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와이번 혈강시
축제가 끝났다.
천휘는 축제 기간 3일 내내 미온에게 끌려 다니고 나서야 그녀에게서 풀려날 수가 있었다. 물론 그녀와 조금은 강압적으로 친구 등록을 하고서 말이다.
“휴우, 드디어 내일이 수능인가?”
대한민국 고3 수험생들에게 있어 인생의 전환점인 수학능력시험이 바로 코앞이다. 내일 하루를 위해 무려 10년이 넘는 기탄의 세월을 기다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으로 진학을 하건 하지 않건.
내일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날임에 틀림없다.
“내일 하루 쉬니까 간만에 제대로 『오벨리스크』 좀 해보실까?”
…하지만 그것은 고3 수험생들에게 국한된 일.
이미 수능을 치르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겐 매년 치러지는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다. 특히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그날은 푹 쉴 수 있는 휴일 중 하루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파아앗.
“휴우, 어째 접속하자마자 온몸이 결리는 것 같지?”
『오벨리스크』에 접속한 천휘는 몸을 짓누르는 피곤함에 곧바로 침대에 누워야 했다.
“미온 님, 좀 짱인 듯.”
저택에서 휴식을 취한 후, 피로도를 충만하게 만든 천휘는 집사 그레엄으로부터 무려 닷새 치 식량을 받아 곧바로 잡화 상점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돌입할 강시 제작을 위해 사전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어서 오세요.”
“횃불 열 개, 그리고 튼튼한 망치와 정.”
“다 합쳐서 50골드 되겠습니다.”
천휘와 같은 손님이 많은지 잡화 상점의 어린 소녀가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그에게 물건을 건넸다. 천휘 역시 별다른 말없이 100골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고는 곧바로 잡화 상점을 나왔다.
“다음은 마탑인가. 젠장, 또 그 여자를 만나야 하나? 설마 그 노인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이래저래 마탑을 자주 들락날락거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 천휘로서는 세레나와의 좋지 않은 감정이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녀와 묵은 감정을 풀려고 해도 그녀의 얼굴만 보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끼이익.
“어서 오십… 2층으로 가세요, 천휘 님.”
이제는 단골 고객이 되어버린 듯 1층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여인이 곧바로 천휘를 2층으로 안내했다.
“사용료 안 받는 건가?”
“지부장님께서 천휘 님께는 이동 마법진 사용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놈의 영감탱이. 이런 걸로 날 꼬실 작정인가 본데. 어림없지.’
여인의 말에 천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곧바로 이동 마법진에 올라섰다.
파앗.
“어서 오십… 또 오셨어요?”
“어라? 손님 대하는 태도 보게? 이거 지부장님께 탄원서라도 올리든가 해야지, 안 되겠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됐으니까 비켜 줘.”
세레나를 무시한 채 바구니를 들고 상점 안으로 들어간 천휘는 속으로 킥킥대며 시약들을 바구니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으드득.
뒤에서 들려오는 이 가는 소리에 소름이 돋을 법도 하건만 천휘는 유유자적 자신에게 필요한 시약들을 차곡차곡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쾅.
“총 얼마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뭐야. 이것도 재깍재깍 계산 못하는 거야? 그러면서 어떻게 마법사는 되었데. 이해를 못하겠네.”
천휘의 능글맞은 말에 세레나는 시약의 가격을 계산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를 표독스러운 눈으로 노려봤다.
“잠. 깐. 만. 기. 다. 리. 시. 라. 구. 요. 손. 님.”
“…네.”
세레나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천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가 계산을 마치길 기다렸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치솟은 걸로 봐서 조금만 더 그녀를 건드렸다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총! 12만 5천 골드네요, 손님!”
“…….”
잔뜩 뿔이 난 세레나의 말에 천휘는 말없이 돈을 건네고는 곧바로 이동 마법진으로 향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안. 녕. 히. 가. 십. 시. 오. 손. 님!”
“…….”
뒤에서 들려오는 세레나의 인사에 천휘는 등에 소름이 팍 돋는 것을 느꼈다.
천휘는 미리 생각해뒀던 준비를 다 마치고는 곧바로 제황의 계곡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제황의 계곡으로 들어서는, 카이젠 산맥의 지류에 있는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라는 필드로 향하는 것이었다.
가장 만들기 쉬우면서도, 전력에 큰 보탬이 되는 철골강시를 만들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철골강시를 만들기 위한 시체로, 그곳에 무리지어 서식하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냥이야, 멈춰!”
캬오오.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외곽 지역에 도착한 천휘는 곧바로 냥이를 멈춰 세웠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은 후각이나 청각이 극도로 발달해 더 이상 접근하면 곧바로 녀석들에게 표적이 될 수 있는 탓이었다.
