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꿩 먹고 알 먹기
싸가지와 쥬얼리가 동굴을 쾌적하게 리모델링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천휘는 변강쇠를 시켜 돌쇠들로 하여금 동굴을 중심으로 반경 1백 미터 안의 나무들을 모두 제거하게 했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쥬얼리에게 물 속성 마법으로 동굴 앞 연못을 넓히도록 지시했다.
결국 쥬얼리는 8서클 마법인 컨트롤 웨더(Control Weather)를 이용해 연못에 집중호우가 내리게 만들어 연못을 기존의 5배 크기까지 확대시켰다.
마지막으로 오베른과 싸가지로 하여금 심연의 밀림을 탐색하여 식용으로 쓰일 만한 채소와 과일들을 채집해오도록 지시했다.
사실 두 녀석이 서로 누가 더 강한지 실력을 겨뤄본답시고 이를 갈며 치고받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둘은 죽이 잘 맞아 지시를 내린 지 하루 만에 10가지가량의 채소와 과일의 씨앗 및 뿌리를 확보해왔다.
“이야, 이 자이언트 보어 냄새 죽이는데?”
[제가 황제의 위에 있을 때 여러 황궁 요리사에게 배워둔 요리 중의 하나입니다.]
[무슨 황궁 요리씩이나. 그냥 소금 넣고 구운 것뿐이고만.]
[…한판 붙을까, 쥬얼리?]
[바라던 바다, 싸가지.]
휘익.
[히익!]
[헉!]
쥬얼리와 싸가지가 금방이라도 결투를 벌이려 하자 천휘는 슬그머니 목걸이에 걸린 피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에 쥬얼리와 싸가지는 사색이 되어 헛기침을 내뱉었다.
“싸우고 싶으면 마음껏 싸워. 난 있지, 종종 내 폐활량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고 싶을 때가 있어. 너희도 궁금하지, 내 폐활량이 어느 정도인지? 이 피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불 수 있는지 말이야.”
[살려 주십시오, 주인님.]
[살려 주세요. 네?]
그들이 알고 있는 천휘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천휘가 장난처럼 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두 강시는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해. 너희의 고귀하신 주인님께서 지금 맛있게 저녁을 먹는다고 하시잖니.”
[흡!]
[헙!]
천휘의 말에 쥬얼리와 싸가지는 곧바로 손으로 입을 가려 버렸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천휘의 심기를 건드릴까,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나저나 주인.]
“우적우적. 왜, 오베른?”
[아무래도 슬슬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모양이다.]
“그래?”
오베른의 말에 천휘가 맛있게 자이언트 보어의 뒷다리를 뜯으며 대답했다.
[싸가지와 채소 채집을 하면서 눈여겨본 것인데, 밀림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감지됐다. 자세한 것은 싸가지에게 묻는 것이 더 빠를 거다.]
“흐음, 확실히 오베른 너보다는 싸가지 저 녀석이 좀 더 여러 가지 기운에 민감하니까. 좋아. 싸가지, 방금 오베른의 말에 보충해봐.”
[감사합니다, 주인님.]
천휘의 말에 싸가지가 입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무리의 몬스터들이 밀림 초입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녀석들을 몰아냈던 마수 시벨리우스를 주인님께서 처치한 탓이겠지요.]
“녀석이 뿜어내던 마기가 사라지니까 녀석이 사라진 것을 알고 다시 되돌아오는 거다?”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마기가 아니라 암흑 투기라 불리는 마계 특유의 기운이지만요.]
“암흑 투기?”
천휘는 생소한 단어에 의아한 표정으로 싸가지를 바라봤다.
[자세한 것은 쥬얼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그래? 쥬얼리, 암흑 투기가 뭔지 설명해봐.”
천휘의 지시에 쥬얼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엘레이든에 보관된 한 고대 서적에서 마족이나 마수들이 뿜어내는 끈적끈적하고 찌릿찌릿한 기운을 암흑 투기라 불린다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흐음, 암흑 투기라. 뭐, 그건 어찌 되었든 좋고. 싸가지, 계속해서 설명해봐. 두 무리의 몬스터가 어쨌다고?”
[아, 네. 두 무리의 몬스터는 제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다크 트롤들과 다크 오우거들입니다. 두 몬스터 모두 주로 드래곤 산맥 초입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이곳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살아생전에 녀석들을 사냥해본 경험이 있으니, 확실할 겁니다.]
