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히드라 레이드 (20/82)

제9장 히드라 레이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새벽.

간밤에 몸을 얼어붙게 만들 북방의 한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 산짐승들마저 보금자리에서 나오지도 않을 정도로 이른 새벽이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에도 언제나 먹잇감을 노리고 먼저 일어난 새들은 있기 마련이다.

휘익, 휘익.

“빠르게! 그러나 은밀하게!”

숲 속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베놈 헌터 도리아가 이끄는 드림 길드와 동맹 유저들이었다. 전사들을 필두로 숲을 가로지르는 그들은 테헤른산 정상을 빙 돌아 반대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정지!”

가장 선두에서 유저들을 이끌던 도리아가 마침내 멈춰 섰다. 그러자 유저들은 직감적으로 이곳에서 분화구로 진입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며, 떨어진 기력과 공복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어느새 산자락의 어둠이 밀려나며 조금씩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새벽 여명을 따라 반대편에서 순백의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을 필두로 분화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리도 출발한다! 출발!”

“와아아아!”

천공의 날개 길드 진영에서 한발 먼저 움직이자, 마침내 드림 길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함성 소리에 아침잠을 곤히 자고 있던 히드라들도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크워어엉!

쿠아아앙!

수천에 달하는 대병력을 확인한 히드라들은 제각기 포효를 터트렸다.

한 몸뚱이에 3개의 머리를 지닌 괴물 몬스터, 히드라.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띠링! 상태 이상 ‘공포’에 빠지셨습니다.]

[띠링! ‘공포’의 영향으로 5분간 민첩이 10% 하락했습니다.]

[띠링! ‘공포’의 영향으로 5분간 물리 방어력이 10% 하락했습니다.]

“으윽! 모두 버텨! 사제들은 곧바로 상태 회복 마법 걸어주고!”

히드라의 머리들이 터트리는 포효는 급기야 유저들을 상태 이상에 빠트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 양 진영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제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 유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 이상에서 회복되며 다시 히드라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레논! 왼쪽 놈을 맡아라!”

“도리아! 넌 오른쪽 놈을 맡아라!”

두 길드의 마스터들은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도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그 자리에서 간단한 작전을 짜 맞췄다. 그리고 그에 맞춰 양 진영의 공격 대상이 지정되었다. 각 진영과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히드라들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쿠오오오!

“액시드 브레스(Acid Breath)! 전사들을 피하고! 마법사들과 사제들은 방어 마법을 중첩시켜!”

갑자기 터져 나오는 액시드 브레스에 도리아가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전에도 히드라와 같은 드래곤형 몬스터의 레이드를 한 경험이 있는지 그의 지시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콰아앙!

“버텨라! 여기서 무너지면 끝장이다!”

드디어 히드라의 액시드 브레스가 중첩된 방어막 위를 두드렸다. 순식간에 몇 겹의 방어막이 무너지며 급기야 겨우 세 겹밖에 방어막이 남지 않은 상황에까지 몰리고야 말았다.

“전사들! 히드라 공격!”

그러나 때마침, 도리아의 지시가 빛을 발했다. 브레스를 피해 좌우로 흩어진 전사들이, 일제히 액시드 브레스를 뿜고 있는 히드라를 향해 스킬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 브레스의 위력이 약해졌다! 궁수들은 일제히 녀석의 아가리를 향해 스킬을 퍼부어라!”

히드라가 뿜어내는 액시드 브레스의 위력이 현저하게 약해진 것을 확인한 도리아는, 곧바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들로 하여금 브레스를 뿜고 있는 녀석의 아가리를 향해 공격을 퍼붓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활을 꺼내들고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내가 만든 데들리 포이즌Ⅲ에 중독되기만 한다면, 승기는 확 우리에게 기울게 된다. 단 한 방울만으로도 헤론 습지의 크로커다일 수백 마리를 한 번에 마비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비독. 제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분명히 마비된다!’