“미친 소, 오베른, 나와!”
파앗, 스파앗.
음메!
[요새 뜸하더니, 내가 보고 싶어졌나? 음핫핫핫!]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어차피 미친 소와 냥이에게는 내가 따로 명령을 내리겠지만, 녀석들은 정교한 명령을 알아들을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아. 때문에 오베른 네가 따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이 몸이 위대하다는 것은 세상 만물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지시만 내려라. 내 주인이 바라는 모든 것을 그대로 이뤄주지.]
여전히 광오하기 짝이 없는 오베른을 보며 천휘는 흡족한 듯 웃었다. 비록 그가 자기 자랑하는 꼬락서니는 보기 역겹지만, 그만큼 그의 실력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을 찾아보자.”
[거점?]
“그래. 아무래도 빙옥을 통해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운반하는 것엔 한계가 있고 그렇게 되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철골강시들을 원하는 물량만큼 제작하는 동안 이 근처에서 거점을 마련해 움직일 거야.”
빙옥이 무려 3톤에 달하는 시체들을 보관할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상대는 무려 3미터 이상의 키를 자랑하는 카이젠 사이클롭스였다. 대략 추정해보건대 녀석들의 무게는 최소한 1톤 이상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빙옥으로 운반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주인이 작업을 할 거대한 공간이 필요하겠군. 하지만 우리가 수많은 시체들을 가져온다 해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어떤 문제?”
[일단 주인의 작업 속도가 우리의 사냥 속도를 못 따라올 테고, 그렇게 되면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의 시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패하게 되겠지. 그래도 상관없는 건가?]
예리하게 문제점을 지적한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문제가 생기네. 흐음,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 있다, 주인.]
“무슨 방법?”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빙옥과 같은 영하의 온도를 간직한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테오른 왕국은 아르니안 대륙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따뜻한 남방 국가. 이곳에서 소위 말하는 냉동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법사로 하여금 일정 공간에 얼음 마법을 펼치라고 하면 된다. 그것도 마법진을 이용해 지속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호오! 그거 좋은 방법인데?”
확실히 오베른이 내뱉은 방법, 그 이상의 방법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어디에서 그만한 마법사를 구하지?”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거대한 체구를 볼 때, 그들의 시체를 보관할 냉동고는 엄청난 크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일반적인 마법사로는 불가능하고, 최소한 얼음 마법만 집중적으로 익힌 6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막 아르니안 대륙으로 넘어온 천휘가 그런 고위 마법사를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래도 카멜 녀석에게 부탁해야 하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카멜이었다. 최소 30대 이상의 줌마부대로 이루어진 인맥들. 천휘는 그 인맥을 이용하기 위해 카멜에게 귓말을 보냈다.
[To. 카멜:뭐 하냐?]
귓말을 보내고 한참이 지나도록 카멜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이 바빠 『오벨리스크』에 접속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젠장. 그럼 누구에게 알아보지? 로빈 녀석에게 물어봐야 하나.”
자신이 친구 등록을 한 이는 기껏해야 3명.
그중 카멜은 접속을 하지 않은 상태고, 또 다른 한 명은 다름 아닌 미온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만큼은 귓말을 먼저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천휘는 이내 로빈에게 귓말을 전했다.
[To. 로빈:접속해 있냐?]
띠링!
[From. 로빈:어. 있다. 왜?]
“오! 자식! 역시 있었어.”
천휘는 곧바로 로빈에게 지금 자신의 사정을 대강 설명했다. 그러자 예상외로 로빈이 선뜻 말했다.
[From. 로빈:알았다. 그럼 내가 아는 얼음 계열 마법사 한 명 데리고 그쪽으로 가마. 좀 먼 곳에 있으니, 아마 이틀 정도 걸릴 거다.]
아무래도 로빈이 마법사 계열의 직업을 가진 덕에 알고 지내는 마법사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럼 일단 로빈 녀석이 올 때까지 거점이 될 공간을 마련해볼까?”
[산속이니, 아무래도 동굴이 낫지 않겠나? 근처에 서식하는 거대한 동물이나, 거대한 몬스터의 거처가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네 말이 맞아. 잠깐 기다려 봐.”
이 거대한 산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탐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천휘는 장생본초집성을 꺼내들었다.
“디텍트!”
천휘는 곧바로 장생본초집성에 내재된 마법인 디텍트를 전개했다. 그러자 눈앞에 희미한 산맥의 지도가 펼쳐지더니, 붉은 점들이 알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이 붉은 점들이 몬스터들인가?’
붉은 점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짐작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중간 크기의 붉은 점들은 카이젠 사이클롭스고, 이 작은 점들은 그 밖에 중소형 몬스터들인가 본데?’
