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음양마령강시
이그나혼 북서쪽에 위치한 진 마탑 부근은 밤에도 낮과 같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아르니안 대륙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인 곳답게 그곳을 드나드는 마법사들의 숫자도 많았고, 더불어 그러한 마법사들을 상대로 시약이나 각종 마법 물품들을 파는 상인들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늘 먹을거리도 몰리는 법. 진 마탑 주변 야시장에는 이그나혼 최고의 먹을거리들이 풍성하게 몰려 있었다.
“흐음, 여긴가?”
천휘는 어느새 인피면구를 벗어젖히고 본래의 모습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그저 평범한 저렙 마법사용 튜닉인 탓에 지나는 사람들은 그를 얼굴만 잘생긴 저렙 마법사로 인식할 터였다.
“천휘야!”
“오, 로빈!”
진 마탑 앞의 분수에서 약속을 잡은 두 사람이었다.
로빈이 이 근처의 지리에 능통하니 당연히 먼저 와서 천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신수가 훤한데?”
“큭큭, 그러냐?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어라, 이 자식 보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네? 내가 알던 그 로빈 맞냐?”
“걱정 마라, 나 로빈 맞으니. 움직이자. 근방에 내가 잘 아는 포장마차가 있으니, 거기로 가자.”
로빈의 안내에 두 사람은 야시장 먹자골목에서도 가장 허름한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단 한 명의 손님도 보이질 않았다.
“로빈 아니냐? 네가 여긴 우짠 일이고?”
“볼일이 있어서. 인사해라. 이쪽은 내 대학 과 동기 블랙헤드. 그리고 이쪽은 내 평생지기 천휘.”
“아, 느가 천휘? 워매 반갑다잉. 내는 블랙헤드라 칸다.”
“하하, 로빈 친구면 내 친구나 마찬가지지. 난 천휘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이윽고 천휘는 테이블에 앉았고, 블랙헤드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뭐 주꾸마?”
“조리 스킬 좀 올렸냐?”
“아즉 택도 없단깨. 허구한 날 맹글어싸도 이제 겨우 초급 8단계란깨. 조리 스킬이 중급에는 들어서야 한식을 맹글 수 있을 낀디, 내도 미치긋다야.”
블랙헤드의 푸념에 천휘가 물었다.
“조리 스킬은 등급 올리기 힘들다는데, 그 정도면 대단한 거 아닌가?”
“아직까지 중급에 오른 사람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니, 저 정도면 대단한 거지. 하지만 저 녀석은 하루라도 빨리 한식을 배우고 싶어 해.”
“한식은 왜?”
“그건 내가 말해주꾸마.”
천휘의 물음에 이번에는 블랙헤드가 나섰다.
“말하자믄 쪼매 긴디, 나가 쪼렙 시절 때 히든 퀘스트를 해브러갔고 이래 조리사를 하고 안 있나.”
“히든 퀘스트?”
저렙 시절의 히든 퀘스트라면, 히든 직업과 관련될 가능성이 컸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히든 직업을 보지 못한 천휘였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커져만 갔다.
“식객이라는 히든 클래스란다.”
“식객?”
“그래, 식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클래스네?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최초로 발견되는 직업 아냐? 어떻게 얻었지?”
웬만한 히든 직업이라면 대부분 꿰뚫고 있는 천휘였지만, 식객이라는 직업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오벨리스크』에 최초로 발견된 히든 직업인 것 같았다.
때문에 천휘의 궁금증은 대단했다.
“최고의 한식 조리사라고 생각하믄 될 끼다. 아무튼 그 식객이라는 직업을 얻을라 카믄 조리 스킬을 중급까지 끌어올려야 한단깨.”
“그게 전부야? 그 정도면 충분히 식객 직업을 얻을 수 있겠는데?”
“그게 아니야. 아직 문제가 좀 있다. 녀석이 익혀야 할 스킬에는 조리 스킬뿐 아니라 소드 마스터리의 일종인 클리버 마스터리도 있어서 그것도 중급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클리버(Cleaver)?”
소드 마스터리의 일종이라면 클리버라는 것이 검의 일종이라는 소리인데, 천휘로서는 무척이나 생소한 말이었다.
“식칼이라고 생각하믄 될 끼다.”
“아, 식칼!”
“한마디로, 조리에만 능한 게 아니라 전투 능력도 갖췄다고 봐야지. 웬만한 검사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다. 저번에 카멜 녀석하고 순수한 검술만으로는 절대 뒤지지 않는 대련을 펼치기도 했다. 벌써 클리버 마스터리가 초급 9단계거든.”
“정말?”
카멜과 비등한 검술을 펼쳤다는 말에 천휘는 놀란 눈빛으로 블랙헤드를 쳐다봤다.
“아즉 멀었단깨. 근디 문제는, 식객이 되고 나서부터여.”
“아직도 돈 못 구했냐?”
