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파멸의 권능
딸깍.
그그그긍.
“열린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떨어진 기력과 생명력을 회복한 천휘는 열쇠 구멍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열쇠 구멍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그곳에서 한참을 헤매야 했다.
이윽고 석벽의 귀퉁이에서 열쇠 구멍을 찾아낸 천휘는 그곳에 마신의 열쇠를 집어넣었다.
이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석벽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밀려나며 그 안에서 붉은색 안개가 스멀스멀 밖으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마신의 보물 창고라 이건가?”
붉은색의 안개는 흡사 전설의 고향을 연상시키듯 통로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야를 어지럽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더니 이내 천휘의 눈은 검고도 청아한 빛에 이끌려 천천히 보물 창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우오오오! 이건 최소한 레전드… 아니, 그 이상의 물건들이다!”
마신의 보고, 즉 보물 창고는 마치 박물관처럼 몇 점의 물건들만 전시되어 있었다.
내심 금화가 창고 안을 가득 메우길 기대했던 천휘였지만 그보다 더욱 뛰어난 가치의 물건들을 보고는 그저 감탄사만 연방 내뱉을 뿐이었다.
[웬 놈이냐!]
“…휴우, 역시 이런 보물 창고에는 창고지기가 있기 마련인가?”
막 전시된 물건들의 정보를 확인하려던 천휘는 창고 안에서 들려오는 천편일률적인 외침에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하아, 닌자에 이어 이번에는 사무라이냐? 무슨 일본 오타쿠도 아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휘를 괴롭히던 4명의 닌자들은 이제 시체가 되어 천휘의 아공간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어쌔신보다 더욱 뛰어난 은신과 더불어 암기와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그들의 뛰어난 실력을 확인한 천휘가 그들을 강시로 재탄생시키고자 챙겨 놓은 것이다.
[감히 이곳이 어느 안전이라고 들어온 거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인가? 아니지. 그보다 대체 닌자들은 어떻게 처치하고 온 것이지? 보아하니 조낸 좆밥 같은데 말이야.]
“…조낸 좆밥? 이 빌어먹을 몬스터가 누구보고 좆밥이래!”
조금만 생각했다면 그가 몬스터가 아닌 운영자라는 걸 깨달았을 천휘였지만 좆밥이라는 도발적인 말에 사리 분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사무라이야! 죽어라!”
창고 안은 과연 마신의 보물 창고답게 무척이나 규모가 컸다. 충분히 두 사람이 전투를 벌일 만큼 널찍한 공간. 천휘는 마음 놓고 사무라이에게 쇄도했다.
[공간 찌르기.]
피슉.
“끄아악!”
천휘의 움직임을 그저 발도로 제지한 사무라이.
안력이 좋은 천휘로서도 녀석의 공격을 눈으로 좇지 못하고 어깨 어림을 꿰뚫렸다.
‘말도 안 돼.’
조금 전의 공격 한 번으로 천휘는 녀석의 무위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거의 카이젠에 버금가는 찌르기.
일본의 무사인 사무라이들의 검술은 대부분 발도에서 연결된다는 걸 알고 있는 천휘였기에 눈앞의 상대가 보여 준 발도에서 그 실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드엠페러까지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그랜드 소드마스터 정도는 되어 보인다. 게다가 극한의 쾌도를 무기로 삼는 사무라이. 젠장, 아까는 몰랐는데… 빈틈이 안 보여.’
닌자들을 처치하고 나니 그보다 몇 배는 어려운 상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과 같은 요행은 바랄 수 없는 진정한 강자. 천휘는 손아귀에 땀이 흥건히 적셔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기세 좋던 처음의 움직임은 어디로 갔지? 쫀 건가?]
“응? 쫄아? 어라? 그러고 보니 너… 이런, 빌어먹을! 이런 개영자! 이놈의 게임은 영자가 아무 때나 나타나! 자유도 극한의 게임 어쩌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까? 젠장! 당장 나가서 오시리스 게시판에다 고발해버리겠어! 영자가 나타나서 유저 방해한다고!”
