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펜릴의 굴욕
[주인님.]
“…녀석들을 뒤쫓는다.”
늑대인간들의 등장으로 이미 몇 개의 땅굴 입구를 체크해둔 상태다. 하지만 그중에서 어떤 것이 늑대인간 소굴의 중심으로 향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레오나르도.”
[충.]
어느새 닌자거북들이 아이템을 모두 수거해서 돌아왔다.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 초원 지대에 있는 모든 땅굴의 입구들을 조사한다. 단, 우리가 들어서는 땅굴의 입구를 제외하고.”
[명 받들겠습니다.]
천휘의 명령에 파란색 띠를 머리에 두른 레오나르도를 비롯해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 그리고 라파엘로가 초원 지대로 모습을 감췄다.
“로즈란, 넌 이곳에 남아서 녀석들의 퇴로를 차단해라. 우리가 안에서 날뛰면 도망가는 녀석들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주인님.]
로즈란이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할지라도 비좁은 공간에서는 제 실력을 보이기 힘들다. 때문에 로즈란으로 하여금 늑대인간 수뇌부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내린 것이다.
“카이젠, 우리는 금발의 다크 엘프 녀석이 끌려간 입구로 쳐들어간다.”
[알겠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젠 늑대인간들을 모조리 몰살시키고 다크 엘프들을 구출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금발의 다크 엘프가 땅굴로 끌려가고 난 뒤, 초원 지대는 다시 고요함으로 물들어갔다. 더불어 더 이상 적이 쳐들어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주변을 감시해야 할 늑대인간들마저 모조리 사라졌다.
때문에 천휘와 카이젠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금발의 다크 엘프가 끌려간 땅굴의 입구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컹컹.”
땅굴 입구로 들어서자 땅굴 안에서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늑대가 원래 저렇게 우나? 보통은 아우 하고 울지?”
[늑대인간이 워낙 베일에 싸인 존재들이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로는…….]
“아무튼 빌어먹을 게임이야. 울음소리고 뭐고 현실과 동떨어진 게 왜 이리 많아?”
천휘는 괜히 늑대인간의 울음소리에 대해 투덜거리며 땅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컹컹, 인간 냄새가 난다.”
“컹컹, 인간이다!”
“쳇, 역시 늑대인간인가? 냄새 하나는 잘 맡네. 하앗!”
땅굴 안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늑대인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녀석들의 예민한 후각에 천휘의 살 내음이 포착된 듯했다.
“파멸의 대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인간 둘의 전면에 천휘는 스킬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움직이지 못하는 동상으로 변해버린 두 늑대인간.
천휘는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들을 간단하게 주먹 몇 방으로 요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컹컹, 인간…….”
퍼억!
“알았으니까 그놈의 인간 소리 좀 그만 해라.”
퍼버버벅!
“커어엉, 인간… 강하다.”
한 박자 빠르게 들어가는 천휘의 주먹은 어둠의 진실로 인해 능력치가 저하된 늑대인간들이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쾌속했다. 게다가 공격력까지 막강해서 단순 평타임에도 늑대인간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아직 졸개들이라 그런지 죄다 약한 녀석들뿐이잖아? 카이젠, 이제부터 네가 나서라. 난 좀 더 강한 녀석들이 나올 때까지 휴식 좀 취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천휘의 주먹에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너질 정도로 늑대인간은 약하지 않았다. 되레 예전의 천휘였다면 한 번에 셋 이상을 상대하지 못했을 정도로 녀석들은 강했다.
그러나 현재의 천휘는 예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지금의 천휘에게는 파멸의 권능이라는 아르니안 대륙 최초의 신급 스킬이 있었고 전신은 온통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으로 도배되었다. 더불어 상대의 능력치를 대폭 하락시키는 어둠의 진실마저 있었으니, 늑대인간들이 오크처럼 손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신이 난 건 카이젠이었다.
지저 세계에서 벗어난 뒤로 피를 거의 못한 그로서는, 늑대인간들을 처치하며 온몸에 뒤집어쓰는 검붉은 피가 그토록 즐거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피익.
털썩.