“그게 뭔 소리야?”
“저 녀석에게 식객 직업을 소개해준 할아버지가 한 권의 책을 남겼는데, 거기에 명시된 내용이 식객은 하급의 식재료부터 상급의 식재료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진정한 음식의 대가라고 했대.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오벨리스크』에서 상급의 식재료가 얼마나 비싸? 한마디로, 스킬 등급 올리는 데 이래저래 애로 사항이 많다는 거지.”
“흐음, 그래?”
천휘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돈을 불릴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오벨리스크』는 현실에 거의 근접한 맛을 구현해낼 수 있다. 그 말인즉 현실의 맛을 좇아 게임상에서도 맛있는 요리를 찾는 미식가들이 많다는 소리였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유저들은 제법 큰돈을 들여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한다. 현실에서는 큰돈일지 몰라도 게임상에서는 그나마 조금 낮아진 금액으로 음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대가가 될 수 있는 직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원만 해주면 『오벨리스크』 최고의 요리사가 될 수 있다는 말!’
“내가 도와줄까?”
“응? 고거시 뭔 말이단가?”
“상급 식재료를 구하려면 돈이 많이 들 거 아냐. 보아하니 조만간 식객에 들어설 것 같은데, 그러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한 거 아냐?”
“그라긴 한디…….”
천휘의 말에 블랙헤드가 조심스럽게 로빈을 쳐다봤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물음이었다.
“야, 너 돈 없잖아?”
로빈은 그런 블랙헤드의 시선을 외면하고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천휘를 바라봤다.
“걱정 마라. 테헤른산에서 주워 모은 아이템을 팔아 돈 좀 있으니까. 좋아! 결정했다. 블랙헤드, 네게 정확히 5천만 골드 줄게. 그걸로 이그나혼 최고의 식당을 만들어봐라.”
“헉! 5, 5천만 골드?”
천휘의 통 큰 배팅에 블랙헤드는 물론이고 로빈도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5천만 골드라면 이그나혼에서도 가장 노른자위 땅이라 할 수 있는 진 마탑 주변이나, 혹은 중앙 헤레온 광장에서 식당을 구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부담 갖지 말고. 단! 수익의 8할은 내가 가진다. 2할은 블랙헤드 네가 가지고.”
“야, 그건 완전히 착취 아니냐?”
천휘의 조금은 과한 편파적 분배에 로빈이 나서서 딴죽을 걸었다.
“착취는 개뿔. 난 그저 블랙헤드의 가능성만을 믿고 돈을 배팅하고 있어. 게다가 이건 동업이 아니라 투자야. 그러니까 그 정도 액수는 내가 가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 안 그래, 블랙헤드?”
“당근 그렇단깨. 좋아브러. 오늘 장사 접어블고 신나게 술이나 퍼 마시잔깨.”
“자식,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으하하하!”
“미친놈들! 그래, 먹고 죽자! 큭큭큭.”
“자, 여기 5천만 골드.”
“흐미, 증말로 이것을 나한티 주는 거냐?”
“내가 허투루 말했을까 봐? 걱정 말고 이 돈으로 마음껏 조리 스킬 올리고, 클리버도 이그나혼 최고의 대장간에서 하나 좋은 놈으로 제작해서 가지고 다녀라. 최고의 요리에는 최고의 식칼이 필요한 법 아니냐. 나도 나중에 클리버 하나 구하게 되면 너 줄게.”
“으헝헝헝.”
천휘의 말에 급기야 블랙헤드가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아침 댓바람부터 장사를 시작한 상인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야, 왜 울어!”
“서러워서 근단깨. 그동안 고생한 것만 생각하믄! 으헝헝헝!”
“…이 자식, 원래 이러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좀 순수하긴 하지. 야, 이 자식아, 그만 울고 얼른 움직여! 하루라도 빨리 식객이 되어서 돈 벌어야지.”
“으헝… 뚝. 맞단깨. 얼른 그래야 한단깨. 그럼 먼저 가보꾸마. 낸중에 보잔깨.”
“큭큭, 알았다. 나중에 보자. 나중에 식당 차리면 연락 주고.”
휘잉.
“벌써 갔냐?”
“…어.”
* * *
끼익.
“자, 여기가 내 방이다.”
“얼레? 생각보다 방이 좋은데?”
블랙헤드를 보낸 두 사람은 진 마탑에 마련된 로빈의 거처로 자리를 옮겼다.
“이래 봬도 6서클 마스터다. 게다가 마나량은 7서클 마스터와도 견줄 만큼 많은 이 몸이야.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한 거다.”
“큭큭, 그래.”
“그쪽으로 앉아라. 차 내올게.”
“쌩유.”
천휘는 탁자에 앉아 방 안을 살펴봤다. 흡사 작은 도서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방 안 가득 기이한 문자의 서책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천휘가 호기심에 하나 빼서 읽고자 했지만, ‘룬 문자를 익히지 못해 읽을 수가 없다’라는 알림음만 뜰 뿐,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야, 녹차. 차를 별로 안 좋아해서 이거밖에 없다.”