그제야 눈앞의 사무라이가 운영자라는 걸 깨달은 천휘는 극도로 흥분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영자? 설마 전설의 희극배우, 바로 그 영자를 말하는 건가? 아아, 그녀는 정말 대단했지. 그토록 가녀린 여인은 처음 봤어.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호탕한 목소리와 과장된 표정. 어린 시절 내게 영자 그녀는…….]
“이봐, 영자 아저씨, 그렇게 발뺌해도 소용없어. 아무튼 난 여기서 목숨을 잃으면 당장 나가서 오시리스에 ‘『오벨리스크』에 운영자가 강림하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릴 테니까. 저번에 한 번 뒤통수 맞았을 때도 어느 정도 보상을 해주기에 그냥 넘어가줬더니,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쳐?”
[이거 젊은 사람이 융통성이 없군. 하지만 자네가 제아무리 그렇게 날뛴다고 해도 난 하등 상관이 없네. 나는 자네의 퀘스트에 이렇다 할 관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야.]
사무라이 운영자의 담담한 말에 천휘는 내심 뜨끔했다. 사실 지금 상황은 운영자가 자신을 방해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본래 이곳에 있었을 저 사무라이 NPC를 운영자가 컨트롤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젠장, 어수룩해 보이는데 의외로 똑똑하잖아?’
사무라이 운영자의 마음을 흔들어서 이득을 보려 했더니 이제는 그것도 물 건너간 듯했다.
결국 천휘는 역시 마지막에 믿을 건 자기 자신의 무력뿐이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가슴 어림으로 추켜올렸다.
[호오, 드디어 싸워볼 생각이 든 건가? 좋았어! 그럼 나도 그대의 용기에 부응해주지!]
사무라이 운영자의 오른손이 왼쪽 허리춤에 매어진 도집으로 향했다. 역시나 전형적인 사무라이의 기수식 자세였다.
그에 비해 천휘는 그저 기본적인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스킬을 쓰고 싶어도 이제 남아 있는 공격 스킬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동안 게임을 해오며 얻은 격투 센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하아앗!”
천휘가 먼저 선공을 가져갔다. 사무라이의 찌르기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접근해간 것이다.
피슉.
“크윽!”
그러나 천휘는 이번에도 역시 사무라이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정공법으로는 녀석을 상대할 수 없을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휘는 계속해서 사무라이를 향해 쇄도해갔다. 녀석의 칼에 찔리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마치 무조건 몰아붙이는 불도저처럼 사무라이를 향해 쉼 없이 달려들었다.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종자로군.]
“헉헉.”
그렇게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 한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미 천휘의 몸은 성한 데가 없었고, 호흡마저 거칠어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하는 것도 의미가 없을 듯했다.
하지만 천휘의 눈만큼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무엇이 천휘를 그토록 집착하게 만드는지 천휘는 계속해서 사무라이에게 쇄도했다.
그런 천휘가 조금씩 질리기 시작하는지 이제껏 평온했던 사무라이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피슉.
츠읏.
‘보인다!’
처음으로 사무라이의 칼을 피해냈다. 물론 완벽하게 피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치는 데에 그쳤을 정도였다. 그것을 사무라이 또한 눈치 챘는지 눈빛이 조금 굳어졌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어! 이 이상은 한계다. 게다가 녀석도 이번 회피를 통해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어느 정도 눈치 챘을 수 있어! 이 공격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하아앗!”
어느 정도 결심을 다진 천휘가 드디어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사무라이에게로 다가갔다.
피슉.
‘왔다!’
역시나 어느 정도 사정거리 내로 다가가자 여지없이 칼이 날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작정하고 있었기에 천휘는 왼팔을 내주며 그의 칼을 중심으로 빙그르르 돌아 사무라이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헙!]
예상치 못한 천휘의 움직임에 사무라이도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 개영자야! 이대로 천당 가는 거다! 하아압!”
