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참격의 기사 (6/82)

제5장 참격의 기사

끼이익.

다행히 문에는 이렇다 할 트랩이 설치되지 않았는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친 소! 더 세게 밀어!”

음메에!

천휘의 명령에 미친 소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괴력을 토해냈다.

휘이잉!

“응? 웬 바람이?”

미친 소가 문을 끝까지 밀어젖히자, 별안간 천휘의 콧잔등을 스치는 바람이 불어왔다. 밀폐된 공간인 무덤 안이기에 바람 한 점 불 일이 없을 텐데도 사람이 느낄 정도로 확연한 바람이 불었다.

“흐음, 의외로 심플하네?”

문 안의 풍경은 단순했다.

지상까지 닿을 만큼 높다란 천장.

홀 안에 가득한 토관들.

그리고 그들이 기사들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반대편 벽에는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양각되어 있었다.

덜컹!

“응?”

그렇게 홀 안으로 들어서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사이, 천휘의 귀로 불안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천휘의 머리카락이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쳤고 그는 기겁하며 미친 소가 있는 곳까지 경공을 전개했다.

“말도 안 돼!”

덜컹덜컹.

덜컹덜컹.

수십 개에 달하는 관의 뚜껑이 조금씩 흔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 괴기스러운 장면에 천휘의 머리카락은 마치 젤을 바르기라도 한 양 곤두서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젠장! 녀석들이 일어나길 기다릴 필요가 뭐 있어! 미친 소! 관 뚜껑이 열리면 배틀액스로 조져 버려!”

음메에!

관에서 온통 죽은 기사들의 좀비가 나올 것 같은 불안감에 천휘가 미친 소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미친 소는 이제껏 보여 주지 않은 놀라운 움직임으로 관 사이를 누비며 뚜껑을 열고 나오는 녀석들을 정확하게 배틀액스로 내리찍고 있었다.

“…두더지 잡기 하냐?”

미친 소가 하는 짓은 말 그대로 두더지 잡기, 아니 좀비 잡기였다. 순차적으로 올라오는 좀비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리찍는 미친 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 와서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순진한 표정으로 두더지를 향해 맹렬하게 망치를 휘두르는 어린아이들의 무서움이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천휘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아직까지도 좀비 잡기에 여념이 없는 미친 소를 바라봤다.

음메에에에에!

모든 관을 박살내고 나서야 배틀액스를 내려놓은 미친 소는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며 마치 킹콩처럼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 네 팔뚝 굵다.”

미친 소를 뒤로하고 천휘는 산산이 부서진 관을 살폈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관의 형상은 온데간데없고 그 안의 좀비들도 대부분 피 떡이 된 듯했다.

“이야, 이 미친 소 진짜 확실하게 떡을 쳐 놨네. 흐음, 그럼 이제 남은 건 저 관 하나뿐인가?”

홀에는 유독 하나의 관만이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 관은 특이하게도 거대한 검 조각상 바로 아래 배치되어 있었고, 다른 관들이 줄기차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처음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관 자체의 크기도 다른 관들보다 두드러지게 거대했다.

“뭔가 특별한 기사의 시체가 있는 모양인데, 상황으로 봐서는…….”

천휘는 곧바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냥이야, 저 관 뚜껑을 열…….”

콰앙!

푸슈우!

천휘가 막 냥이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갑자기 폭발음이 터져 나오더니, 관 뚜껑이 하늘로 치솟고 그 안에서 희뿌연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만 관에서 흘러나올 뿐, 기대했던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기다림이 답답했는지 천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꾸물거리지 말고 튀어나… 헉!”

콰앙!

천휘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예의 그 관에서 풀 플레이트를 갖춰 입은 기사가 튀어나오더니, 곧바로 천휘를 향해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하지만 천휘의 앞에는 미친 소가 있었다. 상대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낸 미친 소는 허무하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마- 말도 안 돼!”

천휘는 놀란 눈으로 미친 소와 기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감히 이 몸의 단잠을 깨운 놈이 너냐? 앙?]

마치 기계음처럼 들리는 기사의 목소리.

그런 상대의 도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천휘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보고도 모르냐? 이 븅아?”

[호오, 감히 이 몸을 면전에서 마주하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이 대륙의 인간이 아니구나.]

