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오망성의 마법사
딸깍.
끼이익.
터벅터벅.
기름칠을 하지 않은 듯 뻑뻑한 문을 열고 초로의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암갈색 로브를 걸치고 있는 한 청년이 눈을 감고 명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허허, 아직도 명상에 빠져 있다니. 실로 놀라운지고.”
“…….”
초로의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청년의 반대편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노인은 청년을 바라보며 인자하고도 따뜻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허허, 명상을 하면서도 내 존재를 느꼈단 말인가?”
“탑주님의 기운이 워낙 강대하셔야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허허, 드디어 때가 된 것인가?”
노인의 물음에 청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로빈아…….”
“네, 탑주님.”
“네가 가슴에 품은 열망이 참으로 거대하다는 걸 안다. 이 마탑의 품 안에 널 담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무슨 소리십니까, 탑주님. 저는…….”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로빈은 탑주의 말에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봤다.
“네가 이 마탑을 책임질 의향이 없다는 걸 안다. 내 백수가 다하도록 너와 같이 마나에 대한 감응과 친화력이 뛰어난 아이는 처음이야.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는…….”
“죄송합니다. 탑주께서 저를 예쁘게 봐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탑주님과 다른 이방인입니다. 다른 이방인들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저는 제 본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이곳에서 마법을 배우고자 할 뿐입니다.”
“허허, 참으로 고얀지고. 감히 이 마탑에서 나 지안루지의 명을 거역하다니 말이야.”
“죄송합니다.”
진 마탑의 탑주이자, 오벨리스크 최고의 대마도사인 지안루지 드 갈라섹. 세수 백세를 훌쩍 넘긴 그 초로의 대마도사가 바로 눈앞의 노인이었다.
“…떠날 생각인 게냐?”
“이제 7서클에 들어섰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 배울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제 스스로 세상에 나아가 더 많은 걸 보고 경험할 때입니다. 탑주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부분이 아닙니까.”
“…허허, 그렇지. 제아무리 너의 재능이라고 해도 8서클은 닿기 힘든 경지이지. 그러나!”
“……?”
“이대로 널 보낼 수는 없다! 그동안 탑에서 너에게 들인 공을 허투루 여길 수는 없을 터!”
“탑주님!”
로빈의 외침에도 지안루지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조금 전의 인자한 표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네 마음은 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
“탑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너를 무작정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안루지의 말에 로빈이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너에게 시험을 내리겠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한다면 너를 이대로 보낼 것이야. 그러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연하질 않느냐. 나를 대신해 네가 이 진 마탑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
지안루지의 단호한 대답에 로빈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굳히고는 지안루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제 자신을 위해!”
[띠링! 히든 퀘스트 ‘마탑주의 시험’이 발동되었습니다.]
진 마탑의 탑주이자, 대륙 최고의 대마도사인 지안루지 드 갈라섹이 자신의 후계자를 위해 내린 시험. 총 3명의 마법사들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친다. 마탑 지하에 마련된 세 곳의 시험 관문을 통과하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어라.
난이도:A-
기한:3일
보상:알 수 없음
“이게 무슨?”
“네 녀석만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너 이외에도 이 진 마탑에는 내로라하는 천재 두 명이 더 있다.”
“그럼 그 두 사람을 후계자로…….”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 당장 지하로 내려가거라. 어서!”
“…네, 탑주님.”
로빈은 그길로 마탑 내부에 마련된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지하 1층으로 향했다.
파앗.
“드디어 왔나 보군.”
“흥! 저따위 허약해 보이는 녀석과 대결을 펼치라니. 스승님도 참.”
로빈이 지하 1층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미리 와 있었던 듯 3명의 사내가 비아냥거리며 로빈을 맞이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부탑주님.”
“그래, 왔느냐. 마스터로부터 언질은 받았겠지?”
“그렇습니다.”
로빈은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두 사내를 무시하고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진 마탑의 부탑주이자, 8서클 익스퍼트인 아르빈 드 로마네코가 그의 이름이었다. 더불어 마탑 역사상 가장 이른 나이에 7서클을 마스터한 당대 최고의 마법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자, 이제 모두 모였으니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이곳 지하는 총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불어 지하 2층까지는 방이 3개씩 자리하고 있다. 그 방문마다 너희들의 이름을 붙여 뒀으니, 너희들은 각자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가 시험을 치르면 될 것이다.”
“질문 있습니다.”
“무엇이냐.”
아르빈의 지시에 염소수염을 기른 밉상 사내가 손을 들며 말했다.
“2층까지의 시험을 통과하면 3층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네놈들의 실력으로는 2층을 통과하는 것조차 버거울 테니, 깊이 알 필요 없다! 자, 어서 앞장서거라. 시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3일 후에 너희들을 데리러 오마.”
파앗!
자신이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아르빈의 신형이 사라졌다.
로빈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가 로빈이냐?”
“…뭐지?”
“흥! 꼴에 마탑의 꾸부렁쟁이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는 모양이더군.”
“게다가 우리 두 사람과 함께 마탑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다니. 5서클 익스퍼트 주제에 말이야. 어떻게 꾸부렁쟁이들을 구워삶았지?”
“…….”
