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하이 엘프의 마을 엘레이든 (17/82)

제6장 하이 엘프의 마을 엘레이든

[주인, 녀석들을 쫓을 방법이 정녕 없는 것인가?]

“…아무래도.”

[…….]

퇴근하고 『오벨리스크』에 접속하자마자, 오베른은 천휘를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짜증날 법도 하건만 오베른에게 있어 그들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천휘이기에 모두 받아주고 있었다.

“걱정 마. 녀석들과 우리의 악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될 거다.”

[…….]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서, 다음에 녀석들을 만났을 때 이번처럼 쪽팔리게 당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위로의 말에도 여전히 풀 죽은 모습의 오베른을 보자, 결국 천휘는 참지 못하고 화를 토해냈다.

[주인, 말이 맞다. 역시 주인 똥은 굵다.]

“…야, 그런 건 좀 배우지 말란 말이야.”

대충 오베른이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천휘는 의자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흑마법사 녀석들은 아무래도 금방 찾기 어려울 것 같군.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정보 길드 본점 정도? 아르니안 대륙의 모든 정보를 갖추고 있다는 그곳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지도.”

일부러 오베른 들으라고 크게 말한 천휘는 하얀 종이 위에 ‘흑마법사는 나중에’라고 적었다. 오베른의 입장에서야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정작 천휘에게는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역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하이 엘프 퀸을 만나는 것이겠지.’

『오벨리스크』 시간으로 무려 한 달 반에 걸친 막노동 끝에 1백 기에 이르는 철골강시 군단은 만들었지만, 녀석들의 엄청난 중량과 크기 때문에 데리고 다니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나같이 미친 소에 근접하는 엄청난 근력과 맷집을 자랑하는 녀석들이기에 녀석들만 있으면 몰이사냥을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폭렙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고 봐야 했다.

‘더불어 녀석의 동향도 놓칠 수 없지.’

으드득!

늘 그렇듯 녀석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린다.

오늘도 학교에서 녀석은 같이 가기 싫다는 희영을 데리고 교무실을 나섰다. 요새 들어 부쩍 다툼을 많이 하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야 어떻든 천휘가 화가 나는 건 녀석의 태도다. 감히 희영을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하루속히 녀석이 『오벨리스크』에서 이루어놓은 세력을 깡그리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녀석의 현 상황을 자세하게 알아야 했다.

“젠장, 이래저래 돈 나갈 데는 많고 돈은 없고. 역시 경매장에서 막 지르는 게 아니었나. 자식들 옆에 있다고 괜히 허세 부렸어.”

마지막 황제의 무덤에서 도굴한 보물들은 이미 모두 골드로 환산되어 철골강시 제작에 필요한 시약을 구매하는 데 쓰이고 말았다. 그나마 현재 천휘가 가지고 있는 골드는 고작해야 10만 골드. 몇천만 골드를 쥐락펴락하던 예전의 천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 빌어먹을 저택이나 좀 팔아볼까? 그러면 좀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말이야. 에이, 아서라. 그래도 사람이 집은 가지고 살아야 마음이 편하지. 비록 게임 속이긴 하지만 말이야. 좋았어! 역시나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건 하이 엘프 퀸을 만나는 거야! 그래야 철골강시 녀석들도 써먹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몰이사냥을 통해 돈도 짭짤하게 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오베른! 나가자! 출동 개시다!”

천휘는 곧바로 저택의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창고 옆 넓은 잔디밭 위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파뱃이 있었다.

“야, 일어나.”

끼엑?

퍽!

“그렇게 울지 말랬지? 이 자식 와이번이라면서 대가리는 새대가리인 거 아냐?”

끼… 짹짹.

“좋아! 오베른, 올라와.”

[알았다.]

“파뱃! 북쪽으로 날아가!”

끼에… 짹짹.

파뱃의 등 위에 올라 천휘는 북쪽의 바렌트 왕국으로 향했다. 왕국의 대부분이 산악 지대로 이뤄진 바렌트 왕국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이종족 마을의 건립을 허가한 나라였다.

그곳에는 엘프나 드워프는 물론이고, 노움의 마을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마을들 대부분이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유저들로서는 찾기 어려웠다.

“이곳이 바렌트 왕국의 수도 그런트인가?”

수도 오베른에서 곧장 북쪽으로 향하면 거대한 산들로 둘러싸인 바렌트 왕국의 수도 그런트를 찾을 수 있다. 마치 엘프들의 마을처럼 수도 곳곳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도시의 조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무척 아름다운 곳이군.]

“그러게.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공원 같은 느낌인걸?”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런트는 천휘의 말처럼 흡사 공원을 연상케 했다. 건물조차도 덩굴들이 휘감고 있어 온통 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탓이었다.

