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새로운 천마강시,그리고 전직
“오셨습니까.”
“그래. 후원에 가 있을 테니, 찾을 때까지 근처에 아무도 못 오게 해. 집사, 당신도 예외는 아니야. 저번처럼 창고 앞에서 어슬렁거리다간 바로 모가지니까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천휘는 오베른과 함께 후원의 창고로 향했다.
[여기서 뭘 할 작정이냐?]
“말했잖아. 널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기서 말이냐?]
“잔소리 말고 잠깐 기다려.”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칠 법도 하건만 천휘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어제 무리를 한 탓에 오늘은 내일 출근을 위해 일찍 자두려는 생각에서였다.
‘드디어 천마강시를 만드는 건가?’
아르니안 대륙에서 다시금 천마강시를 만든다는 생각에 천휘는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천마강시는 혈강시나 철골강시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대단한 강시였다. 한 제국에서도 절정 고수 서넛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었고, 마지막에는 드래곤 산맥의 패자를 상대로도 몇 분이나 버텨 낸 전적까지 있었다.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아직 천휘의 강시 제작 숙련도로는 천마강시를 100퍼센트 완벽히 만들어낼 수 없었다. 한 제국에서 유일하게 만들어낸 천마강시도 요행으로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천휘는 예의 그 철제 욕조에 조금 전 흑마법사 길드에서 사온 시약들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비싸기 짝이 없는 시약들. 마탑에서 사들인 시약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비쌌고, 무엇보다 강시를 제작하는 데에 적합한 것들이었다.
“후우.”
[뭘 만드는 거냐?]
“말 걸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다 설명해줄 테니, 제발 좀 입 닥치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시약을 조합하느라 머리가 아픈 천휘는 오베른의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런 천휘의 마음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오베른은 이후로 입을 다물고 잠자코 서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이다! 이제 이것만 넣으면 완성이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시약의 조합이 마무리되었다. 한 번 만들어본 덕에 이전보다는 확실히 시간이 덜 걸렸지만, 벌써 그가 창고에 들어선 지 3시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이게 과연 쌍두용각사의 뿔만큼이나 강력할까?’
천휘가 한 제국에서 천마강시를 제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시약은 쌍두용각사의 뿔이었다.
쌍두용각사는 추정 레벨 400 이상의 보스 몬스터로, 그 뿔에는 엄청난 맹독이 깃들어 있어 200레벨 이하의 일류 무사들은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녹아내릴 정도였다.
‘아무튼 지금은 이것에 기댈 수밖에…….’
천마강시 제작을 위한 시약들은 그 하나하나가 강력한 독성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비슷한 독성을 지니고 있기에 화합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린 드래곤의 체액은 그런 시약들의 독성을 제압하고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난 맹독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아싸, 빙고!”
그린 드래곤의 체액을 시약 화합물에 투여하자, 철제 욕조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 시간가량이 흘러 거무튀튀했던 시약 화합물이 이내 녹색의 액체로 변했다.
드디어 그린 드래곤의 체액이 다른 시약들과 화합한 것이다.
“오베른, 이리 와봐.”
[드디어 끝난 것인가?]
“그래.”
[그게 뭐지?]
“일단 여기 앉아봐.”
천휘는 오베른에게 상황 설명을 하기 위해 그와의 눈높이를 맞추고자 그를 땅바닥에 앉도록 했다.
“잘 들어. 나는 본래 이곳, 아르니안 대륙 사람이 아냐. 드래곤 산맥 너머에 있는 천 제국이라는 곳에서 왔지.”
[흐음.]
“천 제국에서 난 세 명의 절대 강자 중 한 명이었고, 내가 그곳에서 절대 강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강시라는 존재의 힘이 컸지.”
[강시?]
의아한 오베른의 표정에 천휘는 곧바로 빙옥에서 미친 소를 꺼냈다.
“그래, 강시. 미친 소를 봐. 녀석이 살아 있는 존재 같아?”
[녀석에게는 생명력이 없다. 좀비일 따름이지.]
