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장. 동족-(2)
적어도 팽팽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건 확실했다. 이방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하고 있다.
그 외에도 관찰했다. 옷은 구식이지만, 아랑은 원래 떠돌아다니며 사니 옷을 최신 유행으로 입고 다니기는 힘들 것이다. 이장과 아까 그 소녀의 도이체스어는 아랑 특유의 느릿하게 끄는 발음이 있었지만, 확실한 남부 사투리에다 능숙했다. 애초에 우리가 불시착한 장소가 장소인 이상, 이곳은 도이체스가 분명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저는 헤르만 예거로, 도이체스군의 용기사입니다. 프랑크군과 교전을 벌이다 격추되어 바다로 불시착했습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릅니다. 히데··· 아참, 아직 깨어나지 못한 제 일행은 히데 프롬으로, 역시 용기사입니다. 아마 히데가 절 데리고 왔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녀는 !파라이니까요. 자세한 건 그녀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군요.”
“!파라라고요?”
소녀가 들뜬 목소리로 끼어들었다가, 이장의 눈총을 받고 풀이 죽었다. 둘러보니 소녀와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런 쪽에선 소녀는 상당히 외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프랑크와 교전했다고?”
“바깥은 전쟁인가?”
‘바깥은 전쟁인가?’라고? 이 사람들, 이 세계대전에 대해 모르는 건가? 도이체스에서 전쟁에 대해 모르기란 불가능한데?
어떤 아낙이 말했다.
“저 사람, 거짓말이에요! 남자는 용기사가 될 수 없어요!”
그 점을 다들 기억해낸 듯,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진다. 이 나라에서 전쟁에 대해 모르고 살기도 힘들고,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남자 용기사가 이 나라에서 나왔다는 것을 모르기도 힘들다. 이 사람들, 어디 외딴 곳에 동떨어져 살고 있기라도 한 걸까.
응급처치용 비상 용병기라도 써서 내가 용기사임을 증명해 보여야 할 것 같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려는 순간, 소피가 말했다.
“이 자는 용기사가 맞습니다.”
그 말에 군중이 술렁인다. 그 중에는 이런 말도 들린다.
“분명 외국인이었는데···”
그 요동을 이장이 손을 들어 정지시킨 후, 말한다.
“안 그래도 엘리카에게서 그대가 우리말을 아주 잘 썼다는 말을 들었네. 도이체스어를 따로 배웠소?”
“아니요. 나는 도이체스인이었어요.”
내가 그녀의 의외의 말에 경악하여 바라보자 소피가 말을 이었다.
“나는 소피 라리보. 프랑크의 용기사로, 몇 시간 전까지 이 자와 교전했어요. 하늘에서 적으로 만났죠. 이 자가 날 격추시켰고, 내 대원이 이 자를 격추시켰죠. 히데 프롬까지 같이 와 있다고 하니 그녀 역시 내 대원이 격추시켰겠군요. 내 예전 이름은 게르발트 로렌츠. 9살 때 개인 사정으로 프랑크에 망명해 프랑크인으로 자라났어요. 도이체스어는 아직 잊지 않았지만요.”
소피는 도이체스어를 잊지 않았다는 그 말을 꼭 짓씹듯이 말했다.
“헤르만 예거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용기사에요. 지금 도이체스와 여러 국가들의 연합인 추축국, 프랑크, 브리타니아 및 기타 아르텐 대륙의 몇몇 국가가 연합한 연합국이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고, 예거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적을 하늘에서 떨어뜨렸죠. 그걸 모른다는 것은, 당신들,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군요?”
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14년간. 14년간 이 마을에 갇혀 있었지. 그대는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가?”
“바다를 건너고, 절벽은 기어 올라왔지요.”
그 말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장이 말했다.
“그 상어 바다를 맨몸으로 건너고, 그 절벽을 맨몸으로 올랐다고?”
소피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혼혈 !파라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사람, 거짓말은 안 했는데요?”
“그런가, 용기사라서 마법을 잔뜩 지녔나 보군. 하지만 소지품 중에 용병기 같은 건 없었는데.”