눈앞의 두 사람은 로빈도 알고 있는 사내들이다. 나이도 자신과 엇비슷한 데다 마탑에서도 촉망받은 유저 마법사들로서 대외적으로 유명한 마법사들이었다.
먼저, 작은 키의 염소수염 사내는 불 계열 마법을 6서클까지 마스터하고 바람 계열 마법을 3서클까지 마스터한 지오라는 남자였다.
그 옆, 건장한 체격에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장발의 사내는 땅 계열 마법을 6서클까지 마스터하고 익히기 어렵다는 물 계열 마법을 3서클까지 마스터한 반니라는 남자였다.
“…병신들.”
“뭐- 뭐라고!”
“이런 개 같은 자식이! 어스 애로우!”
“…실드.”
파앙!
반니의 공격 마법을 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마법으로 막아냈다.
그가 너무도 쉽게 자신의 마법을 막아내자, 반니는 다소 놀란 듯 잔뜩 커진 눈으로 로빈을 쳐다봤다.
“네놈… 5서클 익스퍼트가 아니구나!”
“…네들 마음대로 생각해. 나 먼저 간다.”
“이익! 거기 서지 못해! 불꽃의 장막으로 그대의 앞길을 막을지니, 파이어 월(Fire Wall)!”
로빈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지오가 급히 마법을 전개했다.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함이었다.
“캔슬(Cancel)!”
“헉!”
“이- 이럴 수가!”
그러나 지오의 마법은 구현되지 못했다. 로빈이 나서서 지오의 마법을 무효로 만들어버린 탓이다.
그 모습을 보며 지오와 반니는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크게 당황했다.
파이어 월은 무려 4서클 마법. 4서클 마법을 무효화시키려면 최소한 6서클 마스터는 되어야 가능했다. 한마디로, 로빈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5서클 익스퍼트가 아니라 최소한 6서클 마스터라는 소리였다.
“건드리지 마라. 짜증나면 확 엎어버릴 테니.”
“…….”
“…….”
로빈의 살기 섞인 말에 지오와 반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를 쳐다봤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빈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방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섰다.
[띠링! ‘마탑주의 시험’ 첫 번째 관문이 시작됩니다.]
파앗. 파앗. 파앗.
“…몬스터들인가?”
[띠링! 첫 번째 관문 ‘몬스터 사냥’이 10초 후에 시작됩니다. 10, 9, 8…….]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방 안에는 공간 변이 마법이 걸려 있는지 주변 풍경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순식간에 방 안의 풍경은 거대한 대평원으로 바뀌고 전방에 오크를 비롯한 수많은 몬스터들이 즐비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신으로 처치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숫자. 하지만 로빈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꾸에에엑!
크어어엉!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오크와 오우거들이 한데 모여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터트리는 엄청난 굉음은 보통 사람이라면 고막이 터질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하아암, 돼지 새끼들하고 근육질 덩어리들이 살판났네. 아, 젠장! 탑주 노인네는 왜 이런 걸 시켜 가지고.”
몬스터들의 집단 괴성에도 로빈은 그저 하품만 나올 뿐이었다. 결국 그는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로브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틱. 틱. 틱.
그러나 로빈은 여전히 마법을 쓸 생각이 없는지 그저 자신의 주변으로 손톱만 한 돌멩이 5개를 흩뿌리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내던진 돌멩이들은 마치 원을 그리듯 일정한 간격으로 로빈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꾸에에엑!
쿵쿵쿵!
척 보기에도 가장 거대하고 강해 보이는 오크가 오른손에 들린 대부(大斧)를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오크들이 일제히 천휘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크어어엉!
쾅쾅쾅!
오크의 뒤로 오우거들도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머리가 둘 달린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명령에 따르는 듯했다.
“이제 시작하는 건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숨이 턱 막힐 법한 상황이다. 그러나 로빈은 여전히 천하태평 그대로였다. 마치 눈앞의 몬스터 군단이 그를 비켜갈 것이라 예견하는 듯 미동조차 하질 않고 있었다.
꾸에에엑!
크어어엉!
로빈이 그렇게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 몬스터 군단이 급기야 속도를 높여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칫하다가는 그들의 포악한 발길질에 채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을 만큼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마나 증폭.”
로빈의 나지막한 말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작은 돌멩이들이 갑자기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나 공명을 일으키며 그가 딛고 서 있는 땅바닥에 작은 오망성(五網星)이 그려졌다.
“화마의 참혹함이 이 땅에 떨어질지니, 파이어 스트라이크(Fire Strike)!”
로빈의 빠른 캐스팅과 함께 땅바닥에 그려지던 오망성이 하늘 위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돌격해오는 몬스터들의 중앙으로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뀌이이익!
크아아앙!
로빈이 만들어낸 화염의 기둥들이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외곽에 있던 몬스터 몇몇이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역시나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실전에서 써보는 건 처음인데. 이거 나름 쓸 만하잖아?”
누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말이었지만, 로빈은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었다. 하마터면 몬스터들의 발길질에 채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실전 경험이 전무한 마법을 시전하다니.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나 증폭 원진 마법만으로 이 정도 효과를 발휘한다면, 마나 공명 원진 마법과 마나 드레인 원진 마법을 더할 경우에는… 쿡쿡, 역시 지안루지에게 원진 마법을 배우길 잘했어.”
