한 여고생, 그 전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절 돕겠다는 것인지 알겠지만, 이번 일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어쩌면…….”

임페리얼 길드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단시간에 어떻게 그토록 방대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임페리얼 길드는 현재 『오벨리스크』 최강의 세력 중 한 곳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펜하르트 왕국의 백작위에 오른 것하며, 펜하르트 왕국 전역도 모자라 이제는 라그혼 왕국의 남부에까지 그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랜저는 감히 일개 개인으로서 닿을 수 없는 위치에까지 오르고 만 것이다.

“괜찮아, 천휘 동생. 어차피 게임 속 일인걸. 까짓 잘못되면 캐릭터 지우고 다시 시작하지, 뭐. 안 그래?”

“맞아용, 언니. 전적으로 동감이에용.”

생각보다 끈질긴 두 사람을 보며 천휘는 졌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말만으로는 두 사람을 설득할 수 없을 듯했다.

“그럼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거냐?”

“아직.”

“아직? 올 사람이 또 있어?”

“아, 저기 온다.”

『오벨리스크』 내에서 자기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 모두 모였다.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유저는 없었다. 있다면 원수나 마찬가지인 그랜저뿐이었다.

“안녕.”

“아하하, 너였어?”

3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미온이었다. 현실에서는 섹시한 여교사 미연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몽크 미온이 바로 그녀였다.

“오랜만이네.”

“게임에서는 거의 몇 년 만이지?”

천휘는 미온과 대화하며 로빈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왜 그녀를 불렀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빈은 그런 천휘의 눈빛을 회피하며 딴 곳을 바라봤다. 카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온 게 부담되는 모양이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일단 앉자.”

“그러자니깨. 매가야!”

“네, 숙수님.”

모두 자리에 앉자 블랙헤드가 아래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윽고 일전의 그 정장 차림의 사내가 위로 올라왔다.

“매가야.”

“숙수님, 제 이름은 매가가 아니고 매트라니까요.”

“그란깨 성을 따서 매가.”

“후우, 제 성은 매가 아니고 프란치스코인데요?”

“뭐시 그라고 복잡허데. 아무튼 가서 이짝에 운남 풀코스로 쫙 깔아브러라. 애들헌티 신경 쬐까 쓰라 이르고.”

“알겠습니다.”

블랙헤드가 지시를 내리자 매트라는 사내가 아래로 내려갔다.

“NPC냐?”

“그라제. 아무래도 유저들은 믿을 수 없은깨야.”

“크크크, 그놈의 사투리는 아직도 그대로네?”

“촌놈 어디 가가니?”

“크크, 네 말이 맞다.”

이윽고 탁자가 무너질 만큼 많은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졌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것을 보다 못한 카멜이 이제 됐다고 매트더러 내려가라고 할 정도였다.

“자, 이제 상이 차려졌으니 식사들 하면서 내 이야기 들어. 하린 누님, 그냥 말 편하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동생. 괜히 나 때문에 어려워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누님. 모두들 알겠지만 우리의 목표는 그랜저가 기획한 남부 화신의 사막 원정대에 참여하는 거다.”

눈앞에 맛있는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모든 이들의 이목은 일제히 천휘에게로 향해 있었다.

“화신의 사막은 아르니안의 4대 금지로 칭해져 있는 만큼 아직까지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장소지. 하지만 그랜저는 그곳을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대륙 각지로부터 유저들을 끌어 모으고 있어. 그것도 레벨 300 이상의 고렙 유저들만을.”

천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의 말처럼 그랜저에게 화신의 사막을 정복할 확실한 계획이 없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냐? 화신의 사막은 천휘 동생의 말처럼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야. 동생은 모르겠지만 난 예전에 북부 빙룡의 대지 원정에 참가한 적이 있어.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하린의 말에 모두가 숨죽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만큼 불어오는 눈보라는 둘째 치더라도, 눈밭에서 튀어나오는 수많은 몬스터들은 두렵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어. 게다가 그것뿐이게? 설원을 지배하는 이민족들은 마치 지옥의 야차처럼 원정대를 죄어왔어. 결국 우리는…….”

