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장 랄프 로렌 (41/82)

제10장 랄프 로렌

우르릉.

콰과과광!

천휘가 땅굴 밖으로 나서자 힘겹게 버티고 있던 땅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순식간에 풀이 가득하던 초원 지대는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양 처참하게 변해버렸다.

[어떻게…….]

“왜! 내가 그 똥개 자식에게 죽기라도 바랐냐? 아서라. 이 몸은 절대 죽지 않는 불사신이야.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강시지존이라고! 그따위 똥개가 날 어찌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카이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천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익.

[끄아아악!]

“이건 네놈에게 주는 벌이다.”

그야말로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서 푸는 격으로, 천휘는 카이젠을 괴롭혔다.

‘빌어먹을! 녀석의 시체는 온전했는데, 대체 그 장궁은 어디로 간 거야!’

펜릴을 마신의 품으로 되돌려 보낸 천휘는 기꺼운 마음으로 피라미드를 올라 금발 다크 엘프의 시체를 수거했다. 다행히 피라미드를 강타한 벼락에도 녀석의 시체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검은색 장궁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동공을 샅샅이 뒤져 봐도 장궁은 보이질 않았다.

결국 계속 충격을 받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땅굴을 빠져나오며 천휘는 무척이나 신경질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천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성 다크 엘프가 천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을 구해준 장본인이 천휘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저희들을 구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띠링! ‘다크 엘프의 영웅’ 칭호를 부여받으셨습니다.]

[띠링! 명성이 50,000 상승하셨습니다.]

“다크 엘프의 영웅?”

이토록 어려운 퀘스트를 수행했는데 고작 칭호라니…….

천휘는 열불이 나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서 죽겠는데 이따위로 자신을 놀려 대는 다크 엘프 녀석들을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크 엘프의 영웅]

다크 엘프들을 구해준 은인에게 내려지는 칭호.

의심이 많고 인간을 꺼리는 다크 엘프의 신뢰도가 극에 이르렀을 때 발생한다.

등급:A

제한:다크 엘프들의 무한한 신뢰

옵션:모든 스탯+50

하지만 천휘는 일단 화를 가라앉혔다. 그들을 처치하는 것은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궁금증을 풀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혹시, 그 금발의 다크 엘프…….”

“아, 랄프 로렌 녀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금발의 다크 엘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남성 다크 엘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녀석은 어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다. 한데…….”

“혹시나, 그 악마의 활이 사라졌습니까?”

“악마의… 활?”

천휘는 직감적으로 그 악마의 활이라는 것이 자신이 찾고 있던 거대한 장궁임을 깨달았다.

“그가 확실하게 죽었다면, 그 악마의 활은 분명히 자취를 감췄을 테지요.”

‘뭐야? 이 자식.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남성 다크 엘프의 물음에 천휘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녀석은 악마의 자식입니다. 악마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아귀(餓鬼) 힐프리거의 자식입니다.”

“아귀라면…….”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악마지요. 아주 악질적인.”

“그래서.”

“네?”

“그래서 그 장궁이 어디로 사라졌냐고.”

천휘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장궁이 악마의 활이라느니, 금발 다크 엘프가 악마의 자식이라느니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 활의 행방만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아, 악마의 활은 악마의 자식이 사라짐과 동시에 악마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마도 랄프 로렌이 죽었으니, 악마의 활은 악마에게로…….”

“아, 젠장! 그러니까 그 악마라는 녀석이 어디에 있냐고! 그걸 말하란 말이야, 그걸!”

참다못한 천휘가 결국 폭발하며 소리쳤다. 지금은 녀석에게 예의를 갖출 때가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그 거대한 장궁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천휘는 너무도 조급했다.

“그 악마라면 심연의 늪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봉인되어…….”

천휘의 다그침에 놀랐는지 그제야 다크 엘프도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일러주기 시작했다.

“심연의 늪?”

심연의 늪이라면 밀림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늪이었다. 늪 전체가 발 디딜 만한 지반도 형성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사람 키만 한 갈대들이 우거져 있어 천휘로서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 곳 중 하나였다.

