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도굴의 시작
다음 날, 영완은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로 향했다. 전날 미온에게 시달린 탓에 잠자리에 늦게 들어야 했지만, 출근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아침 일찍 깬 것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영완은 학교를 가는 도중에 몇몇 학생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교무실로 향했다. 분명히 등교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교무실은 한산하기만 했다.
“오늘 무슨 일 있나요?”
“아, 서 선생, 일찍 왔네? 다음 주가 수능이라, 담임 맡지 않은 선생들은 등교 시간이 9시로 늦춰졌어. 어제 퇴근 시간에 교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아, 그랬나요?”
3학년 2반 문 선생의 설명에 영완은 그제야 납득하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수능이라……. 수능 끝나면 일이 좀 줄겠지? 흐음,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 방학일 테고. 좋아! 이번 겨울 방학엔 연수도 없으니, 제대로 『오벨리스크』에 빠져 살아보는 거야!’
영완이 그렇게 벌써부터 방학 계획을 세우고 있을 무렵, 교무실 안으로 한 쌍의 남녀가 들어섰다. 다름 아닌 시영과 희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서 선생님.”
“아, 안녕하세요, 장 선생님.”
“쳇.”
희영이 먼저 영완에게 반갑게 인사하자, 영완도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시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오늘 소개팅 있는 거, 잊지 않으셨죠?”
‘아, 맞다.’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희영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영완은 깜빡했는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잊지 않았어요.”
“에이, 딱 보니 잊으셨나 본데요? 아무튼 오늘 오후 두 시에 홍대 미카야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그런 줄 아세요. 미카야 아시죠?”
“네, 알아요.”
‘어찌 잊겠어. 당신과 처음으로 함께 간 카페인걸.’
“그럼 그때 봐요. 늦으시면 안 돼요!”
“그럴게요.”
희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영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왜 영완과 이야기를 나누느냐는 트집이었다. 하지만 희영은 귀찮은지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는 할 일이 있다며 비키라고 했다.
그에 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완을 뚫어져라 쏘아봤다. 하지만 영완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컴퓨터 화면에 집중했다.
‘큭큭, 열 좀 받을 거다.’
시영을 놀리는 즐거움은 영완에게 있어 지루한 학교생활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날 오후.
영완은 별 기대를 하지 않고 홍대로 향했다.
사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희영이 밉기도 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자신을 신경 써준 것이니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앗, 여기예요, 서 선생님.”
“아.”
카페에는 벌써 도착한 듯 희영이 반갑게 영완을 맞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여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응? 어디에서 봤지?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낯이 익는 거지?’
영완은 희영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향하면서도 그녀의 옆에 있는 여인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로 기억을 되짚어 봐도 분명히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뭐 마실 거라도 드실래요?”
“냉녹차 먹을게요.”
“네. 그럼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일단 두 분이서 인사라도 나누세요.”
“그럴게요.”
희영이 눈치 빠르게 잠시 자리를 비워주자, 영완은 용기를 내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서영완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미연이라고 해요. 나이가 스물여덟이시라고요?”
“아, 네. 미연 씨는 장 선생님과 친구시니, 저와 동갑이시겠네요?”
“맞아. 그러니까 우리 말 놓자. 불편하잖아, 이런 거. 안 그래?”
“아, 저는…….”
무척이나 당돌한 여자였다.
그저 인사만 나눴을 뿐인데 곧바로 말을 놓자고 하다니.
아무래도 희영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듯했다.
“서 선생님, 여기 냉녹차요.”
“아, 감사합니다.”
“이야기들 좀 나눴어?”
“아니. 네가 너무 빨리 와서.”
희영의 물음이 민망할 정도로 미연이 똑 부러지게 말했다. 조금은 민망할 법도 하건만 희영은 그런 일에 익숙한지 살짝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랬나? 후훗, 그럼 나 먼저 일어날까?”
“아- 아니에요. 그냥 좀 더 있으…….”
“희영아, 잘 가라.”
“그래. 끝나고 연락 줘.”
“알았어.”
“아…….”
