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하이랜더 길드 (23/82)

제2장. 하이랜더 길드

부들부들.

“헉헉.”

흡사 땅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몸을 떠는 데보타를 보며 천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무려 10분 동안 쉴 새 없이 그녀를 주먹으로 가격했더니 천휘 자신도 기력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만 것이다.

“질겅질겅. 그나저나 이 여자, 어떻게 처리하지?”

바닥까지 떨어진 포만감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무한의 행낭에서 육포를 꺼내 씹으며 간헐적으로 움직이는 데보타를 바라봤다.

“이대로 두고 가자니 훗날 후환이 두렵고, 그렇다고 처치하자니 양심에 찔리고. 어떻게 해야 하려나…….”

만약 천휘가 이곳에서 그녀를 처치한다면 하이 엘프들에게 쫓기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가 범인이라는 걸 모르겠지만, 바렌트 왕국을 등에 업은 그들이라면 언젠가는 그를 찾아낼 공산이 컸다.

‘역시 뒤끝 없이…….’

머리를 땅에 묻은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오자 천휘의 눈빛에 악독한 살기가 어렸다.

“빌어먹을!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처치해야 하다니!”

미인은 능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들은 영완과 같은 노총각들에게 있어 꿈과 희망을 안겨다주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데보타는 미인이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초극의 미인이다. 그런 그녀를 이대로 세상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니…….

“지워버려? 응? 그러고 보니!”

천휘 자신이 누구인가!

죽은 시체도 되살린다는 강시술사가 아닌가!

게다가 이제는 천마강시 이상의 뛰어난 강시를 제작할 수 있는 최고의 강시술사다. 천마강시 위 단계의 강시라면 그녀를 살아생전과 다름없이 부활시킬 수 있을 터였다.

“좋아,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행여나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고 하이 엘프의 레인저들이 이곳을 찾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앗!”

그녀를 처치하기로 마음먹은 천휘는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8서클 대마도사답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나 회복을 하고 있을 터. 천휘는 그녀의 명성에 걸맞게 자신이 지닌 최강의 스킬로 그녀를 처치하려는 심산이었다.

“악마의 주먹!”

콰아앙!

악마의 힘을 담은 파멸의 주먹이 그녀의 등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8서클 대마도사 데보타 엘 클라리넨을 처치함으로써 악명이 300,000 상승하셨습니다.]

[앞으로 6개월 후부터 분노한 하이 엘프들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쳇.”

무려 레벨이 5개나 올랐음에도 천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악명의 상승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하이 엘프들의 추격을 받는다는 대목에서 앞으로 꽤나 골치 아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뭐, 덕분에 8서클 대마도사를 강시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쌤쌤인 건가?”

자신의 목을 노리는 이들이 더 늘긴 했지만, 천휘는 데보타의 시체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그렸다.

* * *

데보타의 시체를 확보한 천휘는 곧바로 신전을 빠져나와 파뱃을 타고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로 날아갔다. 아공간을 가졌으니 그곳에 남겨 놓은 철골강시들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파뱃, 더 빨리! 더 빨리!”

끼에… 짹짹.

아직까지도 파뱃은 천휘가 강제적으로 부여한 울음에 익숙하지 않은지 기이한 울음을 내뱉으며 속도를 높였다.

휘익, 휘익.

천휘의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나풀거렸다. 그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에 천휘는 두 눈을 감고 양팔을 벌려 바람을 만끽했다.

휘청.

“으아아악!”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한마디로 말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파뱃이 얼마나 빠르게 날아가는지 증명해주듯, 천휘의 전면으로 엄청난 맞바람이 불어 닥쳐 천휘를 뒤로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다.

끼엑? 끼에에엑!

천휘가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파뱃은 비명을 내지르며 아래로 급강하했다.

“으아악! 파뱃!”

끼에에엑!

천휘의 외침에 파뱃이 그의 위로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웬일인지 파뱃은 곧바로 천휘를 구하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으악! 어서 구하지 못해? 이 자식이, 감히!”

파뱃의 만행에 천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파뱃은 그런 천휘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끼에에엑!

그동안 마음껏 소리를 내지르지 못한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파뱃은 마음 놓고 자신이 내고 싶은 소리를 발산했다.

