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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83화 (83/102)

4권 3장. 균열-(5)

유리로 된 대지가 산산이 부서져내려 그 아래로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늪지대를 건너는 것처럼 발이 무거웠다.

“히데, 히데, 히데!”

쉴 새 없이 이름을 부르며, 눈은 핏자국을 좇는다. 히데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내 삶의 절반을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었다면, 내 삶의 나머지 절반은 히데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져 버린 이상, 히데가 없다면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소피의 짓은 아니었다. 소피는, 약해져 있었다지만 드라헨킨더였다. 무의식적으로 ‘소우사’ 같은 대형 마법을 써댈 수 있는 상대와 맞붙기에는 히데의 무장이 너무 적었다.

이 핏자국은 짐승에게 질질 끌려간 느낌의 핏자국. 가지고 있던 용병기의 절반을 베이스캠프에 놔둔 것으로 봐서 지금 히데가 가지고 있는 전력은 평소의 절반. 출혈량을 보건대 인간이라면 벌써 죽었다. !파라이니 아직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무성한 숲처럼 되어버린 어느 폐허까지 뛰어갔다. 작은 폭음과 짐승의 울부짖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나는 입구를 날려 버리면서 안으로 뛰어들었다.

곰과 용을 반쯤 섞어놓은 것 같은 갈색 짐승이었다. 눈동자는 은색이라 흰자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양쪽 무릎 아래가 사라진 히데는 고통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마법을 써대고 있었다. 생명력을 많이 소진했는지 마법은 많이 약했다. 잡아먹히는 걸 겨우 면할 수준이었다. 용–곰은 주둥이 왼쪽의 피부가 날아가 이빨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고 앞발에선 깊은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전력 차는 명백했다.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짐승의 머리를 폭발 마법으로 날려 버린 뒤였다.

곧바로 히데에게 달려가 다리를 재건한다. 급한 마음에 몇 번이고 종양이 생기려는 것을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재생한다. 히데는 그것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더니 다리가 다 재생되자 그대로 기절했다.

나도 당장 기절할 것 같은 상태였지만 뜬눈으로 히데가 깰 때까지 지새웠다. 그렇게 한참 바라보고 있으려니 히데가 깨어났다. 히데가 희미한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 말에 저절로 질책이 나온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지금 얼굴이 너무 좋지 않아서···”

“네가 이렇게 됐는데 태연할 리가 없잖아.”

나는 커져 간 내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사실 당장이라도 부둥켜안아 히데의 온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살아 있음을 그 체온과 고동 소리로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러지 않을 정도로는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소피 씨는? 그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히데의 청력으로는 이 공간에 우리 둘밖에 없다는 게 들릴 것이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내 얼굴을 본 히데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내 얼굴에서는 지금 무슨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소피는 오지 않을 거야.”

눈을 휘둥그렇게 뜬 히데에게 말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맙소사.”

너무나 많은 말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히데는 그 안에 든 끔찍한 의미를 얼핏 짐작해낸 것 같았다.

“설마, 당신 아버지가 거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히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오, 헤르만.”

힘없이 누워 있던 자그마한 여자는 몸을 일으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히데가 나를 껴안게 내버려 두었다. 히데는 안다. 내가 얼마나 아버지를 좋아했는지를. 나와 단둘이서 시간을 그렇게 보낸 사람은, 그리고 그렇게 깊은 이야기를 나눈 친구는 이텔을 제외하면 히데밖에 없었다.

히데는 나를 꼭 안았다. 친구를 위로해주려는 것처럼. 아마 그 정도의 감정이겠지. 내 근간이 송두리째 무너진 이 상황에서 겨우 이런 걸 따지려는 내가 우스워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멈출 수도, 떨쳐낼 수도 없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볼 거야.”

나는 말했다.

“다시 가서 모든 진실을 볼 거야. 나는 그래야만 해. 내 아버지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려면.”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 명단에 있는 이상,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보러 가야만 했다.

그럼에도······.

“헤르만···”

히데가 심호흡을 하더니, 낮게 속삭인다.

“바라는 대로 하십시오.”

히데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 숨결이 내 귀를 간지럽혀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나는 말했다.

“네가 또 다시 위험해지게 둘 수 없어. 최소한의 안전장치, 이를테면 결계라든지···”

“간다면 어디로 갑니까?”

“폭발의 진원지.”

어쩌면 멍청한 자살법일지도 모른다. 그러자 히데가 무거운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보러 갈 생각이시군요. 하지만 결계는 됐습니다. 그 위험한 곳에 가는데 저에게 결계까지 쳐주고 갔다간 죽을 겁니다. 이번 일은 제가 방심해서 생긴 일이니 다시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결계는 예시일 뿐이야. 그래, 다른 예를 들면 한 번의 치명상을 막아 주는 마법이라든지···”

“헤르만.”

히데가 내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용기사입니다. 그런 마법은 ‘맹세’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보통의 마법은 마력을 대가로 발휘하는 기현상이다. 그러나 맹세의 경우, 여러 가지 조건을 더 걸고 훨씬 고차원적인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다른 대가 또한 바쳐야 했다. 그리고, 보통 맹세에 쓰일 정도의 용도라면 그 대가는 무겁다. 히데가 말했다.