“녀석이 마지막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땅굴에 들어선 지 3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쉬지 않고 몰려드는 늑대인간들 탓에 거의 전진을 하지 못해 아직도 햇빛이 비추는 입구 근처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 이제부터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제아무리 녀석들이라 해도 또다시 공격을 감행해 오지는…….”
“컹컹컹컹.”
“…않을 줄 알았는데.”
[…떼로 몰려듭니다.]
“빌어먹을. 이대로 계속 이 자리에서 머물 수는 없어! 강행 돌파한다!”
지시를 받은 카이젠은 천휘와 나란히 서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좁은 땅굴의 통로였지만, 세 사람이 지나도 충분한 거리였기에 두 사람이 함께 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파멸의 축제!”
제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일단 통로를 막고 있는 늑대인간을 해치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때문에 천휘는 달리는 와중에 유일한 범위 스킬을 시전하며 늑대인간들을 옆으로 치워냈다.
[라그나 썬더(Ragna Thunder)!]
카이젠의 레이피어 끝에서 전격의 다발이 뿜어져 나갔다. 전격의 다발은 마치 그물을 형성하듯 뒤로 쭉쭉 뻗어나갔고 거기에 닿은 늑대인간들은 마비를 일으키며 픽픽 쓰러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스킬을 계속해서 전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젠장! 대체 얼마나 더 남은 거야?”
그러나 늑대인간은 오크에 견줄 만큼 뛰어난 생식력을 지녔는지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특히나 통로의 끝이 보이질 않자 천휘는 더욱 초조해졌다.
두 사람이 땅굴에 들어선 지도 벌써 5시간이 훌쩍 넘어섰건만 통로는 아직까지도 계속 지하로 연결되고 있는 중이었다.
“더 이상은 무리야. 카이젠! 전진은 그만두고 녀석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기만 해!”
[알겠습니다.]
카이젠 녀석은 강시답게 기력이나 포만감이 떨어질 리가 없지만, 천휘는 그렇지가 못했다.
땅굴에 들어선 지 한참이나 자닌 탓에 이미 기력이나 포만감이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인 것이다.
“우적우적. 젠장, 이놈의 통로는 갈림길도 안 보이네. 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야?”
아무래도 늑대인간들을 얕본 모양이었다. 내심 몇 시간이면 충분히 늑대인간의 우두머리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건만, 상황은 그리 여의치가 않았다.
“카이젠, 우리 지금 점점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것 확실하지?”
[그렇습니다. 이 통론 아주 넓게 회전을 하면서 점점 아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흐음, 역시.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긴 한데 이거 원, 이렇게 깊어서야. 게다가 초글링 떼처럼 덤벼드는 늑대인간들이라니.”
모든 통로가 이토록 깊게 땅속까지 이어질 리가 없었다. 이 통로가 땅굴 속 가장 중심이 되는 통로이기에 이렇듯 아래까지 이어지는 것이라 봐야 했다.
[주인님, 저 아래에 갈림길이 있는 듯합니다.]
“뭐? 우적우적. 갈림길?”
카이젠의 말에 천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전방을 내다봤다. 과연 그곳에는 좌우에서 늑대인간이 나타나 갈림길이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우적우적. 그런데 갈림길이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어차피 어느 쪽으로 그 금발의 다크 엘프가 끌려갔는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
[주인님, 제게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만.]
“오, 그래? 무슨 방법인데?”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더 이상 금발의 다크 엘프를 쫓을 수 없게 된 상황이었기에 내심 당황해하던 천휘는,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햇빛을 만나기라도 한 듯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늑대인간 녀석들 중 하나를 살기로 제압한다면 금발의 다크 엘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해줄래?”
[아, 주인님께 말씀 안 드렸습니까? 과거 제국의 황제였던 제겐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을 비롯한 유사 인종으로 하여금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있었기에 전 생각보다 오래 황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요. 무려 12년이나!]
삐이이익.
[끄아아악!]
카이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휘는 곧바로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꺼내 힘껏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에 카이젠은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내질렀다.
“감히 그렇게 유용한 능력이 있었으면서 이제야 알려 줘? 이건 분명히 날 농락하려는 속셈인 거야. 그렇지?”
[그- 그것이 아니옵… 끄아아악!]
“이런 빌어먹을 종자! 역시 네놈에겐 잘해줄 필요가 없었어! 잘해주면 기어오르니, 나로서는 이렇듯 지르밟을 수밖에! 어디 맛 좀 봐라!”
