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철골강시 군단
“후우, 이 땀 좀 봐. 너무 오랫동안 『오벨리스크』를 했더니 땀에 흠뻑 젖었네. 그나저나 애들은 수능을 잘 치르고 있으려나.”
벌컥벌컥.
결국 『오벨리스크』를 하며 밤을 지새우고 만 영완은 물을 마시면서 시계를 바라봤다. 한창 수리영역 시험을 치르고 있을 학생들을 생각하며 멀리서나마 그들에게 응원을 하고는 곧바로 컴퓨터를 켰다.
“설마 8서클 대마도사가 한 명도 없겠어? 없으면 진짜 큰일인데…….”
영완은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그런 걱정을 하면서 모니터를 쳐다봤다.
“자, 일단 오시리스에 접속하고…….”
『오벨리스크』 팬 사이트인 오시리스에 접속한 영완은 곧바로 NPC 목록창을 모니터 화면에 띄웠다.
“흐음, 뭐라고 쳐야 하나. 대마도사? 8서클?”
영완은 먼저 대마도사라는 단어로 검색했다. 그러자 목록이 뜨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대마도사에 근접한 7서클 마도사, 대마도사 지망생? 젠장! 이번에는 8서클로 검색해봐야지.”
처음 검색에서 이래저래 낚인 영완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오오! 역시! 드넓은 아르니안 대륙에 8서클 대마도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8서클로 검색하자 모니터 화면에 3명의 인물이 검색되었다.
“진 마탑의 탑주이자, 8서클 대마도사인 지안루지 드 갈라섹이라…….”
첫 번째 8서클 대마도사는 다름 아닌 진 마탑의 탑주였다.
라그혼 왕국에 위치한 마탑의 본산, 진 마탑.
그곳에 인간 최고의 마법사 지안루지 드 갈라섹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자를 만나는 건 아무래도 무리야. 뒷돈을 얼마나 꽂아야 할지. 게다가 기약조차 없으니…….”
마법사들은 대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마법 연구로 인해 금전욕이 많았다. 특히나 지안루지 드 갈라섹은 광적으로 돈에 욕심이 많아 진 마탑의 맨 꼭대기 층이 모두 금으로 도배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자는 패스! 돈도 없을뿐더러 이런 녀석에게 뒷돈을 쑤시기도 싫어! 다음은 대마녀 레나 드 펠트. 마녀 역사상 두 번째로 8서클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팔십 대의 고령임에도 여러 가지 약물 처리로 아직까지 삼십 대의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세간에는 아직 달거리를 하지 않은 어린 소녀들의 피를 통해 피부를 보존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 …패스. 왠지 피 빨아 날 죽일 것 같아.”
두 번째 인물도 넘긴 영완은 제발 마지막은 정상적인 인물이길 기대하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하이 엘프 퀸, 데보타 엘 클라리넨. 마법적이니 재능이 뛰어난 하이 엘프 퀸의 후계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마나 친화로 명성이 자자했다. 결국 20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이 엘프 퀸에 올랐고 237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8서클의 영역을 마스터했다. 현재 바렌트 왕국 카이젠 산맥의 지류인 클리든 산맥, 하이 엘프의 마을 엘레이든에 거주하고 있다……. 바로 이거야!”
모니터를 세심하게 읽던 영완은 환한 미소와 함께 손뼉을 마주쳤다.
“하이 엘프 퀸이라……. 분명히 몸매 착하고 얼굴 착한 건 물론이고 성격까지 착한 걸이겠지? 좋아! 당신으로 당첨! 조금만 기다리라고! 내가 곧 갈 테니까! 그 전에… 어차피 와이번 녀석이 혈강시로 변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잠부터 자둬야겠다. 하암, 이 나이에 날 새는 건 역시 무리야.”
영완은 그렇게 꿀맛 같은 단잠을 자고는 해가 저물 무렵,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났다.
벌컥벌컥.
“후아아, 물 시원하네.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배고프네. 자장이라도 시켜먹을까? 역시 쉬는 날엔 중국집이 최고지!”
영완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중국집 전화번호부를 뒤지던 중 별안간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응? 이 시간에 누구지? 전화 올 사람 없는데. 에? 이 번호는 또 누구야? 모르는 번혼데…….”
영완은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핸드폰 폴더를 열어젖혔다. 정말 간만에 핸드폰이 울린 것이 고마워 넙죽 받아버린 것이다.
“여보세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건만 영완의 목소리는 조금 전 잠에서 깬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기발랄했다.
(어라?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받네?)
“누구… 세요?”
영완은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낮게 물었다.
(뭐야! 내 목소리도 기억 못하는 거야?)
“글쎄요. 누군지 잘…….”
(…좀 실망이네. 내 목소리도 기억 못하다니. 나 미연이야, 미연이! 이제 좀 알겠어?)
“미연? 아, 미연 씨! 그런데 이 시간에는 웬일로……. 아니, 그보다 내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미연이라면 얼마 전 희영이 소개해준 그녀의 친구였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은 그때 그녀에게 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 탓이다.
(당연히 희영이에게 물어봤지. 아무튼 주말인데 뭐 해?)
“집에서 밥 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아, 정말? 그럼 아직 밥 안 먹은 거네? 나와라. 나도 밥 안 먹었으니까 같이 먹게.)
“…….”
미연의 당돌한 말에 영완은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답답한지 미연이 다시 말을 꺼냈다.
(왜 대답이 없어. 어서 나오라니까?)