“심연의 늪 중심에 작은 섬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악마 힐프리거의 석상이 자리하고 있지요. 아마도 랄프 로렌이 죽으면서 그 장궁은 그곳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악마의 품으로…….”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천휘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천휘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 대단한 활을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할 뿐이었다.

“닌자거북!”

[충!]

“이들을 마을까지 데려다줘라. 늑대인간 녀석들 때문에 몸도, 마음도 다들 지쳤을 테니 말이야. 나타나는 마수 녀석들은 모조리 다 해치우고.”

[충!]

천휘의 명령에 닌자거북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허깨비와도 같은 그들의 등장에 다크 엘프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가벼운 몸놀림과 어둠의 성향을 지닌 은신의 대가들이었지만, 닌자거북들의 은신은 그야말로 차원을 달리하는 탓이었다.

그렇게 닌자거북 셋이 다크 엘프들을 이끌고 마을로 향하자, 천휘가 나지막하게 닌자거북들의 수장 레오나르도를 불렀다.

“레오나르도.”

[부르셨습니까.]

“녀석들을 마을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녀석들을 모조리 처치해라. 당연히 사지는 멀쩡해야 한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지?”

[충!]

어차피 다크 엘프들은 천휘 자신의 강시들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굳이 그들을 마을로 데려가서 죽이려는 이유는, 기왕이면 퀘스트 보상을 받고 나서 해치우려는 심산이었다.

악마.

천휘, 그는 아귀 힐프리거보다 더한 악마였다.

천휘는 닌자거북들에게 다크 엘프와 관련된 일을 맡겨 두고 곧바로 심연의 늪으로 향했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이미 심연의 밀림에 익숙해진 그는 보법을 운용해 겨우 2시간 만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이젠, 저 안쪽에 뭐가 보이냐?”

[죄송합니다. 늪 안쪽에 형성된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로즈란, 저 안개 치울 수 있겠어?”

[불가능해요. 파이어 스톰을 쓴다면 어느 정도 안개를 걷을 수는 있겠지만, 이 정도로 자욱한 안개라면 그마저도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 같아요.]

“흐음.”

예전에 이곳을 지나쳤을 때는 늪 중심부에만 안개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늪 가장자리부터 뿌옇게 안개가 형성되어 있었다.

소드엠페러인 카이젠의 뛰어난 시력으로도 전방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는 자욱했다.

“이렇게 되면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겠는데? 하지만 이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들어설 수는 없는데 말이야. 행여나 늪 밑바닥에서 마수라도 나타나는 날에는…….”

땅 위에서 마수를 만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수중에서 마수를 만나는 것은 천휘로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수중에서는 카이젠을 비롯한 천휘가 제대로 된 은신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반대로 마수들은 수중에서도 몇 배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었고 이미 지저 세계에서 수중 마수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꺼려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참에 수중 마수 한 마리를 강시로 만드시는 것은 어때요?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수중 마수를?”

로즈란의 말에 천휘는 귀를 쫑긋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수중 마수를 강시로 만든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법 유용하게 쓰일 것이 분명했다.

“좋았어! 당장 만들어야지!”

천휘의 강시 제작술은 이미 경지에 올라 혈강시 정도는 이틀 정도면 제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악마의 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상황이니, 시간은 넉넉하다고 봐야 했다.

“난 거처로 가서 강시를 제작해올 테니, 너희들은 여길 감시하고 있어.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곧바로 연락하고. 알겠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천휘는 곧바로 강시를 제작할 요량이었다.

그런 천휘의 마음을 읽었는지 카이젠과 로즈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심연의 늪 가장자리를 돌며 탐색에 나섰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 * *

“아공간 오픈. 라프라스 소환!”

라프라프.

[꺄아악! 귀여워!]

천휘가 이틀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마수는 라프라스라는 이름의 수중 마수였다.

등에는 천휘의 주먹에도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등껍질을 두르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자라처럼 짧은 다리들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녀석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마치 사슴을 연상시키는 머리였다. 사슴의 눈망울처럼 녀석의 눈망울도 크고 촉촉했으며, 늘 웃는 얼굴로 샤방샤방한 미소를 내뿜고 있었다.

