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92화 (92/102)

5권 1장. 거부할 수 없는 제안-(1)

다들 전쟁이 올해 안에 끝날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 외롭게 버티는 국가는 프랑크뿐이었고, 동부전선의 키예프는 우리와 미적지근하게 싸우고 있었다. 물론 대중들이 보는 것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양쪽 면에 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적어도 이 전쟁이 도이체스 제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끝날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델 피셔 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은 델 대장이 말했다.

“은퇴하고 싶다고? 이 상황에서?”

“전역하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떠나, 후방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습니다. 제가 없으면 비틀거릴 정도로 전황이 위험하진 않고, 용기사들을 체계적인 교육으로 양성시킬수록 현장의 부담이 줄어듭니다. 제 동료들은 너무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의외인 걸.”

델 대장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네가 이런 식으로 ‘뒤로 빠지겠다’고 하는 게. 그 때 격추당한 게 영향이 컸나?”

영향이 큰 정도가 아니라, 내 미래를 결정했다. 나는 내가 목에 걸고 있는 검은 돌을 생각했다.

이다 카우프만의 심장이 마력의 형태로 굳어진 심장석. 계속된 마력 누적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걸 내가 떼어내서 가져왔다. 지금도 위험 수위까지 마력이 차 있으며, 카우프만과 걸었던 맹세 덕에 내가 살아있는 한 터지지 않고 있다.

즉, 내가 전장에서 죽기라도 하는 순간 아르텐 대륙은 끝이다.

“생각할 기회를 주기는 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비법들이, 격추되어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실히 아깝긴 하지. 널 교육에 투입시킬 시간에 전장에서 한 명이라도 떨어뜨리는 쪽이 더 효율적이지만 말야. 네가 육성할 후임 용기사 20명을 갖다 붙여도 네가 더 뛰어나거든.”

역시, 쉽지 않을 줄 알았다. 애초에 도이체스가 후임에 그토록 신경을 썼다면 도이체스 용기사들이 격추 순위를 줄줄이 장식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부 일정 시점에선 은퇴하고 교육에 매진했겠지. 나는 반박했다.

“그런 저와 히데가 빠지자마자 큰 차질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저라는 변수 하나에만 기대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내가 없었던 약 보름 간, 하필이면 그때 프랑크에서 대공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최고 에이스 둘을 한꺼번에 잃고 사기가 꺾인 루프트바페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번 사건으로 증명되었지요. 제가 언제나 이기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요. 어쩌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운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 이번 전쟁이 끝나기 전에 운이 나쁠 수도 있겠죠.”

“꽤나 절박하구나, 너?”

델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심장석을 보여주고 싶다. 이것의 힘을 느끼게 하고, 그러면 이게 터지면 정말 재앙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녀가 이 전말을 알면 바로 나를 현장에서 빼겠지.

실제로 내가 격추당한 건 오직 한 번이다. 그것도 볼랑 티거, 우리와 4배 차이 나는 전력이 상대였다. 남들이 보기에 보통의 전장에서 내가 격추당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있는 곳은 전장이다. 나는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았지만, 어느 날 운의 여신이 나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기에 이만큼 필사적이다.

하지만 이것을 모두 말할 수 없기에, 나는 최대한 그럴듯해 보이는 다른 이유를 계속 가져다 댄다.

델 대장이 말했다.

“그래도 널 현장에서 빼기는 힘들어. 설령 내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인다 해도, 네가 너무 전국적인 우상이야. 사람들은 전장에서 승리의 신화가 계속 작동하길 원하지. 네가 있어서 생기는 용기사들의 사기도 무시 못하고.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러자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내놓는 해결책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델 대장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장성이 되면 가능할 거야.”

하마터면 대장의 면전에다 대고 ‘정신 나갔어요?’라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델 대장의 얼굴은 다시 진지해졌다.

“대령까지는 순조롭게 진급했어. 네가 올린 공이 워낙 크니까. 하지만 공만으로 승진하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네가 지금까지 올라간 곳이 그 한계이고. 그런데 마침 너는 그 이상 올라갈 수 있을 만한 공로를 거의 갖췄어. 네가 필요한 건 딱 한 가지.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공.”

“전황이··· 생각보다 도이체스에 불리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장성들 사이에서만 돌고 있지만, 그래. 당연하게도 언론에 노출된 것 이전의 사정들이 있지.”

델 대장이 책상에서 다트 하나를 집어 들더니 나에게 던졌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다트는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가 벽에 꽂히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새로운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델 대장이 던진 붉은색 다트는 지도의 남 메이아 대륙 한가운데에 꽂혀 있었다.

빈랜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간신히 말했다.

“빈랜드가··· 참전합니까?”

“도이체스는 왕정이고, 프랑크는 아니지. 빈랜드 또한 마찬가지고. 프랑크가 빈랜드에게 마지막 희망을 품은 모양이다. 연락선을 하나 나포했어.”

오싹해졌다. 빈랜드는 자원도 풍부하고, 땅도 넓고, 국력도 굉장한 강대국 중 하나이다. 그동안은 중립국으로 버티고 있어서 계산에 넣지 않았었다.

하지만 프랑크 편에 빈랜드가 붙으면?

“잘 이해한 모양이네.”