기사의 음성은 조금 전과 달리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천휘를 향해 폭사되었던 살기마저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뭐지? 내가 유저라는 걸 안다는 건가? 확실히 평범한 보스 몬스터는 아니라는 소린가? 그러고 보니…….’

분명히 상대는 죽은 시체다.

피부색이 거무튀튀하고 수분이 모두 메말라버려 전신이 쭈글쭈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움직인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자아까지 지니고 있는지 감정의 표현도 능숙했다.

“당신, 정체가 뭐지?”

무심코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천휘는 지금 이 순간 그보다 중요한 물음은 없다고 생각했다.

[클클, 그렇게 묻는 이유가 뭐지? 보다시피 나는 좀비인데 말이야.]

“아니! 당신은 좀비가 아냐! 좀비라면 그렇듯 본래의 형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어! 게다가 좀비 주제에 말을 한다? 그건 더 이상 좀비가 아니지!”

천휘는 흥분한 듯 격앙된 어조로 말을 토해냈다. 하지만 자신을 좀비라 밝힌 기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네가 뭐라 하건 난 좀비다. 이 무덤을 지키는 참격의 기사 오베른이 바로 나다!]

“오베른?”

기사의 소개에 천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생각하다 이윽고 그것이 테오른 왕국의 수도 이름임을 기억해냈다.

“테오른 왕국의 수도 오베른?”

[후훗, 그렇다. 이 몸은 건국대제 테오른의 아우이자, 왕국 최고의 로열 나이트였던 오베른이다!]

“…….”

오베른의 자신만만한 말에 천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시체는 적어도 5백 년 이상 저 관 안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무려 5백 년을 썩지도 않고 보존된 시체라니. 특수한 화학적 처리를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해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감히 성스러운 이 땅을 헤집고 다닌 이상 네놈의 목숨은 더 이상 없다. 각오하라!]

더 이상 천휘에게 흥미가 돋질 않는지 오베른의 클레이모어가 하늘 높이 들렸다.

그러나 천휘는 흉흉한 광경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오베른을 바라봤다.

“당신, 오베른 아니지?”

[…뭣이?]

천휘의 난데없는 물음에 오베른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자신이 오베른이라고 생각해?”

[난 기사 오베른이다! 자랑스러운 이 나라의 수호신이었던 기사 오베른이란 말이다!]

천휘의 물음에 오베른이 클레이모어를 높이 치켜 올리고 자신만만한 어조로 소리쳤다.

“흐음, 그래? 그렇다면 어떻게 오백 년 전의 인물인 당신이 내 앞에 있을 수 있는 거지? 그것도 그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야.”

[하하하! 나는 살아생전 그랜드 소드마스터였던 사람이다! 그것도 소드엠페러를 목전에 둔! 이 몸이 평생 쌓았던 거대한 마나가 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내 몸을 보존해주고 있는 것이지! 으하하하!]

“…….”

오베른의 자부심 가득한 말에도 천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이봐, 내가 하나 알려 줄까?”

[응? 뭘 말이지?]

“인간이 체내에 축적한 마나는 사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모두 사라져. 그것이 마나에 마 자도 모르는 보통 사람이건 그랜드 소드마스터건 상관없이 말이야. 당신이 무슨 드래곤이라도 되는 줄 알아?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체내에 마나가 남아 있게.”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천휘의 예리한 지적에 오베른은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거렸다.

“한마디로 당신이 현재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당신 몸이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당신! 정말 그 오베른이라는 작자가 맞긴 하는 거야?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기는 하는 거냐고.”

[…….]

천휘의 물음에 오베른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천휘를 쳐다봤다. 이내 오베른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크워어엉!

음메에에!

그러자 잠자코 있던 냥이와 미친 소가 천휘의 앞을 가로막았다. 미친 소는 조금 전 오베른의 일격에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철골강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뭐냐.]

오베른의 음성은 조금 전과 달리, 다소 불안한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놓치지 않고 천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이 죽은 뒤에 이곳은 흑마법사들이 연구를 하던 모종의 비밀 장소였어. 내 생각에는 말이야, 그들이 이승을 떠돌던 원혼이었던 당신에게 새로운 육체를 줘서 당신을 이렇듯 움직이게 만들었을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네 말은…….]