천휘가 현재 자리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외곽 지역. 당연히 근방에서 가장 많은 개체를 형성하고 있는 몬스터들은 카이젠 사이클롭스일 터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녀석들보다는 더 커다란 몬스터를 찾아야 할 텐데…….’
이 근방은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이 서식하고 있어 소형 몬스터들은 거의 서식하고 있지 않았다. 녀석들의 먹이가 될 것을 두려한 탓이다.
게다가 대형 몬스터들도 마찬가지다. 녀석들을 먹이로 할 만큼 초대형 몬스터들은 거의 없을뿐더러, 카이젠 사이클롭스 수백 마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의 초대형 몬스터는 대부분이 드래곤 산맥에 서식하고 있었다.
“제길, 이 근처에는 없나 보네. 움직여 봐야겠다. 오베른, 미친 소! 따라와!”
근방에는 없으니 자리를 옮겨서 초대형 몬스터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천휘는 냥이의 등에 올라타 북쪽으로 향하면서 계속해서 디텍트를 활성화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초대형 몬스터의 자취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허탕 친 것 같은데?
[그럴 거다. 카이젠 사이클롭스를 먹이로 삼을 만큼 초대형 몬스터라면, 마법적인 능력도 지니고 있어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림없이 숨기고 있을 테니까.]
“빌어먹을,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건데!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하라고!”
[주인이 묻지 않았으니, 말하지 않은 것뿐이다.]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는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데?”
[사이클롭스를 주식으로 삼는 몬스터를 먼저 찾는 게 순서가 아닐까?]
“흐음, 확실히 그걸 안다면 녀석의 특성을 파악해 보금자리를 찾는 게 가능하겠지. 오베른, 너 혹시 그런 몬스터를 알고 있냐?”
[알고 있다.]
“…….”
한마디로 처음부터 천휘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말이었다. 애초부터 이 근방에 어떤 몬스터가 있고, 어떤 곳에 위치하고 있을지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조언을 하지 않은 오베른을 보며 천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앞서 말했지만, 주인이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잘 들어. 앞으로는 네가 기억하고 있는 지식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당장 내게 말해줘. 알겠지?”
[주인이 그렇게 원한다면.]
빠지직!
오베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천휘는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순간적으로 치미는 살의를 참기 힘들어 속으로 참을 인을 수십 번 되뇔 정도였다.
“그럼 이제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해봐.”
[사이클롭스를 주식으로 삼는 몬스터는 바로 드래곤의 아류라고 불리는 와이번이라는 놈이다.]
“와이번?”
[그렇다. 또는 드레이크라는 녀석도 있지만, 녀석은 드래곤 레어의 수문장과 같은 녀석이니 찾기 어려울 거다.]
와이번이라면 드래곤형 몬스터 중에서 크기는 가장 작지만, 가장 빠른 속도로 날 수 있는 몬스터였다. 크기가 작다고는 해도, 그것은 드래곤과 비교했을 그런 것이지 일반적인 몬스터에 비해서는 월등히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와이번이라면 높은 고지대에서 서식하고 있지 않나? 이 근방에는 그 정도로 높은 고지대가 없는데?”
천휘는 자신이 와이번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늘어놨다. 그에 오베른은 한심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와이번이 고지대에 사는 것을 봤나?]
“그렇진 않지만…….”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
“큭.”
도발적인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오베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어디에 사는데?”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 왼편에 위치한 저 바위산에 서식하고 있을 거다.]
“…뭐야, 결국에는 고지대에 있단 말이잖아!”
[고지대가 아니라 바위산!]
“…큭. 너랑 말을 말아야지, 진짜. 그런데 저 바위산에는 어떻게 가지? 저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바위산을 오르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
오베른이 가리킨 바위산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사면이 둘러싸여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절벽은 발을 딛고 갈 수 있을 만한 곳도 많지 않아 오르기가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냥 포기하고 이 근방에 오두막이라도 짓는 게 어떤가. 내가 보기에는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
빈정 상하도록 얄밉게 하는 오베른의 말을 무시한 채 천휘는 예의 그 바위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좀 가파르긴 하지만 이 정도면 태산의 봉우리인 옥화정에 비해 양호한 편인데?’
아르니안 대륙의 상식으로는 발 디딜 곳도 마땅찮은 바위산을, 이렇다 할 등산 도구도 없이 오르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곳 아르니안의 상식일 뿐, 천휘의 본적은 아르니안이 아닌 천 제국이다.
‘거치적거리는 이 녀석들은 일단 빙옥 속에 넣어두고 나 혼자 저 바위산을 오르는 게 낫겠어.’
“야, 너희들 모두 빙옥으로 들어가.”
