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지저 세계(1)
후루룩.
“빌어먹을 시영이 새끼. 진짜 길드전에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야?”
영완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겨우 캡슐에서 나오며 잠깐 눈을 붙이고는 오후 늦게 라면 하나를 끓여 컴퓨터 앞으로 가져와 앉았다.
그가 컴퓨터로 보고 있는 영상은 어제저녁 펜하르트 왕국에서 펼쳐진 임페리얼 길드와 사신 길드의 길드전.
이미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자신이 복수해야 할 그랜저의 임페리얼 길드가 게임상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니 잠시 짬을 내서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물리 공격력을 10분 동안 10퍼센트 상승시켜 주는 1천 골드짜리 ‘흑곰의 포효’ 스크롤은 물론이고 공격속도와 체력 회복속도를 동시에 10퍼센트 올려 주는 무려 3천 골드짜리 ‘거인의 외침’ 스크롤도 부지기수로 사용했네. 어라, 저건 또 뭐야? 저건 이번에 마탑에서 새로 개발한 ‘페어리의 기적’ 스크롤이잖아? 젠장, 저거는 한 장에 1만 골드짜리인데……. 그랜저 새끼, 진짜 『오벨리스크』에 환장했나!”
영완이 얼핏 보기에도 임페리얼 길드가 사용한 스크롤이나 전쟁 물자는 억 단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무려 수천 명이 모두 골고루 혜택을 받게 하다 보니 그 정도의 금전적인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정도로 네 힘을 알리고 싶었던 거냐?”
영완은 라면을 먹다 말고 영상에 언뜻 비치는 그랜저를 보며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사실 모두의 예상처럼 사신 길드는 임페리얼 길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물론 사신 길드가 펜하르트 왕국의 여타 군소 길드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어느 정도 숫자를 맞추었다고는 하나, 임페리얼 길드는 투 마스터만 수백 명에 이르고 트리플 마스터도 족히 수십 명은 되었다.
한마디로, 애초에 승패가 확연히 갈리는 전쟁이었다는 소리다.
물론 온전히 힘 대 힘의 격돌이었다면 전력을 총동원한 사신 길드로서도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가며 자신들의 저력을 보여 줄 수 있었겠지만, 순간적으로 몇 배는 강해진 임페리얼 길드를 상대로는 단 한 시간도 버틸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
압도적인 금력.
영상 안의 임페리얼 길드는 사신 길드에 비해 모든 면이 앞서 있는 모습으로 길드전을 순식간에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만…….”
후루룩.
마지막 남은 면발을 모두 입 안으로 빨아 당기며 영완은 영상을 종료했다.
“뒤통수 조심해라. 내가 쳐부수기 전에 엄한 녀석에게 당하지 말고.”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임페리얼 길드의 위용을 보고도 영완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무뎌져 가는 투지만 더욱 불태워줄 따름이었다.
그만큼 영완의 캐릭터 천휘가 현재 지닌 힘은 가공함 그 자체였다.
스파아앗.
[어라, 주인 왔나?]
“그래. 녀석들 농땡이 안 부리나 잘 감시하고 있었지?”
[당연하다, 주인. 이 오베른,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했어.”
오베른을 칭찬한 천휘는 한쪽에서 딱 달라붙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쥬얼리와 싸가지에게 다가갔다.
“어때? 이제 좀 친해진 것 같아?”
[다- 당연합니다, 주인님. 저희가 언제는 친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주인님. 저희는 이렇게 친해요.]
와락.
“큭큭큭.”
이전에 접속을 종료하기 전 천휘는 괜한 장난기가 발동해 두 강시로 하여금 서로를 끌어안도록 명령했다.
소드엠페러이자 고대 하스렌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싸가지 슈트라카이젠, 그리고 8서클 대마법사이자 하이 엘프들의 여왕인 쥬얼리 데보타.
두 강시들은 살아생전에 누렸던 명예와 권력 때문에 서로 섞이지 못하는 물과 기름처럼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이전까지는 두 강시의 사이가 좋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던 천휘였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명색이 마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던전이었다. 그런 곳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힘을 하나로 모아 이 위험스러운 던전을 클리어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때문에 천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바로 두 강시에게 자신이 없는 사이에 계속해서 끌어안고 있도록 지시한 것.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보이는 오베른이 있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뭐, 너희 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다는 걸 명시해. 만약 내 눈앞에서 두 번 다시 말다툼을 벌이면 그때는 아주!”
[꿀꺽.]
[아주…….]
