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도살녀 미온
산악 국가인 테오른 왕국 유일의 습지인 헤론 습지의 유래는 1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스렌 제국이 아르니안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1천 년 전, 당시의 인간이 지닌 힘은 대륙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대단했고 인간들은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대륙에 존재하는 최강의 절대자들, 드래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인간들은 카이젠 산맥에 서식하는 수많은 드래곤들을 처치했고, 그중에는 에이션트 블루 드래곤 헤론도 있었다.
헤론은 당시 현재의 헤론 습지 부근에서 하스렌 제국의 드래곤 슬레이어 집단과 당당히 맞서 싸웠고, 드래곤 최강의 무기인 브레스를 뿜어내며 절대자의 명성에 걸맞은 전투를 펼쳤다.
그 결과는 전해지지 않지만, 헤론의 브레스로 인해 그 지역에 습지가 형성되었고 현재의 헤론 습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냥이, 스톱!”
헤론 습지의 입구에 도착한 천휘는 곧바로 냥이를 멈춰 세웠다.
“습지라고 하더니, 정말 눅눅하네. 일단 들어가 보실까?”
[띠링! 필드 ‘헤론 습지’에 입장하셨습니다.]
[띠링! 지형의 특성으로 화염 마법, 화염 계열 스킬의 위력 30% 반감됩니다.]
습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알림음이 들려왔지만, 천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발을 재촉했다. 자신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경고였기 때문이다.
“헤론 습지에는 헤론 리자드맨들과 헤론 크로커다일이 있다고 했었지? 도마뱀과 악어인가? 아무래도 급작스럽게 나타날 테니,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미친 소 녀석도 빼놔야겠네. 미친 소, 컴온!”
음메에에!
냥이와 더불어 미친 소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천휘는 흐뭇한 표정으로 습지를 마음껏 활보했다.
헤론 리자드맨들의 추정 레벨은 200대 초반.
기껏해야 B급 몬스터에 불과한 녀석들이 미친 소의 괴력과 냥이의 민첩함을 당해낼 수는 없을 터였다.
크르륵.
“왔다. 애걔? 기껏해야 세 마리? 쳇, 너희 둘은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어. 이 정도야 식후 간식거리지.”
천휘는 파이크를 들고 나타난 헤론 리자드맨 3마리를 향해 주먹을 우두둑거리며 가볍게 몸이라도 풀 겸 다가갔다.
크르륵.
“걱정 마, 이 자식들아. 내가 예뻐해줄게, 이리 온.”
천휘가 다가가자, 헤론 리자드맨 3마리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울어댔다. 곧 그 소리가 습지로 퍼져 나가더니, 이윽고 녀석들 뒤쪽으로 엄청난 숫자의 헤론 리자드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개떼네.”
물경 수백 마리에 이르는 헤론 리자드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습지 전반에 걸쳐 펼쳐져 있는 안개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중에는 시미터를 들고 있는 헤론 리자드맨 전사들과 헤론 리자드맨 궁수까지 있어 더욱 위력적인 모습이었다.
“혼자서 해결하려 했더니, 안 되겠네. 미친 소! 돌진! 마음껏 휘저어버려! 냥이! 네 녀석은 계속 대기!”
수도 오베른 근방에서는 가장 강한 헤론 리자드맨들이라고는 해도 철골강시로 거듭난 미친 소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메에에!
천휘의 명령을 받은 미친 소가 흥분한 듯 괴성을 내지르고는 헤론 리자드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그럼 슬슬 나도 움직여 볼까?”
미친 소가 헤론 리자드맨들을 혼란에 빠트리자, 이윽고 천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티 타임 시작이다! 대지의 울음!”
천휘가 하늘로 떠올라 땅으로 내려서면서 스킬을 전개하자, 주변에 있던 리자드맨들이 일순간 스턴 상태에 빠졌다.
“연타!”
천휘는 곧바로 이번에 배운 연타를 전개했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초고속 연타.
레전드 아이템인 발록의 주먹과 발록의 심장으로 인해 무려 450이나 추가된 민첩 스탯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손맛 죽이네!”
자신의 연타에 리자드맨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가자, 신이 난 천휘는 계속해서 연타를 전개했다.