“사실 저는 당신이 가지 말았으면 합니다. 너무 위험하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가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당신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나’ 때문에.”

“네가 안전하지 못하다면 진실 따위는 필요 없어.”

내가 날카롭게 말하자 히데가 눈을 크게 뜬다. 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 보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십니까?”

“진실을 알아내도 네가 죽으면 내 삶은 무의미하니까.”

내 말을 듣고 굳어 버린 히데에게 말했다.

“좋아해, 히데. 어느샌가 네가 제일 소중해져 버렸어. 네 핏자국을 보고 순간 세상이 부서지는 줄 알았어. 마치 내 인생이 끝나버린 느낌이었어. 네가 살아 있어서, 죽지 않아줘서··· 너무나 안도했어.”

결국, 고백해버리고 만다.

“사랑해.”

히데는 충격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얼굴이 화악 붉게 물들었다.

끈을 탁 놓아버린 느낌이었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이제 결판이 나겠지. 히데는 나 같은 사람에게 과분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러나 한 번 히데를 잃을 뻔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잃기 전에 잡아야 한다. 지나간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대로 소중한 ‘친구’를 잃을지 몰라도, 나는 이기적이 되기로 했다.

그러나 히데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히데···?”

“당신은,”

히데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히데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정말로, 나쁜 사람입니다.”

“···히데?”

“좋아했어요. 사랑했어요. 천둥 치는 밤, 저를 껴안고 같이 노래를 불러 주었을 때부터, 절 향한 모욕에 처음으로 나서 주었을 때부터, 쭉, 쭈욱 사랑했어요. 그렇지만,”

히데는 결국 세차게 흐느끼며 말했다.

“대용품은 싫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즉각 내 입에서 부정이 튀어나왔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데는 여전히 그 처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히데가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2천만을 죽여야 한다는 중압감에 만취했었던 당신은, 잠들기 직전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죠. ‘만족해요? 나는 당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어디까지 떨어질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가혹하군요. 그래, 당신은 잔인해···.’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어요.”

그 말을 하는 히데는 고통으로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해요, 우나.’”

아아, 그 말은 나를 어찌나 묵직하게 후려쳤던지.

얼른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즉각 그런 대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 버리고 만 것이다.

우나와 히데는 닮았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술 취한 채로 보면 동일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나는 우나를,

우나를?

“알고서 그러진 않았겠죠.”

히데가 말했다.

“브라운이 당신의 원수니까 본인이, 스스로가 그 연심을 부정하고 억눌러 왔겠죠. 아세요, 헤르만? 당신의 길은 가혹해요. 끝에는 파멸만이 기다리는 길이라고요. 그런 길을 원수를 위해 걷지는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아니···”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가 뇌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평생 원수라며 증오해왔다. 죽이기 위해 무엇이든 해왔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진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벨 가문의 지붕 위에서 참사를 피한 소년은, 우나 브라운이 !파라의 대검을 들고 사람들을 쳐죽이고 지붕 위로 올라와 그 에메랄드색 눈동자로 그를 바라본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모든 존엄을 바쳐 파멸의 길로 들어설 정도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게슈타포가 되면서까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려 할 정도로 사랑했다.

단지,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인 상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걸 견딜 수 없었던 내가 증오를 방패삼아 그 감정들을 숨긴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우나와 닮은 히데 프롬에게 이끌렸다. 그녀에게 우나를 투사했다. 그래서 처음엔 히데에게 이유 모를 반감을 품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나는 분명 ‘히데 프롬’을 좋아한다. 내 전우 히데 프롬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가 우나를 그렇게나 닮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사랑했을까?

그 말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메스꺼움을 느꼈다.

히데가 돌아서며 말했다.

“···만약 알고서도 그랬다면 정말 당신을 증오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보이네요. 당신의 의식은 정말로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그리고 또 다른 것도 깨달아 버렸네요. 당신은 진짜로 우나 브라운을 사랑한다고.”

히데의 목소리는 이제 울먹임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어서 가세요. 가서, 모든 진실을 찾아보라고요. 아니, 제발 지금은 가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나는 충격을 추스를 틈도 없이 내쫓기듯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문을 닫고 나가자 히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목구멍에서도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올라오다 앙다문 입술에 막혀 다시 목구멍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연구소로 다시 돌아가는 길 내내 우나와 히데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이제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나 큰 마음을 부정하고 있었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사실이었고, 이미 히데에게 상처를 입힌 지 오래였다.

나는 멈춰 섰다.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연구소가 보였다. 소피와 맞부딪친 장소로 가 보니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집어들어서, ‘헤르만 예거’도 찾아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왠지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빨리 폭발의 진원지로 가야 한다고. 거기에 ‘답’이 있을 거라고.

마력이 강해지는 쪽으로 나아가자 어느덧 황량한 벌판이 나타났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 지금부터 내가 가야 할 곳.

한 걸음을 내딛는다. 소피는 이 마력을 견디지 못했었다. 한 걸음을 내딛는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나는 울렁거림 속,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밀감.

왜 마력에서 친밀감을 느낀단 말인가?

갈수록 높아지는 마력 농도가 머리를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마력이 뇌를 두드린다, 두드린다.

마력으로 지워진 기억이 깨어졌다 다시 재조립된다.

···그와 동시에 재생되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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