사무라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천휘는 그대로 주먹을 녀석의 안면에 처박았다.
[커허억!]
천휘의 주먹에 사무라이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입 안에서 강냉이 몇 개를 우수수 떨어트렸다.
“아직 안 끝났어!”
퍼억!
[커억!]
“한 번 더!”
퍼억!
[끄악!]
“짜증나니까 한 대 더!”
퍼억!
[커헉!]
“영자라 재수 없으니까 한 대 더!”
퍼억!
[제- 제발!]
“그리고 이건… 그냥 한 대 더!”
퍼어억!
[띠링! 마신의 보고를 지키던 창고지기 사무라이를 처치하셨습니다.]
[띠링! 서브 퀘스트 ‘마신의 무구’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마신의 무구 3가지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크크크크. 우하하하! 해냈다, 해냈어!”
퀘스트 완료를 알려 오는 알림음에 천휘는 대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마신의 무구를 얻는 것은 물론 오베른에 필적할 만큼 강력한 상대를 스킬 하나 없이 쓰러트렸다니.
왠지 모르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받은 것만 같아 더욱 즐거운 천휘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천휘는 창고가 떠나가라 웃어젖히고 있었다.
* * *
“마신의 무구라… 우적우적.”
식객 블랙헤드가 만들어준 최상급 소고기 육포를 씹으며 기력과 생명력을 동시에 회복하던 천휘는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고 안을 돌아다녔다.
퀘스트에 대한 보상으로 얻어갈 마신의 무구 3가지를 선택하기 위함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것 다 가져가고 싶지만, 퀘스트 보상이 세 가지뿐이니 나머지는 어떤 식으로든 못 가져가겠지? 그러니 신중해야 해.”
천휘는 보물 창고를 천천히 둘러보며 느낌이 가는 것 몇 가지를 간추려 냈다. 대부분이 자신이 사용할 아이템들이었다.
“일단 장갑이나 무복은 패스. 내겐 발록의 심장과 주먹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남는 건 신발과 액세서리뿐이야. 그것도 아니면 스킬북인데… 젠장, 여긴 왜 스킬북이 없는 거야? 뭐, 좋아. 어차피 마신의 힘을 얻으면 그까짓 스킬북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니까. 그럼 이렇게 다섯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겠네.”
천휘는 자신이 골라온 5가지 아이템 중에서도 그 옵션이 가장 눈에 띄는 3가지를 골라냈다.
[림다일의 최후]
마수왕 림다일의 기운이 담긴 장화.
다섯의 마수왕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날랜 움직임을 가진 마수왕 림다일은 세상에서 누가 가장 빠른가를 놓고 바람의 정령왕 엘라이넨과 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 림다일의 최후는 그렇게 끝났다.
등급:레전드 내구력:40,000/40,000
분류:신발
제한:악명 1,000,000 이상
옵션:물리 방어력 +250
옵션:이동속도 200% 상승
옵션:민첩+30
옵션:특수 스킬 ‘림다일’ 습득
[가엘론의 수호자]
고대 하스렌 제국의 제2도시였던 가엘론.
그곳에는 수호자라는 별명을 가진 기사가 존재했다.
그는 가엘론을 공격하는 수만의 몬스터 부대를 막아냈지만, 마왕 이그니시스 군대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야 말았다.
등급:레전드 내구력:10,000/10,000
분류:팔찌
제한:명성 100,000 이상
옵션:마법 방어력 +300
옵션:생명력 회복속도 50% 상승
옵션:마력 회복속도 50% 상승
옵션:더위와 추위에 대한 면역
옵션:지혜 +50
옵션:지능 +50
옵션:특수 스킬 ‘가엘론’ 습득
[마룡 오그하트의 가슴]
고대 하스렌 제국을 멸망으로 몰아간 원인 중 하나는 마룡 오그하트의 출현이었다.
본래 오그하트는 블랙 드래곤이었으나 드래곤의 율법을 어기고 마신의 힘을 부여받아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가는 마룡이 되었다.