로빈은 6서클을 마스터하고 진 마탑주 지안루지 드 갈라섹에게 원진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진 마법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로빈이 배운 것은 그중에서도 보조 역할을 하는 분야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아직까지 유저 중에서 배운 이가 1백을 넘지 않을 정도로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익히기 위해서는 엄청난 골드의 마나석을 남발해야 하는 탓에 웬만한 갑부 유저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마법이었다.
뀌이이익!
끄워어엉!
하지만 아직 몬스터가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대다수의 몬스터들이 흉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후훗, 손속에 사정을 두었더니 살아남은 녀석들이 꽤 되네? 좋았어. 이번에는 7서클 최강 마법으로 요리해주지. 우하하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로빈도 천휘만큼 사악한 면이 있었다. 게다가 웃음소리도 비슷한 것이 흡사 천휘를 보는 듯했다.
“빙결의 여신이여, 당신의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본받아 이 땅에 당신의 염원을 뿌릴지니, 블리자드(Blizzard)!”
휘이이잉!
이제껏 가장 긴 진언을 읊자 로빈의 주변으로 빙결의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워낙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거센 눈보라에 그를 제외한 모든 몬스터들이 꽁꽁 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오크는 그렇다 쳐도 오우거는 질긴 가죽으로 인해 마법 저항력이 뛰어난 몬스터다. 그러나 그런 오우거라 할지라도 7서클 최강의 광역 마법인 블리자드가 연출해내는 빙결의 폭풍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그대로 얼음 동상이 되고 말았다.
[띠링! 첫 번째 관문 ‘몬스터 사냥’이 종료되었습니다.]
[띠링! 문이 열립니다.]
끼이익.
블리자드에 의해 모든 몬스터들이 동상이 되자 귓가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변하더니, 처음 그 방에 들어섰을 때의 풍경으로 되돌아왔다.
“별거 아니네.”
로빈은 생각보다 ‘마탑주의 시험’이라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며 열린 문을 지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큭큭, 역시나 가장 늦었잖아?”
“당연한 거 아니냐? 저놈의 실력으로는 통과한 것만으로도 용한 거야.”
“…….”
문 바깥에는 로빈과 함께 시험을 치르는 지오와 반니가 그를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녀석들을 단숨에 제압해 비웃음을 없애고 싶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기에 로빈은 그저 그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했다.
“고작해야 오크 5마리를 처치하지 못해서 쩔쩔매다니. 저 자식 실은 6서클 마스터가 아닌 거 아냐?”
“그러게. 파이어볼 2개만 캐스팅해도 금방 해치울 수 있는데 말이야.”
‘오크 5마리?’
두 녀석의 대화를 들은 로빈은 의아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봤다.
“겨우 오크 5마리를 처치했다는 거냐?”
“다- 당연하잖아. 그럼 너는 오크 5마리가 아니었다는 거야, 뭐야!”
“난 오크랑 오우거 합쳐서 수백 마리 정도였는데? 네놈들은 고작 그 정도냐?”
지오의 말에 로빈은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털어놓았다.
“뭐? 오크와 오우거 수백 마리? 푸하하하! 이 자식 완전히 뻥쟁이 아냐? 어떻게 6서클 마스터가 그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처치하냐?”
“큭큭큭, 내버려 둬라. 저런 녀석들이 꼭 있지. 허풍만 심한 겁쟁이들이 말이야. 그만 하고 아래로 내려가자. 두 번째 관문을 시작해야지.”
“그래, 그게 좋겠다. 큭큭큭, 몬스터 수백 마리래.”
“큭큭큭.”
두 녀석의 비아냥거림에 로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금방이라도 마법을 전개해 두 녀석들을 잿더미로 만들고 싶은 살의에 휩싸였다.
‘후욱, 릴랙스, 릴랙스. 저따위 자식들 처치해봐야 내 악명만 올라가니 그냥 참자. 그나저나 진짜 왜 나만 몬스터 수백 마리를 상대한 거지?’
역시 마법사답게 로빈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대처했다. 천휘나 카멜이었다면 단숨에 달려들어 두 녀석의 목을 따버려겠지만, 로빈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함께 시험을 치르는 저들과 자신이 치른 시험의 내용이 다르다는 말인가. 아니, 이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수준의 시험이라고 봐야 옳았다.
‘빌어먹을! 그 노인네, 노망 난 거 아냐!’
어찌 된 영문인지 계속해서 생각을 거듭하던 로빈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바로 마탑주인 지안루지의 계획적인 방해였다.
그는 자신을 어떻게든 진 마탑의 차기 탑주로 만들려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에게 원진 마법도 가르쳐 주고 여러 가지 마법 시약이나 마나석도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로빈은 진 마탑의 탑주는커녕 오히려 천휘를 도와 그의 복수를 실현시켜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안루지는 그가 치르는 시험의 난이도를 어렵게 설정하여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인 듯했다.
“역시 그 노인네의 수작이 분명해! 제기랄!”
“저 자식 뭐야?”
“신경 꺼. 허풍을 치는 것뿐 아니라 이제는 혼잣말까지 중얼거리는 걸 보니, 살짝 맛이 간 놈인가 보다.”
