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프롤로그
10살의 베르논 블라즈 폰 프로이센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납치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누의 이텔도 함께.
“무슨 인간 여자애가 이렇게 독해···!”
보라색 눈의 납치범이 귀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귀는 어린 이텔이 방금 물어뜯어서 살점이 조금 뜯겨나가 있었다. 그녀의 손이 무심코 올라간 걸,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잡아채 제지한 참이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그만둬. 네가 때리면 죽는다.”
그 말에 보라색 눈의 여자는 간신히 진정했다. 그는 베르논을 지키던 경호원,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강한 그의 경호원, 지금은 죽어 버린 그 경호원과 똑같은 색의 눈을 하고 있었다.
!파라다.
!파라 여자의 힘이 서서히 빠지자 갈색 머리의 남자도 손을 풀었다. 그는 이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 꼬마 공주님은 좀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그의 말대로, 이텔은 베르논에 비하면 몰골이 엉망이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거나 뜯어져 있었다. 있는 힘껏 저항하며 몸부림친 결과이다. 반면 베르논은 겁에 질려 몸이 굳어 버리는 바람에 비교적 말끔한 차림새였다.
이텔은 행색에 비하면 다친 데는 없었다. 그들이 치료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예고 없이 주먹을 이텔의 배에 내리꽂았다. 그 뒤로 무자비한, 그러나 섬세한 구타가 이어졌다. 사람을 많이 때려 본 사람만 할 수 있는 힘 조절이었다. 폭력은 야만적이었지만 동시에 효과적이었다. 이텔은 조금 있다가 무너져 제발 그만하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13살 소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아니, 이런 취급은 그 누구에게라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파라 여성은 이텔이 고분고분해진 것을 보자 작은 용병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텔의 얼굴에 생겨난 멍과 상처가 없어졌다. 하지만 얼굴뿐이었다. 옷으로 가려진 몸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였다.
눈물을 닦아낸 이텔이 말했다.
“네놈들은 무엇이냐.”
갈색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공주님은 모르셔도 됩니다.”
베르논은 그렇게 얻어맞고도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은 채 고압적인 태도로 말할 수 있는 이텔을 경이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베르논은 지금 공포로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이텔이 재차 물었다.
“우리 몸값으로 무엇을 요구했지?”
“용병기 몇 개 정도이죠. 그렇게 자세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대충 대답하자 이텔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 몸값 정도는 알아두고 죽고 싶은데.”
그 말에, 베르논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 외쳤다.
“누나!”
이텔은 여전히 갈색 머리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베르논에게 말했다.
“베르논. 이자들은 우리를 죽일 생각이다. 일단 우리에게 얼굴을 거리낌 없이 노출하고 있어. 그리고 용병기를, 일국의 공주와 황태자를 납치해서까지 얻고자 하는 용병기···”
이텔이 차갑게 말했다.
“저들은 계몽결사다.”
“계몽···결사?”
“어린 너에게 근심을 주고 싶지 않아 폐하께서 알리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들은 폰 프로이센 황가를 멸절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 용병기를 노리지. 우리의 경호부대를 전멸시킨 것도 이들의 신묘한 용병기 때문이었지 않나? 일개 범죄조직이 그런 걸 몰래 가지기는 이 나라에서 불가능하다. 계몽결사 정도가 아니라면. 따라서 원하는 걸 얻고 나서도 우릴 살릴 생각은 전혀 없을 거다.”
그렇게 말한 이텔이, 13살 소녀가 쏘아보자 갈색 머리의 남자는 침묵했다.
마침내, 남자는 낮게 웃었다.
“정말 똑똑하시군요, 공주님.”
그가 다시 이텔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본다.
“그래서, 이제 죽음 앞에서 저항하실 겁니까?”
“그렇지 않다.”
이텔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13살 여자아이, 베르논은 10살. 이 전력으로는 !파라 한 명과 성인 남성을 무력화시키고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다. 저항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아픈 게 싫다. 그렇게 아픈 건 싫어.”
남자는 아까 울면서 그만하라던 이텔의 모습을 떠올리며 납득한 모양이었다. 이텔이 말했다.
“그러니, 우리 몸값이라도 알고 싶다는 거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이텔의 말에 남자는 잠시 !파라 여자와 눈짓하더니, 결국 그들의 몸값을 말했다. 베르논은 그것을 듣고 경악했다.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요구였기 때문이다. 베르논이 비록 10살에 불과하더라도,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알았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이텔이 비웃음을 띠었다. 그걸 본 남자가 말했다.