“…네가 나오라면 내가 가야 되냐?”
(뭐라고?)
계속되는 미연의 재촉에 영완이 이내 말문을 열었다.
“언제 봤다고 날 오라 가라 하는 건데? 돈 많다고 뭐든 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그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너와 난 다르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전화하지 마라. 전화해도 수신 거부해놓을 테니까.”
탁.
영완은 자신의 할 말만 마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미연의 번호를 수신 거부 번호로 등록하고는 핸드폰을 탁자 위에 내팽개쳤다.
“진짜 재수 없는 년일세. 드라마에서만 보던 된장녀가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뭐, 이걸로 됐겠지.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연락하겠어?”
영완은 이내 미연에 대한 관심을 접고는 다시 『오벨리스크』에 접속했다. 영완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얼마나 악바리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앗.
[왔는가, 주인.]
“아, 그래. 별일 없었어?”
[근처에 하이퍼 트롤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기에 손 좀 봐준 것 말고는 그다지 별일은 없었다.]
“…….”
하이퍼 트롤이라면 카이젠 사이클롭스보다 훨씬 윗줄로 평가받는 대형 몬스터다. 일반 트롤을 몇 배나 뛰어넘는 엄청난 재생력과 오우거를 넘어서는 근력. 게다가 머리까지 좋아 A급 몬스터 중에서도 상위로 평가받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아무래도 인접해 있는 드래곤 산맥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모양이었다.
“역시 네 똥은 굵구나. 뭐, 아무튼 상관없지. 그나저나 이 녀석은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온다고 해놓고선 연락도 없고! 냉동 창고가 만들어져야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사냥하든지 할 거 아냐.”
띠링!
“응? 이 소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천휘는 귓말 알림음에 곧바로 확인했다.
[From. 로빈:어디냐?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입구에 도착했다.]
[To. 로빈:알았다. 금방 그쪽으로 가마. 마법사는 구해왔냐?]
[From. 로빈:당연하지. 얼른 오기나 해, 인마.]
[To. 로빈:오키!]
천휘는 로빈과의 귓말을 중단하고 오베른을 바라봤다.
“나 로빈 만나서 일 좀 보고 올 테니, 오베른 넌 여길 지키고 있어. 알았지? 하이퍼 트롤이 또 나타나면 손 좀 봐주고.”
[싫다. 이곳은 너무 지루하단 말이다.]
“어허! 나의 가장 충실한 머슴은 누구?”
[참격의 기사 오베른이다!]
“좋았어. 그럼 여길 지키고 있어라. 금방 다녀올게.”
[알았다! 난 주인의 머슴이니까!]
“큭큭.”
자신 스스로 머슴이라고 칭하는 오베른을 보며 천휘는 웃으면서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입구로 향했다.
“여어! 왔냐!”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왔지.”
“부탁한 마법사는?”
“여기 있잖아. 마법사 랭킹 20위의 얼음 공주, 눈송이야. 인사들 해.”
“안녕하세용, 얼음 공주 눈송이에용.”
“아하하, 전 천휘라고 합니다.”
로빈이 데려온 마법사라는 여자는 얼핏 봐도 고등학생, 아니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게다가 입고 있는 꼬라지도 어찌나 민망한지, 마치 자신이 공주인 양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왜?”
“잠깐 보자면 보는 거지, 뭔 말이 많아!”
천휘는 따라오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로빈을 데리고 눈송이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야! 미쳤냐? 저런 어린애를 데려오면 어떡해!”
“어린애라니! 저래 봬도 무려 16살이야! 어리긴 뭐가 어려! 그리고! 네가 얼음 마법에 능통한 마법사를 찾는다매! 눈송이는 얼음 마법에 관한 한 아르니안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최고의 얼음 마법사야. 오로지 얼음 마법만 익혀서 서클은 6서클에 머물고 있지만.”
“…너 설마.”
로빈의 설명에도 천휘의 눈은 여전히 경멸감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저토록 어린 여자 애와 놀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냥 아는 사이야. 게임 안에서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저번에 카멜이 데려오신 그 하린 누님과 다를 바가 뭐가 있냐고.”
“…말은 좋다. 정말 실력은 확실한 거겠지.”
“물론!”
“…쳇. 왜 내 주변에는 정상적인 놈이 하나도 없는 거야.”
스물여덟 평생을 함께해온 두 친구 중 한 명은 아줌마들을 사랑하는 소위 줌마 빠돌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어린 소녀들을 사랑하는 로리콤이라니.
지극히 정상적인 연애관을 가지고 있는 천휘로서는 두 사람 다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몇 년 동안 한 여자만 바라보고 있는 네가 더 이상하거든? 잔말 말고 얼른 해야 할 일이나 말해. 눈송이가 은근히 유명인이라 좀 바쁘거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로빈의 재촉에 천휘는 비아냥거리며 눈송이에게 다가갔다.
“이야기 끝나셨어용?”
“…네. 죄송한데, 혹시 얼음 마법으로 대략 반경 30미터 정도의 동굴을 얼려 주실 수 있겠어요? 그것도 지속적으로 냉동 상태가 유지될 수 있게요.”
비록 자신과 거의 띠동갑에 가까운 어린 소녀지만, 천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 데다 친구인 로빈과 아는 사이이기에 말을 높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라면 얼려드릴 수 있어용. 하지만 상태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요. 전 상태 동결 마법진을 배우지 못했거든용.”
“아, 그러세요.”
