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기분 좋은 날?
영완은 저녁이 되어 또다시 『오벨리스크』에 접속했다.
“흐음, 역시나 여긴가?”
천휘가 로그아웃한 곳은 바로 카이젠 산맥의 지류에 해당하는 제황의 계곡 입구.
어느새 운영자들이 나서 일을 처리했는지 오베른이 만들어낸 대형 참사는 모두 복원되어 있었다.
“운영자들도 던전까지는 복원시키지 못했던 모양이네.”
『오벨리스크』의 운영자들이 게임 내에서 행할 수 있는 권한은 한정되어 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권한은 바로 이벤트 행사. 그 외에는 잡부라고 할 정도로 게임 내에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소소한 것뿐이었다.
“마지막 황제의 무덤은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별다른 감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을 만한 것도 아니다.
아르니안 대륙에서의 역사적인 첫 도굴이 이뤄진 장소인 탓이다.
추억.
추억이 담긴 장소라는 것이다.
“뭐, 상관없지. 일단 오베른으로 가서 재정비하고 와야겠다. 이제 어느 정도 돈도 모였으니, 강시군단을 만들어보실까?”
천 제국에서 가져온 금괴를 거의 소모한 탓에 기존의 강시들을 제외하고 다른 강시들을 만들 수 없었던 천휘는, 이번 도굴을 통해 얻은 보물들을 몽땅 강시 제작에 사용할 심산이었다.
‘카멜과 로빈에게는 돈 좀 쥐어주면 되겠지.’
“냥이! 나와.”
캬오오.
“자식, 비벼 대기는. 푸하핫, 어딜 간질이는 거야!”
천휘는 애정을 듬뿍 표현하는 냥이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는 이내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집으로!”
크워어엉!
“크워어엉! 으하하하!”
냥이의 울음소리에 맞춰 천휘도 장난스럽게 울어대고는 기분 좋은 듯 대소까지 터트렸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이요호!”
냥이의 등에서 만끽하는 시원한 바람에 천휘는 절로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캬오오!
냥이도 마찬가지인 듯, 둘은 서로 호응하며 빠르게 오베른으로 나아갔다.
“냥이, 들어가.”
크르르.
콩.
“들어가라면 들어갈 것이지 뭔 말이 많아!”
오베른 근처까지 당도하자, 천휘는 냥이를 빙옥으로 집어넣었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기 싫은 탓이다.
“여전히 오베른의 밤은 불야성이네.”
멀리서 보이는 오베른의 밤은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오늘은 무슨 축제라도 펼쳐지는 듯 오베른의 밤하늘은 불꽃들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흐음, 정말 축제라도 벌이는 건가? 아니면 이벤트? 좋아! 간만에 사냥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즐겨 볼까? 오베른, 나와!”
파앗!
[주인, 오랜만이군.]
오베른은 나오자마자 반갑게 천휘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에 천휘도 대충 인사를 하고는 함께 수도 오베른으로 걸어갔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군. 예전 오베른의 흔적은 찾을 수조차 없을 정도야.]
“예전에는 어땠는데?”
수도 오베른을 바라본 오베른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
“왜 그래?”
갑자기 말문이 막힌 오베른을 보며 천휘가 물었다.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군.]
“아…….”
오베른이 키메라가 되면서 과거의 기억을 거의 대부분 상실했다는 것을 잊은 천휘가 탄식을 내뱉었다. 괜한 말을 꺼내서 미안한 마음이 든 탓이다.
[미안해할 것 없다. 어차피 이미 한 번 죽은 몸. 이렇게 다시 오베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을 일이지. 신경 쓰지 마라, 주인.]
“흠흠, 누가 신경 썼다고. 가자. 새로운 오베른에서 마음껏 즐기는 거다!”
[그러지.]
“…….”
천휘가 한껏 부푼 얼굴로 소리쳤지만, 오베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죽은 기사의 심장으로 감정의 일부분을 되찾은 그라 할지라도 강시는 강시인 것이다. 그에게 투쟁심 이외의 감정은 사치다.
“튤립 축제라…….”
오베른에서 펼쳐지고 있는 축제는 튤립 축제였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이 앞에 붙은 축제.
