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너는 용이 되어-80화 (80/102)

4권 3장. 균열-(2)

우리는 즉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단검을 뽑아들며 히데가 속삭였다.

“작아요.”

그래도 이곳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이상,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우리는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그것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쫑긋한 두 귀에 풀숲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토끼네.”

소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우릴 놀래킨 건 작은 갈색토끼였다. 나는 덧붙였다.

“육식토끼.”

그 토끼의 입가에는 무언가를 갓 잡아먹은 듯 피가 얼룩져 있었다. 히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분 나빠···”

소피가 토끼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토끼 정도야, 좀 쫓아내면 괜찮지 않을까? 저렇게 작은데.”

나는 피로 얼룩진 토끼의 입을 보면서 말했다.

“피에토 대륙의 피라냐도 생긴 건 작아.”

히데가 말을 받았다.

“보통 자기보다 큰 동물에게는 잘 달려들지 않죠. 어지간히 만만히 보였거나, 정말 강하거나, 무리를 지었거나. 소리로 봐서는 이제 스무 마리 정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스무 마리라는 말에 소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둘러쌌다고?”

“네, 빈틈없이···”

우리는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토끼는 무해해 보이는 얼굴로 자기 입가를 핥아 핏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분홍색 혀가 날름거리며 털 위로 움직인다. 소피가 말했다.

“그럼 헤르만, 네가 마법을 써봐.”

“내가?”

“그래. 나는··· 못 쓰는 건 아니지만 자주 쓰기는 힘들어. 사정이 있어서.”

소피가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마치 통증을 참는 모양새였다.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마법을 쓰기로 했다. 아무리 마병으로 변이되어 체계가 다르더라도 뇌혈관을 날려 버리면 죽겠지. 나는 생명계 마법 ‘베타’를 발동시키려 했다. 자각한 이후로는, 마치 용과 감응해 마법을 쓰는 것보다도 내 손에 꼭 맞게 마법이 나를 감도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가 마력을 움직인 순간, 수많은 토끼가 동시에 펄쩍 뛰어 물러나더니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갈 곳 잃은 마법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자 히데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소피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넌 좀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이게 제약되지 않은 드라헨킨더 정도인가···”

“제약?”

“아무것도 아니야.”

소피는 의뭉스런 미소를 짓더니 일어섰다. 히데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위험하더라도 구시가지에서 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지금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약간 지루하기까지 한 행군이 이어졌다. 우리는 다시 육식토끼 이상의 존재가 나타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히데가 생명체가 ‘들리는’ 방향을 요리조리 피해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둑할 때쯤 우리는 구시가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소피가 말했다.

“이거,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잖아.”

소피의 말 대로였다.

도이체스 남부식 건물들이 우르르 들어서 있는 구시가지는 이미 원래의 흰 대리석 빛을 잃었다. 온갖 기기묘묘한 식물들이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건물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담쟁이 잎이 내 손바닥만 한 거지?”

여기 식물들은 전반적으로 매우 컸다. 아까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도 대충 보인 경향이었지만, 이쪽으로 오니 좀 더 뚜렷해졌다.

빠각.

무성한 풀숲을 밟으며 지나가려는데 무언가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발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밟은 건 백골의 갈비뼈였다. 소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뭐,뭐야!”

히데가 조금 찡그린 얼굴로 해골을 살펴보며 말했다.

“여기서 크라쿠프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여기 살다가 마병으로 죽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그렇겠지?”

경직된 소피를 두고 나는 다른 풀숲을 헤치면서 말했다.

“잠깐만, 여길 봐.”

또 다시 백골. 우리는 일정 반경 내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길 곳곳에 늘어져 있는 해골들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해골이었다.

날이 너무 어두워져 적당한 건물 하나를 잡아 안에 들어가려고 할 때쯤, 등골이 서늘한 괴성이 아주 멀리서 메아리쳤다. 마을 사람이 경고한 ‘괴물’의 소리 같았다.

건물 안에도 해골은 많았다. 한참 돌아다닌 우리는 뼈가 하나도 없는 방을 겨우 찾아 자리를 잡았다. 소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도 죽었네··· 마병이라니 당연한 일이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미심쩍어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살핀 해골들, 전부 비슷한 이유로 죽었어.”

“그러니까 마병 아냐?”

“아니. 그들은 거의 둔기에 준하는 무거운 흉기로 죽었어. 뼈가 절삭되거나 깨진 해골이 대부분이야. 흔적이 너무 깔끔해서, 인위적으로 잘렸다고밖에 볼 수가 없어. 흔적을 보면··· 아주 숙련된 칼잡이야. 지금까지 우리가 본 모든 시신은 전부 한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아. 아니면 무시무시한 발톱을 지닌 괴물이든지. 하지만 발톱이라면, 저렇게 한 줄만 나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긴 ‘어떤 괴물’이 나올지 모르는 곳이니까.”

내가 음울한 어조로 말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히데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괴물의 짓이라면, 저는 이 이상 깊숙이 들어가면 안 되겠군요. 이미 영역 근처라는 뜻이니까.”

히데는 몇 개의 용병기와 자기 신체 빼면 보호할 수단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위협적이었지만, 이곳은 무엇이 될지 모르는 곳이다. 우리는 먼지투성이 건물의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우리는 히데의 말대로 여기를 베이스 캠프로 삼기로 했다.