그는 인간 영웅들의 손에 의해 처단당하며 대륙의 3가지 신물을 남기고 죽었고, 그 신물들에는 마룡 오그하트의 강대한 힘이 담겨져 있다.
등급:레전드 내구력:50,000/50,000
분류:갑옷(흉갑)
제한:악명 3,000,000 이상
옵션:물리 방어력 +300
옵션:마법 방어력 +300
옵션:치명타 확률 50% 하락
옵션:더위와 추위에 대해 면역
옵션:NPC 상대 시 10% 확률로 공포 효과 발생
옵션:세트 효과(1) 생명력 +100,000
옵션:세트 효과(2) 모든 스탯 +50
하나같이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들이었다. 과연 마신의 무구들답게 그 옵션도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마룡 오그하트의 가슴이었다.
천휘 자신이 알기로는 분명 『오벨리스크』에 최초로 나타난 레전드 등급의 세트 아이템이었다.
유니크 등급의 세트 아이템도 겨우 두 점에 불과한 현실인데 레전드 등급의 세트 아이템이라니. 천휘가 판단하기에 마룡 오그하트의 세트 아이템을 모두 모은다면 신급 아이템에 필적할 만한 옵션을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우하하하! 역시 신은 내 편이로구나! …흐음, 주신 라멘이 신이었나? 빌어먹을! 그 자식은 제외! 우하하하! 아무튼 무조건 좋아, 좋아!”
3가지 아이템을 획득한 천휘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발록의 심장과 주먹을 돈으로 산 이후에 이렇다 할 아이템을 얻지 못한 천휘로서는 간만에 얻은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신급 아이템인 ‘태양의 진실’은 예외였다. 그것은 천휘 자신보다는 주변의 강시들에게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하는 아이템이었으니.
“이제 슬슬… 마신의 힘이라는 걸 얻어보실까?”
3가지 아이템을 즉시 착용한 천휘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마신의 보고를 벗어났다.
이제야말로 그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마신의 힘이라는 것을 얻어야 할 때였다.
“흐음, 드디어 예의 그 갈림길에 도착했네.”
천휘는 한 시간여를 걸어서 전에 왔던 갈림길에 도착했다. 갈림길에서 마신의 보물 창고로 갈 때만 해도 고작 5분 만에 주파했었지만, 이제는 쫓아오는 닌자도 없기에 천천히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쪽에서 왔었으니까 나의 진정한 목표는 저쪽에 있겠지?”
천휘는 반대편 방향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다. 그사이 해가 저물고 새해가 찾아온 것은 물론 현실에서 일주일 후면 꿀맛 같은 방학이 끝나고 학교가 개학하기까지 했다.
물론 3학년을 맡은 관계로 딱히 수업을 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집에서 편히 쉬며 『오벨리스크』를 즐기는 것보다 좋을 리 없었다.
휘이잉.
살며시 산들바람이 불어와 천휘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아마도 성 안쪽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리라.
천휘는 그 바람에 실린 끈적끈적한 살기를 느꼈다. 아니, 살기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 순간 천휘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미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갈림길에서 또 한참을 걸었다. 대략 한 시간 정도를 걸었지만 아직까지도 통로는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화는 있었다.
바람에 따라 실려 오는 살기가 더욱 짙어지는 변화가…….
“…….”
터벅터벅.
“…….”
터벅터벅.
“…으아아악! 도저히 못 참겠다! 이렇게 걷다가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어!”
천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보법을 운용해 빠르게 뛰어가기로 작정했다. 게다가 이번에 새로 얻은 아이템으로 인해 추가된 스킬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림다일]
마수 림다일의 기운을 일시 동안 자신의 발에 머무르게 하여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른 움직임을 보이게 하고 숙련도가 중급에 이르면 머문 자리에 잔상까지 남길 수 있다.
