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다크 엘프의 마을
“알아봤어?”
[그렇습니다, 주인님. 주인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로즈란과 함께 일대를 돌아다니며 다크 엘프들의 거처를 확인했습니다.]
“좋아, 잘했어.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니까 바로 가자. 앞장서!”
[알겠습니다.]
지저 세계에서 돌아온 천휘는 곧바로 거점으로 마련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똥개로 전락해버린 마수 시벨리우스 강시가 떠나지 않고 그곳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동안의 전투에서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낸 천휘는 곧바로 카이젠과 로즈란으로 하여금 다크 엘프의 마을을 찾도록 명령했다. 심연의 밀림 어딘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아갈 그들의 힘이 필요한 탓이었다.
‘다크 엘프라면 엘프에 버금가는 궁술은 물론이고, 마신의 권능을 이어받아 흑마법에도 능통해. 그 정도라면 사상 최강의 원거리 공격 강시 군단이 탄생하는 거야.’
카이젠 사이클롭스들로 이루어진 돌쇠 군단도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바야흐로 폭풍의 행진곡 서막이 울릴 대혼란의 시기.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절대적인 힘이 천휘에게는 필요했다.
휘익, 휘익.
곧이어 천휘는 카이젠, 로즈란과 함께 다크 엘프의 마을을 찾았다.
최근 오베른은 지난 지저 세계에서의 쌓은 경험을 밑거름으로 수련을 쌓고 있어 따로 불러낼 수가 없었다. 소드엠페러의 경지에 한 번에 들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녀석 역시도 카이젠과 같은 소드엠페러의 경지에 들어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여기냐?”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런데 이상하다? 어째 다크 엘프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는데?”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뒤로 천휘는 그 누구보다 마기에 민감하게 변모했다. 게다가 그 자신이 품은 마기가 어찌나 강력한지 지저 세계의 상급 마수들조차 자신을 향해 눈을 내리깔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신의 기운을 부여받은 다크 엘프들의 기척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확실히 저 마을 안에 마나의 유동이 전혀 없는데요?]
“쳇! 뭐야! 일단 마을 안으로 가본다!”
불길한 예감에 천휘는 곧바로 마을로 빠르게 나아갔다. 다크 엘프의 마을은 심연의 밀림 남서쪽에 위치한 수림 지대 깊숙한 곳에 거처를 마련에 살아가고 있었기에 천휘는 나무 위를 다람쥐처럼 건너뛰며 나아가고 있었다.
[주인님! 저쪽에서 연기가!]
“빌어먹을! 누가 먼저 선수 친 거야!”
마을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치솟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불을 피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크 엘프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 자연을 거스르는 흑마법을 익히고 있다손 쳐도 그들은 여전히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불을 지폈을 리는 없었다. 즉, 저 연기는 타인에 의한, 타인의 방화에 의한 연기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천휘는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연기가 솟구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끔찍한 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찌할까요, 주인님.]
[제법 손속이 짙은 녀석들이네요.]
“…….”
다크 엘프의 마을은 규모가 꽤 컸다. 아마도 수백의 다크 엘프들이 부락을 이뤄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다크 엘프들이 단 한 개체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마치 천을 찢듯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카이젠, 너도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지?”
[그렇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독한 죽음의 기운만이…….]
“로즈란, 주변으로 옵저버 마법을 펼쳐라. 찾아내! 감히 이 천휘의 계획을 방해한 족속들이 어떻게 되는지 내 똑똑히 가르쳐 주지.”
[알겠어요, 주인님.]
천휘의 명령에 로즈란이 곧바로 하늘 위로 치솟았다.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허공에서 옵저버 마법을 시전하려는 심산이었다.
“카이젠, 너는 마을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행여나 단서가 나올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주인님.]
기운에 민감한 카이젠이라면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낼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천휘는 그에게 그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젠장, 진짜 후련하게도 죽여 놨네.”
천휘는 마을 안을 돌아다니며 혹여 성한 시체라도 있는지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강시로 제작할 만한 성한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후우, 이렇게 되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저들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천휘는 저들을 자신의 힘으로 몰살시킬 생각이었다.
엘프의 여러 부족이나 하이 엘프들과는 달리 다크 엘프는 몬스터들로 분류된 족속들.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죽여도 하등 상관이 없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그들이 지닌 본신 무력도 250레벨 그 이상으로 평가될 정도다. 수많은 학자와 모험가들이 그들에게 내린 등급은 A+급. 엄청난 궁술 실력은 물론이고 3서클에 달하는 흑마법, 그리고 인간에 버금가는 지식까지.
