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87화 (87/102)

4권 4장. 친애하는 나의 적에게-(4)

히데는 다시 일어섰다. 양쪽 귀가 욱신거린다. 진동만이 느껴질 뿐 세상이 갑자기 고요하다. 일시적으로 소리를 잃었다. 그 이전에 보였던 빈틈 자체가 너무나 많았다.

다행히도 용은 추가 마법을 전개하는 대신 히데를 경계하며 다리를 재생하는 쪽을 택했다. 히데는 우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흰색 연기로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소리로 꼬리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삼아 해 본 동작이었지만, 그 움직임은 히데를 살렸다. 다리를 원상복구시킨 용이 꼬리를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쪽을 겨냥하는 듯한 둔중한 진동.

땅을 구른 히데는 한 바퀴 앞구르기를 한 직후 고개를 쳐들자 회색 이빨들이 창살처럼 눈앞을 가로막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직.

제아무리 용을 부리고, 세 자리수에 가까운 사람을 죽였더라도, 기본적 생명체로서의 먹이사슬이 있었다. 용은 최상단에 있다. 잔뜩 화가 난 돌연변이 용과 감응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히데는 ‘먹이’였다. 용의 뜨거운 숨결이 히데의 머리카락을 감쌌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용의 그르렁거림에 대기가 진동한다. 회색 잇새로 새어 나오는 악취는 정신을 흐릿하게 만든다. 침이 뚝뚝 떨어지는 용의 아가리를 보면서 원초적인 공포가 히데를 잠식했다.

히데는 용의 아가리가 쩍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텔레비전 화면처럼. 남의 일처럼 낯설게.

“···, ······!!”

공기를 찢는 누군가의 절규가 고요한 히데의 세상을 때렸고, 히데는 목과 몸통이 분리되기 직전 땅을 박차고 뒤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히데의 오른쪽 팔은 이미 용의 아가리로 들어가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 히데는 용이 자신의 팔을 몇 번 입질한 후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어 뼈째 삼켜버리는 것을 보았다. 분리되어 자신의 신경망을 떠난 신체임에도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또 다시 무언가의 절규. 히데는 뒤로 물러나며 군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잡히는 두 가지 물건. 자살캡슐과 모르핀.

히데는 모르핀을 꺼냈다. 남은 왼쪽 팔로 피하주사를 허벅지에 꽂는다.

얼마 안 가 고통이 사라졌다.

다음 행동은 가장 간단한 화염마법 ‘시마’를 발동하는 것. 상처부위로. 고통과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을 저울질할 때,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 마땅하다.

화상으로 인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진 팔에 대한 환상통은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모르핀으로도 억제할 수 없었다. 히데는 이를 악물고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용··· 용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마법···”

히데는 자신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답은 비관적이었다.

그럼에도 히데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감응력이 히데가 쥐고 있는 용병기로 뻗어나간다. 이미 마탄은 전부 소진된 지 오래다. 히데의 에너지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내부에 박혀 있는 인조 다이아몬드 하나하나에 각인된 마법을 더하고, 뺀다. 히데의 감응력에 자극된 마력물질이 공진하며 용병기의 끝에 마법을 짜내기 시작한다. 용병기 끝부분에서 마법진이 완성된다.

동시에 용의 뱃속으로 들어간 자신의 오른팔이 쥐고 있는 용병기도 작동시킨다.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걸었다.

히데는 원소-분자계 마법 ‘소우사’를 발동했다. 용의 뱃속, 내부에서부터, ‘크리히’보다도 더 뜨거운 초고온 화염, 플라즈마가 생성될 정도의 화염이 용을 집어삼킨다. 그와 동시에 히데의 앞쪽에 생성되는 거대한 방열벽. 그러나 ‘소우사’의 열기를 감당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히데는 의식을 놓쳤다. 대형 마법과 중대형 마법을 동시에 자신의 에너지만으로 발동한 히데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자신의 몸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휙 들리는 감각이었다.

열기 때문에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천천히 쓰러지는 히데의 모습은 마치 악몽의 한 장면 같았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가려는 걸, 아까 히데가 던져서 땅바닥에 쓰러진 채로 그대로 있던 소피가 내 바지자락을 붙잡아 저지했다.