고작해야 한 번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마나 50 정도만 다는 스킬이니,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자랑하는 천휘로서는 끊임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띠링! 스킬 연타의 숙련도가 초급 2단계로 상승하셨습니다.]
[띠링! 스킬 피스트 마스터리의 숙련도가 초급 2단계로 상승하셨습니다.]
“좋아, 좋아!”
귓가에 들려오는 알림음에 더욱 신이 난 천휘는 살아 있는 샌드백, 헤론 리자드맨들을 상대로 더욱 빠르게 연타를 퍼부었다.
휘익!
퉁.
“으하하하! 누가 솜이라도 던졌나?”
보다 못한 헤론 리자드맨 궁수가 화살을 날렸지만,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발록의 심장 때문에 화살은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휘는 더욱 신이 나 파안대소를 터트리며 헤론 리자드맨들을 학살해갔다.
[띠링! 기력이 25% 이하로 떨어지셨습니다.]
“후우, 후우. 젠장, 한창 재밌는데 기력이 바닥이네. 냥아! 이리 와서 녀석들 좀 상대해.”
크워어엉!
천휘의 명령에 냥이가 기다렸다는 듯 포효를 터트리며 헤론 리자드맨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흡사 순한 양 떼들 사이에 늑대 한 마리가 날뛰고 있는 형상이었다.
“너무 리얼해도 문제야. 사냥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면 어쩌냐고. 피로 회복 포션, 박코스라도 사두든지 해야지, 원. 게다가 접속하고 나서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포만감이 바닥이네. 육포나 먹어야지. 오물오물.”
천휘는 기력과 포만감을 동시에 회복하기 위해 땅바닥에 앉아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그사이 냥이와 미친 소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헤론 리자드맨들을 학살하며 습지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역시 강시는 편하다니까. 기력을 채울 필요가 있어, 포만감을 채울 필요가 있어. 게다가 팔을 잃거나 해도 다시 수리하기만 하면 되니. 젠장, 나도 강시나 되어볼까?”
천휘는 지치지 않는 건전지 에너타이저처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두 녀석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확실히 강시란 존재는 불사의 존재답게 먹을 필요도, 체력이 떨어질 염려도 없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강시가 되는 건 무서워. 오물오물.”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강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천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베른이 바로 그 예였다.
물론 오베른은 인간은 아니었지만,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 줄 아는 키메라였다.
게다가 그는 검사로서는 최고의 경지라는 그랜드 소드마스터임에도 강시화가 되는 과정에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고래고래 내지르고 있으니, 강시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다시 한 번 날뛰어볼까?”
5분 정도 육포를 씹으며 휴식을 취하자, 다시 기력과 포만감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천휘는 또다시 헤론 리자드맨들 사이로 파고들며 예의 연타 공격을 반복해나갔다.
“휴우, 이 녀석이 마지막인가?”
무려 한 시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겨우 마지막 헤론 리자드맨 전사를 처치한 천휘는 그대로 습지 바닥에 눌러앉았다. 조금 척척하긴 했지만, 어차피 리자드맨들을 상대하느라 체액이 온몸에 묻었기에 별반 척척한지도 몰랐다.
“자식들, 네놈들도 수고했다.”
음메!
캬오!
“그나저나 이 안으로는 안개가 더 짙네? 행여나 길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흐음, 뭐, 냥이 녀석이 있으니까 상관없으려나?”
헤론 리자드맨들의 시체를 방석 삼아 앉아 있던 천휘는 멀리 보이는 짙은 안개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 참! 생각해보니까 스킬 숙련도가 얼마나 올랐나 모르겠네. 초급 3단계까지 오른 것까지는 들었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됐나 모르겠나. 확인해봐야지. 스킬창 오픈!”
[주직업 강시술사 스킬]
강시 제작술:중급 9단계(87.01%)
고루마공:중급 5단계(63.77%)
시약 제조술:고급 2단계(12.35%)
약초술:고급 3단계(42.65%)
[부직업 격투가 스킬]
피스트 마스터리:초급 6단계(36.57%)
오라 마스터리:초급 2단계(46.97%)
연타:초급 7단계(73.16%)
대지의 울음:초급 1단계(81.45%)
악마의 숨결:초급 1단계(42.31%)
이중극점:초급 1단계(27.54%)
“헉! 이게 뭐야! 피스트 마스터리가 초급 6단계? 게다가 연타는 초급 7단계잖아? 이게 말이 돼? 원래 격투가 스킬은 숙련도가 빨리 오르나?”
