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제1장. 데보타 골탕 먹이기 (22/82)

제1장. 데보타 골탕 먹이기

데보타가 아공간 마법을 펼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 천휘는 머릿속으로 데보타와 자신의 능력을 감안해 작전을 짜내기 시작했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감히 8서클 대마도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오벨리스크』에서도 고작해야 단 2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8서클 대마도사였다. 유저로 치면 포 마스터에 준하는 격. 이제 겨우 트리플 마스터의 경지를 두드리고 있는 천휘로서는 대적조차 못할 상대인 것이다.

‘오베른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천휘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는 다름 아닌 오베른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조금 전 에이션트 히드라와의 전투로 인해 절실하게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기에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 이제 이 최상급 마나석만 이 마법진의 중심에 놓으면 끝난다. 슬슬 그 물건을 내놓으실까?”

“어림없는 소리! 아공간이 내게 종속되기 전까지는 절대 건네줄 수 없다!”

“…난 그렇게 인내심이 좋은 여자가 아닌데 말이야. 뭐, 네 말도 틀리지는 않으니 그렇게 하지. 단!”

꿀꺽.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 데보타의 눈빛에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강렬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보며 천휘는 그녀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젠장! 저런 변태 아줌마한테 이대로 이 아이템을 뺏겨야 하나?’

천휘는 손에 들린 태양신 라멘의 신물이자 아르니안 최초의 신급 아이템인 ‘태양의 진실’을 바라봤다.

그것은 옵션이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아르니안 대륙에 거대한 피바람을 몰고 올 정도의 물건으로, 다수의 강시들을 제작해 그랜저를 상대해야 하는 천휘에게 있어 이보다 더 탐나는 아이템은 다시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아이템을 눈 뜨고 뺏겨야 한다니…….

천휘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가라. 네게 아공간을 종속시켜 주지.”

언제부터인가 아예 대놓고 반말로 지껄이는 데보타를 보며 천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2백 살이 넘은 노파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외모로 봤을 때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반말을 해대니 천휘로서는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데보타의 반말을 무시한 채 천휘가 물었다.

“얼마든지.”

“…….”

천휘의 물음에 데보타는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아공간 마법조차도 식은 죽 먹기처럼 손쉬운 일인가? 명색이 8서클 마법, 그것도 가장 펼치기 힘든 마법 중의 하나인 아공간 마법인데, 너무 손쉽게 해내는 것 같아서 말이야. 행여나 당신이 나쁜 생각이라도 품지 않았나 싶은데, 안 그래?”

무척이나 도발적인 물음이었다. 엄청난 명성을 등에 업은 대마도사를 거짓말쟁이로 전락시키는 것은 물론, 비열한 사람으로까지 내몰고 있는 것이다.

“후훗, 역시나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 뭐, 나도 체면이 있으니 이딴 짓은 관둬볼까?”

‘사실이었던 거냐!’

그저 데보타를 떠보려는 심산이었는데, 그녀는 정말 그럴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사전에 미리 알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죽도 밥도 안 될 뻔했다.

“…….”

“그렇게 쳐다보지 마, 제대로 해줄 테니.”

천휘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데보타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마법진을 구축하고 있는 최상급 마나석의 위치를 기존 위치에서 한 뼘 정도 뒤에 배치했다.

‘마법 역시 술법과 마찬가지로 극도의 정확성을 요구하는군. 흐음.’

아르니안 대륙으로 넘어와 고위 마법을 견식할 기회가 없었던 천휘는 그녀의 신중한 손놀림을 보며 그것이 어느 정도의 정확성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천 제국 최고의 강시술사였던 만큼 마법의 특성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파아아앗.

데보타가 최상급 마나석의 위치를 재배열하자 마법진이 별안간 새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에 천휘는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하며 데보타를 바라봤다.

“놀랄 것 없다. 8서클은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꿈의 영역이다. 일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그것이 8서클이다.”

“인간도 이미 8서클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 예로, 진 마탑의 탑주가 있어!”

데보타의 말에 발끈한 천휘가 흥분하며 말했다. 자신이 왜 흥분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은 천휘로 하여금 반발심이 일게 만들고 있었다.

“후훗, 어리석긴. 그가 진실로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일개 인간 따위가 정말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후후훗, 좋을 대로 생각해라, 애송이.”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 마탑의 탑주, 지안루지 드 갈라섹은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아마도 눈앞의 데보타처럼 이종족이거나, 혹은…

‘드래곤이었나?’

