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하이 엘프 퀸과의 계약
천휘는 혹시 몰라 오베른을 빙옥에 집어넣고 홀로 엘레이든으로 들어섰다. 괜히 오베른이 사고라도 치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통 엘프나 드워프 등의 이종족들은 인간들을 꺼려한다고 했는데… 역시나 바렌트 왕국이라는 건가?”
엘레이든에는 하이 엘프들은 물론이고, 인간 유저들도 꽤나 자주 눈에 띄었다. 그들은 마치 예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이 엘프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배척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확실히 그런트에서 봤던 일반 엘프와 비교했을 때 좀 더 성스러운 느낌인걸?”
지나가는 하이 엘프 여성을 바라보며 천휘는 자기 나름대로 감상평을 내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일단 하이 엘프 퀸을 만나러 가기 전에 ‘하이 엘프의 눈물’부터 구입해야겠어. 하지만 시세가 개당 10만 골드 정도이니… 좀 힘들까나? 그래도 일단 어느 정도나 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지.”
천휘는 사방을 둘러보며 잡화 상점이나 시약 상점이 있는지 찾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엘레이든에는 건물에 간판이 걸려 있지 않아, 초행인 천휘로서는 도저히 가게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나? 기왕이면 아리따운 하이 엘프에게……. 저기요!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아, 네. 엘레이든은 처음이신가 보내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외모도 모자라 마치 피아노 선율을 듣듯 아름다운 목소리, 게다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도와주겠다는 착한 마음씨까지. 왜 남성 유저들이 이곳 엘레이든을 남자라면 꼭 가봐야 할 명소로 꼽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혹시 잡화 상점이나 시약 상점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볼일이 좀 있어서요.”
“‘하이 엘프의 눈물’을 사시려는 건가요?”
천휘의 물음에 여성 하이 엘프는 다소 새침한 말투로 반문했다.
“아, 그런데요?”
“그럼 알려 드릴 수 없네요. 우리들의 눈물로 만들어진 그 고귀한 결정이 이윤을 목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전 용납할 수 없답니다. 죄송해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싱그러운 미소를 짓던 그녀가 갑자기 찬바람을 불며 홱 돌아서자, 천휘는 안타까운 탄식을 내지르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하이 엘프들이 ‘하이 엘프의 눈물’을 사려는 인간들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것 같은데? 흐음, 그렇다면 하이 엘프들이 운영하는 잡화 상점이나 시약 상점에서도 그걸 구할 수 없다는 말이잖아? 젠장! 뒷거래로 알아봐야 하나?”
조금 전 하이 엘프 여성의 반응으로 미루어, 하이 엘프들이 ‘하이 엘프의 눈물’을 팔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천휘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정도 가치가 있는 물건을 뒷거래로 구매해야 한다면, 얼마만큼 지출이 심할지 대충 짐작이 가는 탓이었다.
그러나 짐작과 현실은 다를 수도 있는 법.
천휘는 ‘하이 엘프의 눈물’을 사지 않는다고 속내를 감추고는 잡화 상점과 시약 상점의 위치를 알아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젠장!”
잡화 상점과 시약 상점 모두 ‘하이 엘프의 눈물’을 판매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마탑이 있는지도 찾아봤지만, 마탑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하이 엘프의 눈물’이 있어야 마지막 황제 슈트라카이젠의 시체로 천마강시 이상의 강시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되면 녀석을 강시로 만드는 건 좀 더 기다려야 하나.”
천휘가 ‘하이 엘프의 눈물’에 집착하는 데는 천마강시 이상의 강시를 제작해보려는 욕심 때문에서였다. 현재 천휘의 강시 제작술은 고급 2단계. 파뱃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경험치가 쌓였고 더불어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철골강시로 제작하면서 결정적으로 지금의 숙련도에 이를 수가 있었다.
중급 9단계를 넘어 고급 2단계로 올라섰으니, 아마도 새로운 강시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천마강시 이상의, 어쩌면 말로만 듣던 생강시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천휘는 최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휴우, 역시나 문제는 돈이야. 여기에서 일을 빨리 마치고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총동원해 제황의 계곡을 모조리 도굴한다! 그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야!”
실망이 크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체념할 건 체념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책을 강구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일이었다.
이내 천휘는 ‘하이 엘프의 눈물’에 대한 마음을 접고 지나가는 하이 엘프에게 하이 엘프 퀸 데보타 엘 클라리넨이 거주하는 곳을 물었다.
“호호, 퀸께서 사시는 곳도 모르시다니. 여행객이신가 봐요?”
“네. 힘겹게 이곳에 왔으니, 하이 엘프 퀸이라도 뵙고 가고 싶어서요.”
“잘 생각하셨네요. 퀸은 누구나 뵐 수 있는 분이니까요. 퀸께서는 어머니 나무의 아래에 거주하십니다.”