싸가지의 세밀하고도 정확한 설명에 천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동안 오베른의 두루뭉술한 기억과 지식 때문에 이래저래 피해를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찰나에 각 분야 최고의 지식인들이 자신을 도와주니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오히려 잘됐어.”
[그게 무슨 말이지, 주인?]
조금은 걱정스러워할 줄 알았던 천휘가 만족스러운 듯 말하자 의아한 오베른이 물었다.
“난 너희와 애초에 근본부터가 다른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오로지 자기 수련만으로는 강해지기 힘들지.”
[아, 그럼 주인님께서는 녀석들을 사냥해서 힘을 키우시겠다는 거군요?]
“바로 그거야. 하지만 녀석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면 골치 아파지겠지? 아무래도 집 지키는 개 한 마리를 세워둬야겠어.”
[집 지키는…….]
[…개?]
그로부터 며칠 동안 천휘는 어두운 동굴 안에서 강시 제작에 몰두했다.
그리고는 닷새가 지나 다크 트롤과 다크 오우거들이 동굴 주변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낼 때쯤에야 동굴 밖으로 나왔다.
[다 끝났나, 주인?]
닷새 만에 동굴 밖으로 나온 천휘를 가장 먼저 반갑게 맞아준 것은 오베른이었다. 그 외에 쥬얼리와 싸가지도 하던 일을 멈추고 천휘에게로 다가왔다.
“그동안 몬스터들 물리치느라 수고했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을 거다. 아공간 오픈, 똥개 소환!”
크워어어.
닷새 동안 천휘가 제작한 강시는 다름 아닌 마수 시벨리우스의 시체로 만들어진 혈강시였다.
퍼억!
크아악!
“내가 뭐라 했어? 그렇게 울지 말라고 했지? 네 이름은 똥개야, 똥개! 똥개면 똥개답게 울어, 이상하게 울지 말고! 자, 따라 해봐. 월월!”
…월월.
“좋아, 잘했어. 앞으로 한 번만 더 이상하게 울어봐라, 확 잡아먹어버릴 테니! 자, 이제부터 네가 있을 곳은 저기야. 저기서부터 우리 이외에 그 누구도 발을 못 내딛게 해. 알아들었어?”
크워… 월월.
천휘는 마수씩이나 되는 시벨리우스를 고작 집 지키는 개로 전락시키고야 말았다.
그것도 사상 최강의 똥개로.
* * *
모든 일을 끝마친 천휘는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이 안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형성된 공간이었다.
동굴 안은 총 3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방은 간단한 취사와 함께 잠을 잘 수 있는 돌침대가 놓인 곳으로, 다른 방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지만 천휘가 가장 애용하는 방이었다.
두 번째 방은 일종의 수련장 겸 강시 제작실로 쓸 방이었다. 이제부터 이곳에서 천휘는 마령혈천권법을 익힐 것이고, 그 외에 강시를 제작할 일이 있으면 그것 역시 이곳에서 할 터였다.
세 번째 방은 아직 정확한 용도를 정하지 않았지만 대충 서재로 사용할 방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는 유구한 아르니안 대륙의 역사를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때문에 이그나혼에서 수천 권의 고대 서적들을 구입해 아공간에 넣어둔 천휘였다.
“지금 가장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천휘는 아공간에서 들뜬 마음으로 하나의 서적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봉인해온 「마령혈천권법서」였다.
천 제국에서도 고작해야 총 10권밖에 없는 초절정 무공 중 유일한 권법, 마령혈천권법이 적힌 무공서가 바로 그것이었다.
초절정 무공이란 아르니안 대륙으로 치자면 신급의 스킬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효용성만 따지자면 신급 스킬 이상의 것이 바로 초절정 무공이었다.
천 제국의 유저들은 말한다.
초절정무공을 익힌 자는 곧 하늘이라고.
“후우, 이거 은근히 떨리네.”
「마령혈천권법서」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도 떨리지 않던 마음이 이제 와서 떨리는 것은 무엇일까? 심지어 수전증을 앓는 것처럼 손까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릴랙스, 릴랙스. 내가 떨 게 뭐야? 어차피 내 수중 안에 있는 것인데. 난 그저 이걸 통해 한 단계 더 도약하면 그뿐인걸!”
천휘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며 「마령혈천권법서」에 손을 가져갔다.