“소용없습니다, 공주님. 우리가 원하는 건 반드시 얻어내고야 말테니까요. 지금껏 그래왔듯이.”
이텔이 냉소했다.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군. 제국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그런 다음, 여전히 기품 있는 분노를 띤 채 말한다.
“그 정도로는 이 몸과 황태자의 몸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말에 지금껏 생겨났던 분위기가 산산이 깨졌다.
“뭐,뭐라고?”
!파라 여자가 말을 더듬었다. 이텔이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는 단순히 제국의 공주와 황태자가 아니다. 폐하께서는 우리를 몹시 사랑하시지. 그것만으로도 우리 가치는 올라간다. 황후 전하께서는 오래 살지 못하실 거다. 즉, 폰 프로이센 황가의 정통 핏줄은 우리가 유일할 확률이 높지. 우리의 가치가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은 우리와 우리 죽음에 대한 모독이다.”
“여기서 더 요구하라고···?”
갈색 머리의 남자가 멍하게 말하자 이텔이 우아하게 말했다.
“거기에다 ‘아바돈’을 얹어 달라고 하면 우리의 격에 맞을 것이다.”
그 말에, !파라 여자가 들고 있던 용병기를 떨어뜨렸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텔의 어깨를 자기도 모르게 움켜쥐며 말했다.
“‘아바돈!’ ‘아바돈’이 실제로 존재한단 말인가?”
“겨우 아까의 그 정도 용병기를 위해 죽기에는 우리 목숨이 너무 크지. 우리는 고귀하다. 남들보다 더 고귀한 목숨이지.”
그 말에 남자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지만, 이텔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어차피 이텔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목숨은 똑같이 고귀했다. 다만 지금은 허세를 부릴 필요가 있었다.
“자, 이제 해야 할 일이 명백할 것 같은데? 일단 시원한 물을 좀 마시고 싶군. 베르논, 너도 원하는 게 있나?”
이텔의 시선이 베르논에게 향하자 그는 화들짝 소스라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의 누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지 알 수 없었다. 배짱만큼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했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이텔을 놓았다. 그가 !파라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이 공간을 나갔다.
순식간에 공기가 달라졌다. 주도권을 잡은 자는 이제 이텔이었다. 비록 그것이 얼마 남지 않은 생 동안 가진 권력이라 해도, 경이로웠다.
베르논은 이텔이 왜 스스로를 더 고귀하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보통의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녀라면 고귀하다는 칭호를 가질 자격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고 내 몸도 마저 치료해라. 뼈가 부러진 것 같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텔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몸은 뼈가 남들보다 약하다. 공주로 살아왔기에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었지.”
남자는 납득한 듯, 아까 이텔의 얼굴을 치료해 준 용병기를 집어 들려다 멈췄다. 뼈가 부러졌다면,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남자는 더 강력한 치유마법이 각인된 용병기를 집어 들고 이텔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폭발.
용병기에서, 그가 방아쇠에 건 손가락을 타고 빛이 올라가더니 그의 심장을 터뜨려 버렸다. 동시에 바깥쪽에서 약한 폭음이 났다. 베르논이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사이, 이텔이 일어서서 베르논에게 다가왔다.
“가자, 베르논. 시간이 없다.”
“이···이텔, 이게 무슨 일이죠?”
“일단 일어서.”
이텔이 손을 내밀었고, 베르논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녀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텔이 죽은 남자에게서 열쇠를 뒤적이며 말했다.
“아마 나는 내년에 하는 감응력 테스트에서 꽤 상위 등급의 용인으로 나올 거다.”
“누나···?”
“저들의 용병기가 나에게 ‘느껴졌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어. 하지만 저기에 무슨 마법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 내 감응력을 동원해 마탄에 잠재된 모든 마력을 역류시켰다.”
이텔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신체적 무리로 발생하는 떨림이었다.
“아까 새 물을 떠오려고 나가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바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먼저겠지. 그게 그들의 두목이든, 아니면 우리 측 인질 협상 전문가이든. 추적을 피하려면 통신장비에 수많은 용병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을 거다. 일단 그것도 역류시켰지.”
이텔은 찾아낸 열쇠로 문을 열어 보았다. 문은 쉽게 열렸다.