그 정도의 평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크 엘프들이 부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찾기 힘들어. 현재까지 알려진 부락도 거의 없는 실정이고. 젠장! 이렇게 되면 다크 엘프들이 있을 법한 카이젠 산맥을 샅샅이 뒤져야 하나?”
다크 엘프 강시들은 천휘의 복수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얻어야 할 주요 무력집단 중 하나였다. 원거리 공격에 있어 그들만큼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이들은 없었기에 이곳의 다크 엘프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어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주인님.]
“그래. 주변에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던?”
천휘가 그렇게 고심할 때 카이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치밀한 녀석들인 듯 이렇다 할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카이젠은 뒷말을 얼버무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잿빛의 털 한 가닥을 천휘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이리저리 생각해본 결과, 아무래도 늑대인간들의 털인 듯합니다.]
“늑대인간?”
늑대인간이라면 유사 인종 중 한 부류로, 평상시에는 인간의 형상을 띠다가 보름달이 뜨면 늑대의 형상으로 변모하는 족속들이었다.
[하늘의 달을 확인해보니 사나흘 전 보름달이 떴었습니다. 대충 시체들의 상태를 살펴보니 부식된 정도가 사나흘 정도는 되어 보였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며칠 전에 혈겁이 일어났다는 소리인가? 이 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대충 확인했냐?”
[너무 듬성듬성 털이 떨어져 있어서 거기까지는 미처…….]
한마디로, 카이젠으로서도 그들이 어느 쪽으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는 소리였다. 별수 없었다. 그는 전문적으로 추적에 대한 기술을 배운 이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천휘에게는 지저 세계에서 얻은 추적의 스페셜 리스트들이 있었다.
“아공간 오픈. 닌자거북 소환!”
파앗. 파앗. 파앗. 파앗.
천휘의 부름에 이내 허공에서 4명의 닌자들이 떨어져 내렸다. 천휘는 그들을 어린 시절 재밌게 시청했던 닌자거북이라 불렀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닌자거북들의 수장인 레오나르도는 다른 닌자거북들과 달리 특별히 천마강시로 제작했다.
다른 닌자거북들이 혈강시들인 데 비해 녀석이 천마강시로 제작된 이유는, 좀 더 이성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당장 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이 털들이 떨어진 곳을 확인해라. 기한은 한 시간이다.”
[충!]
피잇.
천휘의 명령에 닌자거북들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봤다면, 그들이 순간 이동이라도 한 줄 알 정도였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흩어져서 시체들을 살펴보고 흉수들이 진정으로 늑대인간인지 확인해보자.”
[알겠습니다, 주인님.]
천휘와 카이젠은 마을을 뒤지며 시체들의 사인을 확실하게 조사했다. 그리고는 어느새 시간이 지나 한 시간가량이 지나갔다.
“주변에 탐지되는 마나 반응은 없었고?”
[네. 반경 10킬로를 넘어 15킬로 밖까지 조사를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나오질 않았어요. 하지만 조금 특이했던 건…….]
“뭐가 있었어?”
로즈란의 말에 천휘가 살짝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그러니까 심연의 밀림 경계에 해당하는 작은 초원 지대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왔어요.]
“이상한 반응?”
[네. 분명히 초원 지대가 맞는데, 그곳의 풀들은 식물 특유의 마나를 띠지 않고 오히려 바위나 흙과 비슷한 마나를 띠고 있었어요. 즉, 생명의 기운이 거의 없었다는 말이에요.]
“흐음, 그래?”
나무나 풀 등의 식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나 몬스터에 비해 아주 미약한 생명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만, 돌이나 흙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기운을 내뿜었다.
그것은 개체의 특성이기에 절대 변할 수 없는 성질인 것이다.
그런데 그곳의 풀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성질을 띠고 있었다. 한마디로, 누군가에 의해 성질이 변화되었다는 소리다. 천휘는 뭔가 감을 잡았다는 듯 이제 닌자거북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왔네.”
50미터 앞 전방에서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죽음의 기운이 나타났다. 천휘의 감각을 속이고 이렇듯 가까운 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존재는 당연히 닌자거북 녀석들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주인님.]