[띠링! 초절정 무공 마령혈천권법을 익히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띠링! 초절정 무공을 익히려면 기존 격투가 직업의 스킬들이 모두 초기화됩니다. 그래도 익히시겠습니까?]
“뭐라고?”
초절정 무공을 익히기 위해 기존의 무공을 지워야 한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천 제국에서도 몇 권의 초절정 무공서가 풀린 만큼 그것을 익힌 유저들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분명히 없었다.
아무래도 천휘 자신이 천 제국의 무공이 아닌 아르니안 대륙의 격투가 스킬을 얻은 탓에 벌어진 페널티인 모양이었다.
“젠장, 별수 없지. 다른 건 몰라도 생성 스킬인 악마의 주먹은 좀 아깝지만 마령혈천권법은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할 테니까! 익히겠다!”
[띠링! 격투가 직업의 모든 스킬들이 초기화됩니다. 마령혈천권법을 익히셨습니다.]
“이건 뭐임? 이렇게 쉽게 익힐 수 있는 거였어? 난 또 초절정 무공이라 익히기 힘들 줄 알았더니! 이건 완전 누워서 떡 먹기, 아니 앉아서 시영이 골리기보다 더 쉬운 일이잖아? 어디, 스킬창을 확인해볼까? 스킬창 오픈!”
[주직업 강시술사 스킬]
강시 제작술:고급 2단계(86.44%)
고루마공:고급 1단계(16.08%)
시약 제조술:고급 5단계(08.36%)
약초술:고급 3단계(47.32%)
[부직업 격투가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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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스킬]
삼재보법:고급 8단계(98.85%)
무형은잠:고급 4단계(79.78%)
“무- 뭐야? 왜 격투가 스킬이 하나도 없어?”
빠방한 이름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격투가 스킬란이 어이없게도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 있자 천휘는 황당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야? 제대로 절차를 밟아서 스킬을 익힌 건데, 왜 표시가 안 되는 거야? 젠장! 이거 버그 아냐?”
천휘는 자신이 설마 이런 개떡 같은 일에 휩싸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빤히 스킬창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쳐다봐도 스킬이 적혀 있어야 할 스킬란에는 물음표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띠링! 창조의 여신 메이드가 귀하를 호출했습니다. 10초 후, 창조의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뭐? 창조의 여신 메이드?”
『오벨리스크』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이었다. 물론 천휘 자신이 모든 신의 이름을 다 알 순 없지만, 확실히 저런 식의 신은 없었다. 게다가 이름마저도 급조한 티가 나는 것이,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운영자네.’
순간적으로 천휘는 창조의 여신 메이드라는 작자가 운영자임을 직감했다. 아직 운영자들이 직접 『오벨리스크』 게임 내부에 영향력을 가할 수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상대는 분명히 운영자인 것 같았다.
스파아앗.
그리고 10초 후, 동굴 안에 서 있던 천휘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스파아앗.
“큭!”
갑자기 눈으로 들이닥치는 환한 빛에 천휘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쥬얼리가 영구적으로 설치해놓은 라이트 마법 덕분에 동굴 안도 그리 어두운 편은 아니었지만 천휘의 눈을 감싼 빛은 그것을 초월할 만큼 밝았다.
“어라? 벌써 왔네?”
‘여자네? 여신이라더니… 여자 운영자라. 쳇, 골치 아프게 됐네. 여자 운영자라면 분명히 땡깡 부릴 텐데.’
천휘는 눈이 천천히 빛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헙!”
“뭐야, 뭘 그렇게 놀래?”
천휘가 눈을 뜨자마자 웬 여자 한 명이 그의 코앞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천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여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조금은 뚱한 표정으로 천휘를 쳐다봤다.
“당신이…….”
“어, 내가 메이드야. 거기 앉아.”
“거기라면 어디……?”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이었다. 그저 환한 빛만이 두 사람을 밝혀 줄 뿐이었다.
“어디긴 어디야? 거기지.”
“헛! 어- 어떻게!”
어느새 천휘의 뒤에는 작은 탁자와 의자가 세워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존재했었다는 듯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와 찻잔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래 봬도 여신.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지. 아무튼 거기 앉아. 이래저래 묻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아, 뭐.”
여인의 권유에 천휘는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여인도 자리에 앉자 다시 한 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난데없이 주변 풍광이 동남아 휴양지의 그것처럼 변한 것이다.
“기왕이면 풍광이 멋진 게 좋겠지?”
“그쪽 마음대로.”