[정말 저 바위산을 오르려는 건가? 와이번은 최소한 바위산 중턱 위쪽에 서식하고 있을 텐데.]
“저토록 높은 곳에 거점을 마련하면 사이클롭스에게 공격당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일석이조의 거점이야. 그리고…….”
천휘는 이번 기회에 와이번의 시체를 혈강시로 제작할 생각이었다. 만약 와이번을 강시로 제작한다면, 또 하나의 강력한 힘을 얻는 것과 더불어 장거리 이동 수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잔소리 그만 하고 들어가!”
[그러지.]
파앗, 파앗, 파앗.
강시들이 차례로 빙옥으로 들어가자, 천휘는 곧바로 경공을 전개해 바위산으로 향했다. 외눈박이 괴물의 보금자리와 맞닿은 면이 아닌 반대편으로 오를 생각이었다.
“흐음, 멀리서 볼 때마다 좀 더 높은 것 같은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럼 시작해볼까?”
천휘는 바위산을 올려다보며 대충 어느 곳을 밟을 것인지 파악했다. 천 제국에서 워낙 도주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이런 바위산도 수십 번은 오르내린 경험이 있었다. 그 때문에 천휘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앗!”
천휘가 곧바로 경공을 전개하자 그의 신형이 위로 솟구쳤다. 말 그대로 몸을 가볍게 해주는 공부인 경공. 천휘는 생사의 기로에서 자연스럽게 경공을 터득한 덕에 그의 경공은 능히 일절로 불려도 될 만큼 뛰어났다.
“이야호!”
탁탁.
천휘는 즐거움에 비명까지 내지르며 바위산을 쉼 없이 올라갔다. 높은 산을 오르는 기분은 말 그대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아 천휘로 하여금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끼요옷호!”
타악!
단숨에 바위산의 중턱까지 올라온 천휘는 두 발을 내디딜 만한 작은 공간이 보이자, 곧바로 그곳에 올라섰다. 기분 같아서는 이대로 바위산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쌓여 가는 피로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헉헉, 그나저나 경치는 환상인데?”
바위산 중턱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멀리 제황의 계곡 주변에 짙게 펼쳐진 안개는 이곳을 흡사 무릉도원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고, 그 옆으로 펼쳐진 푸른 수림은 그의 마음을 확 트이게 해주었다.
“이런 데서 『오벨리스크』의 대단함을 느낀다니까. 천 제국의 풍경도 그렇지만, 이곳의 광활한 수림은 현세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태고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나 할까? 휴우, 이래서 『오벨리스크』를 그만둘 수가 없다니까.”
어릴 적부터 각박한 도시에서만 살아온 천휘로서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은 대자연의 풍경은 경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대자연이 연출하는 환상에만 치중할 수 없는 상황. 천휘는 이윽고 바위산의 위쪽을 바라봤다.
“이제부터는 똑바로 올라가지 말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올라가야겠어. 아무래도 사이클롭스를 먹이로 삼는 와이번이니, 녀석들의 행동거지를 지켜볼 수 있는 곳에 거처를 마련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 출발해보실까?”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운 천휘는 곧바로 서 있던 자리에서 박차고 바위산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은신도 함께 펼친다.’
행여나 바위산을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와이번과 맞닥뜨리면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은 천휘로서는 큰 봉변에 빠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는 경공과 함께 은신까지 펼치며 자신의 존재를 은폐했다.
‘저기다!’
한참 바위산을 오르니, 유난히 튀어나온 바위 하나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휘익, 탁.
조심스럽게 바위 위에 발을 내디딘 천휘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동굴 안을 살폈다.
‘기척이 느껴지질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사냥이라도 나간 모양인데?’
다행히 동굴 안에는 와이번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았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기에 천휘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는 생각보다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이 넓어지는 것 같은데?’
와이번의 거처로 의심되는 동굴은 호리병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와이번의 크기를 감안해볼 때, 입구 역시 그리 좁은 것만은 아니었다. 녀석은 3미터의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사이클롭스를 먹이로 삼는 몬스터다. 그 크기는 어림잡아도 10미터 이상, 어쩌면 20미터가 넘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입구는 사람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거대했다. 다만, 천휘의 예상보다 작다는 것일 뿐이다.
“역시 없는 건가?”
동굴의 끝자락에 도달했음에도 와이번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사이클롭스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들 뿐.
천휘는 곧바로 오베른을 빙옥에서 빼냈다.
[호오, 정말로 그 바위산을 올라온 것인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어. 그보다 아마도 와이번 녀석이 사냥을 나선 모양이야. 너와 둘이서 이 근처에 은신해 있다가 녀석이 사이클롭스를 물고 오면 그때 덮치자. 어때?”