도리아는 자신의 화살촉에 데들리 포이즌Ⅲ를 묻히고는 히드라의 브레스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브레스 지속 시간이 끝난 듯 녀석의 아가리에서 더 이상 액시드 브레스가 뿜어지질 않자, 그때를 노려 화살을 날려 보냈다.

휘이익!

푹!

“좋았어!”

명색이 베놈 헌터라는 히든 클래스를 지닌 도리아는 주 무기로 2자루의 숏 소드를 사용하지만 보조 무기로 활을 애용했다. 때문에 그의 궁술 숙련도는 중급에 이르러 여지없이 녀석의 아가리 안으로 화살을 명중시킨 것이다.

“전사들에게 더욱 몰아붙이라고 전해! 그리고 마법사들은 집중적으로 녀석의 발목을 노리라고 전하고! 궁수들은 녀석이 또다시 브레스를 쓰지 못하도록 최대한 견제한다!”

자신의 계책이 성공하자, 도리아는 다시 유저들에게 신속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언제쯤 반응이 올까 곁눈질로 녀석을 예의주시했다.

쿠아아악!

“왔구나! 흑마법사들은 일제히 녀석에게 저주 마법을 걸어! 샤먼들은 지금 당장 토템을 건축해! 피로 회복 토템과 생명력 지속 회복 토템은 필수야!”

도리아의 지시에 이제까지 뒤에서 자리만 축내던 흑마법사들이 일제히 히드라에게 저주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A급 이상의 몬스터에게 잘 먹히지 않는 저주 마법의 특성상 S급 보스 몬스터인 녀석에게 먹힐 리가 만무했건만, 흑마법사들은 마스터 도리아의 지시에 군말 없이 저주 마법을 난사했다.

[띠링! 히드라가 상태 이상 ‘중독’에 빠졌습니다.]

[띠링! 히드라가 상태 이상 ‘어둠’에 빠졌습니다.]

[띠링! 히드라가 상태 이상 ‘마비’에 빠졌습니다.]

연달아 들려오는 알림음에 도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반대편에서 힘겹게 히드라를 공격하고 있는 천공의 날개 길드 진영을 바라봤다.

‘내가 이겼다, 레논!’

“1진은 물러나고 2진 전사들 돌격! 마나를 아끼지 마라! 마법사들은 마음 놓고 캐스팅해서 6서클 이상의 마법을 퍼부어라! 사제들은 1진 전사들의 생명력을 회복시키고, 2진 전사들에게 축복을 걸어줘라!”

도리아의 지시에 유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2진의 전사들은 1진의 전사들에 비해 방어력을 떨어지나, 공격력은 월등했던 유저들. 그들은 도리아의 지시에 방어는 도외시한 채, 자신의 최강 스킬들을 마음껏 전개하며 히드라의 생명력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깎아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레이드가 종국으로 치닫는 사이, 천휘와 친구들은 파뱃을 타고 테헤른산 상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오늘 안에 끝나겠는데? 드림 길드는 베놈 헌터 도리아의 뛰어난 지시로 히드라를 마비시켜 놓고 생명력을 깎고 있고, 천공의 날개 길드는 무한 힐과 무한 축복으로 히드라의 생명력을 차근차근 깎고 있으니 세 시간, 아니 어쩌면 두 시간 안으로 끝나지 않을까?”

레이드가 성공적으로 돌아가자, 로빈이 들뜬 목소리로 천휘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천휘의 안색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히드라의 피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거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 피통이 5천만 그 이상일 거다.”

“마- 말도 안 돼! 피통이 5천만이나 되면 어떻게 잡아!”

“그러니까 S급 보스 몬스터지.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어.”

“그게 뭔데?”

천휘의 의미심장한 말에 카멜이 다급하게 반문했다.

“저 가운데에 있는 녀석.”

“아… 그러고 보니 왜 저 녀석은 동료들을 돕지 않고 있지? 저러다 동료 히드라들이 죽으면 어쩌려고?”

“아마도 저 녀석은 평범한 히드라가 아닐 거다.”

“그럼? 새끼 히드라인가?”

