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4장. 친애하는 나의 적에게-(6)
“···고마워.”
소피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거절하겠어. 너에게 맡겨 놓으면 마음은 편하겠지.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에게 폭격 계획을 알린 순간부터 나는 동료를 죽이기로 결정한 거야. 이미 이 계획의 기여자라고. 그런 와중에 너에게만 떠맡긴다면 나는 위선을 부리는 것밖에 되지 않아.”
소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편하겠지. 내가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버린 칼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안도하겠지. 하지만 내가 그 칼을 쥔 손이었다는 건 변하지 않을 거야. 난 그렇게 도피하지 않을래.”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무척이나. 내 입장에선, 동족인 소피가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이었다.
나는 저럴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 내가 한 일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했다. 이텔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진짜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소피가 참여하기로 되어서 우리는 바로 마을로 복귀하는 대신 다른 시설의 용병기를 찾아다녔다. 다행히도 알맞은 게 몇 개 있었다. 알맞은 마법들을 전부 찾아낸 우리는 마을로 귀환했고,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물론 우리에게 방을 내 준 !파라–아랑 혼혈 남매는 사라진 히데의 오른쪽 팔을 보고 기겁을 했었지만.
학살의 준비는 착착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폭격 예정일이 되었을 때는 날씨가 무척 맑았다. 아마 며칠 전에 누군가가 여기서 강제로 비를 내려버려 그렇겠지.
요격은 생각보다 차분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한 번에 하나씩. 처음에는 히데와 소피가 정확히 저격해 쏘아 맞힌다. 세 마리째를 떨어뜨리고 나서는 이제 프랑크의 용도 긴장하기 시작한다. 조준이 빗나가고 있다. 하지만 반쯤은 의도된 것이었다. 피한 용이 안심하는 찰나 내가 요격마법의 방향을 바꾸어 준다. 마치 자동으로 추적해서 격추하는 것처럼.
반나절 내내 뜨거운 태양을 올려다보며 용을 쏘아 맞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더 이상 용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먹고 다시 온 후발대를 경계하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4시간 뒤에 후발대가 왔고 우리는 그들 중 둘을 요격했다. 나머지는 그들이 떨어지는 걸 보자마자 쏜살같이 후퇴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예언한 대로의 대참사가.
체력이 달려 기진맥진한 소피가 히데와 함께 왔다. 소피는 의연한 모습이었다. 생각보다는 잘 견디고 있었다. 히데는 적을 떨어뜨렸음에도, 어딘가 착잡한 표정이었다.
나는 남은 내 마력으로 히데의 오른팔을 재생시켜 주었다.
마을로 돌아가니 군데군데 무너진 곳이 있었다. 폭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하늘에서 요격된 생물체들의 파편이 여기저기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다들 자기 집을 수리하다가, 이제서야 광장에 모여들었다. 광장에는 용을 제외한 인간의 시신들을 모아 놓았다.
이장이 말했다.
“전쟁 중이고, 적이라 하였지만 우리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소. 그리고··· 장례는 치러 줌이 옳다고 여겼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는 망연한 얼굴로 광장에 죽 누워 있는 시신에 다가갔다. 사실 그것은 시신이라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참혹한 파편들이었다. 얼굴이 온전한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소피의 눈길이 한 시신에 닿았다. 머리가 없는 시신이었다. 그 시신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피가 갑자기 경직되었다. 나도 소피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시신의 목에는 ‘소피 라리보’라는 문신이 되어 있었다.
소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델···”
그렇게 말하는 소피의 목에는 ‘아델 블뢰즈’라는 문신이 있었다. 소피가 털썩 주저앉아 시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소피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델, 아델, 아델!”
소피의 절규가 아랑의 마을에 울려 퍼졌다.
“어째서, 어째서!”
소피가 흐느끼며 말했다.
“왜 네가 거기에 있어.”
모두가 소피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소피가 토해내듯 말했다.
“왜, 왜 이따위로 돌아가는 거야. 왜 이러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째서!”
나는 소피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손수건을 건네주자 눈물을 닦은 소피는 곧 내 품에서 서럽게 울었다.
이 용기사들은 어떻게 되었든 죽었을 것이다. 내가 심장석을 원래 자리에서 떼어냈으니 고농도의 마력은 자연히 흩어지겠지만, 그러려면 몇 년은 걸린다. 어차피 그들은 크룬트를 지나면서 죽게 되어 있었다. 소피는 그저 민간인을 살리기 위해 조금 다른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피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않겠지.
소피는 업을 짊어지기로 결심했었지만, 그럼에도 이 결과는 가혹했다.
그 후 나는 자발적으로 추가 수색을 도왔고, 얼마 안 가 아델 블뢰즈의 머리도 찾아낼 수 있었다. 반쪽밖에 없었지만.
소피가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나머지 용기사들과 마을 사람이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렀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비석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던 아델 블뢰즈라는 용기사의 장례까지 마치고 나서, 나는 이장에게 말했다.