[지금 내게 협공을 강요하는 건가? 사나이 오베른, 상대가 누구건 절대 협공하지 않는다. 나 혼자의 힘으로 상대할 뿐이다.]
“…빌어먹을 놈.”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전개지만, 막상 말을 듣고 나니 짜증이 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요새 들어 부쩍 녀석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고 있을 지경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단, 녀석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입혔을 시에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얼마든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 난 근처에 숨어 있을 테니!”
오베른이 이 정도로 호언장담을 했으니, 천휘로서는 더 이상 녀석을 만류할 수 없었다. 녀석의 장점이자 단점인, 강자와의 대결에 관한 고집을 꺾을 수가 없는 탓이다.
그렇게 천휘와 오베른은 멀찌감치 떨어져 각자의 위치에서 와이번이 오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인지라 해가 저물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느낌상 해가 저물다 못해 달이 중천에 떴을 시각이었다.
그러나 와이번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점점 천휘와 오베른의 긴장감은 떨어져, 어느새 두 사람은 앞으로의 행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주인 말은 저 수많은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모두 미친 소와 같은 철골강시로 만든다는 것이냐?]
“모두 만들 수는 없겠지. 일단은 녀석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도 문제이고.”
[그렇겠군.]
현재 강시들을 넣어두고 다니는 빙옥의 무게 제한은 3톤이다. 때문에 이미 빙옥은 포화 상태나 마찬가지다. 미친 소는 물론이고, 오베른과 냥이 역시 엄청난 중량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당한 무게를 자랑하는 카이젠 사이클롭스 철골강시들을 대동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 제국에 비해 이곳에서 제작되는 강시들은 그 무게가 너무도 엄청났다.
“그래서 생각해둔 게 있긴 한데.”
[그게 뭔가, 주인?]
“아무래도 8서클 이상의 대마도사를 찾아봐야겠어. 그에게 아공간을 선물받는 것밖에 방법은 없을 것 같아.”
[아공간?]
오베른의 물음에 천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본래는 드래곤의 전유물이었던 일종의 공간 왜곡 마법이 바로 아공간이지. 이 아르니안 대륙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이계의 공간을 소환해 그 공간을 들락날락거릴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이야. 물론 그 공간은 나만의 공간이기에 창고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편리한 마법이지.”
[그런 게 있는가?]
천휘의 설명에 오베른은 놀란 눈초리로 반문했다. 그 자신의 기억 속에는 아무래도 남아 있지 않은 지식인 듯했다.
“그런 게 있어. 물론 8서클 대마도사를 만난다는 전제하에.”
8서클 대마도사란, 한마디로 8서클을 마스터하고 9서클을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라는 뜻이다. 오베른 마탑 지부의 지부장인 게렌 드 필리얀도 8서클 유저이긴 했지만, 그는 아공간 생성 마법을 펼칠 수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 8서클의 모든 것을 이룬 대마도사가 아닌 탓이다.
‘8서클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유저라면 경우에 따라서 그 이상도 바라볼 수 있겠지만, 아직 유저 중에는 7서클도 많지 않은 상황. 결국 8서클 대마도사는 NPC 중에서 찾아야 한다는 소리다.’
아르니안 대륙에서의 구체적인 계획이 잡혀 갈수록 생각할 것이 너무도 많아졌다. 특히나 아공간처럼 자신이 생각한 범주 이상에서 난관에 봉착했을 때가 가장 난감한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무덤에서 발견한 시체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 슈트라카이젠!”
생각해보니 그랜저와 관련된 일 때문에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제황의 계곡을 떠나 수도 오베른의 저택에서 차분히 그의 시체를 확인하려 했는데, 중간에 일이 꼬여 버린 것이다.
“아직 와이번이 오려면 먼 것 같으니까, 녀석의 시체를 한번 확인해볼까?”
스파앗.
천휘가 조심스럽게 빙옥에서 슈트라카이젠의 시체를 꺼냈다.
“역시나 변함이 없는걸?”
[…정말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자로군.]
슈트라카이젠의 시체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관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천휘는 그저 슈트라카이젠의 상태가 예전과 다름없이 생기가 넘치는 것에 주목했고, 오베른은 그의 몸 안에 내재된 엄청난 마나를 통해 그의 실력을 추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도 확인이 가능하려나?”
천휘는 그가 살아생전에 어느 정도의 실력자였는지 확인해볼 겸 장생본초집성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디텍트 기능으로 시체를 확인해보지 않아 미덥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디텍트!”
[이름:참격의 기사 오베른]
등급:천마강시
생명력:15,800 마나:3,600
<기본 스탯>
근력:2,660 민첩:1,440 체력:1,580
지혜:15 지력:360
[뭐 하는 건가?]