천휘의 말에 카멜이 말했다. 하지만 천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다. 새끼라고 하기엔 녀석의 몸 안에 내재된 마나의 양이 너무도 많아. 어쩌면 웬만한 드래곤에 필적할지도…….”

“드래곤?”

“그래.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녀석은 에이션트 히드라일지도 몰라.”

“에이션트 히드라? 그건 또 뭐냐?”

천휘는 히드라에 대한 좀 더 자세한 특징과 약점을 알기 위해 파뱃을 타고 대륙 최고의 도서관이 있는, 라그혼 왕국의 수도 이그나혼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휘는 히드라의 특징과 약점에 대한 것 말고도 히드라의 상위 몬스터인 에이션트 히드라의 존재도 확인했다. 너무나도 희귀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몬스터인 탓에 그리 많은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들이 실재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적혀 있었다.

‘녀석이 에이션트 히드라라면… 오베른의 힘으로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녀석은…….’

“허억, 허억.”

“2진은 뒤로 물러나고 1진이 앞으로 나선다!”

“마스터! 더 이상은 무립니다! 벌써 해가 저물었습니다!”

“으득, 젠장!”

부길마 마곤의 말에 도리아가 이를 꽉 물었다. 확실히 하루 반나절 동안 지속된 레이드로 유저들의 상태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힘들겠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이번 레이드는 끝이다! 더불어 신급 아이템도 얻을 수 없다! 히드라 녀석도 점점 생명력이 빠지고 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돼!”

“알겠습니다! 이번 레이드에 우리 드림 길드의 존폐가 걸린 이상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부탁한다, 마곤.”

이윽고 마곤이 최전방에서 유저들을 독려하며 도리아의 지시를 하달하자, 유저들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히드라에게 다시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레이드 중 최장 시간이 걸린 것은 고작해야 세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열두 시간째다. 한마디로 녀석의 피통이 무식하게 어마어마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상태를 보아하니, 녀석도 이제 생명력은 바닥을 기고 있을 터.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돼!’

도리아는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애써 자신을 독려하며 히드라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녀석의 세 대가리 중 하나에 엄청난 상처가 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정도라면!”

히드라의 왼쪽 대가리에는 마치 꼬챙이로 꿰인 듯 오른쪽 볼에 해당하는 지점에 구멍이 뚫린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상처 때문에 고통이 심한지 왼쪽 대가리는 힘없이 등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녀석의 생명력을 대폭 깎을 절호의 기회다! 마곤!”

도리아의 부름에 이윽고 마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지.”

“베놈 레기온을 사용할 거다. 한동안 지시는 네가 내려.”

“…이제야 나서시는 겁니까?”

마곤의 물음에 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히드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일정 거리까지 접근하자, 곧바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양 손바닥을 벌려 마치 무언가를 받는 동작을 취했다.

“길드마스터다!”

“저 자세는 베놈 레기온이다!”

“와아아아! 드디어 마스터가 나섰다! 녀석은 끝이다!”

도리아의 등장에 드림 길드의 진영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가 펼칠 스킬의 위력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도리아를 지금의 위치까지 도달하게 만들어준 바로 그 스킬, 베놈 레기온. 드림 길드의 유저들뿐 아니라 다른 유저들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스킬이었다.

‘아무래도 아군 진영에 생각지도 못했던 보우마스터가 있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냐!’

도리아의 주변이 녹색의 안개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던 식물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그의 반경 10미터가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베놈 레기온!”

그와 동시에 도리아가 소리를 내지르며 양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을 중심으로 거대한 구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구체를 중심으로 도리아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녹색 안개가 빨려 들어갔고 급기야는 녹색 안개가 모두 사라지며 도리아의 주변이 환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도리아의 양손에 맺힌 거대한 구체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심지어 엄지 손톱만 한 구슬로 변모하고 말았다.

“샷(Shot)!”

도리아의 일갈과 함께 작은 구슬이 히드라의 왼쪽 대가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왼쪽 대가리에 뚫린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3.”

