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84화 (84/102)

4권 4장. 친애하는 나의 적에게-(1)

기억은 가장 오래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손길.

우나 브라운이 아닌, 내 생모의 손길. 그녀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한다.

“미안해 에리히. 난 도저히 널 지켜줄 수가 없구나.”

어린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말한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차라리···”

어머니와 함께 그대로 몸이 휙 쏠린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아찔한 무중력. 그러나 일순간 내 몸의 무게가 돌아온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날 붙잡은 것. 그의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까맣고 눈동자는 자수정 같은 보라색이다.

끌어올려지는 나를, 정장을 입은 남자 뒤에 선, 나와 무척이나 닮은 황금색 눈동자의 남자가 응시한다. 얼핏 느낀 인상은 차가움. 나를 마치 어떤 사물이라도 보듯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착각이었던 듯싶다. 곧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도이체스의 귀족인 그는 몸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묻는다.

“괜찮니, 에리히? 많이 놀랐겠구나.”

아직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었다. 초면에 나의 이름도 알고 나에게 친절한 이 남자까지 포함해서. 나는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누구···세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가 기분 좋은 저음으로 말했다.

“나는 카쉬 디어크 지에르페트로프크람–아벨. 너의 아버지란다.”

어린 나는 그 상황에서 신기하게도 그의 말을 바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동안 어머니는 아버지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저 그런 아버지 없는 아이인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저렇게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내 아버지일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부정하기에는 그가 처음 보는 나에게 너무 따뜻했고, 심지어 어머니보다도 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맹금류처럼 샛노란 눈동자는 정말 나와 똑같았다. 그리고 이름 맨 마지막에 아벨이라는 글자가 달려 있었다.

난 그렇게 카쉬 아벨이 구해낸, 찾아낸 또 다른 자식으로서 아벨 가문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어머니는 차갑고 무뚝뚝했지만 언제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부족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역시 귀족 가문은 급부터 달랐다. 나는 사생아라 미묘한 눈총을 받아냈음에도 거의 황홀할 정도로 나아진 환경에 놀랐던 것 같다. 어머니에 대한 정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어머니가 나와 함께 죽으려 했다는 사실을 듣고서는 조금 사그라들었다. 다만 어머니의 유언은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나를 껄끄럽게 대하던 사용인들과 아버지의 아내, 그리고 그녀에게서 난 자식들은 곧 나를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끝없는 냉대를 각오했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아버지는 사생아에 불과한 나에게 귀족의 품위를, 몸가짐을, 홍차를, 그리고 사랑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아내를, 그녀의 자식들을, 아벨 가문을 사랑했다.

그 달콤한 꿈이 깨어진 건 낯선 장소에서 눈을 떴을 때.

흰 가운을 입은 딱딱한 표정의 사람들과, 나를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덩치 큰 남자들. 나는 그 낯선 장소에 온 순간부터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실험체였을 뿐이었다. 정신을 잃고 나면 못 보던 수술자국이 생겨 있고, 못 보던 통증이 자라나 있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나의 상태를 흰 가운을 입은 자들이 무심히 기록한다. 그러기를 몇 개월 하자 나는 희망을 버리고 이 연옥에서 그저 살아내기만 했다. 노란 눈동자를 한 기적이 두 번이나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므로.

어떤 끔찍한 마법이 걸렸던 어느 날, 나는 너무나 생생한 환각에 사로잡혀 마침내 지옥으로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것이 아무리 환각이라 해도 너무 소용없었다. 그것들은 무척이나 선명한 현실감을 갖고 있었다. 움츠러든 채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는 나에게 갑자기 어떤 괴물의 형상이 다가왔다. 내가 뒷걸음쳐도 괴물은 점점 다가왔다. 괴물이 촉수를 뻗었다. 곧 그것이 나의 이마에 닿았다.

“이제 괜찮아.”

괴물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소녀의 형상으로 변하며 말했다. 안토니나와 같은 녹색 눈의 소녀다. 촉수는 하얗고 창백한 여자아이의 손으로 변해 있었다. 소녀가 계속 말했다.

“네가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고 있더라도,”

그 순간, 나는 소녀가 ‘실체’임을 자각했다.

“이 손만은 진짜야. 네 얼굴에 닿는 이 손만큼은.”

진짜였다. 내 얼굴에 닿은 온기만큼은 진짜였다. 그 외의 환상들은 전부 가짜였다.

더 이상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누나는 이름이 뭐예요?”

소녀는 확실히 그 시절의 나보다는 성숙해 보였다. 아니면 나와 비슷할 수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빨리 자라니까. 소녀가 말했다.

“나? 나는 1097.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이게 아니었겠지?”

“내 이름은 에리히에요.”

“그렇구나, 에리히. 나는, 나는···”

한참을 고민하던 소녀는 떠올렸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프리다 아커만. 고마워.”

나는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의문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소녀가 이어서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내 이름을 잊고 살았으니까, 떠올리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잠시 서로의 존재에서 위안을 얻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환상이 사라질 무렵, 프리다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진 모양이구나. 나는 이제 가야 해.”

“다음에도 올 수 있나요?”

“너의 비명이 또 닿는다면. 그때도 이끌려서 올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해···”

프리다는 그 말을 마치고 연구원들에게 끌려갔다. 그제야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관찰하고 있는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 마비된 것처럼 지내던 나에게, 처음으로 분노라는 게 생겼었다. 결국 나는 진정제를 맞고 하루 종일 뻗어 있어야 했다.

