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3장. 지도자-(1)
내가 소피를 격추시켰다는 사실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도이체스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하도 인터뷰 요청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쇄도하는 탓에 나는 점점 기자들의 창의력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일상에 방해될 지경이 되자 결국 나는 인터뷰 요청을 수락했다. 앞으로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러는 편이 더 유리하겠다는 심산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애국심 넘치는 인터뷰를 할 수 없었고, 결국 나의 인터뷰는 미적지근한 톤으로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태도가 도이체스 국민들의 더 열광적인 태도를 불러일으켰다. 밀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덤덤한 태도가 오히려 내가 압도적인 전력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는 동안 라헬을 잃었는데도. 물론 그 사실은 부고란 귀퉁이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시신이 없는 라헬 및 다른 전사자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자 델 대장이 나를 불렀고, 나를 장성 후보로 추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내 얼굴을 본 델 대장이 묻는다.
“기쁘지 않은 거야? 네가 바라는 대로 되었어. 네가 진짜 이상한 일만 하지 않는다면 준장이 되는 건 거의 확정이야.”
“제가 잃은 사람이 기쁨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러자 델 대장은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잃은 사람’의 범위는 델 대장의 생각보다 더 넓겠지만, 그건 아마 영영 알 길이 없겠지.
장성이 되는 건 델 대장 혼자만의 의사로 결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정적인 지지대는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고 절차만 밟으면 곧바로 진행될 거라고 한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되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떤 것에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고 공허해져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히데와 이텔이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나는 손님이 왔는데도 뭘 해줄 기운이 없었고, 두 손님은 각각 능숙하게, 혹은 서투르게 나에게 홍차를 우려내 주었다. 홍차는 또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지만, 어쨌든 좋은 찻잎이었기 때문에 나쁘진 않았다.
아마 그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침대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
그렇게 5일을 요양하자, 나는 드디어 일어설 기운이 생겼다.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완수해야 하는 일.
하지만 그 전에, 나는 라인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라인스는 내가 칩거하자 집에 가 보아도 되겠냐는 편지를 보냈었지만, 내가 기력이 없어서 미처 답장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히데와 이텔처럼 허락 없이 쳐들어갈 수 있을 만큼 스스럼없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라인스는 하염없이 내 답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루 뒤, 답장을 받은 라인스가 내 집으로 찾아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된다. 그 표정을 본 내가 묻는다.
“아직도 엉망이야?”
“환자 같아요.”
내 몸은 멀쩡하다. 하지만 마음 면에서는, 솔직히 자신 없었다.
지금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지친다.
나는 홍차를 우려내어 차려 주었다. 요즘은 홍차 수급이 힘들어졌다. 전에 내가 인터뷰에 대고 홍차가 좋다는 말을 하고 나자 홍자 수요가 폭주했기 때문이었다. 라인스는 참을성 있게 나를 기다렸다.
나는 라인스에게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했다. 크룬트를 다녀왔으며, 나는 확실히 드라헨킨더가 맞았고, 아버지가 총책임자 중 하나였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거기서 소피 이야기도, 심장석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라인스는 ‘공백’에 대해 목표를 공유하는 파트너였지만, 굳이 소피 이야기를 더 알 필요는 없었다.
이후에는 베르논과 라몬 이야기였다. 그 대목에 이르자 라인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베르논은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실제로 그동안의 통계를 보니 영향력 있는 이종족 출신 국회의원이나 유지들이 암살되는 일이 잦았어. 물론 사고사로 처리되었다지만, 그런 식으로 일을 많이 처리해 본 내가 장담하건대 절대 아냐. 사고사로 위장된 살해야. 그리고 그 선전에 나라는 아이콘을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지. 한편, 라몬은 베르논을 막기 위해 투입된 어떤 단체의 첩자야. 그가 말하길, 그들은 혁명을 일으켜 베르논을 제거할 생각이라더군.”
“혁명···이요?”
“베르논을 막기 위해선 혁명밖에 답이 없다면서. 그러고보니 이 이야기를 하는 건 네가 처음이군.”