“오는 길에 잃어버렸어요.”
“저것도 거짓말이 아녜요.”
!파라 소녀의 확인에, 이장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종합하자면, 그대들은 단지 우연히 이곳으로 왔다는 뜻인가? 그 어떤 목적도 없이?”
나는 말했다.
“맹세코 그렇습니다. 굳이 목적이 있다면, 살고자 하는 그런 의지였겠죠. 저는 나중에 기지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어째서 이 마을은 고립되어 있는 겁니까? 그것도 14년 동안?”
내 질문에 이장과 장로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한참을 속닥거리던 그들은 결국 말했다. 이장이 대표였다.
“이곳은 크룬트. 우리는 크룬트의 최외곽에 있는 아랑 격리구역의 사람들이오. 14년 전, 갑자기 크룬트 시내의 마력 농도가 너무 높아지는 바람에 그쪽으로 더는 지나갈 수가 없게 되었지. 우습게보면 안 된다오. 감응력이 없는 나조차도 그곳은 마력의 압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니.”
감응력이 없는 사람이 마력을 느낄 정도라면 그곳은 이미 재앙의 땅이라 봐도 무방했다.
“마력은 사그라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차차 강해지기만 했지. 우리는 나갈 수도 없을뿐더러 우리의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있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깎아지른 절벽은 무척 위험하고 바다는 거칠고 상어가 득실거리고 항구로 쓸 만한 해안도 없지. 완전한 고립이라오. 그대들이 들어오게 된 건 놀랍지만, 나갈 수 있는 길은 말해줄 수 없소. 모르니까. 그대들이 왔던 길로 나갈 수는 있겠지.”
내가 소피를 바라보자 소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장이 말했다.
“우리에게 그대들은 위협적이오. 우리에게는 예언자가 한 명 있소. 이 아이의 남동생이지.”
이장이 !파라 혼혈 소녀를 가리켰다.
“최근 그 아이는 예언을 했소. 그리고 크게 앓아누웠지.”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신병을 크게 앓고 있습니까? 치명적입니까?”
“목숨은 겨우 건졌지. 하지만 그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신병이오. 우리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소.”
아랑은 죽음을 예언하는데, 그 규모가 크고 정확할수록 그 예언의 반동으로 돌아오는 ‘신병’이 치명적이다. 한 소년의 신병은 지금 이 일대에 대규모의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장이 말했다.
“우리는 그 전부터 불안했던 산사태가 재앙의 원인일 거라 보고 공사를 하는 등 대비를 하는 중이었소··· 그대들이 오기 전까진.”
그래서 우리를 위협적이라고 한 것이었구나.
“저희는 절대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같은 도이체스인을 해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소피 또한 말했다.
“나는 지금 프랑크인이고 당신들의 적이지만, 역시 전혀 위협을 가할 생각이 없어요. 나는 용기사에요. 용기사는 하늘에서 싸우죠. 지상은 제 무대가 아니에요.”
“둘 다 거짓말이 아녜요.”
!파라 소녀가 증언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눈에 띄게 풀어진다.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파라의 눈썰미는 절대적이다. 거짓말을 할 줄 아는 !파라조차도 같은 !파라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이장이 말했다.
“그렇나. 그럼 곧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오. 바다에서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테니. 당분간 엘리카의 집에서 지내시오.”
엘리카는 혼혈 !파라 소녀의 이름이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그대들이 적이 아닌 이상, 손님에게는 당연한 일이오. 그리고 그대들도 산사태 방지 공사에 동원될 수 있으니, 그리 아시오.”
숙박료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피와 나는 엘리카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가면서 나는 엘리카에게 물어보았다.
“저희가 머물러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빈 방이 많거든요. 남동생 아돌프와 둘이서 살아요.”
“···몇 살입니까?”
“저는 19살이고 아돌프는 18살이에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 히데처럼 동안인 모양이었다. 부모님 방이 남으니 빈 방이겠지. 집 안에 들어가기 한참 전, 엘리카가 말했다.
“아돌프가 많이 아프니 조용히 해 주세요. 아돌프는 저보다는 !파라의 기질이 좀 약하지만, 그래도 청각이 예민하니까요.”