삐이익! 삐이익!
[으아악!]
뇌리를 관통하는 끔찍한 고통에 결국 카이젠은 혼절을 하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기절한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고통을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천휘는 마음이 독하지 못했다.
퍼억.
삐익.
“어라? 모르고 피리를 불어버렸네?”
…다만, 늑대인간을 해치우는 척하며 입에 물고 있는 피리를 간헐적으로 불고 있을 따름이었다.
[금발의 다크 엘프가 끌려간 곳이 어디냐?]
어느새 깨어난 카이젠은 머릿속을 울리는 고통을 감내하며 늑대인간을 붙잡고 취조하기 시작했다.
“컹컹, 나는… 모른다.”
하지만 늑대인간 역시 긍지 높은 부족 중 하나. 특히 전투에 특성화된 이들이라 억압에 의한 취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 눈을 봐라.]
찌지짓.
반항하는 늑대인간의 눈에 카이젠의 선홍빛 눈동자가 투영되었다.
“…….”
카이젠의 선홍빛 눈동자에는 천휘조차도 움찔할 만큼 강렬한 살기가 내재되어 있었다. 괜스레 그의 눈빛을 쳐다봤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천휘가 눈까지 돌릴 정도였다.
[어디냐. 어디로 끌려갔지?]
“펜… 릴의 사… 당.”
[거길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지?]
“왼… 쪽…….”
피슛.
녀석에게서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카이젠은 이내 녀석의 심장에 레이피어를 박아 넣었다.
“뭐냐?”
[무슨… 말씀이신지.]
“누구 맘대로 그 자식을 죽이래! 이 자식 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더- 더 이상 무- 물어볼 것이…….]
“그러니까 누가 너보고 그런 판단을 하라고 했냐고! 그 펜릴의 사당이라는 곳에 누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늑대인간들이 있는지 물어봤어야 할 것 아냐!”
[제- 제발 자- 자비를!]
삐이익.
[크아악!]
카이젠의 애걸복걸에도 천휘는 지체 없이 피리를 불었다. 아무래도 이참에 카이젠의 버릇을 확실하게 고쳐 놓을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녀석도 참 불쌍한 인생이었다.
* * *
“이제 출발한다.”
[충!]
천휘와 카이젠은 갈림길에서 밤을 보냈다.
이미 몇 시간에 걸친 결투를 치른 터라 간단한 휴식만으로는 도저히 기력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탓이었다.
다행히 더 이상 늑대인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천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간헐적인 피리 소리에 밤새 고통을 받은 카이젠은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강시임에도 온몸에 뻐근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펜릴이라면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그 거대 늑대를 의미하겠지. 그렇다면 역시 늑대인간들이 모시는 신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 터. 설마… 그 녀석이 이번 퀘스트의 최종 보스는 아니겠지?’
A- 등급의 퀘스트치고는 제법 수월한 진행에 천휘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물론 범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늑대인간들도 제법 대단한 상대이긴 했지만, A- 등급을 받을 정도의 퀘스트는 아니라고 여겨진 탓이었다.
하지만 늑대인간들이 신으로 모시리라 예상되는 펜릴이 이 퀘스트의 최종 보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퀘스트는 충분히 A- 등급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카이젠, 혹시 펜릴이라는 신 아냐?”
[저도 잘……. 이 아르니안 대륙에는 워낙에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탓에.]
“흐음, 로즈란이라면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밖에 있는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어쩌면 그녀도 모를 수 있었다. 펜릴은 『오벨리스크』 홈페이지인 오시리스에서도 아무런 언급이 나와 있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비밀에 감춰진 신이었으니.
‘이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싸워야 할 상대라면 이렇게 고민해봐야 소용없지. 난 이제 예전의 천휘가 아냐! 거치적거리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간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가수 이 여사의 노래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이건 어떠니 또 저건 어떠니 고민 고민하지 마.
괜히 현실로 드러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늑대인간의 말에 따라 왼쪽 통로로 들어선 지 또다시 반나절이 흘렀다. 벌써 현실의 시간은 자정을 넘어 2시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번 퀘스트는 날짜 기한이 무척이나 짧은 탓에 천휘로서는 내일을 위해 게임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도 기척을 읽을 수가 없어?”