문을 열자 뜨거운 공기가 훅 불어 닥쳤다. 옆방에서 불이 나고 있었다. 이텔이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날려 버린 것 같군. 가자.”
“다른 사람이 더 없을까요?”
“없기를 바라야지.”
그렇게 그들은 출구를 찾아 뛰었다. 베르논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입구 직전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이텔은 뛰지 못했다. 이텔은 고통으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텔이 이끌고 베르논이 뒤따르던 것이 어느새 베르논이 이텔을 잡아끌고 가는 구도처럼 되어갔다.
마지막 문을 열기 직전, 베르논은 몸이 뒤로 휙 쏠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이텔이 맞잡은 손을 황급히 놓았다.
“이텔!”
베르논은 급히 돌아보았다. 형체를 조금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아까의 그 !파라 여자였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왼쪽 눈의 피부는 흘러내려 안구를 가려 버렸지만 오른쪽의 눈동자만은 자수정처럼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이텔을 확 잡아챈 것이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대 못 놓쳐··· ‘아바돈!’ ‘아바돈’만은 반드시 확보한다!”
그러나 그 !파라 여자도 극심한 부상을 입었는지 이미 조금 더 달려버린 베르논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텔을 죽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이텔이 한탄했다.
“꼴사납게 되었군. 그리 꽉 붙들 필요 없다. 나는 이제 걷지도 못하니까.”
!파라 여자가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기 꼬마 황태자. 순순히 이쪽으로 다가와. 그러지 않으면 네 누나는 죽을 거다. 내가 이 꼴이지만 적어도 여자애 한 명은 죽일 수 있어. 아주 고통스럽게 말이다.”
베르논은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또였다. 또 다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처음에는 공포로 몸이 굳어 납치범들에게 저항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가 벌벌 떨고 있는 동안 이텔은 납치범들에게서 우위를 가져오고 그들을 속여 무찔렀다. 그러는 동안 베르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저 자가 그의 소중한 사람을 붙들고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또 다시 아무것도 못할 것인가?
그의 주저함을 눈치 챈 이텔이 날카롭게 말했다.
“얼른 가! 너는 이 나라의 황태자다! 네가 죽어선 안 돼!”
“하지만 누나는···!”
“나에겐 네 목숨이 더 고귀하다!”
베르논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결국 베르논은 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문을 휙 열고 밖으로 뛰쳐나오자 갑자기 총 소리가 났다. 뒤이어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베르논의 뒤쪽에서였다. 베르논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텔을 붙들고 있던 납치범이 머리에 총을 맞고 죽어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아주 멀리서부터 온 게 분명한 특수부대원 한 명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저격총을 들고 있었다. 그가 베르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불편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의 눈동자 역시 보라색. 그렇지 않으면 조준경도 없이 그 멀리서 누군가를 쏘아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얼른 이텔부터.”
베르논 또한 움직일 힘이 없었기에 그렇게만 말했다. 특수부대원은 일어서더니 곧 달려 나가 이텔을 안아들고 나왔다.
그렇게 구출된 두 사람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베르논은 놀란 것 말고는 별 이상이 없었기에 곧 병원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그는 이텔의 병실로 향했다.
이텔은 그를 보자 활짝 웃었다. 베르논은 알고 있었다. 싸늘한 이텔에게서 그런 표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실로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별로 다친 데가 없다지? 무사해서 다행이다, 베르논.”
그 얼굴을 본 베르논은 조금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베르논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난 누나를 버리고 갔는데.”
그뿐만이 아니다. 베르논은 일종의 열등감이 그를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이 나라의 황태자라고, 그렇게 입버릇처럼 이텔이 말했지만 베르논의 눈에는 이텔이 오히려 더 군주다워 보였다. 그녀의 기품과 배짱과 결단력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베르논을 보며 환하게 웃는 이텔을 보면서, 10살의 황태자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 환한 태양을 견딜 수가 없는 것과 비슷했다.
이텔이 말했다.
“그건 네가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이니까.”
그 말에 어리둥절해 이텔을 바라보자, 이텔이 말을 이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모든 것의 정점에 선 자는 더더욱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다. 무언가는 버리고 더 큰 것을 얻어야 해. 군주는 적절한 순간에 가장 최선의 선택으로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너는 그때 우선순위를 명확히 했지. 그렇게 버릴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다, 베르논. 나는 그러지는 못해. 나는 미련이 많아 포기하지 못하지. 그러니 나는 전혀 유감이 없다. 오히려 난 네가 그 선택을 해 주어서 기뻤다.”