“큭큭, 아무래도 그렇지?”
로빈이 들었다면 악명이고 뭐고 두 녀석을 단숨에 처치해버렸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빈은 지안루지에 대한 분노로 인해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좋아!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 해서 내가 포기할 줄 알아! 반드시 이 빌어먹을 시험! 통과해 보이겠어!’
지안루지가 자신을 방해한다는 확신이 들자 로빈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사실 자신을 마치 제자처럼 대해주던 그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편치 못했는데, 이제는 그런 미안함까지 모조리 사라지고야 만 것이다.
“여어, 이제야 오나? 허풍쟁이?”
“…건드리지 마라. 죽여 버리기 전에.”
“히익!”
조금 늦게 계단을 내려온 로빈을 향해 반니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로빈의 분노가 담긴 살기에 기겁하며 그는 뒷걸음쳐야 했다.
하지만 그뿐.
로빈은 두 녀석과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위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방 안으로 곧바로 들어섰다.
[띠링! ‘마탑주의 시험’ 두 번째 관문이 시작됩니다.]
[띠링! 두 번째 관문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10초 후에 시작됩니다. 10, 9, 8…….]
파아앗.
“허억!”
두두두두!
“뭐- 뭐야!”
두 번째 관문이 시작되고 눈앞에 새로운 정경이 들어오자, 로빈은 기겁하며 빠르게 자세를 낮췄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게 이거야?”
로빈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휘황찬란하기 짝이 없는, 화려한 장식의 마차 지붕 위였다. 게다가 마차가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전력 질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로빈이 재빠르게 몸을 숙이지 않았다면, 힘없이 뒤로 튕겨져 나갔을지도 모를 만큼 빠른 속도였다.
“마법사님! 뭐 하시는 거예요! MC몽들이 따라오잖아요!”
“에?”
로빈은 마차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소녀의 외침에 곧바로 마차 뒤쪽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MC몽이라 불리는 야생 원숭이들이 떼거리로 마차를 뒤쫓고 있었다.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상식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로빈은 여전히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하게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젠장! 일단 거기에 대한 생각은 접고 저 녀석들부터 처치해야…….”
덜컹.
“큭.”
막 마법을 시전해 MC몽들을 처치하려던 로빈은 갑자기 마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자 몸을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마법을……. 빌어먹을, 이런 소리였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는 게?”
로빈은 그제야 이번 관문의 주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한마디로 말해,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조건에서건 마법사라면 냉정을 찾고 이성을 되찾아 마법을 시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터였다. 더불어 이토록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마법 시전을 성공시키는 것 또한 시험의 일부분이리라 생각했다.
“…….”
아직 MC몽들이 접근하려면 여유가 있었다. 녀석들의 속도가 가히 나는 새와 같다고는 해도 건장한 체구의 흑마 6필이 이끄는 마차보다는 느린 감이 있었다.
그로 인해 로빈은 눈을 감고 마차 위의 떨림을 온몸으로 느낄 시간을 벌었다. 막무가내로 마법을 시전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마법이 깨지며 마나 서클에 충격을 입을 수도 있는 탓이었다.
‘지독히도 떨리는구나.’
지안루지에게서 이와 비슷한 수련을 쌓긴 했지만, 그때와는 몸의 떨림이 훨씬 격했다. 흡사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랄까?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떨림이 심하다. 롤러코스터는 그나마 어느 정도 떨림을 예측할 수 있는 데 반해 마차 위에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대로는 제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법을 시전할 수 없다. 무언가 내 몸을 받쳐 줄 지지대가 필요해! 지지대… 지지대.’
떨림을 멈출 수 없다면 떨림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줄 만한 도구가 필요했다. 하지만 주변에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로빈 자신의 힘으로 지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빠각.
로빈은 눈을 뜨고 마차 위를 스쳐 지나가는 기다란 나뭇가지를 부러트렸다. 그리고는 연달아 몇 개의 나뭇가지를 더 부러트리고는 마차 위의 그것들을 흩뿌렸다.
“자연의 근간을 이루는 초목의 생명들이여, 자라나 적의 발목을 붙잡을지니, 인탱글링 루츠(Entangling Roots)!”
로빈은 4서클 마법인 인탱글링 루츠를 이용해 마차 위에 흩뿌려 놓은 나뭇가지를 자라나게 했다. 그리고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시전해 자라난 나뭇가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도록 조절했다.
“됐다!”
단단하게 마차 위의 지붕에 고정된 나뭇가지가 로빈을 옭아매자 더 이상 이전만큼의 떨림은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라면 지안루지의 수련 당시에 느꼈던 떨림에 불과했다.
끼기기긱.
“훗, 자식들.”
운 좋게도 로빈이 막 인탱글링 루츠를 시전해 떨림에 적응을 마치자, MC몽들이 마차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여차하면 한 번의 도약으로 마차 위로 뛰어들 태세였다.
“꺄악! 마법사님!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네, 네. 이제 갑니다! 매직 애로우 트리플!”
쐐액. 쐐액. 쐐액.
끼끽. 끼끽. 끼끽.
마차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비명에도 로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마법의 화살을 만들어 MC몽들을 가격했다.
