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드러나는 흑막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처치하며 레벨을 또 하나 올린 천휘는 곧바로 수도 오베른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그곳에서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는 뒤로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은… 역시나 흑마법사들을 찾는 것인가?”
파뱃의 등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휘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정리하고 있었다.
“오베른 녀석이 말은 하지 않지만,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 흑마법사들이다. 하지만 암흑가 녀석들은 아직도 정보를 가져오지 않고 있어. 흐음, 역시나 그 녀석들… 냄새가 나.”
암흑가의 보스가 무려 5서클 이상의 흑마법사인 점만 봐도 구린 냄새가 진동했는데, 이제는 부탁했던 정보까지 오지 않고 있었다. 정보 길드가 전 대륙에 걸쳐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역시 녀석들을 족치는 게 가장 빠른 길이겠어.”
제아무리 녀석들의 세력이 암흑가 전체에 뻗쳐 있다고 해도 천휘 자신과 오베른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녀석들은 엄연히 왕국에서 인정하지 않는 범죄자 집단인 탓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나도 경비병들은 쫓아오지 않을 터였다.
“그 전에… 지금의 내 힘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겠지.”
이제부터는 이래저래 전투가 계속될 터였다.
암흑가를 족쳐 흑마법사들의 은거지도 알아내야 하고, 아공간을 얻는 것 역시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때문에 천휘는 강시를 제작하는 틈틈이 헤론 리자드맨들과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사냥하며 경험치를 쌓았고, 스킬의 숙련도를 향상시켰다.
이제 그 결과물을 제대로 확인해야 할 때였다.
레벨:289 칭호:강시지존
주직업:강시술사 부직업:격투가
명성:6,000 악명:3,501,000
생명력:7,400(+15,000) 마나:286,000(+120,000)
기력:100% 포만감:80%
물리 공격력:52~56(+600) 물리 방어력:125~135(+500)
마법 공격력:118~124 마법방어력:68~72
<기본 스탯>
근력:180(+100) 민첩:140(+450) 체력:140
지능:620 지혜:360
<특수 스탯>
손재주:420 의지:160 감지:440 집중:10
“좋아!”
처음 아르니안 대륙에 들어섰을 때보다 레벨이 8이나 상승했다. 이런 기세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레벨이 300을 돌파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명실상부한 트리플 마스터가 되어 스탯이 대폭 상승하게 된다. 100레벨이나 200레벨, 그리고 300레벨과 같은 100레벨 단위에는 일종의 관문이 존재했고 경험치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천휘가 99레벨이 되었을 때 100레벨로 오르기 위해 치렀던 시험은 바로 혈강시 제작이었다. 당시 천휘는 혈강시를 제작하기 위해 며칠 동안 끙끙 앓았던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지난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역시나 이번 시험은 천마강시 이상의 강시를 제작하는 것이겠지?’
200레벨 돌파를 위한 시험은 천마강시였다. 그렇다면 이번 300레벨 돌파를 위한 시험은 응당 그 이상의 강시를 제작하는 것일 터였다.
‘흑마법사 건을 빨리 해결하고 곧바로 아공간을 만들어야겠어. 그러려면 역시나… 하이 엘프의 마을로 향하는 수밖에…….’
천마강시 이상의 강시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가의 시약들이 대거 필요할 터였다. 한 번에 제작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고가의 시약은 수십 번의 제작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물량이 확보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돈도 부지기수로 들 테고, 시간도 얼마나 걸릴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이번엔 스킬 숙련도를 알아볼 차례인가? 스킬창 오픈!”
[주직업 강시술사 스킬]
강시 제작술:고급 2단계(03.01%)
고루마공:중급 8단계(81.45%)
시약 제조술:고급 4단계(19.36%)
약초술:고급 3단계(47.32%)
[부직업 격투가 스킬]
피스트 마스터리:중급 3단계(48.96%)
오라 마스터리:초급 8단계(68.12%)
연타:중급 4단계(23.63%)
대지의 울음:초급 6단계(12.86%)
악마의 숨결:초급 3단계(16.38%)
이중극점:초급 2단계(14.58%)
[보조 스킬]
삼재보법:고급 8단계(84.85%)
무형은잠:고급 4단계(79.78%)
[조합 스킬]
악마의 주먹:초급 1단계(01.13%)
“큭큭큭.”
주직업 스킬인 강시술사의 스킬은 물론이고, 부직업 스킬인 격투가 스킬 또한 대폭적으로 상향되었다. 그동안 친구들도 안 만나고 죽어라 『오벨리스크』를 한 보람이 있었다.
“피스트 마스터리가 하루라도 빨리 중급을 넘어서 고급에 들어야 할 텐데. 그때쯤 되면 고루마공도 고급에 올라설 거고… 그렇게만 된다면!”
천휘는 무심코 무한의 행낭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마령혈천권법… 반드시 익혀 보일 테다!’
천휘가 익히고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스킬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가치가 있고 훗날 천휘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마령혈천권법이었다.
“뭐, 지금은 그보다 흑마법사를 족치는 게 급선무지. 파뱃! 스팀 팩 먹고 오베른으로 날아간다! 스팀 팩-!”
끼에… 짹짹.
천휘의 명령에 울부짖으려던 파뱃은 이내 천휘의 매서운 눈빛에 울음소리를 급하게 변경하며 빛살과도 같은 빠르기로 오베른으로 날아갔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아, 그래. 별일 없었지?”