눈송이의 말에 천휘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저 동굴을 얼리는 것만으로는 시체들을 보존하는 데 있어 한시적인 방법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걱정 마라.”
“응?”
“상태 동결 마법진이라면 내가 알고 있거든. 이래 봬도 내가 현자 직업을 가진 놈 아니냐.”
“오, 정말? 이야, 네놈도 쓸 만한 구석이 있긴 하구나?”
로빈의 말에 천휘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를 칭찬해줬다.
“자식, 꼭 말을 해도! 내가 언제는 쓸 만하지 않았냐? 기다려 봐! 내가 언젠가는 아르니안 최강의 마법사가 될 테니!”
“로빈 오빠라면 충분히 그러실 거예용.”
“하하하! 그렇지? 눈송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넹!”
“…꼴값을 떨어라, 아주.”
두 사람의 기묘한 애정행각을 보다 못한 천휘가 낮게 말하고는 그들을 이끌고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왼편에 위치한 바위산으로 향했다.
“뭐야, 정말 여길 올라가야 한다고?”
“왜, 못하겠냐?”
줄을 잡고 등반하듯 바위산을 올라가야 한다는 천휘의 말에 로빈은 질색하며 말했다. 사실 그는 고소공포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천휘가 비열한 눈빛으로 그에게 비아냥댔다.
“로빈 오빠, 그냥 플라이 마법을 펼치세용. 플라이 마법으로 쉬엄쉬엄 올라가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용?”
“하- 하지만.”
눈송이의 말에 로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바위산을 올려다봤다. 그리 높진 않았지만, 깎아지른 절벽처럼 경사가 심하고 대략 300미터 높이까지 하늘 위로 솟구쳐 있는 탓에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은 까마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나 먼저 올라간다. 눈송이 양도 같이 올라가죠.”
“그래용. 로빈 오빠도 얼른 뒤따라 오세용.”
“아- 알았어.”
“큭큭.”
천휘는 쩔쩔매는 로빈을 보면서 사악한 웃음을 짓고는 이내 경공을 전개해 줄을 잡지도 않고 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눈송이 역시 천휘 못지않게 빠르게 플라이 마법을 전개해 바위산을 올랐다.
“…….”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로빈에게 있었다. 플라이 마법을 익혀 놓고도 거의 써보지 않았을 정도로 고소공포증이 심한 그였기에 이렇게 높은 곳을 오를 배짱도 없었다.
그러나 역시 모든 일에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로빈 오빵! 이게 뭐예용! 오빠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용?”
“당연히 아니지! 플라이!”
“…븅진.”
눈송이의 타박에 로빈은 곧바로 플라이 마법을 펼쳐 하늘 위로 솟구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소공포증으로 인해 무서워하던 녀석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은 미친 소와 냥이가 기다리고 있는 와이번의 동굴에 도착했다.
음메에에!
캬오오오!
“스톱! 네 녀석들, 나만 보면 달려드는 거 그만두지 못해! 네 녀석들의 덩치를 생각하란 말이야!”
음메…….
캬오…….
천휘의 핀잔에 그에게 달려들던 미친 소와 냥이는 풀 죽은 목소리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윽고 눈송이와 로빈이 동굴 입구로 올라섰다.
“와아, 이런 곳에 동굴이 있다니, 잘도 찾아내셨네용?”
“그러게. 이 정도 높이면 확실히 비밀 장소로 쓸 만하겠는데?”
“뭐, 내 실력이 이 정도지. 피차 바쁜 사람들 같으니까 일단 일부터 시작하자.”
“그러지, 뭐. 송이야, 내가 상태 동결 마법진을 먼저 그릴 테니까 준비해줘. 마법진과 절충되어야 하는 것 알지?”
“그럼용.”
두 사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천휘는 이내 미친 소와 냥이를 빙옥으로 집어넣고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동굴 안에서는 로빈이 로브를 휘날리며 ‘마법의 가루’라고 불리는 마법진 제작용 가루를 이용해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입구에 있던 미노타우로스와 샤벨 타이거는 천휘 님의 소환수들인가용?”
천휘가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대기하고 있던 눈송이가 넌지시 물어왔다.
“아, 그 비슷한 거죠.”
“흐음, 샤벨 타이거를 소환하실 정도라면 레벨이 꽤 높으신 것 같은뎅. 왜 전 처음 듣는 이름일까용? 제가 의외로 발이 넓은 편인데용.”
“하하, 글쎄요. 제가 주로 게임을 혼자 즐겨서 말이죠.”
“아, 그러신 건가용? 흐음, 아무튼 제가 이번에 한 번 도와드릴 테니, 나중에 천휘 님도 제 부탁 한 가지 들어주셔야 해용. 아셨죠?”
“당연합니다. 언제든 연락하세요.”
현실에서라면 겨우 학생뻘밖에 되지 않는 눈송이였지만, 천휘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 말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말을 놓는다고 해서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천휘는 왠지 모르게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확실하게 선을 긋고자 말을 높이고 있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오타쿠의 냄새가 나. 그것도 일본 애니 오타쿠. 보통 저런 유는…….’
천휘 자신도 어린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 수십 작품을 탐닉했지만,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도 그저 즐길 따름이었지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표현하는 것은 꿈에도 하지 않았었다.
왠지 모를 불쾌감.
애니메이션 속의 주인공들이 입으면 예쁘고 귀여운 옷들도 현실의 인간들이 입으면 불쾌하고 짜증스러움만 남는다.