“어라?”
하지만 녀석들은 의외로 마법 저항력이 높은지 로빈의 매직 애로우만으로는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고작해야 뒤로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그마저도 주변에 산재한 나무의 나뭇가지를 잡아내 땅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시험이잖아?”
인탱글링 루츠로 자신의 몸을 지탱한 순간부터 이미 시험은 종료되었다고 믿은 로빈이었다. 하지만 그리 녹록지는 않은지 MC몽들은 예상보다 훨씬 강한 녀석들이었다.
“아무래도 지안루지, 그 노인네가 또 손을 쓴 모양이네. 젠장! 그 망할 노인네! 대체 어디까지 날 방해할 심산이야!”
로빈은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로브 안에서 마나석을 꺼내 마차 주변으로 한꺼번에 튕겼다. 그리고는 마차 지붕 위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원진 마법을 전개했다.
“마나 증폭!”
가장 간결하면서도 효과가 좋은 원진 마법이 바로 마나 증폭이다. 일시적으로 시전자의 주변에 마나 함량을 2배로 향상시켜 주는 마법. 마나 함량이 증가된 만큼 마법의 위력도 배가되는 효능이 있었다.
“다시 시작해볼까? 매직 애로우!”
쐐액.
끼끽.
“좋았어!”
마나 증폭을 통해 위력이 향상된 덕인지 마법의 화살에 직격당한 MC몽 한 마리가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즉사한 것은 아닌지 여전히 전신에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 미치도록 마법 저항력을 높여 놨네. 뭐, 별수 없지. 일단은 저 녀석들을 다 떨어트리는 게 중요하니까. 매직 애로우 익스트림!”
로빈은 마법의 화살 수십 발을 한꺼번에 만들어 쫓아오는 MC몽 수십 마리를 공격했다. 로빈 그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의 마법 화살이었다.
“와아아!”
마법의 화살 수십 발이 하늘을 뒤덮는 장관은 애타는 심정으로 마차 위를 살펴보던 어린 소녀에게 감탄사를 터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끼끼끼끽.
수십 발의 마법 화살은 소녀에게 있어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상대인 MC몽들에게는 죽음의 선고와도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 한 발의 어긋남도 없이 마법의 화살들은 정확하게 MC몽들을 가격했고 녀석들로 하여금 더 이상 마차를 뒤쫓지 못하게 했다.
“경험치 덩어리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대지를 진동시키는 폭염의 줄기여, 더 이상 인내하지 말고 이 땅에 그 분노를 표출할지니, 익스플로전(Explosion)!”
마법의 화살에 가격되어 신음하며 모여 있던 MC몽들의 중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땅속에서부터 치솟던 거대한 폭발은 일대를 순식간에 화염으로 뒤덮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MC몽들을 잿더미로 만들고야 말았다.
[띠링!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큭큭, 좋아.”
[띠링! 두 번째 관문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종료되었습니다.]
[띠링! 문이 열립니다.]
“어라?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이대로 끝이야?”
내심 그 어린 소녀의 신분이 궁금했던 로빈은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되자, 살짝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지금은 그 소녀보다 세 번째 관문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방을 빠져나갔다.
“어- 어떻게 네놈이!”
방을 빠져나가자 사색이 된 채 자신을 쳐다보는 지오와 조우할 수 있었다.
“반니 녀석은 아직이냐?”
“…쳇! 어떻게 너 같은 허접 새끼는 시험을 통과하고 반니 같은 우수한 마법사가 시험에 떨어질 수 있는지. 이거 뭐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됐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두 녀석 중 한 놈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로빈은 그저 그런 마법사라고 생각했던 지오가 두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로빈 자신도 궁여지책을 발휘해 겨우 관문을 통과한 것이 아니던가.
로빈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두 번째 관문, 어떻게 통과했냐?”
“흥!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시험쯤이야! 물론!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계곡 위에서 마법을 전개할 수 있는 정도의 마법사는 아르니안 대륙에 이 몸 정도밖에 없긴 하지만 말이야. 우하하하!”
“…….”
자신은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거칠고도 변화무쌍한 떨림을 느끼며 마법을 전개해야 했건만, 지오 녀석은 고작해야 거센 바람을 맞받으며 마법을 전개했다니.
바람이 제아무리 거세다 해도 흔들리는 마차 위보다 방해가 심할까. 이미 지안루지와의 수련을 통해 그와 비슷한 경험을 겪었던 로빈이었기에, 지오 녀석의 시험이 자신에 비해 얼마나 쉬운 것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야, 야, 형님의 설명을 마저 들어야지! 어떻게 바람을 맞으면서도 마법을 전개했느냐 하면!”
“됐으니까 나 먼저 간다.”
“야! 야!”
로빈은 지오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는 진정으로 마지막 관문만이 남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층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지하 3층에는 이제까지와 달리 방이 정해져 있지 않다. 최악의 경우에는 저 녀석과 팀을 이뤄 시험을 통과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저 녀석은 걸림돌에 지나지 않아. 여차하면 방패막이로 삼고 나 혼자의 힘으로라도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로빈의 관점으로 볼 때, 지오는 그리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그는 6서클을 마스터한 유능하고도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그가 볼 때에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로빈이 생각하는 뛰어난 마법사는 3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했다. 바로 굳은 심지와 냉철한 이성, 그리고 마나와의 감응 또는 건실한 마나 서클인데, 지오는 그것들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다.