[아무래도 이 땅굴에는 신묘한 힘이 깃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상대의 기척도 척척 읽어내는 카이젠이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면, 그의 말대로 이 땅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천휘는 그것이 늑대인간이 모시는 신, 펜릴의 힘일 것이라 추측했다.
[불빛입니다.]
“이 주변에도 불빛은 있거든?”
카이젠의 보고에 천휘가 까칠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 주변의 은은한 빛과 달리 흡사 윤락가를 연상시키는 붉은빛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붉은빛이라…….”
이어지는 카이젠의 설명에 천휘는 전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그에게 카이젠이 발견한 빛이 보일 리가 없었다. 천휘 자신이 강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육체적인 면은 카이젠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차피 우리들의 존재는 녀석들이 이미 알고 있겠지. 괜히 시간 끌어봐야 우리 손해야. 정면으로 승부한다.”
[충!]
천휘의 명령에 카이젠이 그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천휘가 걷는 속도에 맞춰 그를 보조했다.
그렇게 1분 정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자 천휘에게도 붉은빛이 희미하게나마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보다 몇 배는 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만큼 둘 간의 격차가 좁혀져 고작 1분 가지고도 이렇듯 천휘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다시 10분이 지나자 이제는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린 박자로 울리는 북은 갑자기 빨라지기도, 혹은 갑자기 느려지기도 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조금씩 흥분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전속력으로 향한다!”
북은 대개 어떤 예식을 치르거나 그밖에 무수한 행사를 치를 때 사용되는 악기다. 보통 북을 사용하는 행사라면 기쁜 일일 가능성이 큰데, 지금 귓가에 들려오는 북소리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울 정도로 뭔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휘익, 휘익.
둥둥둥둥.
붉은빛에 가까워질수록 북소리도 점점 고조되었다.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가니 이제는 늑대들의 울음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카이젠! 이 통로의 끝자락에서 안쪽으로 큰 거 한 방 날려 줘라.”
[알겠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도 없었고 더 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 통로의 끝에는 늑대인간들이 모여 모종의 예식을 치를 테고, 금발의 다크 엘프를 비롯한 다크 엘프들은 그 예식의 제물로 쓰일 것이 분명했다.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지금이다!”
[라그나 블라스트!]
카이젠의 레이피어 끝으로 검은색의 오망성이 그려졌다. 그리고는 전방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어둠의 프라즈마가 뻗어나갔다.
콰아아앙!
“커어엉.”
“커엉.”
“좋았어! 카이젠! 너는 다크 엘프들을 보호해라!”
통로의 끝자락에는 이곳이 과연 땅속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동공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동공의 중심에는 족히 아파트 4~5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다크 엘프들은 그 구조물 앞에서 늑대인간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컹컹, 감히 인간 따위가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다니! 빨간 망토들은 당장 녀석들을 처단하라!”
거대한 구조물의 맨 위에 서 있던 늑대인간이 명령을 내리자, 구조물의 중턱쯤에 대기하고 있던 늑대인간들이 천휘와 카이젠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 등에 빨간색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어울리지 않는지 웃음이 다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네들이 무슨 빨강 망토 소녀냐!’
얼토당토않은 늑대인간들의 모습에 천휘는 코웃음을 치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파멸의 축제!”
“커엉.”
“커엉.”
파멸을 부르는 주먹의 그림자들이 허공에 만개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피할 길이 없는 빨간 망토 늑대인간들은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 구조물에 처박혔다.
휘익, 탁.
다다다닥.
빨간 망토 늑대인간들을 한 번에 제압한 천휘는 곧바로 구조물에 마련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저 잉카 문명의 피라미드를 보는 듯하네.’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활극 모험물 영화에 종종 등장했던 바로, 그 피라미드의 형태를 띤 늑대인간들의 구조물. 천휘의 느낌상 이것은 펜릴을 모시는 일종의 제단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컹컹! 막아! 막아! 이제 조금만 버티면 된다!”
애꾸눈 늑대인간의 명령에 피라미드 위쪽에서 늑대인간들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이제껏 땅굴 안에서 잡아 족친 늑대인간의 수만 해도 수백은 되건만 아직도 늑대인간들은 꼭 그만큼의 숫자가 더 남아 있었다.