그런 녀석의 의도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한 천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빌어먹을. 좋아! 앞으로 네 마음대로 울어! 됐지? 어서 구하지 못해! 으아악!”

어느새 지면에 가까워진 것을 본 천휘가 비명을 내질렀다. 제아무리 가상현실이라고는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져 곤죽이 되는 것은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끼에에엑!

휘익, 쿵.

간신히 파뱃이 천휘를 등에 태우고 하늘 위로 솟구쳤다. 불과 지면에서 채 1백 미터도 남지 않는 높이에서였다.

“후아아.”

파뱃의 등 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천휘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감히 주인을 골탕 먹인 이 몹쓸 강시 놈을 어떻게 응징해야 좋을지 고심하며 녀석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 * *

카이젠 산맥의 중심에 위치한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부근은 여전히 인적이 드문 사냥터였다.

카이젠 산맥에 워낙 흉흉한 몬스터들이 즐비한 탓도 있지만, 최근 테오른 왕국에 나타난 사내들의 영향도 컸다.

그들의 이름은 하이랜더.

아르니안 대륙의 10대 길드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길드다.

투 마스터 후반의 고렙 랭커 소수 정예 길드인 하이랜더는 지존 12인 중 하나인 로열 하이랜더 브리튼의 존재로 더욱 유명한 길드였다.

그들은 한 나라에 정착하지 않고 대륙을 주유하며 아직 클리어되지 않은 고위 던전이나 사냥터를 클리어하는 일종의 헌터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테오른 왕국에 나타났고, 아직까지 클리어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에 들어섰다.

“여긴가?”

“그래. 역시나 대단한 명성을 지닌 녀석들답게 카이젠의 사이클롭스들은 그 위용부터가 남다르군.”

“그러게. 저 펜하르트 왕국의 고담 분지에 있던 고담 사이클롭스들도 강했지만, 이곳의 사이클롭스들은 남다른 면이 있어. 적어도 투 마스터 이상, 잘하면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을 거다.”

하이랜더를 이끌고 있는 두 사내.

로열 하이랜더 브리튼과 하이랜더의 머리라 불리는 페이튼이 그들이었다.

“그래봤자 우리에겐 안 되지.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사냥터지만, 우리 하이랜더들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해. 안 그래, 브리튼?”

“언제든지 방심은 금물이다. 길원들에게 현실 시간으로 내일 저녁 7시에 모이라고 전해. 단 1초라도 늦으면 내일 사냥에서는 제외된다는 것도 확실히 명시해두고.”

“어련하시겠어.”

친구인 브리튼의 말에 페이튼이 이죽거리며 타 길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페이튼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브리튼은 오렌지색으로 물든 카이젠의 산맥들을 바라봤다. 어느새 하늘은 저녁노을로 물들며 브리튼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투, 파괴.

로열 하이랜더 브리튼은 벌써부터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모조리 베는 상상에 빠져 있었다.

* * *

휘익, 탁.

“파뱃, 수고했어. 빙옥, 아니 아공간으로 돌아가. 아공간 오픈!”

끼에에엑.

철골강시들을 숨겨 놓은 동굴의 입구에 도착한 천휘는 아공간을 오픈시켜 파뱃을 그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제 그만 효용이 떨어진 빙옥은 다른 강시들과 함께 아공간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저벅저벅.

“후훗, 드디어인가?”

동굴 안으로 걸어가는 천휘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어려 있었다. 더불어 머리카락도 하늘로 삐쭉 솟아올라 그가 지금 얼마만큼 흥분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내가 왔다, 나의 애기들아!”

지능을 배제하고 오로지 강철 같은 피부와 엄청난 힘을 부여한 카이젠 사이클롭스 철골강시들.

천휘는 그들을 보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공간 오픈. 미친 소 나와!”

스파앗.

음메에에.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바라보던 천휘는 아공간에서 미친 소를 소환했다.

“이제부터 너희를 돌쇠라 지칭한다. 미친 소, 너는 이 돌쇠들을 이끄는 변강쇠다. 알겠냐?”

음메에에!

쿵쾅쿵쾅.

천휘의 말에 미친 소가 거칠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했다. 무려 1백 기에 달하는 부하들이 생겼다는 기쁨에서일까? 녀석의 포효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창대했다.

천휘 역시 드디어 녀석들을 가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았어! 너희도 이제 데리고 다닐 수 있겠다. 간만에 제대로 된 사냥 한번 해보실까?”