“역시나 강시에게는 통하네.”
천휘는 먼저, 시험 삼아 오베른에게 디텍트를 전개했다. 그러자 천휘의 눈앞으로 그의 상태창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훤히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번엔……. 디텍트!”
[이름:마지막 황제 슈트라카이젠]
등급:無
생명력:5,800 마나:26,000
<기본 스탯>
근력:750 민첩:3,280 체력:580
지혜:1,640 지력:2,600
“…….”
천휘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엄청난 능력치다. 만약 그가 천마강시나, 혹은 그 이상의 단계에 해당하는 강시로 제작된다면……. 아마 상상할 수도 없는 괴물이 탄생하게 될 터였다.
“…일단 보류.”
슈트라카이젠의 능력을 확인하니, 천휘는 한시라도 빨리 강시 제작술 숙련도를 올리고 싶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하지만 천 제국에서도 느꼈다시피, 강시 제작술 숙련도를 올리려면 엄청난 노가다가 필요했다.
그것도 현실 시간으로 몇 달에 걸친.
“이 녀석은 천마강시 윗단계의 강시를 제작할 수 있을 때, 그때 강시로 제작한다.”
슈트라카이젠의 시체는 천마강시로 화한 오베른보다도 몇 배는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천휘는 그의 시체를 보며 욕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상 최강의 존재를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욕심이 그것이었다.
[주인! 녀석이 왔다!]
“헉! 알았어!”
오베른의 말에 천휘는 다급하게 슈트라카이젠의 시체를 빙옥으로 집어넣고 곧바로 동굴의 구석진 곳으로 달려가 은신했다.
끼에에엑!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입구에서 기괴한 울음이 동굴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오베른의 말대로 와이번 녀석이 드디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쿵. 쿵.
와이번이 날개를 접고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지, 동굴 안에 굉장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꿀꺽.
엄청난 발소리에 긴장한 듯 천휘는 은신한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끼에에엑!
‘왔구나!’
드디어 동굴의 통로를 지나 와이번이 오베른과 천휘가 자리하고 있는 동굴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녀석의 발톱에는 거대한 카이젠 사이클롭스 한 마리가 죽은 채로 꿰여져 있었다.
‘색깔이 붉다.’
보통 와이번의 피부색은 암청색을 띤다.
피부색을 감안했을 때, 아무래도 눈앞의 와이번은 보통의 와이번은 아닌 모양이었다.
[왔는가!]
와이번을 발견한 오베른은 투지에 불타오르는지 환희에 찬 목소리였다. 와이번 역시 그러한 오베른을 발견했는지 흉성을 토해내며 위협했다.
끼에에엑!
와이번 녀석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오베른 역시 2미터가 넘는 거구임에도 녀석과 비교하면 어린아이처럼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끼에에엑!
와이번은 자신의 보금자리에 불청객이 존재한다는 것이 불쾌한 듯 계속해서 흉성을 터트렸다. 급기야 사냥해온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시체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오베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큭큭, 저게 뭐야?’
기세 좋게 달려드는 것치고는 너무도 모양새가 볼품없었다.
와이번은 땅에서가 아닌 공중에서 활약하는 비행형 몬스터. 그런 녀석이니, 비좁은 동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무척이나 제약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앗!]
그런 와이번을 향해 오베른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들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샤벨 타이거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오베른의 움직임 역시 눈으로 좇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다.
콰앙!
끼에에엑!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와이번의 가슴 둔치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타격음이 들려오더니, 이내 와이번이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터트렸다.
오베른이 녀석에게 생채기를 입히지 않기 위해 클레이모어의 면으로 후려친 탓이었다.
‘의외로 쉽게 끝나는구나.’
둘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던 천휘는 예상외로 쉽게 풀리는 전개에 긴장의 끈을 조금 늦춰버렸다. 비좁은 공간에서 와이번이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탓에 당연히 오베른이 녀석을 처치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개는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끼에에엑!
화아아아!
오베른의 계속되는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와이번은 급기야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레드 드래곤의 파이어 브레스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녀석의 브레스 역시 굉장한 화력으로 오베른을 압박했고, 심지어 구석에서 은신해 있던 천휘까지 덮쳐 버렸다.
“으악!”
화르르륵!
긴장의 끈을 놓고 있던 천휘는 녀석이 뿜어낸 브레스에 화들짝 놀라 은신을 풀고 재빨리 몸을 빼냈다.
[젠장.]
“앗, 오베른!”
비교적 거리가 떨어져 있던 천휘는 어떻게 몸을 빼냈지만, 바로 정면에서 브레스에 직격당한 오베른은 그렇지 못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풀 플레이트 덕에 타격은 어느 정도 흡수했지만, 브레스에 내재된 엄청난 고화력에 화상을 입고 만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강시답게 고통은 느끼지 않았지만, 문제는 화상을 입은 탓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원활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오베른, 더 싸울 수 있겠어?”