“이런 개초글링들! 다 뒤졌어!”
애꾸눈의 늑대인간이 무척이나 서두르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뭔가 사단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날 듯했다.
“파멸의 대지! 파멸의 축제!”
파멸의 미학에 내재된 스킬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마나를 잡아먹는 것들이었다. 최소 3,000에서 최대 1만. 40만에 달하는 마나통을 지닌 천휘라 해도 쉬이 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마나 소모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긴박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든 천휘의 발목을 잡으려고 달려드는 늑대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번 시간을 통해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알 수 없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애꾸눈의 늑대인간.
천휘는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늑대인간들을 밀쳐내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쿠와아아앙!
“컹컹컹컹,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신 펜릴께서 우리의 염원에 귀를 기울이셨다!”
“아우우우.”
천휘가 그렇게 늑대인간들의 육탄 공세에 시간이 끌리는 사이, 결국 사단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거대한 동공을 격하게 떨게 만드는 굉음.
그 굉음에 호응하듯 늑대인간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한데 입을 맞추고 울음을 터트렸다.
“크윽!”
[띠링! 늑대인간의 울음으로 인해 전체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늑대인간들은 천휘보다 레벨도 낮을뿐더러 능력치도 떨어진다. 때문에 녀석들이 내뱉는 울음소리는 이제껏 천휘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입을 한데 모아 울음소리를 터트리자 천휘로서도 버티지 못하고 능력치 하락을 경험해야만 했다.
“제길!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피라미드 위쪽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천휘로서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단시간 안에 위쪽을 점령하고 있는 늑대인간들을 해치고 위로 올라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별수 없지. 아공간 오픈. 변강쇠 소환!”
스파앗.
음메에에.
“강쇠야, 날 저 위쪽으로 던져!”
음메?
천휘는 변강쇠의 무지막지한 근력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 피라미드 위쪽으로 단숨에 가로지를 심산이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변강쇠로서는 주인의 이상한 명령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컹컹, 우리들의 신께서 강림하신다! 인간 녀석과 소대가리 녀석을 제물로 바쳐라!”
“아우우우.”
애꾸눈 늑대인간의 명령에 늑대인간들의 눈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입에서 침까지 게걸스럽게 흘려 대는 것이 영락없는 미친개의 형상이었다.
“강쇠! 어서 날 던지지 못해!”
변화된 늑대인간들의 모습에 천휘는 다급한 표정으로 변강쇠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변강쇠는 이내 천휘를 어깨에 둘러메고 투포환의 자세를 취했다.
“강쇠, 나를 위로 던지고 넌 이곳에서 목숨이 다할 때가지 녀석들을 처치하는 거다! 무슨 소리인지 알지?”
음메에에!
천휘의 명령에 변강쇠가 용맹한 울음을 터트렸다. 주인의 명령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였다.
물론 녀석은 강시인 탓에 천휘의 명령 없이는 제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던져!”
음메에에!
휘리릭.
천휘의 신형이 늑대인간들의 머리 위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그 진풍경에 늑대인간들은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천휘의 신형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음메에에!
“커엉.”
그렇다고 늑대인간들이 우르르 몰려가 천휘를 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새 변강쇠가 거대한 배틀액스를 꺼내들고 늑대인간 무리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천휘는 생각보다 손쉽게 피라미드의 정상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휘리릭, 탁.
강쇠의 도움으로 천휘의 신형이 단박에 피라미드의 정상에 도착했다. 늑대인간들이 저 아래에 개떼처럼 모여 있지만, 변강쇠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을 듯했다.
휘익.
스차앗.
“크윽.”
하지만 피라미드 정상에는 늑대인간의 우두머리라 추정되는 애꾸눈 늑대인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천휘가 피라미드 정상에 발을 내딛자마자 날카로운 발톱으로 천휘의 가슴팍을 냅다 후려쳤다.
주르륵.
어찌나 깊게 파였는지 천휘의 가슴팍은 금세 핏빛으로 물들었다.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발록의 심장과 마룡 오그하트의 흉갑이 아니었다면 즉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컹컹, 인간치고는 몸이 단단하구나. 아니면, 그 안에 덧대어 입은 갑옷 때문인가?”
