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4장. 친애하는 나의 적에게-(5)
두 사람은 비가 그치고 나서야 깨어났다. 히데가 먼저였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열린다. 굉장히 지쳐 보이는 히데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어. 네가 성공했어.”
“그렇습니까···”
히데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빈자리를 본다. 입이 썼다. 나는 히데의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이 사람에게 그 녹색 눈의 사람을 투영시켰다. 이제는 전혀 아니다. 둘은 다른 사람이었고, 다르게 의미를 가졌다.
“재건해주고 싶었는데, 방금 너무 큰 마법을 써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당분간은··· 당분간은 오른팔 없이 지내. 그래도 최대한 빨리 해줄 테니까.”
“무리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안 그럴 거야.”
“오늘이라도 당장 해주려던 걸 모를 줄 알았습니까?”
나는 왜 !파라를 상대로 거짓말을 한 거지.
그런 한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소피도 깨어났다. 소피는 나와, 돌을 쥔 내 손과, 축축한 땅과, 하늘을 각각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소피가 뭐라 말하기 전에 냉큼 선수를 쳤다.
“카우프만이 너에게 전할 말이 있어.”
약간 멍한 표정이었던 소피는 더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소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이다 카우프만이 14년 동안 꼭 전해주고 싶었대. ‘언제나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불러 주어서 고마웠어. 게르발트, 너만은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렇게 이다 카우프만의 유언을 전해 주고, 어떻게 이 돌을 얻게 되었는지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소피가 삐딱하게 말했다.
“네가 드라헨킨더 실험의 주모자를 애비로 두었다는 이야기는 안 했겠군.”
그 말에 잠깐 움찔했다. 알고 있다. 저것은 증오로 포장해서, 날 상처 주기 위해 일부러 찌른 칼날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소피라면 그렇게 미워할 수밖에 없다.
“했어.”
“그런데도?”
“···아마 나도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겠지. 우리 둘은 서로의 기억을 동시에 공유했어. 나는 카우프만이 보냈던 고통스러운 시간을, 카우프만은 내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들을···”
나는 힘겹게 말했다.
“그자는 처음부터 실험체로 쓰기 위해 날 어머니께 잉태시켰어. 어머니는 그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갓난아기인 나를 데리고 도망쳤지만,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지. 내가 정식 실험체가 되지 못한 건 남자아이여서.”
“그렇다고 카쉬 아벨이 네 아버지인 건 변하지 않아.”
“맞아···.”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 내가 드라헨킨더 실험을 조직한 것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걸 파헤치려는 쪽에 더 가까웠다. 내심 억울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소피의 감정을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동물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기도 하고, 그 현실을 부정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투영한다. 아니면 그저 자식일 뿐 피해자인 나에게도 원망을 쏟아 내거나.
나는 합리적인 판단 운운할 자격이 없었다.
소피가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보았다. 소피가 중얼거린다.
“그 모든 것에도 나는 여전히 너를 동족으로 인식하는구나.”
소피의 양 손이 축축한 땅을 움켜쥔다.
“바보같긴. 덥석 맹세를 받아버린 녀석이나, 나에게 그 말을 하려고 14년이나 기다린 놈이나···”
소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소피를 돕고 싶었다. 이것은 동족으로서 가지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소피를 도울 수 없었다. 그것은 소피가 해결해야 할 감정이었기 때문에.
한참 기다려준 뒤 나는 소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마법으로 불을 껐고 죽지 않았어.”
나는 손에 있는 검은 돌을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네가 그 전에, 마법을 썼다간 죽는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걸 몸에 지닌 채로 마법을 썼을 거야. 그리고··· 결국 그래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겠지. 결계를 한 번 펼쳤는데도 엄청난 무리가 갔으니까.”
나는 과거를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소피의 별명은 실수하지 않는 용기사. 소피와 싸워본 나 또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피는 내 모든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이 적중할 때마다, 혹은 중요한 사건의 분기마다 느꼈던 수많은 기시감. 히데는 느끼지 못하고, 오직 나만 느꼈던 기시감.
나는 소피에게 물었다.
“너, 미래를 볼 수 있지?”
소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소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우선 이 진창에서 벗어나고, 베이스캠프까지 묵묵하게 걸어갔다.
모두의 몸이 마르고 베이스캠프에는 비 갠 후 정오의 햇살이 내려쬘 때쯤, 소피가 불쑥 내뱉었다.
“나는 10초 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
소피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와 히데는 자리에 앉아 주의 깊게 경청했다. 소피는 이윽고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다 카우프만이 폭발하고, 나는 기억나지 않는 과정을 거쳐 프랑크로 와 있었지. 언어조차 모르는 낯선 땅에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맹세했어. 도이체스에게 복수하겠다고. 하지만 내 힘으로는 불가능했지. 내가 설령 드라헨킨더라 해도 말야. 광폭화된 용 한 마리로도 그 커다란 제국을 멸망시킬 수 없었으니까.”
소피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몰라. 맹세를 건다면 나 혼자만으로 충분히 제국을 밀어버릴 수 있었겠지. 드라헨킨더는 용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까.”
드라헨킨더는 인간 기반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이런 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물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고대의 맹세로 지능을 강제로 낮춘 존재가 아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납득했다.