그러한 생각은 로빈이 이미 여느 유저 마법사들보다 뛰어난 수준에 도달했다는 반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6서클과 7서클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다닥!
“너, 뭐야!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
우르릉, 쿠웅!
“허억! 이- 이게 무슨!”
로빈을 따라 지오가 지하 3층에 발을 내디딘 순간, 계단으로 향하던 통로에 거대한 석벽이 내려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몸이 납작한 종잇장으로 변했을 것이기에 지오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갇힌… 건가?”
거대한 석벽이 통로를 막음과 동시에 지하 3층은 완벽하게 폐쇄된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 어디에도 다른 곳으로 이어진 통로나 문이 없었다.
“끄아악!”
“뭐야!”
“싫어! 싫다고! 개미야! 개미! 개미가 있어!”
“…븅신.”
지오의 비명 소리에 무슨 사단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그를 쳐다봤던 로빈은, 그의 시답잖은 말에 비아냥거리며 지하 3층 내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는데… 대체 여기에서 뭘 하라는 거지?”
벽이나 천장을 살펴봐도 특이할 만한 것은 없었다. 혹여 자신이 놓친 조각이나 문구가 새겨져 있을까 싶어 꼼꼼하게 살펴봤지만, 모두 다 헛수고였다.
스파아앗.
“큭!”
“헙!”
두 사람이 그렇게 헤매고 있을 때, 3층의 중심에서 하얀 빛무리가 뿜어졌다. 6서클 마스터인 지오도, 심지어 7서클 마스터인 로빈도 감지하지 못한 마나의 움직임.
이는 두 사람보다 훨씬 윗줄의 마법사가 공간 이동을 했다는 반증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대단해. 우리가 안배한 시험의 마지막까지 도달하다니 말이야.”
“헉! 마탑주!”
“…….”
하얀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진 마탑의 탑주이자, 8서클 대마법사인 지안루지 드 갈라섹이었다. 게다가 그가 평소 애장하고 있던 화이트 드래곤의 세트까지 착용해 그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마탑주께서 여긴 어떻게?”
“너희 두 사람에게 마지막 시험 과제를 내리도록 하겠다. 나를 이겨 봐라.”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
지안루지의 황당한 발언에 지오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로빈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말이 되냐는 식의 눈을 하고 지안루지를 쳐다봤다.
“너희 둘의 실력을 감안해 6서클 이하의 마법만 사용하도록 하지. 자, 이제부터 시험은 시작되었다.”
[띠링! 세 번째 관문 ‘마탑주의 농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망할 노인네! 이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쳐?’
이것은 명백한 농간이었다. 시험의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본래는 이와 같은 시험이 아니었지만, 행여나 로빈 자신이 시험을 통과할까 무서워 그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6서클 이하의 마법만 사용하신다고 해도 마탑주께서는 8서클 마스터이시니, 6서클까지의 마법을 캐스팅도 하지 않고 전개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이건 시험이 아니라 그저 일방적인 구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야, 너도 뭐라고 한마디 해봐!”
“…….”
지오가 이 시험의 부당함을 논리정연하게 늘어놓았지만, 로빈은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지안루지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저 망할 노인네는 한번 한다면 하고야 마는 성격이지. 그 자신이 말을 내뱉은 이상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반드시 밀어붙일 테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조차 없어.’
로빈은 지오의 외침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지팡이를 꺼내들 뿐이었다. 천휘가 선물해준 유니크 지팡이인 실피드의 지팡이였다. 실피드는 바람의 정령왕이기에, 바람 계열 마법을 사용할 시 무려 2배에 달하는 위력 증폭이 걸려 있는 지팡이였다.
“이런 미친! 너 설마 마탑주와 정말 한판 붙으려는 거냐!”
“어차피 저 노인네는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절대 바꾸는 성격이 아니야! 너도 준비해! 어떻게든 저 노인네를 이겨야 하니까! 짜증나지만 이 시험을 통과하려면 너와 내가 힘을 합쳐야 한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8서클 마스터를…….”
로빈의 다그침에도 지오는 아직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에게 호통을 쳐서라도 정신을 일깨워주고 싶지만, 로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안루지가 난데없이 마나를 주변으로 개방한 탓이었다.
‘큭, 망할 노인네! 역시 마법 실력 하나는…….’
고위 마법사들은 그저 마나를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마나를 유동시킬 수 있다. 물론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최소한 6서클을 마스터하고 7서클의 경지에 한발 내디뎠을 때나 가능한 일.
때문에 이러한 경험을 처음 접한 지오는 지안루지의 마나 개방에 자신의 마나가 유동치는 것을 느끼며 더욱더 깊은 혼란 상태에 빠지고야 말았다.
“허허허, 고작 이 정도로 저 지경에 이르다니.”
“…….”
지안루지의 푸념에도 로빈은 온 신경을 그에게로 집중했다. 언제 어느 때에 마법을 전개할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허허, 지금이라도 말해라. 이 진 마탑의 차기 후계자 되겠다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파이어볼!”