“그래. 당신의 몸은 살아생전의 인간 몸뚱이가 아니라, 흑마법사들이 몬스터들의 신체로 만들어낸 키메라야.”

천휘의 말에 오베른의 표정은 사색으로 변했다. 물론 시체인 탓에 본래부터 얼굴빛이 시커멓긴 했지만.

“궁금하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그 갑갑한 풀 플레이트 갑옷을 벗어봐. 더 궁금하다면 거울로 얼굴을 확인해도 좋고. 아마 얼굴도 다른 인간의 것일 공산이 크니까.”

천휘의 말에 오베른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풀 플레이트 갑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흉갑을 벗으니, 그 안에는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우락부락한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오우거나 그 비슷한 몬스터의 몸체를 쓴 모양이었다.

오베른은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흉갑 아래 걸치고 있던 사슬 갑옷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양팔이 드러났고, 그의 양팔은 흡사 미친 소의 그것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한마디로 양팔은 미노타우로스의 것을 붙인 듯했다.

“이제 어느 정도 파악…….”

그 이상 오베른이 갑옷을 벗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그를 제지하려던 천휘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공허하기 짝이 없는 얼굴.

흡사 처음 예슬 고등학교에 부임하고 시영과 희영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의 자신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오베른은 계속해서 갑옷을 벗어나갔다.

다리는 켄타우로스의 강인한 앞다리였고, 전체적인 피부 조직은 트롤의 그것인 듯 탄력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손과 발, 그리고 얼굴은 인간의 그것이라는 점이었다.

[…거울이 있나?]

“…여기 있다.”

오베른의 공허한 물음에 천휘 역시 힘없는 얼굴로 행낭에서 거울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정말 내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 아니군.]

“…….”

마지막 말을 내뱉은 오베른의 얼굴은 기이하게도 편안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 공허했던 표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 몸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하지만 두려웠다. 진실을 깨닫는 것이…….]

“…….”

자신도 그랬다.

희영과 시영이 붙어 다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으면서도 홀로 그것을 부정하고 애써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이렇게 진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흐음.”

[내 몸은 이렇게 변했을지라도 난 여전히 테오른의 수호 기사 오베른이다! 내 정신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와라! 신성한 기사들의 잠을 깨우는 네 녀석을 용서치 않겠다!]

다시금 폭사되는 오베른의 투기.

갑옷도 갖춰 입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무거운 짐을 던 듯 그의 안광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쳇, 할 수 없나? 미친 소, 냥이!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일제 공격이다!”

크워어엉!

음메에에!

“타아앗!”

냥이가 가장 먼저 흉성을 토해내며 오베른의 가슴을 향해 앞발을 내리쳤다. 그러나 오베른의 다리는 강인한 켄타우로스의 그것.

쉽사리 냥이의 공격을 피해낸 오베른은 곧바로 거대한 클레이모어로 냥이를 공격했다.

콰앙!

하지만 오베른의 공격은 미친 소의 배틀액스에 가로막혔다. 오베른이 흑마법사들이 만든 키메라라고 하면, 미친 소는 최고의 강시술사 천휘가 만든 철골강시. 미친 소가 근력에서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타앗! 악마의 숨결!”

천휘는 처음부터 강력한 스킬로 오베른을 공격했다. 거대한 체구인 데다 키메라인 덕에 엄청난 방어력을 지닌 오베른을 상대로 잔공격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콰앙!

[어디에서 날파리가 날아드는 것이냐!]

엄청난 충격음이 들려왔음에도 오베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천휘를 향해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콰앙!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는 충격음.

이번에도 오베른의 공격을 미친 소가 배틀액스로 막아냈다.

캬오오!

그사이 냥이가 오베른의 어깨 위로 올라가 앞발로 오베른의 머리를 마구 가격했다. 오베른은 그런 냥이를 떼어내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냥이 역시 강력한 힘으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좋았어, 지금이 기회다!’

냥이와 미친 소가 광풍처럼 오베른을 몰아넣고 있는 사이 천휘는 나이트 골렘을 산산조각 낸 이중극점을 준비했다.

[무슨 꿍꿍이냐!]

천휘가 얕은꾀를 부리려는 것을 눈치 챈 오베른은, 냥이의 공격을 신경 쓰지도 않고 천휘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강력한 참격을 터트렸다.

콰아아앙!