갑자기 도리아가 오른손을 들어 카운트를 세자, 그를 지켜보던 유저들이 덩달아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2.”

“1.”

“폭발!”

꽈아아아앙!

꾸아아악!

도리아가 전개한 작은 구슬이 히드라의 왼쪽 대가리 안으로 들어가자, 정확히 3초 만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어찌나 대단한 위력이었는지 히드라의 왼쪽 대가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다른 2개의 대가리들도 덩달아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를 정도였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하라!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공격하라!”

드디어 히드라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둑은 더 이상 둑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 누구도 이미 터져 버린 둑을 메울 수는 없다. 지금껏 억눌려 왔던 유저들의 분노가 히드라들에게로 쏟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디어 끝인가?”

“역시 길드마스터들인가? 단 한 방의 스킬들로 히드라들을 무너트리고야 말았어. 대단하지 않냐, 천휘야? 응? 천휘야?”

허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멜과 로빈은 두 길드마스터들의 활약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베놈 헌터 도리아의 베놈 레기온과 더불어, 썬나이트 레논의 썬 기가매쉬 덕분에 히드라가 무너지며 레이드가 종국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휘는 두 사람이 기뻐하는 와중에도 야릇한 찝찝함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 녀석은 왜 아직까지도 나서지 않고 있는 거지?’

“야,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다. 저 히드라 녀석이 뭔가 일을 벌일…….”

쿠오오오.

쿠와아아앙!

“헉! 저길 좀 봐! 세- 세상에! 윽!”

“가- 갑자기 머리가! 커헉.”

“뭐- 뭐야, 너희들 갑자기 왜 이래! 야!”

두 친구가 별안간 파뱃의 등 위로 쓰러지자, 천휘는 다급하게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그저 잠시 동안 기절한 것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헉! 설마!”

두 사람의 안위를 확인한 천휘는 재빨리 땅 아래를 쳐다봤다.

“이- 이럴 수가! 저- 전멸?”

하늘에서 내려다본 테헤른산 정상의 풍경은 그야말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터져 나온 이후에 테헤른산 정상이 거미줄처럼 푹푹 갈라져 있었다.

게다가 곳곳에서 유저들의 시체가 회색으로 물들며 강제 로그아웃되고 있었고, 히드라들 역시 온전치는 못한지 땅바닥에 거대한 몸을 뉘고 널브러져 있었다.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저 자식이라는 걸.”

테헤른산 정상에는 유일무이하게 에이션트 히드라로 추측되는 녀석만이 굳건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는 녀석이 서 있는 땅은 다른 곳과 달리 멀쩡하기까지 했다.

“…파뱃, 일단 친구들을 아래에 내려 둔다.”

끼에… 짹짹.

이윽고 기절한 카멜과 로빈을 땅에 내려놓은 천휘는 곧바로 오베른을 빙옥에서 꺼냈다.

“오베른.”

[왜 그러지, 주인? 분위기 잡으니 영 어울리지 않는다.]

“너에게 부탁이 있다.”

[뭐지?]

“…….”

새삼스럽게 부탁이라는 말을 하는 천휘를 보며 오베른이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네가 소멸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난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머슴이다. 주인이 나보고 지금 이 자리에서 소멸하라 해도 소멸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말해보라.]

“…그래.”

오베른의 굳은 심지를 확인한 천휘는 무한의 행낭에서 검은색 단약을 하나 꺼내들었다. 일전에 천 제국에서 ‘괴물’ 녀석을 뿌리치기 위해 천휘 자신이 복용했던 바로 그 단약이었다.

“이게 뭔지 아냐?”

[모른다.]

“당연히 모르겠지. 이건 우리 고루문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고루폭마단이라는 단약이다.”

[그래서?]

천휘가 그걸 보여 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베른으로서는 그저 지금의 상황이 생뚱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네게 주겠다. 그걸 먹고 저 녀석을 처치해라.”

[…….]