조금 전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헤론 리자드맨들을 상대로 연타를 퍼부었고 주먹을 내질렀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천휘는 그저 현재의 숙련도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흐음, 그에 반해 유니크 스킬들은 아직도 고작해야 1~2단계에 불과하네. 스킬의 등급에 따라서 숙련도가 상승하는 속도가 다른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자세한 건 따로 알아봐야겠어. 일단 일어나 볼까?”
아직 아르니안 대륙의 시스템에 익숙지 않은 천휘는 다음에 따로 팬 사이트인 오시리스에서 찾아볼 생각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냥아, 미친 소, 이제 움직이자. 냥아, 네가 앞장서.”
캬오!
음메!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됐다고 판단하자, 천휘는 지체 없이 두 녀석을 앞세워 헤론 습지 탐방에 나섰다.
“안개 제대로 짙네. 이러다가 리자드맨 녀석들한테 습격당하는 거 아냐?”
헤론 습지의 안개는 점점 짙어져 마침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시야를 방해했다. 때문에 천휘는 처음의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근본적인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크아앙!
음메!
콰앙!
“흐엑! 놀래라. 이 녀석이 크로커다일인가?”
별안간 습지에 숨어 있던 크로커다일 한 마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미친 소의 발 빠른 대응에 녀석은 허리가 갈라지며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엄청난 크기네. 확실히 일반 악어와는 다르다 이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크로커다일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족히 5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몸통에, 그 몸통보다 더 긴 꼬리를 가진 크로커다일은 리자드맨을 주식으로 하는 만큼 아가리도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튼 잘했어, 미친 소. 계속 그렇게만 해라.”
음메!
천휘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미친 소가 흥겹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연이어서 나타나는 미친 소가 배틀액스로 내리찍고 있을 무렵, 갑자기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습지 중심 부근에 도착한 건가?”
보통 습지에 낀 안개는 외곽이 짙고 중심 부근이 상대적으로 옅다. 이곳 헤론 습지 역시 그런 습지의 생태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 듯했다.
“후우, 그럼 이곳을 거점으로 하루 정도 더 사냥을 해보고… 응? 저건 뭐지? 나 말고 또 누가 사냥하나?”
습지의 안개가 많이 걷혀 시계가 넓어진 천휘는 멀리 엄청난 숫자의 헤론 리자드맨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게다가 그 리자드맨들은 마치 커다랗게 원형을 유지하듯 한 명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펼치고 있었다.
“와우! 저 정도의 리자드맨들을 상대로 홀로 사냥하는 건가? 그렇다면 적어도 300레벨은 되겠는데? 응? 가만. 저 여자는… 헉! 아까 격투가 길드에서의 그 여자 아냐?”
자신이 상대한 리자드맨들보다 몇 배는 많아 보이는 리자드맨들을 홀로 상대하고 있는 이는 조금 전 길드에서 만났던 수줍은 얼굴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사제복을 입은 채 수줍은 듯 한마디 말도 하지 않던 그녀가 헤론 리자드맨들을 상대로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파충류 새끼들! 다 뒈져 버려!”
“…….”
“이 니글니글한 새끼들! 다 죽여주마!”
“…….”
“으아악! 난 파충류가 싫어!”
“…….”
수줍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천휘의 눈앞에는 리자드맨들을 도살하는 괴물 같은 여인만 보일 뿐이었다.
온몸을 휘황찬란하게 빛내주는 엄청난 신성력의 오라.
그녀는 꽤나 많은 축복 마법을 자신에게 건 채, 오로지 연타 공격으로만 헤론 리자드맨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역시 여자들은 무서워. 으윽.”
헤론 리자드맨들을 마치 동네 개 패듯 때려 대고 있는 여인을 보며 천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천휘에게 다시 한 번 여자의 무서움을 각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흐음, 그런데 리자드맨 숫자가 너무 많아. 도살녀 혼자서는 좀 힘들겠는데?”