“녹차면 됐지, 뭐. 그나저나 이거 뭐라 적힌 거냐? 도통 읽을 수가 없네.”
로빈이 녹차를 내오자 천휘는 그에게 자신이 읽지 못했던 책을 건넸다.
“아, 그거? 룬 문자라고, 일종의 마법 언어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그건 「마나의 생성」이라는 서적이고.”
“흐음, 그래? 역시 마법사들은 이래저래 익힐 게 많구나.”
“당연하지. 괜히 마법사들이 희귀한 게 아니라니까.”
“큭큭, 그래, 네 똥 굵다. 후욱.”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최근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강시를 제작해 곧바로 심연의 밀림으로 가겠다, 이거냐?”
“그래. 아직 나도 한 번도 제작해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100퍼센트는 아니겠지만, 70퍼센트 이상의 성공률은 될 거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내가 좀 도와줄까?”
“아냐. 어차피 나 혼자 해야 할 일이다. 넌 그냥 한 달 정도 내게 네 마법 실험실만 빌려 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 정도야, 뭐. 그동안 난 사냥이나 하면서 레벨이나 올리면 되니까.”
그렇게 일사천리로 합의를 본 두 사람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메모지에 적힌 시약들만 구해오면 되는 거냐?”
“그래, 돈은 여기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천휘는 메모지에 이어 무려 5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로빈에게 건넸다.
“헉! 이 시약들이 이 정도로 비싼 거냐?”
“그중에는 제아무리 진 마탑이라 해도 구하기 힘든 시약들도 있을 거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가 이곳 이그나혼에 인맥이 더 두터울 테니까, 네가 좀 알아봐주라. 난 그동안 강시 제작에 관련된 것 좀 익혀 두고 있을게.”
천휘의 말에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 한쪽에 걸려 있던 로브를 빼내 몸에 걸쳐 입었다.
“그건 뭐냐?”
“진 마탑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로브다. 네가 선물해준 대현자의 로브보다는 좀 성능이 떨어지지만, 진 마탑에서 물품 구입 시 30퍼센트 할인 효과가 있어서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지.”
“큭큭, 역시 널 찾아오길 잘했다.”
“잔소리 말고 준비나 하고 있어. 내일 아침 정도면 다 구해올 수 있을 거다.”
“부탁한다.”
그렇게 로빈이 방을 빠져나가자 이제 방 안에는 천휘만이 남게 되었다.
“좋아, 그럼 일단 오베른부터 소환해볼까? 아공간 오픈, 오베른 소환!”
스파아앗.
[흐아아암. 주인, 아침 댓바람부터 왜 소환한 거지?]
“…야, 강시에게 아침저녁이 어디 있어? 그리고! 주인이 나오라면 나올 것이지, 웬 잔말이 그리 많아?”
[그런 무식한 말은 하지 마라. 강시에게도 엄연히 인권, 아니 강시권이 있는 법이다. 주인은 나의 강시권을 존중해달라.]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아무튼 기왕 나왔으니까 나 좀 도와.”
천휘의 말에 오베른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제부터 음양마령강시를 만들어야 하니까 날 좀 도와달라고.”
[음양마령강시? 또 다른 강시들을 제작하는 건가?]
“그래. 그것도 이번에는 너를 능가하는 최고의 강시들을 제작할 거다. 그것도 무려 두 구나.”
[나를 능가하는 강시란 있을 수 없다. 이 몸은 대륙 최강의 강시이자 최강의 머슴인 오베른이니까.]
“…제발 잔소리 좀 하지 말고 거기에 똑바로 서 있어. 이제부터 내가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그러지.]
천휘는 오베른을 통해 음양마령강시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직접 몸으로 익힐 예정이었다. 음양마령강시의 바로 전 단계인 천마강시라면 분명히 어느 정도 도움이 될 터였다.
“아공간 오픈, 「강시 제작의 모든 것」 소환.”
천휘가 아공간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서적이었다. 그것도 아르니안 대륙의 서적들과는 형태가 사뭇 다른 천 제국의 서적이었다.
“간만에 펼쳐 보네. 천마강시를 제작할 수 있게 된 뒤로는 한 번도 살펴보지 않았으니.”
「강시 제작의 모든 것」은 고루문에 전승되어오는 강시 제작 비전서였다. 이름은 좀 평범했지만, 내용만큼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최하급 강시인 철골강시에서부터 최고의 강시를 위한 제작 방법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수록된 서책이었다.
“자, 그럼 이제 음양마령강시 부분을 읽어보실까?”
천휘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음양마령강시의 장’이라고 적혀 있는 페이지에 도달했다.
[띠링! 강시 제작술이 고급에 이르러 ‘음양마령강시의 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 인마.”