자신의 선공이 제대로 먹혀들자, 천휘의 실력이 생각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한 애꾸눈 늑대인간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제법 따끔하긴 하네. 그래봐야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말이야.”
“컹컹, 인간들은 종종 자신들이 강한 줄 알고 있지. 실상은 이 땅에서 가장 허약한 존재들이면서 말이야. 네놈도 딱 그 짝이로구나.”
애꾸눈 늑대인간의 도발에도 천휘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뒤쪽을 바라봤다.
“제기랄!”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피라미드 정상에 마련된 작은 제단 위에 금발의 다크 엘프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가 사용했던 거대한 장궁이 세워져 있었다.
“컹컹, 저 잡종 자식을 아나? 흐음, 의외로군. 인간이 저 잡종 자식을 알고 있다니 말이야. 하지만 녀석은 이미 생명이 끊어졌다. 위대하신 펜릴께 바치는 제물로 재탄생했다는 소리다! 아우우우!”
애꾸눈 늑대인간의 말에도 천휘는 그다지 불편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살짝 기분이 나쁜 듯 이마가 조금 찡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누가 죽이든 상관은 없는데… 젠장! 감히 내 수하가 될 녀석을 죽여? 초글링, 너 오늘 죽어봐라! 타앗!”
어차피 죽일 녀석이었으니, 조금 빨리 죽었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 자신의 주축 강시가 될 녀석이 고작 늑대인간 따위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르릉.
“응?”
천휘가 막 애꾸눈 늑대인간에게 달려드려 할 때, 갑자기 동공 안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안은 깊은 땅속인 탓에 천둥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지만, 분명히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선명한 천둥소리였다.
[피하십시오!]
피라미드 아래에서 들려오는 카이젠의 외침에 천휘는 본능적으로 계단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늑대인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콰아아앙!
피라미드의 정상에 난데없이 검은빛의 벼락이 떨어졌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이미 천둥도 친 마당에 벼락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끄아아악, 펜릴이시여!”
미처 벼락을 피하지 못한 애꾸눈의 늑대인간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소멸했다. 어찌 보면 참혹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지만, 워낙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 것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강쇠야! 날 받아!”
음메에에!
워낙 다급하게 몸을 날린 탓에 자칫하다가는 늑대인간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천휘는 변강쇠에게 명령해 자신을 떠받치도록 했다.
탁.
“잘했어! 강쇠야, 이대로 아래로 돌진이다!”
음메에에!
변강쇠는 배틀액스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계단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늑대인간들은 조금이라도 몸을 뻗어 변강쇠를 저지하고자 했지만, 5미터가 훌쩍 넘는 거구를 오로지 근력만으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리석은 피조물들이여.]
흠칫.
피라미드 위쪽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
그와 더불어 심장을 옭죄어 오는 저음의 목소리.
천휘는 가슴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피라미드 위쪽을 쳐다봤다.
화르르륵.
그곳에는 청염의 불길로 온몸을 감싼 거대한 마수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청염의 불길 속에서 뿜어지는 녹색의 안광에 천휘의 몸은 절로 움츠러들었다.
[띠링! 퀘스트 ‘다크 엘프의 수난’의 서브 퀘스트 ‘펜릴의 마수’가 발동되었습니다.]
과거 마신의 애완견이었던 펜릴.
녀석은 마신의 발목을 물어뜯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스스로 신의 반열에 들어섰다. 하지만 마신은 그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녀석을 마신의 품으로 되돌려 보내라.
난이도:A+
기한:없음
보상:알 수 없음
“빌어먹을! 세상에 갑자기 A+ 등급의 퀘스트라니! 그것도 서브 퀘스트! 날 낚으려고 작정했나!”
어쩐지 생각보다 퀘스트가 쉽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정도 위기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스스로 신의 반열에 든 마신의 애완견을 상대하라니. 이건 상급 마수 몇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라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견신으로서 명하노라.]
“견신? 개병신이라 이거냐!”
펜릴의 말에 천휘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무지몽매함은 그 어떠한 것보다 더 큰 죄악이니. 나를 알아보지 못한 죄, 죽음으로 갚으리라.]