그저 자신의 생각일 따름이지만, 천휘는 적어도 그런 부류의 인간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아, 다 끝났네. 두 사람 다 비켜 봐. 이제 마법진을 활성화할 테니까. 송이는 마법진 활성화 타임에 맞춰서 얼음 마법을 준비해주고.”
“네, 오빠앙!”
“…….”
눈송이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천휘는 말없이 그녀에게서 한 발짝 더 떨어졌다.
“하앗! 스테이트 리메인(State Remain)!”
화아악!
로빈이 마법진을 활성화시키자, 동굴 안에 퍼져 있던 마법의 가루들이 마나를 흘려내며 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프로스트 노바(Frost Nova)!”
마법진의 활성화 타이밍에 맞춰서 눈송이가 드디어 얼음 공주라는 별명에 맞는 광역 얼음 마법을 전개했다.
꽈지직!
“헉!”
“이 정도면 됐나용?”
과연 로빈이 자신 있게 데려왔을 만큼 눈송이의 얼음 마법은 위력적이었다. 순식간에 동굴 안이 얼음 동굴로 변해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나를 컨트롤해 자신과 로빈을 마법의 영향에서 벗어나게까지 했다. 한마디로 마나에 대한 이해와 컨트롤이 대단하다는 소리였다.
“충분하네요. 감사합니다.”
“호호, 괜찮아용.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용, 뭘. 로빈 오빠, 이제 우리 하던 거 마저 하러 가자.”
‘하던 거?’
얼핏 들으면 의미심장할 수도 있는 눈송이의 말에 천휘는 매섭게 로빈을 노려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래, 가자.”
하지만 로빈은 그런 천휘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굴 입구로 걸어 나갔다. 보란 듯이 눈송이와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저런 패 죽일 놈! 이런 범죄자! 이런 개자식!’
천휘는 멀어져 가는 로빈을 죽일 듯이 째려봤다. 폭사되는 천휘의 살기에 한 번쯤 뒤를 돌아볼 만도 하건만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간다!”
“우리 갈게용! 다음에 또 뵈용.”
“하하, 그러세요.”
동굴 입구에 다다른 두 사람은 곧바로 장거리 이동 마법 스크롤을 찢고는 사라졌다.
천휘는 로빈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옆에 눈송이가 있었던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띠링!
“응? 누구지?”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천휘에게 귓말이 왔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천휘는 궁금함에 그 귓말을 확인했다.
[From 로빈:걱정 마라, 인마. 그냥 함께 사냥하는 거다. 송이가 퀘스트 도와달라고 했거든. 아무튼 다음에 또 보자. 주말에 정호 녀석이랑 너희 집 찾아갈게.]
“큭, 자식.”
로빈의 변명에 천휘는 미소를 짓고는 빠르게 바위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를 잡을 때다.
…그 전에 와이번 혈강시부터 완성시키고.
[주인.]
“오, 그래. 잘 지키고 있었냐?”
[보면 모르겠는가?]
“흐음.”
호수 주변에는 하이퍼 트롤의 일부분이었을 육편들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호수 근처로 엄청난 개체의 하이퍼 트롤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하이퍼 트롤들이라면, 제아무리 녀석이라도 무리가 있었을 텐데. 점점 성장하는 건가?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강시가 성장이라니! 녀석이 제아무리 천마강시라도 불가능하다!’
천휘는 혼자서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등, 오베른이 보기에는 다소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그의 주변을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주인, 설마 똥이 마려운 건가?]
“윽, 아니니까 주변 방비나 잘해. 물 빛깔을 보니까 얼추 강시화가 끝나가는 것 같으니까.”
[똥이 마렵지 않은 것이었나? 난 또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기에 그런 줄 알았다.]
“…빌어먹을.”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와이번의 강시화가 이뤄지고 있는 호수를 바라봤다.
호수는 핏빛으로 물들다 못해 사이한 기운마저 뿜어지는 듯했다. 게다가 마치 호수 주변을 감싸듯 핏빛의 안개들이 짙게 깔려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들 정도였다.
“흐음, 거의 끝나가네. 좋아. 이제 시작해볼까?”
흉성이 강한 혈강시의 강시화를 위한 마지막 단계는 바로 고루마공상의 내기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호수가 워낙 거대한 탓에 엄청난 양의 내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앗!”
천휘의 손끝에서 대량의 내기, 즉 마나가 호수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핏빛의 호수는 이내 검붉은색으로 변화되더니, 급기야 호수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휘는 여전히 호수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물이 끓고는 있으되, 와이번의 피부 조직 하나하나에 마나가 스며들지 않은 탓이었다.
‘빌어먹을, 마나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어.’
마나를 주입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마나를 체크한 천휘는 급속도로 떨어지는 마나의 수치에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와이번의 시체는 말 그대로 마나를 잡아먹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천휘가 마나를 주입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주변에 다시금 하이퍼 트롤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나를 주입하는 데에 집중하는 천휘는 알 수 없었지만, 물경 50여 마리에 이르는 대규모 무리였다. 아무래도 이전에 오베른에게 당한 동료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온 듯했다.
[…….]
하이퍼 트롤들의 흉흉한 모습에도 오베른은 전혀 기죽지 않고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어깨 위에 걸치며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주인이 충직한 머슴인 자신에게 명령했다. 주변 방비를 잘하라고. 오베른은 지금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와이번의 피부 조직 요소요소에 자신의 마나가 깃든 것을 확인한 천휘는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주의가 분산되자, 그제야 주변에서 치열한 금속음이 들리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헉! 언제 이렇게!”