내일은 영완이 다니는 예슬 고등학교가 드디어 방학식을 하는 날이었다. 때문에 조금 늦게 가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에 천휘는 철골강시들을 이끌고 대규모 사냥을 해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첫 사냥감은 당연히 저 아래 서성이고 있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이 될 터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천휘는 철골강시들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곧바로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입구로 향했다.

“응? 뭐지, 저건?”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사냥터는 웬만한 고렙 유저들도 잘 찾지 않는 일종의 버려진 사냥터였다.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이 강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녀석들이 경험치는 물론이고 아이템마저 짠 사냥감인 탓이었다.

그런데 대규모의 사람들이 야영을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오십 명 이상인가? 아무래도 이곳에서 모두들 야영지를 마련하고 접속을 종료한 모양인데? 누구지?”

호기심에 야영지를 돌아다니던 천휘는 그곳이 수십 명의 유저들이 안전하게 접속 종료를 하기 위해 야영지를 마련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위치를 봐서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사냥하려고 온 거겠지? 흐음, 규모로 봐서는 녀석들을 몰살시키려는 심산인가 본데?”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은 최소한 250레벨 이상의 고렙은 되어야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다. 이 근처에서 야영지를 마련했다면 그들 모두가 250레벨 이상의 고렙 유저들이라는 소리.

그런 고렙 유저 수십 명이 파티를 이뤄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사냥한다면, 녀석들은 여지없이 몰살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 전에 내가 처치해버릴까?”

어차피 자신은 철골강시들의 위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이곳에 들른 터였다. 자신이 만든 1백 기의 철골강시들이라면, 카이젠 사이클롭스 수백 마리가 떼 지어 서식하는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를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휘는 그러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이 아닌, 그들을 사냥하러 온 고렙 유저들을 상대로 자신이 제작한 철골강시들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은 탓이었다.

‘아직 모닥불이 채 꺼지지 않았어. 저 정도라면 접속 종료를 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거다. 지금 현실은 새벽 2시로 치닫고 있는 상황. 내일 오후, 혹은 저녁 시간에 녀석들은 다시 접속한다.’

천휘는 야영지를 바라보며 몸을 돌렸다.

결전의 순간은 오늘이 아닌 내일이었다.

* * *

[이상으로 방학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호, 드디어 방학이구나!”

“빌어먹을! 좋아할 건 또 뭐냐? 어차피 다음 주부터는 하루 온종일 학원에 다녀야 하는데.”

“너 학원 다니냐? 우하하하! 이 몸은 학원 안 다니신다. 하루 종일 『오벨리스크』를 할 수 있다는 말씀!”

“젠장! 진짜냐? 부럽다!”

방학식이 끝나고 학생들은 곧바로 귀가했다.

정부의 교육정책으로 고등학교에서 더 이상 보충 학습을 할 수 없게 된 지금, 방학은 학생들에게 다음 학기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되고 있었다.

물론 학원을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제외하고.

“자, 모두 주목해주세요.”

교무실에서도 교사들이 각자 들뜬 마음을 안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런 교사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희끗희끗한 머리의 교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교사들을 집중시켰다.

“에, 다음 주부터 일주일간 일본으로 온천 여행 가는 거 모두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개인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불참하시는 몇몇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하는 뜻 깊은 자리인 만큼 정해진 시각에 정확하게 공항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이시영 선생은 잠깐 나 좀 보고 가지.”

“알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푹 쉬시고 다음 주 월요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교감 선생님도 주말 푹 쉬세요.”

교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자신의 철골강시들과 결전을 벌일 그들이 언제 다시 접속할지 알 수 없으니 미리 접속해서 기다리고 있을 심산이었다.

탁.

“어허! 서 선생, 어딜 가려고?”

하지만 그런 영완을 붙잡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김국헌 선생이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볼일은 무슨. 오늘 저녁에 한잔하자는 거 잊었어? 여선생들도 다 참석하는 자리니까 서 선생도 빠질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아…….”

생각해보니 며칠 전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방학식이 있는 날 조촐하게 평교사들끼리 회식이나 하자는 이야기였다.

‘젠장! 하필 오늘 같은 날.’