태양신 라멘이 창조한 가장 궁극에 가까운 피조물인 드래곤. 신의 축복을 받아 지식을 기억하는 인지 능력과 마법적인 재능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궁극의 생명체가 바로 드래곤이다.

‘아직까지 게임 내에서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정보는 없었다. 그들이 워낙 정체를 잘 숨기는 탓이겠지. 이거 잘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겠는데?’

데보타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템과 정보를 낚아 올린 천휘는 갑자기 그녀가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천휘 자신이 그녀의 마수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느냐에 따라 그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자, 이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그토록 원하던 아공간을 드디어 종속시켜 주지.”

“…다 좋은데, 그런 얼굴로 꼭 그런 목소리를 내야겠어? 동네 아저씨도 아니고 말이야. 처음의 목소리는 마법으로 변성한 거였나?”

데보타의 말에 천휘는 마법진의 중심으로 향하며 투덜거렸다.

“호호호, 이런 목소리를 말하는 건가?”

“좀 낫네.”

천휘의 말에 데보타의 목소리가 대번에 변했다. 이전에 처음 만났을 때의 고혹적인 목소리 그대로였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 변성기를 잘못 겪어서 말이야. 목소리 변성 마법 정도야 내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그러시겠지.”

데보타의 말에 천휘는 관심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지? 데보타, 넌 곧 옷이 흠뻑 젖게 될 거다!’

진심으로 그녀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듣고 싶어 투덜거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로 하여금 어떻게든 정신이 분산되도록 하기 위해 꼼수를 쓴 것이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그 정도로는 8서클 대마도사인 그녀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겠지만, 천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제 시작한다.”

“…….”

천휘가 마법진의 중앙에 서자 데보타의 눈빛이 진중하게 변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그녀의 진중한 눈빛에 덩달아 천휘도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태양의 진실이라는 뜻밖의 아이템을 얻긴 했지만, 진정으로 천휘가 원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수백의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보관할 수 있는 아공간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미지의 시간, 그리고 미지의 공간.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영원의 약속이여…….”

데보타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진언을 읊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시구를 읊듯 리듬감 있고 진중하게 진언을 읊어나갔다.

역시나 8서클 마법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는 마법답게 그녀가 읊는 진언은 끝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이 정도의 진언을 읊는 마법을 펼치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분명히 기회는 온다!’

데보타가 진언을 읊으면 읊을수록 마법진이 뿜어내는 빛은 약해져만 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 안에 내재된 마나 역시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공간이라는 것이 마법진을 구성하고 있는 최상급 마나석을 매개체로 하여 데보타가 보유한 마나와 상호 작용을 일으켜 만들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러한 아공간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아다만티움일 터였다.

‘마법이란 참으로 놀라워. 분명히 신이 창조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섭리를 거스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니, 이해 불가야.’

어차피 게임 개발자들이 만들어놓은 세상,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겠는가.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자신이 즐기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이곳의 새로운 공간을 구축할지이니.”

스파아앗.

데보타의 입이 드디어 멈췄다. 그와 동시에 마법진에서 마나의 아지랑이가 세차게 일렁였고, 그 아지랑이 사이로 엄청난 마나의 빛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오오…….”

그 황홀한 광경에 천휘는 그동안의 고심을 내팽개치고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이제껏 수많은 빛의 향연을 봐왔지만, 이토록 자신으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킨 광경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다. 안으로 들어서라.”

어딘가 쇠약해 보이는 목소리.

조금 전의 표독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안색은 그저 창백한 병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히죽.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천휘는 그녀 몰래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크리에이트 스페이스(Create Space)!”

“크윽!”

천휘가 마법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데보타는 일체의 기다림도 없이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이내 마법진 안으로 스며들었던 빛무리가 주변으로 폭사되더니, 이윽고 천휘의 심장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띠링! 아공간이 생성되었습니다.]

[첫 아공간의 소유자가 되어 명성이 10,000 상승합니다.]

[아공간은 크기와 무게에 상관없이 생물이 아닌 모든 물체를 보관할 수 있는 것으로, 오픈과 클로즈 명령어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습니다.]

[아공간은 항온의 공간이며, 시간이 정지된 공간입니다.]

“후후훗, 이제 신물을 받아보실까?”

아공간 생성 마법이 성공으로 돌아가자 데보타가 천휘를 바라보며 고혹적인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마법 시전으로 마나가 거의 고갈된 듯,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역시 8서클 대마도사라고 해야 하나? 8서클 마법을 이토록 완벽하게 구현해낼 줄이야.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본 것 같은데?”

“그따위 입에 발린 소리 들을 여유 없다. 어서 신물을 내놓기나 해라.”