“갔던 일은?”
[워낙 미세한 털이라 추적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만, 털들이 어느 방향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서쪽인가?”
[그것을 어떻게.]
“역시.”
로즈란의 보고와 레오나르도의 보고로 미루어볼 때, 늑대인간의 근거지는 그 작은 초원 지대에 있을 공산이 컸다. 아니, 분명히 그곳에 녀석들이 있을 것이다.
“남서쪽으로 향한다. 감히 이 천휘의 먹이를 가로챈 녀석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가르쳐 주지!”
[띠링! 퀘스트 ‘다크 엘프의 수난’이 발동되었습니다.]
심연의 밀림에서 거주하며 마신의 기운으로 숨을 쉬는 어둠의 존재들이 위기에 빠졌다. 그들은 현재 늑대인간들에게 붙잡혀 목숨이 위태롭다.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자로서 그들을 구출하라!
난이도:A-
기한:3일
보상:다크 엘프의 보물
“좋아! 늑대인간 녀석들을 모조리 개뼉다구로 만들고 다크 엘프들을 구해낸다! 가자! 아그들아!”
마치 조폭과도 같은 어투.
현직 교사라는 사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지만, 강시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욱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네!]
심연의 밀림은 웬만한 왕국의 영지보다 넓었다.
아르니안 대륙에 산재하는 각 왕국의 영지들 중 심연의 밀림보다 더욱 방대한 곳은 고작해야 서너 개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런 심연의 밀림인 만큼 벌써 몇 달 동안 심연의 밀림을 근거지로 삼는 천휘라 할지라도 가보지 못한 곳이 더욱 많았다.
특히 밀림의 남서쪽 부근은 워낙 강력한 마수들이 많은 탓에 천휘조차도 오기를 꺼려했었다.
콰앙!
“파멸의 대지.”
크앙!
“파멸의 안식!”
퍼어엉!
단 두 번의 스킬로 거대한 풍뎅이 형상의 마수가 목숨을 잃었다. 단단한 갑주로 로즈란의 마법에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던 녀석이건만 천휘가 발휘한 파멸의 권능에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손맛은 역시 주먹이 최고지!”
파멸의 권능을 손에 넣은 천휘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파멸의 대지는 제아무리 강력한 마수라 할지라도 움직임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효과를 지녔고 파멸의 축제는 한 번의 내지름에 수십 발의 주먹이 뻗어나가는 효과를 창출했다.
무엇보다 천휘가 마음에 드는 스킬은 바로 파멸의 안식이었다.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을 더한 값에 10배에 해당하는 공격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파멸의 안식. 레전드 아이템으로 도배한 천휘에게 파멸의 안식은 그야말로 최고의 스킬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주변의 마수들은 모두 정리한 듯합니다.]
“좋아. 닌자거북, 너희들은 가서 아이템들을 회수해와.”
[충!]
이곳까지 오면서 워낙 많은 수의 마수들이 일행을 덮친 탓에 아이템을 제대로 회수하지도 못했었다. 상급 마수들이 즐비한 지저 세계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수준이 떨어지는 하급과 중급의 마수들이었지만, 녀석들이 드롭하는 아이템들은 아르니안에서 비싼 값에 팔리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곳이 바로 늑대인간들이 서식하는 곳이군.”
천휘는 늑대인간들을 유사 인종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어디 쌍스럽게 시체를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가 있을까. 시체로 강시를 만드는 천휘의 입장에서 녀석들은 그저 굶주린 늑대에 불과했다.
[다시 한 번 옵저버 마법을 시전해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녀석들은 아마 이 주변에 무슨 장난을 걸어놨을 거야. 늑대들은 천성이 흉포하고 잔인하지만 의외로 영리한 면이 있거든. 게다가 다크 엘프의 마을을 박살낼 정도로 실력까지 갖춘 녀석들이야.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지.”
[하지만 여기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천휘의 말에 카이젠이 반박했다. 어느새 천휘의 말에 토를 달 정도로 녀석의 간은 커져 있었다. 그것은 물론 로즈란도 마찬가지.
“녀석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움직일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우리의 힘을 눈치 챈 녀석들이 도망칠 우려가 있으니까. 흐음, 무슨 수가 없을까?”