“저번에 지저 세계의 강가에서 잡은 라프라스라는 녀석이야. 이래 보여도 상급 마수니까 이 늪에서 이 녀석을 어찌할 마수는 없을 거야. 자, 다들 올라타.”

마수 라프라스는 천휘가 지저 세계에서 지상으로 돌아오며 잡은 유일한 수중 마수였다. 사실은 그마저도 운이 좋아 잡았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강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귀여운 얼굴에 걸맞지 않게 녀석은 마치 터틀 드래곤처럼 워터 브레스를 뿜어낼 수 있었고 단단한 등껍질을 이용해 웬만한 공격들은 모두 막아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공방이 일체된 최고의 마수라는 소리였다.

“출발!”

라프라프.

천휘의 명령에 마수 라프라스가 빠르게 물살을 헤치기 시작했다. 마치 현실에서 모터보트를 타는 것처럼 라프라스는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주변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마라.”

천휘가 명령하지 않아도 카이젠과 로즈란은 죽을힘을 다해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마수가 접근해 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면 천휘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게 물살을 가르기 시작한 지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났다. 시야를 가로막던 뿌연 안개가 점점 걷히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섬입니다.]

“흐음, 역시나 그 다크 엘프의 말이 사실이었어.”

멀리 보이는 섬을 보며 천휘는 기분 좋은 웃음을 내비쳤다. 의외로 일이 간단하게 풀린 탓이었다.

라프라프.

[주인님! 마수입니다!]

“젠장! 그럼 그렇지! 어째 일이 쉽게 풀린다고 했어!”

라프라스와 카이젠이 동시에 반응했다. 전방에서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는 거대한 마수를 본 탓이었다.

“제길! 이번엔 상어냐! 자라야, 왼쪽으로 회피해!”

라프라프!

천휘는 라프라스에게 자라라는 애칭을 지어줬다. 라프라스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천휘의 명령을 따랐다.

“녀석이 접근한다! 로즈란! 녀석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늦춰!”

이전에도 경험했었지만 수중 마수들이 무서운 점은 가공할 속도로 물살을 헤치고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그 점을 깊이 각인하고 있는 천휘였기에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워터 프리즌(Water Prison)!]

천휘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로즈란이 마법을 시전했다. 이윽고 거대한 수중 감옥이 만들어지며 상어 형상의 마수를 봉쇄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죄송해요! 녀석의 힘이 워낙 세서!]

“괜찮아! 이미 예견했던 바야! 카이젠! 이번엔 네 차례다! 녀석이 접근하면 녀석을 수면 위로 띄워버려!”

[알겠습니다!]

상어 마수의 크기는 거의 10미터에 달했다. 그런 녀석을 수면 위로 끌어내라니, 언뜻 보기에는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천휘의 무리한 명령을 거부할 능력이 없었다. 그저 혼신의 힘을 다해 천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만이 그가 피리 소리를 듣지 않을 유일한 방법일 따름이었다.

쉬이익.

“…지가 무슨 조스도 아니고 갑자기 지느러미는 수면 위로 왜 빼는 건데?”

흡사 어린 시절 본 영화 ‘조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거대한 상어가 수면 위로 삼각형의 지느러미를 내밀고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던 바로 그 영화!

하지만 천휘는 그때처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이야!”

천휘의 외침에 카이젠이 반응했다.

상어 마수와의 거리는 고작해야 5미터.

자칫하다가는 상어 마수의 날카로운 이빨이 라프라스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라그나 소어(Ragna Soar)!]

하지만 카이젠이 누구이던가.

얇디얇은 레이피어 한 자루만으로 소드엠페러라는 지고무상한 경지에 오른 대검호가 아니던가.

카이젠의 레이피어가 수면을 두드리자, 아래에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칼끝에서 형성된 회오리바람은 상어 마수의 배 밑을 파고들더니, 이내 상어 마수를 허공으로 날아오르게 만들었다.

“자라야! 브레스!”

라프라프!

크아아앙!

천휘의 명령에 하늘 높이 날아오른 상어 마수에게 라프라스의 워터 브레스가 작렬했다. 마법으로 치자면, 7서클 대인 마법 정도의 위력이 담긴 워터 브레스에 상어 마수가 괴성을 내지르며 더욱더 놓은 허공 위로 솟구쳤다.