귓가에 들려오는 알림음에 천휘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겼다.
<음양마령강시.
그것은 음과 양의 기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강시로서, 활강시와 생강시의 과도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흐음, 과도기적인 성향이라. 그렇다면 아직 온전한 생강시는 아니라는 소리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내가 강시로 제작하려는 이들은 모두 차디찬 시체가 되었으니까.”
<전반적인 기반은 활강시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나, 생강시의 특징 중 하나인 생전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살아생전의 기억? 헉! 그럼 데보타 녀석이 날 죽이려 들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흐음, 이거 무슨 제약 같은 거 없나?”
마지막 황제 슈트라카이젠은 몰라도, 하이 엘프 퀸 데보타가 생전의 기억을 지닌 채 강시로 변모한다는 것은 천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데보타가 자신의 모략에 의해 목숨을 잃은 탓이었다.
<음과 양의 기운을 동시에 지닌 음양마령강시는 천지의 기운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탓에 기에 민감하다. 그리고 생강시와 다름없이 생전의 지능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에 민감한 특성 때문에 시체가 되기 전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질 수도 있다.>
“천마강시보다 기에 민감하다는 건가?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 황제 슈트라카이젠은 검의 극의를 이뤘다는 소드엠페러다. 게다가 하이 엘프 퀸 데보타 역시 마법의 극의에 해당하는 8서클 마스터였다.
둘 모두 한 방면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대가들.
그런 그들이 더 강해진다면, 누구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설사 주인인 천휘라 할지라도…….
<하나, 음양마령강시에는 하나의 제약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음양마령강시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법이 될 것이며, 만약 이 제약을 걸어놓지 않는다면… 뒷일은 알아서 생각하도록. 지금부터 그 방법을 하나하나…….>
“으하하하! 역시나 제약이 있었어! 그것도 녀석들을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는 제약이!”
한참을 더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던 천휘는 급방긋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주인, 드디어 미친 건가?]
“으하하하! 으하하하!”
오베른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휘는 다음 날까지 음양마령강시를 제작하는 방법과 순서에 대해 확실하게 머릿속에 담아나갔다.
* * *
“다 구해왔냐?”
“두말하면 잔소리.”
다음 날 아침, 로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한 보따리의 짐을 싸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은 돈은 어쩔까?”
“너 마법 연구하는 데 써라. 어차피 아직 나도 돈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 나 이제 나가볼 테니 만들고자 하는 강시 잘 만들어라. 끝나면 연락 주고.”
“그러지 말고 오베른 데려갈래? 오베른과 함께 사냥하면 경험치 팍팍 쌓일 텐데.”
“됐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아는 인맥 총동원해 파티 만들어놨다.”
로빈의 말에 천휘가 음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어린 소녀들이냐? 그도 아니면 요새 잘나간다는 츤데레?”
“당연한 거 아니냐? 요새는 츤데레가 대세야.”
“…그냥 해본 소린데 진짜였냐?”
“큭큭, 나 이제 간다!”
로빈이 시약을 담은 보따리만을 남겨 놓고 방을 빠져나가자 천휘는 천천히 보따리를 풀어 안에 든 시약들을 천천히 둘로 나누었다.
“흐음, 어느 정도 생각했던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건가? 혹시 몰라서 이래저래 시약을 많이 준비했더니 필요 없는 것들이 더 많잖아?”
천휘가 로빈에게 부탁한 시약들은 그저 여러 특성을 지닌, 그것도 아직까지 그조차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했을 만큼 고급 시약들이었다.
그 외의 시약들은 예전에 돌쇠들을 만들 때 쓰고 남은 것들이 있어 따로 구입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족한 것보다는 낫지. 다행히 음양마령강시에 필요한 시약들은 다 있어!”
천휘는 곧 필요하지 않은 시약들은 아공간으로 집어넣고 그 외 필요한 시약들을 따로 정리해 로빈의 마법 실험실로 옮겨 갔다.
“따로 미리 실험이라도 해보고 싶지만… 강시 제작을 위해 만들어야 하는 시약 화합물이 워낙 고가이니… 그냥 곧바로 제작할 수밖에.”
천휘는 천천히 예전에 사용했던 욕조에 하나하나 시약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화신의 부적이라.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기운이 녹아 있는, 최고의 양기를 품은 시약. 그리고 님프의 날개. 물의 요정이라 불리는 님프의 기운이 담겨 있는, 최고의 음기를 품은 시약. 이 두 개를 가장 먼저 넣고…….”
천휘가 사용하는 시약들은 하나같이 하나에 수십만 골드를 호가하는 최고급 시약들이었다. 그만큼 구하기도 힘든 것들이었음에도 로빈은 단 하루 만에 모두 구해왔다. 과연 진 마탑이라는 감탄마저 들 정도였다.
“자,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은 건가?”
