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장. 그녀의 진심 (31/82)

제10장. 그녀의 진심

“흐음, 그러니까 네 말은 운영자가 네게 직접 제안을 했단 말이지? 그것도 최고 운영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렇다니까. 아무튼 이거 빅뉴스야. 『오벨리스크』의 신들은 죄다 운영자다, 뭐 이런 거?”

영완의 말에 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제법 뉴스거리가 되겠는데? 여태까지 유저들은 『오벨리스크』의 운영자들이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정호, 네 말이 맞지만 떠벌리고 다닐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왜?”

준우의 말에 영완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생각해봐. 아직까지 그러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런 사실이 드러나 봐라. 그럼 운영자 측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냐?”

“그냥 누군가가 사실을 알아냈다고 생각하겠지.”

“야, 이 바보야! 선생씩이나 되는 놈이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

“내가 뭘!”

준우의 핀잔에 영완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소리 낮춰. 여기 네 집 안방 아냐.”

“알고 있어, 인마.”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영완네 집 근방의 호프집이었다. 오랜만에 주말에 모여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할 겸 찾은 것이다.

“아무튼 밝히는 건 안 돼.”

“그러니까 왜?”

“잘 생각해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유저가 몇 명이나 되겠냐?”

“많지 않겠지.”

“그래. 그럼 운영자 측에서 그 많지 않은 유저들 중에서 그 사실을 퍼트렸다고 생각할 거 아냐.”

“그게 뭐 어때서?”

준우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 듯 정호가 물었다.

“아무래도 좀 불이익이 있겠지.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말이야.”

“바로 그 점이야. 그러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인 것 같다. 어차피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흐음, 확실히 준우 말이 맞네. 큭큭. 아무튼 우리 세 사람 다 착실하게 강해지고 있구나.”

“세 사람 다? 그럼 너도 강해지고 있다는 소리냐?”

영완의 질문에 정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이 몸이 이번에 드디어 히든 클래스로 전직했다는 거 아니냐.”

“히든 클래스?”

정호의 말에 준우가 놀란 듯 소리쳤다. 어찌나 컸는지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테이블을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미쳤냐? 왜 소리쳐!”

“그럼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 히든 클래스를 얻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오벨리스크』는 여느 게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지만, 히든 클래스의 숫자는 무척이나 적었다. 아니, 적다기보다 히든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탓에 유저들이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여하튼 히든 클래스를 얻는 것은 그만큼 특별하고 놀랄 만한 일이었다.

“어떻게 얻은 거냐?”

“다 네 덕분이지. 네 말대로 팔라딘에서 다크 팔라딘으로 전직한 후 혼원신공을 꾸준히 수련하면서 팔라딘과 다크 팔라딘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데 중점을 뒀다. 그 결과, 레벨이 300을 넘으면서 카오스 팔라딘이라는 히든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게 된 거고.”

정호의 말에 영완이 그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축하해주었다.

“고생했다. 이제 너도 먼치킨 캐릭터로 한 걸음 다가선 거야.”

“큭큭, 알고 있다. 그나저나 준우 너는 어떻게 됐냐?”

대화의 중심이 정호에서 준우로 이어졌다.

정호의 물음에 준우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세이지로 승급하고 현재 진 마탑에서 열심히 마법을 수련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오행신공도 꾸준히 수련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큰 진척은 없는 상황이다. 좀 더 기다려 봐야지.”

“걱정 마라. 너도 다 잘될 거다. 저 무식하고 아줌마만 밝히는 정호 자식도 히든 클래스를 얻었잖냐.”

“큭큭, 그건 그래.”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다소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가 영완의 농담 한 번에 즐겁게 변했다.

그 후로도 세 친구는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크윽. 아, 간만에 마셨더니 좀 취하네.”

저녁 7시에 모여 자정이 다 되도록 술을 마신 셋은 그대로 호프집에서 헤어졌다.

준우와 정호 녀석은 일부러 차를 가져오지 않아 함께 택시를 타고 사라졌고, 영완은 술도 깰 겸 천천히 밤이슬을 맞으며 집까지 걸어갔다.

뒤적뒤적.

“흐음, 열쇠가 어디 있더라?”

집 근처에 다다른 영완은 열쇠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찾았다! 어라? 넌!”

“오랜만. 그동안 잘 지냈어?”