“헤르만···”
“순순히 응할 생각은 없어. 나는 세부사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거든. 그렇게 협력하지 않아. 대신 대답은 해줘야지. 베르논을 막는 데는 협조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몽결사 내의, 라몬보다 더 상위의 사람과 의논할 필요가 있어.
그게 바로 너를 오늘 불러낸 이유지, 라인스 윈터.”
내 말이 끝나고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라인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의 모든 분노를 담아서. 라인스는 모든 것을 확신하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서서히 라인스가 ‘달라졌다.’
그건 달라졌다고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얼굴의 골격이나, ‘라인스 윈터의 얼굴’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서서히 바뀌는 표정 근육은 마치 변신을 보는 것처럼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아는 용기사 라인스 윈터의 가면이 서서히 벗겨지고, 점점 다른 것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거의 과거의 ‘헤르만’과 ‘에리히’ 정도의 차이였다.
한참 후, 라인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듣고 싶네요.”
아마 나는 이제 억누를 필요 없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증오를 담아 라인스를 노려보고 있겠지. 라인스를 당장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설명한다.
“크라쿠프 쪽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긴 정말 힘들어. 수사기관이 할 수 있는 허점이란 허점은 전부 이용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베르논이 뒤늦게 재수사를 해서 나를 위협한다면, 누가 유출했다고밖에 되지 않겠지. 여기서 후보가 셋으로 좁혀져. 게랄드, 라헬, 너. ‘뒤늦게 재수사’가 핵심이지. 디터가 죽은 이후에 갑자기 허점을 알아차릴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그렇게 크라쿠프의 건을 알아차렸다면 내가 베르논에게 반대한다는 걸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도이체스 정부 전체에 반대하고, 지향점이 현 정부의 전복을 요구하는 수준이란 걸 알기엔 모자란 정보였어.”
속을 알 수 없는 라인스의 까만 눈을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따라서 크라쿠프의 일을 알고, 내 목적을 아는 사람, 바로 너뿐이지. 물론 여기까지는 전부 억측이야. 그래서 나는 더 확실한 증거를 찾기로 했지.”
신문꽂이에 있던 서류들을 소파 앞 탁자로 집어던졌다. 거기엔 라인스의 모든 행적을 조사한 사진과 증거들이 있었다.
“네가 관련되어 있고, 혁명을 꾀하는 반정부단체. 이 키워드로 수사를 진행했지. 그리고 나는 전쟁 기간 내내 계몽결사의 수장을 옆에 둬 놓고 헛다리만 짚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년을 찾아왔지만 제자리만 맴돌았던 계몽결사 쪽 수사가, 라인스와 라몬, 그 외 키워드를 놓고 찾자 놀랍게도 이치에 딱 맞아떨어졌다.
“가장 결정적인 힌트는, 모든 사람이 계몽결사의 수장을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거였다. 남녀노소로 제각각이었지. 바로 거기서 네가 수장이라 예측한 거다. 넌 인간의태가 가능한 돌고래니까. 마치 아르노 얀츠처럼.”
“정확히 맞추셨네요, 헤르만.”
라인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끓어올랐다.
“너는 전에 원하는 게 있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었지.”
라인스는 내가 극도의 거부감을 내비치는데도 안토니나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크라쿠프의 일로 끌어들였고, 그 아이를 ‘자연스럽게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발목을 스스로 절단했다. 그렇게 하면서 말했었다. 자신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애초에 라인스는, 날 향한 증오심을 해소하기 위해 2000만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진짜로 무엇이든지 했구나.”
라인스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구나.
“그래서 전쟁까지 일으켰구나.”
아는 사람은 얼마 없지만,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놈들이 계몽결사다. 계몽결사가 보헤미아의 황태자를 암살하지만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것을 달마티아의 과격파 소행으로 둔갑시키지만 않았던들 전쟁은 일어나지 않거나 훨씬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사람 앞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뭘 원했던 거야? 무엇을 원했길래 전쟁을 일으킨 거야? 그게 그럴 가치까지 있는 일이었어?”
라인스는 나의 비난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어요.”