영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서고야 말았다. 그에 영완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우리 뭐 할까?”
“그게 잘… 소개팅은 처음이라…….”
“뭐야, 귀엽게 그런 말투는. 걱정 마. 아직 밥 안 먹었지? 가자. 점심이나 먹게.”
소심한 영완과는 달리 희영의 친구인 미연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실행하는 호탕한 여자였다.
“그런데 있지. 너 혹시 어디에서 나 본 적 없어? 이상하게 네 눈매를 어디에서 본 것 같단 말이야.”
“잘 모르겠는데요.”
“야! 친구 먹었으면서 웬 존대야. 그냥 반말 해. 그건 그렇고 진짜 어디에서 봤는데……. 어디였지?”
카페를 나서 주차장으로 향하던 미연은 급작스럽게 몸을 돌려 영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당돌하다 못해 버릇없는 행동이었지만, 영완은 그저 꾹 참고 있었다.
“모르겠네. 흐음, 뭐, 언젠가 생각나겠지. 차는 가져왔어?”
“차 없는데요.”
“하긴 교사 월급은 박봉이니까. 그럼 내 차 타. 내가 잘 아는 일식집이 있으니까 그리 가게.”
왠지 모르게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영완은 그러려니 하고 주차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주차장에서 붉은색 포르줴 한 대가 밖으로 나왔다.
“야, 타.”
“…….”
미연의 말에 영완은 얼굴을 굳히며 그녀를 바라봤다.
외제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영완이 봐도 억대를 호가할 것 같은 오픈카. 게다가 포르줴라니. 아무래도 그녀는 어느 재력가의 딸인 모양이었다.
“안 탈 거야?”
“아, 미안. 그냥 너 혼자 밥 먹어라.”
급작스럽게 말투가 바뀐 영완을 보며 미연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냥 너랑 나랑 노는 물이 다른 거 같다. 난 연못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일개 미꾸라지에 불과하거든. 그러니까 바다에서 놀고 있는 너와 놀고 싶지 않다는 얘기야. 아무튼 그런 줄 알고 나 먼저 간다.”
영완은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는 곧바로 뒤돌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녀에게 정말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그의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빨랐다.
“흐음, 왠지 저 말투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였지?”
영완이 사라지건 말건 미연은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첫 만남이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미연은 차 안에서 오랫동안 상념에 빠져 들었다.
영완은 그날 밤, 기분도 꿀꿀한 찰나에 정호와 준우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간만에 달려 보려는 심산에서였다.
띵동.
“자식들, 일찍도 왔네. 나간다.”
집 안에서 편하게 TV를 시청하던 영완은 벨이 울리자마자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왔냐?”
“자식. 네가 부르는데 안 올 수야 있나. 안 그러냐?”
“당연하지.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잖냐.”
정호의 말에 영완은 웃음을 짓고는 친구들을 안으로 들였다.
“들어와라. 안주거리는 사왔지?”
“당연하지. 네가 좋아하는 닭똥집에 꼼장어 사왔다.”
“캬아, 죽이는구나. 역시 소주에는 똥집이랑 꼼장어가 최고지!”
준우가 내미는 안주 봉지에 영완이 흥분한 듯 소리치며 자리에 앉았다. 이미 영완은 테이블을 세팅해놓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친구들도 대충 겉옷만 걸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제 겨우 해가 떨어지는 5시 무렵임에도 세 사람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영완이 미리 사놓은 소주 5병이 모두 바닥나고 말았다. 세 사람의 평균 주량이 한 병 반임을 감안할 때, 이미 주량의 한계를 넘어선 수치였다.
“큭큭, 오늘따라 술이 잘 들어가네? 나가서 몇 병 더 사올까?”
“그럴까?”
“좋지.”
술을 더 사오자는 영완의 말에 두 사람은 일치단결하여 곧바로 외투를 걸쳐 입었다.
“벌써 여덟 시냐?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냐?”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지, 뭐. 큭큭. 간만에 너무 즐거운데?”
“하긴, 우리가 학교 졸업하고 이렇게 모인 적도 거의 없었지. 바빠서 친구들끼리도 얼굴 보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 안 그러냐?”