풍광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보다 훨씬 아랫줄로 보이는 여자가 계속해서 반말을 지껄이자 천휘 역시 지지 않고 말을 짧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천휘는 그녀가 자신에게 대하는 것만큼 그녀를 대할 뿐이었다. 그녀가 설사 운영자라 할지라도.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는지는 짐작이 가겠지?”
“대충.”
“그럼 긴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당신이 천 제국에서 가져온 마령혈천권법, 그게 심각하게 프로그램에 무리를 주고 있다는 거 알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조금은 도발적으로 물어오는 여인에게 천휘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오벨리스크』는 엄연히 천 제국과 아르니안 대륙이 분리되어 있어. 비록 드래곤 산맥이 둘을 이어주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공간일 뿐이고, 절대 두 공간은 이어질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그게 뭐 어때서?”
여인의 설명에 천휘는 조금 공격적으로 되받아쳤다. 마치 자신을 심문하는 것 같은 그녀의 말에 짜증이 인 것이다.
“뭐야, 그 말투는. 지금 배 째라 이거야?”
“네가 지금 내 배를 째겠다고? 허, 어린노무 가시나가 못하는 말이 없네. 야, 이 기지배야! 내가 너보다 밥을 먹어도 수천 그릇은 더 먹었고, 인생을 살아도 몇 년은 더 살았어. 어디 어린노무 기지배가 막말이야, 막말이!”
“여기서 나이 이야기가 왜 나와! 중요한 건 난 운영자고, 당신은 잘못을 저지른 유저라는 거야! 알아?”
자신의 호통에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그녀를 보며 천휘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잘못? 누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 내가 마령혈천권법을 마교에서 빼돌린 거? 아니면, 내가 내 힘으로 당당하게 드래곤 산맥을 넘어 아르니안 대륙으로 건너온 거?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그- 그건!”
천휘의 당당한 질문에 여인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쪽에서 드래곤 산맥을 어떤 이유로 만들었건, 그건 내가 알 바 아냐. 난 그저 게임상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뿐이니까.”
천휘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천휘의 행동에 당황한 듯 여인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휘를 붙잡았다.
“앉아.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놔! 이거 안 놔? 난 더 이상 너와 할 말 없어. 지금 당장 마령혈천권법상의 권법을 내 스킬창에 생성시켜 놔!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그 잘난 회사, 고소해버릴 테니까! 감히 유저를 협박해?”
천휘의 행동은 점점 점입가경으로 변해갔다. 더 이상 어떤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듯 거칠게 여인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익!”
“그만 하지, 메이드 여신?”
“아빠!”
“아빠?”
여인과 대치 중이던 천휘는 난데없이 나타난 한 중년 남성을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빠라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운영자가 아빠라고 부르는 중년의 남성.
천휘는 문득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누가 그대의 아빠인지 모르겠군.”
“아… 죄송합니다, 주신이시여.”
‘주신!’
그제야 천휘는 눈앞의 중년 남성이 『오벨리스크』를 관장하는 최고 신 중 하나인 태양신 라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군, 이방인이여. 철없는 여신 메이드가 그대에게 무례를 범했네. 용서해주게.”
“그다지 무례랄 것도 없습니다만, 주신의 용서라니 한번 받아보도록 하지요.”
이미 중년 남성이 운영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천휘였지만, 그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는 걸 알기에 그에 상응해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훗, 제법 재밌는 이방인이군. 그래, 이번에 참으로 재미난 일을 벌였다고?”
“주신께서도 절 탓하고자 오신 것이라면 그만두시지요. 저 말괄량이 여신에게도 말했지만, 제게는 하등의 잘못이 없습니다. 아마 주신께서도 아실 텐데요?”
천휘는 지금의 이 자리가 너무도 불편했다. 마치 자신을 타박하고자 하는 자리처럼 느껴진 탓이다. 하지만 받을 것은 받아내야 하기에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대의 말이 옳지. 확실히 그대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어. 하지만 말이야.”
“이 대륙의 밸런스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흐음, 역시나 강시지존이라는 악명에 걸맞게 참으로 영리한 이방인이로군.”
천휘의 대답에 주신 라멘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만 갔다.
“제가 만약 불법적인 방법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제 캐릭터인 천휘를 삭제하겠습니다. 하지만 전 분명히 제 스스로 지금의 수준에 도달했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게임을 즐겨 왔습니다.”
“계속해보게.”