그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빙룡의 대지 원정을 떠났던 리버훌 성국의 원정대가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원정에 실패하고 전멸한 채 되돌아왔다는 것은 아르니안 대륙의 유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랜저 녀석은 가망도 없는 일에 뛰어들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묘책이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 지옥 같은 화신의 사막에서 우리의 전력을 얼마나 보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

로빈의 말에 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천휘 일행의 전력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대륙 10대 모험가인 하린, 카오스 팔라딘 카멜, 그리고 오망성의 마법사인 로빈과 얼음 공주라 불리는 눈송이까지. 거기에 더해 몽크인 미온과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천휘도 있었다.

하지만 이만한 전력으로도 천휘는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화신의 사막은 유저들에게 가혹한 곳이었고, 자칫했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강시들은 어쩔 거냐?”

이곳에 천휘가 강시술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때문에 로빈은 마음 편히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강시들은 사용할 수 없어. 이번 원정에 리버훌 성국의 성기사들이나 사제들도 참가할 태세니까. 그들이라면 강시들이 언데드들과 같이 죽음의 기운을 뿜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어.”

“천휘 말이 맞아요. 사실 저도 일전에 처음 천휘를 만났을 때는 그가 강시술사라는 것을 몰랐지만, 이제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고 신성력이 증가하니 금세 알아볼 수 있게 됐어요. 몽크인 저도 그러는데 신성력이 뛰어난 사제들은 아마 한눈에 알아볼 거예요.”

사제들이 천휘를 언데드나 부리는 네크로맨서로 치부하는 것은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아직까지 아르니안 대륙에서 그리 많지 않은 직업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마법사의 상위 직업군 중 하나인 네크로맨서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0레벨을 넘어서 트리플 마스터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제들이 천휘를 네크로맨서로 간주하게 된다면 여러 유저들의 이목이 천휘에게 집중될 것이다. 어쩌면 그랜저의 귀에까지 들어가 녀석과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천휘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녀석은 내 얼굴을 알고 있다.’

천휘가 이번 원정에서 착용할 인피면구는 다름 아닌 제황의 계곡에서 착용했던 바로 그 인피면구였다. 그랜저가 소환사로 알고 있는 그 얼굴인 것이다.

‘내 실제 얼굴은 절대 안 돼. 그렇다고 골든 시크릿으로 알려진 얼굴도 안 돼. 그 얼굴은 알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아.’

골든 시크릿으로 알려진 얼굴은 그랜저뿐 아니라 알고 있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 때문에 천휘로서는 아직 그리 많이 착용하지 않은 소환사 인피면구를 착용하려 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랜저와는 어떻게든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 강시들이 없어도 난 충분히 강하니까.”

천휘의 강함은 이미 모두들 알고 있었다. 물론 강시술사일 때의 그가 더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격투가로서의 그도 그리 뒤처지지 않았다. 더욱이 이제는 마신의 권능까지 얻은 데에야…….

“아무튼 우리에게 중요한 건 두 가지야. 하나는 생존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랜저의 뒤통수를 치는 것!”

카멜이 얼른 자신의 말을 받아 소리치자 천휘가 웃으며 말했다.

“큭큭. 그래, 바로 그거야! 이번 원정에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바로 그거다! 다른 분들께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번 원정은 바로 그랜저가 이루려는 야욕을 깨부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겨우 7명 가지고 그게 될까? 그는 수백, 아니 수천의 길원을 거느린 길드마스터라고. 게다가 지닌 무위도 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데 말이야.”

“그러게요.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천휘의 말에 하린과 눈송이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확실히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해 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두 분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우리는 고작 7명이 전부가 아닙니다. 제 직업이 뭔지 잊으셨어요?”

“아!”

“하긴 그러네요.”

천휘의 말에 두 여인은 그제야 어느 정도 수긍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감히 말하건대, 그랜저 따위는 제 상대가 되질 못합니다. 물론 그가 전 길원들을 총동원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그 대단하다는 임페리얼 길드에서도 300레벨 이상의 고렙 유저들은 채 오십 명에 지나지 않아. 그 정도 숫자라면 우리와 천휘의 강시로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야.”

“로빈, 네 말이 맞다. 하린 누님과 눈송이 동생도 그렇게 알고 각자 준비를 해주세요. 적어도 게임 시간으로 한 달 이상의 긴 원정이 될 테니까요.”