“어머니 나무요?”
“아, 저희 하이 엘프들은 세계수 메두살리온을 어머니 나무라고 한답니다. 어머니 나무 밑동으로 가보세요. 그곳에 퀸께서 거주하시는 저택이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의외로 퀸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듯했다. 하이 엘프의 말을 빌리자면,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편한 존재였다.
“일이 쉽게 풀리려나. 하이 엘프 퀸이라면 세상에서 그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심성도 비단결처럼 고울 테지? 좋았어! 역시 난 행운아야!”
착각은 자유다.
천휘는 그러한 착각을 너무 자주 하는 경향이 있었다.
본래 작은 일부분을 가지고 모든 것을 유추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옳지 못한 방법이었다.
“여긴가? 흐음,”
조금 전 만난 하이 엘프의 말대로 세계수 메두살리온의 밑동에는 커다란 저택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테오른 왕국의 수도 오베른에 위치한 천휘의 저택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주변 하이 엘프들의 집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크기였다.
“어쩐 일이시죠?”
“아, 지나던 여행객인데 퀸을 뵙고 싶어서요.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럼요. 퀸께서는 엘레이든을 찾는 여행객을 사랑으로 대하신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역시나 천휘의 생각이 맞았는지 저택의 정문을 지키는 하이 엘프 기사들도 친절하게 천휘를 맞아주었다.
“여기 너무 인심 좋은 거 아냐? 사람은 모름지기 인심 좋은 데서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이참에 엘레이든으로 이사 와버릴까.”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천휘는 엘레이든의 후한 인심에 혹해 진심으로 이사를 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만큼 하이 엘프의 마을 엘레이든은 여러모로 천휘를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꽤 화려하네?”
의외로 저택 안은 화려한 장식품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저택 로비에는 천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이 장미 덩굴을 온몸에 휘감고 자리해 있었고, 천장에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장미 덩굴로 치장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장미를 좋아하나?’
그 외에도 저택의 벽 곳곳에는 장미 덩굴로 휘감겨진 그림 액자들이 걸려 있었고, 요소요소에는 장미꽃이 담긴 화병이 세워져 있었다.
천휘가 그렇게 저택 안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집사로 보이는 나이 든 하이 엘프 남성이 그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지나는 여행객인데 퀸을 뵙고 싶어서.”
“그러신가요? 다행히 퀸께서는 현재 대전에서 쉬고 계십니다. 안내해드릴까요?”
“저야 당연히 좋습니다.”
천휘는 집사로 보이는 하이 엘프 남성을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는 역시나 장미 덩굴로 치장된 문 앞에 멈춰 섰다.
“퀸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그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시길.”
“감사합니다.”
너무도 친절한 그의 모습에 천휘는 다시 한 번 이곳으로 이사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아, 아름답다.’
침실로 보이는 방 안은 저택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장미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하이 엘프 퀸이 정열의 붉은색을 좋아하는 듯 방 안의 모든 가구는 물론이고, 벽지까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천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하이 엘프 퀸의 아름다움이었다. 듣기로는 300살이 넘은, 인간의 나이로 따지자면 40을 넘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느 하이 엘프 미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성스러움, 그리고 매혹.’
천휘가 느낀 하이 엘프 퀸 데보타 엘 클라리넨에 대한 인상이었다. 얼굴에서는 성스러움이 가득했지만, 붉은색의 짧은 원피스를 입어 매혹적인 면도 함께 가지고 있는 하이 엘프 퀸이었다.
“반가워요. 데보타 엘 클라리넨이라고 해요.”
“천휘라고 합니다.”
저절로 존칭이 나올 정도로 천휘는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것을 눈치 챈 것일까. 그녀가 설핏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이방인이신가요?”
“아, 네.”
“역시 그렇군요.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 정도 마나를 가지고 계시다니. 이방인들의 재능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네요.”
“…….”
천휘는 그녀의 말에서 왠지 모를 슬픔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슬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절 찾아오신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퀸께 부탁이 있습니다.”
“그대는 하이 엘프가 아니니, 퀸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데보타라고 불러주세요. 그런데 부탁이 뭔가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릴게요.”
보기와는 달리 성격이 화끈한 하이 엘프 퀸의 말에 천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했다.
“데보타, 당신은 8서클 대마도사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게 아공간을 하나 선물해주시겠습니까?”
“아공간을요?”
천휘의 물음에 데보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 제게 꼭 필요한 것이거든요.”
“흐음, 아공간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문제가 있네요.”
“네?”
문제가 있다는 데보타의 말에 천휘는 살짝 긴장했다.