“아니, 이 녀석은 좀비가 아냐. 방금 내가 말했던 강시지. 이렇게 빠르고 민첩한 좀비 봤냐?”
[…확실히 좀비치고는 근력도 대단하고 게다가 단단하기까지 하다. 네 말은 나보고 저런 강시가 되라는 건가?]
오베른이 조금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천휘를 쳐다봤다.
“그래. 하지만 오베른 넌 미친 소와 같은 철골강시가 아니고 천마강시라는 최고의 강시가 될 거야.”
[어떤 건지 좀 들어나 볼까? 솔직히 썩 내키지 않는다. 만약 천휘, 네 말이 아니었다면 난 일말의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을 거다.]
“알아. 그럼 들어봐. 천마강시는 일단 몸 안에 독을 품고 있어. 그것도 오우거 따위는 즉사시킬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맹독이! 그리고 근력, 민첩성 모두 기존의 두 배까지 상승하지. 무엇보다 더 대단한 건…….”
[더 대단한 건?]
천휘의 설명에 구미가 당기는 듯 오베른이 물었다.
“네 몸이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된다는 거다.”
[금강불괴?]
“한마디로 말해 그 어떠한 충격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거다. 물리적인 공격은 물론이고, 마법 공격에도 끄떡없게 되지. 아마 본래 그랜드 소드마스터인 오베른 네가 금강불괴가 된다면 7서클의 대인 마법은 무리여도 광역 마법 정도는 충분히 방어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게 정말인가?]
무척이나 놀란 듯 상기된 어조로 묻는 오베른을 보며 천휘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어.”
[문제?]
“본래 천마강시는 신체적인 기능이 사라진 시체들로 제작해야 하지. 그런데 오베른 너는 키메라인 탓에 아직 그러한 기능이 남아 있어.”
[그럼 불가능한 것인가?]
금강불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오베른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워졌다.
“하지만 키메라라고는 해도 내가 보기엔 넌 거의 좀비에 가까워. 생식적인 기능도 못하는 데다 네 몸에는 피도 흐르지 않으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끔찍한 고통이야. 천마강시가 되기 위해서는 온몸의 피부 조직이 수십 번의 재구성을 거쳐야 할 텐데…….”
[내가 누군가! 나는 이 나라의 수호신이자, 참격의 기사로 불렸던…….]
“네 똥 굵은 거 아니까 그딴 소리 집어치우고. 할 수 있겠냐? 겁나면 하지 말고.”
천휘의 말은 다소 도발적이었다. 그의 말은 은근히 오베른의 자존심을 긁고 있었다.
[나를 뭐로 보고! 당장 시작하지!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인가!]
풍덩!
천휘가 말릴 새도 없이 오베른은 철제 욕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에 천휘는 급히 철제 욕조에서 멀어졌다.
“오베른! 그 상태로 보름 동안 버텨야 해! 아프다고 절대 나오지 말고, 비명은 마음껏 내질러도 되니까 아프면 소리쳐! 보름 뒤에 보자!”
[그- 그러지.]
천휘의 말에 오베른은 벌써부터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 힘겹게 대답했다.
이윽고 천휘가 사라지자 철제 욕조에서 녹색의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창고 안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그와 동시에 오베른의 끔찍한 보름이 시작되었다.
쪿쪿쪿
“후우,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네. 하긴 다음 주면 수능이니까. 세탁소 가서 겨울 코트 찾아와야겠다.”
이른 아침, 영완은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섰다.
집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직 차를 사지 않은 영완은 28살인 지금까지도 꾸준히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었다.
“으악! 밀지 마요!”
“젠장! 밀지 말라니까!”
아침 출근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지옥이었다. 다행히 집과 학교가 가까워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애용하는 영완이었지만, 단 세 정거장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극심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피슉.
“끄윽. 휴우, 간신히 나왔네.”
힘겹게 버스에서 내린 영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양복을 털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리는 버스 안에서 묻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툭툭.
“안녕하세요. 일찍 나오셨네요?”
“헉!”
영완이 먼지를 털고 다시 발길을 재촉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건네 왔다. 다름 아닌 희영이었다.