“타앗!”

그러자 이번에는 천휘가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마지막 대미는 자신이 장식하려는 듯 그의 주먹에는 검붉은 오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쿠워어엉!

하지만 상어 마수도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 아가리를 벌리며 거대한 이빨을 드러내고는 천휘를 물고자 몸을 비틀었다.

타악.

“이 정도도 못 피하면 그랜저 녀석을 볼 면목이 없지!”

하지만 천휘는 그것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녀석의 콧잔등을 지지대 삼아 상어 마수보다 더욱 높은 곳까지 솟구쳤다.

“이거나 먹고 꺼져! 파멸의 안식!”

휘이익.

쫘아아악.

공중에서 떨어지며 더욱 위력이 배가된 천휘의 주먹이 상어 마수의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마치 회칼에 의해 찢어지는 것처럼 상어 마수가 둘로 나뉘며 늪의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띠링!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띠링! 칭호 퀘스트 ‘마수 학살자’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마수 학살자의 칭호’를 부여받으셨습니다.]

[마수 학살자]

아르니안 대륙을 어지럽히는 마수들을 무수히 처치한 전사에게 내리는 칭호. 마수들의 두려움을 얻게 되는 부가 효과가 있다.

등급:A

제한:심연의 밀림에서의 사냥

옵션:모든 스탯+30

옵션:생명력과 마나 최대치 5% 증가

“흐흐, 이제야 이 퀘스트를 완료했네. 좋았어! 카이젠은 늪에 들어가서 아이템 회수해와라. 돌아오면 바로 성에 상륙한다.”

현실 시간으로 무려 한 달여 만에 완료한 칭호 퀘스트.

힘들었던 만큼 보상이 대단해 천휘로서는 만족, 만족, 또 만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자신이 정작 얻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악마의 활.

자신의 주력 강시가 될 랄프 로렌에게 줄 바로 그 악마의 활 힐프리거였다.

쏴아아.

탁.

라프라스가 물살을 가르며 섬에 상륙했다.

천휘와 두 강시는 라프라스에서 내려 섬에 발을 내디뎠다.

“수고했다, 자라야. 여긴 혼자 있기 위험한 곳이니까 우리가 다녀오기 전까지 아공간으로 돌아가 있어.”

라프라프.

라프라스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방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천휘에게 얼굴을 비벼 댔다.

“라프라스 역소환!”

하지만 천휘는 그런 녀석이 귀엽지도 않은지 곧바로 녀석을 아공간으로 되돌려 보냈다.

“생각보다 섬이 작아. 오면서 봤지만 우리에게 위협을 가할 만한 마수는 보이지 않으니까, 곧바로 섬 중앙으로 향한다. 아마 그곳에 봉인되었다는 그 악마가 살고 있을 거다. 카이젠, 앞장서!”

[알겠습니다.]

카이젠을 선두로 일행이 움직였다.

워낙 빠르게 발을 놀린 탓에 일행은 곧바로 섬의 중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흐음, 저건가?”

섬의 중심에는 보기만 해도 구토가 나올 만큼 끔찍한 악마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으윽, 너무 못생겼어요. 토 나와.]

어지간해서는 저런 말을 내뱉지 않는 로즈란도 비위가 상하는지 눈을 가리며 얼굴을 홱 하고 돌려 버렸다.

[심히 부담스럽게 생긴 석상입니다.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카이젠마저도 어울리지 않게 살기를 내뿜으며 석상을 쳐다봤다. 평소 수준이 떨어지는 마수나 몬스터들만 상대한 탓에 딱히 살기를 내비칠 기회가 없었던 그가 살기를 보이자, 이 작은 섬 근처에 있었던 마수들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정도였다.

“큭큭, 확실히 못생기긴 했네. 뭐, 어찌 됐든 석상에 다가가보면 알겠지.”

두 강시의 재밌는 반응에 천휘는 실실대며 석상에 다가갔다.

픽.

“어라? 뭐야. 이 자식 움직이잖아?”