영완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그의 앞에 웬 낯익은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미연이 아냐? 우아, 되게 오랜만이네?”

그녀는 다름 아닌 희영의 친구 미연이었다.

평소라면 그녀에게 모질게 대했으련만 술도 한잔 걸쳤겠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냈겠다 한껏 달아오른 영완으로서는 그런 그녀와의 만남도 무척이나 반가울 따름이었다.

“너 아직도 희영이 좋아하니?”

“…….”

술이 확 깨는 미연의 물음에 영완은 아무 말 없이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지?”

“내가 이런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넌 지금 희영이 그것한테 속고 있는 거야.”

“…계속해봐.”

이미 희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영완이었기에 그녀의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팍팍 와 닿았다.

“내가 그년이랑 친해서 너와 소개팅한 줄 알아? 천만에! 그년은 날 이용해서 널 골탕 먹이려고 한 거야. 자신을 좋아하는 네게 그런 식으로 상처 주기 위해 날 불러낸 거라고!”

“…….”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도 그년한테 속았어. 그년은 예전에 내 애인을 뺏어간 못돼 처먹은 년인데 내가 왜 그년을 도와줬겠어? 난 그년이 널 좋아한다기에 널 꾀어 그년에게 상처를 주려 한 거라고!”

“그럼 처음에 내게 관심 있는 척한 건 다 날 유혹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냐?”

미연의 말에 영완은 차가운 말투로 되물었다.

“처음에는 그랬었지. 하지만…….”

“하지만 뭐?”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네게 진심으로 끌리기 시작했어. 그리고 희영이가 날 가지고 널 골탕 먹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널 좋아하게 됐고.”

“왜, 그런 여자에게 놀아나는 내가 불쌍해 보여서?”

“너… 알고 있었구나?”

영완의 반응에 뭔가 눈치 챈 듯 미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최근에 알아버렸다, 그년이 얼마나 못된 년인지!”

“…….”

“무려 2년간이나 짝사랑해오던 여자였어. 천생 여자이고, 그 누구보다 고운 마음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단 한 번에 그런 믿음이 깨져 버렸어! 제기랄!”

팍!

영완이 울부짖듯 그렇게 소리쳤다. 어찌나 분통했는지 거칠게 오피스텔 외벽을 후려칠 정도였다.

“헙!”

주먹에서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괴로워하던 영완의 등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미연, 그녀가 뒤에서 살포시 영완을 안은 것이다.

“화내지 마. 네가 화내면 내가 더 슬퍼져.”

“…….”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영완의 분노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그 자세로 서 있다가 헤어졌다.

서로 애틋한 마음만을 남겨 둔 채…….

다음 날.

영완은 해가 중천에 뜬 정오가 되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어젯밤 먹은 술로 인한 숙취가 사라진 상태임에도 여전히 이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그건 무슨 의미일까?’

영완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여인의 향기, 여인의 온기.

그 모든 것을 떠나 영완이 궁금한 것은 대체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희영, 그년의 개수작일 수도 있어. 그년은 그러고도 남을 년이야.’

무려 2년 동안이나 안면 몰수하고 자신을 골탕 먹여 온 여자였다. 게다가 아직까지 자신이 그녀의 진상을 알게 된 것도 모르고 있었기에 그런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어.’

마음속으로는 또다시 희영에게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미연의 촉촉했던 눈망울이 잊히지 않았다.

‘진심이었을까?’

사실 첫인상만 좀 나빴지, 그녀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오벨리스크』 안에서 엿볼 수 있는 순수함으로 인해 호감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완은 선뜻 마음을 열 수 없었다. 이미 한번 제대로 데인 탓에 마음의 문이 너무도 굳건히 닫혀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화악.

“내가 이런 고민해봤자 뭐 하냐. 어차피 결론은 나 있는 것! 에라, 『오벨리스크』나 하자!”

영완의 마음이야 어떻건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영완은 더 이상 희영과 관련된 그 어떠한 것과도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그녀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미연이라 할지라도…….

* * *

“오베른! 아직도 멀었냐?”

[거의 다 정리되어간다, 주인! 조금만 기다려라! 흐아아앗!]

현재 천휘와 강시들은 근거지를 떠나 심연의 밀림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밀림에 존재하는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 때문에 이동속도는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크 트롤과 다크 오우거의 영역에서 벗어나자마자 엄청난 숫자의 다크 스콜피언에 맞서 강시들이 접전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1백 기나 되는 돌쇠들과 일당백, 아니 일당천은 거뜬한 오베른과 싸가지, 그리고 쥬얼리의 활약으로 인해 큰 위험은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동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주인님.]