“일단 내려가자. 이곳에서 엘레이든의 위치를 알아봐야겠어. 파뱃! 아래로 내려가! 아니, 그쪽으로 말고 저쪽으로!”

끼에… 짹짹.

“역시나 한 나라의 수도라 그런지 사람은 꽤 많네. 앗! 저 사람은 엘프 아냐?”

[엘프 처음 보나?]

“일전에 피부가 검은 다크 엘프들은 본 적이 있지만, 저토록 순백의 피부를 지닌 엘프는 처음이야. 역시나 듣던 대로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쁜걸?”

천 제국에서만 활동하던 천휘에게 엘프들의 아름다움은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천 제국에서도 무수히 많은 NPC 미녀들을 봐왔지만, 그녀들조차도 눈앞에 지나가는 엘프들의 아름다움은 그 이상의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침은 흘리지 마라, 주인. 보기 민망하다.]

“…침은 무슨. 아무튼 움직이자. 여행자 길드나 용병 길드라면 엘레이든의 위치를 대충 알고 있겠지.”

[침은 닦고 움직이자, 주인.]

“안 흘렸다니까!”

오베른의 거대한 체구는 어딜 가든 눈길을 끌게 마련이다. 게다가 거구에 걸맞게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등에 메고, 또한 보기에도 무겁기 그지없어 보이는 풀 플레이트를 착용한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오베른의 체구가 먹히지 않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용병 길드였다.

덜컥.

‘이거 분위기 왜 이래?’

용병 길드의 입구에 들어서자, 뭇 남성들의 눈이 천휘에게로 쏠렸다. 아니, 정확히는 천휘의 뒤에 서 있는 오베른에게로 향해 있었다. 오베른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마치 레이저를 발산하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콰앙!

[한판 해보자는 건가?]

“야! 무슨 망발을…….”

그들의 도전적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오베른이 클레이모어로 땅바닥을 강하게 내려치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천휘는 급히 녀석을 제지했지만, 이미 사고는 터진 후였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후원으로 와라! 내 본때를 보여 주지!”

“저리 비켜! 저 녀석은 내가 상대할 거다!”

“무슨 소리! 덩치만 믿고 까부는 저놈은 내가 묵사발 낸다.”

[…여긴 다 너 같은 놈들만 있는 거냐.]

오베른의 도발에 길드 건물 안에 있던 남자들이 제각기 자리에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척 보기에도 드는 것조차 무거운 무기들을 들고 있어 언뜻 보기에도 제법 한가락 할 것처럼 보였다.

[한꺼번에 붙어라! 모조리 밟아주지!]

“야! 너까지 그러면…….”

“배짱 한번 두둑한 놈이군! 하지만 그 배짱이 네놈의 명줄을 잡아당긴 거다!”

“우리를 밟아? 저런 미친놈! 저 자식을 쳐 죽여 버려!”

오베른의 한마디에 불끈한 사내들은 당당하게 건물 뒤편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이어 오베른이 그 뒤를 따라나갔다.

“하아, 세상에서 제일 싫은 족속들이네. 단순 무식 지랄. 젠장! 오베른! 같이 가!”

용병 길드 건물 뒤편에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기라도 하듯 제법 커다란 공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베른은 수십 명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채 가공할 만한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오베른! 꼭 싸워야겠어?”

용병 길드에 엘레이든의 위치를 묻기 위해 온 것이지, 용병들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천휘는 용병들과 싸우려는 오베른을 말리고자 물었다.

[남자는 걸어오는 대결을 거절하지 않는 법이다!]

“…하아,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네 맘대로 해!”

어차피 이런 답이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천휘는 체념하고 공터 한쪽에 쌓인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유저가 아니군. 뭐, 상관은 없지. NPC라고 해도 우리를 모욕한 건 마찬가지니까!”

“감히 누굴 밟아버린다는 거야!”

“우오오오!”

오베른을 둘러싼 사내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그를 위협했다. 하지만 오베른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까지 말고 덤벼라.]

“컥! 저 자식, 저런 말은 또 언제 배운 거야? 이거 난리 났네.”

오베른을 지켜보던 천휘는 그가 너무도 도발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자, 아무래도 일이 쉽게 넘어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지 않아도 흉흉했던 분위기는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불현듯 나타난 한 사내의 등장 탓이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인지는 몰라도 이곳 그런트 용병 길드의 질서를 확실히 알려 주지.”

“마스터!”