화르륵.
펜릴의 목소리가 끊어지기 무섭게 그의 입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뿜어졌다. 마치 밤하늘을 수놓는 유성처럼 거대한 불덩어리는 청염의 불길을 뿜어내며 변강쇠와 천휘가 서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빌어먹을!”
휘익.
“강쇠, 역소환!”
강쇠의 어깨를 박차고 앞으로 뻗어나가면서 천휘는 변강쇠를 역소환시켰다. 차마 녀석을 이런 곳에서 희생할 만큼 천휘는 모질지가 못했다.
앞으로 더 부려먹고 우려먹어야 할 녀석이었다.
[주인님!]
하지만 불덩어리는 생각보다 크고 거대했다. 게다가 속도까지 빨라 그 상태로는 천휘마저도 불덩어리에 의한 죽음을 면치 못할 듯했다.
“젠장! 림다일!”
천휘는 곧바로 자신의 이동속도를 높이기 위해 림다일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활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앞으로 뻗어나가는 천휘의 신형. 하지만 불덩어리도 타이밍 좋게 뒤쪽에서 폭발하며 거대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그 파편 중 하나가 폭발의 여파로 인해 빛살보다 빠르게 천휘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치 표적을 향해 나아가는 유도 미사일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가엘론!”
하지만 천휘에게는 최강의 방어 스킬이 존재했다. 천휘의 오른팔에 매어진 ‘가엘론의 수호자’로 인해 쓸 수 있게 된 스킬 ‘가엘론’이었다.
시전자의 능력이 어떤지에 따라 최고의 방어 스킬이 될 수도, 최악의 방어 스킬이 될 수도 있는 가엘론.
불덩어리의 파편이 천휘의 뒤통수에 부딪치려는 찰나, 짙푸른 녹색의 막이 천휘의 뒤통수를 보호했다.
까앙.
가엘론에 의해 생성된 방어막이 등 뒤의 파편을 막아주자, 천휘는 림다일의 효능을 빌려 불덩어리의 폭발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변강쇠였다.
녀석이 제아무리 피통이 넘쳐난다고는 해도 그 정도의 폭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더불어 변강쇠와 천휘를 뒤쫓던 늑대인간들마저도 폭발에 휩싸이며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그러니까 당장 다크 엘프들을 데리고 이 땅굴을 빠져나가! 어서!”
[하지만!]
“죽고 싶어! 난 죽어도 상관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었어! 하지만 저들은 반드시 살려 내야 해!”
‘여기서 깔아뭉개지면 시체도 구할 수 없다고!’
어차피 다크 엘프들은 모두 죽어 자신의 강시들이 될 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땅굴이 펜릴과 자신의 대결로 인해 무너지게 되면 온전한 시체를 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녀석들은 죽으나 사나 자신의 강시들이 되어야 할 몸.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녀석들의 시체를 거두지 못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자, 모두 통로 안으로!]
천휘의 명령에 따라 카이젠이 다크 엘프들을 동공 밖으로 안내했다. 어림잡아도 2백 정도는 되어 보이는 이들. 게다가 부상을 입고 먹을 것을 섭취하지 못해 피골이 상접해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다크 엘프의 전사들이었다.
가볍고도 유연한 몸놀림.
게다가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그들은 천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다크 엘프의 전사들이 틀림없었다.
“반드시 땅굴을 빠져나가야 한다!”
[무사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지껄여. 아무튼 가봐! 여긴 내가 맡는다!”
[충!]
카이젠과 다크 엘프들이 떠나자, 거대한 동공 안엔 이제 천휘와 펜릴만이 남아 있었다. 웬일인지 녀석은 다크 엘프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 주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인간, 어떻게 마신 그 미친 여자의 권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냐. 어떻게!]
마신의 애완견이라더니, 녀석은 과연 천휘가 파멸의 권능을 부여받은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건 네 따위 잡종 변견 따위가 알 바가 아니질 않나? 그나저나 고작해야 마신의 애완견인 주제에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내게 이래도 되는 거야! 확 불을 지필까? 말까?”
펜릴의 물음에도 천휘는 녀석을 도발했다. 마신을 미친 여자라 지칭하는 것으로 봐서 녀석은 마신에게 이래저래 쌓인 것이 많은 듯했다. 그렇다면 그만큼 녀석을 흥분시키는 것도 쉽다는 말.