“이곳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정보 길드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전갈이 없고?”
“그렇습니다만…….”
집사 그레엄의 말을 들은 천휘는 곧바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오벨리스크』 시간으로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보를 건넬 생각이 없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오베른, 나와.”
파앗!
암흑가의 입구에 들어선 천휘는 곧바로 오베른을 빙옥에서 꺼냈다. 암흑가 전체를 상대로 푸닥거리를 하는데 오베른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그곳이로군.]
“아무래도 이곳에서 뒤가 구린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서 말이야.”
[뒤가 구리다니. 주인, 혹시 방귀 뀌었나?]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이곳에서부터 네 녀석을 그 꼴로 만든 흑마법사들을 본격적으로 추적할 거다. 무슨 소리인지 알지?”
[…충분히.]
천휘의 한마디에 오베른의 기세가 판이하게 변했다. 말 그대로 사냥감을 목전에 둔 사자처럼 이글거리는 살기와 투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아무래도.”
오베른의 살기를 느낀 천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나 흑마법사들에 대한 녀석의 원한은 깊고도 깊었다.
“잠깐 기다려 봐. 파뱃 녀석의 파이어 브레스로 우리가 왔다는 걸 알려 주고 시작할 테니까. 목표는 그때 만난 바로 그 흑마법사다. 녀석만 족치면 될 거야.”
[그러지.]
오베른의 대답을 들은 천휘는 곧바로 파뱃 녀석에게 영성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 어떤 강시보다 자신의 마나를 많이 부여받은 파뱃이기에 자신과의 영적 연결이 가장 두드러지게 이어지고 있었다.
끼에에엑!
녀석에게 지시를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오베른의 상공으로 파뱃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펼치면 무려 40~50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모습. 수도 오베른에는 때 아닌 공습경보가 내려졌다.
“저 자식이 또 저렇게 우네? 진짜 날 잡아서 쥐어 패든지 해야지 고치려나? 아무튼 파뱃! 브레스!”
끼에… 짹짹.
천휘의 말을 들었는지 파뱃의 울음소리는 살짝 변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입에서 뿜어지는 고열의 브레스. 녀석으로 인해 조용했던 암흑가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불이야!”
“불을 꺼라!”
“으아아악! 누가 내 몸에 붙은 불 좀 꺼줘!”
아비규환(阿鼻叫喚).
파뱃의 브레스 한 방에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암흑가는 순식간에 극한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베른! 지금이다!”
[알았다!]
하지만 천휘는 암흑가의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건 말건 암흑가를 누비며, 흑마법사이자 암흑가의 보스인 갈릭을 찾았다.
“젠장! 여기도 없어!”
천휘는 갈릭을 찾아 예전에 정보 길드의 마스터인 비앙카가 안내한 주점으로 향했지만, 역시나 그곳에도 갈릭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천휘는 지나는 사내를 붙잡아 갈릭의 위치를 캐물을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악! 사- 살려 줘!”
“갈릭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끄아아악!”
고문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천휘는 오베른으로 하여금 사내의 팔을 뒤로 젖히게 만들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시- 시계탑.”
엄청난 고통에 못 이겨 결국 사내가 말을 토해냈다.
“시계탑? 아, 저기 말인가? 좋았어! 오베른, 따라와!”
[이 녀석은?]
“그냥 냅… 아니, 업고 간다. 혹시나 녀석이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으니.”
[알았다.]
“히익!”
천휘의 말에 사내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에 천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사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뼈 마디마디가 뽑혀져서 죽을래, 아니면 좋게 말할래?”
“히익! 시계탑이 아니라, 저기 보이는 5층 건물이다. 그곳의 꼭대기에 보스의 비밀 거처가 있다.”
“이제야말로 실토하는군! 네놈 살려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라! 가자!”
천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했다고 판단해 곧바로 사내가 가리킨 5층 건물로 향했다.
“흐음, 이상하게 이곳만 조용한걸? 화염도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말이야.”
기이하게도 5층 건물 부근에만 화염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원체 암흑가가 목조 건물로 이뤄진 탓에 불길이 사방 천지로 번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 건물만큼은 마치 태풍의 핵처럼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함정인 모양이다.]
“그럴지도. 뭐, 아무튼 들어가자.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모 아니면 도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모 아니면 도?]
“뭘 꼬치꼬치 캐물어! 그냥 쳐들어가!”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천휘는 오베른을 믿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띠링! 연계 퀘스트 ‘흑마법사의 후예’가 발동되었습니다.]
100년 전, 죽은 기사들의 무덤에서 악명을 떨치던 흑마법사의 후예가 마수를 뻗쳐 왔다. 녀석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불사의 존재들을 앞세워 대륙 정복을 꿈꾸고 있다. 흑마법사 갈릭을 생포해 그들의 본거지를 캐내라.
난이도:A
기한:1시간
보상:경험치 100,000
기타:흑마법사들의 본거지 위치
“역시! 그 녀석이 그들의 후예였나? 그나저나 한 시간? 젠장! 한 시간이 넘으면 녀석들이 도망친다는 소린가? 오베른! 위층으로 올라가!”
