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제1장 타오르는 적의 (12/82)

제1장 타오르는 적의

그랜저를 위시한 일단의 무리들은 카이젠 사이클롭스를 정리하고 곧바로 제황의 계곡 방향으로 향했다.

천휘는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어떻게 해야 저들의 발길을 묶어둘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마법 결계로군.”

“그런 것 같은데?”

자신들을 몇 시간을 헤맨 끝에 알아낸 사실을 그랜저는 한눈에 알아봤다. 역시나 아르니안 대륙에서의 경험만큼은 그가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칼룬!”

“맡겨만 줘요, 형!”

“그래! 너만 믿는다!”

그랜저가 칼룬이라 부른 유저는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나이가 좀 어린지 그랜저에게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는 하린과 마찬가지로 결계가 형성되어 있는 숲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하린보다는 그 실력이 다소 떨어지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 갔다.

“휴우, 다 했어요, 형.”

“잘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흘렀어. 내가 지원해줄 테니, 앞으로 레벨 좀 더 올리고 모험가 스킬도 더 올려 놔. 우리 모임 중에서 오로지 너만이 모험가니까, 네 책임이 막중하다는 건 알지?”

“알고 있어요, 형.”

‘모임이라……. 역시 아직 길드를 형성한 건 아니었어. 하긴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소울 스타께서 길드를 만들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힘겹게 결계를 파훼한 그랜저 일행은 곧바로 제황의 계곡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이 제황의 계곡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천휘의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이야,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확실히.”

그랜저 옆에서 걷던 사내 한 명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황가의 계곡을 바라봤다.

짙은 암무로 휩싸인 계곡의 입구.

암무 사이로 비치는 거대한 계곡의 위용.

그랜저 일행은 제대로 찾아왔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자, 그럼 고대 황제들의 보물들을 가져가 보실까?”

“우오오오!”

“보물은 우리 거다!”

‘빌어먹을! 저 능글맞은 새끼.’

그랜저가 20명가량의 유저들과 함께 슈트라카이젠의 무덤으로 향했다. 던전은 클리어했지만 자신들이 그곳을 나와 버려 그곳은 다시 최초의 모습으로 돌아갔기에, 그랜저는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그곳으로 들어섰다.

그랜저가 무덤 안으로 사라지자, 무덤 입구에는 이제 5명의 유저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일 터였다.

‘어차피 그랜저 녀석이 무덤을 나오려면 최소한 세 시간은 걸린다. 녀석과 그 동료들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정도는 걸릴 것이 분명해. 그 전에 저 녀석들이라도 처치해놓는다면…….’

5명의 유저 중 4명은 전사로 보였고 나머지 1명은 마법사로 보였다. 던전 안에서는 귓말을 할 수 없는 탓에, 메시지 전달 마법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법사를 한 명 배치시켰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천휘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이미 그랜저가 무덤 안으로 들어선 지 30분여가 흘렀다. 연락을 받는다 해도 빨리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의미다.

“오베른, 냥이, 나와!”

천휘는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냥이와 오베른을 불러냈다. 미친 소는 느려터진 움직임 탓에 유저들에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불러내지 않았다.

캬오.

[왜 불렀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감히 내 보물들을 훔치려는 쓰레기들이 나타났어.”

[오호라, 그 쓰레기들을 청소하라 이건가?]

“정답. 하지만 쓰레기들이 좀 세. 오베른 너도 방심해서는 안 될 녀석들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천휘의 말에 오베른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내 힘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냐, 주인?]

오베른은 은연중 주변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얼마나 응축된 살기였는지 주변의 풀들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질 정도였다.

“네가 아무리 세도 녀석들을 혼자서 다 상대할 수는 없어. 녀석들의 숫자는 대략 서른 명. 그들 모두가 나보다 강하거나 나와 엇비슷한 실력자야.”

[흐음, 주인과 비슷한 실력자라니…….]

잘난 체하던 오베른의 코를 꺾었다고 생각한 천휘는 뒷말을 흐리는 오베른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뒤이어 터져 나온 오베른의 말은 그런 천휘를 긴장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간만에 몸 좀 풀 수 있겠어! 저쪽인가?]

“오- 오베른!”

오베른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무덤으로 달려 나갔다. 거대한 체구임에도 그가 뛰는 속도는 냥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빌어먹을! 냥이야, 따라와!”

순식간에 숲 너머로 사라진 오베른을 쫓기 위해 천휘는 곧바로 경공을 전개해 그를 뒤쫓았다. 냥이 역시 천휘 못지않은 속도로 그 뒤를 따랐다.