갑자기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 같은 준우의 말에 영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뭔 일 있냐? 왜 갑자기 신세 한탄이야?”
“그냥. 대기업 입사했다고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더라. 이래저래 눈칫밥 신세에, 일은 죽어라고 많고. 그냥 사진작가나 할 걸 그랬나 보다.”
“자식, 복에 겨운 소리 좀 그만 해라. 집도 없이 매일 매일을 찬 길바닥에서 자는 노숙자가 수십만 명이 넘어가는 세상이다. 너 그런 소리 하다간 벌받아, 인마.”
정호의 핀잔에 준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럴지도. 하지만 사람이 꼭 물질적인 행복만 추구할 필요는 없잖아. 난 물질적인 행복보다 정신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그래서? 그래서 지금 대기업을 나오겠다는 거냐?”
준우의 말에 영완이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그럴 리야 있겠냐. 그랬다간 우리 부모님 기절하신다. 그냥 주말만이라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스트레스 좀 풀어볼라고.”
“어떻게? 또 사진 찍으러 다니게?”
“대학 때부터 내 유일한 낙이잖아. 지금은 『오벨리스크』도 하나의 낙이긴 하지만 말이야.”
준우의 말에 영완이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 너희들 내가 말한 대로 캐릭터 잘 키우고 있냐?”
“큭큭.”
“큭큭.”
“뭐냐, 그 능글맞은 웃음들은?”
“일단 소주 사가지고 집에 가서 말하자. 할 이야기가 좀 많아.”
정호의 의미심장한 말에 영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준우와 정호는 그저 킥킥대며 웃을 뿐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집에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을 추궁해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든 영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렇다니까! 준우랑 나랑 파티 플레이를 해서 벌써 200레벨을 넘어섰어. 게다가 우리 둘 다 히든 직업으로 전직했어.”
“뭔데?”
“난 세이지(Sage). 한마디로 현자지.”
“나는 다크 팔라딘(Dark Paladin). 우리말로 하면 타락한 성기사쯤 되겠다.”
“오오!”
두 친구의 말에 영완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 모습에 두 친구는 짐짓 거만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아직 놀라긴 일러.”
“또 뭐가 있는데?”
영완의 물음에 준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네가 천 제국에서 도굴을 해서 돈을 벌었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때 경매장에서 거의 대부분의 돈을 썼고 말이야.”
“그랬었지. 그런데 왜?”
“놀라지 마라. 우리가 하스렌 제국 당시의 황가 무덤을 발견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수십 개가 모여 있는 곳이야! 이름 하여 제황의 계곡!”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말하는 준우의 말에 영완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았다. 매우 흥분했다는 증거다.
“그게 정말이라면 진짜 대박인데? 하스렌 제국의 황제들이 묻힌 무덤이라면 그곳에 함께 매장된 금은보화는 가히 천문학적일 것이 틀림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는 영완을 보며 정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천 년 전, 아르니안 대륙을 지배했던 하스렌 제국의 황제들이 묻힌 땅이야. 그저 그런 가디언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지. 예전 내 경험을 미루어봤을 때, 적어도 레벨 300 이상의 가디언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을 거다.”
“레벨 300 이상?”
“어쩌면 그보다 더할 수도 있겠지.”
영완의 말에 준우와 정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저 무덤을 털 생각만 했지, 그곳에 얼마나 대단한 가디언들이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아! 맞다! 계곡 입구에 작은 무덤이 하나 있긴 했잖아?”
“아, 그랬었지? 하지만 그래봐야 그곳에 레벨 300 이상의 가디언이 있으면 소용없는 거잖아.”
“휴우, 찾아도 문제구나.”
준우와 정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영완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중 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는 거냐?”
“그래. 사실 그 계곡은 우리가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을 사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녀석들이 폭젠된 탓에 도망치다가 발견한 곳이거든.”
“처음 발견한 곳이 바로 그 무덤이었지. 물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어.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에게 거의 반나절 동안 쫓긴 탓에 기력이 극에 이르러 과로사했거든.”