천휘는 바로 코앞에서 오베른과 수십의 하이퍼 트롤들이 엄청난 난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드디어 목격했다. 오베른이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녀석들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지만, 워낙 숫자가 많은 탓에 매우 힘겨워하고 있었다.
[주인!]
“오베른!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녀석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막고는 있지만, 결국 이곳까지 밀리고 말았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아마도 오베른은 수십의 하이퍼 트롤들을 베어냈겠지만, 중과부적이었을 터였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녀석이 깨어난다! 그때까지만 버텨! 네가 최고의 머슴임을 증명해 보일 때다!”
[우오오오! 그렇다! 난 최고의 머슴이다! 드래곤 스크류!]
천휘의 칭찬 아닌 칭찬에 오베른이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닌 최강의 기술 중 하나인 드래곤 스크류를 전개하며 하이퍼 트롤들을 대거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서둘러야 해!’
단순한 오베른을 속여 어느 정도 시간을 벌긴 했지만, 여전히 위험 부담은 컸다. 한마디로 빨리 와이번을 혈강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 소와 냥이도 꺼내 오베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만, 상대가 그들과 엇비슷한 실력을 지닌 하이퍼 트롤이기에 오히려 오베른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하앗!”
천휘는 다시 고루마공은 운용해 마나를 호수 안으로 흘려보냈다. 천휘가 분출한 마나는 곧장 와이번의 머리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와이번의 머릿속으로 엄청난 양의 마나가 주입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마나의 해일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엄청난 마나였다.
콰앙! 콰앙!
천휘의 바로 옆에서 땅이 움푹 파이며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천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나를 주입했다.
쿠워어엉!
오베른의 시야에서 벗어난 하이퍼 트롤 한 마리가 급기야 천휘를 향해 거대한 아이언 크럽을 내리쳤다. 엄청난 괴력에서 뿜어지는 공격은 대번에 천휘의 머리를 날려 버릴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콰앙!
[주인!]
천휘가 있던 자리에서 엄청난 먼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충격음은 있었을지언정 파육음은 없었다. 한마디로 천휘는 몸을 빼냈다는 소리였다.
“오베른! 뒤로 물러나!”
[알겠다! 하앗! 드래곤 크레이터!]
꽈아아앙!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음이 터져 나오며 오베른을 감싸던 하이퍼 트롤들이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 틈을 타 오베른은 천휘의 곁으로 몸을 날렸다.
[드디어 끝난 것인가?]
“물론! 나와라, 파뱃!”
[파뱃?]
“레드 와이번 혈강시 파뱃! 불을 뿜는 모습을 보고 내가 지은 이름이다! 파뱃! 녀석들을 쓸어버려!”
끼에에엑!
레드 와이번 혈강시 파뱃이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하늘 위로 솟구쳤다. 거대한 녀석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니, 20미터에 육박했던 체구가 물경 배 이상 커 보였다.
[호오, 대단한 위용인걸?]
“파뱃! 불을 뿜어서 녀석들을 쓸어버려!”
끼에엑!
천휘의 명령에 하늘 위를 선회하던 파뱃이 아래로 낙하하며 가공할 위력의 파이어 브레스를 뿜어냈다. 레드 드래곤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위력이지만, 하이퍼 트롤들을 쓸어버리기에는 차고 넘치는 위력이었다.
화아아악!
쿠어어엉!
쿠어어엉!
파뱃의 파이어 브레스에 직격당한 하이퍼 트롤은 물론이고, 여파에 휩쓸린 녀석들마저도 재로 변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천하의 오베른마저도 파이어 브레스의 여파에 휩쓸렸을 뿐인데, 팔에 마비 증상이 올 정도였으니 그 정도 위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베른! 이제 남은 녀석들을 쓸어버린다!”
[바라던 바다!]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대신해 하이퍼 트롤들을 철골강시로 만들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천휘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상대적으로 하이퍼 트롤보다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피부가 더욱 단단하기 때문이었다.
천휘가 철골강시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 어떠한 것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
자신을 보호해줄 최강의 방벽.
철골강시들의 효용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국 머뭇거림이 없어진 천휘의 주먹은 하이퍼 트롤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해나갔다.
“자,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임무를 주마. 먼저 오베른!”
[말만 해라.]
“정확히 하루에 세 마리씩 카이젠 사이클롭스를 사냥해 와라. 단! 파뱃을 사냥할 때와 마찬가지로 생채기 하나 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엄청난 개체가 모여 있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상대로 생채기 하나 없이 사냥하라는 것은, 오베른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그리고 파뱃!”
끼에에엑!
천휘의 부름에 파뱃이 엄청난 고음으로 울부짖었다.
“크윽. 아, 귀 아파! 파뱃! 너 앞으로 그딴 식으로 울면 죽을 줄 알아! 짹짹이라고 울어! 알았어?”
끼에에엑!
콰앙!
“짹짹이라고 울란 말이야!”
짹짹.
천휘가 파뱃을 교육하기 위해 녀석의 대가리를 후려치자, 그제야 파뱃이 참새처럼 짹짹이라고 울음소리를 냈다.
“좋아, 좋아. 앞으로 무조건 그렇게 울어!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울면 폐기처분시켜 버리겠어!”
끼… 짹짹.
“좋았어. 그럼 파뱃 너는 오베른이 사냥한 카이젠 사이클롭스를 잡아다가 이곳으로 가져와.”