천휘가 석상에 다가가자, 흉측한 악마의 석상이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석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천휘로서는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간파해냈다.

[아무래도 녀석은 석상이 아니라 그저 악마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면 제가 한번 시험해볼까요?]

카이젠의 말에 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의 허락에 카이젠이 짙은 살기를 내비치며 레이피어를 꺼내 석상에 다가갔다.

[하앗! 라그나 블레이드(Ragna Blade)!]

단순히 위협용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카이젠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을 가했다. 얇은 레이피어에 담긴 기운이 어찌나 강렬한지 천휘로서도 몸을 피할 정도였다.

[끄악! 이 미친놈들!]

그러자 악마의 석상이 말을 내뱉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은 하늘을 날지 못하는지 곧바로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네가 힐프리거냐?”

[그렇다면 어쩔 거냐! 감히 인간 따위가 어딜 와.]

“이야, 진짜 더럽게 못생겼다.”

[뭣이?]

천휘의 도발에 힐프리거가 인상을 찡그렸다. 악마인 주제에 감정 표현이 지나치게 솔직한 녀석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너같이 못생긴 놈은 처음이다, 진짜.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그맨들도 너보다는 한 이천 배 잘생겼겠다. 와, 어떻게 저런 면상이 나올 수가 있지? 네 부모님도 참 기구한 인생이네.”

[이런 육시랄!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을…….]

“너 아귀 힐프리거 아냐.”

[…어.]

“딴 건 필요 없고 살려 줄 테니, 악마의 활이라는 거나 빨리 내놔 봐. 이 형아, 시간 없다. 정확히 열 셀 동안 내놔라.”

[이런 미친. 그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하나.”

힐프리거의 거친 욕에도 불구하고 천휘는 꿋꿋이 숫자를 셌다.

[세상이 제아무리 거지같아도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세상에 악마 삥을 뜯으려는 거냐, 지금?]

“둘.”

힐프리거가 뭐라 하든 천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숫자를 셌다. 그와 더불어 카이젠이 레이피어를 들고 힐프리거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진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너 진짜 머리가 헤까닥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셋.”

[…….]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천휘를 보며 힐프리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찌꺼기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싶었지만, 옆에서 지독한 살기를 내비치는 카이젠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 전에 그가 보여 준 공격은 제아무리 자신이 악마라 해도 어찌할 수 없는 극강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넷, 다섯.”

[뭐야! 갑자기 그렇게 세는 게 어디 있어!]

갑작스레 넷과 다섯을 연달아 읊은 천휘에게 힐프리거는 마치 반칙이라는 듯 따졌다.

“숫자 세는 건 내 맘이다. 여섯!”

천휘가 힘을 여섯을 외쳤다. 힐프리거는 그의 제멋대로 방식에 기가 찬다는 듯 입을 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곱!”

[자- 잠깐만. 그 활은 주란다고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여덟! 이제 둘 남았다!”

[그러니까 그걸 주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홉!”

힐프리거가 뭐라 지껄이든 천휘는 꿋꿋하게 숫자를 셌다. 이제 남은 숫자는 단 하나. 만약 천휘의 입에서 열이라는 숫자가 나오면 카이젠은 곧바로 레이피어를 힐프리거의 심장에 꽂을 심산이었다.

“여…….”

[잠깐! 준다, 줘! 내 더럽고 치사해서 준다!]

“큭큭.”

천휘가 열을 세려고 하자, 힐프리거가 그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그의 항복에 천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물론 미연의 사태에 대비해 카이젠과 로즈란이 좌우로 나란히 호위를 선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못 줘.]

“뭐야? 이런 개 구라 자식을 봤나! 카이젠! 녀석을 그냥 꼬치 꿰듯 심장을 꿰어버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자신을 죽이려는 천휘와 카이젠을 보며 힐프리거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쳤다.

[자- 잠깐! 그게 아니고 난 내 종속자가 있어야 활로 변할 수 있단 말이다!]

“종속자?”

뜻 모를 힐프리거의 말에 천휘가 되물었다.

[그래, 종속자! 악마의 활 힐프리거는 곧 나 자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난 계기가 없이는 활로 변할 수 없어. 마신께서 그렇게 만들었으니 따지고 싶으면 그분께 따져.]