이미 그 여인을 ‘도살녀’라 지칭해버린 천휘는 전황을 살피다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처음 보는 여인에게, 아니 겨우 두 번, 그것도 말조차 걸지 않은 유저를 돕는다는 것은 천휘에게 있어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다른 유저의 몬스터를 빼앗는다면 모를까.
“쳇, 자기가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곳에 왔겠지. 난 그럼 다른 곳으로 가보실까?”
역시나 천휘는 도살녀를 도울 생각이 없는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고자 했다.
“도와주세요!”
“응?”
그때 마침 도살녀가 천휘를 발견한 듯 도움을 요청했다. 조금 전 헤론 리자드맨들을 도살하면서 내뱉은 살기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아닌 귀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도와주세요! 꺄아악!”
“…….”
갑자기 약한 척을 하는 도살녀를 보며 천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헤론 리자드맨들을 개 패듯 패댔지만, 천휘 앞에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래서 여자들이 더 무서워!’
“미친 소! 냥이! 다 쓸어버려!”
음메!
크워어엉!
만약 자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해코지를 해댈까 하는 생각에 천휘는 결국 그녀를 돕기 위해 냥이와 미친 소의 봉인을 해제시켰다.
그와 동시에 두 녀석의 눈빛이 뜨겁게 변하더니, 헤론 리자드맨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다녔다.
“고마워요!”
‘그 말이 더 무서워!’
도살녀가 감사의 뜻을 전하자, 천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신도 헤론 리자드맨들을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여자들은 어쩜 저렇게 겉과 속이 다른 건지. 설마 희영 씨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세상에! 진짜 그러면 난 죽어버릴 거야!’
도살녀와 희영 씨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혹시나 희영 씨도 이 『오벨리스크』를 하면서 저렇듯 파괴적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자, 천휘의 주먹에는 힘이 더욱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그럴 리 없어! 대지의 울음!”
콰앙!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희영 씨는 천사야! 으아아악!”
천휘는 마치 절규하듯 소리를 내지르며 스턴 상태에 빠진 헤론 리자드맨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르고 강렬한지 헤론 리자드맨들은 끔찍한 몰골로 죽어나갈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런 천휘를 보다 못한 도살녀가 천휘의 안위를 걱정하며 말을 건넸다.
“괜찮지 않아! 당신! 이 도마뱀 새끼들 다 처치하고 보자고!”
도살녀의 걱정 어린 말에도 천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분노를 토해냈다. 도살녀 때문에 자신의 천사 희영 씨를 잠시나마 오해했다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천휘의 마음 한편으로는 희영 역시 결국은 저 도살녀와 똑같은 여자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무려 3시간 동안을 꼬박 사냥해야 했던 천휘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조금 쉬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도살녀의 피로 회복 마법. 거기에 더해 얼마나 더 뛰어다니라는 건지 쉬지 않고 축복 마법을 걸어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독한 년! 날 얼마나 더 부려먹을라고!’
천휘는 처음으로 여자라는 족속에게 원한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마스크를 하고서 어쩜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을까?
속사정을 모르는 천휘로서는 진정 죽을 맛이었다.
‘하아, 멋지다. 본래 직업은 소환사인가? 미노타우로스와 샤벨 타이거를 소환할 정도면 엄청난 고렙이라는 소린데. 그럼에도 격투가를 저렇게 잘 소화하시더니. 아, 멋져! 계속해서 회복 마법과 축복 마법을 걸어드려야지!’
도살녀의 마음은 역시나 천휘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확연히 대조적이었다. 자신을 말려 죽이려 한다는 천휘의 생각과는 달리, 도살녀의 마음은 진정으로 그를 위해 신성 마법을 펼친 것이다.
음메!
“미친 소! 저 녀석은 또 뭐야!”
천휘와 도살녀가 서로 눈치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때, 별안간 미친 소가 괴성을 내질렀다. 고통을 알 리 만무한 미친 소였지만, 그의 괴성은 마치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였다.