[나는 그 계집의 애완견이 아니다! 절대!]
자신의 도발에 살짝 미끼를 문 듯 펜릴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천휘는 느낄 수가 있었다.
“애완견 주제에 지금 반항하는 거냐! 이러니까 애완견 주인들이 욕을 먹는 거야. 애완견 간수 하나 못해서 이렇게 피해를 주나? 말 안 듣는 애완견은 두들겨 패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네놈의 유들유들한 아가리, 닥치게 만들어주지!]
화르륵.
펜릴의 동체를 감싸고 있던 청염의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마치 녀석의 분노에 이끌기라도 하듯 더욱 거칠게 타오르는 듯했다.
크아아앙!
“어라?”
늑대인간의 울음소리와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포효소리가 동공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천휘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휘리릭.
천휘가 그 점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을 때, 펜릴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쏜살같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변강쇠보다 더욱 거대한 체구의 펜릴이었지만, 움직임만큼은 늑대인간보다 훨씬 날렵했다.
“림다일!”
그런 펜릴의 움직임에 맞추고자 천휘 역시 림다일을 전개했다. 무려 이동속도를 300퍼센트나 향상시켜 주는 림다일의 효능에 천휘의 움직임은 펜릴의 그것과 견줄 만큼 빨라졌다.
결국 1인 1수는 거대한 동공을 휘젓고 다니며 때 아닌 추격전을 펼쳤다. 천휘가 기회를 엿보며 펜릴의 공격을 피해 다녔고 펜릴은 그런 천휘를 잡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젠장! 벌써 마나가!’
한창 잘 피해 다니던 천휘가 벌써 절반이나 깎인 마나통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무려 초당 50의 마나를 잡아먹는 림다일.
1분이면 3,000이고 10분이면 3만에 이른다. 한마디로, 언제까지고 림다일을 전개해 펜릴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휘익, 끼익.
‘어차피 녀석을 해치우지 않고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어!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천휘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자, 어느새 펜릴이 거대한 이를 드러내며 녹색의 안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를 능멸한 네놈의 죄,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으나, 기왕이면 가장 처참하게 죽여주도록 하겠다.]
“아나, 거 더럽게 말 많네. 일개 애완견 주제에!”
[이노옴!]
크아아앙!
눈앞에서 들려오는 흉맹한 펜릴의 포효.
하지만 천휘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이 포효를 터트리는 것을 보고 선제공격을 가할 정도였다.
“파멸의 대지!”
콰앙!
[크허억!]
“에잉?”
그저 녀석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봉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천휘는 파멸의 대지를 전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녀석은 신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괴로워했다.
“파멸의 축제!”
퍼버벅.
[크허어억!]
녀석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이때다 싶어 천휘가 연달아 스킬을 전개했다.
녀석의 전신을 두들기는 파멸의 그림자.
펜릴은 큰 덩치가 무색하게 이전보다 더욱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고 심지어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어떻게 이방인 주제에, 파멸의 권능을…….]
“역시 똥개 때려잡는 덴 주먹만큼 좋은 게 없지! 도망치지 말고 썩 이리 오지 못해!”
[히익!]
천휘의 으름장에 펜릴은 기겁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며 펜릴이 도망치고 천휘가 녀석의 뒤를 쫓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녀석은 마신의 애완견에서 신으로 승격된 녀석이다. 그래봐야 마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겠지! 그에 반해 나는 마신의 권능 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이고 강력한 파멸의 권능을 부여받은, 일종의 대리자. 녀석은 나를 절대 이길 수 없다!’
펜릴이 왜 자신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지 천휘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마신의 최고 권능인 파멸의 권능.
그것은 마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하급 신 펜릴에게 있어 천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파멸의 대지!”
[끄허어억!]
림다일까지 써가며 녀석의 꼬리를 잡은 천휘.
그는 마치 보신탕집에서 개를 때려잡는 도살꾼처럼 흉흉한 안광을 뿜어가며 펜릴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깨개개갱.
아무도 남지 않는 거대한 동공에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개 울음소리.
천휘는 거기에 취해 주먹을 더욱 신명나게 휘두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