“후훗,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희영 씨가 이 시간에는 웬일로. 보통 이 선생 차 타고 등교하지 않으시나요?”
“그 사람 말 꺼내지도 마세요.”
“네?”
아무래도 전날 시영과 다툰 모양인지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희영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죄송해요. 그냥 안 좋은 일이 좀 있어서……. 그나저나 서 선생님은 애인 없으세요?”
“학교 일이 바쁘다 보니…….”
희영의 물음에 영완은 뒷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속내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걸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흐음, 그런가? 서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친구 한 명 소개시켜 드릴까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서 선생님과 무척 잘 어울리는 친구가 있거든요. 좀 왈가닥이긴 하지만.”
“괘-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안 돼요! 서 선생님같이 좋으신 분께 애인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마침 내일이 토요일이니, 오후에 잠깐 시간 내세요. 제가 친구에게 물어보고 당장 내일 알려 드릴게요. 아셨죠?”
“하- 하지만…….”
영완이 희영의 제안을 바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난데없이 끼어든 불청객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불청객은 다름 아닌 시영이었다.
“희영!”
차를 타고 가다 희영을 발견한 듯 급히 도로 가에 차를 대놓고 달려 나온 시영은 곧바로 희영에게로 다가갔다.
“왜 이 자식이랑 같이 있는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이 자식이라니! 서 선생님, 죄송해요.”
“…괜찮아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당장 차에 타!”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
희영이 시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지만, 역시 힘으로는 시영을 당할 수 없는지 이내 차에 타고 말았다.
마침 그 모습을 등교하던 학생들이 지켜보며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희영을 차에 태우고는 뒤돌아서며 영완을 보고 한마디 외쳤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감히 네가 넘볼 수 없는 여자니까.”
“병신.”
“뭐- 뭐라고!”
막 운전석에 타려고 차문을 열던 시영은 영완이 내뱉은 나지막한 말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영완은 시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뒤돌아 학교로 걸어 나갔다.
“저 자식이 진짜!”
시영은 그런 영완을 보며 달려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제야 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화를 곱씹으며 차에 탑승했다. 그리고는 걸어가는 영완을 앞질러 학교로 향했다.
‘…빌어먹을.’
시영의 차에 탄 채 학교로 향하는 희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완은 제자리에서 한동안 멈춰 있어야 했다.
자괴감.
그가 지금 이 순간 희영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자괴감이었다.
그녀를 지켜 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퇴근하고 영완은 곧바로 집으로 귀가했다.
다음 주가 수능인지라 고3 생물 과목을 맡은 자신은 일찍 귀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완은 곧바로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 베란다로 향했다. 원룸임에도 제법 그럴싸한 베란다가 있어 이 집을 선택한 것이었다.
치익.
푸슈우.
벌컥벌컥.
영완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양복 차림으로 캔맥주를 따고는 곧바로 입 안으로 들이켰다.
“캬아, 맛 좋네!”
목으로 넘어가는 알싸한 맥주 맛에 영완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집에서 혼자 먹는 맥주가 최고네.”
영완은 맥주를 다시 한 번 입으로 가져가며 베란다 밖을 쳐다봤다. 그래도 원룸 주제에 5층에 있어 영완의 집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제법 괜찮았다.
“젠장,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네.”
시각은 벌써 6시에 다다르고 있었다.
11월에 접어든 초겨울이라 6시만 돼도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나저나 희영 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학교에서도 주변의 눈치가 보여 희영에게 한마디 말조차 못 건 영완이었다.
그래서일까?
영완의 표정은 칠흑 같은 바깥의 풍경보다 더욱 어두워 보였다.
* * *
스파앗.
수도 오베른의 저택에 천휘가 환한 빛 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아악!]
“큭큭, 오베른 녀석 지치지도 않나. 아주 대성통곡을 하네.”
『오벨리스크』에 접속한 천휘를 맨 먼저 맞아주는 것은 바로 후원에서 들려오는 오베른의 비명이었다. 이곳 시간으로는 대략 3일 정도가 흘렀을 텐데도 녀석의 음성은 여전히 까랑까랑했다.
[으아아악!]