그런 미친 소 옆에는 녀석과 거의 대등한 크기의 리자드맨 한 마리가 거대한 시미터를 들고 미친 소를 노려보고 있었다.
“헤론 리자드맨 킹인가?”
녀석의 머리 위에 떠오른 희미한 글씨에 녀석의 정체를 알게 된 천휘는 얼굴을 찌푸리며 녀석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디 가세요?”
천휘가 자신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자, 불안해진 도살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 것 없잖아!”
도살녀의 물음에 천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는 곧바로 미친 소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도살녀도 그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날 버릴 리가 없지! 이래 봬도 한 인물 하는걸! 좋아! 그럼 난 여기에서 이 녀석들을 처치하자!’
“우호호호! 이 파충류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콰앙! 콰앙!
‘저 독한 년 또 시작했군.’
뒤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도살녀의 광기에 찬 목소리에 천휘는 고개를 내저으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날뜀으로써 헤론 리자드맨들의 주의가 분산되기에 천휘로서는 내심 고맙기도 했다.
“그나저나 저 자식, 정말 리자드맨 맞아? 킹이라고는 해도 저렇게 크다니. 이건 반칙이잖아!”
거의 미친 소에 육박하는 체구를 자랑하는 헤론 리자드맨 킹. 녀석의 양손에 들린 시미터 2자루는 천휘의 키보다 훨씬 크고 날카로워 엄청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그래봐야 도마뱀이지. 냥아! 치고 빠지기!”
크워어엉!
냥이 녀석에게 미리 입력해두었던 명령어를 내뱉자, 냥이가 포효를 내지르며 헤론 리자드맨 킹 녀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크롸라라!
광속의 스피드로 치고 빠지는 냥이를 잡고자 헤론 리자드맨 킹 녀석이 손에 들고 있는 시미터를 사방으로 휘둘렀지만, 냥이의 빠른 움직임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때문에 녀석이 열 받은 듯 특유의 괴성을 내질렀다.
[띠링! 피어의 영향으로 5분간 민첩이 10% 하락했습니다.]
[띠링! 피어의 영향으로 5분간 물리 방어력이 10% 하락했습니다.]
“헉! 저 녀석 피어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뭐, 상관없지. 10퍼센트 하락한다고 해서 냥이를 쫓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슬슬 이 몸도 준비해보실까?”
피어의 영향으로 냥이도 살짝 움직임이 느려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워낙 높은 민첩 스탯을 자랑하는 냥이이기에 10퍼센트가 하락한다고 해도 헤론 리자드맨 킹이 쫓기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중극점을 쓰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악마의 숨결 연타 공격으로 간다! 하앗! 악마의 숨결!”
헤론 리자드맨 킹이 냥이에게 주의가 집중된 사이 천휘는 빠르게 녀석에게로 접근했다. 그리고 양 주먹에 암흑의 기류가 휩싸이자 그대로 헤론 리자드맨 킹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크롸라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앗! 연타!”
악마의 숨결은 유니크 스킬답게 마나를 상당히 많이 소모했다. 무려 초당 300의 마나를 집어삼키는 엄청난 스킬.
하지만 천휘는 그런 괴물 같은 스킬을 거의 20분이나 지속시킬 수 있는 엄청난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쾅! 쾅! 쾅!
암흑의 기류에 휩싸인 천휘의 주먹이 계속해서 헤론 리자드맨 킹의 허벅지에 파고들었다.
헤론 리자드맨 킹은 천휘를 잡고자 시미터를 빠르게 휘둘렀지만, 그럴 때면 냥이가 어김없이 나타나 머리를 가격하고 빠져나갔다.
크롸라라!
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헤론 리자드맨 킹이 헤론 습지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그동안 참전하지 않았던 헤론 리자드맨들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천휘를 공격했다. 아무래도 냥이의 공격보다는 천휘의 연타 공격이 더욱 위력적인 모양이었다.
“큭큭큭, 기다리고 있었다, 도마뱀 조무래기들! 미친 소! 이 녀석을 상대해! 타앗!”
음메!
미친 소와 자리를 바꾼 천휘는 곧바로 리자드맨들을 상대로 악마의 숨결 연타를 퍼부었다.