프리다는 자주 찾아왔다. 내가 받는 실험이 그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프리다는 매 순간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매 순간 내가 물어본 뒤에야 ‘프리다 아커만’을 기억했다. 어느새 소녀의 이름을 되새겨 주는 건 나의 일과가 되었다. 그 일과마저 없었더라면 나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프리다는 나보다 훨씬 오래 이곳에 있었다. 이곳엔 나 말고 다른 실험체들도 많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사내아이는 내가 처음이라고. 그리고 프리다가 나를 만나게 된 것도 무척이나 이례적인 사건이었기에, 프리다는 함구령을 받았다고 한다. 프리다는 연구원들이 무서워서 다른 실험체들에게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전부 숫자였다. 프리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서 프리다는 이름을 다시 찾아낼 때마다 고맙다고 말했다. 1097이 아닌, 프리다 아커만으로 있을 수 있다고.

어느 날부턴가 프리다는 오지 않았다.

선반에 손끝이 닿고 옷소매가 짧아질 때까지 자랐는데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물어봐도 그들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윽박지르지도 않았고, 나를 무시했다. 내가 날뛰면 진정제를 주사하고 꽁꽁 묶어놓을 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받은 것 중 가장 중요하고 고통스러운 실험에 들어갔다. 의식은 있지만 움직일 수 없었던 나를, 그들은 유리 수조에 집어넣었다. 주저앉을 수조차 없는 세로로 길쭉한 수조여서 나는 무릎을 수조 벽에 찧으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곧 수조 안에 물이 차오른다. 진짜 물은 아니었다. 액체환경에서도 호흡할 수 있는 특수한 용액이었다. 하지만 공기호흡에 익숙한 인간에게는 폐를 찢어발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눈앞이 번쩍번쩍할 정도로. 그렇게 정신을 잃기 직전, 나는 그제야 수조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다. 수조는 여러 개 있었다. 개중에는 자그마한 것도 있었다. 그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프리다의 머리가, 머리만 수조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전부 빡빡 밀어버렸지만 녹색 눈동자 때문에 프리다인 걸 알 수 있었다. 힘없는 눈알이 빙글 돌더니 나를 바라본다.

그 눈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프리··· 아커···ㅁ······.”

수조가 전부 찼고, 내 말은 기포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두 번 다시 프리다가 이름을 기억할 일은 없겠지. 이름을 물어봐줄 내가 ‘여기’ 있으니까. 프리다는 머리만 남아 ‘죽어’버렸으니까.

눈물은 용액에 섞여서 티가 나지 않았다.

유리 수조 속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 변화를 기록하고 변형하는 연구원들도 훨씬 분주해졌다. 그러는 동안 내 감각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유리 수조 너머의 일상적 대화들이 웅얼거리는 저음에서 선명하게 옆에서 듣는 것처럼 깨끗한 음성으로 들렸고, 내 건너편에 있는 프리다가 얼마나 죽은 눈으로 힘없이 떠다니는지도 선명하게.

“직접 보러 오실 것까지는···”

「아니, 궁금해져서.」

어린 나는 뒤엣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전혀 낯선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 나는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저것은 고대 게르만 어인 고트 어였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음성은 식별했고, 나는 몸부림치려 애썼다. 운동신경이 전부 차단되어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수조를 깨부수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카쉬 아벨이 다가와 수조에 대고 속삭였다.

“네 감각이 강화되었다고 들었단다. 내 말 들리지?”

나는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구하러 왔단다. 조금만 참거라.”

그는 수조를 통, 하고 두드린 뒤 돌아서서 연구원에게로 향했다. 연구원은 고트어로 이것저것 보고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줄곧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구도를 보면 아버지도 높은 사람이지만, 연구원도 예사 직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어디서 저런 실험체를 구하셨습니까?」

「오, 저 아이는 특별하지.」

아버지가 말했다.

「비록 사내아이라지만, 만들어진 단계부터 남달랐으니 말야.」

「만들었···다니요?」

「어미에게 특별한 조작을 가했어. 마법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그리하여 저 아이를 수태시켰지. 무슨 괴물이 나올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인간의 형상을 제대로 갖췄더군. 하지만 사내아이였어.」

「태생부터 무척 불법적이고 금지된 아이였군요. 여자아이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잠시 관심을 끊었지. 그 사이에 어미가 저 애를 데리고 잠적했더군. 아이를 지키겠다고 말야. 하! 절반의 확률로 실패했더라도, 저건 인류 문명의 집약체야. 당연히 인류에게 기여해야 마땅하지. 그래도 가진 것 하나도 없는 일반인치곤 잘 숨어 살았어. 이 내가 몇 년이나 헤매고, 저것이 소년으로 자라날 때까지. 하지만 결국은 붙잡았지. 마지막엔 동반자살을 시도했어. 어림도 없는 일이지. 저걸 만들어내느라 무엇이 들어갔는데 말야.」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 정도로 진척된 실험체는 없었어요. 완성될 때까지는 이 비밀 프로젝트의 인원들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하는 게 조금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중단하려는 것이죠?」

「그년이 눈치 채기 직전이야. 아깝지만 적당한 때에 발을 빼야지.」

「또 브라운입니까···」

「그래. 이 이상은 한계다. 유의미한 데이터는 충분히 뽑아냈어. 이제는 집으로 돌려보낼 시간이야.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정서적 충만감 또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1097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진척을 보였으니까.」

「그러면 그것조차도 실험이겠군요. 마지막.」

「그렇지.」

아버지가 웃었다.

「좋은 아버지 놀이쯤이야 쉬우니까.」

어린 나는 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저 수조에 비친 내 얼굴, 문양 하나 없이 깨끗한 내 얼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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