천휘는 「강시 제작의 모든 것」을 읽어보고 이곳 아르니안 대륙에 적합하게 만든 레시피대로 모든 시약을 집어넣었다.
이내 그의 손에는 이제 마지막 남은 시약이 들려 있었다.
“죽음을 부르는 식물, 만드라고라.”
천휘가 마지막에 집어 든 시약은 바로 만드라고라였다.
흡사 산삼의 줄기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신비한 효험이 있는 약초라 착각하기 쉬우나, 만드라고라는 지독한 독기를 지닌 독초였다.
게다가 뿌리는 인간의 축소판처럼 생겨 만드라고라를 땅에서 뽑아낼 때 비명을 내질렀다.
만드라고라의 비명은 사신의 목소리라고 할 만큼 심약한 이들에게는 죽음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만드라고라는 흑마법사나 어쌔신들이 독약을 제조할 때 주로 쓰이지.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그것 말고도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
천휘가 알아본 바로, 만드라고라의 씨앗은 싹을 틔우기 위해 어린아이의 시체에서 나오는 깨끗한 피가 필요하다고 했다. 때문에 만드라고라는 어린아이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는 무덤 근처에서 피어날 정도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라나는 만드라고라이기에 이들에게는 어린아이의 영혼 조각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피를 양분으로 하여 자라나는 탓이다.
“음양마령강시에 꼭 필요한 시약이 바로 이 만드라고라지. 천 제국이었다면 영성을 지닌 영물의 내단을 사용해야 했겠지만, 이곳에서는 이걸로도 족해! 음양마령강시를 제어할 수 있는 마지막 시약, 어디 한번 집어넣어보실까?”
툭.
풍덩.
마지막 시약이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시약 화합물이 천천히 회오리치더니 이윽고 빠른 속도로 욕조 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임팩트가 강렬한데? 후훗.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강시가 나오려나?”
시간이 30분쯤 지나자 욕조 안을 휘몰아치던 시약 화합물이 천천히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또 한쪽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고운 빛깔의 푸른색이었다.
“음과 양의 기운으로 갈라진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붉은색은 양기를 뜻하고, 푸른색은 음기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갈라진 두 갈래의 회오리는 서로를 밀쳐 내며 3시간가량이나 서로의 영역을 지킨 채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이다!”
무려 3시간 동안 욕조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천휘가 별안간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공간을 오픈시켜 그 안에서 마지막 황제 슈트라카이젠의 시체를 꺼내고, 미리 준비해놓은 깨끗한 흰색의 헝겊으로 얼굴을 가린 뒤 곧바로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분명히 책자에서 두 갈래의 회오리가 태극의 형상을 띠는 시점에 시체를 집어넣으라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천휘의 말처럼 붉은색 회오리와 푸른색 회오리는 어느새 태극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의 탁했던 시약 화합물은 어느새 투명하게 변해 욕조 안에 있는 슈트라카이젠의 시체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대로 보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책자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새로이 제작한 레시피는 완벽해! 큭큭큭.”
겨우 보름이다. 예전에 돌쇠들을 제작하기 위해 근 한 달간을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저 지켜보는 것에만 그치는 작업이 아닌가.
천휘는 조용히 메모지를 들고 와 그날부터 보름간 욕조의 변화 상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 * *
툭툭.
“흐응.”
툭툭.
“아아, 건드리지 마.”
툭툭.
“아 씨, 누구야!”
[나다, 주인.]
“아, 오베른, 무슨 일이야? 나 방금 잠든 거 몰라?”
[저길 봐라.]
천휘는 졸린 눈으로 오베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부글부글 기포를 뿜어내고 있는 욕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앗! 시작된 건가?”
음양마령강시의 경우, 강시 제작의 마지막 단계에서 반드시 고루마공의 기운을 불어넣어줘야 한다고 「강시 제작의 모든 것」에 명시되어 있었다. 때문에 천휘는 재빨리 일어나 욕조 옆으로 다가갔다.
“정말 시작했네! 나도 시작해야지! 흐아압!”
「강시 제작의 모든 것」에 명시된 대로 천휘는 고루마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외공과도 같이 피부를 보호해주는 고루마공이지만, 강시를 제작할 때는 특유의 기운을 흘려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공과는 조금 의미가 다른 것으로, 오로지 강시공 특유의 기운이었다.
천휘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고루마공의 기운이 욕조 안으로 물밀듯이 흘러나갔다.
그동안 고루마공의 연마도 게을리 하지 않아 천휘의 고루마공은 중급 9단계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큭. 뭐- 뭐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욕조 안으로 고루마공을 전개해 기운을 흘려 내던 천휘는 기이한 느낌에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빠- 빨려 들어간다?’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천휘의 손끝에서 뻗어나가는 고루마공의 기운을 슈트라카이젠의 시체가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찌나 많은 양의 기운을 빨아들이는지, 천휘로서는 매우 버거울 지경이었다.
‘상태창 오픈.’
