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3장. 균열-(3)
소피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이름이야.”
“이름···”
“그래. 저번에 네가 프리다 아커만인가, 그런 이름 물어봤잖아. 그리고 난 모른다고 대답했지. 당연했어. 왜냐하면 난 거의 모든 실험체를 숫자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소피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심호흡을 하더니, 이야기한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다들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어. 내가 안면을 튼 실험체들은 거의 다. 카우프만만 제외하고. 이다 카우프만은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나에게 말해줬어. 딱 한 번만. 그 뒤로는 계속 자기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그 때마다 내가 이름을 다시 불러 주었어. 그러다가 실험체 중 우리 둘만 유일하게 ‘자각’을 했지. 하지만 이다의 마력은 불완전했고, 그래서 마력 주입 실험을 하던 도중··· 터졌지.”
소피가 슬픈 어조로 말했다.
“터지기 직전 나는 카우프만의 이름을 불러 주었어. 그래서일까, 걔가 날 지켜줄 수 있었던 건.”
나는 소피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안토니나 코바르첵은 비록 자각했지만 자기 자신을 숫자로 칭했다. 내가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는 자기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 말해준 뒤로는 계속 기억해냈고, 그 뒤에 아주 강력한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적 내가 공명했을 때는 그 정도까지 강력하진 않았었는데도. 소피가 상념에 빠진 나에게 물었다.
“너는 네 이름을 기억하니? ‘헤르만 예거’ 이전의 이름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가 말했다.
“터무니없는 가설일지도 모르지만 말야. 실험체 중 유일하게 ‘자각’한 자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그것밖에 없어서··· 내가 실험 자료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니 정확하지 않고 그저 추측이지만.”
“아냐. 나는 그런 추측 하나하나도 절실하니까.”
나도 마지막 육포를 뜯으면서 히데에게 말했다.
“히데, 이게 내가 루프트바페 일도 친위대 일도 둘 다 하려고 했던 이유였어. 그리고, 그렇게 적을 많이 만든 이유이기도 했지··· 저번 습격 사건은 조금 양상이 달랐지만 말야.”
말을 끝낸 나는 일어섰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저 진실을 찾는다는 명목 하에서. 이 정도의 정보를 얻기까지도 수많은 희생이 필요했지. 나는 그런 사람이야.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는 이 임무에 목숨을 걸었으니 알려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어.”
히데는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나와 소피는 짐을 챙겼다. 문을 나서기 직전, 히데가 말했다.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했습니까?”
나는 돌아보면서 말했다.
“무슨 거짓말?”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면서, 그녀가 어머니라고 저에게 거짓말한 것.”
크라쿠프 일을 마치고 우나 브라운이 내 집에 깜짝 들렀을 때 히데도 같이 있었다. 나는 히데에게 우나가 내 어머니라고 말했고, 그때 히데는 깜짝 놀랐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내 어머니지만 진짜 어머니가 아니니 거짓말이었던 거야.”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나는 고개를 까닥하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나와 소피는 백골의 도시숲을 걷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력 농도가 이전보다 더 짙었다. 히데가 금방 지칠 정도일 것이다. 그래 봐야 거의 나만큼 활발하게 돌아다닐 테지만.
내가 했던 말을 들은 소피는 백골들을 눈여겨보며 걷기 시작했다. 소피가 말했다.
“네 말대로, 정말 깔끔하게 잘린 뼈가 많네. 특히 이 사람, 척추가 말끔히 두 동강 나 있어.”
소피가 가리킨 자리에는 두부 자르듯 깔끔한 절단면을 보이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해골이 있었다. 소피가 그 절단면을 만지며, 그 매끈함에 놀라며 말한다.
“혹시 말야, 그 우나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이들을 죽인 게 아닐까?”
“···혼자서?”
“!파라라며. 혼혈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나는 백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인간 남자 검사라도 척추째로 몸을 반 토막 내기는 거의 불가능해. 마법의 도움 없이는. 그리고 아까 히데가 있던 곳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 마력밀도 안에서 용병기를 쓰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육체적 힘만으로 했다는 거지. 인간은 못해.”
“!파라라면 모를까.”
“!파라라면 모를까. 맞아.”
소피가 말했다.
“아까 히데가 있던 자리 정도면 모르지, 이 정도로 마력 농도가 짙은 자리에선 용병기를 제대로 쓰기도 힘들어. 나나 너 같은 존재면 몰라. 순수하게 육체적 힘만으로 저렇게 만들 수 있어야 해. 그리고 그 자, 너희 집에 피 묻은 대검을 들고 들어왔다며?”