아무래도 엘레이든의 수호자인 그녀로서는 그곳을 떠나 오랜 시간을 머무는 것이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이걸 건네기 전에, 당신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겠어?”

천휘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데보타가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현재 자신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공간 마법은 8서클 대마도사인 그녀조차도 이제 겨우 두 차례 시전했을 정도로 정교한 마법이었다. 그만큼 엄청난 심력을 요구했고, 더불어 8서클 마법 중 두 번째로 많은 마나를 요구하는 마법이었다. 제아무리 8서클 대마도사인 그녀라 할지라도 위험 부담이 큰 마법이라는 소리다.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서 그 신물을 넘겨라, 어서!”

그런 상태임에도 데보타는 전혀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마나만으로도 충분히 천휘를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신물을 넘겨야 하지?”

“뭣이?”

천휘의 대찬 말에 데보타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서 형용하기 힘들 만큼 강렬한 살기가 천휘에게 쏟아졌다.

“이건 내가 찾은 내 물건이야. 더불어 아공간은 당신이 내게 내린 임무에 대한 보상이고. 한마디로 말해, 내가 당신에게 이 신물을 넘길 하등의 이유가 없단 소리지. 안 그래?”

“오호라, 그러니까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는 고혹적인 목소리에서 강압적인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황당하긴 했지만 단번에 천휘를 처치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의 행동이 가소롭게만 보일 따름이었다.

“거역? 말이 좀 웃긴데? 난 그저 사실이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뿐인데 말이야. 그런 말은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인 하이 엘프들에게나 지껄여. 난 당신의 아랫사람이 아니야, 이 빌어먹을 노인네야!”

“노- 노인네?”

천휘의 급작스러운 발언에 데보타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그래, 이 노인네! 그까짓 마법으로 가리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았냐? 당신의 본모습이 쭈글쭈글한 노인네라는 걸 내 모를 줄 알아!”

천휘로서는 그저 해본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어느 정도 사실임을 깨닫고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화려한 옷이나 목소리로 가릴 수 있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노인네면 노인네답게 행동할 것이지, 그렇게 차려입는다고 네가 노인네라는 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 이 멍청한 노인네야!”

“머- 멍청한! 노- 노인네!”

데보타로서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었다.

8서클을 마스터한 대마도사답게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칭송받았으며, 그 누구보다 마나와의 친화도가 높은 덕에 어린 시절부터 마나의 영향으로 얼굴이 아름답고 피부가 고왔던 그녀였다.

멍청이나 노인네.

둘 다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그리고 아주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

“그뿐인 줄 알아? 노인네가 되어서 욕심은 또 어찌나 많은지. 게다가 노인네가 생명 존중의 미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욕심쟁이 노인네야!”

천휘에게 욕을 들을 때마다 데보타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더불어 그녀의 눈빛은 세찬 눈보라처럼 지독히도 차가워졌다.

‘어? 이게 아닌데?’

천휘가 그녀를 도발하는 것은 그녀가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들기를 바란 탓이었다. 본래 분노가 이성을 잠식해서 감정적으로 변하면 자신의 진신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 천휘는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데보타는 오히려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으로 대처했다. 그것은 그녀가 분노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세상 만물의 모든 지식을 다루는 대마도사답게 분노를 내재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

그녀의 빙설같이 차가운 눈이 말없이 천휘에게로 향하자 천휘는 오한이 든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섭다.’

오베른을 처음 대했을 때의 두려움과 비견될 정도로 데보타의 살기는 대단했다. 오베른이 흡사 한 마리의 야수를 대하는 듯했다면, 데보타의 살기는 마치 매서운 눈보라의 중심에 홀로 남겨진 기분마저 들게 했다.

천휘의 무복이 땀으로 흥건히 젖기 시작했다. 상하의 할 것 없이 순식간에 땀으로 젖은 천휘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얼마만큼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꾸욱.

어찌나 으스러지게 주먹을 말아 쥐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길게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천휘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 신물, 정말 내놓지 않을 거냐?”

감정의 부스러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그야말로 텁텁하게 메마른 그녀의 목소리가 천휘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하지만 가슴을 옥죄어오는 답답함에도 천휘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이미 자신은 뒤가 없는 길에 들어선 처지였다.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무척이나 대범하게 대처했다.

“사실 이방인인 네 녀석을 처치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한 번쯤 목숨을 빼앗고 보내주려 했다. 하지만 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어. 더 이상 내게 자비를 바라지 마라.”

섬뜩한 말이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그것이 오히려 두려움을 일깨우는지 천휘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 무슨!”