천휘의 경험상 시간제한이 있는 퀘스트는 같은 난이도의 퀘스트 중에서도 더욱 클리어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한 시간이라니. 일분일초가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2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모두 해치워!”
아무것도 없는 1층을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던 중 오베른이 말했다. 천휘는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빠르게 처치하고 한 시간 내에 위로 올라가야 했기에 다급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겔겔겔겔.
“검은 손톱 좀비? 오베른! 날려 버려!”
인기척의 정체는 다름 아닌 좀비들이었다. 일반적인 좀비에 비해 강화된 형태의 좀비인 듯 움직임이 더 빠르고 날렵했다.
[미천한 좀비들이 감히!]
“…너도 준좀비거든?”
오베른의 말에 딴죽을 건 천휘는 오베른의 뒤를 따라 검은 손톱 좀비들을 처치하기 시작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꾸준히 헤론 리자드맨들을 상대한 덕에, 기본적인 격투가 스킬의 숙련도가 꽤나 상승해 검은 손톱 좀비들은 속수무책으로 천휘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다음, 3층!”
검은 손톱 좀비들을 채 5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정리하고 곧바로 3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어쌔신이냐?”
휘익, 캉!
[뒤에서 암습이나 하는 버러지들이군! 모두 죽여주마!]
“…이상한 거에 열 내기는.”
3층에는 암흑가의 어쌔신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계단에 가까이 있던 어쌔신이 오베른에게 단검을 던졌지만, 오베른의 풀 플레이트 갑옷에 힘없이 튕겨졌다.
[하앗! 드래곤 블래스트!]
천생 기사인 오베른은 뒤에서 암습하는 어쌔신들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지 곧바로 스킬을 전개했다. 거대한 클레이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의 칼날이 전방을 휩쓸고 지나가자, 곳곳에서 상처를 입은 어쌔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했어, 오베른! 나도 날뛰어볼까!”
오베른의 스킬 한 번에 잠복해 있던 어쌔신들의 위치가 드러나자 천휘는 안심하고 연타 공격으로 그들을 공격했다.
“어라? 이 녀석들 왜 이리 약해?”
자신의 주먹질 한 번에 나가떨어지는 어쌔신들을 보며 천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명색이 암흑가의 보스를 지키는 녀석들이 이 정도로 약하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천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약하지 않았다. 다만, 그만큼 오베른이 전개한 드래곤 블래스트의 위력이 굉장했을 뿐.
“좋았어! 3층도 클리어! 바로 4층으로! 고고고!”
3층을 클리어하는 것은 2층을 클리어하는 것보다 더욱 쉬웠다. 결국 3층 역시 10분 만에 클리어한 천휘는 곧바로 4층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키메라인가?”
[…….]
4층에는 오베른과는 다른 형태의 키메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베른이 인간형 키메라라면, 눈앞의 키메라들은 야수형 키메라였다. 곰의 몸집에 코카트리스의 머리를 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샤벨 타이거의 몸에 아울 베어의 머리를 지닌 녀석도 있었다.
괴기스러운 형태에 비해 지닌 힘은 대단한지, 녀석들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엄청났다.
“오베른, 괜찮겠어?”
[뭘 말인가. 설마 주인은 이런 괴물들과 나를 동류로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오베른! 넌 왼쪽을 맡아! 난 오른쪽을 맡을 테니!”
[알았다, 주인!]
오베른에게 지시를 내린 천휘는 곧바로 악마의 숨결을 전개했다. 이전까지는 악마의 숨결을 전개할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눈앞의 키메라들은 범상치 않은 외모에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닌 것 같기에 공격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악마의 숨결은 필수나 다름없었다.
‘곰의 몸집에, 코카트리스의 머리라……. 강력한 힘은 물론이고, 석화 브레스를 뿜는 녀석인가? 조심해야겠는데.’
코카트리스의 머리에서 뿜어질 석화 브레스를 조심하며 천휘는 이름 모를 키메라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무래도 석화 브레스에 직격되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돌이 되어야 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천휘는 틈을 엿보며 키메라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젠장! 섣불리 못 다가가겠네. 그렇다고 내게 원거리 공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길 나가면 반드시 원거리 스킬 하나 익혀야겠어!’
원거리 공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천휘는 계속해서 키메라의 주변을 돌았다.
그때, 오베른이 크게 소리쳤다.
[주인! 이 녀석들 생각보다 약하다! 망설일 필요 없이 부딪쳐라!]
“약해?”
오베른의 외침에 천휘는 그를 쳐다봤다. 그의 주변에는 어느새 키메라 셋이 차디찬 시체로 변해 널브러져 있었다.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디 한번 움직여 볼까?”
오베른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천휘는 곧바로 경공을 전개해 녀석에게 빠르게 쇄도했다.
꾸꾸꾸꾸.
“응? 헉! 브레스!”
오베른의 말만 믿고 키메라에게 달려들던 천휘는 녀석의 머리에서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는 급히 방향을 틀었다.
쿠아아앙!
“끄아악!”
[띠링! 왼다리가 ‘석화’ 상태에 걸리셨습니다. 30분 이내로 회복하지 못하면 전신으로 석화가 번집니다.]
키메라의 석화 브레스가 천휘의 왼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 스친 것임에도 생명력은 3,000이나 깎였고 왼다리는 행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이 녀석들 약하다며! 감히 누굴 낚는 거야!”
[…그 녀석이 대장인 모양이다.]