하지만 역시나 그의 공격은 미친 소에게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오베른의 참격을 받아낸 미친 소의 배틀액스는 걸레가 됐고, 미친 소 자신 역시 육중한 체구가 끈 떨어진 연처럼 저만치 날아갔다.

“빌어먹을! 이거나 먹어라! 이중극점!”

퍼엉!

[끄아아아!]

행여나 공들여 만든 미친 소가 부서졌을까 봐 천휘는 분노를 토해내며 오베른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렀다. 그에 악마의 숨결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오베른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헐, 이거 정말 엄청난 스킬이잖아?”

이중극점의 엄청난 파괴력에 천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미친 소의 배틀액스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던 오베른이, 냥이의 날카로운 앞발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던 오베른이, 작디작은 자신의 주먹에 무너지는 모습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야! 이래서 사람들이 전사나 기사를 하는 거라고!’

천휘는 주먹에 느껴지는 전율에 엄청난 희열감을 느꼈다.

천 제국에서 강시술사로 활동할 때만 해도 늘 강시들의 뒤에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자신이 한없이 멍청해 보일 지경이었다.

[크윽, 제법 주먹이 매서운 녀석이군.]

“헙!”

그렇게 희열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어느새 오베른은 배를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만 해도 천휘의 공격에 분명히 명치 부근이 움푹 파여 있었지만, 트롤의 재생 능력 덕택인지 다시 원래대로 복구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이대로 한 번 죽는 건가? 천 제국에서도 그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죽지 않은 내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휘의 머리카락은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곤두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검은 불꽃이 천휘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

“…….”

그러나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오베른은 그저 침묵을 고수하며 천휘를 바라봤다.

그에 천휘도 입을 다물고 오베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무도 슬픈 눈이다.’

[띠링! 퀘스트 ‘슬픈 기사의 소원’이 발동되었습니다.]

비록 키메라의 몸으로 변했으나, 여전히 긍지 높은 기사도를 자랑하는 참격의 기사 오베른. 그의 소원은 다시 한 번 긍지 높은 기사가 되어 아르니안 대륙을 누비는 것. 그의 소원을 들어줘라.

난이도:C+

기한:없음

보상:그랜드 소드마스터 오베른

천휘가 그의 눈빛이 슬프다고 여기는 순간, 갑자기 퀘스트가 발동되었다.

잠자코 퀘스트의 설명을 읽던 천휘는 이윽고 오베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이곳을 나가지 않겠어?”

[…….]

“무려 오백 년이나 이곳에 갇혀 있었잖아. 내가 보기에 당신은 죽어서도 다시 한 번 그 무위를 펼쳐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참격의 기사씨?”

[어떻게 내 별명을?]

5백 년 전에 사람들이 자신을 칭송하며 부르던 애칭이 천휘의 입에서 나오자, 오베른은 깜짝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어때, 오베른. 당신, 나와 함께 세상으로 다시 나가보지 않겠어? 이래 봬도 나 꽤 강하다고.”

[…….]

천휘의 물음에 오베른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나의 열정은 죽어서도 식지 않았다. 언제나 나는 강자들과의 대결에 목말라 있지. 네 말에 따르겠다.]

“하하하, 잘 생각했어! 당신은 이제 아르니안 대륙에서 내 첫 번째 천마강시가 될 거야!”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올린 천휘는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웃었다. 그리고 오베른 또한 지금의 상황이 나쁘지는 않은지 살짝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걸 모아서 뭘 어쩌려는 거냐?]

“이걸 가져가면 안 되나?”

천휘는 오베른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미친 소와 냥이를 빙옥에 들여보내고, 오베른과 함께 죽은 기사의 무덤을 빠져나오며 지하 3층에 산재한 죽은 기사의 심장들을 대거 채취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오베른은 못마땅한 듯 물었다.

[그것은 이곳에 묻힌 기사들의 긍지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나라를 위해 평생을 살다 죽어갔고, 더불어 그 공로를 인정받고 이곳에 묻힌 것이다. 그런 기사들의 긍지를 짓밟으려는 것이냐?]

오베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고지식한 기사의 전형을 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했다.