녀석들의 근거지인 초원 지대로 왔음에도 녀석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녀석들은 초원 지대 지하에 굴을 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녀석들 역시 개과 동물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때문에 무작정 쳐들어가면 녀석들은 굴 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 공산이 컸다. 그렇게 되면 늑대인간의 수뇌부를 잡기란 요원해진다. 녀석들이 파놓은 굴은 분명히 수십 갈래로 지하를 파헤치고 있을 테니까.
“젠장, 연기라도 피워서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하나.”
사냥꾼들은 굴속에 숨은 토끼나 너구리를 잡을 때 그와 같은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능이 낮은 동물들에게나 통하는 방법일 뿐이다. 명색이 녀석들은 유사 인종으로 분류되는 무리들. 그 정도에 굴복할 리가 없었다.
“누가 미끼가 되어 녀석들을 꿰어주기라도 한다면… 어라? 저 녀석은 뭐지?”
[다크 엘프 같습니다.]
[그러네요. 정말 다크 엘프가 맞는데요?]
카이젠과 로즈란의 말처럼 초원 지대에 웬 낯선 다크 엘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느 다크 엘프와는 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가죽으로 만든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등 뒤에는 자신의 키보다 더 거대한 검은색 장궁을 걸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건 어울리지 않는 금발의 머리카락이었다. 보통 다크 엘프들은 마신의 영향을 받아 검은색이나 암회색의 머리카락을 지니는 데 반해 눈앞의 다크 엘프는 특이하게도 금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들! 당장 나와!”
금발의 다크 엘프는 초원 지대에 들어서자마자 일대가 떠나가라 고함을 내질렀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제법 거리가 떨어진 천휘의 귀를 따갑게 할 정도였다.
“큭, 목청 하나는 예술이네.”
금발의 다크 엘프는 고함을 내지르고는 씩씩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늑대인간을 찾아온 모양이지?”
[그런 모양새입니다.]
“좋았어. 저 녀석을 미끼로 한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들 바보냐? 저 녀석을 미끼로 늑대인간들을 낚는다 이거야!”
천휘의 나지막한 말에 로즈란과 카이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금발의 다크 엘프를 쳐다봤다.
“자, 사상 최대의 낚시질… 시작해보실까?”
천휘의 그런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발의 다크 엘프는 계속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다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등 뒤에서 거대한 장궁을 꺼내들었다.
마치 투석기인 발리스타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크기.
그 장궁을 꺼내들자 금발 다크 엘프의 주변으로 검붉은 마나의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오지 않는다면… 깨부수는 수밖에! 타아앗!”
금발의 다크 엘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발리스타와도 견줄 정도의 거대한 장궁의 시위를 땅바닥으로 겨눴다.
“데몬 스피어!”
금발의 다크 엘프가 들고 있는 거대한 장궁에는 분명히 화살이 메겨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활시위에 검은 기류의 화살이 생성되고 있었다.
“헉! 아처마스터?”
아르니안 대륙에서 주류 직업 중 하나인 아처, 즉 궁수는 전사와 더불어 유저들이 가장 많이 택하는 직업 중 하나다.
전사를 택하는 유저들이 손맛에 취해 전사를 직업으로 삼는다면, 궁수를 택하는 유저들은 원거리에서 몬스터들을 유린하는 재미에 궁수를 직업으로 삼는다.
하지만 전사들에 비해 궁수 중에는 고수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지존 12인 중에도 궁수를 직업으로 가진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다.
궁수를 택한 대부분의 유저들은 일격필살을 지향한다. 개중에 멀티 샷이라는 스킬을 통해 사냥에 올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극소수다. 아니, 그런 유저들은 거의 없다. 멀티 샷 스킬이 워낙 데미지가 떨어지는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격필살을 지향하는 궁수 유저들이 레벨을 빨리 올릴 수 있느냐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움직이는 몬스터들의 급소를 겨냥해 일격필살을 노린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탓이었다.
때문에 궁수들은 대부분 파티 플레이를 선호하지만 그렇게 되면 궁수 스킬을 올릴 수가 없어 상위 직업으로 승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스킬 레벨을 채울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궁수는 이래저래 페널티가 많은 직업일 수밖에 없었다.
“화살을 메기지 않고 오로지 마나로 화살을 형성한다는 것은 저 다크 엘프가 아처마스터라는 소리! 그랜드 소드마스터보다 더 구경하기 힘들다는 아처마스터를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천휘가 그렇게 놀라고 있는 사이, 금발의 다크 엘프는 시위에 메겨진 검은 기류의 화살을 땅바닥으로 쏘아냈다.