그 말을 하는 라인스는, 더 이상 내 부하 용기사 라인스 윈터가 아니었다. 라인스는 계몽결사의 지도자로서 말했다.
“참고로 한스 윈터는 계몽결사원이 아님을 먼저 밝힐게요. 그는 그저 기자로서 나를 도운 것이었어요. 저는 당신 예상대로 계몽결사를 이끌고 있었고, 17살 때부터 베르논 황태자를 주시했어요. 그랬기에 라몬을 훈련시켜서 베르논 곁으로 잠입시켰고, 여러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베르논의 야망을. 황제만 조심한다고 될 게 아니었죠. 아무리 계몽결사라도 황제를 암살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저희는 황태자라도 제거하기로 결심했었죠. 하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제가 지도자가 되기 전 한 번 공주와 왕자를 납치하려다 실패한 일 이후로, 그들에 대한 경계가 너무 삼엄했어요. 베르논을 비롯한 다른 파시스트를 자연스럽게 제거하려면, 결국 소요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과 같은.”
“소요? 그게 끝이야? 겨우 그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거야? 한 황태자 때문에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려서 죽고 죽이게 된 거야?”
“살기 위해 선택한 것에 문제라도 있나요?”
나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하는 사람에게서 어떤 공포를 느꼈다.
사람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그’ 우나 브라운조차도, 저런 식으로 생각하진 못할 것이다. 과거의 에리히도, 그 누구도.
이 자와 필적할 존재는 베르논뿐이겠지. 양 극단에서 적대하지만 마치 그들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나는 수천만의 목숨을 장기말로 사용하는 괴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그 어느 광폭화된 용보다도 섬뜩했다.
침착하자. 그래, 나는 이런 자를 상대하고 있다. 분노에 잠식당하면 휘둘릴 뿐이다. 나는 목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황실을 제거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거지?”
그러자 라인스가 차분히 설명한다. 계몽결사는 생각보다 꽤 급진적인 조직이었다. 현재는 비록 ‘조직’의 형태를 하고 라인스라는 수장을 두었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이상적인 아나키즘 사회를 건국하는 것이었다.
“···이상이 ‘계몽결사’가 목표로 하는 바에요.”
“머릿속에 꽃밭만 가득하군. 혁명 정부도 세우지 않고 국가가 그 뒤에 알아서 굴러가길 바라는 거야? 다른 반동 세력은 권력을 빼앗기고 가만있을 것 같아? 대중은 반발하지 않을 거 같아?”
“말씀드렸죠. 이건 계몽결사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결국 끝까지 투쟁하겠지만, 중간 단계 정도에 잠시 머물러 있어도 조금은 목표가 달성될 거예요.”
그러니 여기서 협상할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말했다.
“내 요구조건은 두 가지. 첫째.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로 한다.”
“누굴 주체로 해서?”
혁명과 쿠데타는 둘 다 정권이 바뀔 수도 있고, 전자가 더 긍정적인 어감을 준다는 것만 빼고 굉장히 비슷해 보이지만, 많이 다르다. 쿠데타는 ‘권력을 가진 자가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대개 무력을 동원해)벌이는 불법적인 권력탈취’행위를 가리킨다. 즉, 여기서 군사행동의 주체가 ‘이미 권력층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만약 내가 수도에 쳐들어가 황실과 의회를 장악하고, 권력자로 선출되면 나는 쿠데타를 벌인 것이다. ‘군 고위장교’가 ‘더 높은 권력을 위해’ 벌인 짓이 되므로.
라인스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기존 권력층을 쿠데타의 주축으로 삼을 것인가? 혁명에서 쿠데타로 변질된 순간부터 계몽결사 내부에서 납득하지 않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라인스가 물었다.
“당신인가요? 우선 당신이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건 확실하지만···”
아, 그러고보니, 라인스는 모르는구나. 내가 얼마 안 가 준장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라인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내가 기여하는 게 많겠지. 라인스가 주체를 나로 추론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난 정치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아니, 내가 그런 자리에 올라서는 절대 안 돼. 내가 정한 최소한의 한도는,”
그러자 라인스가 조용히 끼어든다.
“이텔 마리아 폰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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