“큭큭, 큰소리 뻥뻥 치더니, 꼴좋네. 그럼 난 이제 슬슬 전직을 하러 가보실까?”
오베른이 천마강시가 되어가고 있는 시각, 천휘는 직업을 얻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저택을 나서는 도중 집사 그레엄으로부터 후원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해주고 나서는 천휘였다.
“길드가 대거 모여 있는 곳이 어디였더라? 수도 남쪽 광장 부근이었나?”
수도 오베른의 지리는 이미 예전에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상황이다. 앞으로 자신이 터전으로 삼을 곳이기에 사전에 미리 연구를 한 것이다.
덕분에 천휘는 이 넓은 수도 오베른에서 여태까지 길 한 번 잃지 않고 잘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야, 사람 많네.”
일전에도 한 번 와봤지만, 이렇게 밝은 대낮에 와보기는 처음인지라 천휘는 새삼 놀랍다는 듯 남쪽 광장에 들어섰다.
“역시나 저 여관은 아직 건재하네. 진짜 왕의 애첩이라는 게 사실인가.”
천휘는 붉은 마녀의 집을 흘낏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격투가 길드를 찾았다. 다행히 길드들이 모여 있는, 흔히 길드촌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남쪽 광장과 인접해 있어 금세 격투가 길드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일단 들어가 보실까?”
천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격투가 길드를 찾았다. 이미 격투가 직업을 얻기 위한 절차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친절과 정성으로 모시는 격투가 길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맨주먹으로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남성 취향의 직업인 격투가 길드에서 천휘를 처음 맞아준 이는 다름 아닌 여자였다. 하지만 격투가로 보기 힘든 다소 마른 체형과 곱상한 외모는 그녀가 격투가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직업을 얻고자 하는데…….”
“아, 그러십니까? 전직 심사는 왼쪽 카운터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서 오십시오, 친절과 정성으로…….”
부드러운 얼굴로 친절하게 안내한 여인은 곧바로 길드로 들어서는 또 다른 사내에게 천휘와 같은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심지어 접수처의 사람마저도 여자였다. 그것도 예의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곱상한 외모를 지닌.
‘남자들을 위한 마초 공간인가?’
격투가를 선택하는 유저들의 성비는 압도적으로 남자들이 많았다. 거의 9 대 1에 육박할 정도였다.
때문에 천휘는 격투가 길드가 완벽한 남성 성향의 인테리어와 분위기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격투가 직업을 얻으려고.”
“아, 그러십니까? 왼편 통로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간단한 심사를 통해 직업을 얻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전형적인 가이드처럼 말하는 여점원.
천휘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왼쪽 통로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처럼 새로이 격투가 직업을 얻으려는 듯 한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남자는 그렇다 쳐도 이 여자는 대체 뭐야?’
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는 척 봐도 한가락 할 것같이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었고 인상도 깔끔했다.
하지만 여인은 한눈에 봐도 소심하고 여린 성격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전혀 띄지 않는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는 여인.
‘딱 봐도 소심해 보이는데……. 저런 여자가 격투가를 해? 남자들의 로망인?’
이래저래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천휘는 그 이상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여인의 옆에 앉았다.
“어이, 형씨, 이런 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뭐, 그러죠. 제 이름은 플라톤이라고 합니다.”
천휘는 그에게 자신의 본 아이디를 말해주기 싫어 대충 가명을 둘러댔다.
“플라톤? 고대 그리스의 철학가인?”
“뭐,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하하, 나랑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말 놔. 난 필리언이라고 한다.”
사내는 생긴 것 이상으로 성격이 호탕한 듯했다. 그에 천휘 역시 기분이 좋아진 듯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아가씨도 괜찮으면 통성명이나 하지? 우리보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오빠라고 하면 더 좋고.”
필리언의 능청스러운 말에 여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이내 부끄러운 듯 양손으로 두 얼굴을 가렸다.
‘뭐야, 이 여자. 얼굴은 이십 대 중반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저렇게 쑥스러움을 타서 어쩌겠다는 거야? 게다가 입고 있는 장비는 사제? 몽크로 전직하려는 건가?’