콰앙!

“젠장! 벌써 시작했나?”

전방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천휘는 더욱 발에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오베른!”

마침내 무덤 앞에 도착한 천휘는 4명의 전사들에게 둘러싸인 오베른을 보며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여어! 왔나, 주인?]

“이익.”

“빌어먹을, 밀리지 마!”

천휘의 등장에 오베른은 여유로운 듯 왼손을 들어 흔들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오베른의 클레이모어와 맞부딪친 상태로 근력 대결을 펼치고 있는 네 전사는 사력을 다해 오베른의 클레이모어를 저지하고 있었다.

“라이트닝 랜스!”

지지직, 콰앙!

“오베른!”

오베른이 4명의 전사를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천휘는, 별안간 오베른의 가슴을 강타하는 전격의 창에 화들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짜릿하구나!]

“…빌어먹을 괴물.”

천휘의 걱정에도 오베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소리쳤다. 오히려 짜릿한 느낌이 기분 좋은지 얼굴에 미소까지 번지고 있었다.

‘본래 육체가 키메라이라 마법 방어력이 엄청 높은 건가? 라이트닝 랜스라면 4서클 마법인데, 그 정도 마법에도 충격조차 입지 않는다는 건……. 역시나 괴물일세.’

천휘는 오베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법사에게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매직 애로우!”

하지만 마법사도 이런 접근전에 익숙한지 매직 애로우를 다발로 만들어 천휘에게 흩뿌렸다.

“쳇.”

휙휙.

매직 애로우는 고작해야 2서클 마법이지만, 그에 담긴 파괴력은 무시 못 할 수준이다.

때문에 천휘는 달리던 기세를 늦추고 몸을 좌우로 비틀며 매직 애로우 다발을 피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경공이 대단한 덕에 그의 신형은 어느새 마법사의 코앞에 이르렀다.

“블링크!”

하지만 마법사 또한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메이지에서 전투법사인 워로드로 전직한 모양인지 천휘의 엄청난 기세에도 침착하게 블링크로 몸을 피해냈다.

“흠, 순간 이동인가.”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지만 천휘는 마법사가 펼친 마법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재빨리 몸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파앗!

“여기다!”

이내 반짝이는 빛 무리와 함께 예의 그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천휘는 지체 없이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헉!”

또다시 자신의 코앞까지 도달한 천휘를 보며 마법사는 처음으로 당황한 듯 헛기침까지 내쉬었다. 그런 마법사를 향해 천휘는 사악한 웃음을 내보이며 강하게 땅을 발로 짓밟았다.

“대지의 울음!”

콰앙!

“흡!”

대지의 울음이 지닌 효과인 스턴 상태에 빠진 마법사는 놀란 눈빛으로 천휘를 바라봤다. 천휘는 그런 마법사의 눈빛을 무시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악마의 숨결!”

악랄한 악마의 힘을 품은 주먹이 마법사의 머리를 강타했다.

마법사는 본래 체력이 약한 족속들. 생명력을 올려 주는 온갖 장비를 착용하여 즉사는 면했지만, 마법사는 엄청난 충격 탓에 일시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바이, 바이!”

퍼버벅!

마법사는 전투에서 가장 까다로운 존재다. 행여나 마법사가 마비가 풀려 전투에 참여할까 염려되어, 천휘는 곧바로 연타를 퍼부어 그의 숨통을 끊어냈다.

“휴우, 마법사의 전투 방법도 제법 까다로운걸?”

천휘는 회색으로 물들어가는 마법사를 보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고는 전사들을 상대하고 있는 오베른을 쳐다봤다.

“…젠장. 벌써 처치한 거야?”

오베른과 맞서던 전사들은 어느새 모두 생명력을 잃고 회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그들 중 리더로 보이던 사내만이 냥이의 날카롭고 거대한 이빨에 물려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했지만, 그도 얼마 못 갈 듯했다.

“크윽! 웬 녀석들이냐!”

“이봐,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당신은 곧 죽기 직전이야.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어디서 큰소리야!”

상대가 그랜저와 함께 다니는 동료라는 생각에 천휘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이익!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냐!”

“진짜 짜증나네. 이런 자식들이 제일 짜증나. 이름만 믿고, 혹은 명성만 믿고 뭐든 해결하려는 족속들. 짜증나니까 좀 죽어줄래? 냥아! 비틀어!”

쿠워어엉!

“으아악!”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천휘의 명령에 냥이가 지체 없이 거대한 이빨을 거칠게 맞부딪쳤다. 그러자 사내는 허리가 대번에 끊어지며 생명이 다했다.

