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4장. 친애하는 나의 적에게-(2)
“제발.”
쉰 목소리가 목 안쪽을 찢으며 나온다. 언제 이렇게 목이 쉬어버렸나. 나는 언제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나.
그러나 기억은 무자비하게 재생되었다···
어린 나는 아버지를 아군으로 믿은 채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 실험을 버텼고, 눈을 떴을 때는 그 수조 안이 아니라 저택의 내 방 안이었다.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안도하는 얼굴로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나는 다시 돌아온 게 너무 좋아서 울었다. 그리고 잊었다. 그 모든 끔찍한 기억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 순간들을. 아버지 또한 그것은 모두 악몽이라고 말했다.
내가 숙청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그 상태, 잊지도 기억하지도 않는 기묘한 상태에서 벌어진 우연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거대한 마력의 폭발.
파도가 뇌를 휩쓸어 간 뒤 악몽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녹색 눈동자의 학살자.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인 학살자.
그녀는 나에게 엄청난 것을 요구했다. 그녀를 위해 내 생을, 내 존엄을, 앞으로 쌓일 무수한 업을 내놓으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그런 삶을, 나는 수락했었다.
오직 우나 브라운을 위해서.
그 순간, 내 얼굴에는 용이 춤추는 듯한 세로줄무늬가 생기고, 에리히 아벨은 헤르만 예거와 에리히 아벨이라는 두 자아와, 나머지 자아들로 분열되었다.
“아······.”
나는 의미 없는 울림을 내뱉었다. 축축했다. 고통도 있었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서 입술이 절단되었다가, 마법으로 다시 재생되었다가, 절단되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나는 혀로 입술을 쓸었다. 짜고, 금속 특유의 콱 찌르는 비린 맛이 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절단된 입술은 다시 원래처럼 붙고 있었다. 고통은 아득히 먼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자잘한 기억이 또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내 다른 인격들의 기억이었다. 주인격인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인격의 기억들. 프리다 아커만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소녀가 겪은 기억들, 한스 슈마허라는 남자의 기억, 프란츠라는 기억. 그리고 에리히 프란츠 지에르페트로프크람–아벨의 기억.
부작용으로 생겨난 변두리 인격들, 그리고 연약한 정신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아, 오직 업을 짊어지기 위해서 분리시킨 나의 친애하는 나 자신.
에리히는, 나 자신이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고, 그가 한 모든 행동은 내가 한 행동이었다. 그 용서받지 못할 일들은 모두 나였고, 라인스를 목 졸라 죽일 뻔한 것도 나였고, 그 추하고 어두운 모습들도 전부 나였다.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나는 온전한 헤르만 예거로서 여기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다중인격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에리히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 자신이었으니까.
퍽 소리가 났다. 내가 주저앉으며 무릎으로 땅바닥을 찍는 소리였다. 무릎의 통증도 멀게 느껴졌다.
비로소 ‘나’와 주위를 인식했다.
식물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광야에 나는 서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에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지나쳐 온 연구소였다. 내 시력이 좋은 편이어서 겨우 볼 수 있었다. 십 년이 넘었는데도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황야는 검은색 모래가 깔려 있었다. 황야의 한가운데는, 그리고 내가 주저앉은 자리 바로 앞에는 내 고양이 카트리나의 머리통만한 검은 구체가 있었다.
나는 그것에서 친밀감을 느꼈다.
구체는 천천히 박동하고 있었다. 인간의 심장보다는 느리고 용의 것보다는 빠르게. 구체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있었고, 거기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이제 다가오는 황혼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그것의 리듬에 따라 내 심장의 고동도 서서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와 공명하는구나.”
나는 구체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는 나와 동족이기 때문에.”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환대와 친밀감을 읽을 수 있었다. 한때 드라헨킨더의 심장이었을 그것은 계속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자 다른 기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터져버렸던 어린 드라헨킨더 이다 카우프만의 기억. 나는 마치 나의 기억인 것처럼 그 기억을 받아들였다. 똑같이 고통스러워하고, 울고, 웃었다. 죽음 직전에 게르발트 로렌츠에게 하려는 말도 들었다. 소피는 듣지 못했겠지만.