자신은 이방인이다. 한마디로, 한 번의 죽음은 자신에게 있어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물론, 죽음 자체가 지닌 근본적인 공포 때문에 『오벨리스크』를 즐기는 유저 대부분은 캐릭터의 목숨을 현실의 목숨과도 같이 소중하게 다루긴 하지만, 역시나 가상은 가상이다.

그런데 데보타의 말은 그런 상식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종합하자면, 한 번의 죽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선사한다는 것이 아닌가.

“바인딩(Binding)!”

“큭!”

갑작스럽게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나무줄기가 천휘의 발목을 휘감았다.

“스톤 에지(Stone Edge)!”

쿠구구궁.

“우아아아!”

그와 동시에 천휘가 서 있던 자리가 위로 치솟았다. 물론, 그를 옭아매고 있는 나무줄기는 건재했다.

“워터 볼(Water Ball)!”

휘이익.

“푸아아아!”

이내 물리적인 타격이 거의 없는 물의 구가 천휘의 전신을 흠뻑 적셨다.

“대체 뭐야!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천휘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그의 물음이 들리지 않는지 데보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소멸.”

“소- 소멸?”

죽음이 아닌 소멸이란다.

그 말인즉, 자신을 이 게임에서 영구적으로 삭제시키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운영자가 아니고서야 캐릭터를 영구 삭제시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더욱이 『오벨리스크』는 운영자들의 힘이 거의 미치지 않는 게임. 한마디로, 캐릭터의 영구 삭제는 절대 불가능했다.

“푸핫!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시지? 네가 제아무리 8서클 대마도사라 해도 태양의 신 라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이방인인 나를 소멸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

“어- 어이! 이봐!”

자신 있게 말하기는 했지만, 데보타의 심드렁한 반응이 영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천휘는 마지막 패를 꺼내들었다.

“시- 신물을 줄게! 신물을 줄 테니 어서 날 풀어줘!”

천휘는 얼른 무한의 행낭에서 태양의 진실을 꺼내들었다. 바인딩 마법으로 생성된 나무줄기가 옭아매고 있는 것은 하체뿐이었기에 다행히 상체는 움직일 수 있었다.

“필요 없다.”

“뭐- 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대답에 천휘는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차피 널 소멸시키면 신물은 내 손으로 돌아올 터. 지금은 널 소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으으윽.”

데보타의 말에 천휘는 이제 두려움을 넘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말을 들어먹지 않으니 천휘로서도 극단적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만물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태양의 신 라멘이여…….”

데보타가 난데없이 마나 영창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진언을 읊을수록 그녀의 주위로 마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저 마법이 뭐가 되었든지 내게 위험한 것만은 사실이다. 피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천휘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나무줄기를 바라봤다. 8서클 대마도사가 시전한 마법답게 트리플 마스터에 근접한 천휘의 근력으로도 풀기 힘들 만큼 단단하게 발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결국 이 방법뿐인가?’

천휘는 슬그머니 무한의 행낭에서 검은색 단약을 꺼내들었다. 바로 오베른에게 먹였던 고루폭마단이었다.

“…마나의 상충을 일으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데보타가 진언을 읊으면 읊을수록 마나의 소용돌이는 거세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젠장할! 꿀꺽.”

결국 천휘는 고루폭마단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지독한 고통이 관통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전에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싱크로율을 최저치인 1퍼센트에 맞춰둔 일이었다.

“끄아아악!”

뿌지직.

그와 동시에 천휘는 전력을 발휘해 발을 붙잡고 있던 나무줄기를 뜯어냈다.

“데보타!”

온몸을 전율시키는 고통을 분출하려는 듯 데보타의 이름을 크게 외쳤지만, 데보타는 그런 천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진언을 읊고 있었다.

“이중극점!”

데보타로 하여금 더 이상 진언을 읊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천휘는 2배는 강력해진 힘으로 데보타의 가슴을 두드렸다.

콰아앙!

귀를 자극하는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왔지만 여전히 데보타는 건재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마나의 소용돌이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극점! 이중극점! 이중극점!”

콰앙! 콰앙! 콰앙!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천휘는 연달아 데보타를 공격했다. 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 그녀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마나의 소용돌이는 모든 물리적인 타격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콰아앙!

천휘는 그녀를 공격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못 이겨 발로 땅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러자 충격을 못 이기고 바닥의 돌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응?”

그 순간 천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의 아래로 떨어진 돌 파편 하나가 마나의 소용돌이를 뚫고 그녀의 발 어림을 건드린 것이다.

‘설마!’