“아공간 마법은 8서클 마법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마법이랍니다. 아니, 난해하다기보다는 마법을 전개하는 데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해요. 특히나 타인에게 아공간을 종속시키려면 더 그렇구요.”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겁니까?”
천휘의 물음에 데보타는 그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짓고는 대답했다.
“아공간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최상급의 마나석이 필요해요. 거기에 더해 ‘시공의 화석’이라는 시약과 아다만티움이 필요하답니다. 구해오실 수 있겠어요?”
“…….”
데보타가 열거하는 물품들은 하나같이 돈이 많아도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최상급 마나석은 구하기 어려운 걸 떠나서 천문학적인 금액이 있어야 했고, ‘시공의 화석’은 아르니안 대륙의 시약에 어느 정도 정통한 천휘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니 그 가치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다만티움은… 아예 시중에서 찾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초레어 금속이다. 미스릴은 그나마 꽤나 많은 양이 시중에 돌아다니지만, 드워프들이 최고의 금속으로 꼽는 아다만티움은 아예 그 모습을 찾기조차 힘들다.
‘뭐야, 저 웃음은. 나보고 엿 먹어라, 이 소리인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미션을 내준 데보타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미온과 겹쳐 보이는 천휘였다. 남들 앞에서는 순진한 척, 혹은 소심한 척 행동해놓고는 다른 이들이 없을 때에는 무자비하게 몬스터들을 도살하는 그녀처럼 데보타도 왠지 그런 부류의 여자인 듯했다.
“…….”
“어머나, 그 표정은 뭔가요? 포기하신다는 건가요?”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진 천휘의 표정에, 데보타가 호들갑을 떨며 살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제가 그 물건들을 구해오면 아공간을 주시는 겁니까? 다른 대가 없이?”
“물론이에요. 비록 제가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마나를 소모한다 해도 구해오신다면 해드릴게요. 정말 구해오신다면 말이에요.”
“…….”
아무래도 눈앞의 하이 엘프 퀸은 자신을 골탕 먹일 생각인 듯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최상급 마나석과 아다만티움은 몰라도, ‘시공의 화석’이라는 시약은 존재의 유무조차 확인할 수 없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지?”
천휘의 말투가 싸늘하게 변했다. 상대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려 한다는 걸 알고서도 그의 말투가 이전처럼 고울 리가 없었다.
“감정의 변환이 빠르신 분이시네요.”
“잡설은 관두고, 본론부터 말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뭘 해줘야 아공간을 줄 거냐고!”
“흥분하지 마세요. 전 그저 당신을 진심으로 돕고 싶은 것뿐이에요.”
“…….”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기조차 싫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아공간이고 뭐고 때려치운 다음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공간은 자신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앞에서는 살랑거리면서도 뒤에서는 이렇듯 뒤통수를 칠 생각만 한다니까. 인간이나 하이 엘프나 마찬가지야! 젠장! 저 가식적인 얼굴에 혹하다니! 내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엘레이든에 발도 들여놓지 않겠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레이든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었지만, 이제는 정반대였다. 퀸이라는 작자가 이렇듯 겉과 속이 다르다면, 다른 하이 엘프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하이 엘프들의 심성은 진정으로 곱고 아름답다. 다만, 그들의 퀸인 데보타 엘 클라이넨이 남다른 것일 뿐이다.
“사실 우연찮게도 세 가지 물품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답니다.”
‘젠장, 역시나인가!’
“하지만 문제는 세 가지 물품들이 있는 곳에 드래곤 산맥에서 넘어온 거대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생존 경쟁에서 밀린 그들은 드래곤 산맥을 넘어, 카이젠 산맥을 따라 이곳 클리든 산맥까지 오게 된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그들을 처치하라 이건가?”
“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단지 그들을 처치해야만 세 가지 물품이 놓인 창고, 아니 던전으로 가는 길이 열릴 뿐이라는 거죠. 어때요? 한번 해보시겠어요?”
‘빌어먹을! 결국 나보고 거대 몬스터들에게 뺏긴 네년의 창고를 찾아오라, 이 소리 아냐!’
천휘는 데보타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전히 매혹적인 미소를 품으며 천휘를 지그시 바라봤다.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무엇인가요?”
천휘의 물음에 데보타가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싱그러운 미소지만, 천휘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미소가 너무도 비열해 보였다.
“확실히 그 창고, 아니 그 던전에 세 가지 물품만 있는 것인가? 혹시나 그 외에도 다른 여러 물품들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후훗, 아니랍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곳에는 오로지 세 가지 물품들만이 있을 뿐이랍니다.”
데보타의 대답에 천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받아들이지.”
[띠링! 퀘스트 ‘하이 엘프 퀸과의 약속’이 발동되었습니다.]
드래곤 산맥에서 넘어온 3마리의 히드라들이 엘레이든 동북쪽 테헤른산을 지배하며 일대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을 처치하고 하이 엘프의 성지 ‘태양의 진실’을 수복하라.