마스터라 불린 사내는 오베른에 육박하는 거대한 체구에, 기이하게도 쌍검을 쓰는 듯했다. 게다가 머리는 또 어찌나 긴지 흡사 로커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빌어먹게도 입만 산 놈들 천지군.]

마스터라는 사내 또한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베른의 반응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러자 마스터라는 사내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기어코 쌍검을 꺼내들었다.

[띠링! 돌발 퀘스트 ‘용병들의 신고식’이 발동되었습니다.]

거친 사내들 간에는 그들만의 신고식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몸을 부딪쳐 사람을 판단하며, 길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그들의 신고식에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라.

난이도:B-

기한:無

보상:경험치 50,000

기타:용병의 친구로 인정받음

기타:용병 길드에서 무보수로 정보 취득 가능

번쩍!

천휘는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알림창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베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무조건 이겨! 지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천휘가 신나서 응원 아닌 응원을 했지만, 오베른은 이미 마스터라 불린 사내와 대치중이었다. 마스터라 불린 사내도 제법 실력이 출중한지 오베른이 선뜻 선제공격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군. 자네 역시 투마스터의 영역에 발을 디딘 모양이군. 유저는 아닐 테고, NPC인가?”

[잡설은 집어치워라!]

마스터라는 사내의 말을 미뤄봤을 때, 그 역시 오베른과 마찬가지로 투마스터인 듯했다. 오베른이 검사로서 그랜드 소드마스터에 이르렀다면, 그는 아마 용병으로서 투마스터의 칭호인 제네럴의 경지에 올랐을 터였다.

‘난이도가 제법 높더니, 이런 걸 말한 거였나? 게다가 유저 운운하는 걸 보니, 유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휘는 상대의 실력을 대충 가늠해보고는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베른과 대등한 실력자라니, 그것도 유저라면 퀘스트 클리어는 쉽지 않다.

보통 유저가 NPC들보다 훨씬 더 유기적인 움직임이 가능하고, 그 덕에 동급의 실력이라 할지라도 NPC보다는 유저가 더 강하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었다.

‘넌 그랜드 소드마스터가 아냐! 넌 천마강시 오베른이다! 이길 수 있어!’

그러나 천휘는 여전히 오베른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 제국에서 만들었던 천마강시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천마강시가 바로 오베른이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검술에 키메라의 단단한 맷집, 거기에 더해 그는 천마강시로서 비약적으로 상승한 근력과 민첩성이 있었다.

[하앗!]

“타앗!”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하더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에게 쇄도했다.

콰앙! 캉캉캉!

격렬한 충격음과 함께 연이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마스터라 불린 사내의 근력 역시 거대한 체구에 걸맞게 대단한 듯 오베른을 상대로 무기를 맞부딪치면서도 전혀 밀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마스터라는 사내의 쌍검술은 천 제국의 환검을 연상시킬 정도로 사람의 시야를 현혹시키는 화려한 검술이었다. 그나마 오베른이 거대한 클레이모어로 잘 방어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화려한 쌍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을 터였다.

‘슬슬 오베른이 천마강시로서의 자각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오베른은 현재 천마강시임에도 천마강시로서의 특성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전투 감각은 오로지 살아생전의 그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마강시는 천마강시만의 전투 방법이 있다. 일반 범인의 시체로도 절정 고수 서넛을 상대할 수 있었던 천마강시만의 전투 방법. 천휘는 이번 대결을 계기로 오베른이 그것을 각성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콰아앙!

주르륵.

“큭.”

[…….]

그야말로 공터를 뒤흔드는 충격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마스터라는 사내는 고통이 심한 듯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오베른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쿡쿡, 푸하하하! 이거 온몸에 전투 아드레날린이 샘솟는데? 자네는 안 그런가?”

[눈곱만큼?]

“푸하하하! 감히 내 앞에서 그러한 오만함이라니!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람이 분수를 모르면 명이 짧은 법이지. 특히나 NPC 따위가 그러면 유저인 내 입장에서는 기분이 심히 편치 못하거든! 하아아압!”

“비- 빌어먹을! 마스터가 그 기술을 쓰려 한다! 모두 피해!”

“젠장! 어서 밖으로 나가!”

마스터라는 사내가 기합을 내지르자, 그곳에 모여 있던 용병들이 하나 둘 공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길드 건물에서도 소란이 일며 그곳에 남아 있던 이들도 밖으로 대피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란 말이지.’

[…….]

때 아닌 소란에 천휘도 잔뜩 긴장하며 사내를 노려봤다. 하지만 오베른은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식. 전신이 떨리는 걸 보니 잔뜩 흥분한 모양이지?’

제아무리 눈앞의 사내가 강하다 해도 천휘는 오베른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사 이 일대를 폐허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라도, 오베른은 그보다 훨씬 강했다. 천휘 자신이 아는 한.