“그래, 수고했어. 그나저나 이 밀림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이 살고 있는 거야? 이대로는 가도 가도 끝이 없겠어.”

천휘의 푸념에 쥬얼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주인님, 제가 한번 힘써볼까요?]

“어떻게?”

다른 이라면 몰라도 8서클 마스터인 쥬얼리라면 분명 묘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천휘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 밀림에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은 전반적으로 마신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요. 한마디로 말해, 밀림 전체가 마신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죠.]

“서론은 짧게.”

[네, 주인님. 아무튼 제가 익히고 있는 8서클 마법인 디바인 생츄어리를 전개한다면 녀석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할 거예요.]

“디바인 생츄어리?”

8서클 마법들은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알려진 바가 적었다. 때문에 천휘 역시 8서클 마법인 디바인 생츄어리의 효능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었다.

[본래는 사제들이 쓰는 신성 마법인데, 마법사들이 쓸 수 있게 변형된 마법이에요. 하지만 마나의 형질이 다른 탓에 저와 같은 8서클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시전할 수 있죠.]

“네 잘난 체는 그만 하면 됐고, 어찌 됐든 그런 마법이 있다면 얼른 시전해봐.”

[알았어요, 주인님.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게 뭔데?”

문제가 있다는 쥬얼리의 말에 천휘가 되물었다.

[사제들과 달리 마법사인 제가 구현해내는 디바인 생츄어리는 다소 범위가 작아서 저 돌쇠들에게까지 효과를 보일 수는…….]

한마디로, 돌쇠들을 역소환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천휘는 곧바로 돌쇠와 변강쇠를 아공간으로 역소환했다.

“이제 됐지?”

[네, 주인님. 그럼 시작할게요.]

“알았으니까 잡설 말고 마법이나 펼쳐.”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밀림의 몬스터들이 빽빽이 밀집해 있는 위험 지대. 당연히 빨리 서둘러야 했다.

“…을 말살하는 신성한 기운을 이 땅에 내리실지니, 디바인 생츄어리(Divine Sanctuary)!”

웅웅웅.

스파아앗.

쥬얼리의 캐스팅이 끝나자 천휘와 강시들 주변으로 희뿌연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온몸을 청명하고 맑게 정화시켜 주는 느낌에 천휘는 눈을 감은 채 그 기운을 만끽했다.

“역시 쥬얼리! 대단해!”

[별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아냐, 아냐. 이번에는 정말 수고했어. 그런데 혹시 이 마법, 이 땅에만 펼쳐지는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이동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거 아냐?”

날카로운 천휘의 지적에 쥬얼리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마 8서클 마스터인 제가 그런 실수를 범했겠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이 마법을 조금 변형해 이 땅이 아닌 주인님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해서 이동해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

“흐음, 그래? 좋아, 다 좋은데… 너 조금 전 표정, 좀 위험했다.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표정 지으면 바로 피리 불어버릴 거다. 조심해.”

[죄- 죄송해요, 주인님.]

“자, 그럼 이제 마음 놓고 마신의 성까지 가보실까?”

천휘의 말에 쥬얼리는 물론 싸가지마저 얼굴이 굳었다. 역시나 한시라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됐다.

두 강시는 다시 한 번 그 점을 숙지하며 천휘의 뒤를 따랐다.

천휘와 세 강시들은 그대로 밀림 깊숙한 곳까지 이동했다. 쥬얼리의 마법 덕택에 몬스터들로부터 습격을 받지 않아 빠르게 발을 놀린 덕분이었다.

“여기부터는 암흑 투기가 더욱 짙게 깔려 있단 말이지?”

[그렇다, 주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암흑 투기가 짙다.]

[이곳과 저곳의 차이는 대략 2배에서 3배 정도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아마 저 안쪽의 밀림에는 몬스터가 아닌 하급의 마수들이 서식하고 있을 겁니다.]

“흐음.”

오베른과 싸가지의 말에 천휘는 뭔가 고심하는 듯 눈을 감았다.

“똥개 녀석에 버금가는 마수들이 서식하는 곳이라. 이제 나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자, 출발하자. 이제부터 싸가지가 일행의 선두에서 우리를 이끌어라.”