“이건 그저 돌멩이에 불과해. 기사들의 긍지? 긍지라는 것은 살아 있을 때나 필요한 것이지 죽어서까지 필요한 건 아냐. 저들이 긍지를 알고 있었다면 순리를 거스르고 좀비로 재탄생된 건 뭔데? 오히려 그런 게 더 기사들의 긍지를 잃어버린 꼴 아냐?”

[…….]

천휘의 일목요연한 대꾸에 오베른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는 무려 2미터를 상회하는 거대한 체구를 굽히고는 천휘와 함께 죽은 기사의 심장을 줍기 시작했다.

[네가 뭐라 해도 이 돌멩이는 기사들의 혼이 담긴 물건이다. 하지만 네 말처럼 저들이 좀비가 된 이상 이 물건은 그저 한낱 돌멩이에 불과하겠지.]

“꼭 그렇게 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저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본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좀비가 되고, 키메라가 된 것뿐이니까. 나쁜 녀석들은 네 녀석들을 이렇게 만든 흑마법사들이지.”

자신을 위로하는 천휘의 말에도 오베른은 그저 묵묵히 죽은 기사의 심장들을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주워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천하의 천휘라도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녀석들에게 복수하지 않을래?”

[복수?]

뜬금없는 천휘의 물음에 오베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복수.”

[어떤 녀석들을 말하는 거지?]

“흑마법사들. 정확히 말하면 너를 그 꼴로 만든 흑마법사들. 어때?”

[…가능하겠나?]

천휘의 말에 오베른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하며 반문했다.

“오베른, 당신이 얼마나 나를 도와주는가에 따라 달렸지. 전에도 말했지만, 난 생각보다 강하거든.”

[날 이 꼴로 만들어서 녀석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날 깨워줬기에 이 시대의 강자들과 대결을 펼칠 수 있게 됐으니 감사할 따름이지. 하지만 이 나라의 충신인 기사들을 좀비로 만든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저들은 기사의 긍지를 짓밟았어. 녀석들은 내 손으로 처단한다. 그전까지 나는 당신의 검이 되겠다.]

“후후, 좋아.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어. 녀석들에 대한 단서가 마땅치가 않거든.”

[나는 불사의 존재. 그것이 수십 년이 되었든 수백 년이 되었든 계약이 끝나는 그날까지 나는 당신의 검일 것이다.]

[띠링! 퀘스트 ‘오베른의 복수’가 발동되었습니다.]

죽은 기사들의 무덤에 침입해 기사들을 좀비로 만들어버린 흑마법사에 대한 원한이 대단하다. 오베른은 무슨 수를 강구해서라도 녀석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고 싶어 한다. 그를 도와 불사를 연구하는 흑마법사들을 처치하라.

난이도:A-

기한:없음

보상:알 수 없음

확실히 오베른은 뼛속까지 완벽한 기사도로 무장한 고리타분한 기사였다. 그러나 천휘는 그런 녀석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외골수.

그들은 융통성이 없는 것일 뿐, 자신의 분야에서는 단연 최고인 사람들이었다.

[그만 주워라! 기사들의 긍지가 이 무덤에 조금은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하지만 녀석은 좀 심하다.

웅성웅성.

“저 사람 좀 봐. 뭐가 저렇게 크지?”

“적어도 2미터는 넘겠는데?”

“저 클레이모어는 또 어떻고. 저걸 사람이 휘두를 수 있기는 한 거야? 적어도 오우거 정도는 되어야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수도 오베른으로 돌아온 천휘 일행은 곧바로 시가지를 경유해 마탑으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 사람들의 이목은 천휘의 뒤에서 검은 망토를 두르고 따라오는 오베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인기 많다?”

[원래 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오백 년이 흘렀다고는 하나, 이 몸의 남자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넌 지금 예전의 오베른이 아니라니까.”

[상관없다. 내 뜨거운 가슴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젠장, 왜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똥이 굵은 자식들이 많아?”

[응? 똥이 굵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됐어, 인마. 잘 따라오기나 해.”

장난스럽게 던진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오베른이 못마땅한지 천휘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아, 잠깐 여기에서 기다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서 움직이지 말고. 알았지?”

[그러지.]

마탑의 입구에 도착한 천휘는 오베른을 앞에 세워두고 마탑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1층에서는 전직 상담을…….”

“2층.”

“왼쪽 마법진입니다. 사용료는…….”

“여기.”