“저저저! 젠장! 저 녀석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냥이, 나와!”
오베른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은 천휘는 이내 냥이를 빙옥에서 꺼내 그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하니, 냥이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오베른! 너 좀 있다 보자!”
[좀 있다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더군.]
“으윽! 저게 진짜! 으악! 냥이야, 피해!”
오베른을 향해 이를 갈던 천휘는 키메라가 다시 한 번 석화 브레스를 내뿜자, 냥이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좋았어! 역시 빨라! 저 녀석에게 공격을 피하면서 달려들어!”
크워어엉!
천휘의 지시에 냥이가 전광석화와도 같은 빠르기로 키메라에게 달려들었다.
“악마의 숨결! 연타!”
냥이의 등에 올라탄 천휘는 코카트리스의 머리에서 뿜어지는 석화 브레스를 피해내며 녀석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키메라가 보통 흑마법사의 농간으로 피부가 단단해지긴 하지만 악마의 숨결이 담긴 천휘의 주먹은 그보다 더욱 강력한 힘으로 녀석의 피부를 두드렸다.
꾸아악!
“겨우 처치했네. 오베른 녀석은? …물어보나 마나지.”
간신히 키메라 한 녀석을 처치한 천휘와 달리, 오베른 녀석은 이미 다른 녀석들을 모두 처치하고 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마법사의 후예’ 퀘스트가 30분이 지났습니다.]
“벌써? 젠장! 오베른! 곧장 위로 올라가! 흑마법사 녀석들을 놓칠 수 없어!”
[기다리고 있었다.]
“냥이, 고고!”
오베른에게 화를 낼 시간도 없이 천휘는 곧바로 마지막 층인 5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하반신은 모두 석화되어 언제 전신으로 퍼질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지금 그보다 더 급한 것은 퀘스트의 클리어였다.
“클클, 결국 여기까지 왔군.”
“갈릭!”
“생각지도 못한 방문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동안 그렇게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더니 말이야.”
갈릭의 비아냥거림에 천휘는 크게 소리쳤다.
“오베른! 저 녀석만 빼고 모두 죽여 버려!”
[접수했다! 하앗!]
시간이 촉박했다. 퀘스트 클리어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듯했지만, 전신으로 석화가 퍼지는 것을 막으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퀘스트를 끝마쳐야 했다.
천휘의 지시에 오베른이 갈릭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건달 NPC들을 향해 쇄도했다. 오베른은 녀석들이 하찮은 무기를 휘두르며 공격했지만, 그것들을 모두 무시한 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녀석들을 일거에 베어버렸다.
“역시 꽤나 강력한 호위 무사를 두셨군그래.”
“뭐, 보시다시피.”
“하지만 이걸 어쩌나. 자네는 조금 있으면 죽을 신세 같은데 말이야. 그것도 석상으로 변해서 말이지. 크하하하!”
“널 잡고 곧바로 신전으로 달려가 성수를 뿌리면 되지. 오베른! 녀석을 생포해!”
[…….]
“오베른! 뭐 하는 거야! 어서 움직여!”
[…….]
갑자기 움직임이 멈춘 오베른을 보며 천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마치 이지를 상실한 실혼인처럼 녀석의 두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뭐지?”
“크하하하! 내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곧 석상으로 변할 거라고!”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갈릭의 말에 녀석이 모종의 술수를 쓴 것을 직감하고 천휘가 거칠게 소리쳤다.
“수작이라니! 위대한 흑마법의 힘을 고작 수작이라고 표현하다니! 죽고 싶은 게냐!”
“네놈 따위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아무래도 갈릭 녀석이 속박과 관련된 흑마법을 펼친 모양이었다. 흑마법 역시 백마법이나 신성 마법과 같이 여러 계열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이와 같은 저주나 상태 이상을 일으키는 계열도 존재했다.
“미친 소, 나와!”
음메에에!
“저 녀석에게 돌진!”
마지막 카드인 미친 소를 꺼낸 천휘는 곧바로 갈릭에게 녀석을 돌진시켰다. 3미터에 이르는 거구, 미친 소의 돌진이라면 비리비리한 흑마법사 따위는 곤죽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고 봐야 한다.
“어둠의 손!”
음메에에!
“젠장!”
“음하하하! 고작해야 미노타우로스 좀비 정도로 날 어찌할 수 있다고 여겼나?”
별안간 땅바닥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그림자 손이 돌진하는 미친 소의 다리를 옭아맸다. 그러자 미친 소는 얼마 가지 못하고 돌진을 멈춰야 했다.
“이따위 좀비는 내 마법 한 방이면 끝장이다!”
“안 돼!”
흑마법사 갈릭의 말에 천휘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갈릭의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만이 가득했다.
“어둠의 창! 꼬치가 돼라!”
“젠장! 미친 소, 피해!”
음메에에!
갈릭이 만들어낸 어둠의 창이 빠르게 미친 소에게로 날아갔다. 천휘는 다급한 마음에 미친 소로 하여금 피하라고 명령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어둠의 손이 미친 소를 옭아매고 있는 탓이었다.
콰앙!
“빌어먹을!”