콰아아앙!
초원 지대를 뒤흔드는 강렬한 폭음.
순식간에 초원 지대에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도저히 화살 한 발이 만들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위력이었다.
“이래도 나오지 않는다면 더 날뛰어주지!”
콰아아앙!
콰아아앙!
금발의 다크 엘프는 계속해서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활을 잡아당겼다. 그로 인해 초원 지대는 순식간에 만신창이로 변해갔다.
[물고기들이 나옵니다!]
“역시!”
그렇게 금발의 다크 엘프가 날뛰기 시작한 지 10분가량이 흐르자, 드디어 물고기들이 미끼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늑대인간 서너 마리가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들! 감히 이 랄프 로렌이 없는 틈을 타서 마을을 습격해!”
“컹컹, 이런 잡종 날라리 자식이 어디에 와서 행패야!”
“누가 잡종 날라리래!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
“컹컹, 그럼 하이 엘프랑 다크 엘프 사이에서 난 자식이 잡종이 아니면 뭔데! 잔말 말고 꺼져!”
모습을 드러낸 늑대인간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금발의 다크 엘프와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금발의 다크 엘프는 쉽사리 물러날 수는 없는지 곧바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콰앙!
“커엉!”
“깽깽!”
“이 개새끼들! 오늘 뒈져 봐라!”
단 한 발의 화살로 늑대인간의 심장을 꿰뚫어버린 금발의 다크 엘프는 곧바로 연달아 활시위를 잡아당기며 늑대인간을 공격했다.
하지만 처음 당한 늑대인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늑대인간들은 화살에 쉽게 당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늑대인간들도 금발의 다크 엘프가 쏘아내는 검은 기류의 화살이 무섭긴 한지 쉽사리 그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도울까요?]
로즈란의 물음에 천휘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나타난 늑대인간들은 아무리 좋게 봐줘봐야 졸개에 불과했다. 좀 더 거물급 인사를 끌어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조금만 더.’
천휘는 금발의 다크 엘프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본래 궁수들은 몸빵을 해줄 수 있는 전사들이 있을 때 빛을 발하는 존재. 거리를 재고 목표물을 겨냥해 머리나 심장을 꿰뚫어 일격필살을 노리는 것이 바로 궁수의 참된 공격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금발의 다크 엘프에게는 일격필살의 수를 쓸 만한 틈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시위에 화살을 메기는 시간이 늦춰줬다가는 엄청난 빠르기를 지닌 늑대인간들에게 공격을 허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아악! 짜증나! 귀찮아! 아버지, 용서하세요! 아버지와의 약속을 저버려야겠어요!”
쏘고 피하고. 그 지리멸렬한 시간이 지속되고 있을 때 난데없이 금발의 다크 엘프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거대한 장궁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컹컹, 이때다! 녀석을 해치워!”
금발 다크 엘프의 공격이 사라지자 늑대인간들이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세 방향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늑대인간들. 여차하면 금발의 다크 엘프가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데몬 이터!”
늑대인간들이 막 금발의 다크 엘프를 덮치려는 순간, 거대한 장궁에서 갑자기 검은 기류가 주변으로 폭사했다.
벌떡!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휘가 은신해 있다는 것도 잊고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만큼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주인님!]
그런 천휘를 다급하게 로즈란이 끌어내리며 다시 은신시켰다.
“방금 봤어? 봤냐고! 갑자기 장궁에서 악마의 형상을 띤 검은 안개가 뿜어지더니, 늑대인간들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어. 저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조금 전의 그 모습은 흡사 어린 시절 봤던 공상 과학 다큐멘터리를 연상시켰다. 당시 그 다큐멘터리는 세계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는데, 최초로 만들어진 인공 블랙홀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시 멋모르고 그 다큐멘터리를 보던 영완은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만큼 충격적인 영상을 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던 블랙홀.
그것은 죽음의 무저갱을 연상시키듯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였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영완은 어린 마음에 블랙홀을 보면서 너무나도 두려웠었다. 심지어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생을 마감하는 꿈까지 꿨을 정도다.
그런 천휘였으니,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 놀라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거대한 장궁에서 뿜어진 어둠의 안개가 늑대인간을 빨아들인 것이다.
[실로 놀라운 무기입니다.]