회식 자리는 교사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자리였다. 폐쇄적인 교직 사회에서 안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면 피곤한 것은 결국 본인이었다.

이것은 의당 교직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인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영완도 그러한 점을 알고 있기에 회식 자리에서 빠질 수가 없었다. 일부 교사들만 모이는 술자리라면 양해를 구하고 빠질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이 모이는 술자리라면 그만 빠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 그럼 그렇게 알고, 다들 일어나볼까? 오늘 회식 담당은 제가 맡겠습니다. 다들 가시죠.”

김국헌 선생은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마당발이다. 게다가 유머 감각이 뛰어나 대부분의 동료 교사들이 그를 좋아했다. 게다가 영완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이기도 했다.

결국 영완은 그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희영도 회식 자리에 참석한다는 데에야…….

웅성웅성.

회식 자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삼겹살집에서 시작되었다. 회식에는 뭐니 뭐니 해도 삼겹살이 최고라는 김국헌 선생의 철학 때문이었다.

“서 선생, 한 잔 받아.”

“아, 예.”

영완은 김민선이라는 여선생으로부터 술을 받았다. 희영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학교 최고의 미녀로 군림하던 그녀였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벌써 서른이 넘은 골드 미스라는 점이었다.

“이야, 서 선생, 은근히 술 잘 먹네?”

“아, 뭘요. 그렇게 말하는 김 선생님이 더 잘 드시는데요, 뭘.”

“이 나이 먹도록 술 못 마시면 누가 같이 마셔 주지도 않으니까 별수 없지.”

“뭘요, 김 선생님처럼 예쁘신 분이 그런 말씀하시면 욕먹어요.”

“호호, 그래? 서 선생, 알고 보니 아부도 떨 줄 아네? 자, 자, 한 잔 더 받아.”

“네.”

간만의 술자리인 탓에 영완도 『오벨리스크』에 대한 생각을 접고 즐겁게 술잔을 들이켰다.

사실 그동안 회식 자리에서 칙칙한 남교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인 탓에 여교사들과는 친해질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서 선생, 내 잔도 좀 받아.”

“아, 예.”

영완의 주변에는 여교사들밖에 없었다. 그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오느라 좀 늦게 자리에 참석해 가장자리에 앉은 여교사들과 합석한 덕이었다.

그렇게 영완이 한창 여교사들과 희희낙락거리며 회식 자리를 즐기는 와중에 갑자기 그의 몸이 쿵 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큭, 무슨 짓이야!”

“아,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통로에 몸을 걸치고 있으라고 했습니까?”

보나 마나 영완을 밀친 사내는 시영이었다. 그의 얼굴에 담긴 사악한 웃음에 영완은 순간 화가 치밀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툭.

그 순간 영완의 안경테가 매가리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조금 전 충격으로 인해 안경테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앗!”

“세상에! 서 선생님이 저렇게 잘생기셨나?”

안경이 부러지자 더 이상 영완의 얼굴을 가로막는 것이 사라져 그의 본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안경에 가려 감춰져 있던 영완의 부드럽고 남자다운 눈빛에 여교사들은 너나없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은 희영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흠흠.”

그런 여교사들의 눈빛이 어색했는지 영완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젠장! 이제 편한 학교생활은 글러먹은 건가?’

사실 영완이 굳이 렌즈를 끼지 않고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착용한 것은 괜히 주변의 시선을 끌기 싫은 탓이었다. 자신이 연예인처럼 잘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들의 고개를 한 번쯤 돌리게 만드는 얼굴을 지닌 탓에 이래저래 귀찮은 일들을 겪으면서 일어난 자기 보호였다.

“쳇! 잘생기긴, 기생오라비같이 생겼을 뿐인데.”

“그래도 제가 보기엔 이 선생님보다 서 선생님이 훨씬 잘생기신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선생님들?”

“제가 보기에도 그러네요. 여태 왜 안경을 쓰고 다니신 거예요? 앞으로는 안경 벗고 다니세요. 아셨죠?”

“주 선생님 말이 맞아요. 다음 주 온천 여행에서는 절대 안경 쓰시기 없기예요!”

“아, 네, 뭐.”

미혼 여교사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영완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영을 바라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표독스러운 시선.

영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봤다.

* * *

“쳇, 재수 없는 자식. 괜히 밀쳐 가지고는.”