“그 종속자가 랄프 로렌이라는 다크 엘프냐?”

[그렇다. 그만이 날 변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죽었으니 난 절대 활로 변할 수 없다!]

절대 활로 변할 수 없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는 힐프리거를 보며 천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카이젠, 녀석을 잘 감시해! 여기서 즉석으로 강시를 제작한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천휘의 명령에 카이젠이 힐프리거의 옆으로 다가갔다. 녀석의 흉측한 얼굴이 보기 싫은 탓인지 카이젠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녀석을 꿇어 앉혔다.

[강시?]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힐프리거는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천휘를 쳐다봤다. 하지만 천휘는 그런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공간에서 강시 제작에 필요한 시약들과 거대한 철제 수조를 꺼냈다.

“어차피 이 근방에는 우리를 해할 마수도 없으니 강시를 만들어도 되겠지. 자, 어디 시약 배합을 해볼까?”

천휘가 배합하는 시약은 다름 아닌 음양마령강시를 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랄프 로렌의 뛰어난 궁술을 확인한 천휘였기에 기왕이면 녀석을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강의 강시로 재탄생시키고 싶었다.

“자, 이 정도면 얼추 되었고. 이제 이것만 넣으면 되려나?”

장장 반나절에 걸쳐 시약을 배합한 천휘는 무한의 행낭에서 작은 뿌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그것은!]

[마- 만드라고라!]

자신들을 끔찍한 고통에 빠지게 하는 마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카이젠과 로즈란이 두려운 표정으로 천휘의 손에 들린 만드라고라를 쳐다봤다.

“큭큭, 걱정 마. 이제 너희들의 동료가 하나 더 늘게 된 거니까. 고통도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 안 그래?”

[…….]

[…….]

천휘의 사악한 미소에 카이젠과 로즈란은 벌벌 떨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천휘의 말대로 자신들처럼 고통에 몸부림칠 동료가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퐁당.

“자, 이제 시약 배합이 끝났으니 녀석을 집어넣어 볼까? 아공간 오픈!”

[헉! 아공간? 그렇다면 당신은… 8서클 대마법사?]

아공간은 8서클 대마법사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고 있던 힐프리거는 천휘가 아공간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자식은 웬 뒷북이야? 그냥 잠자코 보고 있기나 하시지?”

천휘는 힐프리거의 물음에 대답할 의무를 못 느낀 듯 그를 무시하며 랄프 로렌의 시체를 아공간에서 꺼냈다.

[헉! 그것은 로렌의 시체?]

그래도 예전의 종속자라고 대번에 시체의 정체를 알아본 힐프리거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아나, 저 자식 신경 쓰이게 하네. 카이젠, 몇 대 쥐어박아 줘. 저 냄새나는 입 좀 못 열게.”

[알겠습니다.]

퍼버벅.

[끄아악!]

단숨에 장내를 조용히 시킨 천휘는 곧바로 시약 화합물이 담긴 철제 수조에 랄프 로렌의 시체를 집어넣었다.

“자,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 마수 사냥이나 다시 시작해볼까? 카이젠, 넌 여기에서 그 녀석 잘 감시하고 있어. 한눈팔면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니까.”

[잘 감시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난 로즈란과 함께 늪지대의 마수들을 처치하고 올게. 그동안 잘 지키고 있으라고.”

음양마령강시 제작을 위한 시약 화합물이 시체에 스며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보름.

천휘는 그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레벨을 올릴 심산이었다.

지금부터 반년.

그랜저를 깨부수기 전까지 한시도 여유부릴 틈이 없었다.

* * *

“이제 시작인가?”

순식간에 게임 속에서 보름이 지나갔다.

그동안 천휘는 학교와 집을 오가며 『오벨리스크』에 집중했다. 다행히 개학 후 첫 회식이 내일에야 있어 천휘는 제때에 맞춰 『오벨리스크』에 접속할 수 있었다.

[기포가 올라온 지 30분 정도 되었어요.]

“그래? 그럼 바로 시작해야겠네.”