천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오베른의 눈빛이 깊게 침잠되었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굳건하게 서 있는 히드라에게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소멸할지도 모른다. 저 녀석은 확실히 너에게 버거운 상대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네가 저 녀석을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이 단약이 만들어줄 거다.”

[…주인.]

“말해봐.”

[똥폼 잡지 말고 그거나 건네라. 저 녀석 따위는 후딱 해치워주지.]

“…큭, 그래! 역시 넌 그런 자신감이 마음에 들어! 자, 받아라! 그리고 저 녀석을 반드시 해치워! 지기라도 했다간… 내가 용서치 않을 거다!”

천휘는 냉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투에서는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천 제국에서도 수많은 강시들을 제작하고 폐기시켰던 천휘이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매정하게 오베른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가 일말의 감정을 가지고 강시가 된 순간부터 천휘는 그를 강시로 여기지 않았다. 오베른은 그에게 있어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런 천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베른은 천천히 히드라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꾸아악?

오베른이 히드라에게로 다가가자, 녀석도 그의 정체를 알아봤는지 반응을 보였다. 3개나 되는 녀석의 대가리가 일제히 오베른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한낱 뱀 새끼 주제에, 내 주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그런 히드라를 쳐다보며 오베른은 투지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그가 우스워보였는지 히드라의 대가리들은 여전히 흥미가 동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저벅저벅.

탁.

드디어 오베른이 녀석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코앞이라고는 하나, 오베른과 히드라의 거리는 무려 50미터가량이나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베른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그 이상은 녀석의 권역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참격의 기사 오베른이 명한다! 당장 여기를 떠나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꾸아아악.

오베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히드라 녀석의 입 모양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변했다. 그것을 알아챘음인가. 오베른이 천천히 등에 메여 있던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꺼내 양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의 클레이모어는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 크다는 것이지 무려 30미터의 크기를 자랑하는 히드라에게는 한없이 작은 것이었다.

[흐아압!]

꾸아아악!

드디어 오베른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히드라의 대가리들도 오베른을 따라 움직였다.

콰앙!

[흥! 고작 이 정도인가!]

히드라의 대가리 하나가 오베른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며 땅에 부딪쳤다. 다행히 오베른이 빠른 움직임으로 피해냈지만, 땅바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간담이 서늘한 순간이었다.

휘익.

콰앙!

[흡! 하아아아!]

또다시 날아든 히드라의 대가리.

오베른은 마치 예견하기라도 했다는 듯 하늘로 뛰어올라 녀석의 머리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빠르게 녀석의 목을 타고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휘익.

그러나 오베른이 목 위에 있건 말건 다른 2개의 대가리가 오베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오베른을 잡아 물어뜯으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림없다! 드래곤 스크류!]

하지만 오베른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알았다. 2개의 대가리가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곧바로 자신의 최강 스킬을 전개하며 두 대가리를 공격했다.

카앙!

카앙!

[…역시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소린가.]

하지만 제대로 마나도 끌어 모으지 않고서 전개하는 드래곤 스크류는 녀석들의 두꺼운 비늘을 뚫지 못했다. 오베른은 그저 녀석들의 등 위로 올라온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휘익.

휘익.

오베른이 등 위로 올라오자, 녀석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졌다. 3개의 대가리가 쉴 새 없이 오베른을 향해 날아들었고 오베른은 녀석들의 공격을 피해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못해보고 당하겠군.]

녀석을 공격할 틈은 너무도 많았다. 지금 그가 딛고 서 있는 곳도 역시나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의 공격으로 녀석의 비늘을 뚫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녀석이 가장 취약한 부분은… 역시나 눈인가?]

녀석의 모든 곳이 비늘로 덮여 있었지만, 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눈만은 단단한 비늘이 아닌 그저 각막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하앗!]

결심이 섰으니, 오베른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녀석들의 눈을 노리고 몸을 움직였다.

휘익, 카앙!

다시 한 번 날아드는 가운데 대가리.