천휘는 현실의 자신보다 더욱 소심한 모습의 여인을 보며 이내 관심을 접었다. 마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은 여인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다음 분.”
“아, 내 차례네. 그럼 먼저 다녀오지.”
“그러든가.”
“하하, 제대로 까칠한 녀석이군. 아무튼 좀 있다 보지.”
“마음대로.”
이내 필리언이 안으로 들어가자, 통로에는 천휘와 예의 그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
“…….”
천휘와 여인은 이렇다 할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천휘도 그렇지만, 여인은 더욱 말이 없는 듯 그저 시간만 축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나자, 다시 한 번 방의 문이 열렸고 그제야 여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와아, 진짜 대단하네. 나도 그렇지만, 어떻게 말 한마디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을 수가 있지?”
무려 10분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심지어 움직임도 없었던 여인. 천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는 이내 생각을 접고 상념에 빠져 들었다.
‘격투가, 즉 파이터에서 피스트마스터로 전직하려면 적어도 피스트 마스터리를 중급 3단계까지 올려야 하지. 하지만 차근차근 올리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흐음, 알아봐야겠어.’
천휘가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이내 방문이 열리고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분.”
“어라? 벌써?”
자신이 아무리 상념에 빠져 들었다고는 해도 확실히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었다. 조금 전 필리언이라는 사내가 대략 10분 정도 소요된 반면, 그 여인은 고작해야 5분 정도 만에 테스트가 끝난 것이다.
“뭐, 본래 사제였으니 레벨이 높았을 수도 있지.”
천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호오.”
방 안은 특이하게도 일본풍으로 꾸며져 있어 마치 유도장을 연상시켰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유도를 지정 운동 종목으로 가르치고 있어 유도장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천휘였다.
“어서 오게. 심사관 아렌이라고 하네.”
“천휘입니다.”
“특이한 이름이군. 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바로 테스트를 시작하도록 하지. 테스트라고 해봐야 기량을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알아보는 것이니 긴장하지 말게. 이 바위를 부숴보게.”
“…….”
조금 전의 말과는 전혀 상반된 테스트에 천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심사관을 바라봤다. 겉은 멀쩡하게 생겨서 아무래도 말장난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부수면 되는 거요?”
조금 전의 존대는 이미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천휘였다. 현실에서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스물여덟 순수 청년이지만, 이곳 『오벨리스크』에서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걸 하고 마는 열혈청년이 바로 천휘다.
“당연하네. 할 수 있으면 해보게.”
자신만만한 천휘의 말에 아렌은 다소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아렌의 냉소적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천휘는 입을 다물며 테스트용 바위 앞에 섰다. 그리고는 바위 주위를 천천히 돌며 바위에 손을 살짝 가져갔다.
‘단단하네. 아무래도 어떤 금속 성분을 함유한 바위 같은데?’
아직까지 아르니안 대륙에서 경험이 많지 않은 천휘이기에 눈앞의 바위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대략 보통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포기할 텐가?”
천휘가 다소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아렌이 슬쩍 물었다. 하지만 천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바위 앞에서 보폭을 넓게 자세를 잡았다.
‘이중극점! 내가 이 바위를 깨려면 그것밖에 없다.’
천휘가 가지고 있는 최강의 스킬은 단연 이중극점이다. 거기에 더해 조합이 가능한 악마의 숨결을 더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아직 중급에도 이르지 못한 숙련도로는 요원한 일이었다.
“하압!”
“호오, 대단한 기합이로군!”
천휘가 바위를 앞에 두고 강렬한 기합을 내질렀다. 그에 아렌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지만, 천휘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천휘에겐 오로지 바위만 보일 뿐이었다.
“이중극점!”
주변에 자신을 건드릴 이가 아무도 없으니, 천휘는 마음 놓고 이중극점을 펼치기 위한 마나를 모으고는 곧바로 그 힘을 주먹에 담아 바위를 향해 내질렀다.
콰앙!
“이- 이런!”
이중극점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짧고 굵은 충격음에 아렌이 식겁하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거요?”
“이- 이럴 수가!”