“···이렇게 멀리서부터?”
반문하던 소피는, 이내 스스로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파라니까.”
우리는 머물 방으로 안내되었다. 좁은 방은 나 혼자, 큰 방은 여자 둘이서 쓰게 되었다. 우리는 재빨리 히데가 있는 방으로 갔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히데를 내려다보는 나에게 엘리카가 말했다.
“걱정 말아요. 잘 될 거예요. 심장소리, 호흡, 그런 것 모두 정상이니까요. 욕창이 안 생기게 자주 뒤집어 주고는 있었지만요··· 오셨으니까 저 대신 잘 부탁해요.”
엘리카가 우리에게 말하고, 곧 방을 나갔다. 아돌프를 간호하러 간 모양이었다.
문이 닫히자, 우리 사이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기 때문에, 무엇부터 말할지 몰라 나오는 침묵이었다.
나는 의식을 잃기 직전 휩싸였던 거대한 절망을 떠올렸다. 다행히도 히데의 양쪽 다리가 이불 밑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걸 보면, 과장된 위험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전우를 잃는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할 말이 정말 많은 거 같은데.”
소피가 침묵을 깼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선 별로···”
내가 말끝을 흐렸다. 소피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누운 히데가 신음소리를 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곧 히데는 깨어났고, 물을 떠다 주니 잘 마셨다.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앉으려는 히데의 등 뒤에 베개를 받쳐 주며 말했다.
“괜찮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던 거야?”
“···헤엄쳐 왔습니다······. 절벽이 있길래, 그 아래의 해저동굴로 잠수해 이곳으로 빠져나왔고요.”
소피가 혀를 내둘렀다.
“!파라에 대해 알았지만 그 정도야··· 나 같은 사람도 아닌데 그 거리를 한 명 더 데리고 헤엄쳐 올 수 있다니···”
히데가 말했다.
“‘당신 같은 타라’라면 인간의 몸으로 여기 올 수 있겠지요···”
히데의 힘없는 말에 소피의 얼굴이 굳었다. 곧, 소피는 주변에 도청 방지 결계를 쳤다.
소피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이지?”
“용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간.”
“알고 있었어?”
“당신에게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피곤했더니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나보네.”
소피가 어깨를 으쓱하자 히데가 힘없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탄에 있는 마력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마치 헤르만, 당신처럼···”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멈춘 나에게 히데가 말했다.
“당신은 마법을 썼어요······. 제 다리를 재건시키고, 중력에 간섭해 추락 충격을 확 낮췄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마력을 뿜어내 상어들이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안전하게 헤엄칠 수 있었죠.”
또 다시 침묵.
나는 히데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다리부터 걱정했지만, 멀쩡히 붙어 있는 걸 보고 내가 헛것을 보거나 잠시 환상을 봤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히데는 정말로 다리를 잃었고, 그것을 누군가가 재생시켜 줬다.
내가.
히데가 이불을 걷었다. 걷은 쪽에는 허벅지 중간부터 발까지 옷이 없는 맨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당연했다. 그쪽 옷은 폭발과 함께 날아갔을 테니.
나는 천천히, 천천히 말했다.
“제1차 드라헨킨더 실험의 최종 실험체 목록에,”
지금도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
“게르발트 로렌츠라는 이름이 있었어.”
소피가 말했던, 도이체스에서의 이름.
“그걸 어떻게 알지?”
소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했다.
“왜냐하면 그 실험 때문에 내가 사는 곳이 사라졌으니까. 도이체스에서 영원히 지워졌으니까. 내 아버지를 죽여 버렸으니까. 그래서 쫓고 있었어. 누가 했는지, 증거들을.”
나는 소피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곧, 소피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소피가 말했다.
“그래. 난 그곳의 실험체. 397··· 아니, 카우프만이, 이다 카우프만이 연구소에서 폭발했을 때 살아남은 드라헨킨더. 겨우 프랑크로 망명해, 나를 만들어 낸 도이체스를 저주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 왔던 타라.”
소피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드라헨킨더. 나의 동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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