폭발 이후 카우프만은 완전히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심장’의 형태로 십 년 넘게 이 자리에 있었다. 그 뒤로는 계속 단조로운 기억뿐이었다. 특기할 사항이라면, 점점 더 강력해졌다는 것일까.
위험한 수위로 도달할 때까지.
“곧 있으면 터지겠구나, 너.”
카우프만의 심장이 동의의 뜻을 보냈다. 이 심장석은 폭발 직후에 비해 훨씬 더 마력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렇게 십 년 넘게 마력을 가만히 모아왔으나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 아마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버티지도 못하겠지. 나는 카우프만의 심장이 터졌을 때 벌어질 일을 상상했다.
도이체스 제국의 괴멸. 도이체스 제국은 증발하고, 아르텐 대륙에는 끔찍한 마병이 돌 것이다. 어쩌면 아르텐 대륙도 전부 증발할지도.
“그걸 바라니?”
나는 심장에게 물었다. ‘그렇다’라고 대답해도 나는 막을 힘이 없었으며, 막을 수도 없었다. 드라헨킨더로 희생당한 이에게, 이 나라와 세계에게 애정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뜻밖에도 심장은 부정적 응답을 보냈다. 그걸 원했으면 지금까지 버텨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진작 모든 것을 내려놓고 터졌을 거라고.
언젠가는 게르발트를 만나고 싶어서, 언제나 자신에게 이름을 알려 주었던 그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 다만 그뿐이라고.
“그 아이는 지금 소피야.”
나는 심장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존재감이 약해져서 너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더라고. 아마 이쪽으로 다가가지도 못할 거야.”
심장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나 또한 침묵했고, 우리는 한참 동안 생각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의 끝에서 나는 말했다.
“그렇게 할게.”
나는 오른손으로 구체를 그러쥐었다. 심장석은 안식을 갈구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틴 것은 소피 때문이었다. 소피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피가 이곳으로 오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더 기다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방치되면 터져서 이 대륙을 재앙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어받았다. 이 폭탄을 가두는 역할을.
아르텐 대륙을 그냥 떠날 수도 있었다. 드라헨킨더의 몸으로는 혼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 버려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건, 드라헨킨더에게는 불가능하니까.
구체가 서서히 해체되면서 오른손 끝을 타고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무 큰 힘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구체였던 것에 손을 떼지 못하며, 황혼이 사그라들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지막 남은 마력이 나에게 흘러들자 나는 주문을 내뱉었다.
“온전한 하나인 헤르만 예거로서 당신과의 맹세를 맺습니다.”
카우프만의 심장은 소피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심장 쪽은 자신의 존재를, 내 쪽은 이제는 완전히 증오를 사 버린 소피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대가로 ‘맹세’를 사용했다. 그 결과 폭탄과도 같은 이 마력 덩어리는 나의 제어 아래에 들어오게 되었고, 내가 살아 있는 한 터지지 않게 되었고, 이다 카우프만은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맹세가 완료되는 순간, 마력은 초고밀도로 압축되더니 나의 가슴에 검은색 돌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나는 살아 있는 폭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히데는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울음은 그친 지 오래인 듯 얼굴은 깨끗했으나, 여전히 내 얼굴을 보며 동요를 숨기지 못한다. 그러나, 약간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당신, 누구야?!”
히데가 용병기를 겨누며 사납게 말했다. 혼란스러움과 적대감이 동시에 섞인 표정. 라인스가 내 얼굴 밑에 숨어 있던 에리히 아벨을 눈치챘듯이, 히데 또한 무언가를 본 것이다.