마탑에는 한 번 와본 터라 천휘는 여인의 말을 뚝뚝 잘라먹고 20골드를 건넨 채 2층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 어머? 이게 누구에요? 당신은!”

“죽은 기사의 심장 구해왔으니, 어서 지부장이나 만나게 해주지?”

“오랜만에 와서 왜 그렇게 까칠하담. 가만히 있어 봐요. 위층에 연락 좀 해보고요.”

천휘의 까칠한 말에 세레나 역시 까칠하게 대답하며 카운터에 놓인 수정 구슬에 손을 얹고 마나를 주입했다.

“마침 마스터께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네요. 곧바로 올려 보내드리죠. 이리 오세요.”

이내 연락을 받은 세레나가 천휘를 데리고 상점 오른쪽에 활성화된 이동 마법진으로 향했다.

“위로 올라가세요.”

“이상한 데로 보내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당신 같은 줄 알아요! 입 다물지 않으면 정말 드래곤 산맥 한복판으로 보내버릴 거예요!”

“흠흠.”

세레나의 엄포에 천휘는 이내 헛기침을 내뱉으며 눈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럼 잘 가세요. 흥! 텔레포트!”

파앗!

스파앗!

최근 들어 자주 경험하는 이동 마법이었지만, 천휘는 아직까지 적응이 되질 않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자네가 천휘라는 젊은이인가?”

인상을 찌푸리던 천휘는 귓가에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게렌 드 필리얀 대마법사이십니까?”

“호오,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의외로구먼. 세레나에게 들었을 때는 싹수가 노란 젊은이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세레나!’

천휘는 속으로 세레나를 욕하고는 다소 굳은 얼굴로 눈앞의 노마법사를 바라봤다.

아직까지 유저 중에서는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다는 8서클의 영역.

추정 레벨 400 이상의 괴물.

거기에 더해 천휘가 따로 알아본 바로, 눈앞의 노괴물은 8서클 최강 대인 마법 중 하나인 헬파이어를 익히고 있는 화염계 대마법사였다.

“여기 부탁하신 죽은 기사의 심장을 가져왔습니다.”

노마법사를 계속 바라보던 천휘의 머리카락이 살짝 곤두섰다.

천휘는 곧장 할 말만 마치고 떠나려는 듯 무한의 행낭에서 죽은 기사의 심장 수십 개를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많이도 가져왔군. 이 정도로 많은 숫자를 가져왔다면… 역시나 ‘그자’를 깨운 건가?”

“…….”

과연 세수 백세가 다 되어가는 노괴물답게 오베른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천휘는 그런 것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하겠다는 건가?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지. 자, 여기 던전의 위치가 적힌 지도들과 던전 입장과 관련해 필요한 라이선스 카드일세. 자네는 이제 마탑 오베른 지부의 명예 회원일세.”

[띠링! ‘마탑 지부장의 부탁’이 종료되었습니다.]

[띠링! 보상으로 지도와 카드를 받으셨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노마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곳을 나가려던 천휘는 귓가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발길을 멈춰야 했다.

“이보게, ‘그자’를 깨웠다면 당연히 그를 그렇게 만든 흑마법사를 쫓으려 할 테지? 어떤가? 내가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말이야.”

예상외의 말에 천휘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노마법사를 쳐다봤다.

“이래 봬도 백 년 전에 이곳 오베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일세. 그 정도도 모를까 봐?”

천휘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노마법사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왠지 얄미운 노인네네.’

노마법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기양양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천휘는 그런 노인네가 얄미워 툭 한마디 내뱉고는 곧바로 이동 마법진에 올라섰다.

“즐.”

[정말 금방 나오는군.]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것 봤어? 아무튼 가자. 아직 더 둘러볼 데가 남았어.”

[그러지.]

오베른의 주변에는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탑의 입구에서 무려 한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던 탓에 사람들이 그를 신기하게 여겨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휘와 오베른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사람들을 헤집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음침한 곳에 볼일이 있나?]

천휘가 오베른을 대동하고 향한 곳은 수도 오베른 서쪽에 위치한 암흑가였다.

언제나 빛이 있으면 그 반대편엔 어둠도 있는 법.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의 오베른이라고는 해도 이런 곳은 당연히 있기 마련이었다.