지안루지의 제안에 로빈은 마법을 한발 먼저 시전하며 그를 공격했다.
“실드.”
“쳇.”
파이어볼은 3서클 마법이다. 그에 반해 지안루지가 시전한 실드는 2서클 마법. 상식적으로는 실드로 파이어볼을 방어할 수 없지만, 지안루지는 그것을 해냈다. 그 누구보다 마나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직 애로우 트리플!”
“배리어!”
하지만 로빈은 예상했다는 듯 상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법 화살을 날렸다. 한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세 방향으로 날아가는 마법 화살이었기에 한쪽 면만을 방어하는 실드로 막지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한 로빈의 안배가 먹혀들었는지 지안루지는 실드가 아닌 4서클 마법인 배리어로 마법 화살들을 튕겨 냈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제자야!”
‘누가 누구보고 제자래!’
자신은 그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로빈이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그가 자신을 봐주면서 대결을 펼치고 있지만, 만에 하나 수가 틀리기라도 한다면 지안루지는 분명히 로빈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마법 연환공격을 해댈 것이 분명했다.
이전에 이미 그러한 경험을 해본 로빈이었다.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전격의 다발이여, 그 파괴의 힘을 드러낼지니,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본격적으로 해보자 이거냐! 아이언 트랩(Iron Trap)!”
로빈이 만들어낸 전격의 다발이 지안루지에게로 향했다.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는 파괴적인 힘이었기에 그 역시 얕보지 않고 3서클의 아이언 트랩을 전개했다.
피싯.
“큭, 저런 수가.”
체인 라이트닝은 비록 5서클 마법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6서클의 마법보다 강력했다. 물론 다수를 상대할 때에는 그 위력이 다소 감소하지만 지금과 같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전격의 다발은 무지막지한 위력을 자랑했다.
로빈에게 있어 비장의 한 수였지만, 지안루지에게는 그저 가소로운 공격일 따름이었다. 힘들이지 않고 3서클의 아이언 트랩을 이용해 전격의 다발을 모두 대지로 흘려보내버린 것이 그 증거였다.
“제자야, 무슨 수를 써도 내겐 안 된다는 걸 잊었느냐? 그만 포기해라. 대체 왜 대륙 최고의 마법사 자리를 마다하는지 이 사부는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제자 취급하는 지안루지를 보며 로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가 자신에게 원진 마법을 가르쳐 주고 마법의 성취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정식으로 사제지례를 갖추지는 않았다.
그것은 미래에 이런 식으로 엮이지 않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확실히 해두겠습니다. 마탑주님은 제게 있어 그저 마법의 성취를 도와준 조력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저 역시 마탑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소립니다.”
“과연, 제자가 입심 하나는 발군이구나! 하지만 손속은 이 사부가 더욱 매섭다는 걸 잊지 마라! 익스플로전!”
콰앙, 펑펑펑!
“크윽, 아쿠아 프로텍션(Aqua Protection)!”
익스플로전은 6서클 마법이다. 화염 계열 마법 중에서는 파이어 스톰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법을 지안루지는 캐스팅도 없이 곧바로 시전했다. 하지만 로빈 역시 녹록지는 않아 곧바로 4서클 방어 마법인 아쿠아 프로텍션으로 응수했다.
“그것만으로 되겠느냐, 제자야!”
확실히 6서클 마법을 4서클 방어 마법만으로 막아낸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로빈 역시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쿠아 프로텍션 뒤쪽에 또 하나의 방어막을 형성했다.
“배리어!”
익스플로전의 화염은 아쿠아 프로텍션으로 막고 폭발로 인한 물리적인 충격은 배리어로 막아냈다. 그런 과정을 거치니 다행히도 익스플로전은 더 이상 로빈에게 충격을 주지 못했다.
“제법이로구나! 어디 이것도 막아보거라!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모든 것에 우선하는 태고의 물줄기여, 태고의 이 땅을 구현한 그 강력한 힘으로 모든 것을 지워버릴지니, 스프링클러(Sprinkler)!”
지안루지가 마법 시전을 위한 진언을 읊는 순간, 로빈은 그가 펼칠 마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7서클 대인 마법 중에서도 위력 하나는 최고로 꼽히는 수 계열 마법 스프링클러라는 것을.
“태고에 세상을 암흑으로부터 창조한 화염의 불씨여, 거대한 화염의 줄기로 뻗어나가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지니, 플레임쓰로워(Flamethrower)!”
결국 로빈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대인 마법을 꺼내들었다. 게다가 상성으로 지안루지의 스프링클러를 상대하기 위해 반대 계열의 플레임쓰로워를 전개했다.
휘이익.
쐐애액.
콰아아아앙!
“크윽!”
“허허, 제자가 그동안 참으로 많이 발전했구나. 사부의 마법을 막아내기도 하고 말이야.”
로빈의 플레임쓰로워와 지안루지의 스프링클러가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로빈은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에 반해 지안루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너털웃음까지 흘릴 정도였다.
“제자야, 이대로 죽을 것이냐?”
“크윽, 이대로 마탑주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크윽, 어차피 전 불사의 존재인 이방인.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지안루지가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는 듯 로빈은 플레임쓰로워를 지탱하면서도 한 가닥 힘이 남아 입을 열 수가 있었다.