“맞아.”
“이미 그때 바깥사람들을 죽이고 온 게 아닐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 전에도 우나가 대량학살을 벌인 뒤 우리 집에 왔을 거라는 추측은 했었다. 『공백』의 생존자를 찾으려 아무리 애써도 실패했었으니까. 아벨 가문을 처리한 것만 봐도 나머지를 다 죽였을 거라는 추론은 쉽게 가능하다. 이렇게 길거리에 널린 백골들을 보니, 저런 식의 조금 믿기지 않는 가설이 납득된다. 나는 마침내 말했다.
“가설 1로 남겨둘게.”
소피는 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했다. 백골에 대한 집착은 내버려 두고, 우리는 발걸음을 떼고 느껴지는 마력에 집중했다.
그 순간, 전에도 들은 적 있는 괴성이 들렸다. ‘괴물’의 포효였다.
“야.”
소피가 말하자 나는 소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피가 말했다.
“너도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지?”
“응. 저거, 마법생물이야. 용 정도는 아니지만.”
“애초에 우리가 방향을 여기로 잡은 것도 저게 용병기인 줄 알고 그랬잖아. 움직이는 데다, 하필 저기서 저 괴성이 들려오니 그 생각은 폐기했지만. 어떡할까? 저게 계속 돌아다니면 마력을 감지하기가 더 힘들어져. 14년이 지났어. 안 그래도 용병기의 신호가 그렇게 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데···”
“가야 하지 않을까. 위험요소를 내버려둘 수는 없어.”
“지금 나는 ‘이 꼴’이고, 너는 네 전력을 제대로 모르는데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소피의 말은 지당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하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한 괴물은 저게 틀림없어. 바꿔 말하면, 저게 없으면 가장 큰 위험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고.”
“저게 몇 마리나 될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말을 흐렸다. 나는 소피의 전력이 얼마인지 모른다. 한 번도 보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전력을 모른다. 나는 ‘자각’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애송이이니까. 도박을 해도 될까? 소피는 이 점을 묻는 것이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 소피가 말했다.
“너, 히데 좋아하지?”
나는 사레가 들렸다. 어째서, 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소피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말야. 그런데도 굳이 무모한 도박을 하겠다는 건··· 히데 때문이지? 우리가 저걸 처리해놓지 않으면, 히데가 위험할까봐.”
“그렇다고 내가 히데를 좋아한다고 바로 단정하는 건···”
“넌 바로 히데 때문에 자각했잖아. 그것도 계산한 거야.”
나는 바보처럼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마침내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래. 안 그래도 이 장소 자체가 해로운데, 저런 괴물에게까지 노출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자각’ 때문에 내가 히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어. 묘한 일이지··· 하지만 히데와 잘 해볼 생각은 전혀 없어. 말했다시피, 나는 전혀 좋은 사람도 아냐. 어차피···”
내 최후는 예정되어 있다.
“어차피?”
소피가 되묻자, 나는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네 의견은 어때? 내 마음은 이렇지만 나는 너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아까 네가, 마법을 그렇게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한 말도 걸리고.”
“손 내밀어 봐.”
소피의 말에 나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소피가 내 양손을 잡고 눈을 감더니, 공명을 시작했다.
그 순간 소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소피의 존재감이 억눌려 있다는 것도 느꼈다. 소피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연약했다.
마침내 소피가 눈을 떴다. 푸른 눈이 얼핏 광채를 띠는 것 같았다. 소피가 말했다.
“나 혼자라면 무리지만, 너와 함께라면 저것 정도는···”
“너··· 그건 뭐지···? 그건 어떻게 된 거야?”
“많이 미약하지? 사정이 있어서 그래. 어쨌든 내 전력은 네가 느낀 대로야. 마력이 훨씬 적지. 너는 훨씬 더 강력할 거야. 온전한 드라헨킨더니까. 물론 네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다는 전제가 붙지만.”
아까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소피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는 움직이는 마력의 진원지로 걷기 시작했다. 죽은 자를 밟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버려진 도시를 걷는다. 새로운 숲이 된 버려진 도시. 나는 말했다.
“프랑크에는, 네가 드라헨킨더라고 말했어?”
“아니, 전혀.”
즉답이었다. 소피가 말을 이었다.