레벨:299 칭호:강시지존
주직업:강시술사 부직업:격투가
명성:26,000 악명:3,801,000
생명력:9,200(+15,000) 마나:245,000(+120,000)
기력:75% 포만감:80%
물리 공격력:52~56(+600) 물리 방어력:125~135(+500)
마법 공격력:118~124 마법 방어력:68~72
<기본 스탯>
근력:180(+100) 민첩:140(+450) 체력:140
지능:620 지혜:410(+300)
<특수 스탯>
손재주:490 의지:180 감지:480 집중:30
‘빌어먹을.’
본래 천휘의 마나량은 500,000에 육박했다. 태양의 진실을 사용하기 위해 제한 스탯인 지혜를 액세서리들로 도배해서 잔뜩 올린 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절반 수준의 마나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기력도 많이 떨어지고, 포만감도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10분 안에 마나량이 바닥나고 기력이나 포만감 또한 최저치까지 떨어질 터였다.
[주인, 어디 아픈가? 안색이 좋지 않아.]
때마침 오베른이 천휘에게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점점 창백해져만 가는 천휘의 안색을 보고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하나, 이것은 오히려 천휘에게 악재나 마찬가지였다. 평상시라면 고루마공을 전개하는 와중에도 말을 내뱉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극도로 위험한 상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루마공의 기운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주인, 왜 그러지? 설마, 서서 조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오베른을 보며 천휘는 제발 자신을 건드리지만 말아달라고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 빌어먹을 무식탱이. 그냥 저리 가라고, 제발!’
고루마공의 기운이 아직까지도 미친 듯이 빨려 나가는 이 상황에서 자신의 몸에 작은 충격이라도 가해진다면 자신은 아마 순간적으로 마나 쇼크에 빠지고 말 것이다. 천 제국 용어로 치자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는 소리다.
[정말 자는 건가? 우리 주인은 역시 대단하군. 서서 잘 수도 있다니. 님하가 킹왕짱!]
‘저 빌어먹을 자식! 저따위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아무튼 아직까지는 녀석이 안 건드려서 괜찮… 응?’
속으로 오베른을 욕하고 있는 그 순간, 손끝의 느낌이 점점 수그러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슈트라카이젠의 강시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띠링! 최초로 음양마령강시를 제작하셨습니다.]
[명성이 10,000 상승하셨습니다.]
[이름:슈트라카이젠 폰 하르센]
등급:음양마령강시
생명력:12,000 마나:36,000
<기본 스탯>
근력:860 민첩:3,860 체력:1,200
지혜:720 지력:840
“드- 드디어!”
말도 안 되는 능력치의 강시가 탄생했다.
그 이름 하여 음양마령강시 슈트라카이젠!
천휘는 떨리는 눈빛으로 욕조를 바라봤다.
[어라? 주인, 깼나?]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오베른은 천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가 욕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욕조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호오, 누가 날 깨운 거지?]
오베른의 탁한 음성과 달리 슈트라카이젠의 음성은 마치 소년처럼 맑고 청아했다. 게다가 그의 몸은 소년의 그것처럼 근육도 생성되지 않아 남들이 보면 꽃소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나다, 슈트라카이젠.”
[그대인가? 흐음, 이 땅의 인간이 아니로군. 이방인인가?]
“그렇다.”
슈트라카이젠 역시 오베른과 마찬가지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에 대륙을 지배했던 마지막 황제답게 그의 말투는 오연하기 그지없었다.
[신기하군. 데스 나이트가 아닌 괴이한 방법으로 날 깨우다니. 게다가 생전의 기억이 그대로 떠오르다니……. 무엇보다 날 흥분시키는 건 뼈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얼굴과 몸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그대의 정체는 뭐지?]
단순 무식 지랄의 오베른과 달리, 슈트라카이젠은 제법 머리가 뛰어난 듯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하며,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관찰하는 능력까지.
역시나 제국의 황제다웠다.
“난 이방인이긴 하나, 이 아르니안 대륙이 아닌 드래곤 산맥 너머의 천 제국에서 왔다. 내 특기는 시체를 비전의 방법으로 제작해 피부 조직과 신경조직까지 되살려 내는 강시술이다. 넌 그중에서도 내가 만든 최고의 역작인 음양마령강시고.”
[흐음, 그래? 하긴, 이 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하지만 말이야…….]
“…….”
[난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날 이렇게 본래의 모습 그대로 살려 준 건 고맙다만, 이쯤에서 끝내자. 내가 널 죽이기 전에 말이야.]
역시나 폭군이라는 별명답게 녀석의 성정은 흉포함 그 자체였다. 다시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듯 자신을 깨워준 천휘를 핍박할 수 있단 말인가.
채앵.
[주인, 뒤로 물러서라.]
슈트라카이젠의 끈적끈적한 살기에 오베른이 먼저 반응하며 클레이모어를 꺼내들었다. 주인인 천휘를 슈트라카이젠으로부터 지키고자 함이었다.