천휘는 곧바로 돌 파편들을 주워 그녀에게로 내던졌다. 그러자 가슴 이상의 높이에서는 돌 파편들이 튕겨져 나갔지만 그 아래에서는 그녀에게로 부딪혔다. 물론, 위력은 현저하게 약해진 채로.

‘이거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데보타의 주변을 휘감던 마나의 소용돌이가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다. 조금 전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이는 마법 시전이 임박해졌음을 의미했다.

비틀.

“크윽.”

천휘가 서두르려는 순간, 다시 한 번 고통이 뇌를 자극했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크게 비틀거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신물도 중요하긴 하지만 영구 삭제를 당하는 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었다. 천휘에게 있어 『오벨리스크』는 단순한 게임이 아닌 복수를 위한 장치인 탓이었다. 게다가 그에게 있어 『오벨리스크』는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게임이기도 했다.

“이거나 받아라, 이 마녀야!”

천휘는 더 이상 데보타를 8서클 대마도사이며 하이 엘프 퀸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자신을 영구 삭제시키려는 마녀에 불과했다.

휘익.

천휘가 데보타를 향해 아래에서 위로 뭔가를 내던졌다. 가슴 아래에서는 작은 파편이 마나의 소용돌이를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걸 파악해 흩뿌리듯 팔을 휘두른 것이다.

“…이제 이곳에 당신의 심판이 내려지기를, 그리고 파멸로 저들을 이끌기를… 커허억!”

열심히 진언을 읊던 데보타가 갑자기 진언을 멈추고 목을 붙잡았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것을 보니, 뭔가에 기도가 막혀 숨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데보타가 진언을 읊지 않은 그 순간, 휘몰아치던 마나의 소용돌이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력이 담긴 마나의 소용돌이로 인해 천휘는 그 자리를 피해 멀리 모습을 감췄다.

“크허억. 휴우…….”

기도로 파고든 괴물체를 간신히 식도로 넘긴 데보타는 산소가 공급되자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격렬하게 비산하는 마나의 소용돌이를 붙잡기 위해 재차 진언을 읊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끄아아악!”

별안간 데보타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명이 어찌나 처절한지, 흡사 도축장에 실려 가는 돼지의 그것처럼 끔찍하게 들렸다.

“큭큭큭, 이제 시작인가?”

비명을 내지르는 데보타의 앞에 조금 전 마나의 소용돌이를 피해 자리를 옮겼던 천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미친 소가 방패막이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내- 내게 무- 무슨 짓을……?”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천휘의 존재를 자각한 데보타가 힘겹게 물었다. 그에 천휘가 비릿한 미소를 품으며 대답했다.

“고루폭마단.”

“고… 루… 폭… 마… 단.”

천휘가 그녀의 입속으로 내던진 것은 2알밖에 남지 않는 고루폭마단 중 1알이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며 능력치를 2배로 상승시켜 주는 희대의 단약. 데보타는 그것을 복용하고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이 신전을 히드라들로부터 되찾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이건 분명히 내가 먼저 발견한 물건이라고. 당신이 차지할 권리 따윈 없어!”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천휘는 데보타를 향해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끄허억.”

그런 천휘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데보타는 여전히 가래 끓는 소리를 내뱉으며 고통에 몸서리쳤다. 그런 그녀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가질 만도 하건만, 천휘는 냉랭한 눈빛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그녀를 관찰할 뿐이었다.

‘날 죽이려 했던 여자에게 품을 동정심 따윈 없어!’

천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속담을 가장 좋아했고, 그것을 자신의 신조처럼 알고 살아왔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이가 설사 어여쁜 여자라 할지라도 용서는 없었다. 그것이 천휘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이었다.

“부… 숴… 버… 리… 겠… 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지?”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데보타를 본 천휘는 두 주먹을 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법을 채 시전하지 못한 탓에 그녀의 주위를 감싸던 마나의 소용돌이도 거의 수그러든 상태였다. 이제 천휘의 주먹을 막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갈까 하고도 생각했었는데… 안 되겠다. 일단 좀 맞자.”

퍼억!

“크허억. 시- 실드… 커허억!”

천휘의 주먹에 복부를 얻어맞은 데보타는 황급히 실드 마법을 펼쳤다. 아니,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며 마법을 익힌 그녀로서는 이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마법을 펼쳐 본 경험이 없는 탓에 마법이 온전하게 구현되지 못한 것이다.

“발악하면 할수록 강도는 더해진다!”

퍼억!

“크허억!”

이번에는 그녀의 턱을 강타한 천휘의 주먹.

여자라고 해도 자신을 죽이려 한 마녀이기에 그의 주먹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를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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