천휘의 지시에 하린과 눈송이가 각자 카멜과 로빈을 따라 운남정을 나섰다.

“내는 뭘 하믄 되겄냐?”

“당연히 넌 우리가 원정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해줘야지.”

“말은 쉬울란가 몰라도, 그것이 되겄나? 알란가 모르겄지만서도 음식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니깨.”

“걱정 마라, 내게는 아공간이 있으니.”

“아공간?”

천휘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블랙헤드 앞에서 아공간을 오픈시켰다.

“이거시 뭐시다냐? 꺼먼 것이… 워매, 무서워브네.”

“아공간이라는 거다. 8서클 대마도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종의 창고와 같은 거지.”

“창고? 그렇다믄 이거시?”

“그래, 이 아공간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공간이다. 시간도 흐르지 않고 온도도 변하지 않아. 어때, 음식을 저장하기에는 딱이지?”

천휘의 말에 블랙헤드가 기쁜 듯이 소리쳤다.

“당연한 거 아이가! 그렇다믄 내는 얼른 가서 음식을 맹글어와야 쓰겄다. 최소 한 달 동안의 원정이랬제? 내일까정 맹글라믄 시간이 겁나게 없어븐디? 아그들 닦달해야 쓰겄네. 내 먼저 간다잉!”

“그래,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능력치가 부가되는 거면 더 좋고!”

“내만 믿어라!”

블랙헤드까지 3층에서 사라지자 그곳엔 이제 천휘와 미온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직 어색한 듯 찻잔만 기울이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학교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조금은 뜬금없지만 천휘로서는 그녀에게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부잣집 딸인 그녀가 갑작스럽게 작은 고등학교의 교사로 부임한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언밸런스한 일이었던 탓이다.

“정말 모르겠어?”

미온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천휘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나 때문이다, 이거지?”

“알면서 뭘 물어?”

그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천휘는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천휘의 행동에 미온이 놀라며 말을 버벅거렸다.

“가만히 있어봐.”

“무, 무슨!”

천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뜬금없는 행동이었지만 미온 역시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동안 네게 몹쓸 짓, 몹쓸 말만 한 것 같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기억 안 날 리가 있겠어?”

희영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게임 속에서 만난 것이 먼저였다. 격투가 길드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그리고는 헤론 습지에서 또다시 우연찮게 만나 사냥도 함께 했었다.

“사실 난 그때 그 습지에서…….”

“그 습지에서 뭐?”

“네가 변녀인 줄 알았어.”

“변녀? 그게 뭔데?”

“변태녀.”

“뭐? 내가 왜 변태녀인데!”

미온의 앙칼진 반응에 천휘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시에 넌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헤론 리자드맨을 상대로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잖아. 결국 나와 내 강시들이 그 리자드맨들을 상대했었지.”

“그래서 뭐!”

“그때 내가 피로가 쌓여 기력이 떨어질 때마다 네가 내게 기력 회복 마법을 펼쳤지?”

“어, 그랬었지.”

“난 네가 내게 기력 회복 마법을 펼쳐 준 것이 날 미라처럼 말려 죽이려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당시에 워낙 오랜 시간 전투를 펼친 탓에 한동안 『오벨리스크』에 접속하기도 싫었었고.”

“아!”

천휘의 설명에 미온이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네 눈빛이 좀 이상하긴 했어. 뭐야! 그런 걸로 변태라는 거야?”

“큭큭, 그때는 정말 네가 무서웠으니까.”

“체엣, 짜증나네. 그런 걸로 우리 사이가 틀어졌었다니. 난 몰랐다고!”

“누가 뭐래? 큭큭.”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 편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처음의 어색함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것인지 서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자고 학교에 온 거야?”

“너와 같이 있고 싶어서.”

천휘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미온 역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마음의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고.”

“상관없어. 그냥 난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니까.”

“…….”

마치 예전 희영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투영되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자신 역시 지금의 미온과 다르지 않았다.

“…미안해.”

“다 좋은데, 미안하다는 말은 집어치워줄래? 그딴 말 듣자고 온 거 아니거든?”

“큭큭. 그래, 그렇게 할게.”

처음에는 오해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에게 마음을 쓰는 관계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두 사람도 그러한 것을 느꼈는지 그저 말없이 찻잔만을 기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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