[이 자식들이 어떤 녀석들인데 그렇게 신경질적인 것이냐, 주인?]

오베른의 의아한 눈빛에 천휘는 살기가 가득한 눈초리로 말했다.

“원수.”

[원수?]

“그래. 오베른, 네가 힘 좀 써줘야겠다. 이 무덤, 무너트릴 수 있지?”

[이곳을?]

천휘의 물음에 오베른이 살짝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 이 안에 나에게 있어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녀석이 있다. 어차피 이 무덤에 볼일은 끝났으니, 녀석을 없앨 수 있다면 이 정도 무덤이 사라져도 하등 상관이 없어.”

[흐음, 할 수야 있지만, 괜찮겠나?]

“물론!”

마음속으로는 녀석과 일대일 대결을 펼쳐 콧대를 꺾어놓고 싶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직 자신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 탓이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죽여주마!’

[흐읍!]

천휘의 지시에 오베른이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힘 조절을 하지 않는지 그의 주변으로 마나가 격동해 천휘는 호흡조차 곤란한 상황이었다.

“냥이, 들어가!”

천휘는 냥이를 빙옥으로 돌려보내고 그 자신도 오베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진짜 엄청난 마나다!”

오베른의 전신에 충만한 마나가 흡사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만큼 마나가 응집되어 오베른의 전신을 부풀어 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레만! 레만!”

“헉! 그랜저?”

무덤 안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천휘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 바로 그랜저였다. 아무래도 무덤 밖에서 연락이 닿질 않자 의구심에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오베른!”

그랜저가 행여나 무덤 밖으로 나올까 노심초사하며 천휘는 오베른의 이름을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무덤 밖으로 그랜저의 얼굴이 살짝 내비치고 있는 시점이었다.

[드래곤 크레이터!]

그런 천휘의 조급함을 알았음인가.

오베른의 거대한 클레이모어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른 스킬이었지만, 클레이모어에 담긴 거력만큼은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레… 헉! 무- 무슨!”

막 무덤 밖으로 얼굴을 내밀던 그랜저는 무덤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클레이모어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앞으로 뒹굴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무덤을 넘어 제황의 계곡까지 그 여파가 전달되는 오베른의 일격에 몸을 내빼던 그랜저는 힘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경천동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대단한 스킬이었다.

“…….”

오베른이 보여 준 엄청난 모습에 천휘는 그랜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듀라한을 쓸어버린 드래곤 스크류가 승천하는 드래곤을 형상화했다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드래곤 크레이터는 흡사 드래곤의 브레스를 연상시킬 만큼 대단한 스킬이었다.

“크허어억!”

“응?”

그렇게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연출해낸 엄청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천휘는 한쪽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살아 있는 것이냐, 그랜저.’

천휘가 고개를 돌린 방향에는 그랜저가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더불어 녀석의 다리는 조금 전 충격의 영향에 휩쓸린 듯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저 정도의 부상이라니……. 가만히 놔둬도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겠네.’

천휘는 그랜저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봤다. 몸이 버텨 낼 수 없는 충격에 다리가 짓이겨지며, 생명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상태.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녀석은 필시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크허어억!”

그랜저가 다시 한 번 피를 토해냈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를 토해내며 얼굴이 눈에 띄게 해쓱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클레이모어를 등 뒤에 멘 오베른이 천휘에게로 다가왔다.

[녀석인가?]

오베른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천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처치할까?]

오베른이 재차 물었지만, 천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그랜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가라.”

[…그러지.]

짤막한 말이었지만, 그 뜻을 모를 오베른이 아니었다. 이윽고 오베른이 빙옥 안으로 사라졌다.

저벅저벅.

오베른이 사라지고 천휘는 천천히 그랜저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죽을 것만 같은 얼굴로 피를 간헐적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뭐 하는 작자지?”

그랜저의 물음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현재 천휘는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는 상태. 녀석은 자신이 영완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려고 해서 말이야. 난 누가 내 물건에 손대는 거 질색이거든.”

그랜저의 물음에 천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네 물건이라……. 역시 누가 먼저 다녀갔었나? 입구의 결계가 해제되었을 때 어느 정도 눈치 채긴 했지만, 알고 나니 조금 씁쓸하군.”

‘미친. 이 자식 게임상이라고 완전히 말 어른스럽게 하잖아? 이게 『오벨리스크』에서 녀석이 살아가는 방법인가?’