준우의 말에 영완은 한동안 고심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흐음, 무덤 한 개만 따로 떨어져 있다……. 좋아! 그럼 그곳으로 가보자.”
“300레벨의 가디언은 어떻게 하고?”
“내가 누군지 잊었냐? 나 강시지존이야, 강시지존! 걱정 말고 내일 아침 열 시에 오베른 북문에서 보자.”
“알았다. 시간 맞춰서 접속할게.”
세 사람은 그렇게 약속을 하고는 이내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 전에 오늘은 마시고 죽는 거다!”
“당연한 소리!”
“제일 먼저 뻗는 놈이 내일 아침 해장국 쏘는 거다!”
“좋지!”
“콜!”
“다들 모였냐?”
“큭큭, 그래.”
“어서 움직이자, 몸이 근질거린다야.”
“그 전에 잠깐 우리 집 좀 들르자. 꼭 가져가야 할 게 있어.”
“뭔데?”
“강시.”
드디어 오늘로써 오베른을 시약 화합물에 넣은 지 보름이 된다. 아르니안 대륙에 최초로 천마강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기다.”
“에? 여기가 네 집이라고?”
“말도 안 돼! 대체 오베른에 이 정도의 저택을 사려면 얼마의 돈이 있어야 하는 거냐?”
로빈과 카멜은 저택의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며 시샘하는 표정으로 천휘를 바라봤다.
“잔소리 말고 들어와.”
“쳇.”
“재수 없는 자식.”
천휘의 말에 로빈과 카멜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으아아악!]
“헉! 뭐야,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냐?”
“나도 들었다. 분명히 비명 소리였는데. 저 뒤쪽 같은데?”
“거의 끝나가나 보다. 따라와.”
오베른의 천마강시화가 막바지에 이른 듯 녀석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구슬픈지 로빈과 카멜은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아, 그래. 이쪽은 내 친구들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해.”
“알겠습니다.”
“이쪽이다. 두리번거리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천휘의 저택 안은 처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들 만큼 규모가 크고, 화려한 예술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본 건물 1층 로비에는 마법사로 보이는 인물의 석상이 놓여져 있었고, 복도 벽에는 이름 모를 화가들의 뛰어난 그림들이 줄지어서 걸려 있었다.
“야, 어떻게 하면 이런 저택에서 살 수 있는 거냐? 아니, 그보다 이런 저택은 얼마나 하는 거냐?”
“뭐가 그렇게 궁금해. 여기 방 많으니까 너희들도 방 하나씩 잡고 거점으로 삼아라.”
“하여간 재수 없는 새끼라니까.”
“저 자식은 한마디로 말해서 야누스야. 현실과 게임의 얼굴이 완벽하게 다른. 같이 가, 야누스!”
친구들의 농담에도 천휘는 화도 내지 않고 곧바로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 이르자 오베른의 비명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야, 저 소리가 대체 뭐냐니까.”
“천마강시.”
“응? 천마강시? 근데 왜 천마강시가 비명을 질러. 원래 강시는 시체로 만드는 것 아니었어? 시체가 고통도 느끼나?”
“저건 시체에 가까운 생물이니까. 아무튼 좀만 더 기다리자. 저 비명이 잠잠해지면 들어가게.”
갑자기 천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로빈과 카멜도 덩달아 입을 다물고 침묵을 고수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드디어 끝인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비명 소리가 후원을 가득 메웠다. 어찌나 소리가 끔찍한지 로빈과 카멜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귀를 막아야 할 정도였다. 천휘 역시 고막이 뒤흔들리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보다 오베른의 안위가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들어가 보자.”
“그- 그래.”
“그냥 너 혼자 들어가면 안 되냐?”
“따라와.”
“…빌어먹을.”
천휘는 두 친구를 이끌고 조심스럽게 창고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러자 좁은 틈으로 암녹색의 연기가 흘러나오며 세 사람을 덮쳤다.
“으아악!”
“이- 이게 뭐야.”
“호들갑 떨지 마. 그냥 연기일 뿐이니까.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아.”