로즈란의 말에 천휘는 손을 걷고 곧바로 수조 안으로 양팔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양손에서 고루마공의 기운을 쭉 뽑아내 랄프 로렌의 시체로 주입했다.

‘역시! 마나를 원없이 집어삼키는구나!’

이미 한 번 경험을 해봐 이전처럼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마나를 흡수당하는 느낌은 썩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천휘는 새로운 음양마령강시가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에 꾹 참고 마나를 끝까지 주입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을까.

서서히 손끝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 1분이 지나자 천휘의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마나는 더 이상 없었다.

[띠링! 음양마령강시를 제작하셨습니다.]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음양마령강시는 마치 예술가 유저들이 만드는 명작이나 대작처럼 제작할 때마다 명성 수치를 올려 주었다. 그만큼 강시술사에게 있어 음양마령강시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강시라는 소리였다.

이름:랄프 로렌

등급:음양마령강시

생명력:4,500 마나:25,000

<기본 스탯>

근력:370 민첩:4,720 체력:440

지혜:50 지력:50

“뭐야? 이 수치는? 다른 건 다 좋은데. 대체 왜 지혜 수치와 지력 수치는 이렇게 낮은 건데? 이거 설마…….”

순간 새로운 음양마령강시의 상태창을 확인하던 천휘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크윽, 날 깨운 게 누구야! 젠장! 머리 아프잖아!]

“…휴우. 이거 설마 제2의 오베른인가?”

깨어나자마자 다짜고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랄프 로렌을 보며 천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의 말투에서 오베른의 향기를 강하게 맡은 탓이었다.

“내가 널 깨운 사람이다.”

[뭐야? 인간이야? 네가 날 왜 깨우는 건데? 영원한 안식에 들어 이제 좀 편히 쉬려는 다크 엘프에게 말이야! 죽어볼래?]

[이 망나니 자식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랄프 로렌의 고함에 카이젠이 응수하며 맞섰다. 하지만 랄프 로렌은 그의 엄청난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지를 불태우며 소리쳤다.

[한가락 하는 놈일세. 어때? 나랑 한판 붙어볼까?]

[두말하면 잔소리지! 당장…….]

삐이익!

[끄아아악!]

[꺄아아악!]

[으허어억!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삽시간에 대결 구도로 가려는 두 강시의 정신 상태를 뜯어 고치기 위해 천휘는 서슴없이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불었다. 함께 있다가 괜히 로즈란이 봉변당하는 꼴이었지만, 그걸 배려해줄 정도로 천휘는 배려심이 깊지 않았다.

[으허어억! 저 피리 소리! 저 피리 소리가 정체야! 저 녀석을 확!]

삐이익!

[으허어억!]

[끄아아악! 이 자식아! 가만히 있지 못해! 너 때문에 괜히 우리만!]

[꺄아아악! 그 입 좀 닥치지 못해!]

랄프 로렌의 발악에 피리 소리가 한층 커지자 카이젠과 로즈란이 견디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그들은 벌써 여러 번 겪어본 고통이건만 아무리 들어도 저 피리 소리로 인한 고통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10분간 천휘는 계속해서 피리를 불었다. 이미 카이젠과 로즈란은 고통으로 실신한 상태. 그러나 랄프 로렌은 여전히 독기 어린 눈빛으로 천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 로렌. 네가 저 악마 녀석의 종속자라는 게 사실이지?”

[그런데 왜?]

“…휴우. 긴말 할 것 없고 그냥 저 녀석을 활로 변형시켜. 그리고 그 활의 주인은 당연히 너다.”

[그렇게 하면 내게 뭘 해줄 건데?]

“…….”

강시 주제에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많은 녀석을 보며 천휘는 할 말을 잃은 듯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이 자식 확실히 오베른과 비슷해. 막나가는 성격하며. 후우, 오베른을 둘이나 데리고 다닐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네.’

“너 싸움 좋아하지?”

[당연하잖아! 남자라면 힘! 힘하면 싸움!]

“하아… 좋아. 네가 내 말대로 따라준다면 앞으로 원없이 싸우게 해주마. 상대가 누구건 간에!”

[와우! 좋은 제안이긴 한데, 난 그럴 생각 없는데?]