집으로 돌아온 영완은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는 소파에 편히 앉았다. 그리고 테가 부러진 안경을 보며 시영에 대한 분노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개 같은 놈! 당장에라도 네놈을 쳐 죽이고 싶지만, 내가 참는다. 확실한 힘을 얻기 전까지는 봐주마!”

영완의 캐릭터인 천휘는 이제 어느 정도 힘을 갖췄다. 아니, 개인이 지니기에는 차고 넘칠 만큼 강력한 힘을 보유했다고 봐야 옳았다. 하지만 영완이 상대할 이는 돈을 풀어 고렙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시영의 캐릭터 그랜저였다.

황제의 계곡에서도 봤듯이 그와 함께하는 동료 유저들은 대부분이 투 마스터 이상의 고렙들이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랜저가 그의 근거지인 펜하르트 왕국에서 길드를 만들고자 고렙 유저들을 포섭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모로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다.

영완은 그에 대한 복수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오벨리스크』에 접속했다.

스파앗.

“젠장! 생각지도 못했던 회식 때문에 일을 그르쳤네. 그 사람들, 아직 있을까?”

현실 시각은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여교사들의 만류에 하는 수 없이 2차까지 끌려가고 만 것이다.

“일단 찾아보자! 아공간 오픈! 파뱃 소환!”

끼에에엑.

“…빌어먹을 울음소리. 언젠가는 내가 확 뜯어고친다!”

움찔.

천휘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파뱃이 몸을 떨며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자, 가자!”

끼에에엑!

천휘는 곧바로 파뱃의 등에 올라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가 있는 곳은 철골강시들의 창고로 쓰였던 바로 그 동굴이었다.

“앗! 아직 있네?”

다행히도 아직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를 정복하지 못했는지 수십 명의 유저들이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상대로 종횡무진 필드를 누비고 있었다.

“대단해! 저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있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전투는 흡사 군대를 연상시켰다. 4명 혹은 3명씩 조를 이뤄 강력한 근력과 체력을 자랑하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요리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조금만 더 접근해볼까?”

저 정도의 무위와 단결력을 보여 주는 이들이라면 분명 대륙에서도 이름 높은 길드의 일원들일 터였다.

대륙 10대 길드는 물론이고, 그에 준하는 길드들의 표식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천휘였기에 그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파뱃으로 하여금 좀 더 낮게 비행하라고 명령했다.

휘이잉.

파뱃의 날갯짓에 주변의 바람이 거칠게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뱃이 날개를 접으며 하강하자 주변의 공기가 마치 녀석의 날개를 타고 뒤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카앙, 카앙.

“5대와 8대는 왼쪽으로 우회해서 녀석들의 뒤를 쳐라!”

“1대는 나와 함께 녀석들의 중심을 흔들어놓는다!”

파뱃이 지상에서 50미터 높이까지 하강하자 그제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불어 그들의 흉갑 중앙에 새겨진 표식도 천휘의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칼날이 아닌 톱날을 지닌 거대한 검신, 그리고 그 기형 검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뱀.

‘하이랜더 길드?’

예사롭지 않은 그 표식을 바라보며 천휘는 곧바로 그들이 10대 길드 중 하나인 하이랜더 길드라는 걸 눈치 챘다.

단일 세력 중에서 가장 패도적이고 자유분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하이랜더 길드.

천휘는 예상치 못한 그들의 정체에 다소 당황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마스터, 하늘을 봐라!”

“하늘은 왜? 응? 와이번이 아닌가! 그것도 가죽이 붉은 것으로 봐선 레드 와이번! 저 레어한 몬스터가!”

1대 소속의 유저 한 명이 전한 말에 하늘을 올려다본 로열 하이랜더 브리튼은 그곳에 하늘을 배회하고 있는 레드 와이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마스터?”

하이랜더 길드의 모든 길원들은 마스터인 브리튼이나 부마스터인 페이튼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길드라는 이름 아래 뭉쳐 있을 뿐, 서로가 대등한 존재들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브리튼과 겨뤄서 쉽게 지는 유저가 없었고, 반대로 브리튼 역시 그들과 겨뤄서 이길 수 있다는 장담을 하지 않을 만큼 그들 모두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일단은 예의 주시하며 기다리지. 아무래도 저 녀석은 피 냄새를 맡고 이곳에 온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알아서 땅으로 내려올 거다. 우린 그때를 노린다.”