[호오, 제법 쓸 만한 종자를 데리고 다니는군. 무려 그랜드 소드마스터인가? 하지만 그 정도 기사만으로는 날 어쩌지 못할 텐데?]
[흐읍!]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천마강시이건만, 슈트라카이젠이 뿜어내는 엄청난 마나의 파도에 오베른은 제자리에서 기합까지 내지르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졌다.
“뒤로 비켜, 오베른.”
[무슨 소리인가? 제아무리 주인의 똥이 굵다고 해도, 저 녀석은 무리다. 내가 맡는다.]
“너도 무리야. 그건 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 넌 빠져. 녀석은 내가 맡을 테니.”
[그럴 수는 없다. 난 주인의 머슴! 주인이 위험해 빠진 것을 본 이상 물러날 수는 없다!]
“미안. 아공간 오픈, 오베른 역소환!”
계속되는 오베른의 고집에 천휘는 별수 없다는 듯 그를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호오, 아공간이라니, 이 시대에도 8서클 마스터가 있는 모양이군. 넌 그 8서클 마스터와 친분이 두터운 모양이고. 이거 제법 흥미진진하군.]
“큭큭,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네가 아직도 황제인 줄 아는 거냐?”
[뭣이?]
천휘의 도발적인 말에 슈트라카이젠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했다. 조금 전 꽃소년의 얼굴과는 사뭇 대조되는, 흡사 야차의 형상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네놈이 말아먹은 하스렌 제국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한마디로 이제 시중 들어줄 시녀도, 네 분노를 받아줄 신하도 없다는 소리다. 군소리 말고 내 꼬붕이나 하면서 지내. 그게 네 운명이다.”
[…더 지껄여 봐라.]
“못할 것도 없지. 수백, 수천만의 희생자를 내고 제국을 말아먹은 너 따위는 한번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거다, 이 밥맛없는 개자식아!”
[…대꾸할 가치조차 없군. 그냥 죽어라!]
슈트라카이젠의 현재 모습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한마디로 말해, 무기조차 없다는 말. 하지만 소드엠페러의 경지에 오른 그에게 무기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었다.
삐이익.
[크아아아악!]
슈트라카이젠의 수도가 천휘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그 찰나, 귓가를 울리는 작은 피리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에 호응하듯 슈트라카이젠의 비명 소리도 동시에 터져 나왔다.
[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 냐.]
어찌나 극심한 고통이었는지 슈트라카이젠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분노에 찬 눈빛으로 천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놈 같은 괴물을 만드는데 내가 아무런 안전장치도 안 만들어뒀을 것 같냐? 아서라. 나 그렇게 멍청한 놈 아니거든?”
[…….]
천휘의 말에 슈트라카이젠이 그의 손에 들린 작은 피리를 쳐다봤다. 피리라기보다는 오카리나에 더 가까운 형태였지만, 소리는 분명 피리 소리에 더 근접한 것이었다.
“이게 뭐냐고? 이건 ‘만드라고라의 비명’이라는 피리다. 만드라고라를 채취하는 약초꾼들이 즐겨 사용하는 건데, 이 피리 소리를 들으면 만드라고라의 뿌리가 설사 땅속에 있다 해도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물건이지. 극렬한 고통을 동반한 비명을 말이야.”
[…그렇다면 내 몸속에 만드라고라를 복용시킨 모양이군. 아니면 그와 근접한 무언가를 말이야.]
“바로 맞혔다. 이제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겠지? 뭣하면 한 번 더 불어줄까?”
삐이익.
[크아아아악! 그만! 그만!]
“큭큭큭.”
슈트라카이젠이 비명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천휘는 즐거운 듯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슈트라카이젠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더 괴기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 * *
비명을 내지르는 슈트라카이젠을 아공간으로 보낸 천휘는 곧바로 다음 음양마령강시 제작에 착수했다.
이번에 강시로 만들 시체는 다름 아닌 하이 엘프 퀸 데보타.
과연 강시가 되어서도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앞서 먼저 제작한 음양마령강시 슈트라카이젠이 생전의 지식과 검술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그 가능성을 더해주었다.
“아공간 오픈, 오베른 소환.”
[무슨 일이지, 주인?]
“넌 내가 소환하면 그 소리밖에 할 줄 모르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휴우, 내가 네 녀석과 뭔 말을 나누겠냐. 잔말 말고, 그 누구도 저 문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해. 그리고 내가 먼저 말 걸기 전에는 절대 말 걸지 말고, 날 건드리지도 마! 알았지?”
[그렇게 하지. 난 주인의 지시를 잘 따르는 최고의 머슴이니까.]
“…….”
천휘는 오베른의 말을 무시하며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시약을 제조했다. 이미 성공을 거둔 레시피였기에 천휘로서는 한결 부담을 덜고 빠르게 제조해나갔다.