[그 말씀은…….]

“마음껏 날뛰어도 좋아. 네가 감지할 수 있는 몬스터는 모조리 죽여도 좋다는 소리야.”

[그게 정말이십니까?]

“물론. 단, 녀석들을 죽이더라도 아이템은 꼭 챙겨 와야 한다. 여기 무한의 행낭도 가져가.”

[알겠습니다, 주인님. 걱정 마십시오.]

그동안은 녀석이 나설 데가 없었다. 오베른의 지휘하에 움직이는 돌쇠들의 힘으로 밀림을 헤쳐 온 탓이다. 때문에 천휘의 주변을 지켜야 하는 싸가지는 전투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베른, 주인님을 지킬 수 있겠나?]

[내 실력을 못 믿는 것인가? 여기는 걱정 말고 마음껏 날뛰다 와라.]

[고맙다.]

천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싸가지는 곧바로 오베른에게 천휘를 부탁하고는 밀림 안으로 사라졌다.

“자식, 진짜 많이 굶었나 보네. 역시 괜히 폭군이 아니라니까.”

이제는 점점 잊히고 있지만, 녀석은 생전에 폭군이라 불리던 희대의 악마였다. 그가 그 당시만 해도 전무후무한 소드엠페러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피에 대한 욕망과 열망이 그 누구보다 대단한 덕이었다.

피를 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피를 보기 위해 국정에 소홀히 한 탓에 나라마저 말아먹은 위인이 바로 그였다.

소드엠페러 싸가지.

그의 검이 심연의 밀림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휘익.

푸슛.

크워어어.

쿠웅.

[후웃, 간만의 운동이라 아직 몸이 제대로 덜 풀렸군.]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의 레이피어가 거대한 코뿔소를 연상시키는 마수의 미간을 꿰뚫고 지나갔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 거대한 동체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일단 아이템을 챙기고. 다음은 어디에 있지? 흐음, 이제 별로 개체 수가 많지 않네.]

심연의 밀림, 그것도 마신의 성과 맞닿아 있는 밀림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마수들은 백 단위가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반나절 만에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은 절반 이상의 마수들을 처치했다.

원 샷 원 킬(One Shot One Kill).

지금의 녀석은 그 말로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 * *

“이 자식, 늦네.”

[아무리 그라 해도 마수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겠지. 그래도 주변에는 마수들이 없는 것 같으니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나?]

“그러자. 어차피 싸가지 녀석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테니 금세 찾아오겠지.”

밀림의 경계에서 꼬박 하루를 기다리던 천휘는 오베른의 말대로 마신의 성으로 먼저 이동하고자 마음먹었다.

‘드디어 마신의 무력을 얻는 것인가?’

이곳까지 오면서 천휘는 그저 보호받기에 급급했다. 마령혈천권법의 영향으로 모든 공격 스킬이 사라진 탓에 몬스터를 해치울 만한 스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마신의 무력을 얻게 될 것이다.

아르니안 대륙 최강의 무력을!

“궈궈씽!”

[응?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주인? 궈궈씽이라니?]

[매우 이국적인 말이네요. 뭔가 경쾌한 말 같은데 어떤 의미죠, 주인님?]

무심코 현실에서의 말이 튀어나와버린 천휘는 두 강시들의 질문에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 귀찮아. 그냥 따라와. 뭐가 그렇게 궁금해!”

[흑, 주인은 너무 매정하다. 물어도 안 가르쳐 주고!]

[너무하세요, 주인님. 배움은 곧 미덕이라는 말도 모르세요?]

두 강시의 끈질긴 공세에도 천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밀림을 가로질렀다.

[주인님.]

“오, 싸가지. 마수들은 다 처치했냐?”

[거의 다 처치하고 이제 딱 한 마리 남았습니다.]

“그래?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싸가지야. 그건 그렇고, 아이템은 다 챙겨 왔지?”

천휘에게는 싸가지가 마수를 처치한 것보다 얼마나 좋은 아이템을 챙겨 왔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제는 똥개로 전락해버린 마수 시벨리우스도 무려 레어 활을 드롭했으니, 이곳의 하급 마수들도 그 정도의 아이템을 드롭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 모두 챙겨 왔습니다.]

“좋아, 좋아. 그렇게만 해.”

싸가지로부터 무한의 행낭을 건네받은 천휘는 흡족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무한의 행낭을 걸어 찼다.