“둘이 신방을 차려 줘버릴 테니까!”
[커헉!]
[으헛!]
천휘의 말에 싸가지 슈트라카이젠과 쥬얼리 데보타는 기겁을 하며 서로 떨어졌다.
“큭큭. 자, 이제 그만 장난하고 이리 모여 봐.”
[오, 주인! 목소리가 변했다!]
천휘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오베른이 놀라워하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이 마신의 동굴에 들어선 지도 벌써 이틀째야. 하지만 놀랍게도…….”
[동굴의 끝이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맞아, 사실이야. 게다가…….”
[우리를 즐겁게 해줄 마수나 몬스터도 보이질 않고 있어요.]
데보타의 말처럼 이틀이나 이 동굴에서 헤매는 동안 천휘는 단 한 차례도 몬스터를 보지 못했다.
처음 이 동굴에 들어설 때만 해도 케르베로스 이상의 엄청난 마수들이 득실거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예상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는 그저 마신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종의 경계 같아. 마신의 힘이 아르니안 대륙으로 들어서는 일종의 교차점인 셈이지. 조금만 더 힘내자. 싸가지, 네 녀석은 계속해서 앞을 살펴보고.”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틀이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동굴을 거닌 일행이지만 천휘의 말에 일체 군말도 없이 곧바로 발길을 옮겼다. 오베른은 충성심으로, 싸가지와 쥬얼리는 두려움으로 천휘를 따르고 있었다.
다시 반나절이 흘렀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동굴이었지만 천휘는 현실의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대충 『오벨리스크』상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있었다.
[주인님.]
“응?”
무료하게 걷던 일행은 별안간 굳은 어조로 말하는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을 바라봤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어조는 진중하기 짝이 없었다.
[이 앞에서 온몸을 저며 오는 강대한 기운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온몸을 저며 오는 강대한 기운이라… 드디어 마신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건가?”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의 말에 천휘는 드디어 경계를 벗어나 마신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싸가지, 앞장서!”
[알겠습니다, 주인님!]
천휘의 명령에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에 나머지 일행도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10분쯤 전진하자 선두에서 달리던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터벅터벅.
“저곳인가…….”
우우우웅.
일행의 전면에 거대한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껏 지나왔던 비좁은 통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천장이 높고 거대한 규모의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고, 그 뒤쪽에는 광장 벽면에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석상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마치 내 영혼이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주인]
“…….”
오베른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이곳은 분명 현실이 아닌 게임 속에 구현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천휘는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영혼의 속삭임.
천휘 자신의 영혼이 저 구멍 안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착각마저 일고 있었다.
[지저 세계의 입구인가 봐요.]
“지저 세계?”
발이 저절로 떨어져 구멍으로 향하려 하던 찰나, 쥬얼리 데보타의 말에 천휘는 정신이 번쩍 들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오래전, 그러니까 이 아르니안의 모든 생명체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던 오래전의 일이에요.]
“아르니안의 모든 생명체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던 시절이라… 고대 하스렌 제국이 건국되기도 전의 일인가?”
[적어도 반만년은 더 지난 일이에요.]
“반만년…….”
흡사 우리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하는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을 지칭하는 단어에 천휘는 입을 다물었다. 직감적으로 지금부터 데보타가 하는 말이 저 악마의 아가리처럼 지독히도 컴컴한 과거의 잔상을 들춰내는 것이라는 걸 미리 짐작한 탓이었다.
[어린 시절, 엘레이든 도서관의 고대 서적에서 이 지저 세계에 대한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나요.]
“뜸들이지 말고 말해.”
계속해서 말을 빙빙 돌리는 쥬얼리 데보타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며 재촉했다.
[지옥의 땅.]
“지옥의 땅?”
[네, 제가 읽은 그 서적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짧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글귀였다.
쥬얼리 데보타의 그 의미심장한 말에도 천휘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 정도의 페널티는 이미 감수하고 있어. 저 안에서 날 맞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 해도 난 마신의 힘을 꼭 손에 넣고야 말겠어!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날 배신한 두 연놈들을 위해!’
지옥의 땅이 아니라 그 할아비라고 해도 전혀 겁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영과 희영, 두 연놈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 더 겁이 날 따름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 『오벨리스크』의 세계. 지옥의 땅이라고 해봤자 별것 아닐 것이란 생각에 천휘는 곧바로 지저 세계의 입구로 보이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접근했다.