결국 어둠의 창이 미친 소의 복부에 내리꽂혔다. 공격력에 특화된 흑마법의 특성상 제아무리 피통이 많고 방어력이 높은 미친 소라 할지라도 치명상을 면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미친 소의 복부는 어둠의 창이 뚫고 지나간 탓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다행히 강시라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흐음, 좀비치고는 제법 쓸 만한 녀석인가 보군. 너 역시 흑마법사였나?”
“그딴 걸 내가 알려 줄 필요가 있을까?”
“지금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좋다! 내가 지금 당장 네놈의 상황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지!”
갈릭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유저 마법사들은 캐스팅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위 마법을 펼칠 수 있지만, NPC 마법사들은 5서클 이상의 마법을 펼칠 때는 서클을 막론하고 수인을 맺어야 한다.
‘최소한 5서클의 흑마법! 이거 살아가긴 글렀네.’
아직까지도 오베른은 녀석의 마법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격 성향을 띤 흑마법이라면 천마강시인 오베른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겠지만, 이런 형태의 마법에는 속수무책이다.
미친 소 역시 마찬가지인 듯 어둠의 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근력이 높은 것만으로는 마법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길 빠져나가면 녀석들에게 반드시 마법 방어력이 높은 방어구들을 착용시킨다!’
천휘의 지금 심정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와서 마법 방어력을 높여 주겠다고 생각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미친 소는 소멸될 것이고 속박되어 있는 오베른 역시 비슷한 꼴에 처하게 될 터였다.
“나의 위대한 힘을 맛봐라! 어둠의 낫!”
수인을 모두 끝마친 듯 갈릭이 광오한 목소리로 마법을 전개했다. 그의 전면에 생성된 거대한 어둠의 낫. 그 어둠의 낫은 천천히 미친 소에게로 다가갔다.
“미친 소!”
자신이 대신 나서주고 싶지만, 자신도 이제는 팔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석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때문에 눈앞에서 미친 소가 소멸되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 천휘는 애타는 심정으로 녀석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죽어라!”
스겅!
핑!
마치 갈릭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양 녀석의 말에 어둠의 낫이 미친 소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는 고기가 썰리는 소리와 함께 기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핑?”
[띠링! ‘외눈박이 괴물의 갑옷’의 영향으로 마법을 튕겨 냈습니다.]
“마법 면역! 좋았어! 미친 소! 바로 녀석에게 틈을 주지 말고 돌진해!”
음메에에!
“뭐- 뭐지? 이런! 텔레포트!”
콰앙!
“젠장! 도망쳤나?”
미친 소가 착용한 ‘외눈박이 괴물의 갑옷’의 옵션 중 5퍼센트 확률로 5서클 이하의 마법에 대한 면역이 발동되는 것이 있었다. 어둠의 손에 속박당하고 어둠의 창에 직격됐을 때만 해도 발동하지 않았던 그 옵션이 이제야 발동한 것이다.
[띠링! 퀘스트 제한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녀석은 텔레포트를 하기 위해 시간을 번 모양이었다. 텔레포트 마법이 겨우 4서클인 백마법에 비해, 흑마법에선 무려 6서클이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최소한 6서클 마법사인 모양이군.”
[어떻게 되었나, 주인! 그 흑마법사 자식은 어디로 갔지?]
“…하아, 이제는 뒷북까지 치냐?”
제대로 뒷북 때리는 오베른을 보며 천휘는 한숨을 내쉬고 방 안을 살폈다. 행여나 녀석이 의도치 않게 흘린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빌어먹을, 역시나 철두철미한 마법사라는 건가?”
방 안에는 그저 가구만 몇 점 놓여 있을 뿐, 그 흔한 책 한 권조차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종이 한 장도 없을 정도였다.
[흑마법사는 사라진 건가? 대체 내가 어떻게 된 것이지? 어두컴컴한 심연의 바다에 빠진 느낌이었다.]
“아마도 네가 밟고 있던 것이 마법진의 일종이었을 거다. 그것도 속박이나, 혹은 정신 지배 계열의……. 보통 인간이라면 쉽게 걸리지 않을 마법이었겠지만…….”
보통의 인간에게 정신 지배 마법은 통하지 않기 마련이다. 인간의 정신은 그만큼 고도로 발전해 있고 제아무리 똑똑한 마법사들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오베른은 인간이 아니다. 뇌가 없는, 그리고 이성이 없는 강시에 불과하다. 때문에 녀석의 정신 지배 마법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 어쨌든 퀘스트는 실패네. 더불어… 녀석들의 위치를 쫓을 방법도 사라졌고 말이야.”
[…….]
“게다가… 난 이렇게 죽고 마는 건가? 오베른! 내가 죽으면 나에게서 떨어진 아이템들을 모두 저택으로 옮겨 놔라. 미친 소와 냥이는 빙옥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다음에 돌아와서 차츰차츰 이야기하자.”
[그렇게 하지.]
“다음에 보자.”
[띠링! 석화가 전신으로 퍼졌습니다. 생명력이 0으로 떨어집니다. 사망하셨습니다. 레벨이 랜덤하게 1~3레벨이 떨어집니다. 앞으로 현실 시간으로 24시간 동안 접속하실 수 없습니다.]
피슈욱.
“후아, 젠장! 간만에 사망했네. 천 제국에서도 거의 사망하지 않았는데 벌써 사망을 경험하다니.”
영완은 캡슐에서 나와 곧바로 물을 들이켜고는 따뜻한 물로 샤워했다.