“이제 네가 아는 헤르만 예거와는 다를 거야.”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나야. 네 입장에서는 ‘헤르만 예거’에게 불순물이 섞인 것 같겠지만, 이것 또한 나야.”
내 말을 듣는 히데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공포에 더 가까웠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더 천천히, 내 맹세의 결과물을 더 갈무리하자.
그제야 히데가 용병기의 끝을 늘어뜨렸다. 아무리 맹세 덕에 압축이 잘 되었다지만, 내가 가슴에 지니고 있는 이것은 정말로 위험한 감각을 일깨우는 모양이었다.
나는 히데에게 찾아낸 기억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덤덤하게 설명하는 동안 히데는 흐느껴 울었다.
“왜 네가 울고 그러니.”
“그렇지만, 너무, 너무하잖아요. 어떻게···”
내 인생의 반쪽이 환상이나 다름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히데는 나에게 있어 아버지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히데는 내가 무덤덤한 것에 더 슬퍼했다. 히데가 약간 오해하는 게 있다면, 나는 그 황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절망의 표현을 다 해봤기 때문에, 더 이상 울 필요가 없게 된 것에 더 가까웠다. 이젠 지쳐서 슬퍼할 수조차 없어졌지.
나는 내가 심장과 한 맹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히데가 말했다.
“폭발 자체도 재앙이었지만, 크룬트가 마력이 흘러오는 지형이어서 더 비극이었던 거군요.”
안토니나 코바르첵의 친구가 폭발했을 때, 한때 바스키 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죽음의 땅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용기사들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수색이 가능해질 정도로 마력 농도가 낮아졌다. 보통의 경우가 그렇다. 보통이라면 마력농도는 서서히 낮아진다.
불행히도, 크룬트는 지형적으로 마법이 몰려드는 지역이었다. 거기에 심장이 자리하게 되자, 마력이 점점 심장에 누적되어 버렸다. 십 년 넘게. 빨리 심장의 위치를 크룬트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옮기지 않으면 폭발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작 심장에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서 지금의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내가 맹세로 묶어둔 심장을 가지고 나가면, 조금은 안전해지겠지. 여전히 ‘헤르만 예거가 살아 있는 동안은 폭발하지 않는다’라는 맹세가 걸리지만, 내가 죽기 전에 마도공학자들이 꼭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소피를 찾아야지. 나를 미워하지 말라고는 안 할 거야. 다만 전해 줘야 해. ‘이다 카우프만’의 유언을. 그게 이 심장을 크룬트에서 떼어내는 조건이었어. 지키지 못하면 다시 폭발할지도 몰라.”
자초지종을 다 들은 히데는 같이 찾으러 가겠다고 나섰다. 어차피 히데를 이 위험한 곳에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
수많은 감정을 하루 만에 소모했던 우리는 곧 죽음 같은 잠에 빠졌다.
아침 햇살에 깬 나는 감응 범위를 넓혔고, 소피의 방향을 찾아냈다. 이전까지는 소피가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고 있어서 불가능했지만 검은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감각이 민감해져서 곧 찾을 수 있었다. 소피는 정말 멀리까지 가 있었다.
다시 히데가 앞서고, 내가 뒤를 따르는 구조였다. 한참 동안 길을 개척하며 나아가던 히데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헤르만.”
나도 따라 멈췄다. 히데가 말했다.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면, 당신의 진짜 마음을 확실히 알았겠네요.”
그 말에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히데의 말대로 나는 내 감정을 확실히 자각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이미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진 고전 그리스 비극 풍 운명이다.
“알게 되었지.”
나는 이어서 말했다.
“부정해왔던 내 마음을 알게 되었지. 네가 생각한 대로. 하지만 이것도 알게 되었어. 너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내 인생에서 너는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라고.”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사람이기도 했다.
“겁쟁이인 나 때문에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
내가 한 모든 말은 나의 진심이었다. 그러자 히데가 말했다.
“···전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싫습니다.”
언젠가 히데가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다시 돌아온 그 말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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