“그러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단 하납니다. 밸런스라는 것이 뭡니까? 그것은 결국 이 게임을 지탱하고 있는 유저들을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변명하지 않겠네.”
천휘의 물음에 주신 라멘이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지려 하는 것은, 더불어 기반을 다져 놓았던 천 제국을 버리고 위험천만하게 드래곤 산맥을 넘은 것은 이 대륙에서 이루고자 하는 염원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그 염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마령혈천권법이 필요합니다. 전 그 염원만 이루면 됩니다. 대륙 정복이라든지, 유저 학살이라든지 절대 밸런스가 파괴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걸 약속하죠.”
“흐음.”
주신 라멘의 굳은 얼굴을 보며 천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들이 별수 있겠어? 내가 내 힘으로 얻어낸 마령혈천권법인데. 큭큭, 결국에는 내게 무릎 꿇고 말겠지.’
천휘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얻은 마령혈천권법은 절대 법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말은 잘 알아들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령혈천권법을 내어줄 수는 없네.”
“헛! 뭐라고요?”
“아아, 그렇다고 흥분하지는 말게. 충분히 그에 맞는 보상을 줄 테니 말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령혈천권법은 명실상부 천 제국 최강의 권법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강의 권법이란 말입니다. 그런 마령혈천권법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보십니까?”
주신 라멘의 말에 천휘가 흥분하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확고했다.
“확실히 말해두겠네만, 아르니안 대륙에서는 마령혈천권법을 익힐 수 없네. 시스템상 불가능해.”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게다가 마령혈천권법은 천 제국의 향후 에피소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귀중한 무공서일세. 그대가 만약 천 제국에서 그것을 익혔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대로부터 마령혈천권법을 회수할 수밖에 없네.”
“당장 고발하겠습니다! 이건 명백한 불법입니다! 회사 측의 이유로 고객에게 피해를 입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천휘는 지금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만큼 마령혈천권법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었으며, 향후 그랜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이 마령혈천권법인가, 아니면 강대한 무력인가? 그것만 말해보게.”
“…후자입니다만.”
주신 라멘의 이어지는 질문에 천휘는 다소 격앙되었던 자기 자신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럼 됐네! 이걸 받게.”
“이게 뭡니까?”
갑자기 내미는 검은색 광석에 천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암흑석이라는 광석일세.”
“암흑석?”
생소한 이름에 천휘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신 라멘을 바라봤다.
“마나석이 마나를 품고 있는 광석이라면, 그 암흑석은 암흑 투기를 품고 있는 광석이지.”
“그런데 이것을 왜 제게?”
이제껏 『오벨리스크』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광석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천휘는 암흑석에 대한 관심을 접고 그것을 자신에게 준 저의를 물었다.
“그 암흑석을 가지고 심연의 밀림 심처에 있는 ‘마신의 성’을 찾게.”
“마신의 성…….”
“그 마신의 성에서 그대가 원하는 절대 무력을 얻을 수 있을 걸세. 마령혈천권법에 버금가는! 그리고 시스템상으로도 문제가 전혀 없는!”
주신 라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천휘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스템에 무리를 주는 마령혈천권법이 아닌, 차라리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아르니안 대륙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권법을 그에게 선사하려는 속셈이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과연 그것으로 마령혈천권법을 대체할 수 있을까요? 아시겠지만 초절정 무공으로 얻을 수 있는 무력은 엄청납니다. 심지어 화경의 경지를 넘어 현경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초절정 무공서입니다. 이곳 아르니안 대륙으로 치자면 소드엠페러 그 이상, 9서클 마스터 그 이상의 경지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물건이란 말입니다!”
“알고 있네. 때문에 자네에게 그 물건을 준 것일세.”
“뭐라고요?”
“분명히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무력은 마령혈천권법에 비하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력뿐만이 아니네.”
“그렇다면…….”
“그대는 그곳에서 마신의 무구를 얻을 것이네.”
“마신의 무구?”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주신 라멘이 말하는 마신의 무구가 신급 아이템이라는 것을.
“어떻게 할 텐가? 아직까지도 무리를 해서라도 마령혈천권법을 익히고 싶은가, 아니면 내 제의를 받아들일 텐가?”
“…뭐, 어쩔 수 없겠죠. 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후훗, 계약 성립일세.”
“제법 괜찮은 계약이네요. 큭큭.”
마령혈천권법은 사라졌다.
하지만 천휘의 날개는 꺾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높은 곳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