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3장. 지도자-(2)
내 생각을 정확히 짚어낸 탓에,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힌다. 라인스가 내 표정을 읽는다.
“설마 했는데, 맞군요. 한때 저는, 당신의 ‘첫 번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죠.”
그 말에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옛날 기억. 당시 자신의 심연을 라인스에게 내보였던 에리히는, 라인스를 죽이려 하면서 ‘나의 두 번째 사람’이라고 속삭였었다. 이후 라인스는 ‘첫 번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마리아’라고 대답했었다.
“오해하진 말아요. 저는 그때부터 당신을 끌어들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에 조사를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당신의 인간관계를 파헤쳤죠. 굉장히 발이 넓어서 순탄치 않았지만, 진정 가깝게 교류하는 이는 찾아낼 수 있었죠. 그리고 그분의 미들네임은 ‘마리아’였어요. 유일한 마리아였죠.”
라인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자 모든 단서가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죠. 당신의 일은 특성상 반드시 권력층에 비밀 협력자가 있어야 해요. 하지만 어머니 쪽은 불가능하지요. 당신의 다른 모습을 보고도 죽지 않을 정도로 신뢰받고, 한 제국의 공주. 비밀 협력자로서의 조건은 충분히 갖춘 셈이죠. 확률은 반반이었어요. 당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쿠데타를 주도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내세우느냐. 하지만 당신이 직접 정계에 나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그러면 쿠데타 후 지도자로 추대해도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고, 당신이 깊이 교류하는 사람··· 한 명밖에 없었어요.”
라인스의 검은 눈동자가 얼핏 빛났다.
“그래도, 꽤 의외군요. 그녀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들었는데. 황태자가 견제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겨우 멍청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말이 맞다. 이텔은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완전한 문외한은 아니야. 이텔은 베르논이 들었던 교육은 거의 다 받았다. 실제로 교사에게서 상당히 자질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어. 본인이 군 진출을 강력히 희망했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렇군요. 첫 번째 조건은 황녀를 추대하는 쿠데타. 두 번째 조건은요? 제 죽음인가요?”
라인스의 어조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지엄한 거래의 저울에 올려둔다는 느낌이었다.
괴물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두 번째 조건···”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두 번째 조건은, 네가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영원히 지상과 하늘에서 추방되는 것. 남은 생 동안 영원히.”
그러자 라인스가 처음으로 심한 동요를 내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자살하라고 해 버리고 싶다. 자폭 캡슐의 제어권이 나에게 있으니, 죽이는 것 자체는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라인스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자폭 캡슐의 고통조차도 라인스에겐 부족하다.
라인스가 평생 동경해온 하늘을, 애정을 가진 지상의 사람들을 박탈하는 삶이야말로 라인스에게 형벌이 될 것이다. 그것도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죗값이라기엔 너무 가벼웠지만, 나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두 번째 조건은 내가 맹세를 걸어서 확실히 할 거야. 기한은 네가 죽을 때까지. 그 전에 내가 먼저 죽어도 맹세는 유효할 거야.”
휘둥그레 뜬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맹···세까지···”
“드라헨킨더니까.”
“하늘을 포기하라고···”
흔들리는 두 눈동자.
“그래. 영원히.”
나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라인스가 한 모든 행동 중 딱 하나만이 비합리적이었다. 그건 계속 현역 용기사로 붙어 있으려 한 것이었다. 라인스도 숱한 위기를 넘겼고, 매 출전마다 죽을 가능성을 품었다. 그럼에도 계속 용기사를 고집한다는 건, 그만큼 하늘에 애착을 품고 있다는 소리다.
물론 동정심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제안을 거부한다면, 나는 협력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 모든 것을 걸고 이 전범단체를 잡아낼 거야.”
라인스는 다시 ‘지도자’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 안에서 무슨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을지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조용히 홍차를 마시며, 답을 기다렸다.
라인스가 홍자 잔을 탁, 내려놓았다.
“그 조건, 받아들이죠. 다만 한 가지는 약속하세요. 한스 윈터와 계몽결사원은 건들지 말아요.”