델 대장이 말했다.

“지금은 계속 구조요청을 족족 차단시키고 있지만, 언젠가 하나는 빠져나가겠지. 어쩌면 지금 빠져나갔을지도 몰라. 아무튼 우리는 최대한 빨리 서부전선을 마무리해야 할 동기가 있어. 빈랜드의 참전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내가 진지하게 듣고 있으니 델 대장이 말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널 빼놓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상부에서도 마다하지 않겠지. 첫째. 서부전선 하늘을 단숨에 정리한다. 둘째. 그 공과 볼랑 티거를 상대로 아들러를 탈출시킨 공으로 장성이 된다. 그러면 현장에서 나갈 수 있겠지.”

“아무리 저라도 혼자서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는 없겠죠. 딱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그렇지. 그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프랑크 공군의 구심점을 제거하면, 공로로 인정되겠죠.”

“바로 그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델 대장은 나에게, 소피 라리보를 격추시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본 델 대장이 말했다.

“하기 싫으면 말고. 지금 넌 동부전선으로 배정받았지? 거기도 무척 중요한 전장이니, 거기서 계속 있고 싶다면 딱히 반대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네가 이쪽으로 나선다면, 언제든지 편의를 봐주지.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동부전선으로 출발하기까지, 4일 남았던가? 그때까지 생각해 봐. 난 개인적으로 네가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든, 개인적으로 무척 기대하고 있어. 나가보도록.”

나는 그 말과 함께 사령관실에서 쫓겨났다.

부대로 돌아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내 등 뒤에서 걸어온다. 낯설고 묵직한 발걸음이다. 루프트바페 본부의 고위장교는 대부분 여자였기에, 저런 소리는 낯설다. 그러나 행정 쪽에 아예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길을 터주려고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발소리는 바로 내 옆으로 다가와 멈춘다.

“헤르만 예거 씨, 맞습니까?”

고개를 돌리자 키가 큰 편인 나보다도 훨씬 큰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우윳빛 피부에 흑단 같은 긴 머리카락,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의 남성은 군복이 아니라 정장 차림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황태자님의 비서실장 라몬 브란트라고 합니다.”

라몬의 명함은 깔끔하고 간단한 디자인이었다. 명함 선택에서 주인의 성격을 얼핏 읽어낸다면, 라몬은 아마 빈틈없고 철저한 사람일 것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나는 명함을 품에 넣고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태자님께서 잠시 면담을 요청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동부로 떠나신다지요? 그 전에 말씀 나누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십니다. 어디 계신지 몰라서 전해 드리는 게 늦었네요.”

나는 의외로 행선지를 알기 힘든 사람이다. 그렇게 행동해왔기 때문이다. 라몬이 말했다.

“시간 되십니까?”

시간이야 많았다. 무려 4일이나 되었다. 게다가 나는 베르논 황태자의 동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현재의 드라헨킨더 실험을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그 인간을 만나기가 너무 싫다는 것이다.

“저는 앞으로 4일 동안 시간이 빕니다. 황태자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승낙한다. 내 개인의 불호는 잠시 젖혀둔다. 과업과 개인 불쾌감을 저울질한다면, 당연히 전자다.

“다만, 오늘은 쉬고 싶군요.”

그렇게 말하자 라몬이 말했다.

“그러면, 내일 저녁은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승낙하고 라몬을 돌려보냈다. 라몬은 가기 전,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인간이··· 맞으십니까?”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그렇군요. 공명하기에, 혹시나 했습니다.”

나는 그와 공명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소거하면, 내 눈앞에 있는 베르논의 보좌관은 돌고래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 또한 내가 알았다는 사실을 눈치 챘겠지. 나는 안심시키며 말했다.

“아무에게도 당신이 돌고래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감사합니다.”

라몬 브란트는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집에 도착한 나는 혹시나 장착된 도청기가 없는지 한 번 검사를 한 다음, 중얼거렸다.

“돌고래가 그 황태자의 비서라고?”

라몬 브란트는 분명 돌고래였다. 완전히 인간의태가 가능한 돌고래. 그런데 베르논 블라즈 폰 프로이센의 비서실장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는가? 이건 마치 아인자츠그루펜 대원 아르노 얀츠만큼이나 이상했다. 설마, 아르노 얀츠처럼 무언가를 노리는 건가? 어쩌면 베르논 황태자가 품고 있는 폭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언하기엔 일렀다. 사람은 정말 다양했다. 만약 라몬 브란트가 적극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베르논의 앞잡이가 되기를 작정한 경우, 그를 찔러봤다간 바로 역풍을 맞을 수 있었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보고서를 펼쳤다. 군 고위장교들에게 공개된 전황의 일부였다. 그 중에서는 도이체스가 겪은 서부전선에서의 참패가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소피의 업적이다.

프랑크 공군의 구심점이다.

나의 적이다.

나의 동족이다.

꼭 행복해지기로 다짐했던 사람이다.

“너를 죽여야 내가 안전하대.”

나는 소피의 흑백사진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를 죽이래···”

나는 목에 걸린 심장석을 부서뜨릴 듯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단하게 내 손에서 차가운 감촉만을 전해 줄 뿐이었다.

나는 결국 소피의 사진을 치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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