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안경꼰대 (2/82)

제1장 안경꼰대

띠디디딩, 띠디디딩.

“서 선생님, 수업 안 들어가세요?”

“아… 네. 들어가야죠.”

“그럼 저 먼저.”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교무실을 나섰다. 그중에 뿔테 안경을 쓴 남자 교사 한 명이 가장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을 나섰다.

‘하아, 싫어.’

남자 교사의 인상은 교실을 향하는 내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에 안경을 쓴 전형적인 모습.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함 그 자체의 남자 교사였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살짝 엿보이는 인상적인 눈매만큼은 그에게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두꺼운 뿔테 안경에 가려 크게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평범한 남자 교사의 이름은 서영완.

서울 시내에 위치한 예슬 고등학교의 평범한 생물 교사였다.

드르륵.

“어제 나 드디어 불멸의 기사 던전 2층까지 돌파했다! 이대로라면 2주 내로 마지막 층까지 도달할지도 몰라!”

“아서라. 불멸의 기사 던전을 클리어하려고 거대 길드에서도 직접 길드원들을 보냈지만 모두 실패하고 전멸한 거 모르냐?”

“쳇,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인마.”

“야야, 안경 꼰대 왔다.”

교실 안은 영완이 교실로 들어서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조용해졌다. 그마저도 예쁜 반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이제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각자 알아서들 공부해라. 내가 여기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딴생각일랑 하지 말고.”

“네!”

바야흐로 때는 낙엽이 지고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2087년 10월.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자습을 하는 풍경은 고3 교실에서 어쩌면 당연한 광경이었다.

영완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습을 하도록 하고 자신은 교실 탁자에 마련된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접속한 사이트는 『오벨리스크』라는 게임의 정보 공유 사이트 오벨플포였다.

‘어디 천 제국 상황은 어떤지 봐볼까?’

어제를 기점으로 해서 영완은 드디어 천룡 산맥을 넘어왔다. 동대륙의 천 제국에서는 천룡 산맥, 서대륙 아르니안에서는 드래곤 산맥이라 불리는 바로 그곳.

2년여의 『오벨리스크』 서비스 기간 동안 그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다는 바로 그곳을 영완은 넘어섰다.

‘내가 사라졌으니, 마교에서는 천불이 일겠군. 무림맹에서도 마찬가지일 테고. 후후.’

천룡 산맥을 넘은 것은 즉흥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영완에게 있어 천룡 산맥을 넘은 행위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획해왔던 계획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큭큭, 구마적 녀석이랑 진천 녀석 애간장 좀 타겠군.’

오벨플포 게시판에서 가장 큰 이슈는 당연히 강시지존 천휘의 행방이었다.

무림맹에서 1천이 넘는 절정 고수들의 눈을 피해 고금제일의원이라는 만선자(萬仙子)가 저술한 ‘장생본초집성(長生本草集成)’을 탈취하고 마교에서는 고금제일권공이라는 마령혈천권법을 빼낸 희대의 악마, 강시지존.

운남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마교 부교주의 증언을 통해 그가 혹시 천룡 산맥을 넘지나 않았을까 하는 추측까지 난무할 정도로, 그는 천 제국의 소문난 문제아 중 한 사람이었다.

‘큭큭, 날 찾으려면 네놈들도 나처럼 천룡 산맥을 넘어와 봐라. 과연 넘어올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윽! 천룡 산맥 생각을 하니 절로 오한이 드네. 젠장!’

영완은 게임 시간으로 두 달, 현실 시간으로 약 3주 동안 천룡 산맥을 헤매고 다닌 끝에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서 산맥의 건너편 서대륙 아르니안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영완은 천룡 산맥을 넘어오면서 죽음을 수십 번 겪어야 했고, 그나마도 최종 병기 천마강시까지 잃는 사투 끝에 겨우 넘어설 수 있었다.

‘젠장! 그 드래곤 자식만 생각하면!’

천룡 산맥의 중앙에는 천룡이라 불리는 에이션트 드래곤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일반 웜급 드래곤조차도 아르니안의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판국에 녀석을 이길 리는 만무한 상황.

결국 영완은 마지막 최종 병기 천마강시를 녀석에게 제물로 바치며 녀석을 떨쳐 내는 데 힘겹게 성공했다.

‘후우, 릴랙스, 릴랙스. 괜히 화를 내봐야 내 손해지. 어쨌든 아르니안 대륙으로 넘어오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천마강시야 다시 만들면 되지 않겠어?’

드르륵.

“어딜 나가?”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하던 영완은 별안간 들려오는 문 열리는 소리에 그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키가 큰 남학생 하나가 오른손에 담배 한 개비를 든 채로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보면 모르나.”