본래 현실에서의 그랜저, 즉 시영은 이렇게 분노를 자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투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경망스러운 부분이 있어 동료 교사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저토록 차분하게 말을 내뱉다니. 천휘는 녀석의 가식이 하늘을 찌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소울 스타 그랜저다. 내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보아하니 대단한 소환사 같은데, 나와 함께 『오벨리스크』 제패를 꿈꾸는 것이 어떤가. 소환사라면 소환을 위한 시약을 사는 것만 해도 엄청난 부담일 터. 내가 그대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지.”

“…….”

그랜저의 어이없는 회유에 천휘는 기가 막힌 듯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주변에 있는 동료들도 모두 이런 식으로 녀석과 함께하는 것이 분명했다.

‘돈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자식.’

녀석은 늘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녀석은 일진 녀석들을 돈으로 구워삶아 함께 다녔으며, 학교의 자칭 타칭 퀸카들도 늘 대동하고 다녔었다.

대학 시절에는 그 정도가 더했다.

대학 입학을 위해 교부금을 낸 것은 예삿일이고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교수들을 돈으로 매수해 졸업 학점을 이수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대학에서 예쁘고 늘씬한 미녀들만 보면 어떻게든 돈으로 환심을 사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녔다.

‘으드득, 이런 녀석이 감히 희영 씨를!’

천휘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듯 녀석을 보며 이를 갈았다.

“더 지껄여 봐.”

“뭐라고? 당신 방금 뭐라 했지?”

천휘의 살기 가득한 말에 그랜저가 다소 당황한 듯 반문했다.

“더 지껄여 보라고, 새꺄.”

“언제 봤다고 욕지거리지? 내가 지금 이 꼴이라고 나를 우습게보는 건가?”

생명력이 꺼져 가는 와중에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듯 그랜저가 짐짓 위엄을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천휘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품은 채로 대답했다.

“그래.”

“이익!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큭큭, 으하하하!”

조금 전 냥이의 이빨에 의해 허리가 끊어진 전사 사내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말을 지껄이는 그랜저를 보며 천휘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박장대소를 하는지 화를 내던 그랜저마저 민망할 정도였다.

“실성했나?”

그랜저가 천휘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러자 웃음을 터트리던 천휘가 갑자기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무- 무슨!”

천휘의 돌발 행동에 그랜저가 황당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그에 천휘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히죽였다.

“잘 가라. 대지의 울음!”

콰앙!

빠지직!

하늘 위로 뛰어오른 천휘는 곧바로 그랜저의 머리통을 밟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과다출혈로 인해 마지막 불씨만을 이어가던 그랜저는 목숨을 잃었다.

“오늘은 우연찮게 널 이겼다만, 이후에는 진실된 내 힘으로 널 상대해주마. 네 녀석이 어떤 일을 벌이려 하든 네 놈의 야망은 내가 부순다. 더불어! 네 녀석에게서 희영 씨도 구해내겠다!”

부르르!

분노에 찬 천휘의 전신이 떨렸다.

그랜저를 죽여 통쾌할 만도 하건만 천휘는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운 좋게 녀석을 처치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불쾌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이윽고 천휘는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곧바로 『오벨리스크』에서 로그아웃했다.

더 이상 게임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다음 날.

영완은 전날의 피로로 인해 평소보다 늦게 학교로 출근했다. 지난날의 기억 때문인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등굣길 내내 잔뜩 찌푸린 얼굴로 걸어갔다.

드르륵.

영완이 교무실 안으로 들어서 곧장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동료 교사들이 반갑게 인사라도 해주련만, 오늘은 아무도 영완에게 인사를 해주지 않았다.

쾅!

“으아아악!”

영완이 자리에 앉자마자 별안간 굉음과 함께 누군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다름 아닌 시영이었다.

“이 선생, 왜 저래요?”

“낸들 아나. 아침부터 저 지랄이야. 아무튼 상종하지 말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옆자리에 앉은 김민창 선생의 말에 영완은 의아한 표정으로 시영을 쳐다봤다.

“아!”

휘익.

시영을 쳐다보던 영완은 그제야 녀석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겠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주변의 교사들이 그를 쳐다봤지만, 영완은 개의치 않았다.

‘녀석. 어제 일 때문에 저러는 건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녀석이다. 아마도 녀석은 『오벨리스크』를 시작하고 나서 어제 처음 죽었을 수도 있다. 돌아가는 분위기상 녀석은 확실히 어제 처음 죽은 듯했다.