“제가 조치를 취했으니 몇 년 안에 마력 농도가 낮아질 겁니다. 언젠가는 지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바깥세상으로 나오실 때, 도이체스가 패배했든 승리했든 소피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가 바라는 보답은 그것뿐입니다.”
이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아랑 마을과 작별을 고하고 크룬트를 떠났다. 중간에 산맥으로, 그리고 도이체스가 쳐놓은 방벽 때문에 나갈 수 있는 터널이 막혔지만 내가 드라헨킨더이기에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 셋은 마치 첩자들처럼 밤에만 인적이 드문 곳을 다녔다. 한 푼도 없었고, 소피를 노출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폐차장에 있는 고물 자동차를 하나 훔쳐서, 마법으로 자동차를 작동시키며 프로이센으로 향했다.
이틀을 꼬박 달려서 도착한 곳은 프로이센 외곽의 내 집이었다. 아직 전기와 수도가 끊기지는 않았다. 세 명 전부가 씻어서 말끔해진 뒤 거실 소파에 앉을 무렵 나는 소피에게 말했다.
“네가 이대로 무사히 프랑크로 돌아가기는 힘들 거야. 밀항을 잡아내는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거든. 내가 위조 신분을 줄 테니 당당하게 가. 중립국 사람이면 잡아가진 않을 거야.”
내가 내민 여권을 받아든 소피가 말했다.
“그래도 나랑 너무 다르게 생겼는데?”
“얼굴이야 고치면 돼.”
그 뒤 나는 특수 분장술을 동원해 소피의 얼굴을 여권사진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히데가 감탄할 정도였다.
소피는 딱 하룻밤을 쉰 뒤 프랑크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 소피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다음에는 적으로 만나겠지?”
“아마.”
나는 덧붙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미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마법으로 짓누른다던가, 그런 짓도 하지 않을 거야. 아니, 못해. 카우프만이 나를 가만 두지 않을걸.”
소피가 내 말을 듣더니 쿡쿡 웃었다. 소피가 나를 꼭 끌어안더니, 프랑크식 볼키스를 해주며 말했다.
“나의 친애하는 동족, 너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이다의 유언을 전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나, 반드시 행복해지도록 할게.”
내가 미소를 짓자 소피 또한 활짝 웃더니, 돌아서서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히데가 군으로 빨리 복귀하겠다는 것을 나는 말리고 내일로 미뤄 달라고 부탁했다. 히데는 승낙했고, 히데가 내 집에서 잠시 쉴 동안 나는 내 이웃집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 맙소사!”
이웃집의 베른하르트 씨가 내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베른하르트 씨가 말했다.
“세상에! 살아 있었소?”
“네. 어제 돌아왔습니다. 카트리나는 잘 지내고 있었나요?”
나는 전장으로 출격한 동안에는 이웃집의 베른하르트 씨에게 카트리나를 맡겼다. 그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징집을 피할 수 있었고, 그래서 카트리나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베른하르트 씨는 카트리나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들었는지 나를 안으로 들였다.
카트리나는 캣타워 위에서 무방비하게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완전 제 집처럼 편한 모양새다. 내 시선이 전에 없었던 캣타워로 향한 것을 보고 베른하르트 씨가 머쓱하게 말했다.
“그게··· 다들 예거 씨가 상어 밥이 되었을 거라고 하였고··· 카트리나와 오래 살 준비를 하던 참이었소.”
베른하르트 씨는 못내 아쉬운 어조였다. 나는 캣타워로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카트리나?”
쿨쿨 자고 있던 카트리나는 잠꼬대를 하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귀를 쫑긋했다. 하지만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카트리나가 무방비한 틈을 타 고양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배 만지기를 했고, 결국 물렸다.
그제야 정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카트리나를 내 집으로 다시 들여놓은 뒤 나는 자동차를 타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프로이센 안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 집 앞에 도착했다.
열쇠를 가지고 있기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아직은 근무시간이겠지. 나는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익숙한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가족사진이 있었다. 구성원은 두 명. 나는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아 있었구나?”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흑발을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중노년의 여인. 하지만 동안인 탓에 30대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아마 히데가 나이를 먹으면 우나 브라운처럼 늙어갈 것이다.
“출근하지 않았군요?”
“오늘은 이상하게 집에 있고 싶던걸. 무사히 잘 돌아왔구나.”
“뜻밖의 수확도 있었지요.”
“잘됐네.”
어릴 때는 저 사람을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뛰어나고, 압도적이어서. 그녀는 여전히 지금도 아름답고, 뛰어나고, 압도적이지만, 이제 나는 그때 지붕에 앉아 있던 열 살 아이가 아니다.
나는 서서히 그녀와 대등해지려 하고 있었다.
“나의 친애하는 우나,”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죽일 수 있게 될 거예요, 곧.”
그 순간이 오면 나는 그녀와 이름을 준 자와 받은 자의 관계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나란히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우나가 대답한다.
“정말 기대되는구나.”
그렇게 미소 지으면서 말하는 우나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 모든 존엄과 생명을 걸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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