“이야, 이거 임팩트 죽이네!”
악마의 숨결에 얻어맞은 헤론 리자드맨들은 물론이고, 그 주변의 녀석들까지도 악마의 숨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스플래쉬 데미지 효과가 발동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천휘의 주먹을 휘감고 있던 암흑의 기류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 천휘의 주변으로 맹렬한 암흑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거거든!”
자신의 주먹에서 뻗어나가는 엄청난 위력에 천휘는 신이 난 듯 소리치며 주먹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워낙 많은 헤론 리자드맨들이 밀집해 있는 탓에 딱히 타점을 정해놓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다.
어느새 그토록 많던 헤론 리자드맨들은 눈에 띄게 줄어 이제는 고작해야 몇십 마리 정도만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기력이 쌓인 것은 천휘 역시 마찬가지인 듯 녀석들을 노려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비타 삼백!”
따랑!
[띠링! 기력이 75%로 상승하셨습니다.]
“괜찮으세요?”
“휴우, 괜찮으니까 좀 떨어져 줄래?”
“아, 죄송해요.”
어느새 다가온 도살녀가 천휘에게 피로 회복 마법을 걸어주자,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탓에 천휘의 말투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그보다 당신 혼자서 여긴 왜 온 거야? 미친 거 아냐? 저런 괴물들이 서식하는 곳이라고!”
강시들의 무한 체력에 맞서 아직까지도 분투하고 있는 헤론 리자드맨 킹을 가리키며 천휘가 흥분한 듯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흐음, 그냥 스트레스 풀러 왔다고 해야 하나?”
“스트레스?”
상황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천휘의 눈썹 한쪽이 말려 올라가며 반문했다.
“그래요, 스트레스! 사실 현실에서 무척이나 스트레스 받는 직장에 다니거든요. 그래서 늘 이렇게 『오벨리스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그전까지는 사제를 한 탓에 스트레스를 풀기 어려웠지만, 역시나! 격투가는 스트레스를 풀기에 최고로 좋은 직업이었어요! 지난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한 번에 가시는 느낌? 아무튼 너무 즐거웠어요.”
“…….”
한마디로 샌드백을 대신해 헤론 리자드맨들을 치러 왔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천휘는 이마에 땀이 삐질 흘러내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변태. 상종을 말아야지.’
무슨 놈의 여자가 이렇게 변태스러운 취향을 지녔단 말인가. 겉모습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어 스쳐 지나가면 1초 만에 얼굴을 까먹게 생겨 가지고는, 머릿속에 든 건 그야말로 변태 날라리 바바리 걸이었다.
“아, 저 남아 있는 도마뱀들 잡으시게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대꾸하지 말자. 대꾸하지 말자.’
도살녀의 말에 천휘는 안 들린다는 듯 묵묵히 걸어 나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스테로이드!”
[띠링! 10분간 근력이 30% 증가합니다.]
‘그러니까 왜 마법 이름이 스테로이드인 거냐고!’
도살녀가 시전해준 근력 증강 마법이라는 날개를 달고 천휘는 곧바로 남아 있는 헤론 리자드맨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1분도 안 되는 시간을 휴식했음에도 바닥까지 떨어졌던 마나는 어느새 30퍼센트 차올라 있었다.
“대지의 울음! 악마의 숨결 연타!”
콰과과광!
대지의 울음이 땅을 뒤흔들고 악마의 숨결이 헤론 리자드맨들을 뒤덮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마지막 남아 있던 헤론 리자드맨들이 정리되고, 결국 습지의 넓은 평원 위에는 헤론 리자드맨 킹만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
크롸라라!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것일까.
헤론 리자드맨 킹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시미터 2자루를 겹쳐 미친 소의 배틀액스를 두드렸다.
음메!
하지만 덩치는 비슷할지언정 근력에서만큼은 미친 소를 따라올 수 없었다. 미친 소는 양손에 거머쥔 배틀액스로 헤론 리자드맨 킹의 시미터 2자루를 무리 없이 막아냈고, 심지어는 오로지 힘으로써 녀석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브라보! 냥이! 필살기!”