“알았다!”

좀 더 지켜보자고 말한 브리튼은 이내 레드 와이번에 대한 관심을 끊고 눈앞의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딴생각을 할 만큼 그는 미숙한 전사가 아니었다.

“흐음, 눈빛으로 봐서는 파뱃의 정체만 알아보고 날 보진 못한 것 같은데 말이야.”

천휘는 파뱃의 등 위에서 몸을 숨겨 하이랜더 길드의 이목으로부터 피했다. 괜히 그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한 번쯤 맞서보고 싶었던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밑천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이랜더 길드라면 내 철골강시들의 상대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어. 아니, 차고도 넘치는 첫 실전 상대라고 할 수 있겠지.”

저들이 제아무리 하이랜더 길드라고 해도 천휘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철골강시들은 그만큼 대단했고, 거기에 더해 천휘에게는 바로 그것이 있었다.

태양신 라멘의 신물이자 아르니안 대륙 최초의 신급 아이템인 태양의 진실.

철골강시들의 공격속도며 이동속도, 게다가 체력 회복속도까지 대폭 상승시켜 주니 철골강시들은 본래 능력의 1.5배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터였다.

“어차피 저들이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처치하는 것은 시간문제. 조금만 기다려 볼까?”

천휘는 하이랜더 길드가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를 클리어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저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한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었다. 곧이어 죽음을 맞이할 저들에 대한 예우였다.

“내가 좀 도와주면 더 빠르겠지? 으흐흐.”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은 아직도 수백 마리나 남아 있었다. 저들이 어느 정도 해치운 모양이지만, 아직까지는 어림도 없었다. 그만큼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에는 많은 숫자의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파뱃, 간만에 불 좀 뿜어봐! 저들의 주변으로 둥그렇게!”

끼에에엑!

천휘의 명령에 파뱃이 즐거운 듯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날뛸 기회가 적어 심심하던 모양이었다.

휘이잉.

“우아아악! 이런, 미친!”

갑작스런 파뱃의 활강에 천휘가 소리를 내지르며 녀석의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자칫하다가는 떨어질 만큼 녀석은 인정사정없이 빠르게 아래로 하강했다.

쿠아아아.

“뭐- 뭐야!”

“와이번이다! 녀석이 파이어 브레스를 내뿜었다!”

“모두 피해!”

파뱃의 급작스러운 브레스 공격에 하이랜더 길드의 유저들이 뒤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녀석의 브레스는 그들에게 미치지 않고 오로지 그들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카이젠 사이클롭스들만을 처치한 채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언제 브레스를 내뿜었냐는 듯 파뱃은 곧바로 하늘 위로 솟구치며 천휘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저건 뭐야?”

“그- 글쎄?”

정확하게 자신들의 주변에 뿜어진 강력한 불의 숨결.

정면으로 맞았다면 제아무리 고렙 전사들인 그들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강력한 불의 숨결이 어찌 자신들을 정확히 피하는 위치에 떨어졌는지 하이랜더의 유저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봤냐?”

“봤다.”

그런 와중에도 브리튼과 페이튼은 진중한 눈빛으로 하늘 높이 사라지고 있는 레드 와이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맞아, 그것도 사람이었다. 복장으로 봐서는 격투가 정도? 나이는 우리와 비슷한 또래, 아니면 좀 더 어리거나.”

“일반 격투가가 아니다. 녀석이 입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발록의 심장이었어.”

브리튼의 말에 페이튼이 놀란 눈빛으로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며 그를 바라봤다.

“발록의 심장? 그 레전드 등급의 무복 말이냐?”

“그래, 격투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볼 만한 바로 그 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

페이튼의 말에 브리튼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얼마 전 테오른의 수도 오베른을 발칵 뒤집어놓은 골든 시크릿이지.”

“흐음, 그런데 어떻게 그가 레드 와이번의 등 위에 타고 있는 거지?”

페이튼의 물음에 브리튼도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니 모를 수밖에.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란 소리지.”

“흐음…….”

콰아앙!

“둘이 뭘 속닥거리는 거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었어?”

동료의 질책하는 말에 브리튼과 페이튼은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전투에 합류했다.

이곳은 단 일분일초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사냥터다. 더 이상 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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