천휘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파뱃이 긴 목을 휘저었다. 녀석의 목과 얼굴은 흡사 뱀과 같아서 목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자, 빨리빨리 움직여! 오늘부터 한 달간! 백 기에 이르는 철골강시 군단을 제작할 거다!”
음메에에!
캬오오오!
끼… 짹짹!
[알았다, 주인.]
다음 날부터 천휘는 『오벨리스크』에 접속하면 곧바로 철골강시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수능이 끝나고 한창 한가할 때인지라 하루 몇 시간의 수업만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철골강시를 만드는 데 주력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철골강시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녀석들을 담을 시약을 화합하는 것도 시간이 걸릴뿐더러, 녀석들의 시체에 시약이 스며드는 시간도 꽤나 오래 걸리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문제는 천휘가 극도의 지루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벨리스크』를 즐기기 위해 해야 하는데 최근에는 그런 즐거움이 많이 희석되고 있었다.
콰앙!
“으아악! 이곳 시간으로 무려 이 주일 동안 겨우 열다섯 기 만들다니!”
천휘는 시약을 화합하다 말고 땅을 발로 차며 분노했다. 급기야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시체를 내팽개치고 동굴의 밖으로 나섰다.
“파뱃!”
천휘가 아래를 향해 파뱃을 부르자, 이윽고 파뱃이 공중으로 떠올라 동굴 입구로 다가왔다.
탁.
파뱃이 가까이 다다르자, 천휘는 곧바로 녀석의 등 위로 올라탔다.
“당장 헤론 습지로 간다.”
끼에에엑?
콰앙!
“그렇게 울지 말라고 했지! 젠장!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헤론 습지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남서쪽으로 날아가! 어서!”
끼… 짹짹!
천휘는 스트레스도 해소할 겸 파뱃을 타고 헤론 습지로 날아갔다. 냥이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감에 천휘는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이야호!”
마치 무서운 놀이기구를 탄 어린아이처럼 천휘는 즐거워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하늘을 난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희열감을 느낀다. 그들은 번지점프를 하거나, 스카이다이빙이나 행글라이더 등을 즐기며 하늘을 나는 희열을 만끽한다.
천휘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행글라이더 동아리에 들었을 정도로,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쾌감을 느꼈었다.
그것이 무려 5년 전.
천휘는 5년 만에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쾌감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파뱃! 스팀팩!”
끼에에엑?
“빨리 날라고, 인마! 으하하하!”
천휘의 명령에 파뱃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어찌나 빨리 나는지 천휘의 얼굴이 바람에 짓뭉개질 정도였다.
“앗! 저기 헤론 습지다! 파뱃, 스톱!”
끼이이익.
천휘의 갑작스런 지시에 파뱃이 광속으로 날다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천휘는 그 반동으로 중심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야 했다.
“으하하하!”
위급한 상황임에도 천휘는 그저 즐거운 듯 광소를 터트렸다. 그리고는 이내 땅바닥에 몸이 부딪치려 하자, 파뱃이 날아와 천휘의 몸을 낚아챘다.
“좋았어! 이제 날뛰어보실까?”
천휘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헤론 리자드맨들을 상대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었다. 아직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은 혼자 상대하기에 다소 벅찬 녀석들이었기에 굳이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었다.
“하앗! 대지의 울음! 연타!”
사실 레벨이 200대 초반에 불과한 헤론 리자드맨들은 천휘에게 그다지 경험치를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녀석들은 피부가 단단해 천휘에게는 최고의 타격감을 주는 몬스터들. 사냥이 목적이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인 천휘였기에 경험치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헤론 습지를 종횡무진 누비며 녀석들을 상대로 스트레스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천휘는 철골강시 제작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사냥을 번갈아 하며,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시체들로 만들어진 철골강시 군단을 차츰차츰 완성해나갔다.
* * *
“어라? 눈이 오네? 올해는 좀 늦은 건가?”
수능이 끝나고 12월에 접어들 무렵, 이른 아침 출근길에 그 해 첫눈이 내렸다.
“눈이라…….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네. 올해도 여전히 혼자 지내야 하나?”
남들은 첫눈이 오면 연인을 만난다고 바쁘지만, 벌써 몇 년째 솔로 생활을 하고 있는 영완에게는 그저 귀찮은 존재일 따름이었다. 게다가 괜히 눈이 내리면 마음만 싱숭생숭해져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낼 정도였다.
드르륵.
그렇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교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동료 교사들이 한데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낯선 광경에 영완은 천천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소란이에요?”
“아, 서 선생 왔어? 오늘 아침에 이사장님이 오셨는데, 올해 우리 학교 수능 성적이 최근 몇 년간 가장 좋았다고 연말에 일본으로 온천 여행을 보내주겠다지 뭐야.”
“온천 여행이오?”
김국헌 선생의 말에 영완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왜 그래, 서 선생? 온천 싫어?”
“아뇨. 온천 좋아해요.”
“흐음, 그래? 아무튼 잘됐지 뭐야.”
“네, 그러네요.”
사실 영완은 온천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은 다 좋아하는 사우나도 웬만하면 잘 가지 않을 정도였다.
‘쓸데없는 일을 해가지고.’
영완이 시영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아버지인 이사장도 경멸했다. 그 역시 시영과 마찬가지로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연말이 쓸쓸하지는 않겠네.’
언제나 그렇듯 연말은 외로운 사람들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 기간이었다. 커플들은 함께 여행도 가고 데이트도 즐기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홀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혼자서 술이라도 마실라치면 괜히 더 외로워지는 것이 바로 연말이다.