오베른은 녀석의 공격을 피해내지 않고 클레이모어로 막아냈다. 그리고는 그 충격의 여파로 하늘로 뛰어올라 녀석의 대가리 위에 안착했다.

[이거나 먹어라!]

푸슉.

꾸아아악!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마침내 녀석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최초로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내질렀고, 오베른은 흔들리는 와중에도 재빨리 반대편으로 돌아가 녀석의 반대편 눈에도 클레이모어를 쑤셔 박았다.

꾸아아악!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는 히드라의 울음소리.

하지만 오베른의 눈에는 독기와 살기가 여전히 폭사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아압!]

이참에 대가리 하나를 완벽하게 폐기시키려는 듯 오베른이 날뛰는 대가리 위에서 자세를 잡고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데없는 불청객 탓에 오베른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꾸엑.

꾸엑.

[쳇. 녀석들을 잊고 있었군.]

갑자기 날아든 다른 2개의 대가리가 자신을 공격하자, 오베른은 결국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몸을 움직여 아래로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쿠웅.

콰앙!

그러나 허공에서는 몸이 자유로울 수가 없는 탓에 오베른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대가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녀석의 박치기 공격에 오베른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녀석의 등위로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쿠오오오.

그리고 곧바로 오베른의 위로 떨어지는 액시드 브레스. 자신의 등 위였지만, 단단한 비늘 탓에 히드라는 망설임 없이 액시드 브레스를 분출했다.

[빌어먹을!]

녀석들의 연계 공격에도 오베른은 액시드 브레스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굴렸다. 떨어져 내린 충격으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에서도 소멸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액시드 브레스는 그런 오베른이 가소롭기라도 한 듯 가공할 속도로 쏟아졌다. 잠시라도 지체했다가는 히드라의 액시드 브레스에 전신이 녹아내릴 상황.

오베른은 결국 천휘가 건넨 검은색 단약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콰아아앙!

액시드 브레스가 오베른이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역시나 히드라의 단단한 비늘에는 그다지 손상이 없는 듯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오베른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끄아아악!]

오베른은 어느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분명히 그는 천마강시로 변하면서 고통을 느낄 수 없을 텐데도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은 다 천휘가 건넨 고루폭마단 때문이었다.

전신의 마나를 폭발적으로 격발시켜 일정 시간 동안 본래 능력의 2배에 달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고루폭마단.

인간은 물론이고, 강시 또한 잊고 있었던 고통을 되살려 줄 만큼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 악마의 약이었다.

꾸에엑!

꾸에엑!

하지만 더 이상 고통에 몸부림칠 수만은 없었다. 어느새 오베른을 향해 2개의 대가리가 좌우에서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베른은 본능적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녀석들의 공격을 유연하게 피해내고는 등 위를 빠르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격발되는 마나를 좀처럼 주체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으드득, 난 최고의 머슴이다! 으아아악!]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티고자 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뇌리까지 뻗친 끔찍한 고통에 오베른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본능에 의지해, 녀석들의 파상공세를 피하는 데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서서히 오베른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챘는지 히드라의 대가리들이 쉴 새 없이 오베른을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콰앙!

꾸에엑?

이제까지 대가리들의 박치기를 피하기만 하던 오베른이 갑자기 클레이모어를 들어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녀석의 눈을 향해 클레이모어를 쑤셔 박았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공격이라, 녀석은 피하지 못하고 눈을 오베른에게 헌납해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베른은 힘을 가해 클레이모어가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도록 했다. 그리고는 클레이모어의 끝자락을 잡고 스킬을 전개했다.

[드래곤 블래스트!]

꾸아아악!

클레이모어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마나의 칼날들이 녀석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러자 녀석은 끔찍한 고통에 곧바로 무너져 내렸고 그것을 보다 못한 또 하나의 대가리가 오베른을 향해 액시드 브레스를 내뿜었다.

휘익.

그러나 두 번째 액시드 브레스는 전혀 오베른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모든 능력이 2배로 향상된 오베른에게 액시드 브레스는 느려터진 물대포에 불과할 뿐이었다.