로빈과 카멜을 안심시킨 천휘는 문을 모두 열어젖히고는 연기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오베른!”
연기가 모두 걷혔음에도 창고 안에는 오베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천휘는 얼른 오베른이 담겨져 있던 철제 욕조 쪽으로 걸어갔다.
“오베…….”
[이 빌어먹을 자식아!]
“커헉!”
“저- 저게 뭐야!”
천휘가 오베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자, 철제 욕조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괴인영이 재빨리 천휘의 목을 잡고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감히 날 골탕 먹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냐?]
오베른은 천휘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이렇듯 끔찍한 고통을 줬다고 생각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만 있을 로빈과 카멜이 아니었다.
“다크 슬래쉬!”
“강화 파이어볼!”
천휘가 사준 유니크 양손검 데몬 슬레이어로 카멜이 긴급히 스킬을 전개했고, 로빈 역시 오행신공을 통해 강화한 파이어볼을 오베른에게로 날려 보냈다.
콰앙! 콰앙!
[날파리들이 많군.]
“이- 이럴 수가!”
“내 강화 파이어볼을 맞고도 멀쩡하다니!”
급하게 전개하긴 했지만, 카멜이 전개한 스킬이나 로빈이 펼친 마법은 결코 위력이 떨어지는 공격이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오우거였다면 대번에 나가떨어졌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인 것이다.
그럼에도 오베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봤다.
“쿨럭쿨럭! 진짜 천마강기가 되다니, 쿨럭쿨럭. 대단한데!”
[이 빌어먹을 종자!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 아느냐! 실로 죽고 싶었단 말이다!]
천휘의 말에 오베른은 더욱 대단한 살기를 뿜어내며, 바닥에 엎드려 기침을 하고 있던 천휘를 다시금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끄윽, 하지만 덕분에 넌 이 대륙 최강의 일인이 되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네가 지닌 힘을?”
[뭣이?]
오베른에게 멱살이 잡힌 탓에 천휘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그 정도도 듣지 못할 오베른이 아니었다. 결국 오베른은 천휘를 땅에 내팽개치고는 자신의 힘을 확인했다.
[…확실히 마나가 전신에 충만하긴 하지만 잘 모르겠는데?]
“큭큭, 아직 그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걸 거다. 카멜! 네가 익힌 최강의 기술로 이 녀석을 공격해봐라.”
“말도 안 돼! 그러면 저 사람은…….”
“상관없으니 공격해봐!”
여전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천휘였지만, 카멜은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어 당사자인 오베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끄덕끄덕.
자신이 얼마나 대단해진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오베른은, 천휘를 의도를 눈치 채고 카멜에게 긍정의 뜻을 표시했다.
“전력으로 펼쳐라!”
“이런, 젠장! 죽어도 난 모른다고! 하압!”
천휘의 나지막한 말에 결국 카멜은 전신의 충만한 마나를 데몬 슬레이어로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검이 잿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데몬 슬레이어 주변으로 잿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 진짜 책임 안 진다!”
“알았으니까 한 방 크게 날려!”
“빌어먹을! 다크 캐논!”
콰아앙!
카멜의 데몬 슬레이어를 벗어난 잿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마치 레이저와 같은 형태로 뻗어나가 오베른의 몸을 강타했다.
조금 전, 다크 슬래쉬에 직격됐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폭발음에 모두가 긴장한 채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엄청난 대폭발로 인해 창고 안에 먼지가 자욱하게 솟아오른 탓에 오베른의 상태를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었다.
[…이것이 진정 내 몸이란 말인가!]
“마- 말도 안 돼! 내 다크 캐논은 250레벨의 사이클롭스도 한 방에 무너트리는 스킬인데!”
“대- 대단해!”
이윽고 먼지가 어느 정도 걷히고 오베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로빈과 카멜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특히 카멜의 얼굴은 경악을 넘어 경외심을 가진 채 오베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봤지? 지금 네가 어느 정도로 강해진 것인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현재의 네가 지닌 힘을 조금만 더 갈고닦으면 충분히 이 대륙 최강으로 군림하게 될 거다. 이래도 날 죽일 셈이냐?”