“뭣이?”

의외의 대답에 천휘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래저래 왕창 짜증나게 하는 녀석이었다.

[난 누굴 위해서 싸우는 다크 엘프가 아니거든. 우리 종족들을 위하면 모를까.]

녀석의 마지막 말에 천휘는 눈빛을 번뜩였다. 녀석을 움직이게 할 좋은 방안이 떠오른 것이다.

“네가 그렇게 위하던 다크 엘프들, 모조리 죽었다.”

[뭐- 뭐라고!]

처음으로 랄프 로렌이 감정의 변화를 내비쳤다. 그에 천휘는 슬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늑대인간에게 허무하게 잡히고 나서 그들은 결국 모두 녀석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녀석들이 분명히 약속했는데! 내 목숨을 대가로 그들을 살려 주겠다고!]

“너 지금 늑대인간들을 믿은 거냐? 당연히 그따위 약속이야 헌신짝처럼 버렸지.”

[으드득! 이런 육시랄 놈들!]

천휘의 말에 랄프 로렌이 카이젠에 버금가는 살기를 내뿜었다. 조금 전의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라.”

[그게 무슨 말이지? 걱정을 말라니.]

“내가 그 시체들을 잘 보존하고 있으니 말이야.”

[시체를 보존하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나? 어차피 죽은 목숨들. 위대하신 마신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시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들을 되살릴 수 있는데도?”

능글거리는 미소를 띠며 천휘가 여유롭게 물었다.

[되살릴 수 있다고?]

“네가 지금 어떻게 나와 말을 섞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난 시체를 되살릴 수 있는 동방의 술사다. 일종의 마법사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아무튼 난 그들을 살려 낼 수 있다. 더불어 그들을 너와 함께 나의 부하로 들일 생각이다. 어때? 이제야 좀 구미가 당기나?”

[흐음.]

천휘의 제안에 랄프 로렌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슬슬 입질이 오는 모양이었다.

[좋다! 네 말대로 따르지. 단!]

“뭐지?”

이미 녀석을 회유하는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천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날 살려 냈다고 해서 주인 행세하려 하지 마라. 난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물론 네 말을 어느 정도 따라주지. 평상시에는 말이야.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고 나면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거다! 그렇게 알아라. 그걸 허락해준다면 네 말에 따라주지.]

“…….”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드라고라의 비명이 안겨 주는 고통에도 끝까지 참아낸 녀석이 아니던가.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녀석의 무력이니까. 그리고 그 악마의 활만 지닌다면… 카이젠을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녀석이야.’

“네 뜻대로 해주지. 하지만 평상시에는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럼 할 말 다 마쳤으면 저 녀석을 활로 만들어봐.”

[그 정도야 쉽지. 힐프리거! 내게 힘을 빌려 다오!]

스파아앗.

랄프 로렌의 한마디에 흉측한 얼굴의 악마 힐프리거가 희뿌연 빛무리를 뿜어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점점 몸이 변형되더니, 이내 천휘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모습으로 변모했다.

“악마의 활!”

[후후, 간만에 쥐어보니 느낌이 새롭군.]

[악마의 활 힐프리거]

아귀라고 불리는 악마 힐프리거의 힘이 내재된 전설의 활. 이를 다룰 수 있는 이는 마신의 힘과 주신의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신과 주신의 힘이 충돌해 광기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등급:레전드 내구력:15,000/15,000

분류:활

제한:민첩 1,000 이상

옵션:물리 공격력+450

옵션:관통 시 추가 데미지+300

옵션:반경 1㎞의 시야 확보

옵션:일 1회 데몬 이터 사용 가능

“레전드!”

아직까지 그 누구도 얻지 못한 레전드급의 활이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무기다.

게다가 그것을 들고 있는 이가 누군가. 최강의 음양마령강시로 거듭난 랄프 로렌이 아닌가.

‘남부 원정이라……. 내가 짓밟아주지.’

그랜저가 엄청난 자금을 동원해 길드의 사활을 건 프로젝트, 남부 원정.

심연의 밀림에서 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이룬 천휘는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그랜저를 산산이 무너트릴 움직임을…….

- 5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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