띠리리링.
“어라? 이 자식이 웬일이지?”
연말이라고 바쁘다던 정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계를 바라보니, 저녁 10시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찰칵.
“여보세요? 뭔 일이냐, 이 시간에?”
(자식아, 이 형님이 전화하는데 뭔 말이 많아? 뭐 하냐?)
“『오벨리스크』 하다가 죽어서 방금 샤워하고 나오는 길이다.”
(죽어? 천하의 천휘가?)
영완의 캐릭터인 천휘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정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일이 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아, 간만에 시간이 좀 나서 너랑 술 한잔하려고. 나와라, 준우도 같이 있다.)
“준우도? 그 자식은 너보다 더 바쁠 거 아냐? 네놈은 기껏해야 중소기업 다니지만, 그놈은 대기업 다니니까.”
(잔소리 말고 튀어나와. 오랜만에 목이나 좀 축이게.)
“오늘 주말도 아닌데, 괜찮겠냐?”
(자식, 튀어나오라면 빨리 튀어나오기나 할 것이지, 뭔 말이 많아!)
“큭, 알았다.”
정호의 다그침에 영완은 결국 적당히 외투를 걸쳐 막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띠리리링.
“응? 정호 자식이네. 그새를 못 참고.”
찰칵.
“나간다, 나가. 그새를 못 참냐?”
(그게 아니라, 너 안경 쓰고 있지?)
“그럼 안경 벗고 가리?”
(좋은 데 갈 거니까 안경 벗고 렌즈 끼고 나와. 옷도 좀 세련되게 입고 오고.)
“좋은 데? 어디 갈 건데? 나 렌즈 잘 안 끼는 거 모르냐?”
(끼고 나오라면 끼고 나와! 끊는다.)
뚜뚜뚜.
자기 할 말만 하고 정호는 이내 통화를 끊어버렸다.
“뭐야, 어디 가려고 렌즈 끼고 나오라는 거야? 아 씨, 귀찮은데.”
영완은 투덜거리면서도 안경을 벗고 렌즈를 꼈다. 오랜만에 끼는 렌즈라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끼고 있을 만했다. 그리고 옷도 대충 어울릴 만한 걸로 갈아입고는 밑으로 내려갔다.
“왔냐? 어서 타라.”
“어라? 차 뽑았냐? 누가 외제차 타래!”
“큭큭, 아는 누님이 뽑아줬다. 타기나 해.”
“…….”
아는 누님이 외제차를 선물했다는 말에 영완은 매서운 눈빛으로 정호를 바라보고는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정말 그냥 아는 누님이니까.”
“어떻게 아는 누님인데?”
영완은 정호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여자 친구가 없다면 모를까,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제일 친한 친구라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벨리스크』.”
“응?”
“킥킥, 내가 누님들에게 좀 어필되는 얼굴 아니냐. 건장한 체격에 느끼한 말투, 게다가 키도 크고 말이야. 아무튼 아는 누님이 자기 레벨 올려 주는 대가로 이 차 선물해줬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나도 못 믿었는데, 진짜야. 이 자식, 아주 제대로 봉 하나 물었더라고.”
“…….”
준우의 확인 사살에 영완은 그야말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호를 바라봤다. 솔직히 지금 자신의 귀로 들은 이야기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야, 아예 그 길로 나가라. 그 뭐라 하더라? 제비? 그 길로 가면 딱이겠다, 너!”
영완의 비아냥거림에도 정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비는 무슨. 난 그냥 누님들을 도와줘서 인맥이 넓은 것뿐이다. 이것도 그냥 선물받은 거고.”
“븅진아, 이게 그냥 선물이냐? 그 누님이라는 여자가 너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이러는 거 아냐!”
“그런 누님 아냐.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독수공방하는 누님이야. 남편이 남긴 유산이 어마어마해서 돈이 좀 있는 것뿐이고.”
“그걸 믿냐, 븅진아. 다 널 꾀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둘러댄 거 아냐.”
“그런 누님 아니라니까! 아무튼 잔소리 그만 하고 이제 출발한다.”
정호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영완이 준우에게 물었다.
“어딜 가는 거냐? 술 마실 거면 대충 이 근처에서 마시지. 그나저나 네놈들은 왜 또 양복 챙겨 입고 왔는데?”
“나도 잘 몰라. 안 그래도 바쁜데 저 자식이 나오라고 했어.”
“그래? 흐음,”
준우도 영완과 마찬가지로 정호가 불러 나온 모양인 듯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30분을 달려 강남으로 들어섰다.
“야, 여긴 왜 온 거야?”
“누가 널 좀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내가 아는 누님이 네 팬이래.”
“팬?”
“그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시지존 천휘의 팬.”
“에?”
정호의 말에 영완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누님이 너 보고 싶다고 이리 온 거다. 그냥 만나서 즐겁게 놀다 오면 되는 거야.”
“야, 너 미쳤어? 그런 누님들은 너나 만나. 우리는 그냥 갈 테니까.”
“영완이 말이 맞다. 정호 네가 이번엔 좀 성급했어. 이런 일이었다면 사전에 미리 이야기라도 해줬어야지. 나도 영완이 따라갈 거다. 너 혼자 잘해봐.”
영완과 준우가 싸늘하게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정호가 다급히 차에서 내리며 크게 소리쳤다.