천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오베른을 보며 말했다.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오베른이 더 이상 자신에게 해코지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고맙긴 한데, 그래도 너에 대한 원한은 풀 수가 없다. 일단 맞자.]
“뭐- 뭐라고? 으아악!”
보름 동안에 쌓이고 쌓인 오베른의 원한이 고작 그 정도만으로 풀릴 리가 없었다. 보름 동안 매시간 매분을 천휘를 잘근잘근 씹어 먹을 생각만 했던 오베른이다.
결국 그날 천휘는 오베른에게 생명력이 바닥이 될 때까지 얻어맞고는 그 후유증으로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제황의 계곡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이 길이 확실한 거냐?”
“흐음, 확실한데. 우리가 분명히 저 바위를 거쳐서 그 계곡의 입구로 갔었거든. 카이젠 사이클롭스가 저기에 올라서 작은 바위를 집어던져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데……. 안 그러냐, 카멜아?”
“네 말이 맞다. 저 바위는 내 기억 속에도 있는 거야. 그런데 왜 안 보이는 거지? 워낙 거대한 계곡이라 멀리서도 보일 줄 알았는데.”
“흐음.”
두 친구의 말에 천휘는 문득 천 제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천 제국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다.
“혹시 이 근처에 환상 마법진이 펼쳐져 있는 거 아니냐?”
“환상 마법진?”
“그래. 천 제국에도 기문 둔갑이라고 해서 지형을 왜곡시키는 방법이 있거든. 아무래도 이곳에도 그런 비슷한 게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흐음, 그럴 수도 있겠는데.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환상 마법이라는 건 확실히 있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로빈의 말에 천휘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근방에는 환상 마법진이 펼쳐져 있다.
“환상 마법진이 펼쳐져 있다면 우리만으로는 힘들겠는데? 적어도 모험가 직업을 가진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이대로는 계속 이 근방을 돌기만 할 뿐이다.”
“모험가라……. 나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흐음.”
로빈과 천휘가 그렇게 고심하고 있을 때, 카멜은 멀뚱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식 뭐 하는 거냐?”
“저건 친구에게 귓말하는 자세인데?”
“그래?”
아무래도 친구 중 누군가가 모험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듯 카멜이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귓말을 하고 있었다.
“됐다! 내가 아는 모험가 한 명 불렀어. 일단 산 밑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리로 가자.”
“호오, 저 자식도 쓸모가 있네?”
“그러게 말이다. 내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을 다 해본다야.”
“시끄러! 아무튼 얼른 내려가자.”
카멜의 당당한 말에 천휘와 로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야!”
“앗! 하린 누님!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왔어.”
산 아래로 내려오자 과연 유저 한 명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험가라는 그 유저는 언뜻 보기에도 사십은 넘어 보이는, 말 그대로 아줌마였다.
“누님?”
“저 여자가 어딜 봐서 누님이냐?”
“큭큭, 아무튼 가보자.”
카멜과 아줌마 유저가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대화하는 동안 천휘와 로빈도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 왔냐? 누님, 이쪽이 제가 말한 친구들이에요.”
“어머, 그래? 반가워요. 하린이라고 해요.”
“아, 네. 천휘라고 합니다.”
“전 로빈입니다.”
“호호, 카멜 동생 친구들이라 그런지 다들 몸이 좋네? 역시 젊음이 좋은 거야. 안 그래, 동생?”
“그럼요! 하지만 누님, 그거 아세요? 누님은 저희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는 거.”
“호호, 말이라도 고마워, 동생.”
“…….”
“…….”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말을 어찌나 유들유들 잘도 하는지 마치 카멜의 혀에 기름이라도 발라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 미안해요. 카멜 동생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말이 많았네. 일단 말한 곳으로 가봐요.”
카멜과 하린을 필두로 한 일행은 이내 예의 그 바위 앞에 도착했다. 그곳까지 오는 동안 카이젠 사이클롭스들이 공격해왔지만, 천휘와 로빈이 나서 모두 해결해 일행은 무사히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야, 동생?”