“음침하긴. 네가 이천 배는 더 음침하거든?”

[흠.]

천휘는 오베른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암흑가의 심처로 이동했다. 하지만 괜히 암흑가가 아닌 듯 그들의 주변으로 수상한 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지.”

“뭐지?”

급기야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한 명이 천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내의 옆에는 건장한 체구의 불량한 사내들이 함께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마음대로 들어오는 거지?”

“여기? 쓰레기들이 사는 시궁창 아냐?”

“뭐- 뭐라고!”

사내의 물음에 천휘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고 그 말에 사내는 기가 막힌 듯 언성을 높였다.

“이런 호래자식을 봤나! 더 두고 볼 것도 없어! 피 떡을 만들어버려!”

사내의 명령에 그의 옆에 서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천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천휘 뒤에 서 있던 오베른이 등에 메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양손에 들고 땅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콰아앙!

“으으윽!”

“세- 세상에!”

오베른의 일격은 땅에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 사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도저히 인간이 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괴력 앞에 사내들은 겁에 질린 신음 소리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때, 쓰레기들? 더 덤벼 볼래?”

“으윽.”

오베른의 일격에 사내들은 처음 나타난 털보 사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털보 사내 역시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두 비켜라.”

“아, 마스터!”

사내들이 그렇게 겁에 질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홀연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들에게 마스터라 불린 여인은 검은색 가죽 재킷에 검은색 가죽 치마를 입은 채 오베른이 만든 크레이터 앞까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무슨 볼일이지?”

‘젠장! 왜 이 나라에서 한가락 한다는 여자들은 죄다 까칠한 거냐고! 요새 트렌드인가?’

여인의 물음에 딴생각을 하던 천휘는 이내 대답했다.

“알아서 뭐 할 건데?”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

여인의 까칠한 물음에 천휘 역시 까칠하게 대답했다.

“저런 미- 미친놈이!”

“이- 이분이 감히 누군 줄 알고!”

그런 천휘의 반문에 사내들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천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조용조용. 내가 알아서 뭐 할 거냐고? 내가 바로 이 거리의 넘버 투이자, 정보 길드의 마스터 비앙카이기 때문이지. 무슨 소리인 줄 알겠나?”

소리치는 사내들을 진정시킨 여인은 천휘에게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전했다.

그러자 천휘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닫혔던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됐네.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을 찾은 거니까 말이야.”

“그럴 줄 알았지. 당신 같은 사람이 이곳을 오는 이유는 뻔하거든. 안으로 들어가지. 날 따라와.”

“훗. 뭐, 그러지.”

천휘는 오베른을 대동한 채 여인을 따라 암흑가의 심처로 향했다. 미로같이 복잡한 길이라 길이라도 잃는다면 큰 낭패를 볼 법한 곳이지만, 제대로 된 길잡이가 있는 마당에 그런 걸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곳에 앉아라.”

여인이 안내한 곳은 작은 주점이었다.

워낙 작아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구의 오베른은 밖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호위 기사가 없는데도 천하태평이군. 어떤 위험이 닥쳐도 상관없을 만큼 힘을 지녔다는 소리겠지?”

“마음대로 생각해. 그보다 이런 눅눅한 곳에 오래 있을 생각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그 전에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말이야. 잠시만 기다려.”

여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천휘는 살짝 기분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든 탓이다. 하지만 천휘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내가 늦은 모양이군.”

“마스터.”

10분가량이 흘렀을까.

천휘와 여인 단둘만 있는 주점 안으로 중년 한 명이 들어왔다. 젊었을 적 여자깨나 울렸을 법한 미남자였다.

“이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갈릭이라고 하네.”

“천휘요.”

“허허, 젊은이가 뿔이 많이 난 모양이군.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얻고 싶은 정보가 뭐지?”

천휘의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갈릭은 웃는 낯으로 물었다.

“내가 얻고 싶은 건 두 가지요. 하나는 마탑 오베른 지부에서 장악하고 있는 던전의 상세 정보와 백 년 전, 죽은 기사의 무덤에서 연구를 하던 흑마법사들의 현 위치가 그것이오.”

“흐음, 첫 번째 건은 그렇다 치고, 두 번째 건은 이해하기 힘들군. 이유를 물어도 되나?”