“허허허, 생각해보니 내가 한 가지 말 못한 것이 있구나. 이 진 마탑의 지하 3층은 전대의 마탑주들이 모여 생성한 거대한 마법진이 구축되어 있다.”
“크윽, 마법진?”
지안루지의 말에 로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분명히 지하 3층은 샅샅이 뒤져서 더 이상 특이할 만한 것은 없었다. 혹 전대 마탑주들이 모여 구축한 마법진이라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지닌 것일진대 자신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거짓이 아니다. 이 층에는 전대 마탑주들이 구축한 헬 스크림(Hell Scream) 마법진이 펼쳐져 있다.”
“헬 스크림이라면…….”
“모든 것을 지옥의 터널로 안내한다는 마법진이다. 이제껏 그 누구도 구현해내지 못한 최악의 마법이지. 한마디로 말해, 제자 네가 제아무리 불사의 존재인 이방인이라고 해도 이 마법진 위에서 죽으면 부활할 수 없게 된단 말이다. 영. 원. 히!”
“…….”
사악한 미소를 띠며 힘을 주어 말하는 지안루지를 쳐다보며 로빈은 진위 여부를 가늠했다.
‘젠장! 저 노인네가 그런 틈을 보일 리가 없지.’
이제껏 지안루지를 대하면서 그의 심중을 미리 알아챈 적이 없는 로빈이었다. 때문에 그는 지안루지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두렵게 다가왔다.
지지지직.
“크윽.”
로빈이 이리저리 꼼수를 생각하는 사이, 지안루지가 스프링클러에 주입하는 마나의 양을 증강시켰다. 때문에 로빈의 플레임쓰로워가 현저하게 뒤로 밀려나며 불과 3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선택해라, 제자야! 이대로 소멸하고 말 것이냐! 아니면 살아남아 이 진 마탑의 후계자가 될 것이냐!”
“크윽.”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지안루지의 말대로 마지막 선택만이 남아 있는 상황.
선택의 기로에 선 로빈은 결심을 굳힌 듯 잔뜩 찌푸리던 얼굴 근육을 움직여 다부진 표정으로 지안루지를 쳐다봤다.
“죽이십시오.”
“뭐라!”
로빈의 대답이 뜻밖이었던 듯 지안루지가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마도 그는 당연히 로빈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제가 이 마탑에 들어와 힘을 키운 것은 온전히 제 친구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언제까지고 얽매이게 된다면 전 이 땅에 다시 발을 내디딜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소멸되어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니 죽이십시오.”
“이익!”
로빈의 단호한 눈빛과 표정에 지안루지는 당장에라도 스프링클러에 주입하는 마나의 양을 배가해 그를 소멸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일. 아니,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이기 이전에 이 땅에 찾아온 이방인이었다. 이방인들은 불사의 존재로서, 이 아르니안 대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주는 존재들. 게다가 로빈은 자신의 제자라서가 아니라 명실 공히 아르니안 대륙의 이방인 중 최고의 마법사였다.
그런 존재를 자신의 야욕 때문에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피슈웃.
“…왜?”
스프링클러에 주입되던 마나가 금세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로빈 역시 손을 거둬 플레임쓰로워를 사라지게 했다. 실상은 이미 마나가 거의 떨어져 더 이상 플레임쓰로워를 지탱할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널 계속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만일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을 시에는!”
꿀꺽.
지안루지의 엄포에 로빈은 잔뜩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땐 절대 안 놔줄 것이다! 바로 이 진 마탑의 차기 후계자 자리에 앉힐 것이니, 그리 알아!”
“푸웃.”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제자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제자를 이기는 사부 없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그리고 이걸 받아라.”
티익.
“이건…….”
로빈은 지안루지가 건넨 책을 받아들며 물었다.
“네 녀석이 원진 마법 성취가 벌써 경지에 이르렀음을 내 알고 있다. 그것은 오망성의 마법서다. 네 녀석이라면 충분히 익힐 수 있을 터. 그것이 이번 시험의 보상이다.”
[띠링! 히든 퀘스트 ‘마탑주의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띠링! 보상으로 명성이 50,000 상승합니다.]
[띠링! 보상으로 ‘오망성의 마법서’를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주는 선물이다. 받아라.”
“그건!”
지안루지가 로빈에게 건네는 것은 다름 아닌 화이트 드래곤의 세트였다. 화이트 드래곤의 로브와 지팡이, 그리고 화이트 드래곤의 튜닉과 장화가 그것이었다.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니라. 이미 내 경지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것은 이 진 마탑의 소유물이 아닌 내 개인의 소유물. 그걸 네게 주도록 하마.”
“하지만…….”
“잔말 말고 당장 사라져라!”
“사부…….”
스파아앗.
로빈이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진 마탑 지하 3층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안루지가 마법을 이용해 그를 진 마탑 바깥으로 순간 이동시켜 버린 것이었다.
“허허허, 사부라…….”
로빈은 사라졌지만 지안루지는 그가 마지막에 내뱉던 말꼬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부.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단어였지만, 그 말이 이토록 따뜻한 것인지 그는 이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