오베른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던 천휘의 표정은 무서울 만치 일그러져 있었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주인.]
“별로.”
[흐음, 그런가?]
오베른의 물음에도 천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오베른 시내 곳곳에 펼쳐진 튤립 화단은 물론이고,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커플들이 모두 짜증스럽게만 보이는 탓이다.
“어라? 이게 누구야! 천휘 아냐?”
“아, 필리언.”
시내를 걸으면 걸을수록 짜증만 더해가자 천휘는 자신의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필리언을 만날 수가 있었다.
“아는 사이야?”
“조금. 예전에 같이 격투가 직업을 얻을 만났던 사이야. 잘 지냈냐?”
“그럭저럭.”
남자다운 향기를 풍기는 필리언은 역시나 여자 친구가 있는 모양인지, 옆에 여성 유저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천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저번에는 네가 먼저 사라져서 좀 섭섭했다. 스킬 사려고 여기저기 둘러보니까 없어졌더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친한 척이냐?”
“뭐- 뭐라고?”
천휘의 물음에 필리언은 다소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천휘로서는 거리낌 없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고작 몇 분 정도 만난 것 가지고 이런 거리에서 말까지 건다는 게 우습지 않냐? 그냥 조용히 지나가라. 지금 기분이 별로니까.”
“이 자식이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이야!”
“오빠! 뭘 참고만 있어! 저런 말 듣고도 가만있을 거야?”
천휘의 도발적인 말에 필리언은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 그의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도 울분이 치솟는지 필리언을 다그쳤다.
“결투다!”
“결투?”
“그래, 결투! 괜히 널 죽여서 경비병들에게 미움 사기 싫으니까 정당한 방법인 결투를 통해서 널 죽이겠다는 거다!”
‘천 제국에서의 비무와 비슷한 건가?’
“마음대로.”
“이익! 네 녀석 끝까지! 이제부터 네 녀석은 나와 친구가 아니다!”
“원래 친구가 아니었다니까 그러네.”
[띠링! 필리언 님께서 결투를 신청하셨습니다.]
“승낙.”
천휘의 승낙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원형의 막이 생성되었다. 돔 형태의 그것은 두 사람의 결투로부터 주변 지형과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인 듯했다.
“결투다!”
“앗! 저 사람은 그레이 울프라 불리는 필리언이잖아?”
“아, 그 유명한 용병?”
두 사람의 결투를 보고자 모여든 유저들이 필리언의 정체를 놓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필리언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며 천휘를 노려봤다.
“들었나? 내가 바로 십대 용병 중 한 명인 그레이 울프다! 이제라도 결투를 포기하시지?”
이곳 아르니안 대륙에서는 아무래도 각 직업군에 따른 랭커들을 따로 분류하는 시스템이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10대 모험가, 10대 용병 등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도 일반화되어 있는 듯했다.
“너나 포기해라.”
“이익! 오냐! 반드시 널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필리언은 자신의 주 무기인 듯 클로를 양손에 착용했다.
클로는 동물의 발톱을 형상화한 무기로 3개나 5개 정도의 날이 선 갈고리가 주먹에 부착된 형태였다.
‘용병 랭커라면 적어도 300레벨에 근접했을 터. 게다가 저 무기 또한 최소 레어 아이템일 테지. 발록의 심장을 입지 않으면 이기기 힘들겠는데.’
현재 천휘 자신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의식해 발록의 심장이 아닌 따로 구입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자신에게 모든 힘을 토해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착착.
“장비를 바꾼 것이냐? 얼마나 좋은 장비인지는 모르겠다만,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다!”
“진짜 말 많네, 짜증나게!”
휘익!
발록의 심장을 착용하고 발록의 주먹을 양손에 낀 천휘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따위 연타 공격으로 누굴 이기겠다는 거냐!”
듀라한조차 피하지 못했던 연타 공격을 필리언은 너무도 쉽게 막아냈다. 확실히 착실하게 레벨을 올리고 스킬 숙련도를 높인 그는 강했다.
“하앗!”
“쳇.”
천휘의 연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필리언의 클로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흡사 뱀의 혓바닥을 연상시키듯 그의 클로는 괴이한 움직임으로 천휘를 압박했다.