[나를 뭐로 보는 건가, 주인!]
‘하여간 자존심은.’
“알아서 해, 그럼! 절대 안 도와줄 테니!”
천휘는 아예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주저앉아 버렸다. 전투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고 구경만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도 오베른은 신경 쓰지 않고 와이번을 노려봤다.
끼엑.
조금 전의 브레스는 녀석에게도 큰 무리가 따르는 스킬이었는지, 녀석은 눈에 띄게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더해 오베른의 공격으로 전신에 엄청난 타격을 입은 상황이기에,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 상태에도 오베른은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오베른은 거듭되는 와이번의 긴 목을 이용한 공격에도 클레이모어로 착실하게 녀석의 거대한 몸뚱이를 가격해 쓰러트렸다.
“야, 왜 스킬 안 쓰는 거야!”
무려 30분의 혈투 끝에 간신히 와이번을 쓰러트린 오베른을 보며 천휘는 답답한 듯 소리쳤다. 그동안은 행여나 와이번 녀석이 자신에게 달려들까 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이 생채기 하나 내지 말라 하지 않았나. 내가 스킬을 전개하면 이 녀석은 적어도 어디 몸 한구석이 성하지 않았을 거다. 난 참격의 기사니까.]
“…네 똥 굵다는 걸 내가 깜빡했다.”
오베른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한 천휘는 조심스레 와이번에게로 다가갔다. 쓰러지긴 했지만, 아직 숨을 내쉬는 걸로 봐서는 완벽하게 목숨이 끊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참에 이중극점 숙련도나 올려야겠네. 레벨도 올리고.”
오베른이 죽이는 것보다 천휘 자신이 몬스터를 죽이면 경험치를 몇 배는 더 많이 먹게 된다. 게다가 숙련도를 올리기 힘든 이중극점을 쓸 절호의 기회이니,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비켜 봐.”
[주먹질 따위로 이 거대한 와이번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까?]
“…비키기나 해.”
오베른의 비아냥거림에도 굴하지 않고 천휘는 와이번의 배 부근으로 걸어갔다. 상대적으로 얇은 가죽으로 형성된 배 부분을 공략할 생각에서였다.
“하압!”
천휘는 이중극점을 전개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스킬임에도 놀라운 집중력과 마나 응집을 요구하는 이중극점이다 보니 실전에서는 쉬이 쓰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이중극점!”
콰앙!
끼에에엑!
“빌어먹을!”
역시나 한 번의 공격으로 와이번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좀 전의 공격으로 와이번이 고통을 느낀 것이 위안이었다.
“오냐! 네가 죽는지 내가 죽는지 한번 해보자! 이중극점!”
콰앙!
끼에에액.
“이중극점!”
콰앙!
끼에에엑.
무려 세 번의 이중극점이 뿜어지자, 와이번의 호흡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한곳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천휘의 잔인한 공격에 제아무리 튼실한 가죽을 자랑하는 와이번이라도 타격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만 내가 끝장을 볼까, 주인?]
하지만 그 모습이 지루했던지 오베른이 나서서 물었다.
“꺼져! 내가 처치할 거야! 하앗, 이중극점!”
또다시 천휘의 주먹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윽고 동굴 안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천휘의 주먹이 와이번의 배를 두드리는 소리와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와이번의 신음 소리뿐이었다.
콰앙!
“헉헉.”
[띠링!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띠링! 이중극점의 숙련도가 초급 2단계로 상승하셨습니다.]
털썩.
드디어 와이번의 미약했던 생명력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연이어 알림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천휘 역시 땅에 주저앉았다.
[괜찮은가, 주인?]
“헉헉, 네 눈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전혀.]
“그럼 왜 물어! 헉헉.”
이중극점을 무리하게 전개한 탓에 천휘는 피로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이중극점이 엄청난 마나를 잡아먹는 스킬이어서 그 많던 마나도 어느새 바닥을 기고 있었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피로 회복제인 박코스를 복용하고 10분가량 휴식을 취하자, 어느 정도 피로도가 회복됐다. 그에 천휘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이 와이번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뻔한 건 묻지 마라. 당연히 강시로 만들어야지. 그것도 냥이와 같은 혈강시로 만들 거다.”
[이렇게 거대한 녀석을?]
“흐음, 그러고 보니 녀석을 강시로 제작하려면 그에 맞는 수조가 있어야겠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림잡아도 녀석의 크기는 대략 15미터 정도.