‘뭐, 아직 멀었으니까.’
* * *
“자,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 세 기만 더 추가하면 드디어 백 기의 철골강시 군단 완성이다!”
음메에에!
캬오오오!
끼… 짹짹!
[후딱 해치우고 시체를 가져오지.]
“알았어. 난 준비할게.”
오베른과 파뱃이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로 내려가자, 천휘는 철제 수조들에 시약을 배합하기 시작했다. 순서나 양에 조금의 오차라도 있으면 강시 제작이 실패하는 탓에 천휘는 시약 배합하는 내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끼에에엑!
“…저 자식 아직도 못 고쳤네? 진짜 날 잡아서 푸닥거리라도 좀 해야 되려나.”
천휘가 시약 배합을 딱 마친 타이밍에 멀리서 파뱃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녀석은 울음소리를 못 고쳐 천휘가 없는 곳에서는 저렇듯 고음으로 울어대고 있었다.
[주인! 마지막 시체들이다.]
“수고했다.”
천휘는 오베른으로부터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시체들을 받아들고 철제 수조에 한 구씩 집어넣었다.
“자, 끝! 이제 하루 정도만 기다리면 모두 완성이다! 그럼 이제 저 녀석들을 확 쓸어버릴까? 어때, 오베른!”
[찬성이다! 그동안 녀석들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난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어련하시겠어요. 좋아! 모두 입구로 모여! 쪼잔하게 쫄다구부터 해치우는 건 사절이다. 처음부터 로드를 노린다!”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카이젠 사이클롭스 로드. 보통의 녀석들보다 1.5배는 더 거대한 체구에, 머리 색깔도 여느 놈들과 달리 붉은색이라 확 띄는 녀석이었다.
[역시 주인! 주인 똥도 굵다!]
“…따라 하지 말라고.”
한껏 투지로 불타오르던 천휘는 오베른의 김빠지는 소리에 투지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우리가 첫 번째로 노리는 건 로드 녀석이다.”
[저 녀석들은 어쩔 건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어. 녀석들은 나중을 위한 대비책에 불과해. 우리끼리 해결한다. 파뱃! 얼른 우리를 태워!”
끼… 짹짹.
고음으로 울부짖으려던 파뱃은 슬그머니 올라가는 천휘의 주먹에 곧바로 참새 울음을 내질렀다.
“이야호!”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파뱃의 위에서 하늘을 나는 기분은 너무나 즐거웠다. 오베른이나 미친 소, 그리고 냥이 역시 마찬가지인 듯 기분 좋은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이윽고 파뱃이 허공을 선회하다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빠르기.
녀석의 목표는 다름 아닌 카이젠 사이클롭스 로드, 속칭 붉은 머리였다.
“파뱃! 브레스!”
끼… 짹짹!
그 와중에도 천휘의 눈치를 보며 급히 울음소리를 변경한 파뱃은 곧바로 붉은 머리를 향해 파이어 브레스를 내뿜었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번져 나가는 화염의 폭풍.
8서클 화염 마법인 헬파이어에 맞먹는다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와는 달리, 파뱃의 브레스는 6서클인 파이어 블래스트(Fire Blast)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가자, 애들아!”
파뱃의 파이어 브레스가 일대를 휩쓸고 지나가자, 뒤이어 천휘를 비롯한 강시들이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그와 동시에 오베른은 그동안 힘겹게 사냥해왔던 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녀석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음메에에!
미친 소 역시 철골강시 특유의 강인함과 웅대한 근력으로 거대한 배틀액스를 들고 화염에 휩싸인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내리찍었고, 냥이는 종횡무진 일대를 누비며 강력한 이빨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의 머리통을 빠개고 있었다.
“붉은 머리!”
쿠오오오!
강시들이 저마다 활약을 하고 있는 사이, 천휘는 화염에 휩싸인 채로 흉성을 토해내는 붉은 머리, 카이젠 사이클롭스 로드를 노렸다.
“네 녀석을 마지막으로 이곳에서의 시간도 끝이다! 곱게 내 손에 죽어! 하앗! 악마의 숨결! 연타!”
붉은 머리를 철골강시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녀석과 같은 보스급 몬스터는 시체가 남지 않는다. 녀석들은 오로지 세상에 단 하나의 개체만 존재하는 유니크 몬스터. 죽임을 당한다 해도 언제고 다시 부활하는 녀석들이었다.
쿠오오오!
천휘의 공격에 맞춰 붉은 머리도 천휘를 향해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일반적으로 사이클롭스들은 아무런 무기도 없이 그저 타고난 근력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데, 붉은 머리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보스급 몬스터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맹렬하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휙휙.
천휘의 머리를 그야말로 한 끝 차이로 스치며 붉은 머리 녀석의 몽둥이가 그에게 따라붙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체구답게 민첩성은 그리 높지 않은지 몽둥이를 휘두르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 천휘는 쉽게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이 정도는 돼야지!”
콰앙!
크아아아!
붉은 머리의 몽둥이를 피해내며 녀석에게 접근한 천휘는 녀석의 복부에 악마의 숨결을 전개한 주먹을 먹여줬다. 무려 공격력 300퍼센트 상승의 효과를 지닌 악마의 주먹.
붉은 머리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천휘에게 이전보다 더욱 맹렬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윽! 녀석, 분노하면 강해지는 타입인가!”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의 붉은 머리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꽤나 위협적이었다. 쉽사리 피해내기 힘든 탓에 천휘는 결국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 이 머슴이 해치워줄까?]