‘천 제국의 조법보다는 역시나 허접하군.’
천 제국에도 필리언이 사용하는 클로와 비슷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 많았다.
그들은 필리언처럼 따로 무기를 착용하진 않지만, 잘 단련된 손톱으로 괴이신랄한 무공을 펼쳐 상대로 하여금 반격조차 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천휘는 그런 조법의 고수들도 여럿 만났다.
특히, 그중에서는 조법만으로 천 제국 10대 고수의 반열에 오른 백골마황조 허월이라는 자의 조법은 능히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했었다.
‘이건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확실히 필리언의 클로는 빠르고 기이한 움직임으로 자신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압박은 해왔지만, 정작 당사자인 천휘는 전혀 압박감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지 클로의 움직임을 밀쳐 내고 반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이내 행동으로 옮겨졌다.
“하압! 대지의 울음!”
콰앙!
“윽!”
어느 정도 클로의 궤적을 읽어냈다고 판단한 천휘는 곧바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고 대지의 울음을 전개했다. 유니크 스킬답게 숙련도는 아직 미비하지만 필리언의 몸을 확실하게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다.
“악마의 숨결! 연타!”
파바바박!
“크아아!”
겨우 1초의 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전세를 뒤집어엎기에는 충분했다. 악마의 숨결로 극대화된 천휘의 공격력이 그대로 필리언의 몸으로 쏟아졌다.
그러자 필리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멀리 나가떨어졌다.
“필리언!”
여유만만하게 결투를 지켜보던 필리언의 애인은 다급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가 천휘의 전의를 더욱 불태우게 만들었다.
“죽어라! 연타!”
멀리 튕겨진 필리언의 신형을 곧바로 따라가 천휘는 계속해서 연타 공격을 퍼부었다. 악마의 숨결은 운용하지도 않은 공격이었지만, 발록의 주먹에서 뿜어지는 엄청난 공격력은 필리언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끄아아아! 끄아!”
쾅! 퍽!
“음하하하!”
필리언이 괴성을 내지를 때마다 천휘의 기괴한 웃음소리는 더해져만 갔다. 예상외로 흘러가는 결투의 향방에 지켜보던 유저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헉헉.”
움찔움찔.
급기야 천휘는 과도한 체력 소모로 호흡이 가빠지기에 이르렀다. 그의 맹렬한 공격에 필리언은 땅바닥에 누워 몸을 간헐적으로 떨며 사실상 결투가 끝났음을 보여 줬다.
쿵쿵쿵.
“그만! 그만 해!”
비록 게임이긴 하지만 자신의 연인이 다 죽어가는 모습은 여린 심성을 가진 여인에게는 차마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결국 필리언의 애인은 눈물을 흘리며 보호막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짜증나네.”
하지만 천휘는 그런 여인의 눈물을 보며 가련해 보이기는커녕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계속해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
천휘는 그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널브러져 있는 필리언에게로 다가갔다.
“대단한 포스인데?”
“그렇지? 저런 자가 어디에서 나타났지?”
“십대 용병 그레이 울프를 저 정도로 가지고 놀다니. 새로운 강자의 등장인가?”
“그러고 보니 저 무복, 발록의 심장 아니야?”
“헉! 저 장갑은 발록의 주먹! 그렇다면 저자가!”
“골든 시크릿!”
구경꾼들은 급기야 천휘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웅성거렸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천휘는 그런 것은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은 본연의 모습이 아닌 인피면구인 탓이다.
“커헉.”
필리언이 주변의 변화를 인식했는지 이윽고 걸쭉한 피를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척 보기에도 생명력을 거의 다 소진한 모습. 천휘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는 목숨을 잃을 터였다.
“대… 단한데?”
“별로. 네가 약한 거겠지.”
“크크크, 그럴지도. 아무튼 대단한 녀석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어. 보아하니 날 살려 줄 의향은 없는 거겠지?”
“물론.”
필리언의 물음에 천휘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자 필리언의 인상이 흉흉하게 일그러지며 입을 열었다.
“난 이제부터 널 친구라 여기지 않겠다. 넌 이 『오벨리스크』를 하고 있는 내내 내게 목숨을 위협받을 거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다. 그 정도로 개념이 없는 놈은 아니니까.”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
“큭큭큭, 마치 자신을 신이라 여기는 것 같은 광오함. 그게 얼마나 가는지 내가 지켜보지!”