“그럼 그 마지막 남은 마수 한 마리는 어디에 있지?”

[저기 보이는 바위산 근방에 있습니다.]

“저 바위산 부근이면…….”

[아무래도 마신의 성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는 문지기 마수인 것 같은데요?]

심연의 밀림 끝에는 거대한 바위산이 병풍처럼 밀림을 감싸고 있고, 그 바위산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3개나 있어 멀리서 보면 흡사 중세의 성곽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마신의 성이었다.

“이번에는 더 강한 마수일 수도 있겠네. 모두 긴장하고 마지막 보스를 잡으러 가보자고.”

일행은 싸가지를 필두로 천천히 마신의 성에 다가갔다.

“저거 왠지 사람의 얼굴 형상 같지 않아?”

[흐음,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주인. 바위산 중턱에 뚫린 세 개의 동굴을 보고 있자니 인간의 눈과 입이 연상된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오베른의 말처럼 천휘도 3개의 동굴을 보며 인간의 눈과 입을 떠올렸다. 게다가 위쪽의 3개의 봉우리까지 더해지니 그것은 마치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유령처럼 보일 정도였다.

[엄마!]

“…뭐야, 갑자기?”

한참 동안 바위산을 보던 쥬얼리가 갑자기 비명을 내지르며 천휘에게로 달려들었다.

[무서워요, 저 바위산.]

“…뭐 하는 생쇼인지는 모르겠다만, 좀 떨어져 줄래?”

혼자서 다크 트롤 수십 마리를 몰살시킨 8서클 마스터가 고작해야 유령 형상을 띤 바위산에 겁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에 천휘는 차갑게 말하며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정말이에요! 저 어렸을 때부터 유령 무서워했단 말이에요!]

“…어렸을 때라면, 수백 년 전부터?”

끄덕끄덕.

천휘의 물음에 쥬얼리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알았어. 그럼 넌 마신의 성에 들어서기 전까진 아공간으로 돌아가 있어. 아공간 오픈, 쥬얼리 역소환!”

바위산을 무서워하는 쥬얼리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낸 뒤 천휘는 다시금 발길을 재촉했다.

“오베른, 네가 보기에는 저 마녀가 유령 따위를 무서워해도 된다고 보냐?”

[내가 보기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다.]

“큭큭, 그렇지? 아무튼 참 별나요. 뭐, 그건 그거고, 저기가 마신의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가 보지? 저건 아까 말한 문지기 마수이고.”

쥬얼리가 아공간으로 들어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천휘의 눈에도 마신의 성 입구와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 마수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케르베로스이긴 케르베로스인데… 큭큭, 사자 대가리 세 개 달린 케르베로스인 거냐?”

흔히들 마계의 문지기를 일컬어 케르베로스라고 한다.

케르베로스는 개와 비슷한 동체에 개 대가리가 셋 달린 마수로서, 마계의 유황불을 입에서 뿜어낼 수 있는 전설 속의 마수였다.

하지만 마신의 성 입구를 지키는 케르베로스는 좀 달랐다. 개 대가리가 있어야 할 곳에 사자 대가리가 있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몸통은 호랑이처럼 줄무늬를 띠고 있었다.

“뭐, 돌연변이라도 케르베로스라면 강할 테니 다들 방심은 금물이야. 알겠지?”

[알겠다, 주인.]

[제 사전에 방심이란 없습니다, 주인님.]

“쿡. 쿡. 쿡.”

마신의 성 입구에 다다를수록 천휘는 더욱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입을 틀어막고 쿡쿡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케르베로스의 형상이 보면 볼수록 웃음보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자 대가리가 따닥따닥 붙어 있는 모습하며 호랑이의 몸통인 듯 줄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몸통, 그 절묘한 부조화가 천휘를 자극하고 있었다.

야옹.

“쿡쿡쿡, 으하하하! 야옹이래, 야옹! 사자 대가리에서 야옹이래! 으하하하!”

천휘 일행이 마신의 성 50미터 앞까지 전진하자 케르베로스가 별안간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 포효 소리란 귀여운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결국 천휘는 힘들게 참았던 웃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야 말았다.

“으하하하! 아이고, 배야! 저거 누가 만든 마수야? 진짜 센스 죽인다. 으하하하!”