“좋아. 그럼 ‘나는’ 건들지 않겠어.”
“당신의 ‘다른 분’도 안 돼요.”
“‘다른 분’은 이제 없어. 나는 오직 나 하나로 있으니까. 다만 내가 이텔까지 막아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황녀의 명령으로 당신이 집행하는 건 안 돼요.”
“상관없어. 모든 게 끝나면 난 더 이상 어떤 영향력도 가지지 못할 테니까.”
그 말에 라인스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수많은 의문을 담은 눈. 그것이 혼자서 누그러지고, 혼자 납득한다.
“당신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군요.”
라인스가 애매모호하게 말했음에도,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잘라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 말에 라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
장성들과 황실의 승인이 떨어졌고, 나는 승진 내정자가 되었다.
나는 정식으로 준장이 되기 이틀 전에 이텔을 찾아갔다.
“오, 왔구나, 헤르만.”
나를 반기는 이텔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 아마 어디 아픈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베르논을 이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겠지.
그럼에도 혹시나 하여 묻는다.
“행동하진 않으셨죠?”
이텔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랬다가는 베르논이 이텔을 심하게 경계할 테니까.
“그래, 헤르만.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다고.”
“예.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텔이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자, 나는 약간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내 가장 소중한 친우에게 가혹한 말을 해야 하니까.
“행동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긴 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 정도는 스스로 찾아보려 하셨겠죠. 어땠습니까?”
그러자 이텔이 대답한다.
“아무것도.”
이텔의 얼굴이 비통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황실의 공주로선 아버지도, 베르논도 막을 수가 없었어···. 처음으로, 어릴 때부터 정치에 뛰어들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베르논을 제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건 알 수 없다. 이텔은 나름대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베르논은 타고났다. 오히려 그렇게 되었다면 베르논의 정적으로 찍혀서 미리 제거되었을 수도. 하지만 이 사실을 알려 봤자 이텔의 무력감은 사라지지 않겠지.
“황태자를 막을 수단이 있다면, 선택하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이텔은 그렇게 말해놓고, 순간 아차 한다. 어떤 육감 같은 것이리라. 이텔이 천천히 나를 돌아본다.
“또 선택지를 주려 하는구나, 헤르만.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생긴 선택지입니다. 이거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필요한 건 오로지 당신의 의지뿐이죠.”
“···무엇이냐.”
“도이체스의 다음 번째 지도자가 되십시오.”
“그게 무슨 소린가, 헤르만? 나는 황위계승권이 없···”
거기까지 말한 이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그렇습니다.”
“나보고 지금,”
“예.”
“황위를 찬탈하라고··· 그렇게 요구하는 건가?”
“여성이 올라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선례를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돌아가라, 헤르만.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아뇨. 당신은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베르논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죠.”
“당연히 내 동생에 대해선 나도 책임이 있겠지. 하지만 그 얘기와는 별개야.”
“그 정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텔. 당신은 정말로 베르논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리둥절해하는 이텔에게, 덧붙인다.
“왜냐하면 베르논은 당신이 만들어 냈으니까요.”
뒤이어 부연설명. 왜 베르논이 그렇게 변했는지, 이텔의 말을 어떻게 오독해서 그렇게 변해 버렸는지.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이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그 대화가 기억나는군. 인질범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거짓말이 반, 그리고 어린 베르논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 반이라서 잊으라 당부했었지. 잊으라고 당부했는데···”
“고의가 아니셨다는 건 압니다. 받아들인 쪽의 잘못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어느 괴물을 빚어낸 것도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라면 이렇게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현실을 도피하거나 나를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는 이텔을 믿었다.
“돌아가, 헤르만.”
이번에는 순순히 물러났다. 나는 경례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며칠 뒤, 이텔이 나에게 서한을 보내왔다. 암호 서한으로, 그냥 읽으면 일상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해독해보면 다른 의미가 나타난다. 나는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첫 줄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친애하는 헤르만. 숙고 결과 내가 이것을 마무리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도 조건을···’
나는 편지를 전부 해독했다. 편지에는 이텔의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이 너무 이텔다워서 빙긋 웃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