숙련도:초급 1단계(0.00%)
제한:민첩 300 이상
기타:마나 소모 5,000(1초당 50의 마나 소모)
옵션:이동속도 300% 상승
옵션:시전 시 반경 3m 안의 상대에게 1초간 스턴
그렇지 않아도 빠른 이동속도를 자랑하던 천휘에게 림다일 스킬은 마치 달리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무려 이동속도 300퍼센트의 상승이라니. 게다가 여타 아이템의 효과까지 더한다면 천휘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빛보다도 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스킬을 시전할 때 주위 상대에게 1초간 스턴을 먹일 수도 있어 잘만 이용한다면 공격 중에도 참으로 유용하게 쓰일 스킬이었다.
“림다일!”
쾅!
“헉!”
스킬을 시전하자마자 천휘의 몸이 굉음을 내며 앞으로 날아갈 듯 튕겨졌다.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천휘가 있던 자리에는 아주 희미하게 잔상까지 남아 있을 정도였다.
“큭! 이건 상상 이상이잖아!”
천휘는 마치 파뱃을 탄 것처럼 빠른 자신의 속도에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만약 천 제국에 있었다면 경공의 최고수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10분을 내달리자 전방에서 희미한 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양이 뿜어내는 환한 빛이 아닌, 어딘가 탁하고 음습한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빛이었다.
끼이익.
“어후, 이거 멈추는 것도 일이잖아?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네.”
아직까지 림다일로 인해 빨라진 움직임을 조절할 수 없었기에 천휘는 크게 휘청거리며 간신히 자리에 멈춰 섰다.
“큭큭, 이번에야말로 진짜겠지?”
분명 또 다른 갈림길은 없었다. 한마디로, 이제는 더 이상 마신에게 낚일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석상… 인가?”
천휘의 정면으로 거대한 현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의 양옆으로 멀리서부터 확인한, 탁한 빛을 뿜어내는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다행히 골렘은 아닌 모양인데?”
천휘는 조심스럽게 석상에 다가갔다. 보통 이런 던전에 세워진 석상은 골렘인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석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한 빛이 천휘로 하여금 약간 주눅 들게 만들 뿐이었다.
“날개가 달린 악마의 형상이라… 젠장, 여기까지 오면서 마수 이외에 인간 형태의 악마는 보질 못했는데. 설마 이 앞에 그런 악마들이 즐비하게 있는 건 아니겠지?”
천휘가 이곳 지저 세계에 발을 들이고 본 악마의 형상은 총 2개였다. 하나는 지저 세계의 입구로 향하는 동굴의 윗면에 새겨진 거대한 마신의 상이었고, 또 하나는 이곳 마신의 성으로 발을 들일 때 봤던 악마의 상이었다.
그 2개의 형상을 볼 때만 해도 천휘는 그저 흉측하게 생긴 조형물이라고만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의 이성을 휘감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여러 번 실감했던 탓이었다.
삐쭉.
“헉! 빌어먹을! 왜 이놈의 머리는 갑자기 서고 지랄이야!”
한동안 서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갑자기 하늘 높이 솟구쳤다. 천휘가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때 생기는 바로 그 기현상이었다.
“젠장! 악마고 뭐고, 내 앞길을 가로막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으아아악!”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만 가지고 지레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불안감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일. 천휘는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함성을 내지르며 눈앞의 현관문을 힘차게 밀어젖혔다.
“끄으윽… 젠장! 뭐야? 왜 안 밀리는 거야?”
그러나 그런 천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무하게도 문은 뒤로 밀리지 않았다.
끼익.
“…당기는 문이었구나.”
조금 전 문을 밀기 위해 용을 썼던 것이 민망하게 문은 잡아당기는 형태였다. 살짝 잡아당기자 마치 거짓말처럼 열리는 문.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마신의 성에선 볼 수 없었던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왔어?]
“엥?”
환한 빛무리와 함께 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성 입구에서 들었던 탁한 목소리와 달리 이질적이게도 소녀와도 같은 재기 발랄한 목소리였다.
[뭐야, 그 뻘쭘한 반응은? 안으로 들어와.]
“…….”
천휘는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10대의 어린 소녀들이나 할 법한 인테리어라니.