“지옥의 땅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난 저 안에 도사리고 있을 지옥의 괴물들을 모조리 처치해서라도 마신의 힘을 얻고야 말 거니까. 싸가지! 쥬얼리! 그리고 오베른!”
[네!]
[네, 주인님.]
[왜 그러는가, 주인?]
“이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날 보호할 생각 마라! 이제부터 너희의 도움 따위는 바라지 않겠어! 오로지 내 힘만으로 마신의 힘을 얻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할게요, 주인님.]
[걱정되지만 주인의 앞날을 위해 그렇게 하겠다.]
세 강시의 확답을 들은 천휘는 지저 세계의 입구라는 암흑의 구렁텅이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천휘, 마신의 땅으로 들어서다!
* * *
끼아아악!
그르르.
크워어엉!
사위가 온통 어둠으로 물든 죽음의 대지.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이라고는 시체를 찾아 헤매는 까마귀 떼와 먹물을 연상시키는 시커먼 먹구름뿐이었고, 대지에는 집채만 한 크기의 마수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참혹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휘익, 탁.
탁. 탁. 탁.
그 죽음의 땅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들이 들어섰다.
지저 세계의 입구를 통해 지저 세계, 즉 마신의 땅으로 들어선 천휘와 그의 강시들이었다.
그르.
낯선 이방인들의 출현에 마수들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물어뜯는 행위를 멈추고 그들을 쳐다봤다.
[주인…….]
“…나도 알아.”
오베른의 나지막한 부름에 천휘도 긴장한 듯 대답했다.
“젠장! 이건 어찌해볼 수준의 숫자가 아니잖아?”
황량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대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괴상망측한 모습의 마수들뿐이었다. 하나같이 심연의 밀림에서 봤던 녀석들보다 몇 배는 강해 보이는 것이, 자칫 잘못했다가는 마신의 힘을 얻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인님?]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의 물음에 천휘는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대답했다.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아. 내 앞을 가로막는 건 무엇이라도 쳐부순다!”
천휘의 살심이 담긴 명령에 세 강시의 눈에 번들거리는 혈광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천휘가 품고 있는 살기에 세 강시도 반응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만큼 천휘와 세 강시들을 이어주는 영성의 끈이 밀접해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모든 것은 주인의 뜻대로!]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주인님!]
“각자 살아서 만나자! 타하앗!”
천휘가 먼저 마수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뛰어들자 싸가지 슈트라카이젠과 오베른도 각기 무기를 들고 반대편으로 쇄도했고, 쥬얼리 데보타는 하늘 높이 솟구쳤다.
[파이어 스톰(Fire Storm)!]
하늘로 솟구친 쥬얼리 데보타의 손에서 강대한 마나의 유동이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밀집한 마수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염의 폭풍.
화염에 닿는 모든 것을 연소시키는 마법의 위력에 마수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드래곤 스크류!]
그러한 쥬얼리의 활약에 고취된 오베른도 강력한 스킬을 구사하며 마수들을 유린했다.
마수들은 하나같이 중급 이상의 강대한 녀석들이었지만,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검에 담긴 오러 블레이드가 어김없이 녀석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휙. 휙.
쥬얼리 데보타와 오베른이 강력한 마법과 스킬을 구사하며 대량의 마수들을 처치하고 있을 때,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은 자리를 고수하며 몰려드는 마수들을 단 한 번의 찌르기로 모두 처치했다.
어찌나 많은 마수들을 처치했는지 그의 주위에는 마수들의 시체가 쌓여 산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강시들이 눈부시게 활약하며 중급의 마수들을 처치하고 있을 때, 천휘는 수많은 마수들 사이를 오가며 마수들의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젠장!”
크워어엉!
천휘의 주변에는 마치 곰을 연상시키는 마수 한 마리와 들소를 연상시키는 마수 한 마리가 경쟁적으로 천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두 녀석 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가죽 때문에 천휘의 공격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스킬만 있었어도!”
마령혈천권법을 익히려는 와중에 모든 스킬이 사라진 천휘는 중급 마수들을 상대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다른 강시들은 저마다 엄청난 활약으로 수천 마리에 달하는 마수들을 빠르게 해치워나가고 있는데 자신은 고작해야 2마리의 마수도 처치하지 못하고 쫓기는 형편인 탓이었다.
[주인! 내가 도와줄까?]
“오지 마! 좀 전에 내가 했던 말 잊지 마!”
도망만 다니는 천휘가 안타까웠는지 오베른이 자신 주변의 마수들을 처치하며 소리쳤지만 천휘는 단칼에 그의 권유를 끊으며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마수들을 노려봤다.