히데와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 도중, 소피가 말했다.

“어떻게 내 이름이 있는 명단을 찾았는지 물어봐도 될까?”

히데도 궁금함을 숨기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저번 크라쿠프 사건 때 히데에게 이야기해준 범위는 현 드라헨킨더 실험이 무엇을 원하는 실험인지, 그리고 아인자츠그루펜의 배후가 누구인지. 따라서 과거의 『공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소피와 이야기를 한다면 히데에게도 하는 것. 껄끄럽다면 나중에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하기로 했다. 히데는 소중한 내 부하였고, 히데가 없었다면 크라쿠프인들을 탈출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나는 24살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마법을 자각한 사람이다. 바로 히데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그 숱한 위기를 겪었는데도, 굳이 그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말문을 열었다. 복잡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헤르만 예거라는 이름은 지금의 어머니가 새로 지어 줬어.”

소피가 물었다.

“재혼···인거야?”

“아니.”

나는 복잡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어릴 때 친어머니가 죽고 나서 나는 친아버지 쪽 집에 가서 살게 되었어.”

어머니는 날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려다 실패했지만, 굳이 그것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귀족이었고 나는 사생아였어. 하지만 아버지는 나에게마저 무척 친절했지. 과분한 애정을 받으며 자란 것 같아. 추측하는 말인 이유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부자연스럽게 날아가서 그래. 소피 네 기억이 띄엄띄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때 느낀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소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납치되었던 거 같아. 아버지를 1년 넘게 보지 못하고 무서운 아저씨들과 함께 있었거든. 거기서 뭘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기억나는 건 그 생활의 마지막. 나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고, 눈을 떠보니 우리 집 침대에 누워 있었어. 아버지가 나를 꼭 안아 주면서 뭐라고 말했지.”

“그 납치기간, 수상한데.”

“지금 생각해보면 수상하지. 유감스럽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몇 가지 정보를 주워들었고, 그 정보를 토대로 아버지가 곧 숙청당할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했지··· 그때가 열 살 때였어. 물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지만, 열 살짜리 아이의 경고를 진지하게 귀담아 듣지는 않았어. 그리고 또 기억의 공백이 있어. 나는 우리 저택의 지붕에 앉아 있었어··· 평생 그곳에 올라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야. 왜 올라갔는지는 몰라. 그리고 사람들이 아주 이상하게 움직였던 것 같아. 그리고 그 여자가 나타났어.”

“누가?”

“현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우나 브라운. 그녀는 저택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와서 길고 무거운 대검만 가지고 저택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지. 나는 그걸 지붕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대장.)

“잠시만.”

히데가 끼어들었다.

“인간 여자 혼자서 말입니까?”

“인간이 아니야. 그녀는 !파라야. 정확히 하면 반 섞였지. 우나는 !파라의 신체능력을 거의 가지고 있으면서도, !파라의 특징인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녀의 눈동자는 녹색. 그래서 인간중심주의를 중시하는 친위대에서도 들키지 않고 높이 올라갈 수 있었던 거야. 아무튼 그 여자는 모두를 살해하고 저택 안까지 들어갔어.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아. 한참 후, 그녀는 지붕에 있는 나에게까지 올라왔어. 피 묻은 대검을 들고.”

나는 문득 히데가 내 이야기에 매우 집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내가 아버지의 숙청을 예상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흥미를 느꼈나 봐. 그녀는 날 살려두는 대신, 한 가지를 약속하라고 했지.”

“···그게 무엇입니까?”

히데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말했다.

“그녀를 죽일 것. 모든 층위에서.”

“그게 무슨 뜻이야?”

소피가 묻자 나는 대답했다.

“쉽게 말해··· 그녀와 그녀의 조직이 한 일을 폭로하라는 거지. 만천하에. 그래서 응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그녀는 친위대라는 거대 조직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은제 탄환으로 나를 선택한 거야···”

나는 그때 빛나던 그녀의 눈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내 아버지를 죽인 자는 날 거두어 헤르만 예거라는 새 이름을 주고 내 어머니가 되었지. 나는 그녀에게 삶을 얻은 대가로 친위대의 가장 큰 비밀을 파헤칠 의무가 생긴 거야. 최근에는 그 중 하나가 드라헨킨더 실험이라는 것까지 밝혀냈지. 그 명단도. 그 중에 게르발트 로렌츠가 있었지. 물론 내 이름은 없었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후에 소피가 마지막 육포 조각을 씹으면서 말했다.

“네가 실험체가 아닐 리 없어. 내 생각에··· 네가 ‘납치된’ 그 때 실험을 받은 거 같아. 그리고 1년 정도 있었댔지? 나는 4살인가 5살 때부터 실험을 받았어. 그렇게 남자아이를, 늦은 나이에 했다는 건, 네가 정식 실험체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어. 어쩌면 그냥 이제 남자애한테도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야. 그리고 네 말을 듣다가 문득 생각난 가설인데··· 왜 우리는 드라헨킨더이고 나머지는 실패했는지 알 거 같다.”

그 말에 두 사람 다 놀라 소피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그게 뭔데?”

소피가 말했다.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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