학생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학교에서 잘나가는 일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때문에 학생의 대답에 영완은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했다.

영완에게 있어 학생 선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평온함이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저런 학생 따위는 눈에 치이건 말건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큭큭, 저 안경 꼰대, 수철이에게 쫄았나 보지?”

“당연한 거 아니냐? 안경 꼰대 자식, 생긴 건 멀쩡해서 겁만 많아요.”

학생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완은 불쑥 화가 치밀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뭐라 생각하건 하등 상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생활하고 싶을 뿐이다.

띠디디디, 띠디디디.

“오늘은 이만.”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영완은 곧바로 교실을 나섰다. 다시 한 번 자신을 향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학교생활은. 하지만 이런 생활이라고 해도 자신은 별 불만이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교사다.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선 영완은, 교무실로 가기 전 늘 들르던 학교 뒤편 벤치가 잘 내려다보이는 3층 창문 쪽으로 향했다.

“젠장! 역시나! 으득!”

학교 뒤편 벤치에는 선남선녀가 자판기 커피를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영완은 창문 아래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지금껏 보여 주지 않은 분개한 모습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이시영.

학교 내에서 여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남교사로, 잘생긴 미남자임에도 성격이 따뜻하고 자상해 여학생 태반이 그를 이상형으로 여기고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여자의 이름은 장희영.

이시영과 반대로 학교 내에서 남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여교사로, 작고 가녀린 체구에 귀여운 얼굴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이시영! 감히, 희영 씨와 저토록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니!’

두 사람이 늦가을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영완에게 있어 엄청난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무려 2년간의 짝사랑. 영완은 희영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시영! 내 네놈의 파렴치한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말겠다! 그러기 위해 난 천룡 산맥을 넘어왔어!’

영완이 천룡 산맥을 넘은 이유는 전적으로 시영 때문이었다. 영완이 천 제국에서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다면, 시영은 아르니안 대륙에서 지존으로 군림하는 12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이디는 그랜저.

히든 직업인 소울 웨폰(Soul Weapon)으로 전직해 현재 312레벨에 랭크된 그는, 소울 스타(Soul Star)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명실상부 아르니안 최강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저 녀석만큼은 용서 못해! 비록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오벨리스크』에서만큼은!’

남들은 그를 일컬어 이 시대 최고의 매너남이네, 최고의 신랑감이네 하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영완만은 그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오로지 이사장인 그의 아버지 배경으로 학교에 들어왔고, 사생활도 문란해 학교에서는 희영과 사귀면서 밖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을 끌어안고 다니는 바람둥이가 바로 그였다.

이 모든 것은 영완이 그와 고등학교 동창이었기에 알 수 있었던 사실들이며,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런 네놈이! 감히! 희영 씨를!’

희영과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담소를 나누는 시영을 바라보는 영완의 눈빛이 어느새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그의 눈빛을 두꺼운 뿔테 안경이 막아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완은 이내 몸을 돌려 교무실로 향했다.

그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 * *

“크아악! 그 개자식!”

“야야! 그만 좀 해라! 꼭 자식이 술만 마시면 악 지르고 지랄이야.”

술집에서 난데없이 괴성을 지르는 영완을 그의 친구 준우가 달랬다.

“하여간 저 자식이랑 술 마시기가 겁난다니까.”

까칠하게 옆에서 영완을 나무라는 그의 친구 정호.

두 사람은 모두 영완을 비난했지만, 눈빛만큼은 그를 향한 연민의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만 지랄하고 술이나 마셔, 인마. 너 자꾸 이러면 같이 술 안 마신다!”

“내 말이! 이 자식이랑 술 마시면 쪽 팔려서 같이 못 앉아 있겠다니까.”

“…큭, 빌어먹을 자식들. 말하는 거 봐라.”

두 사람의 계속되는 질책에 영완은 그제야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했다.

“스물여덟이나 처먹은 놈이, 그것도 선생이라는 놈이, 술만 마시면 개가 된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도 나자빠져 웃고 갈 거다. 대체 생각이란 걸 어디다 팔아먹고 사는 거냐?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조금 수위가 높은 발언이었지만, 준우는 개의치 않고 영완을 비난했다. 조금은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영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맥주잔을 내밀었다.

“내가 뭐 어때서, 인마. 네 말대로 난 잘나가는 선생인 데다, 돈도 꽤 많이 벌어놔서 남부럽지 않은 아파트도 하나 가지고 있어. 이제 막 대기업에 입사한 준우 네놈보다도 내가 더 낫다고.”

“누가 그딴 걸 물어봤냐? 네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다는 거야! 이 년 동안 한 여자만 사랑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런데 뭐야. 그 여자 때문에 네 자신을 숨긴 채 게임만 주구장창 하는 건 대체 뭔데? 심지어 말도 안 되는 복수심이라니.”