“닥쳐!”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는 붉은 머리를 노려봤다. 전신이 화염에 그슬렸음에도 녀석은 여전히 위력적으로 천휘를 압박하고 있었다.
‘녀석의 단단한 피부를 뚫으려면 역시나 이중극점밖에 없다. 아니, 이중극점으로도 녀석을 한 번에 처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공격을 성공시켜도 그다음에 허점을 노출시켜 녀석에게 당하고 만다. 이제는 이중극점과 악마의 숨결을 조합해야 할 때다!’
그동안은 이중극점이나 악마의 숨결 모두 초급 1단계에 머물렀던 탓에 쉽사리 두 스킬을 조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파뱃을 사냥했을 때 극악의 속도로 올라가던 숙련도가 초급 2단계로 올라섰고, 그동안 꾸준히 헤론 습지에서 헤론 리자드맨들을 사냥했던 덕에 악마의 숨결도 초급 3단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한 방이다! 한 방에 모든 것을 건다!’
‘남자는 한 방이다’라는 말을 보여 줄 때가 왔다. 한 방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내가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 남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성장하는 법이다.
…비록 게임일지라도.
‘반드시 성공시킨다! 먼저 악마의 숨결!’
천휘는 붉은 머리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주먹에 악마의 숨결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드는 주먹. 그야말로 악마가 뿜어내는 숨결처럼 주먹에서는 엄청난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쿠오오오!
그에 동조하듯 붉은 머리 녀석이 거칠게 괴성을 내지르고는 천휘를 향해 돌진했다. 역시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공격. 천휘는 악마의 숨결을 그대로 유지시킨 채로, 좌우로 몸을 흔들며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다.
‘집중하자, 집중!’
『오벨리스크』에서 스킬이나 무공을 전개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집중력이다. 어차피 주어진 경로에 따라 움직이는 스킬이다 보니, 어떻게 움직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만큼 집중해서 원하는 부분에, 원하는 시점에 타격을 입히느냐가 중요했다.
천휘는 마치 바람에 살랑거리는 갈댓잎처럼 녀석의 맹렬한 공격을 흔들흔들 피해내고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처럼 붉은 머리 녀석의 옆구리를 노려봤다.
녀석의 몽둥이가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바로 그 타이밍에 천휘의 눈이 빛을 뿜어내며 그의 신형이 녀석의 품 안으로 사라졌다.
“이중극점!”
콰앙!
[띠링!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띠링! 특수 스탯 ‘집중’이 생성되었습니다.]
[띠링! 조합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조합 스킬은 총 3가지를 생성할 수 있으며, 이름을 유저 임의대로 작성할 수 있습니다. 조합 스킬을 생성하시겠습니까.]
“물론!”
[띠링!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큭큭큭, 이름은 정해져 있지. 악마의 주먹!”
[띠링! 조합 스킬 이름이 ‘악마의 주먹’으로 정해졌습니다.]
[악마의 주먹]
마계에 존재하는 악마의 숨결이 깃든 극한의 공격.
그 주먹을 맞은 이는 죽음을 경험할 것이고, 그 주먹을 바라본 이는 혼을 빼앗길 것이다.
숙련도:초급 1단계(0.06%)
제한:마나 100,000 이상
기타:마나 소모 100,000
기타:(물리 공격력+마법 공격력)×500% 데미지
기타:반경 5미터 이내에 30%의 스플래쉬 데미지
“와- 완벽해. 이건 유니크 스킬 정도가 아니라 레젠드 스킬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어!”
마나 소모가 10만이라는 것은 확실히 부담 가는 부분이었지만,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의 합에 500퍼센트의 데미지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천휘는 주직업이 강시술사인 만큼 마법 공격력도 물리 공격력 못지않게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주먹’은 이중극점과 비교해 봐도 무려 배 이상, 아니 대략 5배 정도의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스킬인 것이다.
“응? 이건! 오오! 간만에 득템인가!”
게다가 천휘는 녀석이 죽은 자리에서 하나의 갑옷과 엄청난 금액의 골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오, 대략 5만 골드 정도 되네. 그리고 이 갑옷은?”
[외눈박이 괴물의 가죽 갑옷]
카이젠 사이클롭스 로드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죽 갑옷. 화염에 대한 내성이 대단하고 둔기류 무기에 대한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한다.
등급:레어 내구력:10,000/10,000
분류:갑옷
제한:근력 1,000 이상
옵션:방어력 +200
기타:최대 생명력 +1000
기타:화염 마법 저항력 30% 상승
기타:둔기류 무기에 대한 방어력 50% 상승
기타:5% 확률로, 5서클 이하 마법 면역 발동
“괜찮은데? 근데 제한이 좀 걸리네. 근력 1,000이라니. 가죽 갑옷은 보통 궁수들이나 어쌔신들이 입는데 민첩성에 투자하는 그들이 근력 1,000을 넘을 리가 없잖아? 흐음, 응?”
제한 조건이 나빠 팔아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 순간 천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에게 둘러싸여 힘도 제대로 못 쓰고 있는 미친 소였다.
“미친 소, 장착!”
강시들은 본래 무기나 방어구를 착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해 액세서리류는 장착이 불가능했다.
음메에에!
외눈박이 괴물의 가죽 갑옷을 장착한 미친 소는 이내 자신을 압박하던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밀쳐내고 맹렬히 배틀액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최강 맷집의 등장!
미친 소는 점점 최강의 탱커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