뒤이어 소피가 손짓하자, 히데의 몸이 들려 우리 쪽으로 둥둥 떠서 왔다. 나는 즉시 히데의 환부를 확인했다. ‘시마’로 지져버린 탓에 출혈은 멈춰 있었다. 소피가 통제를 해제하자 나는 히데를 안아들었다. 가벼웠다. 마치 팔 한 짝의 무게만큼.

나는 소피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소피는 내 손을 홱 뿌리치더니 직접 일어났다.

나는 불길을 바라보는 소피의 뒷모습에다 대고 말했다.

“소피. 여기는 위험해.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같이 대피하자.”

소피는 내 말에 미동도 없다가, 이내 스르르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히데를 이곳으로 불러오느라 무리를 한 것이었다.

이제 의식이 없는 자가 두 명.

!파라였다면 한 손으로는 사람 한 명을 업고 다른 손으로는 안아 들어서 두 명을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 인간이었다.

두 명 다 업고 나갈 수는 없었다.

‘소우사’는 괴룡의 몸뚱이를 뼈째로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 마법 자체는 목적한 용의 몸뚱이와 히데의 오른팔을 태우자 곧 증발했지만 남은 열기는 주위의 나무를 자연발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방화를 저질러 보았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숲에서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죽는다.

나는 무심코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결계를 치는 건 분명 무리한 게 맞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몸에 무리가 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가져간 카우프만의 심장이 무슨 역할을 한 게 틀림없었다.

이게 내 몸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마법을 쓰면 ‘죽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면, 이게 내 몸과 분리된다면?

갑자기 떠오른 터무니없는 가정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도박이다. 이것을 떼어낸다고 해서 ‘연결’이 끊길 거라는 보장은 없다. 맹세는 둘 다 연결로 취급할지도 모른다.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서, 둘이서 숲을 탈출하는 것이다. 맹세를 고려해 볼 때 히데를 버리고 소피를 들쳐 업고 나가는 편이 옳다.

합리적으로는···

나는 천천히 상의 단추를 풀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곳엔 군용 단검이 있다.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을 이제 살로 가져간다.

모르핀은 없다.

천천히, 내 가슴에 박힌 검은 돌을 도려내기 시작한다. 생살을 썰어대는 아픔이 뇌를 후려친다.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리고 헐떡거리는 숨으로 매캐한 대기를 들이마신다. 점차 기도에 화상을 입어가면서, 그렇게 카우프만의 심장을 나에게서 떨어뜨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실수로 대동맥을 잘라버리지 않도록, 내가 겪는 고통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로 인해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른다.

마침내 피로 얼룩진 검은 돌을 빼내자마자 하늘로 손을 치켜들고 기세계 마법 ‘위부체’를 발동시킨다. 강한 공기 흐름을 만들어내는 마법. 보통 시설 환기용으로 사용한다.

그것을 저 하늘로 향해.

크룬트 전체 면적에 해당되는 상승기류가 상공 2킬로미터 위까지 치솟는다. 상공 100미터 위 지점에서부터 발동을 시작했는데도 숲 속의 나무들이 마구 흔들린다.

그리하여 생성되는 것은 적란운.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몇 초 후 강한 소나기가 지역을 적신다. 흙투성이의 소피의 얼굴을 말끔히 씻어낼 정도로, ‘소우사’가 불러낸 화염을 꺼뜨릴 정도로.

“다행···”

나는 눈물을 흘리며 비를 맞았다.

“이···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소나기구름이 생성되려면 강한 상승기류 외에도 수증기가 풍부한 대기가 있어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 대기가 건조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나는 흠뻑 젖은 채 쓰러진 두 사람을 내려다본다. 다들 숨은 잘 쉬고 있었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검은 돌을 집어 들었다. 잡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맹세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심장 안에는 여전히 엄청난 마력이 잠들어 있고, 그것은 아르텐 대륙을 날려버릴 정도의 규모다.

하지만 적어도, 물리적으로 연결되었을 때보다는 좀 더 자율을 보장해 주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돌을 가만히 쥔 채, 쓰러진 두 사람을 보았다.

나는 내가 한 ‘비합리적 선택’의 결과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깨어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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