현재 천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철제 수조는 미친 소조차도 수용하기 힘들었던 만큼 와이번에게는 하염없이 작은 크기였다.
“이거 대책이 안 서네.”
와이번의 거대한 크기를 감당할 만큼 거대한 수조를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작은 연못이라면 모를까.
“연못? 맞아! 바로 그거야!”
천휘는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무릎을 강하게 내리쳤다.
[무슨 일인가, 주인?]
“그런 게 있어. 기다려 봐! 냥이, 미친 소! 둘 다 나와!”
파앗, 파앗.
음메!
캬오오!
[갑자기 녀석들은 왜 빼낸 거지?]
“이 녀석을 이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이 거대한 녀석을?]
“잔말 말고 보고나 있어.”
빙옥은 크기에 제한 없이 3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한마디로 녀석의 크기가 제아무리 커도 무게가 3톤만 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었다.
스파앗.
“오오! 들어갔다!”
[볼수록 신기한 가방이로군.]
“가방이 아니라 행낭이라는 거다. 그것도 고루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물이야.”
[고루문?]
“그런 게 있어. 일단 이 근처에 연못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자. 이 녀석이 들어갈 만한.”
천휘는 미친 소와 냥이를 그 동굴에 남겨 두고는 오베른과 함께 바위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굴의 입구 부근에 줄을 매달아 다음에 올라오기 편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이 서식하는 곳이 산속이라 주변에는 와이번이 푹 잠길 정도로 큰 호수가 두세 개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곳이 드래곤 산맥과 인접해 있다는 데에 있었다.
“카이젠 산맥과 드래곤 산맥이 맞닿아 있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인접한 지형은 처음인걸?”
[주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곳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바렌트 왕국까지 이어지는 카이젠 산맥은 그 부근에서 아예 드래곤 산맥과 이어져 있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웬 피해?”
[드래곤 산맥의 고위 몬스터들이 카이젠 산맥을 따라 바렌트 왕국을 침범하니, 피해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흐음.”
오베른의 설명에 천휘는 바렌트 왕국에 아르니안 대륙에서 유명한 용병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들은 드래곤 산맥에서 넘어오는 고위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내가 와이번 녀석을 혈강시로 만드는 동안 넌 주변을 지켜 줘. 그러려고 데려온 거니까.”
[그렇게 하지.]
“반경 500미터 안에 어떤 녀석도 들여보내지 마.”
천휘는 오베른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하고는 조심스럽게 빙옥에서 와이번의 시체를 꺼내 호수 인근에 내려놓았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사실 천휘는 생물 교사인 탓에 자연 보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과 달리 이곳은 가상의 세상. 호수가 변질된다고 해도 분명히 운영자들에 의해 정화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천휘는 마음 놓고 호수를 강시 제조를 위한 수조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자, 시작해볼까?”
천휘는 혈강시 제조를 위한 시약들을 무한의 행낭에서 꺼내 하나 둘 수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와이번이 워낙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지라 시약의 양도 평소보다 5배 정도 많이 투여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략 3시간가량 흐르자 천휘가 잠깐 휴식을 취했다.
“휴우,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됐네? 남은 건 죽은 기사의 심장뿐인가? 제길, 이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죽은 기사의 심장은 시약 중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생성 조건도 까다롭고, 물량도 많지 않아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카이젠 사이클롭스의 시체를 이용한 철골강시들에겐 죽은 기사의 심장을 아껴야겠어. 어차피 녀석들에게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자, 그럼 어디 마무리를 지어보실까?”
풍덩풍덩.
천휘는 죽은 기사의 심장을 무려 5개나 호수에 집어넣고는 호수가 변화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호수의 빛깔이 푸른색에서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핏빛의 안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좋아! 오베른! 이리 와서 와이번 좀 호수 안으로 밀어 넣어줘.”
[…주인, 난 일꾼이 아니다.]
“맞아. 넌 일꾼이 아니라 머슴이지.”
[머슴?]
생소한 단어에 오베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충직한 호위 무사를 가리키는 고대어야. 오베른 너는 말 그대로 머슴의 표본이야!”
[오! 그런 깊은 뜻이! 좋다! 이제부터 난 주인의 머슴이다!]
“좋아! 넌 나의 충직한 머슴이다! 당장 와이번을 옮겨!”
[우오오오!]
너무도 손쉽게 오베른을 속여 넘긴 천휘는 속으로 킥킥대며 오베른이 거대한 와이번을 호수로 옮기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역시나 상당한 근력의 소유자답게 엄청난 덩치의 와이번을 무리 없이 호수로 집어넣었다.
“자, 이제 오베른 넌 이곳을 지켜. 녀석의 강시화가 진행되는 동안 난 좀 가볼 데가 있으니까.”
[알겠다,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