난이도:A+
기한:30일
보상:경험치 500,000
기타:아공간
“…허.”
천휘는 퀘스트 알림창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퀘스트 난이도가 무려 A+인 데다, 데보타가 말한 거대 몬스터가 아직까지 『오벨리스크』에서 한 번도 잡히지 않은 S급 몬스터 히드라라는 사실을 확인하니 허탈함이 밀려온 탓이었다.
“건투를 빌어요.”
“…….”
아무렇지 않게 조그마한 주먹을 쥐며 말하는 데보타를 보며 천휘는 순간적으로 살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8서클 대마도사. 기습을 펼친다 해도 승산은 없었고, 무엇보다 자신은 반드시 아공간을 얻어야만 했다.
“젠장! 이런 녀석을 어떻게 잡아!”
영완은 『오벨리스크』에서 나와 컴퓨터로 오시리스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히드라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며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세 개에서 아홉 개의 머리를 지닌 초대형 몬스터. 크기는 최소 50미터이고 그보다 더 거대할 수도 있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비늘은 6서클 미만의 마법으로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고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다. 몸집은 거대하나, 거대하고 긴 목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날렵한 공격도 펼칠 수 있고, 무엇보다 녀석이 지닌 최고의 무기는 바로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 드래곤에 필적하는 브레스의 위력은 경악 그 자체다……. 못해! 난 못해!”
히드라는 한마디로 약점이 없었다. 물리 방어력은 물론이고, 마법 방어력까지 완벽한 데다, 공격력 또한 어마어마하다. 그런 녀석들이 무려 3마리나 존재하다니.
대체 왜 8서클 대마도사인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고 이렇듯 자신에게 퀘스트를 부여한 건지 이제야 이해가 갈 정도였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오베른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히드라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나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설사, 철골강시로 재탄생한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동원한다 해도 히드라 한 마리 상대하는 것조차 힘들 터였다.
“응? 이건 뭐지?”
행여나 히드라의 약점을 알 수라도 있을까 싶어 오시리스 게시판을 이 잡듯 돌아다니던 영완은, 유난히 히트 수가 많은 게시물을 클릭했다.
“S급 보스 몬스터 터틀 드래곤 등장. 장소는 펜하르트 왕국? 펜하르트 최강 길드 철혈 기사단을 주축으로 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다? 흐음,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 앗! 그러고 보니!”
영완은 게시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했다.
-단군한배검:저도 레이드 참여합니다.
-꼬냥이:철혈 기사단이라면 제아무리 터틀 드래곤이라도 문제없겠죠? 저도 힘을 보탤게요.
-김태훈:무조건 고!
대부분의 댓글들이 레이드에 참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중에는 한 길드의 마스터도 있어 대대적으로 레이드를 지원하겠다는 글도 있었다.
“이거다!”
영완은 댓글들을 읽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찌나 큰지 스스로도 놀라 급히 입을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이거라면 문제없어!’
『오벨리스크』를 꾸준히 즐겨 온 유저들은 어느 정도 힘이 갖춰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최소한 투마스터는 되어야 고수 소리를 들었고, 대륙의 지존 12인은 쓰리마스터에 올랐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유저들의 힘이 팽창할 대로 팽창했다는 소리다.
이제 유저들의 관심은 지겨운 레벨 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험이나 S급 보스 몬스터의 레이드에 쏠리고 있었다. 처음 『오벨리스크』가 오픈했을 때만 해도 겨우 대륙의 30퍼센트만이 개척되었었지만, 게임이 오픈한 지 1년 반가량이 지난 지금에는 무려 75퍼센트가 개척된 상태였다.
하지만 나머지 25퍼센트의 미개척지는 아르니안 4대 금지로 지정된 네 곳의 새외 지역과 사상 최악의 금지인 드래곤 산맥인 탓에 유저들의 관심은 온통 레이드에 쏠리고 있었다.
‘이걸로 사람을 모아서 히드라들을 처치하는 거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바렌트 왕국의 거대 길드들이 나서준다면 문제없겠지. 문제는 시간인데……. 게임 시간으로 한 달, 현실 시간으로 열흘 안에 그들이 엘레이든으로 집결할 수 있을까?’
바렌트 왕국의 거대 길드들이 모여 있는 수도 그런트에서 엘레이든까지는 적어도 보름은 걸릴 정도로 멀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정보를 흘린다 해도 그들로서는 최대한 준비를 갖추고 나서려고 하지, 제대로 된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S급 보스 몬스터인 히드라를 잡으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뭐, 녀석들 구워삶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문제는 어떻게 녀석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소문을 퍼트리느냐는 건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가득했던 영완의 눈빛에 서서히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