“좋았어!”
마지막 만드라고라까지 넣은 천휘는 이내 3시간을 기다리며 욕조를 바라봤다. 두 번째 제작이기에 소홀히 할 수도 있으련만, 천휘는 그렇지 않았다. 음양마령강시 제작은 그만큼 고난이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천휘는 이전처럼 하이 엘프 퀸 데보타의 시체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쯧쯧쯧, 그러게 욕심을 부리니까 이렇게 되지. 안 그래?”
천휘는 데보타의 섹시하고도 청순한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만약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터다. 물론 자신은 이방인이니 그녀에게 죽어줄 수도 있었지만, 태양의 진실에 대한 욕심이 천휘로 하여금 독기를 품게 만들었다.
“뭐, 이제 와서 소용없는 일이지. 아무튼 이제부터라도 마음 곱게 쓰라고.”
무수한 남자 유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데보타.
하지만 그 아름다운 외모의 이면에는 독사보다 독하고, 장미의 가시보다 날카로운 독심이 숨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천휘가 유일했지만.
보름은 금세 지나갔다.
그사이 천휘는 로빈의 마법 수련장에서 열심히 몸을 굴려 가며 피스트 마스터리와 오러 마스터리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후우, 기력도 다했으니 휴식이나 취해볼까? 우적우적.”
벌써 3시간째 쉬지 않고 몸을 굴린 탓에 기력이나 포만감이 눈에 띄게 저하되어 있었다.
때문에 천휘는 땅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육포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젠장. 육포 먹는 것도 질렸고, 조만간 블랙헤드를 만나서 뜨끈뜨끈한 밥 좀 얻어먹어야겠다. 우적우적.”
게임 속에서 한 달, 현실에서는 무려 일주일 동안 방을 빠져나가지 않고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병행하며 살아온 천휘로서는 현실에서건 게임 속에서건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리웠다.
“흐음, 이제 방으로 돌아가 볼까? 오늘내일 중으로 강시화가 막바지에 이를 테니……. 뭐야? 언제부터 시작된 거야!”
천휘가 이내 마법 수련장에서 마법 실험실로 건너오자 욕조는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딱 봐도 끓기 시작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듯했다.
“오베른, 언제부터 이랬어? 왜 날 안 부른 거야!”
[무슨 소리인가, 주인? 주인이 분명 보름 전에 내게 절대 먼저 말 걸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부르지 않은 거다.]
“이런, 빌어먹을!”
예상보다 빠르게 강시화가 막바지에 도달했다. 멍청한 오베른을 믿고 있지는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일이 터지고 나니 천휘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바로 시작한다!’
오베른을 탓하기보다는 먼저 강시화가 진행되는 것에 고루마공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천휘는 곧바로 욕조에 손을 담갔다.
‘생각보다 기운을 덜 잡아먹는다?’
조금 전의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확실히 데보타의 시체가 고루마공의 기운을 덜 흡수하고 있었다. 그에 이번에는 좀 더 수월하게 그녀를 음양마령강시로 제작할 수 있었다.
“큭큭큭, 일어나지?”
데보타의 시체는 살아생전의 로브를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다.
사실 슈트라카이젠은 처음 발견했을 당시에 이렇다 할 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탓에 나체로 강시화되었던 것이지만, 그녀의 시체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뭐지?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건가?]
음양마령강시로 탈바꿈한 데보타는 주변을 살피며 마치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몽환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이, 마녀, 정신이 좀 드냐?”
[넌! 이 싸가지! 날 어떻게 한 거야!]
8서클 마스터답게 그녀의 손에는 벌써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다행히 마법과 관련된 능력을 잃어버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삐이익.
[끄아아악!]
슈트라카이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워낙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관통하고 있는 탓인지, 손에 모이던 마나도 모조리 흐트러지고 말았다.
“온몸이 찌릿찌릿하지? 너는 이제 내 수하가 된 거야. 그러니까 주인에게 대들지 마라, 이 마녀야.”
[크윽, 감히… 누구에게…….]
삐이익.
[끄아아악!]
데보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듯하자 천휘가 다시 한 번 피리를 불었다. 그에 데보타는 여지없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 마녀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내가 네 주인이라고 했지? 주인에게 말하는 투가 너무 싸가지 없다?”
[네놈… 따위는… 한 손에… 끄아아악!]
“이거 안 되겠네. 이 가시나, 마녀인 줄만 알았더니 독특한 취향까지 가지고 있었잖아? 맞는 걸 좋아한다라. 이런 걸 마조히즘이라고 하나? 뭐, 난 사디즘은 아니지만 네 버릇을 고칠 필요는 있으니까 충분히 즐겨 주도록 하지.”
삐이익.
[끄아아악!]
삐이익.
[끄아아악!]
그날 밤, 진 마탑에는 피리 소리와 여성의 신음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뭇 남자 마법사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