“야, 준우야, 그만 해라. 영완이라고 생각이 없겠냐. 너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술을 마셔서 취기가 오른 준우가 말을 막 퍼붓자, 정호가 나서서 그를 제지했다. 그제야 준우도 자신이 심했다는 걸 알았는지 입을 다물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되지도 않는 복수심. 그래, 준우 네 말이 맞다.”

“…….”

“야, 그렇지 않…….”

“사실이야. 솔직히 애초에 나에겐 어울리지도 않는 복수심이었지.”

영완의 허심탄회한 말에 준우와 정호가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말이다. 사나이에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네놈들도 마찬가지잖아. 준우, 네놈은 버젓이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사진작가를 꿈꾸며 주말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고 정호, 네놈은 귀여운 다섯 살 연하 애인이 있으면서도 결혼은 반드시 열 살 이상의 연상과 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잖아.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년이 넘도록 그녀만 바라보고 살아왔지만, 전혀 후회는 없어. 그녀는 내게 있어 전부나 마찬가지니까.”

“…자식. 꼭 이상한 데서 분위기 잡는다니까.”

“그러게. 야야, 네놈의 순애보를 더 듣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말해봐.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네놈이 드래곤 산맥을 『오벨리스크』 최초로 넘어왔다고는 해도 아르니안에서까지 네놈이 지존처럼 군림할 수는 없다.”

정호의 날카로운 지적에 영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맥주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당연하지. 천 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주력으로 삼는 강시 제작은 한계가 있으니까. 더욱이 아르니안에서는 강시에겐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사제들이 넘쳐나는 곳이니 더욱 한계는 명확하지.”

“잘 알고 있네. 그래서? 그래서 어쩔 건대?”

준우의 까칠한 물음에 영완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강시 제작을 버릴 생각은 없다. 사실 사제들만 아니라면 내가 만든 강시들은 아르니안의 고수들도 쉽게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하니까. 가장 약한 철골강시들도 지금의 내 강시 제작 숙련도로 제작하면 충분히 100레벨 이상의 원마스터 세 명은 상대 가능할 거다.”

“말도 안 돼!”

“야! 이 년이 지나서 유저들의 실력이 고위 평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원마스터를 우습게보지 마! 200레벨 이상의 투마스터 네크로맨서들이 만든 데스 나이트들도 원마스터들은 이길 수 없어. 하물며…….”

“내가 최후에 만든 철골강시 28호는 마교 부교주를 무려 삼십 분 동안 저지했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는 녀석에게 부서졌지만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영완의 말에 준우와 정호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자- 잠깐. 마교 부교주라면 최소한 200레벨은 넘은 초고수일 거 아냐?”

“200레벨이 뭐냐. 마교 부교주 전귀 몰라? 천 제국에서 삼존 밑 서열인 십제 중 한 명이야. 적어도 300레벨은 넘은 지존급 고수라고.”

“저- 정호 말이 사실이냐?”

준우는 이전보다 더욱 놀란 표정으로 영완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영완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야 이 몸의 진가를 알아보겠냐? 마존이나 검존에 비해서는 명성이 떨어지지만, 이 몸 역시 삼존 중 한 사람인 강시지존. 그 정도 힘도 없다면 어떻게 드래곤 산맥을 넘어왔겠냐.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라. 네놈들도 꾸준히 『오벨리스크』 했으니 어느 정도 레벨을 올렸겠지? 둘 다 레벨이랑 직업 말해봐.”

뜬금없는 물음에 준우와 정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마법사(Mage). 일단은 백마법을 마스터했고 지금은 위저드(Wizard)로 전직했다. 레벨은 172.”

“난 솔저(Soldier). 양손검을 주 무기로 쓰고 지금은 팔라딘(Paladin)으로 전직했다. 레벨은 187.”

두 사람의 설명을 들은 영완은 흡족한 미소로 지으며 말했다.

“좋아! 둘 다 제대로 『오벨리스크』를 즐긴 모양이다?”

“당연한 거 아니냐? 너만큼 미친 듯이 『오벨리스크』를 하진 않았지만, 이 년 전부터 꾸준히 해왔으니 이 정도는 보통이지.”

“하긴, 우린 누구처럼 게임으로 복수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으니까. 큭큭큭.”

준우와 정호는 영완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고는 자기들끼리 잔을 부딪치며 맥주를 마셨다.

“너희들… 지존되고 싶은 생각 없냐?”

준우와 정호가 낄낄대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이, 영완이 두 사람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맥주를 마시다 말고 그를 바라봤다.

“지존? 에라, 우리 레벨에 무슨 지존이야.”

“그러게. 아르니안 최고 레벨이 지금 327인데, 그걸 어떻게 따라잡냐?”