콰앙!
“필리언!”
스파앗.
[띠링! 필리언 님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띠링! 명성이 500 상승합니다.]
[띠링! 악명이 1,000 상승합니다.]
필리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휘의 발이 그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리 강력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생명력이 간당간당하는 필리언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저벅저벅.
“…….”
“…….”
일대에 돌연 정적이 흘렀다.
호기심에 바라봤던 결투는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렸고, 승자가 뿜어내는 포스는 그야말로 범접하기 어려운 악랄함 그 자체였다.
그런 유저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천휘는 뒤에 오베른을 대동하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
“…….”
“…흑, 흑.”
천휘가 그곳을 빠져나가고 모습을 감춘 뒤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간헐적인 한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좀 심하지 않았나?]
“별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가 당했을 거다.”
[그다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겉보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실상은 달라. 녀석과 나의 실력은 대등했어. 만약 내가 발록의 심장과 발록의 주먹을 착용하지 않았다면 내가 패했을 거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두지.]
저택으로 향하는 두 사람은 이내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여전히 주변에는 화려한 튤립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고 커플들도 농도 짙은 애정행각을 펼치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전혀 딴 세상 이야기인 듯했다.
“어딜 가는 거야?”
별안간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왠지 낯익은 목소리였지만 천휘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눈조차도 돌리지 않았다. 천 제국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여자는 없는 탓이다.
“천휘!”
휙.
“너- 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휘는 곧장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낯익은,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여인이 환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나 기억하는구나?”
‘…기억 못하는 게 이상하지. 그런 얼굴로 리자드맨을 뚜드려 패는 여자인데.’
눈앞의 여인은 다름 아닌 미온이었다.
헤론 습지에서 헤어진 뒤, 게임 시간으로 대략 열흘 만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녀에게는 좋은 기억보다는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은 탓에 천휘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데 네가 보이기에. 기분 나쁜 것 같아서 말 걸지 말까 하다가, 기분 나쁘면 같이 술이라도 마셔 주려고.”
“…….”
천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미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어디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얼굴. 하지만 눈만큼은 은근히 매력적이었다. 평범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서 단연 돋보이는 은근히 섹시한 눈빛이었다.
‘응? 저 눈빛, 어디에서 봤더라?’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를 낯익음에 천휘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다. 하지만 자신의 뇌리 속에는 그저 낯익음만 있을 뿐, 정확한 기억은 자리하지 않고 있었다.
“뭘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보는 거야. 그러면 내가 민망하잖아.”
“…전혀 민망해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정말 그때, 그 격투가 길드에서 봤던 그 사람이 맞아?”
“당연하지. 나처럼 특별하게 생긴 여인이 또 있을까 봐?”
“…….”
‘어딜 봐서 특별하게 생겼다는 건데.’
당당하게 자신이 특별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미온을 보며 천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축제 기간인데 할 일 있어?”
“어. 할 일 많아.”
미온의 물음에 천휘는 괜히 귀찮아질까 봐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천성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그의 거짓말은 금세 들통이 나고 말았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무- 무슨 짓이야!”
갑자기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는 미온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천휘는 그녀를 밀쳐냈다. 하지만 미온의 힘은 그보다 더 셌다.
“쑥스러워하기는. 가자. 축제 기간인데 처량하게 남자 혼자 돌아다니면 못써. 남자가 처량해 보이면 가치가 떨어지는 거야. 아름다운 내가 특별히 함께해줄게.”
“됐거든! 이 팔짱이나 좀 풀지?”
“쑥스러워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니까 쑥스러워하는 게 아니라니까!”
미온의 말에 천휘는 얼굴까지 붉어져서는 언성을 높였다. 그럼에도 미온은 웃음을 잃지 않고 그의 팔을 꽉 붙잡고 그를 이끌었다.
사랑 앞에서 여인은… 천하장사다.
“와아, 분수 예쁘지?”
“…그런 것 같긴 한데, 이 팔짱 좀 풀래?”
“와아, 저 솜사탕 맛있겠다! 나 저거 사줘.”