천휘의 득의양양한 말에도 아렌의 눈빛은 오로지 예의 그 바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렌은 역시나 뛰어난 격투가인 듯, 이중극점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바위의 현재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한 건가? 설마 발경을 익히고 있는 건가?”
아렌의 물음에 천휘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테스트는 끝난 거요?”
“이 사람아,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을 건가? 어서 말해보게. 조금 전 펼친 기술이 발경인가? 아니지. 발경만으로 이렇듯 블랙 아이언 원석을 산산조각 낼 수는 없지. 어떻게 한 건가?”
“내가 왜 내 비밀을 당신에게 말해야 하지?”
조금 전 아렌이 자신을 향해 냉소를 짓던 것이 아직까지도 앙금이 남았는지 천휘의 말은 냉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흐음.”
바스슥.
천휘의 말에 낮게 신음하던 아렌이 바위를 보자, 이윽고 굳건했던 바위가 가루로 변했다. 그 모습에 아렌의 인상은 더욱 굳어졌다.
“테스트는 끝났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해줄 수…….”
“그럼 난 이만.”
아렌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천휘는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쪽이 아닐세. 이쪽으로 나가야 비로소 직업을 얻을 수 있지. 그리고 격투가로서 필요한 스킬들도 배울 수 있고.”
천휘가 방을 나서려고 하자 긴급히 아렌이 말했다. 그 말에 천휘는 스윽 뒤로 돌아 아렌이 가리킨 문으로 향했다.
“정말 말해주지 않을 텐가?”
“…귀찮게 구시네. 대체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요?”
자신을 따라오며 쫑알쫑알 말을 늘어놓는 아렌이 짜증스러운지 천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반문했다.
“아직 내 소개를 제대로 못한 것 같군. 난 격투가 길드 오베른 지부장이자, 오라마스터인 아렌이라고 하네.”
“오라마스터?”
오라마스터라면 오로지 격투가로서 두 번이나 승급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신체의 극한을 이룬 직업이었다.
그 위로 챔피언이라는 직업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 경지에 도달한 격투가는 유저나 NPC 통틀어도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 그대가 펼친 기술에 집착하는 이유는 최근 내가 연구하고 있는 기술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지. 게다가 내가 얼마 전 카르페 디엠 암시장에서 사려고 했던 이중극점이라는 기술과도 매우 흡사해. 가르쳐 주게. 그게 어떤 기술인지.”
아렌의 말에 천휘는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이중극점은 바로 아렌이 사고자 했던 바로 그 이중극점이기 때문이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가르쳐 드릴 수 없군요. 당신도 자신만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해해주세요.”
도저히 자신이 익힌 기술이 이중극점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듯 천휘는 완곡한 말로 거절했다. 게다가 이전과는 달리 말투도 어느새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에 대한 미안함이 든 것이다.
“휴, 그런가? 어쩔 수 없지. 그 문으로 나가면 앨리샤라는 여인이 있을 걸세. 그 여인에게 테스트에 통과했다고 하면 격투가로 전직할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그럼.”
급히 아렌에게서 떨어지려던 천휘는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여전이 아렌은 아쉬움이 남는지 문을 나서는 천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면 날 찾아주게! 꼭 보답하겠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아렌의 간절한 외침에도 천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수고하셨어요.”
[띠링! 부직업이 격투가가 되셨습니다.]
[띠링! 근력과 민첩성이 30 상승합니다.]
앨리샤에게 전직 신청서를 건네자, 곧바로 격투가로 전직했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스킬북은 어디서 구매합니까?”
“2층으로 올라가시면 스킬북 상점이 있어요. 그곳에서 사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앨리샤의 친절한 안내에 천휘는 곧바로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여어, 또 만났네?”
“…아직 안 갔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헤어지면 섭섭하잖아?”
“별로.”
“하하하! 재밌는 녀석일세. 아무튼 스킬북 사려고 하는 거지? 같이 가자. 나도 마침 몇 가지 스킬북을 사야 하니까.”
“…….”