천휘는 이제 저 녀석을 만든 게임 제작자를 칭찬하면서 더욱 크게 웃어댔다.

야옹, 야옹.

그런 천휘의 반응이 못마땅한 듯 사자 케르베로스가 연방 포효를 내질렀다.

“커헉!”

계속되는 녀석의 포효 소리에 천휘가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전신이 마비되어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입도 뻥긋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저 녀석의 포효 소리에 이런 힘이!’

그저 우스꽝스러운 겉모습에 혹해 웃어대던 자신이었다. 만약 그의 곁에 오베른과 싸가지 없었다면 그는 죽은 목숨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자 케르베로스는 천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딜!]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케르베로스를 맞아 오베른이 거칠게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휘익.

콰앙!

하지만 녀석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오베른의 클레이모어를 피해내고 계속해서 천휘에게로 달려들었다.

휘익.

야옹.

그러나 천휘에게로 가는 관문은 오베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실력자인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이 있었던 것.

그의 레이피어가 가볍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사자 케르베로스의 몸통을 찌르며 녀석을 저지했다.

[호오, 내 공격을 맞고도 살아 있어?]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은 자신이 내지른 찌르기 공격을 맞고도 살아 있는 사자 케르베로스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제껏 그 정도의 공격만으로도 즉사를 면치 못했던 여느 하급 마수들과 달리, 녀석은 중급 마수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싸가지의 공격에도 여전히 목숨을 잃지 않았다.

“후악, 저 빌어먹을 자식! 감히 그따위 흉측한 외모로 날 농락해? 어후, 내가 진짜 스킬만 있었어도 내 손으로 처치하는 건데. 아니다. 스킬이 없어도 내게는 발록의 주먹이 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주먹으로 샌드백 두들기듯 두드리면 되는 거 아냐? 싸가지, 얼른 녀석을 반쯤 죽여 놓고 꿰어서 바위산에 꽂아버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천휘의 명령에 사자 케르베로스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고는 이내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빠르기로 녀석을 향해 쇄도했다.

휘익.

푸슛.

야야야야야옹.

단 한 번의 찌르기였다.

천휘의 눈으로는 그저 한 줄기 빛살만이 보일 정도로 빠른 찌르기가 사자 케르베로스의 몸통을 관통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은 충실하게 천휘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듯 재차 삼차 레이피어를 휘둘러 녀석을 공격했다.

결국 사자 케르베로스는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고 기절하고야 말았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까, 주인님?]

“좋았어! 이제 꼬치 꿰듯 꿰어서 벽에 꽂아버려!”

[네, 주인님.]

푸슉.

천휘의 명령대로 싸가지 슈트라카이젠은 사자 케르베로스를 레이피어에 꿰어 적당한 높이로 바위산에 꽂았다.

“좋았어! 이제부터는 내게 맡겨! 흐아앗!”

퍼억.

“쳇, 이 정도로는 역시 무리라는 건가? 오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앗!”

천휘는 그렇게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자 케르베로스를 두들겼다.

그 와중에 몇 번이고 기절했던 녀석이 깨어나기를 반복했지만,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녀석의 머리를 내리찍어 다시 기절시켰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이 흘렀다.

[띠링! 레벨이 1 올랐습니다.]

털썩.

“헉헉헉.”

천신만고 끝에 겨우 녀석을 죽이고 더불어 레벨까지 올랐지만, 천휘는 기뻐할 새도 없이 그대로 땅바닥에 무너졌다. 녀석을 샌드백 두들기듯 두들기느라 기력이 다한 탓이었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녀석을 처치하고 무려 10분가량 휴식하던 천휘는 그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아이템은 뭐 나왔지?”

[골드 몇 푼 나온 것 말고는…….]

“으아악! 이런 빌어먹을 거지 몹!”

중급 마수씩이나 돼서 변변찮은 아이템 하나 드롭하지 않고 그저 골드만 드롭했다는 말에 천휘는 분노를 터트리며 폭발했다.

하지만 이미 죽은 녀석을 다시 되살릴 수도 없는 노릇. 천휘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드디어인가?”

마음을 진정시킨 천휘는 마신의 성 입구로 추측되는 동굴을 바라보며 감회에 빠졌다.

‘마신의 무력… 기필코 얻고야 말 테다!’

마신의 힘이 숨겨져 있는 미지의 땅.

이제 천휘가 그곳에 첫발을 내디뎠다.

- 4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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