“하아압! 데모닉 파워!”

우우웅.

마나를 모으던 사내가 갑자기 또다시 기합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 주위로 흡사 마기를 연상시키는 다크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마계의 스킬인가.”

아르니안 대륙에는 천 제국과 달리 3개의 이공간이 존재한다. 마신 벨제붑이 지배하는 마계와 태양의 신 라멘이 지배하는 신계, 그리고 정령신 엘레노아가 지배하는 정령계가 그것이다.

하지만 3개의 이공간은 아르니안 대륙과 일정한 방법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그저 특정 소수의 인물들만이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로부터 힘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마계는 흑마법사들이, 신계는 사제들이, 그리고 정령계는 정령사들만이 소통하고 힘을 빌려 쓸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도 아주 간혹 그들과 소통해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숨겨진 퀘스트를 통한 것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데모닉 제너럴, 아르샤빈.

아르니안의 열두 별 중 항상 상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 강자가 바로 그였다.

[하아압!]

그런 사내를 보며 오베른 역시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땅바닥이 조금씩 금이 가더니, 급기야 흙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르샤빈의 얼굴에는 처음의 여유로웠던 모습과 달리 긴장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뭐지? 녀석에게 이런 스킬이 있었나?”

그동안 천휘가 봐온 오베른의 스킬 중에 저러한 효과를 지닌 스킬은 분명히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껏 보여 주지 않았던 스킬이거나, 혹은 최근에 깨달은 스킬이라는 말이 된다.

‘혹시 각성을?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녀석은 아직 각성하지 못했어.’

만에 하나 녀석이 진정으로 각성을 한 것이라면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예전에 천 제국에서 만들었던 천마강시는 각성을 통해 전신이 흡사 황소처럼 부풀어 올랐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그에 근접한 변화는 있어야 정상이라는 소리다.

[흐아아압! 드래고닉 파워!]

“…넌 결국 드래곤이냐.”

흡사 일본식 만화처럼 흘러가는 전개에 천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결이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용과 마의 대결이라…….”

마치 어린 시절 읽었던 구시대 판타지를 보는 추억에 빠져 드는 기분이었다. 정의의 편에 선 드래곤과 악의 축 마왕의 숙명적인 대결.

…그러나 실상은 오만한 용병과 건방진 강시의 대결일 뿐이었다.

“죽어라, 놈!”

[까고 있네!]

“…그러니까 대체, 왜 강시가 그딴 비속어를 쓰는 거냐고!”

두 사람의 대결은 이전보다 훨씬 치열했다.

검은 기류에 휩싸인 아르샤빈과 적색 기류에 휩싸인 오베른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치열하지만, 그러나 보는 입장에서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에는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던 천휘도 지루한지 연방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삼십 분 정도 지났나?”

천휘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조금씩 승부의 축이 기울기 시작했다. 유저인 아르샤빈에게는 강시인 오베른과 달리 한계가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피로도와 같은 한계가 말이다.

콰아앙!

“끄으윽, 헉헉.”

[…….]

결국 아르샤빈은 축적된 피로도 탓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오베른의 강력한 일격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상반신만 일으킨 채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NPC라 해도 피로도는 엄연히 존재하는데… 넌 괴물이군.”

‘괴물이 아니라, 강시다. 피로도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아르샤빈의 말에 천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베른을 쳐다봤다. 승패는 결정되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가 어떻게 마무리를 짓느냐 하는 것이었다. 패한 아르샤빈을 죽일 수도 있었고, 살려 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은 승자인 오베른에게 있었다.

[제법 강한 녀석이군.]

“으하하하, 내가 그런 소릴 듣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오베른의 진심 어린 말에 아르샤빈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이겼다.]

“그렇지. 나는 패했고.”

[…하지만 넌 강했다. 그 누구보다 더!]

“그런 말 따위를 들어도 그리 기쁘진 않군.”

오베른의 진심 어린 칭찬에도 아르샤빈은 전신을 옭아매는 패배감 때문인지 말이 곱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더 강해져라. 그리고 훗날, 다시 붙어보자.]

“…훗, NPC 주제에 무척이나 건방지군.”

[내 똥은 굵으니까.]

“응? 푸하하하!”

“아이고, 두야.”

오베른의 뜬금없는 말에 아르샤빈은 배를 붙잡고 폭소했고 천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골치 아파했다.

어쨌든 난데없는 돌발 퀘스트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언제든지 찾아와라.”

[네가 찾아와. 난 승자고, 넌 패자다. 당연히 패자가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푸하하하! 네 말이 맞다. 내가 널 이길 수 있다고 생각되면 널 찾아가마. 그리고 이걸 받아라.”