온통 분홍색으로 도배된 거대한 홀 안에는 분홍색 카펫으로 바닥이 물들어 있고, 거대한 악마의 석상들마저도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게다가 더욱 가관은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의자마저도 분홍색의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여자?”
아무리 눈을 비비고 쳐다봐도 분명히 거대한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이는 여자였다. 게다가 이 분홍색 방에 어울릴 법한 어린 소녀. 당연히 천휘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뭘 쳐다보는 거야? 마신 처음 봐?]
“진짜로… 마신?”
끄덕끄덕.
천휘의 물음에 어린 소녀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네.”
천휘가 발을 들여놓은 지저 세계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그 어떤 곳보다도 완벽하게 구현된 이 땅의 주인이 고작해야 열서너 살로 보이는 소녀라니.
천휘의 상식으로는 눈앞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뭘 한 방 먹었다는 거야? 설마… 마신이 어리바리하고 후줄근한 중년의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니.”
[오, 쉿! 말도 안 돼! 마신을 대체 뭐로 보고! 당신이 생각하는 마신의 이미지는 버려! 나같이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로 바꾸란 말이야!]
“…알아 모십지요.”
상식을 벗어난 마신의 모습이었지만 천휘는 그러려니 하고 천천히 문을 지나 홀 안으로 들어섰다. 실제로 그녀는 마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었다.
서양의 어린 소녀들을 보는 것처럼 이목구비가 인형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목소리 또한 콧소리가 섞여 애교가 철철 넘쳐흘렀다.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오히려 내겐 잘된 건가?’
만의 하나라도 보편타당한 모습의 마신이었다면 자신에게 크나큰 시련을 안겨 주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우려했던 것처럼 악마와 생사를 건 결투를 하라고 했을 수도 있고, 상급의 마수들을 떼거리로 풀어 자신을 해치우라고 명령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깜찍한 마신은 전혀 그럴 의향이 없는지 호기심이 만발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잘생겼는데? 너 내 가디언 할래?]
“…그냥 이대로 살랍니다, 마신님.”
[악! 그따위로 부르지 마! 소름 돋아! 마신 공주라고 불러!]
“…그러지요, 마신 공주.”
도무지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녀와의 대화에 천휘는 체념한 듯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여기에서 괜히 성질을 부렸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눈앞의 소녀는 깜찍하다고는 해도 분명 끔찍한 힘을 지닌 마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방인 주제에 여긴 무슨 일이야? 닌자 아저씨들과 사무라이 아저씨까지 처치하고 말이야. 게다가 몸에 걸치고 있는 건 내 컬렉션들이잖아?]
“흡!”
마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천휘는 온몸을 옭아매는 무형의 기운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마신이 무형의 기운을 흘려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듯했다.
[어라? 이건 또 뭐야? 네가 그건 또 왜 가지고 있어!]
마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휘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던 무한의 행낭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와 그녀의 손 위로 날아갔다.
[이건 암흑석이네? 이 귀한 걸 왜 네가 가지고 있지?]
“…….”
마신의 물음에도 천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옭아매는 무형의 기운에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입을 마음대로 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뭐야? 고작 그 정도에 몸이 굳어버린 거야? 그러면서 어떻게 닌자 아저씨들은 해치웠지? 그래 봬도 꽤 강한 피규어인데……. 흐음.]
‘피규어? 빌어먹을! 그 정도 실력자가 고작해야 너에게는 노리갯감이라는 거냐!’
마신의 말에 천휘는 속으로 크게 반발하며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대놓고 그녀를 쏘아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절대자.
누가 뭐라 해도 그녀를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도 누울 자리를 봐가며 누워야 하기에.
틱.
“허억, 허억.”
[자, 이제 말해봐.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지.]
마신이 살짝 손가락을 튕기자 마치 거짓말처럼 자신을 옭아매던 무형의 기운이 스르륵 사라짐을 느꼈다.
천휘는 마라톤을 한 것처럼 호흡이 가빠와 한동안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여야 했다.