베르논은 자신의 누이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너는 이 제국의 황태자이니 말이다.”
그 말에 베르논은 스스로를 잠식하던 열등감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내 편이다. 이 뛰어난 사람이, 이렇게나 내 편이다.
베르논은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베르논은 곧이어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은 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아바돈’이 뭐에요?”
“도이체스 제국이 가졌다고 알려져 있는, 그 무엇보다 위험한 용병기이다. 어느 정도로 어떻게 위험한지도 알려져 있지 않아. 일단 도이체스 제국은 ‘아바돈’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그 공포스런 위광만이 아르텐 대륙을 으스스하게 떠돌고 있을 뿐이지.”
“그게 진짜로 있나요?”
“모른다.”
이텔이 딱 잘라 말했다.
“나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아. 아마 네가 카이저가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을 거다. 난 그게 실제로 있는지 헛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무시무시한 후광이 필요했고, 실제로 후광 정도는 이용할 수 있었지.”
그 뒤로 그들은 도이체스 제국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비밀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화제가 떨어졌다. 베르논은 일어섰다. 작별인사를 건네기 직전, 베르논은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해 냈다.
“왜 !파라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았을까요?”
“무슨 말이지?”
“그들은 그렇게 강한데, 그렇게 아름다운데, 그 고통을 이기고 이텔을 붙들 만큼 정신력이 대단한 사람들인데 왜 지상의 지배자는 그들이 아니라 인간이 되었을까요?”
이텔은 베르논의 말을 듣더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들이 노예의 도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겠지.”
“네?”
“아니, 아니다. 그저, 세계를 덮는 데에는 아름다움과 강함 말고도 다른 것이 필요하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제 조금 피곤하구나, 베르논.”
그만하면 충분히 이텔을 피로하게 만든 셈이었다. 베르논은 인사를 하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베르논이 나가려는 순간 이텔이 말했다.
“베르논, 내가 납치되고부터 지금까지 했던 말들, 전부 잊어버려라.”
그렇게 말하는 이텔의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이텔이 이윽고 말했다.
“기억할 가치가 없는 말들이었다.”
베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말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전하.”
베르논 블라즈 폰 프로이센은, 수하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의 보좌관 라몬이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베르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시 옛날 생각을 했을 뿐이야.”
오랜만이었다. 이것은 아마 그 헤르만 예거 때문에 떠올린 기억일 것이다. 그 ‘노예의 도덕’이라는 키워드. 덕분에 오랜만에 ‘아바돈’의 전설도 떠올릴 수 있었다.
“라몬.”
베르논은 라몬을 바라보았다. 키 195센티미터의 이 거대한 남자는 우윳빛처럼 뽀얀 피부 덕에 뭇 여성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사람을 깊어 보이게 했다.
“너는 ‘아바돈’을 믿나?”
“그게 진짜로 있습니까?”
라몬의 눈이 빛나는 걸 보고 베르논은 웃었다.
“물론 알려줄 수 없지.”
사실 베르논도, ‘아바돈’ 만큼은 모른다. 카이저는 드라헨킨터 프로젝트를 그에게 맡길 만큼 베르논을 매우 신뢰했지만, ‘아바돈’은 알려 주지 않았다. 어쩌면 헛소문이라서 알려 줄 가치가 없는 걸지도. 베르논이 물었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우리의 계획은 잘 진행되겠지. 어디까지 되었나?”
“도이체스 유일의 아랑 출신 하원의원을 방금 제거했다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반-이종족 측 국회의원을 늘려 가는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좋아. 이대로만 진행해.”
베르논의 계획은 드라헨킨더에만 있지 않았다. 굳이 드라헨킨더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인간은 마땅히 군림해야 하는 존재였다. 베르논은 10살 때 이텔과 나눈 대화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노예의 도덕’이라는 말은 그 어린 나이에도 강렬한 울림을 주었고, 그 소년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라몬이 말했다.
“헤르만 예거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걸 알고 있었군.”
“여러 모로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요.”
베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내버려둬. 도이체스는 우수한 에이스가 필요하니까.”
베르논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내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내 사람으로든, 실험체로든.”
────────────────────────────────────
────────────────────────────────────