“로얄 팔루트!”
“…….”
“…몇 년산? 21년산은 안 먹는다.”
정호의 외침에 준우와 영완의 발길이 멈췄다. 그리고는 영완이 뒤로 돌아 나지막하게 말했다.
“큭큭, 당연히 38년산이지.”
“가자! 어디야! 그 누님이 계신 곳이!”
“큭큭큭.”
평소에 먹어보기 힘든 로얄 팔루트 38년산에 혹해 영완과 준우는 결국 정호를 따라 강남의 한 바로 들어갔다. 강남에는 올 일이 없어 영완과 준우는 길이 생소했지만, 정호는 이런 곳에 제법 오는 듯 능숙하게 두 사람을 바의 룸으로 안내했다.
“정호!”
“아, 누님! 벌써 와 계셨어요?”
“당연하지. 아, 그쪽 분들은?”
“저번에 누님이 보고 싶다던 제 친구들이에요. 왼쪽의 잘생긴 녀석이 그 유명한 강시지존이고, 오른쪽의 귀엽게 생긴 녀석이 요새 한창 주가를 날리고 있는 현자 로빈이에요.”
정호의 소개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아, 그래? 반가워요. 이쪽으로 앉아요. 난 초희라고 해요. 그냥 편하게 누님이라고 불러요.”
“아, 네.”
“그럴게요.”
과연 정호에게 외제차를 선뜻 뽑아줄 만큼 돈이 많은 재력가인지 초희의 온몸에는 값비싼 액세서리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이는 꽤 들어 보였으나, 얼굴만큼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치 연예인이 늙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성형… 이겠지?>
<당연한 소리를 물어보냐.>
두 사람은 그녀가 당연히 성형 수술을 했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 참, 혼자 있기 민망해서 내 아는 동생 한 명 불렀는데. 괜찮겠지?”
“그럼요. 초희 누님 동생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호호호, 역시 정호 동생 마음이 넓다니까.”
<마음이 넓긴 개뿔.>
<젠장, 여기 너무 가시방석이야.>
정호와 초희가 서로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 영완과 준우는 귓속말로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다.
“내 동생이 오기 전까지 한잔씩들 할까요?”
“네!”
“저희야 좋죠.”
과연 정호의 말대로 웨이터가 들고 온 양주는 다름 아닌 로얄 팔루트 38년산이었다. 세 사람이 한창 젊은 시절, 아는 선배로부터 한 잔씩 받아먹은 로얄 팔루트 38년산. 그때의 맛을 잊지 못해 그 이후에도 종종 로얄 팔루트 38년산을 사먹었지만, 고작해야 한 잔씩 사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이렇듯 병째 먹는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었다.
“흐읍.”
“흐읍.”
초희가 잔에 로얄 팔루트를 따라주자, 영완과 준우는 곧바로 입에 가져갔다. 무려 2년 만에 마시는 로얄 팔루트였다. 한 방울이라도 남길세라 두 사람은 완벽하게 잔을 비웠다.
“어머? 잘 마시네. 한 잔 더 마실…….”
“언니!”
“어머, 얘 미연아! 얼마 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기에 연락 한 번 없었니?”
“미연? 헉!”
영완은 낯익은 이름과 목소리에 술을 받다 말고 뒤를 돌아 상대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예기치 않았던 여인이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여긴 왜!’
여인은 다름 아닌 미연이었다. 희영이 소개시켜 준 바로 그 여인.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수신 거부를 해버린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런데 언니, 이 남자들은 누구야?”
“아, 내가 말했었잖아. 아는 동생이 친구들을 데려온다고.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오벨리스크』 최고의 유명 인사인 강시지존 천휘라고, 바로 저 사람이야.”
“아, 정말? 어라?”
초희의 소개에 미연이 영완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행히 오늘은 안경을 쓰지 않고 렌즈를 낀 탓에 평소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지만, 역시나 영완의 입장에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저 아세요?”
“전혀 모르는데요.”
“아, 그러세요? 흐음, 눈에 익은 눈매인데…….”
역시나 여자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닌 듯, 두꺼운 렌즈에 가려진 영완의 눈매를 어느 정도 알아보는 것 같았다.
“만나서 반갑네요. 술이나 한잔하시죠.”
“아, 네. 전 이미연이라고 해요. 스물여덟 살이고요.”
“아, 그러세요? 저 역시 스물여덟이고 이름은 이대건이라고 합니다.”
“아, 이대건 씨.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진짜 낯이 익네요.”
미연의 눈빛이 부담되는 듯 영완은 스리슬쩍 몸을 돌려 최대한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을 회피했다.
<야, 너 왜 이름 속여서 말했냐?>
<말도 마라. 왜 저번에 내가 희영 씨가 소개시켜 줘서 된장녀 한 명 만났다고 했지? 이후에도 전화까지 하는.>
<그게 저 여자야?>
<그렇다니까! 아 씨,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 먼저 일어나야겠어.>
<그렇게 해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준우에게 대충 상황 설명을 한 후 영완은 연달아 로얄 팔루트 두 잔을 입에 들이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어디 가게?”
“갑자기 일이 일이 생겨서 말이야. 나 먼저 가볼게. 누님, 나중에 다시 봬요. 오늘은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럼. 바쁜데 괜히 불러낸 건 아닌가 모르겠네. 다음에 한가할 때 봐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만.”