[나 지금 좀 짜증나려 하거든? 어서 말해줄래, 이거 어디서 났는지?]
숨을 헐떡이던 천휘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어둠의 오러를 확인하며 힘겹게나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주… 신이… 헉헉.”
[주신? 라멘 녀석을 말하는 거야?]
끄덕끄덕.
[흐음,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그 녀석이 무슨 꿍꿍이지? 이걸 내게 선물한 의미는… 이 녀석에게 내 힘을 나눠주라는 건가? 진정으로?]
그녀의 반응으로 미뤄볼 때, 아무래도 암흑석은 주신과 마신 사이에 맺은 일종의 약속을 나타내는 증표인 듯했다. 게다가 주신 라멘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는지 그녀는 천휘가 진정으로 듣고자 했던 말을 하고 있었다.
“주신 라멘 녀석이 그걸 내게 주며 말했지요. 그걸 가져가면 마신이 그의 힘을 나눠줄 것이라고.”
[그가 아니고, 그녀!]
“…네, 그녀의 힘. 아무튼 그 때문에 저는 마신, 당신을…….”
[마신이 아니라, 마신 공주.]
“…마신 공주, 당신을 만나기 위해 아르니안 대륙에서 이곳 지저 세계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천휘는 간략하게 자신이 이곳을 찾은 목적을 알려 줬다.
천휘의 얘기를 들은 마신은 볼을 부풀리며 귀여운 얼굴로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어차피 약속했으니까 내 힘을 너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지만… 너 이방인이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문제 될 건 없지. 하지만 내가 나눠줄 힘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감당 못할 만큼의 힘을 나눠줄 수도 없지만, 여하튼 네게 무리가 가는 것은 사실이지.]
“상관없습니다. 어떤 고통이라도 달게 감수하죠.”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진감래라고 하지 않았던가. 쓰면 쓸수록 뒤에 따라오는 달콤함이 더할 터였다.
[…푸하하하! 얼굴 완전 웃긴다!]
“에?”
[쿡쿡쿡, 내 말에 잔뜩 긴장하는 꼴이라니.]
“그게 무슨…….”
[고통은 개뿔, 그따위 것 없어. 난 누구처럼 신의 믿음을 얻기 위해 이래저래 시련을 주고 시간을 끄는 것과 같은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아. 한 큐에 해결하지.]
그녀가 지칭하는 ‘누구’란 아무래도 주신 라멘을 지칭하는 듯했다. 주신 라멘을 믿는 사제나 성기사들은 전직을 하기 위해 수백 개의 선행을 해야 하는데, 그녀는 아무래도 그걸 빗대어 말하는 것 같았다.
[단, 한 가지 내놓아야 할 게 있어.]
“……?”
[네가 가지고 있는 주신 라멘 녀석의 표식.]
“주신 라멘의… 표식?”
마신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는 천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주신 라멘 녀석의 힘이 담긴 신물, 태양의 진실 말이야.]
“하아?”
태양의 진실은 향후 천휘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아군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대규모 강시 군단을 지휘할 그에게 있어 최고의 지지대가 될 터였다.
[어차피 내 힘을 부여받으면 그것은 너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게 돼. 생각해봐. 마신의 힘을 이어받은 자가 주신 라멘의 가호를 받을 수 있겠어?]
“…….”
듣고 보니 그녀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품 안에 있는 것을 쉽사리 넘겨줄 리 없는 천휘였다.
“내가 이걸 넘겨준다면, 당신은 내게 뭘 줄 거지?”
[어라? 지금 나랑 협상하자는 거야?]
천휘의 물음에 마신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한 눈빛이 조금 부담되긴 했지만 천휘는 이왕 막가기로 한 거 조금만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법! 그것이 세상의 순리지. 내게 있어 태양의 진실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 당연히 마신 공주, 당신도 그에 필적할 만한 무언가를 줘야 하지 않겠어?”