언제 만났다고 친근하게 어깨에 손까지 올리는 필리언을 보며 천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필리언은 제법 근력이 뛰어난 듯 천휘를 억지로 끌고 위로 올라갔다.
“어라? 사람이 별로 없네?”
필리언의 말대로 2층 스킬북 상점에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거 놔!”
“쳇, 까칠하게 굴긴.”
2층에 도착하자 천휘가 급기야 화를 내며 필리언을 뿌리쳤고, 그는 못마땅한 듯 천휘를 바라봤다.
“그럼 좀 있다가 보자고. 서로 사려는 스킬이 다를 테니까 말이야.”
‘누가 물어봤나.’
필리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천휘는 인상을 구기고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세 가지라면 P v P는 물론이고 몬스터 사냥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이곳에서 파는 스킬이라고 해봤자 다들 노멀 스킬이니, 꼭 필요한 피스트 마스터리와 오라 마스터리, 그리고 연타만 익히는 게 낫겠지. 육체 단련도 쓸 만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몇백 배는 좋은 고루마공이 있으니 쓸모없을 테고.’
천휘는 한참을 고민하다 이내 3가지 스킬북만을 집어 들었다.
필리언은 뭘 그렇게 살 것이 많은지 상점 안을 휘젓고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휘는 그 몰래 1층으로 내려와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치고는 곧바로 길드를 나섰다. 괜히 그와 같이 있어서 피곤해지기 싫은 탓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가볍게 몸이나 좀 풀고 로그아웃할까?”
격투가 길드에서 나와 저택으로 향하던 천휘는 현실 시간을 가늠하더니, 곧바로 발길을 남문으로 향했다. 오베른 주변에서 가장 고위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 바로 오베른 남쪽의 헤론 습지였기 때문이다.
“아, 맞다. 생각해보니, 피스트 마스터리를 속성으로 숙련도를 높일 방법을 물어보지 않았잖아? 젠장, 그 아렌이라는 아저씨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알려 주진 않을 것 같고……. 빌어먹을! 이중극점을 하나 더 구해봐야 하나?”
남문으로 향하던 도중 천휘는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라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바로 피스트마스터가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인 피스트 마스터리의 속성 수련 방법.
하지만 그러한 수련법을 알고 있을 법한 오라마스터 아렌에게는 말 못한 빚이 있는 탓에 천휘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뭐, 나중에 생각하고 오늘은 빌어먹을 몬스터들이나 사냥해보실까? 냥이, 나와!”
남문 밖으로 나선 천휘는 곧바로 냥이를 빙옥에서 꺼냈다.
“꺄아아악!”
“으아아악! 샤벨 타이거다!”
“가-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하지만 온통 아렌 생각에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한 천휘는 금세 곤욕을 치러야 했다. 냥이를 샤벨 타이거로 착각하고 남문 근처에 있던 유저들과 NPC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젠장! 냥이! 고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결국 천휘는 무한의 행낭에서 일전에 사둔 검은 로브를 꺼내 얼굴을 가리고는 냥이의 등에 올라탔다.
크워어엉!
“으아아악! 움직인다!”
“저 사람은 뭐야? 샤벨 타이거의 등에 올라타다니. 미친 거 아냐?”
냥이의 등에 올라탄 천휘를 보고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군거렸다. 하지만 천휘는 그런 소리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냥이를 출발시켰다.
냥이는 이내 광속의 스피드로 헤론 습지를 향해 달려 나갔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더해만 갔다.
“야, 저걸 보고 뭐라는 줄 아냐?”
“뭔데?”
냥이를 타고 헤론 습지로 나아가는 천휘를 보며 한 어린 소년이 말했다.
“얼마 전에 국어 시간에 배웠다고. 저런 걸 바로 기호지세라고 한다는 걸.”
“이야, 똑똑한데? 그거 사자성어라는 거 아냐. 근데 그게 무슨 뜻이냐?”
“바보야! 딱 보면 척이지. 죽으려고 환장한 놈을 보고 기호지세라고 하는 거야. 바로 저놈처럼!”
“우와, 짱인데? 좋아. 나도 나중에 여자 친구한테 써 먹어야겠다. 기호지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