게다가 자신으로 인해 오랜 시간 공들여 찾아온 제황의 계곡에서 목숨까지 잃었다. 그의 터전은 펜하르트 왕국이니, 분명히 다시 부활하는 곳도 펜하르트 왕국일 터. 그렇게 되면 제황의 계곡은 포기할 가능성이 컸다.

이미 영완 자신이 그 무덤의 주인을 자처한 상태이기에 보물이 남아 있을 것이라 확신도 못할 테고, 더욱이 다시 한 번 국경을 넘어 테오른 왕국으로 오는 것도 녹록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벌떡!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완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영이 저토록 분해하는 모습을 보니 어젯밤의 후회가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영완은 자신의 손으로 시영을 죽인 것이 아닌 어부지리 격으로 녀석을 죽인 탓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영의 불행은 곧 영완 자신의 행복.

하지만 영완은 막 시영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희영의 등장으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아침부터 왜 그래?”

멀리서 시영을 지켜보고 있던 희영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교무실 내의 모든 교사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됐다.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래. 그러니까 말 걸지 말아주라.”

연인인 희영의 물음에도 시영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에 희영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설 법도 하건만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화가 나면 밖에서 화를 풀어. 이렇게 교무실에서 악 지르지 말고. 다들 시영 씨 때문에 업무를 보질 못하잖아.”

“이런 썅!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지금 내 심정이 어떤 줄 알아? 무려 두 달을 획책했던 프로젝트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게다가 난 처음으로 목숨을 잃었어. 네가 그 마음을 알아? 내 분신이 죽었다고!”

희영의 말에 시영은 언성을 높이며 주변에 동료 교사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욕설까지 퍼부었다. 순간 희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결국은 또 게임 얘기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래서 어쩔 건데!”

희영과 시영의 대립은 극에 치닫는 듯했다. 주변의 동료 교사들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선뜻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

“그만 하시죠, 두 분 선생님. 좀 있으면 수업도 시작하는데, 교무실에서 굳이 싸우셔야 하겠습니까?”

다른 교사들을 대신해 영완이 나섰다. 실은 시영에게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아, 죄송해요. 폐를 끼쳐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역시나 희영은 예의 바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교사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그에 반해 시영은 잔뜩 짜증이 인다는 표정으로 영완을 바라보며 언성을 더 높였다.

“네가 뭐라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건데!”

“말조심하십시오. 여긴 신성한 학교입니다. 제가 이 선생님께 그런 쌍스러운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소립니다. 이 선생님께서 아침 댓바람부터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치시니, 교무실 분위기가 아침부터 이렇게 축 가라앉은 것 아닙니까. 수능이 코앞입니다. 자중해주세요.”

“…으드득.”

영완의 말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시영도 눈치가 있기에 동료 교사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썩 곱지 많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그의 말대로 이곳은 자신에게 있어 직장이었다. 아버지 후광으로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이 직장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시영은 영완에게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하고 이만 갈면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씩씩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영완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결국 교무실을 나섰다.

“으하하하! 이거 대박인데?”

영완은 교무실을 나와 학교 뒤뜰로 걸어가면서 결국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시영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건 말건 영완은 계속해서 대소를 터트릴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아, 하나구나. 그냥 좀 좋은 일이 있어서.”

불현듯 나타난 하나가 말을 걸어오자, 영완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본심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흐음, 장 선생님과 관련된 일인가 봐요?”

“아닌데? 곧 수업 시작할 테니 어서 들어가 봐라. 수능 얼마 안 남았으니 마무리 잘하고.”

하나의 물음에 영완은 대답을 회피하며 천편일률적인 격려를 해주고는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사범대 갈 거예요!”

“사범대?”

“네! 사범대! 그것도 생물교육학과로 갈 거예요.”

뭔가 의미심장한 하나의 말에 영완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나는 학교에서도 상위권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는 내심 의대나 한의대를 갈 학생으로 점찍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너 의대나 한의대 가려는 거 아니었어?”

“손에 피 묻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요.”

“한의대는?”

“아, 모르시나 봐요? 저 바늘이나 그 외의 날카로운 물건의 끝을 바라보지 못해요. 그래서 한의사는 애초에 글렀다고요.”

‘…그거 병 아냐?’

하나의 말에 영완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냥 왜 너 같은 애가 사범대를 가려 하나 싶어서.”

“다 이유가 있다고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래. 수업 시간에 보자.”

할 말을 다 마친 듯 하나는 이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영완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또다시 대소를 터트리며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그렇게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날 이후, 영완에게 기이한 별명이 하나 붙었다.

그날 하루 종일 실없이 웃음을 흘린 탓에 붙여진 바로 그 별명, 개폭 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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