헤론 리자드맨 킹과 미친 소가 힘겨루기에 들어가자, 천휘는 기다렸다는 듯 냥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냥이가 천천히 헤론 리자드맨 킹의 주변을 돌더니, 이내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빠르게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저게 뭐예요?”
“묻지 말고 그냥 보면 될 것 아냐.”
어느새 도살녀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지만, 천휘는 여전히 냉랭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까칠한 모습도 도살녀에게는 터프하고 멋진 모습으로 비치는지 그녀의 눈에는 하트가 그려지고 있었다.
크워어엉!
천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헤론 습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엄청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포효 소리에 헤론 리자드맨 킹마저도 견디기 어려운지 이내 미친 소에게 현저하게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헤론 리자드맨 킹은 과연 드넓은 헤론 습지를 지배하는 왕다웠다. 희미하지만 시미터에 검붉은 오라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저건 오라 아닌가요?”
“그래봐야 이미 대세는 기울었어! 저걸 보라고!”
오라가 덧씌워지기 시작하는 시미터에 조금씩 미친 소의 배틀액스가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미친 소가 당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피슈욱!
짧지만 강렬한 파공음.
그와 함께 희뿌연 빛줄기가 헤론 리자드맨 킹의 목을 빠르게 지나쳤다.
냥이의 긴 앞니가 헤론 리자드 맨 킹의 목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툭, 데구르르.
결국 헤론 습지의 왕 헤론 리자드맨 킹은 그렇게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이거 당신 가져.”
“어머, 당신이라니. 우리 벌써 사귀는 건가요?”
“아나, 지금 장난쳐? 같이 싸웠으니까 이거 가지란 말이야. 내가 리자드맨들이 뱉은 아이템 싹 먹었으니까 이거라도 가지라고!”
헤론 리자드맨 킹이 죽고 난 뒤, 천휘는 리자드맨들이 죽으면서 남긴 아이템과 돈을 모조리 쓸어 모았다. 조금은 모양이 빠지는 모습이었지만, 돈을 물 쓰듯 써버린 천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도살녀에게 천휘는 헤론 리자드맨 킹이 남긴 목걸이 하나를 건넸다. 물론 자신은 더욱 큰 걸 챙긴 뒤였다.
“전 괜찮은데…….”
“내가 괜찮지 않으니까 받아.”
툭.
끝내 거절하려는 도살녀에게 천휘는 목걸이를 툭 던져 줬다. 그에 도살녀는 잽싸게 그 목걸이를 낚아챘다.
‘쳇, 저럴 거면서 내숭은.’
도살녀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에 천휘는 ‘네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한 차례 바라보고는 이내 냥이의 등에 올라탔다.
털썩.
“뭐- 뭐야?”
자신을 따라 냥이의 등에 올라 탄 도살녀를 보며 천휘는 화들짝 놀랐다.
“내 이름은 미온이에요.”
“그- 그게 뭐 어쨌다고?”
“그냥 알아달라고요. 그쪽 이름은요?”
“내- 내 이름을 알아서 뭐 하게!”
자신을 미온이라 밝힌 도살녀의 당돌한 물음에 천휘는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놀라 반문했다.
“이름 안 알려 줄 거예요?”
천휘는 격투가 길드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미온을 보며, 이 여자가 아까 그 여자가 맞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예의 그 여자가 확실했다.
“내가 왜 알려 줘야 하지?”
미온의 당돌함에 잠시 당황했던 천휘는 이내 냉정함을 되찾고 반문했다. 하지만 그의 냉정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신, 내가 찜했으니까!”
“커헉!”
천휘의 지금 모습은 인피면구를 착용한 상태다.
본래의 모습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마스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미온은 자신을 찜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좋아하게 됐다는 말. 여자 경험이 일천한 천휘로서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서!”
“알려 달라고요, 당신 이름. 싫으면 현실 이름이라도.”
‘뭐- 뭐야, 이 여자. 대체 이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야?’
너무도 당당하게 이름을 알려 달라는 미온을 바라보며 천휘는 신기한 듯 쳐다봤다. 현실의 자신은 무려 2년간이나 좋아한다고, 아니 관심 있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거늘 이 여잔 만난 지 채 하루도 안 돼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천휘. 그게 내 이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