두 사람은 영완의 물음을 허투루 치부하며 다시 맥주잔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내 재차 들려오는 영완의 목소리에 맥주잔을 다시 내려놔야 했다.

“내가 만들어주마. 꼭 레벨이 높아야만 지존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이마.”

“…….”

“…….”

영완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준우와 정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씨익 미소를 짓고는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진탕 놀기만 하던 대학 시절, 세 사람은 그 시절의 젊음이 다시 되살아난 듯 대소를 터트리며 술을 마셨다.

* * *

“하아, 읍.”

“…….”

무심코 한숨을 내쉬던 영완은 이내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조용하던 교실에서 학생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젠장.’

모든 학생들의 이목이 일제히 영완에게로 집중됐다. 그리고는 짓궂은 여학생 한 명이 소리 내어 웃으며 영완에게 물었다.

“후훗, 선생님 무슨 근심이 있으신가 봐요?”

여학생의 이름은 이하나.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학생들의 이름을 거의 외우지 못하는 영완조차도 알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 근심은 무슨. 자, 다들 공부해라.”

하나의 물음에 영완은 다소 당황한 듯 말을 돌렸다. 그러나 학생들의 장난스러운 눈빛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보세요. 혹시 장 선생님 때문이에요?”

정곡을 찌르는 하나의 말.

그녀의 말에 학생들이 일제히 입을 막으며 웃기 시작했다.

교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영완이 희영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작 영완 본인은 동료 교사는 물론이고 학생들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전면 부정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그만큼 감정에 충실한 사내였다.

“아- 아니라니까 그러네. 당장 자습에 열중하지 못해!”

영완은 급기야 화까지 내며 학생들을 조용히 시켰다. 평소 보여 주지 않던 모습에 학생들은 입을 다물면서도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며 킥킥댔다.

‘하아, 젠장.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버렸어.’

영완이 한숨을 쉰 이유는 아침 조회시간에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허, 이 선생,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조회 시간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 걸 보니.”

“하하하, 제가 그랬습니까?”

조회가 끝나고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영완은 시영과 2학년 국어를 담당하는 김국헌 선생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특별히 김 선생님께만 말씀드리죠. 저 오늘 희영 씨 부모님과 상견례하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오, 자네가 좋아할 만도 하구먼. 이거 잘하면 조만간 좋은 소식 들리겠군.”

“좋은 소식이다 뿐입니까. 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입니다. 하하하!”

시영은 진심으로 기쁜지 교무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다른 동료 교사들도 그의 웃음에 이끌려 그로부터 이야기를 듣고는 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으득! 말도 안 돼!’

다른 동료 교사들이 앞 다투어 시영에게 축하 말을 건네는 동안 영완은 자신의 자리에서 볼펜을 부여잡고 책상을 거칠게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볼펜은 금세 부러져 잉크가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서 선생.”

“…왜 그러시죠, 이 선생?”

영완이 그렇게 분노를 삭이는 동안 시영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다.

“서 선생만 내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말이야. 표정을 보아하니 속이 쓰린 모양인데. 내가 컨데션이라도 한 병 줄까?”

“…필요 없으니 그냥 꺼지시죠?”

“뭐라고!”

영완의 도발적인 말에 시영 역시 언성을 높이며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둘 다 그만 해요.”

“희- 희영.”

“…….”

하지만 한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일촉즉발의 상황은 금세 해소되었다. 그 여인은 당연히 희영이었다.

“애들도 아니고, 왜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거예요!”

“쩝.”

“…….”

희영의 핀잔에 시영은 혀를 차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영완 역시 자리에 앉으며 화가 가라앉은 것처럼 시늉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그런 척만 한 것일 뿐.

그때부터 영완의 머릿속에선 하루 종일 상견례라는 말이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띠디디디, 띠디디디.

“자, 반장.”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수업 종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영완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곧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영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아침에 교무실 갔다가 들었는데, 오늘 개시영이랑 장꼴깝 집안끼리 상견례한대.”

“오호라, 그래서 안경 꼰대가 저렇게 축 처져 있었던 거로구만?”

하나를 중심으로 모여든 여자들의 수다에 남자들도 합세하며 낄낄거렸다.

“큭큭큭, 안경 꼰대 속 좀 타겠네. 이러다 둘 결혼식에서 엉엉 우는 거 아냐?”

“아닐걸? 안경, 그 자식은 워낙 소심해서 남들 앞에서 울지도 못해. 내 생각에는 결혼식에서는 꾹 참았다가 집에 가서 펑펑 울 거다. 잘하면 그다음 날, 병가 내고 학교 안 나올 수도 있어.”

“큭큭큭, 충분히 그럴 만해. 그 안경 꼰대라면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