“지금의 용들은 자기 잠재력의 극히 일부만 사용하다가 죽어. 고대의 맹세로 지능이 저하되었으니까. 하지만 드라헨킨더는 용 같은 마법을 쓸 수 있는데 지능이 원래 그대로지. 태고적 용의 지능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현재의 용보다는 확실히 높아. 맹세를 혼자 힘으로 쓸 수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맹세는, 여러 용병기와 마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용은 혼자서 맹세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사고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소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소피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죽기 싫었어. ‘죽을 만큼 미워’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죽기는 싫었어. 그 정도 크기의 맹세는 내 목숨을 앗아갈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점점 성장하면서, 도이체스 전체를 밀어버리자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지. 국민들은 죄가 없어. 날 실험한 자들에게 죄가 있지. 나는 그 대신에 다른 맹세를 하기로 했어. 프랑크의 실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배후에서 도이체스 정부의 멸망을 위해 조종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빌었어.”
“그게 성공했구나.”
“성공하긴 했지. 하지만 내 드라헨킨더로서의 능력의 95퍼센트를 희생해서 얻은 능력은 고작 10초 앞만을 볼 수 있었어. 그 사실에 절망해야 할 지, 아니면 그래도 인과율에 간섭하는 힘을 얻은 것에 대단해 해야 할 지. 네가 나한테서 너무 약한 존재감을 느꼈던 것도 그 때문이야. 나는 이 능력 하나만을 위해 내 힘의 거의 대부분을 희생시켰어.
그 뒤론 무엇을 해야 했을까? 도이체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정치인도 좋았겠지. 우습게도 나는 도이체스에 몰래 들어가 암살행각을 벌인다는 선택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 나는 대상이 누군지도 몰랐고, 그러면 무차별 테러 행위밖에 할 게 없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테러리스트가 되기는 싫었어. 나는 양지에서 그들을 짓밟아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나는 정치인을 하기에는 너무나 수상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어. 더군다나 내 적성에 맞지도 않았고. 결국 나는 군인을 택했지. 10초안에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전장에서 살기로 한 거야. 한 번 결심한 뒤로는 이야기가 빨랐지. 나는 높은 감응력—세상에, 드라헨킨더의 5퍼센트만으로도 역대 최고의 감응력을 갱신할 뻔했지—으로 프랑크의 공군에 들어갔어. 참고로 기관총을 도입하자는 건 내 제안 때문이었어.”
그 말에 나와 소피가 동시에 감정의 동요를 보였다. 전쟁을 살아오며 익숙해져야 하는 게 죽음이었지만, 어떤 죽음은 영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령, 처음으로 잃은 동료라든지.
“너에게 그걸 쓰면 죽는다고 말한 건, 네가 나의 위험을 보고 용을 죽이기 위해 전처럼 마력을 끌어 쓰다가 폭발해버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야. 마치··· 이다처럼. 그래서 10초 전으로 되돌렸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위험에 처해 있었고, 너는 그 모든 순간마다 나를 구하기 위해 마력을 움직였지.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서른 번째로 되돌렸을 때에야 비로소 너를 직접 방해하자는 생각이 떠올랐어. 참 웃긴 일이지.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 사건 이후로 쭉 바라고 있었는데, 정작 네가 죽을 때가 되니 필사적으로 내 몸에 무리를 주는 능력을 계속 쓴 게···”
“···그렇게 해줘서 정말, 정말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어차피 내가 한 선택이야. 고마워할 것 없어.”
소피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떼고 나서 불을 껐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나는 똑똑히 봤어. 네가 대형마법을 쓰자마자 터지는 걸. 하지만 산불을 끌 정도의 마법을 쓰고도 무사한 건, 역시 내가 생각한 게 맞다는 거겠지.
떼기 전의 네 마법의 총량은 이다의 것을 합한 것과 같았던 거야. 문제는 그 힘이 너무 거대하다는 거지.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터졌던 거고. 하지만 떼고 난 이후엔 온전히 네 마법만을 쓴 거야. 그 증거로, 떼기 전의 너에게서 느꼈던 심상찮은 힘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아. 손에 들고 있는 이다의 힘도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물론 실제로는 안에 엄청난 게 들어 있겠지만 말야.”
“잠시만요.” 히데가 끼어들었다.
“그럼··· 산불을 끈 게 오로지 ‘드라헨킨더 헤르만 예거’만의 힘으로 가능했다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힘을 끌어다 쓴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어.”
“맙소사···”
히데가 압도된 듯한 표정을 하자 소피가 말했다.
“시간을 되돌릴 정도의 힘을 가진 능력이야. 그 정도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겠지. 도이체스가 또 드라헨킨더 실험을 한다고 했지? 도이체스가 이런 힘을 가진 자를 한 명 이상 더 얻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말 끔찍해···”
그 말에 셋 모두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 내가 말했다.
“프랑크군 요격 작전은 내가 도맡아서 할까?”
히데의 눈이 가늘어지자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회복이 되었을 때 말야. 폭격 예상일 쯤에는 회복할 수 있을 거 같아.”
대신 히데의 오른팔을 재건하는 일은 조금 미뤄둬야겠지만. 나는 소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프랑크군을 요격하는 것과 네가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소피가 얼마나 상처받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 제안을 들은 소피가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으며 주저하더니, 이윽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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