[쿡쿡, 확실히 배짱은 남다른데? 마신을 상대로 협상을 하는 걸 보니. 뭐, 그렇게 하지. 내 힘을 부여받은 자가 힘이 없어서 다른 이들에게 얻어터지고 다니면 나도 쪽팔리니까 말이야. 자, 이걸 받아.]
파앗.
“이건…….”
[어둠의 진실.]
“어둠의 진실…….”
[태양의 진실에 반대되는 나의 신물이야. 그 정도면 됐지?]
마신의 말에 천휘는 떨리는 눈빛으로 어둠의 진실의 옵션을 확인했다.
[어둠의 진실]
모든 어둠의 족속들을 다스리는 마신 캐리건의 신물.
마신 캐리건이 지닌 권능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파멸의 기운을 담고 있지만, 마신의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가 소유할 시에 소지자로 하여금 파멸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등급:신 내구력:없음
분류:액세서리
제한:파멸의 힘을 얻은 자
옵션:상대의 공격속도 100% 하락(디플릭 오라)
옵션:상대의 이동속도 100% 하락(슬러귀시 오라)
옵션:상대 공격 시 30% 체력 흡수(뱀피릭 오라)
옵션:상대의 물리 방어력 20% 하락(언디보션 오라)
옵션:상대의 물리 공격력 20% 하락(언커맨드 오라)
마신의 말처럼 어둠의 진실은 태양의 진실과는 정반대되는 효능을 지녔다. 태양의 진실이 아군의 힘을 상승시켜 주는 것이었다면 어둠의 진실은 적군의 힘을 하락시켜 주는 신물이었다.
즉, 천휘에게 있어 태양의 진실을 넘겨줘도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
[캬아,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넘겨줄 수가 있지? 확실히 세상 사는 법을 알아.]
“이제…….”
[좋아, 좋아! 어차피 피차 바쁜 몸들이니까 바로 내 힘을 부여해주지. 자, 받아.]
틱.
마신은 천휘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네줬다. 언뜻 보기에도 스킬북으로 보이는 그것은 천휘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차피 내 힘이라고 해봤자 내가 가진 고유의 힘을 줄 수는 없어. 나와 주신 라멘의 힘은 절대적으로 균형을 유지해야 하기에 내 힘을 고스란히 나눠줄 수는 없다는 말이야. 하지만 실망하지는 마. 그 책은 세상을 모두 멸할 수 있는 파멸의 기운이 담긴 책이니까.]
“파멸의 힘?”
[자, 이제 그 책을 펼쳐 봐! 너에게 신천지를 구경시켜 주지!]
마신의 말에 천휘는 조심스럽게 손에 들린 스킬북을 쳐다봤다. 확실히 마신의 힘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여느 스킬북들과는 그 외관부터가 달랐다.
보통의 스킬북은 겉표지가 아무런 문양이 없는 반면, 눈앞의 스킬북은 흉악한 악마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띠링! 신급 스킬 트리 ‘파멸의 미학’을 익히시겠습니까?]
스킬도 아니고 스킬 트리란다. 한마디로 말해, 한 가지 스킬이 아닌 여러 가지 스킬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휘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소리쳤다.
“당연하지!”
[띠링! 신급 스킬 트리 ‘파멸의 미학’을 익히셨습니다.]
[파멸의 미학]
마신 캐리건의 권능인 파멸의 힘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담겨 있는 스킬 트리. 파멸의 힘을 얻은 자, 세상의 어둠을 잠식할 수 있으리라! 세상의 양지가 아닌 세상의 음지에서 어둠은 꽃을 피우리라!
스킬 목록:파멸의 대지, 파멸의 축제, 파멸의 안식
스킬 목록:(잠금), (잠금)
“왔구나! 대박이 왔구나! 올 것이 왔구나!”
파멸의 권능이 담긴 진정한 마신의 무력.
천휘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지금의 기쁨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누가 쉰내 풀풀 풍기는 아저씨 아니랄까 봐, 그의 춤사위는 그야말로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아저씨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파멸의 권능을 얻은 그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