“내가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갈릭의 물음에 천휘는 쫙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발적인 음성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갈릭의 얼굴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뭐, 우리야 돈만 벌면 되는 거니까. 첫 번째 정보는 어렵지 않네. 하지만 두 번째 정보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시일이 걸릴 거야. 워낙 오래전인 데다 흑마법사들의 특성상 위치를 추적하는 것도 어려우니까. 적어도 A-급 이상의 정보지. 어떤가?”

“돈은 얼마든지 주지. 한 달 내로 내 손에 들어오게만 한다면 100만 골드를 내놓지.”

“호오, 역시 돈이 많군. 예상이 들어맞았어. 당신이 바로 암시장의 레전드 아이템들을 싹 쓸어간 골든 시크릿이로군.”

“골든 시크릿?”

처음 듣는 닉네임에 천휘는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골든 시크릿. 카르페 디엠 암시장에 나타나 수많은 귀족들과 길드마스터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며 유유히 사라진 인물. 현재 이곳 오베른에는 골든 시크릿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이질 않고 있지. 어떤가? 자네가 바로 그 골든 시크릿이 아닌가?”

“에? 내가? 큭. 그 골든 시크릿이라는 작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레전드 아이템들을 모조리 쓸어간 사람이라면 엄청난 갑부일 텐데. 내 모습이 그래 보이나?”

현재 천휘가 입고 있는 장비들은 따로 구입한 카이젠 와이번의 가죽 갑옷 세트였다. 테오른 왕국을 터전으로 삼은 격투가나 궁수들이 즐겨 입는 장비로서, 100레벨 중반의 유저들이 착용하는 중렙 장비였다.

“뭐, 그렇다고 해두지.”

갈릭의 의미 모를 미소에도 천휘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당신, 흑마법사지?”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천휘의 물음이 의외였던 듯 갈릭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암흑가의 보스라면 적어도 그만한 힘은 있을 테지. 암흑가를 구성하고 있는 길드의 면면을 따져 보면 흑마법사 길드, 정보 길드, 그리고 도둑 길드와 어쌔신 길드 정도가 있겠지. 당신은 도둑이나 어쌔신들처럼 살기를 숨기고 있지 않아. 흑마법사 맞지? 적어도 5서클 이상의. 내 말이 틀리나?”

“…눈썰미가 좋은 젊은이로군.”

천휘의 예상이 어김없이 들어맞았는지 갈릭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천휘는 그런 갈릭의 표정을 보고 이죽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원하는 건 흑마법사 길드에서 취급하는 시약들. 그중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건 그린 드래곤의 체액이다.”

“그린 드래곤의 체액? 그 물건을 어디에 쓰려는 거지? 그 맹독을 말이야.”

“그딴 건 묻지 말라고 하지 않았었나?”

“흐음.”

다시 한 번 갈릭에게 한 방 먹인 천휘는 이어서 말을 건넸다.

“보여 줄 수 있나, 흑마법사 씨?”

천휘는 이제 노골적으로 갈릭을 흑마법사 취급하며 물었다. 그에 갈릭의 표정은 이제 어둡다 못해 열불이 치미는 듯했다.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런 물건은 왜 가져온 거냐?]

“오베른, 널 더 강하게 해주려고.”

[날?]

천휘의 말에 오베른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난 지금도 충분히 강하다! 날 이길 수 있는 검사는 이 넓고 넓은 아르니안 대륙을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오만은 버려. 네가 절대 강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절은 이제 지났어. 너보다 강한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은 시대야.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어,”

[나 홀로 강해질 수 있다!]

“닥쳐! 좋게 말할 때 들어!”

오베른의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객기를 부리는 그를 천휘가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자 오베른은 입술을 삐쭉 내밀려 삐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스터, 녀석을 저대로 놔두실 겁니까? 녀석은 마스터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암흑가의 입구 건물의 옥상에서 천휘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비앙카가 갈릭에게 말했다.

“녀석에게서 냄새가 나. 아무래도 마탑의 마법사 놈들이 날 끌어들이려는 것 같단 말이야. 실제로 녀석은 마탑과 연관이 있기도 하고 말이야.”

“역시 백 년 전의 그 일로 마스터를 찾는 것일까요?”

비앙카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갈릭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였다.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녀석을 감시할 필요는 있어. 당장 애들을 붙여라.”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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