아르샤빈이 갑자기 오베른에게 작은 금패 하나를 건넸다.

“그것은 네가 아르니안에서 단 다섯 명밖에 없다는 S급 용병임을 증명해주는 용병패다. 이제 네가 포함됐으니, 총 여섯 명이 되는 것이겠군.”

[난 용병이 아니다. 긍지 높은 테오른의 기사다!]

“큭큭, 기사건 뭐건 넌 내가 인정한 최고의 용병이다. 누구보다 거칠고, 누구보다 단순하며, 누구보다 무식하다! 넌 그야말로 살아 있는 용병의 표상이다!”

[흐음, 그런 건가?]

역시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오베른 녀석을 구워삶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최고라는 한마디에, 자신은 기사라고 당당히 외쳤던 오베른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이것.”

“이게 뭐죠?”

“자네가 말했던 하이 엘프의 마을 엘레이든에 대한 정보일세. 정보 길드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용병 길드도 제법 정보력이 괜찮으니, 두고두고 쓸 만할 거야.”

“아.”

천휘는 아르샤빈에게서 받은 몇 장의 서류들을 무한의 행낭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찌 됐건 목표한 물건을 손에 넣었으니, 시간을 다소 허비한 것을 어느 정도 만회한 셈이었다.

게다가 최고의 용병들만 가질 수 있다는 S급 용병패까지 얻었으니, 꿩 먹고 알 먹은 셈이었다.

“이제 가자, 오베른.”

[알겠다, 주인.]

“다음에 또 보지.”

아르샤빈의 배웅을 뒤로하고 천휘와 오베른은 천천히 도시 외곽으로 걸어 나갔다.

“야, 다음부터는 네 맘대로 나서지 마.”

[무슨 말이지?]

“네가 내 머슴이란 걸 잊었어? 괜히 나서지 말란 말이야! 시도 때도 없이 주인인 날 버리고 앞으로 나서는 게 머슴이 할 짓이냐고! 머슴이 뭐야!”

[누구보다 강하고 충직한 호위 무사다!]

“그걸 아는 놈이 그래? 호위 무사면 호위 무사답게 날 지키란 말이야! 천방지축 날뛰지 말고!”

천휘는 이참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녀석을 확실히 교육시킬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하이 엘프 퀸이나, 그녀의 호위 무사들에게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면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음, 확실히 나같이 충직한 머슴이 주인보다 앞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알겠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이 나서기 전에 먼저 나서지 않겠다.]

“제발 좀.”

하이 엘프의 마을 엘레이든은 산악 국가인 바렌트 왕국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불리는 클리든 산맥에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이 발견된 것도 『오벨리스크』가 오픈되고 무려 1년 후였다. 그만큼 일반 유저들에게는 찾기 힘든 곳이 엘레이든이었다.

“앗, 찾았다! 저기야!”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은 일반 유저들에게나 통용되는 일. 파뱃을 타고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휘에게는 하등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야말로 거대한 나무네.”

[세계수 메두살리온이라는 거다.]

“어라? 너 여기 와본 적 있는 거냐?”

테오른 왕국에서 나고 자랐을 그가 이 먼 타국에 와봤을 리 만무하지만 천휘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아마도.]

“흐음, 그래? 네 녀석의 기억이 오락가락하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진짜 거대하긴 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나무일 거다.]

“호오, 정말? 하지만 오래 산 것치곤 지나치게 싱그러운데? 저기 봐! 새싹도 나 있어!”

마치 엘레이든의 하늘을 막아주는 지붕처럼 메두살리온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고 더불어 잎도 풍성해 그 아래로 햇빛이 비추지 않을 정도였다.

“저 정도로 햇빛을 가리는데 마을은 햇빛으로 환하다? 뭔가 언밸런스한 거 아냐?”

[햇빛이 아니다. 저건 메두살리온이 뿜어내는 생명의 빛이다.]

“생명의 빛?”

[메두살리온은 태양의 신 라멘이 만들어낸 신의 산물. 햇빛을 받아 만물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신비한 나무다.]

오베른의 설명에 천휘는 놀랍다는 듯 엘레이든을 비추고 있는 빛을 쳐다봤다. 확실히 그 빛은 햇빛과 달리 더욱 찬란했고, 더욱 싱그러웠다.

“역시나 성스러운 하이 엘프라는 건가?”

아르니안 대륙의 모든 동식물들에게 생명력을 발산하는 세계수 메두살리온.

그리고 그 생명력을 이어받은 하이 엘프.

아무래도 일이 쉽지만은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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