“놀라운 정도가 아니야. 저 정도면 레전드,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신급의 무기일지도.”
[신급이라면…….]
“마신의 힘이 담긴 무기일 수도 있다.”
[흐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금발의 다크 엘프와 전투를 벌이던 늑대인간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이지만, 날렵한 움직임이나 빠른 상황 대처 능력으로 봤을 때 늑대인간들 중에서도 고위급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저 장궁은 녀석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동안 『오벨리스크』를 해오며 수많은 경험을 해온 천휘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허억, 허억.”
하지만 늑대인간들을 집어삼킨 장궁의 소유자인 금발의 다크 엘프 또한 정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고 호흡마저 이전과 달리 거칠어져 있었다.
‘저 녀석, 너무 탐나.’
거대한 장궁이 만약 천휘의 예상대로 신급의 무기라면,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소유자인 금발의 다크 엘프뿐일 가능성이 컸다. 레전드 등급 이상부터는 어마어마한 사용 제한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천휘로서는 저 장궁을 자신이 사용하려 하기보다는 금발의 다크 엘프를 강시로 만드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컹컹, 장로님들이 돌아가셨다!”
“복수다! 감히 잡종 날라리 자식 따위가 고귀한 우리 늑대인간을 죽이다니! 죽음으로써 그 죄를 씻게 만들어야 한다!”
“컹컹컹!”
“컹컹컹!”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늑대인간들이 죽임을 당하자, 땅속에서 늑대인간들이 떼거리로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에도 그 수가 기백을 넘는 것이 혼자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할 듯했다.
[이제 도울까요?]
“더 기다려야 한다. 가장 큰 대물이 잡힐 때까지 우린 움직이지 않는다.”
[미끼가 사라져도 괜찮겠어요? 혼자서는 힘들어 보이는데. 조금 전의 그 스킬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미끼 따위는 사라져도 괜찮다. 솔직히 난 저 녀석이 죽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괜히 내가 공을 들이지 않아도 녀석의 시체를 취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천휘가 노리는 것은 늑대인간들의 우두머리다.
그래야 늑대인간들에게 잡혀간 다크 엘프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구할 수가 있었다.
“이 개자식들! 난 동포들을 구하기 전엔 절대 지지 않아! 데몬 애로우!”
금발의 다크 엘프는 어느새 호흡을 진정시키고 땅바닥에 꽂힌 거대한 장궁을 손에 들고 빠르게 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검은 기류에 휩싸인 화살 수십 발이 늑대인간들을 향해 쏟아졌다.
“컹컹, 피하라!”
조금 전, 늑대인간 장로들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금발의 다크 엘프가 날리는 화살들은 크기가 작고 날카로웠다. 대신 그 수가 많아 다수의 늑대인간들을 상대하기에는 훨씬 적합해 보였다.
금발의 다크 엘프는 스킬을 시전하고는 곧바로 초원 지대를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궁수의 기본은 적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금발의 다크 엘프는 그것을 충실히 지키고자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데몬 애로우!”
“커엉.”
“커엉.”
그러다가도 늑대인간들이 접근한다 싶으면 곧바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그것도 달리는 속도가 전혀 죽지 않아 그 와중에도 거리는 더욱 벌어져만 갔다.
그렇게 초원 지대를 가로지르며 늑대인간들을 상대하자 어느새 늑대인간들의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는 고작해야 스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금발의 다크 엘프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초원 지대가 늑대인간들에게는 있어 제 집 안방이나 같다는 사실이었다.
“이 개자식들! 이제 끝이다! 데몬 스… 커헉!”
활시위를 잡아당기던 금발의 다크 엘프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게다가 다리에서 피까지 철철 흐르는 것이 누군가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듯했다.
“잡았다!”
“그물로 덮쳐!”
휘익.
금발의 다크 엘프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한 이는 다름 아닌 작은 덩치의 늑대인간들이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10살가량의 어린아이와 견줄 만큼 작은 체구였다.
그런 그들이 금발의 다크 엘프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땅속에서 기회를 엿보고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초원 지대는 다름 아닌 늑대인간들의 앞마당. 무수히 펼쳐져 있는 땅굴의 입구를 통해 금발의 다크 엘프에게 일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아우우우.”
“이거 놔! 이거 풀지 못해!”
결국 금발의 다크 엘프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늑대인간들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그물에 걸린 금발의 다크 엘프 주위를 에워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