영완은 행여나 미연이 눈치라도 챌까 봐 빠르게 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다행히 미연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영완이 바를 빠져나갈 때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휴우, 간 떨어질 뻔했네. 저 여자가 여긴 웬일이야! 젠장! 로얄 팔루트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준우 녀석 좋은 일만 시켰잖아!”
영완은 짜증이 이는 듯 연방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리를 걸어갔다. 하지만 강남의 지리에 익숙지 않아 한 30분 정도를 헤매야 했다.
“젠장, 대체 어디로 나가야 되는 거야?”
“역시 너였어.”
“흐익!”
지하철역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던 영완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했다.
“천휘! 어디에서 많이 들었던 이름이라 했더니, 너였구나?”
“…….”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연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영완이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 내 이름을 영완이 아닌 천휘라고 불렀어. 한마디로 날 영완으로서 알아본 게 아니라, 『오벨리스크』의 천휘로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누구지? 천 제국에서 만났었나?’
영완은 분명히 소개팅 자리에서 미연을 처음 만났었다. 한마디로 게임상에서 그 이전에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천휘를 알고 있다니, 뭔가 일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구신지.”
영완은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앞뒤 분간이 잘 가지 않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 참! 현실에서의 내 모습은 조금 낯설겠네. 하지만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잖아! 난 널 알아봤다고!”
갈수록 태산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연을 보며 영완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잘 모르겠는데, 저 아세요?”
“이런 바보 멍청이! 나야, 나! 미온!”
“미온… 헉! 설마 그 미온?”
영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오벨리스크』에서 만난 그 도살녀 미온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미온의 얼굴은 어디에서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인 여인이었다. 눈앞의 미연처럼 튀는 외모의 여인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 이제 알아보겠어?”
“전혀……. 미온이라는 여자를 알고 있긴 하지만 당신과는 완전히 딴판의 여자인데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도 너처럼 성형 마법으로 얼굴을 변형시켰다고! 『오벨리스크』 내에서!”
미연의 말에 영완은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오벨리스크』에서는 퀘스트를 통해 얼굴을 변형시킬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다. 조금 전 미연이 말한 성형 마법도 그의 일종이었고, 영완의 캐릭터인 천휘가 애용하는 인피면구 역시 그러한 방법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
“미온의 얼굴이 뭐 어때서! 그 정도면 평범하고 딱 좋지! 그나저나 네가 정말 강시지존으로 유명한 천휘 맞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넌 드래곤 산맥을 넘어온 거잖아. 『오벨리스크』 최초로!”
“야, 여긴 너무 시끄러우니까 조용한 데로 가자. 입 좀 다물어!”
온 천하에 자신의 비밀을 까발리려는 미연의 입을 영완이 급히 틀어막았다.
“그럴까? 좋았어! 가자!”
미연과 엮이는 것은 싫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려면 별수 없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충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미연이 미온이었다. 이거 충격인데? 그래서 미연이 날 처음 봤을 때 낯익다고 했던 건가? 역시 여자들 눈썰미란… 무시 못해.’
“야, 어디까지 가는 거야. 대충 이 근처에 들어가.”
“무슨 소리! 우리의 역사적인 첫 만남인데, 아무 데나 들어갈 수야 없지!”
“…….”
역시 미연은 피곤한 여자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며 영완은 그녀가 이끄는 바로 들어갔다. 다행히 분위기가 조용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해 보였다.
“앉아. 뭐 마실래?”
“그냥 아무 거나.”
“그럼 내가 대충 시킨다.”
“그래.”
미연이 자리에 앉아 바텐더에게 주문하고는 영완을 바라봤다.
“그런데 너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다? 흐음, 내가 아는 누구랑 이목구비가 닮은 것 같은데, 누구지?”
미연의 말에 뜨끔한 영완은 행여나 자신이 영완임을 알아볼까 봐 얼른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날 왜 이리로 데려온 거야?”
“무슨 소리야. 네가 가자고 했잖아. 난 그냥 거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그랬나. 아무튼 별로 할 말 없으면 나 그냥 간다. 내일 또 출근해야 돼.”
“어딜 가려고! 이것도 운명이야. 게임에서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 건 또 처음이라고! 아무튼 반가우니까 한잔해! 마셔!”
“…….”
미연의 말에 영완은 역시나 그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술을 들이켰다.
“역시나 네 눈매, 그 사람과 닮았다.”
“그 사람?”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갑자기 미연의 얼굴이 우울하게 변했다. 그런 그녀가 이상해 보였는지 영완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 뭐랄까, 얼굴은 너처럼 잘생기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끌린다고나 할까? 처음 만났는데도 전혀 처음 만난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고, 날 차버리고 뒤돌아서 가는 모습도 왠지 기묘한 기분이었어. 뭐, 날 차고 간 남자는 많지만, 내 첫 인상을 보고 떠난 남자는 별로 없었거든.”
‘말이 되냐? 너 같은 여잘 좋아하게! 그나저나 이거 내 얘기 아냐? 얘가… 정말 날 좋아하는 건가? 진심으로?’
그저 장난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장난을 받아주기 싫어 전화도 받지 않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어. 난 그녀만을 사랑하니까.’
미연의 슬픈 표정을 보며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영완은 희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영완에게는 희영밖에 없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