‘이렇게 쫓길 수만은 없어! 되든 안 되든 해보는 거야!’
쫓기던 천휘의 신형이 재빠르게 돌자 순식간에 마수들과의 거리가 좁혀지며 금방이라도 녀석들의 거대한 동체에 튕겨져 나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하앗!”
그러나 천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눈을 감지 않고 녀석들의 움직임을 똑바로 쳐다보며 찰나의 순간에 옆으로 몸을 비틀어 들소의 형상을 한 마수의 돌격 공격을 피해냈다.
꽈아앙!
크워어엉!
거기에 더해 오러를 끌어올려 돌격해오는 마수의 미간에 강력한 카운터 공격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고 날아든 카운터 공격 탓일까, 아니면 마수의 급소가 미간이었던 탓일까?
들소 형상의 마수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좋았어! 이크, 젠장! 녀석은 또 언제!”
크아아앙!
부웅.
한 마리의 마수를 처치했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곰 형상의 마수가 천휘에게 접근해 포효를 터트리며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크윽!”
살짝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들어온 공격이라 천휘는 녀석의 공격을 완벽히 피해내지 못하고 옆구리가 움푹 파이고 말았다.
전신을 관통하는 끔찍한 고통에 천휘는 신음을 흘리며 발을 놀려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주인!]
[주인님!]
[…….]
그 광경을 목격한 오베른과 데보타가 애타게 소리쳤다. 싸가지 슈트라카이젠도 말은 없었지만 굳은 얼굴로 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천휘는 가볍게 오른팔을 들며 녀석들의 걱정을 무마시켰다.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이 지옥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아집일 수도 있고 만용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러한 진흙탕에서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이후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해질 수 있을 터. 비록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이 가상의 공간이긴 하지만 정신적인 단련은 오히려 이곳이 더 나아. 강해지겠어! 두 연놈에게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이야아압!”
크아아앙!
천휘의 기합 소리를 들었음인가? 곰 형상의 마수가 천휘를 향해 돌진했다. 그에 대응하듯 천휘도 기합을 내지르며 녀석에게로 쇄도했다.
‘녀석의 가죽은 이전의 마수보다 훨씬 더 단단해! 내 주먹으로는 녀석을 처치할 수 없어! 녀석의 가죽을 부술 만큼 단단한 무언가가 없을까?’
몇 번의 부딪침으로 곰 형상 마수의 가죽이 더욱 단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 천휘였다. 녀석의 가죽만큼은 제아무리 카운터 공격이 완벽한 타이밍에 꽂힌다 해도 자신의 주먹만으로는 타격을 입히기 어려울 터였다.
크아아앙!
천휘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마수가 코앞에까지 이르렀다. 녀석의 지독한 입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순간적으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은 천휘는 마수의 미간을 향해 팔꿈치를 내리찍었다.
콰앙!
짧지만 강렬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당연히 뒤따라야 할 비명이나 신음이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다.
“후욱, 후욱.”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마수의 두개골이 함몰되며 녀석이 즉사했다. 심지어 비명조차 못 지르고 처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띠링!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띠링! 칭호 퀘스트 ‘마수 학살자’가 발동되었습니다.]
심연의 밀림 심처에만 서식하는 마신의 추종자, 마수.
원체 단단한 가죽과 맷집은 물론이고 마신의 힘을 부여받아 끔찍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마수 1천 마리를 처치해 아르니안 대륙 최초로 마수 학살자의 칭호를 얻어라.
난이도:A-
기한:없음
보상:칭호 ‘마수 학살자’
“마수 학살자?”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알림음에 천휘는 의아한 얼굴로 멍 때렸다. 하지만 이내 주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에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움직였다.
찍찍찍.
눈앞을 새까맣게 뒤덮은 것은 진돗개 크기에 들쥐 형상을 한 엄청난 숫자의 마수들.
이제까지 상대해온 마수들에 비해 크기는 작았지만 삐쭉 튀어나온 날카로운 한 쌍의 앞니는 천휘로 하여금 녀석들이 만만치 않은 녀석들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와라! 주먹이 안 되면 팔꿈치로! 팔꿈치가 안 되면 이로 물어뜯어서라도 처치해줄 테니!”
조금 전 곰 형상의 마수를 상대하며 천휘는 새로운 전투 방식에 눈을 떴다.
개싸움.
진흙탕에서 온몸을 이용해 치열하게 치고받는 개싸움이야말로 지금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전투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