“…그러니까 뭐든 해줄 테니까 이 팔짱이나 좀 풀어달라고!”
미온은 천휘를 데리고 오베른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바로 오베른의 명물인 헤네시아의 분수가 있는 곳으로, 헤네시아는 『오벨리스크』의 사랑의 여신이었다.
미온은 축제 분위기에 한껏 들떠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천휘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팔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것보다 천휘를 더 곤욕스럽게 만들고 있는 건 마치 연인처럼 자신의 팔에 밀착한 미온의 체취였다.
그녀의 체취는 천휘를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게임! 대체 이런 시스템은 왜 만들어가지고!’
미온에게서 느껴지는 촉감과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체취는, 오랫동안 여자를 만나지 못해온 천휘에게 난감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남자의 상징이 불쑥 하늘로 치솟아 버린 것이다.
“미온, 제발 좀 떨어져 주라. 네가 하자는 것 다 할 테니까.”
결국 천휘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고 말았다. 그녀에게 말리는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당장은 이 난국을 헤쳐 나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정말? 알았어!”
“…….”
천휘의 한마디에 미온은 금세 팔짱을 풀고 실실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역시나 낚인 거였나?’
아무래도 눈앞의 여인은 의외로 얼굴이 무기인 듯했다. 순진하고 평범한 얼굴 속에 여우와 같은 잔머리를 숨겨 남자로 하여금 방심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알고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무기였다.
“우리 이제 저쪽으로 가보자.”
“뭐 하는 건데?”
미온이 떨어지자 한층 안정을 되찾은 천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점.”
“점? 그건 연인들이나 하는 거 아냐.”
“꼭 연인끼리만 하라는 법 있어? 촌스럽게 그런 거나 따지고. 그냥 재미삼아 보는 거지.”
“윽.”
평소 같았으면 대번에 무시하고 제 갈 길 갔을 천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있기에 선뜻 그러지 못하고 결국 미온의 손에 이끌려 점집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어서 오세요. 친절과 사랑으로 모시는… 엇!”
“너- 너는!”
점집 안으로 들어서자, 점쟁이로 보이는 여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인사를 채 마치지도 못하고 천휘의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레나, 당신이 여기엔 어떻게?”
“…쳇.”
점쟁이는 다름 아닌 마탑 오베른 지부의 시약 상점을 책임지는 세레나였다. 그녀와는 그리 좋은 인연이 아니기에 두 사람은 서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는 사람이야?”
“그냥 좀.”
천휘는 미온의 물음에 대충 대답하고는 그녀와 함께 세레나 앞에 앉았다. 제법 그럴싸하게 천막 안을 꾸며 놔서 누가 봐도 그녀를 점쟁이로 착각할 만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요. 축제 기간에 한해서 특별히 아르바이트하는 거니까. 본래 직업은 상점 점원 겸 마법사라고요!”
“…….”
‘요새는 NPC들도 알바하나?’
세레나의 말에 천휘는 더욱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이내 그녀에 대한 관심을 뚝 끊고 미온에게 말했다.
“이거 꼭 해야겠어? 그냥 다른 거 하지?”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야?”
“…네 마음대로 해라.”
미온의 도발적인 말에 천휘는 대꾸할 힘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저기 저희 점 좀 봐주세요.”
“그럴게요. 저희 점은 특별히 두 분의 신상명세가 필요 없어요. 그저 이 수정 구슬에 손만 가져가시면 돼요.”
“고마워요. 천휘야, 어서 손 올려.”
“알았으니까 이 손 좀 놓고 얘기해!”
미온의 손에 이끌려 천휘도 결국 수정 구슬에 손을 올렸다. 평소에도 점과 같은 미신을 믿지 않는 천휘지만, 강제적으로 연출된 상황에서의 점은 더더욱 믿기 힘든 것이었다.
“흐음, 어떤 점을 먼저 말씀드릴까요?”
점을 친 결과가 나왔는지 세레나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애정 운이나 말해주세요. 어떤가요?”
“알겠어요. 두 분의 애정 운은 좀 특이하네요. 일단 두 분은 서로의 본모습을 감춘 채 만나고 계시고, 더불어 인연의 고리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요. 그것이 좋은 의미에서의 인연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에서의 인연일 수도 있는데, 정확한 건 잘 모르겠네요.”