오베른은 마지막 남은 대가리의 액시드 브레스를 피해내며 빠르게 녀석의 목을 뛰어 올라갔다. 흡사 나무를 오르는 다람쥐처럼 그의 움직임은 민활했다.

쿠오오오!

그런 오베른의 모습을 보면서 히드라가 분노에 찬 울음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거대한 동체가 하늘로 높이 치솟더니, 이내 땅바닥을 향해 짧지만 거대한 네발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히드라의 동체가 땅에 닿자, 주변에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충격파가 일어났다. 그에 그렇지 않아도 걸레처럼 변한 땅이, 아예 먼지처럼 잘게 부셔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유저들을 몰살시켰던 스킬이 이것인 듯했다.

하지만 오베른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은 천휘가 아무렇지 않았던 이유와 어느 정도 상관이 있었다. 히드라가 전개한 스킬은 일정 이상의 경지에 이르면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 일종의 제한적인 스킬이었던 것이다.

히드라가 강력한 스킬을 시전하고서 잠시 동안 움직임이 멈췄다. 아무래도 스킬 시전에 대한 페널티인 듯했다. 그에 오베른이 녀석의 목을 빠르게 타고 올라가 녀석의 정수리 위로 올라섰다.

[하아앗! 드래곤 크레이터!]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거칠게 녀석의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고루폭마단의 영향일까.

녀석의 클레이모어는 너무도 손쉽게 녀석의 비늘을 뚫고 대가리 속으로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대가리가 폭발을 일으키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떨어져 내렸다.

“좋았어!”

오베른과 히드라의 피 튀기는 혈전이 끝내 오베른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부터였다.

“오베른!”

[주인! 이 머슴이… 커허억!]

“젠장! 벌써 지속 시간이 끝난 건가! 파뱃! 오베른에게 날아가!”

끼에에엑!

상황이 긴박한 것을 아는지 파뱃이 빠르게 히드라의 등 위로 날아갔다. 천휘는 다급한 마음에 녀석이 채 멈추지도 않은 상황에서 뛰어내렸다.

“오베른! 괜찮아?”

[커허억!]

“젠장! 부작용이 시작됐다!”

고루폭마단은 그 효능에 비해 부작용이 심해 천 제국에서도 사장된 단약이었다. 하지만 천휘는 언제나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였기에 늘 그것을 몇 알씩 품에 소지하고 다녔었다.

그런 탓에 고루폭마단의 부작용이 안겨다주는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싱크로율이 고작해야 5퍼센트에 불과한 천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가 느낀 고통은 가상현실상에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엄청났다.

『오벨리스크』의 싱크로율은 최소 3퍼센트에서 최대 5퍼센트였다. 싱크로율이 제로에 가깝다면, 실제와 같은 퀼리티를 자랑하는 『오벨리스크』를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에 3퍼센트를 최소 싱크로율로 정한 것이고, 싱크로율이 5퍼센트 이상이라면 가상현실에서의 고통이 현실의 몸에까지 나타날 수도 있는 탓에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고작해야 5퍼센트의 고통만으로도 천휘 자신은 이상 현상으로 강제 로그아웃이 될 뻔했다. 그런데 오베른은 그 고통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고 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오베른! 빙옥으로 돌아가!”

파아앗.

고통에 몸부림치는 오베른을 빙옥으로 보낸 건 천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빙옥은 강시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것 이외에 강시들에 대한 자체 재생 능력까지 향상시켜 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이제 히드라 녀석들과 이 에이션트 히드라를 마무리하고 아이템을 독식해보실까? 먼저 점차 살아나고 있는 네놈들부터! 하앗! 이중극점! 이중극점! 이중극점!”

천휘는 테헤른산 정상에 널브러진 히드라들을 향해 이중극점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최강 조합 스킬인 악마의 주먹을 쓰고 싶었지만, 그 스킬은 마나 소모가 너무 큰 탓에 한 단계 낮은 이중극점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천 명이 관여한 히드라 레이드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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