“알면 또 다시 실험하려 들 테니까. 프랑크에서도 똑같은 비극이 생겨나게 둘 수는 없어. 나 때문에 나 같은 아이들이 또 생겨난다면 죽어 버렸을 거야. 하지만 나는 도이체스를 증오하니까, 프랑크의 가장 엘리트 용인이 되어 보탬이 되기로 했지. 감응력 측정기가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감응하느라 힘들었어.”
소피가 그때를 상기하는 듯 잔잔하게 웃었다.
“그러니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돌아가면 프랑크에게 말할 생각은 전혀 없어. 절대로. 도이체스가 이 미친 짓을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프랑크라고 그 실험을 알고도 안 할 만큼 고결한 것들이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오히려 부러운걸. 이 실험에 대한 진실을 직접 파헤치다니. 나는 도망쳤는데···”
소피가 자조적으로 웃고는 말했다.
“자, 가자. 성공시켜야지. 아무도 다치지 않게 돌려보내야지.”
우리는 결심을 굳히고 나아갔다. 갈수록 괴물의 소름 끼치는 괴성은 더 강해졌다. 소피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부터 네가 자신을 거의 억누르고 있어서 나도 그렇게 했는데, 차라리 존재감을 드러내고 저쪽도 우릴 알아보게 해서 빨리 찾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도망갈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야. 이미 살아있는 짐승이니까 다른 방법으로도 추적할 수 있어. 급습해서 한 번에 처치하자.”
소피는 새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친위대랬잖아. 거기서 무슨 일 해?”
“···게슈타포.”
그러자 소피는 마치 모르던 사실을 새로 깨달은 것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뭐가 역시야.”
나는 내심 인정하면서도 툴툴거리며, 나 자신의 기운을 최대한 억눌렀다.
크아아아아아앙!!
또 다시 등의 솜털이 쭈뼛 서는 포효. 지금 상대하는 건 인간이나 인간이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짐승이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소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나는 냄새를 억제하는 마법을 사용했다. 근처의 시계탑 안에 들어가 주위를 관찰할 심산이었다. 나는 시계탑 계단을 오르면서 소피에게 말했다.
“내가 앞에서 전위로 맞서 싸울 테니까 넌 후위에서 날 보조해줘. 너는 훨씬 마법을 더 자주 사용해왔지만, 몸 쓰는 전투는 내 쪽이 많이 익숙하니까.”
소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얼마나 많이 싸운 거야?”
“대부분 인간 상대였지만, 정말 많이.”
나는 순간 안토니나를 떠올렸다가 뇌리에서 치워 버렸다.
14년 동안 버려진 시계탑은 음산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기침을 하지 않도록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아야 했다. 계단은 시계탑 벽면을 따라 둥글게 나선처럼 휘감아 올라가고 있었는데, 난간은 금방이라도 삐걱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릴 것 같았지만 잡아야 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발 아래의 마찰력이 매우 작았기 때문이었다. 안은 의외로 밝았다. 곳곳에 커다란 창문이 나 있었다. 대부분 먼지가 너무 껴서 불투명해진 유리였지만, 빛이 들어오기에는 충분했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면서, 괴성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유달리 눈부시게 빛이 세게 들어오는 지점이 있었다. 올라가 보니 유리가 완전히 깨져 있었다.
깨진 구멍 너머로 괴물의 등이 보였다.
나는 검지를 입으로 가져가 누르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소피에게 얼른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창틀 뒤로 몸을 완전히 숨기고 시선만 바깥으로 향하자, 소피도 내 동작을 똑같이 흉내 냈다.
괴물은 용이었다.
아니, 어쩌면 용이라기엔 조금 작은 ‘그것.’ 새끼용이라기엔 크고, 성룡이라기엔 작다. 날개는 두 쌍으로 전부 퇴화했다. 저 정도면 사출공은 무사해도 사출비행이 불가능하다. 비늘은 아바셋의 윤기 나는 흑단 같은 검은 비늘과는 다르게 거무튀튀했다. 이빨과 발톱은 전부 검은색이었고 얼굴의 실루엣이 보통 용과 다르게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검은 용이니 역린은 옅은 색이 틀림없을 거다. 찾아내서 단숨에 죽이자. 이런 생각으로 용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순간, 컨트롤에 익숙지 않은 내 마력이 조금 새어 나갔고, 용이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홱 틀었다.
정면으로 바라본 용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교합이 맞지 않는 턱은 비틀리게 맞물려 괴물의 인상을 더 험악하게 했다. 내쉬는 숨결은 붉은 빛을 띤다.
그렇게 마주친 용의 눈은 광폭화된 용처럼 붉은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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