“그게 전부인가요?”
자신이 원하는 점괘를 듣지 못했는지 미온은 다소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두 분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인연의 고리들을 풀어야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받을 수 있는데, 그 고리를 푸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 보이네요. 죄송해요.”
세레나는 진심으로 미안한 듯 연방 죄송하다는 말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그 말에 천휘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온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씩씩거리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야! 돌팔이 아냐? 인연의 고리는 무슨! 이제 겨우 세 번 만났고 이렇게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는 건 처음인데! 인연의 고리라는 게 얽혀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뭐,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우리 둘이 기억 못하고 있지만, 본래 우리는 어디에선가 만났을 수도 있잖아? 현실에서건 게임에서건 말이야. 아마 그때의 인연이 악연이었으니, 우리가 인연의 고리를 쉽게 풀어내지 못한다고 하는 거겠지?”
타오르는 불씨에 부채질을 하듯 살살 약 올리는 천휘의 말에 미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에 천휘는 움찔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심지어 그의 머리카락이 난데없이 하늘 위로 치솟을 정도였다.
“그래서? 네 말은 지금 우리가 인연이 아니라는 소리야?”
마치 예전 리자드맨을 학살하던 바로 그 도살녀의 향기가 천휘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위기가 전해지는 듯 천휘는 날카롭게 변한 그녀의 인상을 보며 엉거주춤 뒤로 또 한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 역시 천휘에게로 한 발짝 다가와 둘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말해봐. 정말 우리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세레나의 말처럼 너와 나 사이에는 풀지 못하는 악연의 고리가…….”
“어째서 악연이라고 단정 짓는 건데!”
천휘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은 미온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난 분명히 널 이전에 만난 적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인연의 고리가 생기고 자시고 할 게 없다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점은 재미삼아 보는 거라고 해놓고 왜 그렇게 열을 내고 그래? 그냥 네 말대로 그렇게 생각해, 그럼.”
사실 애초에 천휘는 세레나의 점괘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 게임 내에서 고작해야 세 번 만난 사이에 얽히고설킨 인연의 고리가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꺄아아악!”
“왜- 왜 그래!”
별안간 비명을 지르는 미온. 천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인 중앙 광장 한복판에서 비명을 질러대니 삽시간에 수백, 아니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봤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대체 뭐 한 거야? 저 사람들의 눈빛 안 보여?”
“난 원래 주위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아. 남은 남이고 나는 나지. 안 그래?”
“…너 진짜 저번에 격투가 길드에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쑥스러워하던 그 여자 맞아?”
도무지 그때의 그 여인과 눈앞의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천휘가 물었다.
“둘 다 나 맞아. 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이쪽이 더 맞겠지. 현실의 성격이라고나 할까. 널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난 『오벨리스크』를 하면서 내 아바타의 모토를 극 소심쟁이로 정했었거든.”
“소심쟁이?”
“그래. 현실에서의 나와 게임에서의 내가 구태여 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또 다른 내가 되어보고 싶었어. 게임에서만이라도…….”
“…….”
미온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신과 얼추 비슷한 면이 있는 듯했다.
자신도 현실에서는 세상과 타협하는 소심쟁이인 반면, 게임에서만큼은 그러한 것을 타파하고자 내 마음대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왠지 현실에서의 미온은 어떤 여자일지 궁금해졌다. 하는 행동을 봐서는 평범한 여인은 아닐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마음을 밖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게임에서의 인연은 그저 게임에서의 인연으로만 남기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탓이다.
물론 그 이전에 그런 말을 선뜻 할 만큼 천휘가, 아니 영완은 적극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기분도 별론데 술이나 마시자.”
“…그냥 게임에서의 네 모습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겠냐?”
“왜? 그게 더 마음에 들어?”
미온의 당돌한 말에 천휘는 곰곰이 생각했다.
과연 말도 하지 않고 늘 쑥스러움만 타는 미온이 좋은가, 그렇지 않으면 이렇듯 화끈하고 당당한 성격의 미온이 좋은가.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술 마시러.”
“좋아!”
남자들은 순진한 양보다 때론 거친 늑대를 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