“네, 누님. 아무래도 이 앞으로 환상 마법진이나 그 비슷한 뭔가가 깔려 있는 것 같아요. 한번 봐주시겠어요?”
“그럼! 누구 부탁인데. 잠깐만 기다려 봐.”
카멜의 부탁에 하린은 자신감 있게 앞으로 나섰다.
“실력은 있는 거냐?”
“그럼. 저래 봬도 십대 모험가 중 한 명이야.”
“십대 모험가? 그런 것도 있냐?”
“당연하지. 모험가가 미개척 던전 탐험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데. 어쩌다 같이 던전 탐험을 하면서 알게 된 누님인데, 남편이 잘나가는 펀드 매니저라서 하루 종일 『오벨리스크』만 하는 폐인이야. 레벨도 250쯤 되고 모험가 스킬도 대부분 고급 단계에 이른 베테랑 모험가지.”
“호오.”
카멜의 설명에 천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하린을 바라봤다. 확실히 조금 전 카멜과 농도 짙은 농담을 주고받던 모습과는 어딘가 다른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알았다!”
“누님, 뭐 좀 알아내셨어요?”
“응! 환상 마법진은 아니고 결계야.”
“결계요?”
“어. 종종 미개척 던전에서 발견되는 유형인데, 이 정도면 내가 풀 수도 있을 거야. 잠시만 기다려 봐.”
하린은 카멜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진짜 능력 있는 모험가인가 본데? 겉모습과 달리.”
“겉모습이 뭐가 어때서? 하린 누님 정도면 곱게 늙으신 거지. 그리고 고작해야 마흔둘이신데, 나이 먹은 것도 아니지.”
“…….”
“…너도 참 명물이다.”
카멜을 보며 로빈과 천휘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마흔둘의, 그것도 얼굴에 주름이 한가득인 아줌마를 보고 곱게 늙었다니.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가는 두 사람이었다.
파아앗!
“응? 방금 마나가 요동치지 않았냐?”
“맞아. 나도 느꼈다.”
“동생! 이제 됐어! 들어와도 돼!”
멀리서 들려오는 하린의 목소리에 세 사람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휴우, 제법 힘드네. 생각보다 뛰어난 결계였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결계였는데, 다행히 운 좋게 성공했네.”
“감사해요, 누님.”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보다 가고자 하는 던전이 저기야?”
“아, 맞아요!”
하린이 가리키는 방향에, 예전에 두 사람이 발견했던 제황의 계곡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냐?”
“그래! 저기가 확실하다!”
“흐음, 확실히 뭔가 있을 법한 곳이네.”
천휘의 물음에 로빈이 흥분한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누님, 정말 수고하셨어요.”
“뭘.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난 거야?”
“천휘야, 어떡할래?”
아무래도 하린은 천휘나 로빈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하린도 그걸 알고 있기에 카멜에게 그렇게 물어본 것이다.
“저… 시간이 되신다면 좀 더 도와주시겠습니까? 사례는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만으로는 좀 불안해서요.”
“아, 그럴까요? 저야 좋죠. 이렇게 미남들이랑 함께 파티를 하는데.”
“누님께서는 그냥 말 놓으세요. 제가 한참 동생이니.”
“그러는 게 낫겠지? 사실 나도 은근히 불편했거든.”
아르니안 대륙의 던전은 천 제국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도굴에서만큼은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던 천휘였지만, 아르니안 대륙에서의 도굴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럼 출발할까요?”
“그래. 내가 앞장설게. 아 참! 내가 은근히 무서움 많이 타거든? 그러니까 동생들이 날 잘 보호해줘야 돼. 알았지?”
“이를 말이겠어요?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누님은 제가 지킬 테니까요.”
“호호, 역시 카멜 동생은 듬직하다니까.”
“하하하! 제가 한 듬직 하죠!”
“…….”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아무래도…….”
두 사람의 닭살 돋는 행각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에 천휘와 로빈 두 사람의 어깨는 한없이 무거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